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돔(Edom,이두매)/에서(Esau,유다의 형)

작성자7교구카페운영자|작성시간19.11.15|조회수936 목록 댓글 0

에돔(Edom)/에서(Esau) 


에서(Esau)
이삭과 리브가의 아들로 쌍둥이 동생인 야곱의 형이다(창 25:24-26).
태어났을 때 살이 붉고 온몸이 갖옷 같아서 ‘에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창 25:25). 그는 40세에 유딧, 바스맛과 결혼했으며(창 26:34, 36:1-2), 이외에도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창 28:9), 아다(창 36:4), 오홀리바마(창 36:5) 등과 결혼했다.
또한 이방 여인과도 결혼하여 엘리바스, 르우엘, 여우스, 알람, 고라를 낳았다(창 26:34). 이들은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었고 세일 지방에 거했다(신 2:4, 12).
에서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동생에게 팔아 버렸고(창 25:29-34) 축복권도 빼앗기고 말았다(창 27:29). 결국 그는 가문의 대표로 인정받을 기회를 잃어버렸고(창 27:29), 동생보다 두 배의 유산을 받을 재산권도 빼앗기고 만 것이다(신 21:17).
그는 교활한 방법으로 장자권을 빼앗은 동생 야곱을 죽이려 했으나(창 27:36, 41) 말년엔 야곱을 용서했다(창 33:4-16).



에돔(Edom)
에돔은 ‘붉은’이라는 뜻으로, 에서의 별명이자 에서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다(창 25:30).
에돔인들이 살던 에돔 지역의 경계는 남쪽은 아카바 만, 북쪽은 사해와 모압의 세렛 시내이고, 동쪽은 아라바의 동쪽이지만 서쪽 경계는 불확실하다. 이 지역은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붉은 색을 띤 흙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에돔은 사해, 아라바와 이집트로 연결되는 무역로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점 때문에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다.
특별히 에돔 지역을 횡단하는 왕의 대로가 있다는 것과 이곳의 전략적 위치는 에돔이 고대의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이었다.
이스라엘과 에돔의 관계: 이스라엘과 에돔 민족의 적대감은 야곱과 에서가 리브가의 태 안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창 25:22-26). 야곱과 에서는 매우 다른 성격과 기질, 외모의 소유자였을 뿐 아니라 야곱의 장자권 탈취 사건(창 27장)으로 인해 적대감이 더욱 깊어졌다. 물론 에서와 야곱이 화해하기는 했지만(창 33장) 시간이 흐르면서 후손들 사이의 적대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에돔은 가나안 땅으로 가던 중 그들의 땅을 통과하게 해달라는 이스라엘의 요청을 거절했고(민 20:14-21),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성 당시에는 에돔과의 무력 충돌이 없었으나(수 15:1, 21), 사울 때에는 에돔과 접전하여 승리했다(삼상 14:47).
다윗 때에는 에돔 땅에 이스라엘이 수비대를 세우고 그 땅을 다스렸으며(삼하 8:14),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은 6개월 간 에돔에 거하면서 에돔의 남자들을 죽였다(왕상 11:15-16). 이 과정에서 살아남았던 에돔 사람 하닷은 후에 솔로몬의 대적이 되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왕상 11:14).
요람 왕 때 에돔은 유다에 저항했고(왕하 8:20-22), 이 저항은 40년 간 계속되다가 아마샤와 웃시야에 의해 다시 정복되었다(왕하 14:7). 하지만 바벨론의 등장으로 인해 유다뿐 아니라 에돔마저 바벨론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시 137:7; 애 4:21-22; 욥 1:10-16).
신약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과 에돔과의 관계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던 헤롯 대왕이 에돔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그들의 관계가 적대적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마 2:16-23).
에돔 사람: 에돔 사람이란 에서 즉 에돔의 자손을 가리킨다(창 36장). 약 20년 만에 야곱의 가족과 상봉한 에서(창 33:1-11)는 그들과 동거하지 못하고 가족들을 이끌고 세일 산으로 이주를 하였다(창 36:6-8).
에서의 후손들은 원주민 호리 족(창 36:20)을 점령하고 세일 산에 정착하여(창 36:8-9) 에돔 족속이라는 하나의 큰 민족을 이루었다. 에돔 족속은 가나안 족속인 헷 족(창 26:34), 이스마엘 사람들(창 28:9), 세일의 원주민인 호리 족속(창 36:20-30)과 족외혼인을 하였다.


역사 속의 에돔
에돔 왕국은 왕이 모두 8명이었으며(창 36:31-39), 각 군주들이 각각의 성읍을 관할하는 지방 분권적 통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창 36:34). 에돔과 이스라엘은 혈연관계가 있었지만 서로 적대적이었고, 후에 선지자들은 에돔의 죄악을 책망하며 심판을 예언했다(사 34:5-15; 63:1-6; 렘 49:7-12; 겔 25:14; 욜 3:19; 암 1:11-12).
에돔과 이스라엘의 적대적인 관계의 한 예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에돔 지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에돔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을 들 수 있다(민 20:14-21; 21:4).
또 다윗이 에돔을 정복한 이후(삼하 8:14)에 약 200년 동안 양측은 세일 산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 계속해서 싸웠다. 이것은 이 지역의 무역로를 장악하여 경제권을 얻기 위해서였다. 결국 다윗의 정복으로 인하여 솔로몬은 에시온게벨 항구를 통하여 무역을 활성화시키고 그 지역에서 구리 광산을 개발했다(왕상 9:26-27).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자 에돔은 처음에는 유다의 통치권을 인정했으나 후에는 여호람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40년 동안 소강 상태를 유지했다(왕하 8:20 이하). 그 후엔 이스라엘의 아마샤가 다시 에돔을 정복하였다(왕하 14:7).
예루살렘이 멸망할 당시 에돔은 바벨론에 가담하여 유다의 성읍들을 점령하였다(애 4:21; 겔 35:15). 에돔은 주변 민족과 함께 바벨론에 대항하였지만 그 세력은 점차 약해졌고, 유목 민족인 나바테아인들이 침략해 오자 에돔은 점차 북상하여 헤브론을 수도로 삼았다. 알렉산더 대왕 시대부터 에돔은 이두매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BC 2세기 하스몬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는 이두매를 정복하고 그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켰다.
이렇게 유대교로 개종한 이두매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영향력을 갖게 되고 BC 37년 이두매 출신인 헤롯은 로마로부터 유대 지역의 왕으로 임명을 받았다. 이두매인들은 AD 70년 로마에 대적해서 싸울 때 유대인들과 연합했는데, 결국엔 로마 장군 디도에게 패했고 소수의 사람들만 도망쳤으며 이후에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비전성경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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