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MBC 라디오 `지금은 라디오시대`에서
오래전 방송되었던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입니다 -
IMF한파에 밀리고 밀려 집과 가족을 멀리하고
타향살이의 외롭고 쓸쓸함을
'지금은 라디오시대'를 들으며 달래고 있는
전국 덤프협회 가족의 한사람입니다.
28년 전 저는 광산촌에서 자랐는데
당시 마을에는 광부의 가족들이 무료로 사용하던 목욕탕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설을 몇 일 남기고 동네 목욕탕에 가게 되었죠.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때 아마 남탕과 여탕을 갈라놓은
벽 사이의 수도 파이프가 낡아 벽을 허물고
수리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설을 몇 일 앞둔 광부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공사 도중 임시 방편으로
가로 세로 3m정도의 나무판자에 못을 박아 남탕과 여탕의 경계선인 벽을 만들어 놓고
임시로 목욕탕을 열고 목욕을 하게 되었습니다.
설을 몇 일 앞둔 터라 목욕탕은 다른 때 보다 만원이었죠.
나무 판자로 만든 벽..
우리는 원치 않아도 여탕 쪽의 소리를 고스란히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성에 호기심이 왕성했던 사춘기...
여탕 속의 풍경이 궁금하기 그지없었으나 꾹 참고 있는데
남달리 호기심이 많았던 제 친구 S는 목욕을 하다 말고 판자로 만든 벽을
이리저리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맨 꼭대기 부분에
500원짜리 동전 만한 구멍을 발견하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판자에 매달려 기어오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겨우 기어올라 구멍 속으로 얼굴을 바짝 디밀어
뭔가 보았는가 싶었는데... 우얄꼬...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판자가 여탕 쪽으로 기울었고
S는 여탕의 한 복판에 나뒹굴게 되었습니다.
그때 막 탕 속으로 들어가려던 한 아주머니는
여탕 쪽으로 넘어지던 판자벽에 머리를 부딪혀
그만 큰 대자로 기절하고 말았죠.
여탕 "엄마~~, 꺄아악~~~"
남탕 "어, 어, 어~~"
삽시간에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목욕탕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아.. 종환 선생님!
내 생전에 그렇게 많은 나신들을 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을 못했더랬습니다.
거, 확실히 다르데요. 남탕과 여탕의 상황은....
먼저 여탕 쪽의 상황을 말씀드리자면
출구 쪽으로 서로 나가려고 아우성이었고
미쳐 못 나간 사람들은 이구석 저구석으로
비명을 지르며 가슴은 벽 쪽으로,
엉덩이는 모두 남탕 쪽으로 향하고 있더군요.
연속, "꺄~약!" "엄마야~~~!"
"어머, 어머, 어머~"를 연발하면서도
힐끗힐끗 고개를 돌려 남탕 쪽을 보는 건 뭡니까
전 그 속에서 아랫마을 순이가 끼여 있는 것을 목격했고
당혹스럽게도 정면으로 눈이 딱--마주쳤습니다.
그리고 남탕 쪽의 상황은 몇 명 안 되는 이들만 출구로 나갔고
그 나머지는 모두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탕 쪽을 훔쳐보느라 바쁜 것 같았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런 기회가 다시 있으랴 싶어 열심히 기웃거렸죠.
그런데 문제는 아무것도 가리지 못하고
큰 대자로 기절 한 채 누워있는 아주머니였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살던 아담과 이브도 아닌데
누가 홀라당 벗은 채 그것도
남녀 혼탕이 된 상황에서 선뜻 나서겠습니까...
그리고 사건의 주범인 문제의 S는
여탕 쪽으로 나뒹굴어져 있다가
허겁지겁 남탕으로 넘어 오더니 어쩔 줄 몰라하며
쓰러진 아주머니의 상태를 살폈습니다.
한참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눈빛이 얄궂게 변하데요.
그 아주머니를 다시 한번 유심히 바라보던
그 친구 입에서 나온 소리가 뭔지 아십니까?
내참 기가 막혀서...
"엄마!" 오, 하나님, oh! my god!"
그 아주머님은 분명 그 친구의 엄마였습니다.
다만, 그 친구나 저나 벌거벗은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금방 알아 볼 수 없었던 겁니다.
어머님을 병원으로 모신 그 친구는 지은 죄가 막중하여 동네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마을 어귀를 빙빙 돌다
자정 무렵이 되서야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가 던진 재떨이에 맞아
그 자리서 찍소리 한번 못해보고 기절했다는 거 아닙니까.
당시 그 친구 아버지는 성격이 불같아서
어린 시절 그 친구네 집에 한번도 놀러 가보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재떨이 한방에 KO 되어 정신을 잃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 날 밤
그 친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어머니는 머리에 아홉 바늘,
이 친구는 4바늘을 꿰매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구정이 되었는데도
그 친구 어머님의 모든 것을 보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세배도 못 갔고
그 친구 어머님은 나신을 공개한 탓으로
몇 달씩 바깥출입을 삼가 하셨습니다.
거기다 그 친구는 길에서 만나는
어른들마다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죠.
"저 놈이 그 놈이여!"
그리고 참, 아랫마을 순이 말인데요...
그 사건 때문에 제가 반 강제로 책임을 졌다는 거 아닙니까.
이유인 즉...
"목욕탕에서 나 다 봤지?
인제 나는 오빠가 책임져야 돼!"
"아녀--, 나는 니 뒷면 밖에 못 봤어"
"내가 오빠를 다 봤단 말야,
그러니까 책임져!"
그래서 순이가 나를 다 봤다는 이유로
저는 순이를 책임져
딸 둘 낳고 잘 살고 있답니다.
♡♡♡♡♡♡♡♡♡♡♡♡♡♡♡♡♡♡♡♡
그렇습니다.
우리의 부부 모든 만남이 소중하고 값진
인연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누군가 말했듯이 잠자리 날개 짓으로 바위를 스쳐
그 바위가 하얀 눈송이처럼 가루가 될 즈음에
한번 만날까 말까한 귀한 인연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