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사전] 사해사본-가장 오래된 성서사본(염소찾던 베두인소년이 처음 발견)
1. 사해문서
2. 사해사본
3. 쿰란학파
4. 쿰란
5. 사해
1. 사해문서 [死海文書, Dead Sea Scrolls = 사해사본, 사해두루마리]
사해 서안(西岸)의 쿰란 동굴에서 발견한 구약성서 사본 및 유대교 관련 문서.
사해두루마리라고도 한다. 1947년 2월, 베두인의 한 소년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아, 예리코 남쪽 13.6 km의 사해 서안의 절벽 위에 있는 여러 동굴 안을 수색하게 되었다. 소년은 그 중 한 동굴 속에서 아마포(亞麻布)에 잘 싸인 가죽 두루마리가 들어 있는 높이 64.8∼75 cm, 지름 25 cm 정도의 여러 개의 항아리를 발견하였는데, 이들 두루마리 중 5개를 시리아의 예루살렘 정교회(正敎會)의 대주교 마르아타나시우스 사무엘이 샀으며, 나머지 3개는 예루살렘의 헤브라이대학교 E.수케닉 교수가 매수하였다. 1954년 수케닉의 아들 Y.야딘이 25만 달러를 지불하고 사무엘 대주교로부터 5개의 두루마리도 사들여 현재는 이들 두루마리 전부가 이스라엘 국가의 소유로 되어 있다.
그 후 두루마리의 가치성이 인정되었으나, 1948년 초에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이 동굴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를 못하고, 1949년 2월 15일∼3월 5일 사이에 요르단 고고학연구소의 L.하딩과 성서학원의 R.드보에 의해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때 성서의 여러 사본들 및 외경(外經)에 대한 단편(斷片)들과,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700점을 상회) 기록물들이 발견되었다. 거기서 발견된 항아리 파편의 양(量)으로 보아 그 동굴에는 약 20개의 두루마리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동굴들 안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제1동굴에서 발견된 2개의 《이사야서》 두루마리이다. 제1동굴의 첫 번째 《이사야서》는 헤브라이어로 기록된 완전한 《이사야서》 사본이며, 두 번째 두루마리는 그 1/3에 해당한다. 첫 번째 두루마리는 길이가 72 m, 나비가 25.9 cm이다. 이 두루마리가 가장 방대하고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데, BC 2∼BC 1세기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고대 헤브라이어로 기록된 《레위기》의 단편들은 이보다 더 오래 된 것이고, 그 뒤로는 《사무엘서》의 여러 단편들이 나왔다. 그리고 외경에 속하는 《에녹서》 《다메섹의 새 언약 규정:Rule of the New Covenant in the Land of Damascus》 《훈련교법서(訓練敎法書:거룩한 생활)》 등이다. 이 사해문서의 발굴은 구약성서 연구에 새 전기가 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2. 사해사본 [死海寫本]= 사해문서[死海文書, 사해두루마리]
[영] Dead Sea Scrolls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일반적으로 [사해문서]로도 불리운다.
1947년(일설에 의하면 1945년)에서 수년에 걸쳐 사해의 북서연안의 동굴 및 폐허에서 발견된 고사본의 총칭. 발견된 장소, 고문서(古文書)의 내용, 성격등은 다종 다양 이어서, 오늘에도 그 정리 분류는 완료되어있지 못하다. 지금까지 분명히 된 사본 및 단편을 대별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쿰란동굴과 그 사본
사해의 서북단에 가까운 쿰란(Qumran) 지역 일대에 무수하게 있는 동굴중, 11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 및 단편을 보통 [쿰란사본]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해사본의 가장 주요한 부문이기 때문에, 통속적으로는 쿰란사본과 사해사본을 동의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발견의 순서에 따라 제 1 동굴 (1Q), 제 2 동굴(2Q)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들 중, 제 4 와 제 11을 제외한 모든 동굴에서 출토된 사본은 공간되어 있다. 제 2 동굴 특히 제 4 동굴은 아주 많은 수의 단편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에, 정리가 완료되어 있지 못하다.
<2> 무라바아트 동굴과 그 사본
1952년 1월, 쿰란에서 약 16km 남방이 되는 무라바아트 지역(Wadi Murabbaat)의 동굴군에서 다수의 사본단편과 고화폐등이 발견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기원 2세기 전반, 특히 유대인의 대(對)로마 제 2 차 반란(후 132-135)시대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 반란의 수령 바르 코크바(Bar Kokhba)에 관한 흥미있는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파피루스 사본으로서는 팔레스티나에서 최고로 보여지는 히브리어 파피루스도 있고, 아람어, 라틴어, 그리스어의 문서등도 출토되어 있다. 성서 정전의 사본단편도 있고, 그중에서도 선지서등 본문 비평학적으로 가치 높은 사본도 포함하고 있는데, 쿰란 종단과는 직접의 관계는 갖지 않는 듯하다.
<3> 미르드지역의 유적과 사본
무라바아트 지역의 발견에 이어서 와디 엔 나르(Wadi en-Nar)의 가까이에 있는 비잔틴시대의 수도원의 유적 키르베트 엘 미르드(Khirbet el-Mird)에서도 신약성서사본의 단편이 나왔는데, 이들은 연대도 5-8세기나 늦고, 쿰란사본과는 무관계이다.
<4> 출처 불명의 사본단편
쿰란사본 및 유적의 발견이 커다란 뉴스로 됨에 따라, 아랍인의 베두윈등이 가져온 출처 불명의 단편이 상당한 양으로 되었다. 팔레스티나 고고학 박물관에서 사들여, 다른 사본과 비교연구하고, 출처가 추측 또는 판정된 것도 있는데, 아주 불명의 것도 적지 않다. 이상 중, 1의 쿰란군이 가장 중요하며 보통 「사해사본」이라고 하는 경우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고 있다. 쿰란사본군을 다시 분류하면 이하의 4종 문서로 대별된다.
(1) 구약성서 정전의 사본(단편을 포함한다).
전체의 약 1/4의양을 차지하고, 에스더서를 제외한 구약전권에 걸쳐 있다. 신명기, 이사야서, 소선지서, 시편등은 10종이상의 사본이 보여진다. 주요한 것은 성 마가수도원 소속 「이사야서」(1QIsa, 完本), 히브리 대학 소장 「이사야서」(1QIsb, 部分), 「시편」(11Q)등.
(2) 전외서(典外書 - 外典, 僞書).
토비트서, 벤시라의 지혜서, 예레미야의 편지 등의 외전과 종래 이른바 위전으로 알려져 있던 많은 문서의 단편이 있다. 가장 많은 것은 요벨서, 에눅서 등.
(3) 주해서
가장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1Q의 「하박국서 주해」를 비롯하여, 미가서, 나훔서, 시편, 이사야서, 호세아서 등의 주해가 있다. 이들은 먼저 정전을 인용하여 각절에 「이 뜻은 다음과 같다…」는 정식으로 시작되는 주해를 넣은 독특한 형식의 문서이다.
(4) 쿰란종단 독자의 문서
종래 전혀 그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았던 문서군 중에는, 「종규요람」(宗規要覽, 1QS), 「회중규정」(會衆規定) 1QSa), 「축복기도문」(1QSb), 「감사의 시편」(1QH) 등의 쿰란종단의 계규, 예식문에 속하는 문서, 「전쟁의 서」(1QM), 「외전 창세기」(1Q Gen. Ap.), 「모세의 말씀」등 묵시문학의 원칙에 속하는 문서가 있다.
기타 4Q 출토의 단편에 「하늘의 예루살렘에 관한 기술」및 역법, 점성술에 유사한 문서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3Q에서 출토된 「동의 두루마리」는 팔레스티나 각지에 숨겨진 막대한 제보의 리스트인데, 이들이 성전의 재보였는데, 혹은 쿰란종단의 재보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허구였는지는 불명이고 정설이 없다. 사해사본의 연구는 오늘도 국제적인 학자의 협력에 의해 계속되고 있는데, 이들 풍부한 자료에 의해 구약, 신약 등에 공헌하는 바는 극히 크다. 특히 구약 본문 비평학, 유대교사, 신약시대사등의 분야에서는 종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에 빛을 던져 주고 있다.
「文獻」M. Borrows:More Light on the Dead Sea Scrolls, 1958; F.M. Cross:The Ancient Library of Qumran and Modern Biblical Studies, 1958; G.Vermes:Les Manuscrits du Desert de Juda, 1953; P. Wonberg-Moeller:The Manual of Discipline, 1957; R. de Vaux:Fouilles de Khirbet Qumran, RB, LXIII, 1956, 533-77; LXVI, 1959, 225-55.
3. 쿰란교단(~敎團) = 엣(에)세네파
[영] Qumran Community(Sect) 사해문서 중의 쿰란 사본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형성하고 있던 종교단체.
(→쿰란) 폐허의 발굴에 의해, 그곳이 그들의 생활의 터전이었던 것이 분명해졌다. 그들은 여기서 엄격한 계율에 따라 수도원적인 공동생활을 했다. 이 교단의 조직과 생활에 대해서는, 교단교구 계율 (IQS), 회중규정(IQSa), 감사의 시편(IQH) 등 외에 1910년에 카이로에서 발견된 다메섹 문서등이 주요 자료이다. 여기서 교단으로 역되어 있는 말은 히브리어 [야-하드 yachad]로, [하나로 결합한다]는 의미로서,하나의 신앙으로 맺어진 공동체를 의미하고 있다. 쿰란 사람들은 자기들을 [언약(계약)의 백성], [택함 받은 자], [참된 이스라엘]등으로도 불렀다. 3명의 제사장과 12명의 신도가 최고회의를 조직하고 (3명의 제사장을 12명 중에 포함된 것으로 해석된다), 주로 교리적, 정신적 지도에 임했다. 그밖에 [큰 자들]에 의한 회의가 있어, 교단에 새로이 입단하는 자를 결정하기도 하고, 계율을 범한 자를 재판하기도 하는 정치적 활동을 했다. 다수의 학자는 쿰란교단을 엣세네파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리고 사해 문서가 신약성서의 진정하고 분명한 배경을 주고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엣세네파의 일원도 아니고, 교회는 쿰란교단의 일파도 아니다. 이 교단은 이방세계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증오했고, 그리고 율법 아래서 떠날 수 없도록 결속되어 있었다.
4. 쿰란
* 쿰란동굴
쿰란 (Qumran)
사해의 서북단 연안에서 약 1km떨어진 폐허와그부근의 지명이다.
소위 `사해 사본'의 발견과 그에 잇따른 발굴 조사에서 그 역사가 분명해졌다. 이미 1851년드 소울시(F. de Saulcy)가 이 지역을 답사했는데, 그는 쿰란과 발음이 흡사하다는 점등에서 창세기의 고모라의 유적이 아닌가 하고 추론했다. 그 후 1873년 클레르몬 간노우(C. Clermont Ganneau)가 조사하고, 1920년에는 돌만(Dolman)이 이 지역에 로마군의주둔 증거를 확인했다.그러나 쿰란의 본격적인 연구는 전기한 사해 사본의 발견 사건에 자극되었다고 할 수있다. 예루살렘의 에콜 비블리쿠(E´cole Biblique) 소장 로란드브오 신부(R. de Vaux)와, 당시 요단 왕국의 고고학 자료 연구실장이었던 하딩(G.L. Harding)의 지휘하에1949, 1951- 56년에 수회에 걸쳐 행해진 발굴에 따라 쿰란 폐허와 그 출토품은 그 전모를 드러냈다. 그에 따르면 쿰란의 역사는 네 시기로 나뉘어진다.
(1) BC 8-7세기 경(철기 시대 제 II기),
(2) BC 2세기 말부터 AD 68년까지,
(3) 68-90년 경의 로마군 주둔,
(4) 132-135년, 유대인의 대(對) 로마 제 2차 반란때 유대인 게릴라 부대의 점거의 네 시기로 나뉘어진다.
(1)의 시기에 관한 증거는 벽의 일부와 토기, 오스트라카(Ostraca) 따위의 단편적인 출토품이 있을 뿐이다. 역대하 26:10에 기록된 웃시야 왕이 광야에 세운 망대와 동일시하는 설이 유력하지만 확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2)의 시기에 속하는 유구(遺構)는 소위 엣세네파의 쿰란종단(宗團)의 본거로 보인다. 북서부에 견고한 성체로서 망대를 가진 약 37.5평방미터의 건물을 중심으로 집회실, 사경실(寫經室), 식당, 주방 등의 방이 있는 이 유구와, 온전한 토기(식기 포함), 책상, 장의자 등 중요한 출토품을 포함하고 있다. 또 부근의 와디 쿰란(Wadi Qumran)에서 물을 끌기 위한 수로, 7개의 저수조(貯水槽), 6개의 목욕장 등도 이 종단의 교의(敎義)와 생활을 아는 증요한 실마리가 된다. 각종 증거를종합하면 여기에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BC 110년 경 요한 히르카노스(John Hyrcanus, BC 135-104 재위) 시대였을 것이라 보고 있다. 그 후 BC 31년에 이 지방을 엄습한 대지진으로 인해 종단은 이 땅을 떠난듯, 수 10년간 쿰란에는 사람이산 형적이 없다. 소위 `쿰란 문서'(사해 사본)를 보존하고, 다시 새로운 문서를 만들어 낸 종단은 그 후에 재건된 것일 것이다. 재건 시기는 헤롯 대왕의 죽음(BC 4)과 거기에 이은 바루스(Varus) 전쟁 후라고 생각된다.
(3)의 시기는 68년 유대 반란의 제 3년에 비롯한다. 요세푸스(Josephus)의 기술에 의하면, 이 해에 로마의 2군단이 요단 계곡의 주요한 성채를 격멸했다고 한다. 쿰란의 출토품 중에는 반란 제 2년과 제 3년의 날짜를 각인(刻印)한 화폐 70여매, 로마군의 살촉 등이 포함되어 있어 이때의 저항을 말해 주고 있다. 함락 후 로마군은 소수의 주둔병을 남겨 놓은 듯 중앙의 건물 남서우에서는 화폐와 기타의 증거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 로마의 화폐 중 연호(年號)가 가장 새로운 것은 90년 경의 것이다.
(4) 132년 바르 콕크바(Bar Kokhba)를 수령으로 하는 유대인의 제 2차 대(對) 로마 반란이 일어나 135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반란동안 유대인의 게릴라 부대가 일시적으로 쿰란의 유적을 사용한 듯하다. 이 시기의 증거로서는 화폐 13닢이 있는 외에 부근의 와디 무랍바아드(Wadi Murabba'at) 굴에서 바르 콕크바의 자필 편지, 기타 증거물이 발견된 것으로서도 이 근방이 게릴라의 활동 무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사해(死海)
[히] yam [영] Dead Sea 뜻은 [바다].
팔레스티나의 요단지구에 있는 염호(鹽湖). 지중해면 이하 392m, 세계 최저의 곳에 있다. 남북 약 86km,동서는약15.6km,면적 945㎢, 그 가장 깊은 곳은 400m나 된다. 서안에는 높이 450m에 달하는 단애(斷崖)가 솟아 있고, 동안의 최고 900m에 달하는 모압의 고원과 대치하고 있다.
사해는
구약성서에서는
[염해](창 14:3,민 34:3,12,신 3:17,수 3:16, 12:3, 15:2,5, 18:19),
[아라바 바다](신 3:17,4:49,수 3:16,12:3,왕하 14:25),
[동해](겔 47:18,욜 2:20,슥 14:8) 혹은
[바다](암 8:12,미 7:12)로 불리우고 있다.
신약성서에는 어떤 이름으로도 나오지 않는다.
성서 이외의 문헌에서는
[소돔의 바다(호수)] (Sodoumivti, 2 에스드 5:7, Jos. Antiq. V.i. 22) 혹은
[아스팔트의 바다](jAsfaltivti, Plinius, Nat. Hist. V. 15. 15, Jos. War Ⅳ. vii.2)등의 명칭이 사용되어 있다.
지금은 아라비아어 바하르 루트(Bachr Lut-롯의 바다라는 뜻)으로 불리우고 있다.
[사해 Qavlassa nekrav](thalassanekra, 死海)라는 명칭은 기원 2세기경의 그리스의 파우사니아스(Pausanias, 류디아Lydia의 역사가, 여행가)가 이름 붙인 것으로 말해진다. 서남해안에는 염사, 염구가 많이 기복하고, 소금의 봉형결정이 수많이 서 있다. 원주민은 그것을 [롯의 아내](창 19:26)로 부르고 있다.
요단지구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주요한 강은, 북방에서 흘러들어가는 요단강과, 모압고지의 험한 골짜기를 흘러 동안의 거의 가운데로 흘러들어가는 아르논강(민21:13,모압과의 경계)인데, 그외에도 몇개의 작은 것이 흘러가고 있다. 여기에 흘러들어 가는 수량은 하루 650만톤(요단강 만으로도 600만톤)으로 말해진다. 그런데도 사해에는 물의 유출구가 없다.
그러나 열대에 가까운 고기온에 의한 증발과 유입하는 물과는 상쇄되므로, 넘치는 일 없이 수위는 지켜지고 있다. 하루에 1cm 증발한다고 한다.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물은 단물인데, 유출구가 없으므로, 염분이 많아져, 그 염분함유량은 23-25%이므로, 보통 해수의 약 6배이다. 비중은1.166이다. 따라서 계란은 3분의 1 부상(浮上)하고, 여기서는 어떤 사람이든 물속에 잠기기가 어렵다.
예루살렘의 감람산에서도, 빛나고있는 사해면이 요단강이 끝나는 곳에 보여진다. 짙은 남색의 잔잔한 사해의 물은 기름처럼 밀도와 농도를 가지며, 쓴 맛과 짠 맛이 매우 강하다. 이 해수에는 염화나트륨(6.8%), 염화칼슘(3.4%), 염화칼륨(1%), 염화 마그네슘(11.5%), 취소(臭素) 마그네슘(0.3%)등이 포함되어 있다. 염분이 많아 생물이 생식할 수 없는데서 사해라는 명칭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광물자원으로서의 사해의 물은 귀중한 것으로 북안(北岸)의 칼리아(Kallia), 남서안의 세돔(Sedom)에는 이들 광물을 정제하기 위한 공장이 있다. 지금 사해는 이스라엘 공화국의 생명의 바다로까지 말해지고 있다.
고대에는, 사해가 지금처럼 남으로 전개되어 있지는 않았다. 동안(東岸)의 중앙에서 남으로 치우친 곳에 있는 모압의 기르하라셋(왕하 3:25)의 서쪽에 돌출해 있는 엘리산(el-Lisan, 뜻은 [혀])반도의 남은, 이스라엘인이 [싯딤 골짜기](창 14:3)라 부른 지역으로, 소돔, 고모라, 소알(창 13:10)등은 이 부근에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반도의 남은 아주 얕고, 수심은1-2m이다. 리산 반도의 서쪽 끝과 사해의 서안과의 사이는 4km 가량이다. 헤브론 가까이에서 엔게디 가까이로 내려가 모압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리산-반도의 해안에서 얕은 여울로 건너 갈 수가 있었던 듯하다(대하 20장). 모압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이 길에는 엔게디의 윗쪽에 이스라엘인의 요새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 길의 엔게디 가까이에 있는 급한 비탈이[시스고개](대하 20:16)였다.동안의 제르카 마인(Zerqa Main) 협곡에는 유황천(硫黃泉)이 있다. 그 가까이에 로마시대부터 알려져있어서, 헤롯왕도 찾아간, 칼리로(Callirhoe) 온천이 해안 가까이의 바위틈에서 솟아나고 있다. 이 제르카 마인 협곡의 남 21km에 있는 아르논 협곡과의 중간에 마케루스(Machaerus)의 성터가 있다.
헤롯 안디바에게 세례요한이 유폐되고 목베인 바 되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마 14:1-2). 사해의 동안은 모압의 고원으로 이어지고 멀리 아라비아 사막으로 이어진다. 요단강구의 동 18km의 고지에 느보산(Mt. Nebo 801m)이 있는데, 조금 사해에 가깝고 약간 낮은 샤가의 봉우리(Ras Siyagha, 694m)에서의 전망은 각별하다. 이곳은 모세가 약속의 땅을 바라본 비스가의 꼭대기라고 전해진다(신 34:1-4).→비스가
유대광야의 동쪽 끝이 되는 사해의 서안의 절벽의 산복에는 동굴이 많고 사해의 복단에 가까운 아인 페슈카(Ain Feshkha, 페슈카의 샘)에 가까운 쿰란 동굴에서는, 근대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발견이라고 할, 일군의 사해사본, 그 가까이서는 쿰란교단의 유적이 발견, 발굴되었다.
그 남 30km의 곳에, 다윗이 사울의 손을 피하여 피신했던 엔게디가 있다(삼상 23:29). 엔게디의 샘 주위에는 수목이 무성해 있다. 다시 남으로 16km의 곳에는 기원 73년의 유대 열심당(제 1유대 전쟁)의 최후의 거점으로 된 마사다(Masada)가 있다. 서안에 솟아 있는 높이 500m 여의 험하고 고립된 상부의 평탄한 바위를 헤롯대왕이 요새화 했던 것이다.
예루살렘 함락후, 살아 남은 1000명 가까이의 수비병이 농성하여 2년반 동안 로마의 군세에 저항을 계속한 끝에, 항복치 않고 죽음을 택하여 생명을 끊은 곳이다(Jos. War Ⅶ. ix.1). 그 가까이의 동굴에서 기원 135년의 제2 유대전쟁의 유적, 유물도 발견되었다. 사해의 동안은 수중에서 곧 주비아 사암(Nubia 砂岩)의 단층이 융기하여, 팔레스티나의 지질학적 층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서안의 산상은 동안의 고지대 보다 낮고, 유다의 광야의 동단에서 백아암과 석회암이 노정해 있다. 단애와 해안과의 사이에는 폭 좁지만 평지가 있다.
선지자 에스겔은 장차 메시야의 치료의 샘물이 흐르게 되면, 한 때 사해에 살지 못하던 생물이 살게 되고 고기잡이들이 생활 자원을 얻는 곳이 될 것을 말하고 있다(겔 47:9-10). 그러나 사해의 전부가 그렇게 되는 것 아니라, 그 치료의 물(맑은 물)을 받는 일 없이 남겨둘 부문이 있음도 말하고 있다. 은총이 크면 큰 만큼 그것을 받지 못하는 부문에 있어서의 생활은 보다 일층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에스겔에 계시된 주요점은, 풍성한 축복 그것이고, 사는데 필요한 것이 공급되는 메시야적인 하나님의 도성의 묘사인 것이다(→계 22:2).→염해
(인터넷자료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