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성전재건을 극렬 반대한 사마리아총독 산발랏,암몬의 도비야,아라비아,아스돗:2013.2.7.(목) 경건말씀 中
작성자안현상작성시간13.02.07조회수1,739 목록 댓글 0[여의도침례교회-오늘의 경건말씀]
2013.2.7(목) 느헤미야4장1절-23절
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4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5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7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8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9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10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 (11-21절까지 생략)
22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일하리라 하고
23 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
산발랏(Sanballat) 사마리아 총독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할 때 방해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느 2:10).
페르시아의 왕 다리오 2세의 통치 7년에 이집트의 엘레판틴에서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사마리아의 총독이었고 아들들은 엘아이야와 셀레미야였다.
산발랏은 호론 사람이었는데(느 2:19), 호론은 그가 다스리던 지역으로, 에브라임의
두 마을인 위 벧호론과 아래 벧호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던 사마리아 지방에서 실제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여 예루살렘이 강화되면 자신의 세력이 약화될 수 있었으므로 그가 성벽을
재건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산발랏은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을 비웃고(느 4:1), 페르시아 왕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협박했다(느 2:19). 또 공사에 참여한 일꾼들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뿐 아니라
(느 4:10-11) 느헤미야도 암살하려 했으나(느 6:1-2)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후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인 요야다의 아들이 산발랏의 딸과 결혼했다가 느헤미야에
의해 쫓겨났다(느 13:28).
사마리아(Samaria) 북이스라엘의 수도
북이스라엘의 수도를 말한다.
세겜에서 서쪽으로 약 20km,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67km, 지중해로부터 약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성읍이다. ‘사마리아 지방’이라는 말은 사마리아 성의
확대된 지역 이름이다. 원래 세겜, 사마리아, 이블르암, 므깃도 같은 도시들은 므낫세
지파의 영토였는데(수 17장), 이 므낫세 지파의 땅을 어림잡아 ‘사마리아 지방’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물론 ‘사마리아’라는 도시가 북이스라엘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신 일이 있듯이(요 4:5), 이 이름은 신약 시대에도
한 지방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신약에서 사마리아의 지경은 동쪽으로는
요단 강, 남쪽으로는 아얄론 골짜기와 욥바, 서쪽으로는 지중해, 북쪽으로는 이스르엘
골짜기가 그 경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리아라는 이름의 기원
: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 각축을 벌이던 중, 북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
(BC 885-874)이 디르사에서 6년 간 통치한 후에 세멜(shemer)이라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산(山)을 은 두 달란트에 사서 도성을 건설하고 그 산의 소유자의 이름을 따라서
‘사마리아’라고 했다(왕상 16:24). 즉 ‘세멜’( shemer)이라는 개인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쇼므론’(shomron; 개역성경에서는 ‘사마리아’로 번역됨)이라는 도시의 이름으로 발전했고,
이것이 라틴어와 헬라어 발음으로 ‘사마리아’가 된 것이다.
사마리아의 번영과 쇠퇴
: 북이스라엘의 오므리가 사마리아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한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
새로운 도성을 세운 것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곳은 해안도로와
연결되기 좋은 지역이었으며, 효과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기에도 좋은 위치였다.
오므리는 집권 후 처음 6년 동안 안으로 국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는 한편 밖으로는
유화정책을 병행해 나갔다. 그는 손녀 아달랴를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예호람(요람)과
결혼시켜서(왕하 8:26) 불편한 관계에 있던 남유다와 관계를 개선했다(왕하 8:18, 26;
대하 21:6; 22:2). 남유다와의 안정된 관계는 북방정책을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다. 또한 그의 아들 아합을 두로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시켜
조약을 맺기도 했다(왕상 16:31). 사마리아는 이후 100년 이상 이스라엘에게 난공불락의
수도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새로운 도성 사마리아는 오므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게 되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도 사마리아를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의 통치 기간에
아람(수리아) 왕 벤하닷 2세의 두 번에 걸친 침공을 받았으나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넘겼다(왕상 20장). 요람 왕 때 곧 엘리사가 활동하던 때에 다시 침공을 받아
사마리아가 포위되었으며, 이로 인해 극심한 기근을 경험하기도 했으나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넘겼다(왕하 6:8 이하).
이스라엘의 16대 왕이었던 므나헴은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는 등 유화정책을 통해
사마리아를 보호할 수 있었으나 반 앗수르 노선을 걸었던 군대장관 베가에 의해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 왕이 암살되고, 이로 인해 북이스라엘은 반앗수르 정책으로
돌아서게 되었다(왕하 15장). 이와 같은 정책은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이스라엘을
침공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왕하 15:29).
사마리아는 오랫동안 질곡의 역사를 거치면서 수난을 당해야 했는데, 그 수난의 역사
가운데 가장 혹독했던 것은 앗수르의 침공이었다. BC 722년 앗수르의 침공으로
이스라엘과 사마리아가 멸망하고(왕하 17:3-6), 사마리아 지방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를 당시 앗수르의 지배하에 있던 여러 지역으로 옮겼다. 그리고 앗수르는 그곳에
여러 지역으로부터 온 식민지 사람들을 이주시켰다(왕하 17:24). 앗수르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가 이스라엘을 차례로 지배하게 될 때마다 사마리아는
늘 영향을 받았다.
사마리아는 BC 108년 하스모니안 가의 요한 힐카누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가면서 재건되기 시작하다가 BC 30년 헤롯에 의해 본격적으로
재건되었다. 헤롯은 사마리아를 로마풍으로 재건하고 그 도시의 이름을 자기의 후견인이자
로마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헬라어 표기인 ‘세바스테’(Sebaste)라고 명명했다. 이곳은
유대 전쟁(AD 66-70)으로 다시 파괴되었으며, 5세기경에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게
되었다.
암몬(Ammon)
롯과 둘째 딸과의 근친상간으로 낳은 아들로 벤암미라고 불렸으며 암몬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창 19:38; 느 13:23). *모압(Moab):롯의 맏딸과 롯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창 19:37).
모압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도비야(Tobiah)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과 함께 성벽재건을 반대한 사람
암몬 사람으로 산발랏과 함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이다(느 2:10).
그는 계속적으로 편지를 써서 느헤미야를 위협하여(느 6:19) 성벽 재건을 중단시키려
하였지만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을 막을 수는 없었다(느 6:15-16).
그는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유대의 귀인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였고(느 6:17) 유력한
사람 스가냐의 딸과 결혼하여 유대 사회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였다(느 6:18).
그래서 암몬 계열의 사람은 하나님의 회에 들어올 수 없다는 율법의 규정에 의해 쫓겨날
위기에 처했을 때(느 13:1-3) 성전 골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에 의해 보호받는 특권을
누렸다(느 13:4-5). 그러나 그는 느헤미야에 의해 발각되어 골방에서 쫓겨났고 그의
물건들은 내어던져졌다(느 13:7-9).
성경 속의 또 다른 도비야:
1. 여호사밧 왕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도록 유다 성읍에 파견한 레위인 가운데
하나이다(대하 17:8).
2. 바벨론 포로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조상 중 하나이다(스 2:60). 이 사람의 후손인
도비야 자손들이 이스라엘 사람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고 기록되었다(스 2:59).
3.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던 사람 중 하나이다(슥 6:10).
암몬 사람(Am-monites)
롯과 롯의 둘째 딸과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벤암미의 후손들이다(창 19:38).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아르논 강에서 얍복 강에 이르는 곳으로 랍바가 중심지였다(신 2:19-22; 3:11).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과는 형제 나라나 다름없었기에(창 19:36-38)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암몬 족속과 다투지 말라고 하셨고, 그들의 땅은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준 것이므로 이스라엘의 기업에서 제외된다고 하셨다(신 2:16-19).
암몬 사람들은 몰록신을 숭배하여 솔로몬 때에는 암몬 사람의 왕비를 위해 예루살렘에
몰록을 위한 산당을 짓기도 했다(왕상 11:7).
암몬과 이스라엘과의 관계
: 암몬 자손들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떡과 물을 주어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발람을 고용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기 때문에 영원히 여호와의
회중에 들지 못하게 되었다(신 23:3-6).
사사 시대에도 암몬은 이스라엘을 괴롭혔고(삿 10:6, 9, 18), 암몬의 나하스 왕은
길르앗 야베스를 공격했다가 사울에게 패하였다(삼상 11:1-11). 다윗 시대 때 잠시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나하스 왕이 죽자 그의 아들 하눈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대상 19:7).
그러다가 솔로몬 때는 정략 결혼을 통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왕상 11:1).
여호사밧 때에는 암몬이 에돔, 모압과 힘을 합쳐 유다를 공격하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대하 20:1-30). 또한 이들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한 후 성벽을 건축할 때
방해했던 세력이었다(느 4:3-7).
아라비아(Arabia) 이스마엘 사람/미디안 사람/게달 사람
서남 아시아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로, 홍해와 페르시아 만, 인도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북쪽 경계는 정확하지 않다. 고대의 지리학자들은 이 지역을 암석 아라비아,
광야 아라비아, 비옥지 아라비아로 나누었다. 암석 아라비아는 시내 반도, 에돔, 요단
동부를 포함하며, 광야 아라비아는 북부 지방으로 수리아 사막을 포함하고, 비옥지
아라비아는 남부의 해안 지방을 말한다.
솔로몬 왕 때 아라비아 사람은 이스라엘에 세금을 바쳤으며(대하 9:14), 여호사밧 왕에게도
숫양과 숫염소 등을 바쳤다(대하 17:11). 또 하나님께서는 여호람을 치는 도구로 아라비아
사람을 사용하셨으며(대하 21:16), 이사야는 에돔에 이어 아라비아에 임할 심판을 선포했다
(사 21:13-17).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말하면서 아라비아로 갔던 것을 밝혔으며
(갈 1:17), 오순절 당시 예루살렘에 우거했던 사람들 중에는 아라비아 사람들도 있었다
(행 2:11). 아라비아에서 나는 귀금속으로는 오빌(왕상 9:28; 욥 22:24; 시 45:9)과 하윌라
(창 2:11-12), 스바(왕상 10:10; 사 60:6) 등에서 나는 금과 은(왕상 10:22), 보석
(겔 27:22) 등이 유명하다.
또한 식물은 유향과 몰약 나무(왕상 10:2, 10), 종려나무(출 15:27)가 자라났으며
동물로는 양, 염소, 나귀(겔 27:21; 민 31:28)는 물론 낙타가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창 37:25).
성경에 언급된 아라비아 사람들
: 성경에 언급된 아라비아 사람들은 이스마엘 사람(창 37:25), 미디안 사람(창 37:28),
게달 사람(창 25:13) 등이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교역을 했으며(창 37:25;
삿 8:24; 왕상 10:14-15) 이스라엘을 괴롭히기도 했다(삿 6-8장).
아스돗(Ashdod) 여호수아 시대 거인 족속 아낙 족속이 살던 땅
팔레스타인 북쪽에 있는 도시로, 여호수아 시대에 거인 족속 아낙 족속이 살던 땅이다
(수 11:21-22). 여호수아에게 점령당한 후에도 이곳에는 소수의 아낙 자손이 남아
있었다(수 11:22). 나중에 이곳은 유다 지파에게 분배되었다(수 15:46).
사무엘 시대에 블레셋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으로 가져 갔고,
그들이 섬기던 다곤 신전 안의 다곤 신상 곁에 법궤를 두었다(삼상 5:1-2). 다음날
아스돗 사람들이 신전에 가보니 다곤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의 궤 앞에 쓰러져
있었는데 이런 현상은 여러 날 계속되었다(삼상 5:3-4). 이때 하나님은 아스돗에 독종이
퍼지게 하셨는데 결국 아스돗 사람들은 궤를 다른 도시로 보내고 말았다(삼상 5:7-8).
웃시야 왕 때 이곳은 블레셋의 다른 성과 함께 점령당했는데 이곳을 점령한 웃시야에
의해 이곳 일대와 그 외의 블레셋 땅에는 새로운 성이 건축되었다(대하 26:6).
앗시리아의 사르곤 황제 때는 사르곤이 파견한 군대 총사령관에 의해 점령되기도
했다(사 20:1).
그 후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이 도시는 아소도(행 8:40)로 불렸으며, BC 163년에는
유대 마카비가 이곳을 점령했고, BC 147년에는 로마 폼페이우스에 의해서 자유 도시가
되었다. BC 30년에 헤롯 대왕이 이곳을 통치하다가 누이 살로메에게 주었다.
로마 시대에 아소도는 중요한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오늘날 가사와 욥바의 중간
지점인 에스두드(Esdud-Tel Ashdod)로 추정된다.
[출처] 비전성경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