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사전] 산상설교 산상교훈 산상수훈 산상보훈 (마태복음 5~7장)
산상설교(山上說敎), 산상교훈(山上敎訓), 산상수훈(山上垂訓), 산상보훈(山上寶訓)
[영] Sermon on the mount 마태복음 5-7장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
그리스도께서 갈릴리호수 부근의산에 올라가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가르치신데서
산상의 설교,
산상수훈,
산상보훈
등으로 불리우고, 그리스도교의 대헌장[(그리스도교 도덕의 근본]으로도 말해진다. 마태복음에 있어서의 산상설교보다 짧은 설교가 누가복음 6:20-49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6:17에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라고 되있는데서 [평지설교]로 불리우고 있다. 순서나 용어에 다른 것도 있으나, 평지설교의 거의는 산상의 수훈중에 병행기사를 가지고 있다. 산상수훈의 어떤 부분은 누가복음에 있어서는 평지의 설교 이외의 곳에 분산되어 있다. 이상의 일들로서 양복음서 기자는 공통의 자료를 가지고서 각각의 의도대로 편집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마태복음에 따른 내용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1. 먼저 5장 1-12은 8복의 교시이다.
여기서는 [복이 있나니]가 9회 거듭되는데, 그러나11-12절은 10절의 설명인데서, 실질상 8회로 되어, 8복의 가르치심으로 말해진다. 여기서 [복이 있나니]로 역된 헬라어는 형용사 [마카리오스](makarios)로서, [하나님께 축복되어있다, 복되다]의 뜻이다. 10절까지는 감탄문으로 씌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아, 행복스러운지고], 혹은 [아아, 얼마나 축복인가!]라고 예수께서는 감탕의 음성을 높이고 계시는 것을 알수 있다. 그것은 시간의 경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소멸되는, 뜻없는 이 세상의 복을 말하고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슬픔이나, 고통에 의해서도 소멸되는 일없는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요 16:22 이하),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이 있나니]는, 이 하나님의 객관적 축복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이것을 각각의 경우에 해당시키고 있는 것이, 이유,근거를 보여주는 [...것임이요]이다.
2. 다음 5:13-16은 제자된 자의 책임이 보여져 있다.
제 1 의 책임은 [세상의 소금]이다.
제 2 의 책임은 [세상의 빛]이다.
이것을 이행하는 목적은 자기 선전 위해서나 영달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는 것이다(16).
3. 다음 5:17-48에서는 신약의 주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파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취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을 보여주시고 있다.
지금까지 완전하게 성취한 자 없는 것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이다. 즉 율법의 형식적 준수가 아니라, 그 정신적 완성이다. 학자나 바리새인은 율법의 문자적 준수로써 의인되려 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의는 신앙에 의해 영으로 인도됨으로써 완성되는 사랑에 의한 율법의 성취이다(롬 13:10). 모세는 율법을 주고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에 의해 이 율법을 완성하셨다(요 1:17). 21-42까지는 이상의 개론의 개개의 적용이 보여져 있다. 이들 교훈은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그 정신을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참된 사랑,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정신이 있다면 이상의 대개의 경우, 문자대로 실행하기에 이를 것이다. 42-48에 있어서는 애적이나, 이스라엘 이외의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실은 이것이 사랑의 극치이심을 보여주신다. 그러한 사랑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으로서, 만인을 같은 사랑으로서 사랑하신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에게 가까운 형제에만 인사하는 정도의 일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까지도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도록, 이것을 각인의 이상으로 하여, 전진하라고 주께서는 말씀해 주신다. 이것보다 이하의 표준에 만족할 것은 아니다.
4. 다음 6:1-4에 있어서 구제의 경우, 사람에게 알려짐으로서 그 가치를
잃는 일이 없도록하라고 하신다.
기도의 경우(6:5-8)도 역시 사람에게 경건한 사람이라는 상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은밀한데 보시는 아버지 앞에서 할 것이 말해져 있다. 다음의 보여주는 것 같은 정신으로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 주의 기도이다(6:9-13). 이어서 금식의 경우 (6:16-18), 허영심 위해서, 또는 칭찬받기 위해서할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상대로 할 것이 가르쳐져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는 위선으로 된다. 사람에게 감추어진 선행만이 아버지는 이것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6:19-24에 있어서 예수의 제자는 보물을 지상에가 아니라, 하늘에 쌓을 것을 가르치고있다. 만약 보물을 땅에 쌓기에 열중하노라면, 마음도 땅에 속하게 된다. 25-34은 그러므로 땅에 부 위해 염려할 것이 아님이 보여져 있다. 의복이나 음식이나 신뢰하는 생활을 절대 유일의 일로 여길 것이다.
5. 다음 7:1-5에서는 성급한 또는 악의의 판단, 6에서는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는 일을 금하고, 7-11에서는 기도를 장려하시고 있다.
12절은 이른바 예수의 교훈 중의 황금률이다. 누가복음은 마 5:42의 병행기사 뒤에 이 귀절을 두고, 형제애의 가르치심의 요약의 말로 하고 있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는 말은 필요한 것의 일체라는 뜻이다. 또한 이 말이 구약의 정신을 요약하고 있다는 뜻이다(→마 5:17). 7:13-14에는 두개의 문과 길이 보여져 있다. 전절의 황금률과 관계를 가지며, 이것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감행해 가야할 것이 보여져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사랑을 위한 자기 부정을 말함이다. 7:15-23에서는 위선자에 대해 경고가 말해져 있다. 「거짓 선지자」는 자기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맹신하여 말하고, 사람에 강요하는 자이다. 24-29은 산상설교의 끝맺음의 말이다.
「듣고 행하는 자」, 즉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은 서로 병행해야 할 것이다. 산상의 설교대로 실행하는 자는 어떠한 곤란이나 박해나 유혹에도 동요되지 않는다. 반대로 듣기만 하고 행치않는자는, 모래 위에 세운 집처럼 일단 유사시면 무너진다. 실행을 동반치 않는 경우에는 어떠한 소중한 진리를 배운대도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실로 예수의 이 산상 보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권위와 능력으로 충만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말씀의 실행자였기 때문이다. 실행을 동반치 않는 자의 말은 공허하여 권위가 없다. 그리고 완전히 산상수훈을 실행하실 수 있었던 분은 예수뿐이시다. 그리고 산상수훈은 일면에 있어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의 죄와 무력을 깨닫게 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하는 동기로 된다. 예수의 가르치심은 실로 선인의 가르치심의 되풀이가 아니라, 독창적이었다. 그의 말씀은 그의 독창적인 인격과 실행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라는 주위 마지막 결론에 신자는 청종하여, 진리를 듣고 행하는 일에 전심할 것이다.(인터넷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