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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종 ] 어느 창녀의 죽음 17 부 마지막회

작성자풀잎향기|작성시간16.08.10|조회수382 목록 댓글 0

아하. 내가 아직 말 안했던가. 내 이름은 백인탄이야. 이름이 아주 좋대.」

그는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 허물어지지 않을 듯이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완강하고 고집스러워 보였다.

「어서 가 보세요.」

갑자기 그녀는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인탄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녀를 다시 가까이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그는 벌떡 일어서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다리가 몇 번 휘청거렸다.

「빌어먹을. 쓸데없는 이야기만 지껄였군 오늘 실례 많았다. 다시 말하자면…… 그 시계는 중요한 거니까 잘 간직해 둬. 내일 아니면 모레 돈을 가지고 올 테니까.」

그러자 그녀가 시계를 내밀었다.

「괜찮아요. 가져가세요.」

인탄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춘이는 피했다.

「정말 가져가도 되겠어?」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감사하군 내 돈은 떼먹지 않을 테니까 염려 마. 이자까지 쳐서 갖다 주지. 앞으로 우리 잘 사귀어 보자구.」

그는 신뢰를 보이기 위하여 그녀에게 그 잘난 명함까지 한 장 내주었다. 그로서는 정말 재수 좋은 날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을 외상으로 했을 뿐만 아니라 담보까지 잡히지 않아도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더구나 이 계집애는 나한테 단단히 반한 모양이다. 아마 내 남근의 위력에 녹아 버린 모양이지. 그는 가슴이 잔뜩 부풀어 오른 채 귀중한 시계를 팔목에 단단히 비끄러매었다. 그런 다음 대단히 취한 체하면서 비틀비틀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벗어나서 몇 발자국 걷다가 뒤돌아보니 춘이가 문설주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춘이는 얼굴을 휙 돌려 버렸는데.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그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저년이 나한테…… 반해도 단단히 반한 모양이구나.」

그는 씁쓰레한 기분을 털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침을 탁 뱉은 다음 걸음을 빨리했다. 눈은 아까보다 더 거세게 덩이가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춘이한테 돈은 같았소?」

「아직 못 갚았습니다. 내일 서울 올라가는 길에 갖다 줄 참 입니다.」

청년은 춘이에게 아직 외상값을 갚지 못한 것을 변명할 기색인 것 같았다.

오 형사는 술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 잔에 그는 다시 자작 술을 따랐다.

「춘이는 죽었소.」

「네?」

「멀리 갔단 말이오.」

「정말입니까?」

「정말이오.」

오 형사가 시체를 찍은 사진을 내보이자 청년의 얼굴이 뻣뻣이 굳어졌다.

「이런!」

거센 바닷바람에 판자집은 통째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실내에는 손님으로 그들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주모는 구석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는 바람 소리에 놀란 눈을 뜨곤 했다.

「타살입니까?」

하고 백인탄은 물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상당히 겁먹은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범인은 잡혔습니까? 도대체 누가 죽였습니까?」

그는 확실히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공포인 것 같았다.

「모두가 범인이오. 당신도 춘이를 죽였고 나도 춘이를 죽였소.」

「네? 뭐라구요? 제가 춘이를 죽였다고요? 하하하. 생사람 잡지 마십시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허허허.」

청년은 기묘하게 웃음을 흘리면서 안주도 없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쌍놈의 계집애. 어쩐지 그 날도 질질 우는 게 이상하더라니. 난 나한테 반해서 그러는 줄 알았지. 처녀 귀신은…….」

「개 같은 자식!」

오 형사는 벌떡 일어서면서 청년의 얼굴을 후려쳤다. 탁자와 함께 뒤로 쿵 떨어진 청년은 코피를 쏟으면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 형사는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주모에게 술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한 걸음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어둠은 대지와 하늘을 온통 삼킨 채 끝없이 퍼져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눈보라 속을 그는 바다 쪽으로 주춤거리며 걸어갔다. 그리고 개펄을 막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둑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지난 일요일 밤. 백인탄이 일을 치르고 떠나가 버린 뒤 춘이는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으리라.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로 고무신을 끌면서…… 그렇지. 약방으로 갔겠지. 그녀는 이 약방, 저 약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수면제를 사 모은 다음 아마 그것을 하나하나 삼키면서 눈 오는 밤거리를 헤매었으리라. 밤이 깊어감에 따라 정신이 흐려지고 몸이 얼어 버린 그녀는 마침내 길 위에 쓰러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비밀을 자기의 몸과 함께 눈 속에 묻어 버렸으리라. 그것이 그녀가 취할 수 있었던 마지막 예의(禮儀)였겠지. 오 형사는 춘이의 주검이 하얗게, 아주 하얗게 변해가고 있는 것을 보는 듯했다. 이제 남은 것은 종3의 진이 엄마나 포주로부터 춘이의 성이 백가(白哥)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밝혀진 지금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방파제를 두드리는 성난 바다의 물결이 썩어 가는 대지를 깨끗이 쓸어가 버리기를 실로 간절히 기원하면서 그녀를 죽인 조국을 증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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