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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는 이단인가?

작성자paul|작성시간04.09.17|조회수753 목록 댓글 34

http://www.antioch.co.kr/Antioch/Qna01/View.aspx?QnaID=749

 

749 번 글입니다.
글쓴이    김 정
제   목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란 무엇인가?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란 무엇인가?


제가 아는 목사님이 칼바르트를 자주 언급하며 대단한 학자요,교사로서의 영향력을 찬탄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히 어떤 사상인지, 성경적인 진리인지는 관심이 없고 단지 우리나라의 영락교회가 신정통주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정도만을 말해서 도무지 건전한 진리를 가진 학자인지 어떤지를 알수가 없습니다. 

정통주의도 아니고 신정통주의는 또 뭘 주장하는 것입니까? 

칼바르트는 어떤 인물입니까?  

분별할수 있는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750 번 글입니다.
글쓴이    방랑자
제   목    답변입니다.

답변입니다.


칼 바르트는 종종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되며 비교적 이단적인 신학사상에 오염이 덜 된 목사님 가운데 한 분인 에스라하우스 노우호 목사님조차도 간혹 칭찬하시는 것으로 봐서 개인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학문적인 위대한 업적을 남긴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노목사님도 장신대 출신이라 그쪽 영향을 다소 받은 것 같기도 합니다. 

다만,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역시 자유주의 신학의 한 주류를 이루어 결국 이단적인 신학사상입니다. 

아래쪽에 합정동 교회 김효성 목사님의 저서 "현대교회문제 : 배교, 타협, 혼란" 일부분에서 펀 내용이 있습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더 알기 원하시면 

http://www.oldfaith.net/download/modernch/2-00현대교회문제(개정증보판).HWP  

을 받으셔서 보십시오.  

김목사님께서 자신의 귀중한 저서 전체를 무료로 올린 것입니다. 정통적인 모습으로 위장한 현대의 이단적인 신학사조의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신정통주의의 시조이다. 그는 구(舊)자유주의의 내재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초월자 하나님의 계시와 그 내용인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성경이 객관적 계시의 기록임을 부정하고, 소위 성경의 고등 비평을 용납하며,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 역사를 분리하는 이중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Epistle to the Roman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3 (German edition, 1918).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28. 

Church Dogmatics. Edinburgh: T. & T. Clark, 1936-1962. 

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49.  

Dogmatics in Outline. London: S.C.M. Press, 1949. 

Christ and Adam. New York: Harper, 1957. 

A Shorter Commentary on Romans. Richmond: John Knox  

Press, 1959. 

The Humanity of God. Richmond: John Knox Press, 1960. 

 

1. 성경은 객관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말씀을 깨달음과 믿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이 사건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그의 말씀이 되게 하는 한, 즉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다”(Church Dog- matics, I. i. pp. 122, 123). “그러므로 성경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Ibid., p. 124). “계시와 성경의 직접적 동일시는 우리가 전제하거나 기대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한다. . . .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곳에서 계시와 성경은 하나가 된다”(Ibid., p. 127). 

성경은 인간의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이며 비평적인 연구로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연구는 성경 안의 그리스도에 대한 전체적 인간적 형식의 증거를 명백히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연구가 그 증거의 대상 즉 하나님의 계시 자체를 드러내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계시가 계시로 말미암음 외에 그 증거의 신적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계시를 계시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이란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는 계시에 의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그 이중적(twofold) 역사를 사실 그대로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은 그 안에 참여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계시 자체에 의하여 일깨워진 신앙을 가지는 것일 것이다”(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pp. 66, 67). 

 

2. 성경은 무오(無誤)하지 않다고 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Church Dogmatics, I. ii. pp. 528, 529). 

“축자(逐字, 글자) 영감이란, 오류와 결함이 있는 인간의 말을 그대로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과 그 인간적 오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Ibid., p. 533). 

 

3.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 전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65).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Ibid., p. 72).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동반하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Church Dogma- tics, III. i. p. 81).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자체로는 그것이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Christ and Adam, pp. 54, 55). 

 

4. 하나님의 인성(人性)을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人性)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아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볼 때이다”(The Humanity of God, p. 49). 

“이러한 신적 자유 의지와 선택에서, 이러한 주권적 결정에서(옛날 사람들이 말했던 대로, 그의 작정에서), 하나님은 인간적이다. 인간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긍정, 그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관심, 그를 위한 그의 자유로운 대리(代理)--이것이 하나님의 인성이다”(Ibid., p. 51). 

 

5. 성경의 천지 창조 기록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오직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Church Dogma- tics, III. i. p. 42). [그는 사가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설명했다(Ibid., p. 81).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비슷한 개념이다.] 

 

6. 아담의 타락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 첫번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된 자로서 존재했다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오직 사가(saga)일 뿐이다. . . . 그리고 타락, 즉 그 첫 사람의 타락이 발생했던 것은 바로 이런 영역에서, 다시 말해 예언적으로 증거된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이었다”(Ibid., IV, i, p. 508). 

“그렇다면 죄가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옴이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이거나 심리학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른다. 원죄의 교리는, 서방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어왔던 바와 같이, 바울에겐 ‘매력적 가설’(리츠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의 의미에 대한 많은 역사적이며 심리학적인 왜곡들 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온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나타난 의와 같이, 초시간적(timeless)이며 초월적이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 171). 

 

7.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을 신화라고 한다. 

(로마서 1:3, 4의 해설) “우리의 세계가 예수님 안에서 다른 세계에 의해 접촉될 때, 그것은 역사, 시간, 혹은 사물로서 직접 관찰될 수 있기를 그친다. . . . 그리스도로서, 즉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은 역사의 종말이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역설로서(키에르케골), 승리자로서(블룸하르트), 원시 역사로서(오베르베크)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있는 지평이시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지평을, 그는 수직적으로 위로부터 가로지르신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오직 문제 혹은 신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Ibid., pp. 29, 30) 

 

8.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분명히 긍정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주목할 만한 두 마디가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서 사람, 진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주장함을 보려고 해야 한다”(Dogmatics in Outline, p. 96).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우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우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Church Dogmatics, IV. i. p. 5, footnote). 

9.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로마서 3:24의 설명에서) “나사렛 예수 즉 육신을 따라 난 그리스도는 역사의 다른 가능성들 가운데의 하나이시다. 그러나 그는 불가능의 모든 표들을 소유하신 그 가능성이시다. 그의 생애는 역사의 구조 속의 한 역사이며, 다른 구체적 사건들 가운데서의 한 구체적 사건이다. . . . 그러나 그것은 의미를 가득히 가진 역사이다. 그것은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구체성이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p. 103, 104). 

“그의 피를 흘림으로써 . . . 심판자 자신은 . . . 그를 믿는 사람들 전체를 위한 유화적(宥和的) 제물이 되셨다. 그는 그들의 정죄를 마땅히 따라야 하는 그 형벌의,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모든 결과들의, 책임을 짊어지셨다”(A Shorter Commentary on Romans, p. 46) 이 진술은 대리적, 형벌적 속죄, 그것도 제한 속죄를 믿는 것 같으나, 그는 처음의 로마서 주석을 포기하지 않는 것 같다. 

 

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Church Dogmatics, IV. i. p. 335).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 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Ibid., pp. 335, 336). 

 

 

 

1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12. 보편 구원론적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 . .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Ibid., III. ii. p. 34). 

“하나님의 ‘예’(용납하심)는 선언되었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 . . 그것은 영원 전부터 그가 아들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인류에 대한 그의 ‘예’이었고 ‘예’이다”(Ibid., IV. i. p. 356).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 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The Humanity of God, p. 5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그 어떠한 종류의 제한을 가할 아무런 신학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의 신학적 의무는 그것이 우리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Ibid., p. 62). 

 

13.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바르트는 몸의 부활을 스캔달이요 부조리요 종교적 물질주의요 거침돌이라고 말하였다(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대한기독교서회>, 89쪽; 한종희,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신학자들,” 기독신보, 1991년 3월 30일, 9쪽). 

 

14. 성경이 윤리의 객관적 규범임을 부정한다. 

“사람은 자유의 은사(gift)에 내재(內在)한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 . .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The Gift of Freedom: Foundation of Evangelical Ethics,” The Humanity of God, p. 84).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Ibid., p. 85)

 

 

757 번 글입니다.
글쓴이    박만수
제   목    추가사항만 보충합니다..

추가사항만 보충합니다..


오늘날의 모든 신학자들들은 최초의 신학자인 오리겐의 후예들입니다. 오리겐은 최초로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의 접목을 시도한 대학자였지요.. 오리겐이 심취한 플라톤 사상은 혼합주의(syncretism)로서 성경과 플라톤의 적그리스도 사상을 혼합하여 소위 신학의 기초를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신학계가 성경을 지지하는 근본주의와 성경을 회의하는 자유주의로 양분되었는데, 자유주의란 사실상 바빌론 자연주의에서 비롯된 일종의 자연주의 사상입니다. 성경을 제멋대로 난도질하고는 신화와 우화 수준으로 폄하해 버린 자연주의 신학(소위 신신학)이 궁극적으로 신학자들의 설 자리마저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자, 급기야 오스카 쿨만이 아이디어를 낸 구속사 신학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즉 구속사라는 케리그마는 인정하되 성경기록 자체는 완전할 수 없고 신화와 설화로 가득하다는 이중논리를 펼친 것이지요...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자연주의) 사이에 신앙의 괴리와 반목이 심해지면서 점차 신학의 발판마저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쪽으로 세속화가 진행되어가자, 칼 바르트가 등장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정통 근본주의에 접목시키는 새로운 신학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신정통주의 신학입니다. 사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지만 말입니다... 

 

바르트주의 역시 진화론 신학의 기조 하에서 성경의 완전성을 부인하기는 매일반입니다.. 다만 구속사 등 케리그마를 중심으로 근본주의 신앙과 교리 자체는 인정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 과학의 진화론적 주장이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서 비평학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근본주의적 교리와 신앙도 인정해 주는 회색주의적 신학체계를 가장 그럴듯하게 정립한 인물이 칼 바르트라 하겠습니다.  

 

학적 권위도 인정받으면서 신앙도 살렸다는 평가 때문에 일약 신학계의 대스타로 부상하게 되었지요... 

 

미국의 근본주의는 성경신앙을 기준으로 전투적 근본주의와 온건 근본주의로 갈라졌고, 온건 근본주의에서 조금 더 타협하여 복음주의가 나왔으며, 복음주의에서 조금 더 타협하여 신복음주의가 나왔습니다. 가령 미국의 독립 성경침례교회들은 전투적 근본주의에 속하고, 달라스 신학교와 리버티 신학교를 중심으로 온건 근본주의가 형성되었으며, 에브버리 신학교, 트리니티 신학교 등을 중심으로 복음주의가 형성되다가 점차 신복음주의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반면 미국의 자유주의(자연주의) 진화론 신학에서 폭탄 선언을 하고 나온 바르트주의에 의해 신정통주의 흐름이 강하게 형성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챨스 풀러가 세우고 다니엘 풀러가 진화론 신학으로 변질시킨 풀러 신학교를 들 수 있습니다.  

 

지금 미국 신학계는 근본주의에서 타협하여 발전한 신복음주의와 자유주의에서 타협하여 발전한 신정통주의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새로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끌어가는 대표적 신학사조가 되고 있습니다. WCC가 자유주의 진화론 신학을 대표한다면, WEF는 신복음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을 대표하면서, 이 두 거대 기독교 조직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쌍두마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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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andere28 | 작성시간 04.09.17 물론 반 틸은 자신의 전제주의적 입장(칼 포퍼의 패러다임적 전환과 유사)에서 바르트를 비판하기 때문에, 바르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비판하지도 못하지요. 제가 생각할때에는 오히려 반틸의 전제주의적 입장의 변형이 바르트가 사용하는 원역사라는 용어의 의미인데 말입니다.
  • 작성자andere28 | 작성시간 04.09.17 어쨌든 위에 언급한 반틸의 신정통주의라는 책은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한글번역본은 독해하기가 무지 어렵더군요. 한글이 이해안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될 수 있으면, 영어본으로 보시기를....
  • 작성자holyjoy | 작성시간 04.09.17 호목사님께서는, 반틸에게서 배운 이보민교수에게서 칼바르트비판을 배웠는데, 배우던 당시에도 이보민교수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셨다고 하더군요. 신칸트철학비판에 근거해서 반틸이 바르트를 비판하니, 바르트는 아예 반틸의 비판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상대도 안해주었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1990년대까지
  • 작성자holyjoy | 작성시간 04.09.17 의 고신신학의 칼발트이해는 그것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호목사님은 그 이후를 궁금히 여기시는군요. 칼발트를 제대로 극복하고 있는 지 하고 말입니다. 1995년도에 발표한 N.Wolterstorff의 Divine Discourse(Cambridge University Press)가 그 신학을 어느 정도 잘 극복해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문제도 있
  • 작성자holyjoy | 작성시간 04.09.17 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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