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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종 ] 어느 창녀의 죽음 16 부

작성자풀잎향기|작성시간16.08.08|조회수294 목록 댓글 2
 
꺼억, 나는 말이야…… 꺼억…….」

그가 꺼억하고 길게 트림을 하자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야. 소주 한 병만 사 올래?」

「아이. 그렇게 취하셨는데…….」

「아니야. 난 취하려면 아직 멀었어, 이런 자리에서 벌거벗구 술 마시는 것도 괜찮지. 야, 소주 한 병 사 오라구. 돈 없다구 너 날 괄시하니? 술 살 돈은 있어.」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가로막았다.

「아이. 저한테 돈 있으니까 앉아 계세요.」

그녀는 옷을 입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한참 후 그녀는 술과 함께 과자며 과일 같은 것들을 잔뜩 사들고 들어왔다.

「야, 이거 미안한데.」

「드세요.」

그는 비스듬히 누운 채로 그녀가 깍아 주는 사과를 받아먹었다.

그리고 술을 마실 때는 대단히 기분이 좋고 만족한 표정이었다.

「제가 묻는 말에 대답은 잘 안하시네요.」

그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무슨 말을 물었는데? 아무 거나 다 물어 봐. 척척 대답해 줄 테니까.」

그는 벌건 얼굴로 씨근덕거리면서 말했다.

「제가 아까 언제 남하했느냐고 묻지 않았어요?」

「아. 그렇지. 그러니까 1951년인가…… 1․4후퇴 때 남하했지. 사실 그때 이야기를 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진다. 파란곡절이 많았지. 우리 집안은 그때 없어진 거나 다름없었어.」

청년은 잠시 어두운 얼굴로 천장을 응시했다. 그녀는 사내 옆에 바싹 다가앉으며 치마폭으로 그의 손을 가만히 감싸주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 왔는데. 아버지 대(代)에 와서 좀 차질이 생겼어. 우리 아버지라는 사람이 가만히 앉아서 농사만 짓는 데 만족하지를 않은 거지. 아버지는 자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장사에도 손을 뻗쳤는데, 그 중에는 국경을 넘나들면서 아편 장사를 한 것도 끼어 있지. 그렇다고 우리아버지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그 당시 국경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거의가 아편에 손을 대고 있었다니까 그렇게 대수로운 건 못돼. 좌우간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돌아다니면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어. 아버지가 1․4후퇴 때 우리들을 데리고 남하한 것도 순전히 이러한 방랑벽 때문이었지. 남쪽에 대한 강한 호기심. 남쪽에서의 새로운 희망…… 그거니까 아버지는 이민 가는 기분으로 남하했던 거야.」

「누구누구 월남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그는 술 한 잔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하아. 이거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누가누가 월남했느냐 하면아버지하고 나하고 내 누이동생. 이렇게 셋이었지.」

「엄마는요?」

「엄마? 그 여자는 버얼써 죽은 뒤였어. 내 누이동생을 낳고 그 이듬해엔가 승천했으니까. 오래된 이야기지. 살아 있을 때는 별로 몰랐었는데…… 몇 년 지나서 어머니 사진을 보니까 상당히 미인이었어. 아버지가 재혼하지 않고 동짓달 긴긴 밤을 홀로 지낸 이유를 알 만하지 자. 너도 한 잔 해.」

그가 웃으면서 술잔을 내밀자 춘이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흩어진 머리채 속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몸은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온몸이 늘어지고 눈꺼풀이 잔뜩 무거워진 그로서는 이제 한숨 푹 자고 싶을 뿐 그녀에게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흐응. 이제 내 이야기가 재미없는 모양이구나. 빨리 나가 달라 이거지…… 그래에. 이년아. 나간다. 나가.」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푹 고꾸라졌다. 그래도 그녀는 앉은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야. 이 간나 새끼야. 내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재미있다구. 넌 아무것도 몰라. 너 같은 똥치가 알게 뭐야.」

청년은 주먹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한 대 쥐어박은 다음 술병을 입 속에 거꾸로 박아 넣었다.

「남하하다가 말이야…… 우리 세 식구는 뿔뿔이 헤어진 거야. 헤어졌다는 여기에 재미가 있는 거야. 흐흐. 어떻게 헤어졌는지 알아? 삼팔선을 넘어 서울에 들어왔을 땐데…… 그만 아버지가 검문에 걸린 거야. 헌병 나리가 하시는 말씀이 잠깐 가자는 거야. 아버지는 완전히 당황했지. 하지만 아버지는 별일 없을 거라고 하면서 우리한테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어. 그러면서 필요할 거라고 하면서…… 자기가 차고 있던 그 고물 시계를 나한테 주고는…… 간 거야. 자꾸 우리 쪽을 돌아보면서 가더군. 그때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곳은 길가에 있는 어느 빈 벽돌집 앞이었는데. 그 집은 반쯤 허물어져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어. 이때 내가 잘못을 저지른 거지. 아주 큰 실수였어. 난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여서 누이동생을 그 집 마루에 앉혀놓고…… 아버지를 찾아 나섰어. 얼마 후에 아버지가 어느 초등학교에 수용되어 있는 것을 알았어. 거기엔 아버지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입구 헌병이 하시는 말씀이 모두 징용에 나가야 한다는 거야. 나는…… 사정을 했지. 이북에서 오는 길이니 한번만 봐 달라. 그게 어려우면 잠깐 면회라도 허락해 달라. 하지만…… 나 같은 꼬마는 통하지가 않았어. 한참 후퇴할 때라 모두가 살기등등해 있었지. 반시간쯤 뒤에 하는 수 없이 되돌아왔는데…… 이번엔 거기 꼼짝 말고 앉아있으라고 한 여동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거야. 난 반미치광이가 되어 날뛰었지만 홍수같이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 그 앤 아마 날 찾느라고 나섰겠지만 다섯 살짜리 애가 어디가 어딘 줄 분간이나 했겠어. 벌써 20년이 가까워 오지만 아직까지 아버지도 누이동생도 만나지 못했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봤지만 감감소식이야. 내 생각엔 영영…… 못 만날 것 같아 아버지는 징용에 나가서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는데. 아마…… 돌아가셨을 거야. 지금 살아 있다면…… 쉰 아홉…… 한창 나이지. 아버지는 몰라도 누이동생은 살아있을 거야. 좋은 양부모(養父母) 만나서 제대로 학교에 다닌다면 지금 대학(大學) 4학년쯤 되었겠지. 막상 만난다 해도 서로 얼굴을 못 알아볼 거야. 처음 몇 년 간은 누이 생각에 미칠 것 같더니…… 세월이 흐르니까 그것도 만성이 되더군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힘들게 말을 마친 그는 한참 동안 꼼짝없이 엎드려 있었다. 넓은 어깨 위로 흐르는 땀이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만이 유난스레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결국 혼자 남아 부두 노동자로 밖에 전락할 수 없었던 자신의 신세가 새삼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하고 그녀는 기어들 듯이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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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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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별이 | 작성시간 16.08.09 남매간이.아닐까요.제추측이네요
  • 작성자행복한허니 | 작성시간 16.08.12 남매 맞아요 전쟁의 비극이죠.즐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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