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사도 바울 ⑤ 제2차 전도여행(A.D 51-53년)-소아시아~그리스지역

작성자안현상|작성시간09.12.06|조회수8,263 목록 댓글 0

[성경인물] 사도 바울 ⑤ 제2차 전도여행(A.D 51-53년)-소아시아~그리스지역


제2차 전도여행 [A.D 51 ~ 53년]

 

 

 

 

 

 

 

 

* 전도일지 (행15:2-18:22)


1차 전도여행 후 할례문제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예루살렘 교회에 갔다가 돌아온 후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남.

 

 1. 안디옥 >더베

   요한의 동행 문제로 바나바와 헤어져 실라를 데리고 떠남.

 2. 루스드라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

    디모데를 만나 할례를 베품.

 3. 무시아

    비두니아행이 좌절됨.

 4. 드로아

    마케도냐 사람이 부르는 환상을 봄.

 5. 사모드라게섬 >네압볼리

 6. 빌립보

    루디아 집에 거함.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을 구한 사건으로 옥에 갇혔으나

    오히려 간수에게 세례를 베품.

 7. 암비볼리 >아볼로니가 >데살로니가 >베뢰아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의 시기로 베뢰아로 피신.

 8. 아덴(아테네)

   우상에 대해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와 논쟁함. 아레오바고의

   관원인 디오누시오가 복음을 받아들임.

 9. 고린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장막업을 동업함. 1년반 머뭄.

10. 겐그레아

    서원대로 머리를 깎음.

11. 에베소

    유대인과 변론함.

12. 가이사랴 >예루살렘 >수리아의 안디옥

 


제2차 전도여행


예루살렘 회의 결과 바울의 전도 방침과 주의에 대해서는 전교회적인 공식 지지를 받아 이방인에 대한 전도가 더욱 확고하게 정해졌으므로 바울은 바나바와 더불어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 하였다.


그런데 제1차 전도여행 도중 버가에서 일행을 버리고 도중 하차한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에 대해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려 서로 심히 다투어 마침내 바나바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섬으로 건너가고, 바울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를 향하여 떠났다.


바울은 도중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는데, 그도 일행에 가담했다. 바울은 처음에 소아시아 서쪽 에베소의 전도를 뜻했으나,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므로 드로아로 내려가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런데 밤에, 환상에 한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에게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청하므로, 바울은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고 이에 비로소 구라파의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게 되었다(행 16:9,10).

 

사도행전에 있어서는 이때 홀연히 `우리'라는 대명사를 쓰기 시작하고 있다(행 16:10). 이것은 본서의 저자가 이 전도여행에 동행한 사실을 말해 준다. 즉, 누가라는 의사이다. 그 이유는, 본서에 의학술어가 있고, 또 바울의 동역자 누가는 의사인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환상에 나타난 `마게도냐 사람 하나'는 실은 다름 아닌 누가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누가의 종용(慫慂)이 구라파 전도의 계기가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바울 자신의 심중에는 하루 속히 구라파에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못견딜, 참을 수 없는 열정이 있어 그를 서쪽으로 서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한 것은, 사도행전 16:1- 10의 글쓴 태도로써도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아덴, 그리고 고린도로 다채롭고 의의 깊은 전도가 펼쳐진다. 

 

① 마게도냐 지방에서는 여자 결신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빌립보에 있어서, 즉 구라파에 있어서의 최초의 그리스도인은 기록으로 전해지는 한에 있어서는 루디아라는 부인이었다는 것은 초대교회에 있어서 부인의 위치를 시사하는 사실로서 의의가 깊다.


빌립보 교회에는 또 순두게와 유오디아라는 유력한 여신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신앙의 길에 들어섰으며, 아덴에서는 `다마리아라 하는 여자'가 회심자들 중에 섞여 있었다.


② 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 운동이 가는 곳마다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였다. 특히 데살로니가에서는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라고 하면서 바울 일행을 체포하려한 것은, 그들의 운명에 대하여 불길한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었다.아덴의 마르스 언덕. 바울이 이곳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이란 설교를 하였다.


③ 이 여행에 있어서 기독교는 헬라(희랍) 사상과 처음으로 정면에서 접촉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덴에 있어서 바울은 에비구레오파(에피쿠르스)스도이고(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여 이에 극히 철학적인 연설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보아 실패였다. 믿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 후 바울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1-5) 전도하려고 결의를굳혔다.  

 

             * 그리스 아덴(아테네)에서 철학자들과 논쟁하는 사도 바울


④ 고린도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는 이교 사상과 접촉했을 뿐만 아니라, 이교적 생활과도 접촉했다. 그리하여 이것을 기독교화하는데 다소의 효과는 거두었음에는 틀림없으나, 아직 교회 그 자체가 그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고린도전서에서 취급되고 있는 제문제는, 사실은 고린도에 있어서의 이교 생활과 기독교와의 접촉에서 생긴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교 사상과 생활의 기독교와의 관계는 더욱 더 복잡하게 되어몇 개의 중대한 문제를 교회에 던지게끔 되었다. 여하튼 이교 생활의 전형적 대표 도시인 고린도에 유력한 교회가 설립된 것은 위대한 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⑤ 빌립보에서는 로마의 관헌에 체포되었다.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 주었더니 그 주인이 수입이 끊어지는 까닭에 군중을 충동시켜 소송하였다. 그러나 밤중에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스스로 열렸다. 그들은 자결하려는 간수에게 전도하고 이튿날 풀려 나왔다(행 16:16-40).


이렇게 1년 반에 걸친 고린도 전도 후 바울은 고린도에서 얻은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바울이 갇혔던 빌립보 감옥에서 데리고 배로 에베소에 건너가 거기에 이 부부를 남겨 두고, 그와 실라 일행은 일단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안디옥으로 돌아갔다(바울의 고린도 도착은 AD 50년 초라고 한다.


이것은 바울의 연대기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따라서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다른 사건의 연대를 추정하는 열쇠가 될 만한 중추적인 연대이다. 1905년 에밀 부르게〉가 연구 발표한 델피 비문(碑文, 글라우디오 황제가 델피 시민에게 보낸 서신)에 바울의 고린도 전도시 아가야 총독으로 있는 갈리오<행 18:12- 17〉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어 그의 부임하던 해, 따라서 바울의 고린도 도착 후와 체재의 연대를 아주 확실히 미루어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인터넷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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