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조선왕조실록

요동정벌(遼東征伐) -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최영장군을 중심으로 고려가 일으켰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실패한 전쟁.

작성자7교구카페운영자|작성시간15.12.14|조회수586 목록 댓글 0

요동정벌(遼東征伐)

 

1388년 고려가 명나라의 대고려 전진기지인 요동지방을 공격함으로써 명나라의

압력을 배제하려던 사건. 고려는 1369(공민왕 18)부터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왔는데, 우왕 때의 친원정책 이후 명나라는 무리한 세공(歲貢)을 요구하고

고려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기 일쑤였다. 88년에는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원나라 영토였다는 이유로 반환하라고 요구하기에 이르자

명나라와의 실력대결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요동은 남만주 요하(遼河)의 동쪽지방으로, 1360~70년대 초에 고려는 이 지역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이곳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에게까지 통치영역을 넓히고자

세 차례 출정해 일정한 성과를 거둔 적이 있었다. 원나라 멸망 이후 명나라는

이곳에 요동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를 두어 만주 경략을 꾀함으로써 고려와 여러

가지 알력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고려정부는 요동지방을 공격해 명의 압력을

배제하려 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중도에 그치고 말았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요동정벌 [遼東征伐]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 3. 30., 가람기획)

 원문보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8769&cid=42957&categoryId=42957



 

철령위(鐵嶺衛)

 

고려 후기 명나라가 안변(安邊), 곧 철령 이북의 땅에 설치하고자 했던 직할지.


 

1387(우왕 13) 12월에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므로 요동(遼東)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철령위의 설치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설장수(偰長壽)를 통해 이듬해 2월 전달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유사시를 대비해 전국적으로 성을 수축하고, 서북면에 무장들을 증파해 수비를 굳건히 하였다.

 

또한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사신으로 파견해 철령 이북의 문천(文川고원(高原영흥(永興정평(定平함흥(咸興)은 물론 그 북쪽의 공험진(公嶮鎭)까지도 원래 고려의 영토였음을 주장하면서 철령위의 설치를 철회하도록 요구했으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앞서 명나라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는 요동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 철령위의 설치를 정식으로 통보해왔다. 서북면도안무사(西北面都安撫使) 최원지(崔元沚) 또한 요동의 도사(都司)가 강계(江界)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요동에서 철령까지 70개의 역참을 설치하려 한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명나라는 강계만호 김완가(金完哥)의 내부(來附)를 계기로 요동의 봉집현(奉集縣)에 철령위지휘사사(鐵嶺衛指揮使司)를 설치하고, 황성(黃城)을 중심으로 민호(民戶)의 초무(招撫)에만 나서고 있었다.

 

한편 고려는 전국의 정병(精兵)을 총동원하고, 최영(崔瑩조민수(曺敏修이성계(李成桂)를 각각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좌군도통사·우군도통사로 삼아 이른바 요동정벌을 단행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명나라는 더 이상 철령위의 설치를 거론하지 않았고, 1393(태조 2)에는 봉집현의 철령위지휘사사도 현 만주의 철령으로 이전하였다.


 

의의와 평가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를 제기해 고려의 북진기도를 사전에 저지하고, 압록강 부근의 민호를 초무함으로써 요동을 확실히 통치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또 고려와 원나라 유장(遺將) 나하추(納哈出)의 관계유지에 대한 불만도 하나의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철령위 [鐵嶺衛]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원문보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3298&cid=46621&categoryId=46621



요동 정벌(遼東征伐)

 

요동 정벌(遼東 征伐)은 명나라가 철령 이북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고려가 요동을 경략(經略)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그러나, 이는 위화도 회군으로 이어져 고려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역시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1차 왕자의 난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배경>

 

1. 요동 문제

 

요동은 남만주(南滿州) 요하(遼河)의 동쪽 지방으로, 요동반도(랴오둥 반도)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한민족(韓民族)과 한족(漢族), 북방 민족 사이의 쟁탈 지역이

되어 왔다. 본래 고조선의 영역이었으나, 고조선이 기원전 290년경에 연나라 장수

진개와의 전쟁에 패해 서쪽 경계가 2천리 동쪽으로 이동함으로써 고조선의 판도에서

벗어났다. 전국시대 후반에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해 이 지방을 점령한 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한나라는 여기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였는데, 313년에 고구려의 미천왕이

한사군을 몰아내고 402년에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구려는 요양에 요동성을 쌓고 한족(漢族)과 북방 민족을 방어하는

요새지로 삼았다. 612년에 수 양제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645년에는 당 태종이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나, 안시성(安市城)에서

격퇴되어 물러났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요동은 당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98년에 건국된 발해가 요동을 경략하여 200여년간 발해의 영토로 들어갔다.

926년에 발해가 멸망하면서 요나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후 금나라, 원나라가

지배하였다.

 

 

2. 철령위 문제

 

·명 교체기에 명나라는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를 두어 요동을 포함한

만주 경략을 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와 여러 가지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

고려는 1356(공민왕 5)에 철령을 넘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이후 관서 지방

(關西地方)과 관북 지방(關北地方)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다.

 

1369(공민왕 18) 음력 12월 고려에서는 이인임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원나라의

동녕부를 치게 하였다. 동북면 원수 이성계는 1370년 음력 1월 압록강과 파저강

(婆猪江)을 건너 이오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가 지키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서북면 원수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遼陽)을 공격하여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는 고려의 장기적인

점령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외교적으로 반원친명 정책을 폈다. 그러나, 공민왕 사후 요동을

점령한 명나라가 상당한 군사력을 가진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감당키 어려운 세공

(歲貢)을 요구하면서 고려와 명의 관계가 틀어졌다. 1387(우왕 13), 명나라가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1388년 음력 2월 귀국한 설장수(楔長壽)

'()이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한다'고 전하였다. 1388(우왕 14)

음력 3,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에 착수했다는 보고를 받은 우왕은 8도의 정예

병사 징발을 명령하고, 스스로 평안도로 행차하겠다고 나서면서 요동 공격 준비를

본격화하였다. 고려 조정은 막강한 신흥세력인 명나라와의 외교적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는 주화파(主和派)와 명나라의 지나친 요구에 반감을 품고 북원과

손을 잡고 요동(遼東)을 쳐서 명나라에 본때를 보이는 실력행사를 하자는 주전파

(主戰派)로 의견이 갈렸다.

 

 

<경과>

 

농사철을 앞둔 군사 징발에 왜구의 침탈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백성들의 원성(怨聲)

이인임·임견미·염흥방 일파의 전횡시대보다 더 컸다. 그러나, 시중(侍中) 최영

(崔瑩)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음력 4월에 주전론(主戰論)을 지지하는

우왕과 더불어 평양으로 떠났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하여 좌우군 38,830명 등 5만여 병력(10만명이라는

설도 있음)을 요동으로 떠나게 하였다.

 

우왕이 봉산에 가서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처음 요동 정벌 계획을 알렸을 때

(음력 41), 이미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했으나 우왕은

묵살했다.

 

이때 이성계 일파의 4불가론(四不可論)은 다음과 같다.

 

1.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 (以小逆大)

2.(농번기인) 여름에 출병하는 것 (夏月發兵)

3.원정군이 나가면 왜구가 그 빈틈을 노릴 염려가 있는 것 (擧國遠征, 倭乘其虛)

4.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염병 발생의 우려가 있는 것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우왕과 최영은 반대여론을 억누르고 출병을 강행하였다. 1388년 음력 418,

고려는 전국에서 좌우군 38,830, 수송대 11,634, 21,682필을 동원해

요동 정벌에 나섰고, 우왕이 직접 평양까지 나가 격려하였다. 그러나,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 최영은 국내에서의 역모를 걱정한 우왕의 고집으로 전선에 나서지

않고 평양에 남게 되었다.

 

1388년 음력 522,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가 좌군도통사인

조민수를 회유하여 전군(全軍)을 회군시켰다.(위화도 회군) 돌연한 회군에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개경으로 급히 귀경하여 반란군에 대항하였으나, 이성계의 반란군은

최영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최영은 고봉현(高峰縣: 현재의 고양시)으로

유배되었다가 개경에서 참형되었으며, 우왕도 폐위되었다.


 

<의의>

 

이 사건은 고려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통해 나라를 재건하려던 최영을 대표로

하는 보수 세력(권문세족, 문벌귀족, 불교)과 이성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신진 세력(신흥 무인, 신진사대부, 유교)의 충돌이 빚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고려의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4년 뒤 조선을 건국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원문보기  https://ko.wikipedia.org/wiki/%EC%9A%94%EB%8F%99_%EC%A0%95%EB%B2%8C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