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3장
=====3:1
그 때에 - 이 구절의 뜻은 (1) '결정적인 어느 때'(Hill)를 말할 수도 있고,
(2) '예수와 그의 가족이 나사렛에 살던 무렵'(Broadus)을 뜻할 수도 있다. 마태는
구약에서 어떤 특정한 시점(時點)을 나타내던 표현 방법(창 38:1;출 2:11, 23;사
38:1)의 영향을 받아 뒤에 이어지는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하고자 이런 표
현법을 사용한 것 같다. 한편 '그 때'는 2장과 약 30년의 차이가 있는 주후 28년 정도
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즉, 디베료 가이사(Tiberias Caesar) 재위 15년(눅 3:1, 2)
되던 해, 곧 세례요한 내지 예수의 나이가 30세 된던 때였다. 여기서 '30'이란
나이는 모세 율법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
(민 4:3, 42-45). 이는 결국 율법의 완성자요 인류 구속의 과업을 실행키 위해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의 사역을 인준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
세례요한(* ,요안네스 호 배티스테
스) - 히브리어 요하난(* )이란 이름에서 유래한 '요한'은 제사장이자, 유
대의 지도자로서 B.C.106년에 사망한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이래로 유대인들
에게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신약에서 4, 5명 정도 등장하는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이란 이름 앞에 '세례'(Baptist)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주 나오는
다른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 뿐 아니라 그의 사역의 중점이 '세례'에 있었기 때문
이다. 한편, 히브리인의 이름에는 (1) 할례명(이 이름은 거룩한 이름으로 종교적 목
적과 의식에서만 사용한다)과 (2) 개인명(個人名, 즉 세속명으로서 일반적으로 통용
되는 이름이다) 및 (3) 그밖에 한 개인에게 관련된 공적 임무, 정신적, 신체적.
신분적, 도덕적 특성을 일컫는 이름이 있었다. 여기 '세례 요한'이란 이름은 바
로 (3)번의 공식 임무에 관련된 직능적(職能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의 역
사 역사가 요세푸스(Jesephus)도 '세례자 요한'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편 세례요
한은 엄격히 말해서 율법 시대에 속한 자요, 죄를 책망하여 회개를 촉구한 구약 최후
의 선지자였다.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된 것처럼 그는 구약의 율법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의 은혜 시대를 예비하는 준바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세
례 요한의 탄생 경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누가복음 1장을 참조하라.
유대 광야에서(수 15:61;삿 1:16) - 여리고 남쪽과 사해 서쪽 고원 지대에 걸
쳐 펼쳐진 황량한 석회암의 굴곡으로 되어 있는 광야이다.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있
고, 엔게디 근처에는 폭포도 있어 목초지로 이용되던 땅이었다(시 65:12;욜 2:22;눅
15:4). 이곳은 '십 황무지'(삼상 23:14, 15), '마온 황무지'(삼상 23:24), '엔게디
횡무지'(삼상 24:1), '예루엘 광야'(대하 20:16)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는데, 그
모든 땅이 유다 지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전통에 따라 '유대 광야'로 지칭되었던 것이
다. 한편, 이 광야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칩거(蟄居) 생활을 하며 흩어져 살았는데
예수 당시의 극단적 유대교 종파의 하나인 엣세네파(the Essenes)도 그 중에 하나였
다. 세례 요한의 성장지와(눅 1:80) 초기 사역지(요 3:23)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에
그를 엣세네파의 일원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유대인들의 역사성으로 볼 때
'광야'(Desert, NIV)는 단순히 소외된 지역으로만 여겨지지 않고 '예언적 의미'를
갖고 있는 특수 지역이었다. 그 예로써 율법이 광야에서 계시되었고 열심당원들
(Zealots)도 광야를 은신처로 삼았었다(24:26;행21:38). 이러한 의미에서 학자들은 세
례요한의 활동 무대였던 광야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Bonnard, Maier). 더불어 '광야에서'란 말 중에 '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기네
타이'(* )가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 '그가...에 와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단순히 장소를 강조한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의 현재성을 강
조한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사역의 현재성과 역사성을 생동감있게
전해주며, 그의 사역의 예언적 특성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전파하여 - 이에 대한 헬라어 '케륏손'(* )은 '유앙겔리조마이'
(* )와는 달리 말씀을 선포하는 그 자체로서의 사건에 관
계된 것이 아니라 선포의 방법과 의미에 관계된 것이다. 즉 그는 메시지를 선포하되
단지 하나님께서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말씀만을 고(告)하는 것이 그의 사명의 전부이
었음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그가 광야를 사역 장소로 택한 것도 하나님의 지시
(사 40:3)에 따른 것이었다. 실로 세례 요한의 전파지로 택하신 광야야말로 이스라엘
의 피폐(疲弊)한 영적 상태를 적절히 묘사했다 할 것이다.
=====3:2
회개하라 - 이 말의 원어 '메타노에이테'(* )는 고전 헬라
어에서 순수한 의미로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가지며, 통속적으로는 단순히 '무슨
일을 후회한다'라고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도입된 이단어의 용례(用例)는
'새 행실로 돌아 온다'는 히브리어 '슈브'(* )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백성들
로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외침이다. 즉 유대인 중에도 믿음없
는 자가 있고, 우상 숭배자가 있기에 그러한 불신과 영적 음행(淫行)에서 돌이키라는
구약적 의미인 것이다(Alford). 실로 이 말은 머리로서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
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와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Turn ye) 전인격적인
참회(懺悔)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메시야를 영접하는 마음과 행위의 철
두 철미한 변화 전반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궤
도를 이탈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철저한 번화가 절대 요청되는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롬 3:10). 한편 이 같은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서만 참 회개임
이 증명된다.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설교의 두번째 주제로서 회개의 이유를 밝히고 있
다. 왜냐하면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는 날에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될 것이기 때문이다(25:31-46).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 또
는 '하늘 나라'(* ,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마가와 누가에는 '하나님의 나라'(*
,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로 표현한다. 한편 이 표
현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 왕국에서 유래한 것으로서(단 2:44;7:13, 14,27) 구약 성
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곧 '왕국'(* , 말쿠트)의 주요 의미는 '통치
'(reign)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왕국'을 뜻하는 '바실레이
아'(* )는 간혹 영토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4:8) 대부분이 역동적
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한다. 이는 당시 천국을 영적인것으로만 해석
하고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것로 간주하던 랍비들의 해석이나 메시야 왕국이 이뤄질
때 로마의 지배가 무너지고 정치적 평화와 번영이 도래하리라던 A.D. 1세기 당시의 유
대인들의 극단적 해석과는 달리 역동적(dynamic)으로 이 땅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에서는 대적들을 멸망시키고 이 땅
에 공평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실(사 9:7) 하나님의 강림(降臨)과 통치에 대한 기대
로 고조되어 (1) 다윗 언약 성취에 대한 대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삼하 7:13,14).
(2) 여호와의 날로서 심판의 어두움(암 5:18,19)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
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 땅에 구체화될 천국과, 그리스
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천국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본
문에 제시된 세례 요한의 선포는 바로 예수의 초림으로 구체화될 천국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가깝다'(* ,엥기켄)라는 말은 천국이 갖는 역동
적 의미와 함께 결합되어 '천국은 예수와 그의 말씀과 이적과 함께 왔고,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왔으며, 이 시대의 종말에는 완성된 모습으로 올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
닌다. 즉 하늘나라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즉 온 세계에 왔고, 마침내는 영원
히 존속될 것이다. 한편 마태가 '하나님 나라' 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
을 함부로 부르기를 꺼려했던(출 20:7) 유대인의 일반적인 완곡어법(婉曲語法) 때문일
것이다.
=====3:3
저는...자라(* ,후토스 가르 에스틴) - 본절의 내
용은 2절에서 세례 요한이 천국을 전파하는 공적인 근거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본
문장은 이유와 원인을 나타내는 '가르'(* )에 의미를 살려 '왜냐하면 저가...자
이기 때문에'로 고치는 것이 더욱 완전한 번역이 된다. 한편 본절은 예언과 성취라는
구조(flufillment formula)로 묘사되어지지 않은 구약 인용 구절 중의 하나이다. 즉
본문의 경우는 단순히 문자적 예언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모형적, 종말론적 성취로 보
아야 한다.이러한 예언은 다른 복음서에도 공히 취급되고 있다(마 1:2, 3;눅 3:4-6;요
1:23). 특별히 세례 요한 자신은 요 1:23에서 '나는...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라'하였고, 예수께서도 마 11:10에서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하심으로써 이사야
가 예언한 내용의 궁극적인 성취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증하고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 사 40:3은 바벧론 포로 생활에서 그의 백성을 예루살렘
으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이다
(McNeile). 여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하나님의 선구자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
서 '소리'란 어떤 의지나 의미가 개입된 주체적 발언이 아니라 물리적 음파일 뿐이다.
이는 '로고스'(* ), 곧 말씀으로 표현된 예수의 주체적 발언과 그인격을
소개하는 세례 요한의 메신저(messenger)로서의 기능을 확실히 드러내 준다. 그리고
'외치는 자'는 하나님이시요, 듣는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포
로에서 귀한하는 것에 대한 이 예언은 온전한 성취가 못되었고, 부분적으로 이루어졌
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예언은 필연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 즉 메시야 왕국(하늘나
라)의 선포와 도래에 관심을 갖게 된다(Alford). 여기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단순히
역사적 측면에서의 포로 귀환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영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
류를 해방시키고 당신의 나라로 귀환시키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 해토이마사테) - '주'를 뜻하는
'퀴리오스'(* )는 하나님에 대한 신적 칭호로서 히브리어로는 '주인'을
뜻하는 '아도나이'(* )에 해당한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
는 안된다는 십계명 중 제 3계명(출 20:7)의 금기(taboo)를 철저히 따른 것으로 여호
와의 대(代)명칭이다. 한편 '예비하라'는 말은 정확하게 준비되었다는 뜻의 '헤토이
모스'(* )에서 유래하여 불편함 없이 적절히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그
런데 세례 요한은 주께서 이 땅에 셔서 사역하시는데 불편없도록 모든 것을 '예비
하는' 선구자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예비된 길을 따라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
을 위해 '천국'을 또한 '예비하셨다'(요 14:2, 3).
첩경(捷徑)을 평탄케 하하 - 여기서 '첩경'(* , 트리부스)에 해당하
는 히브리어 '메실라'(* )는 곧게 뻗은 대로(high-way)를 가리킨다. 이에 대
해 어떤 학자는 마차가 힘차게 달릴 수 있었던 '마차로'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 길은 분명 '왕의 대로'로 손색이 없는 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어지는 '평탄케
하라'는 말의 헬라어 '유데이아스'(* )는 '곧다', '기쁘다', '바르
다'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주의 길'을 회개로 표현한 은유법이다. 즉, 평탄케 하
라'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 측면에서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일치하도록 '바른'질서를 유지하며, 정의를 이루라는 말이다. 이말이 당시 세
례 요한의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인 것이
다.
=====3:4
약대 털옷 - 검소하고 금욕적인 구도자(求道者) 본연의 모습올 상징한 옷차림으로
서 엘리야의 의상과 의도적 일치를 이룬다(왕하 1:8). 이는 결국 요한이 엘리야 재현
예언(말 4:5;눅 1:7)의 성취자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실로 투박한 털옷은 선지자들이
주로 입는 옷으로 알려졌으며(슥 13:4).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
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들이 백성의 죄를 자신이 대신하여 슬퍼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입었다 한다. 이 옷은 약대(낙타)의 가죽 옷이 아니라 단지 낙타 털로 거칠게 짠
옷이었다. 한편, 약대 털옷을 입은 세례 요한의 모습은 당시의 죄악된 현실을 부정하
며, 회개를 선포하는 그의 사역과 일치한다.
가죽띠 - 풍성한 겉옷올 허리에 단단히 묶기위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옷차림에
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메뚜기(* , 아크리데스) - 이는 몸집이 큰' 종류의 메뚜기로서 레
위기에서도 식용(食用)으로 허락된 정결한 식물이었다(렘 11:22). 지금도 동앙에서
는 메뚜기를 식용으로 삼는데, 유대에서는 하층 천민들이 음식으로 사용했다.
석청(* ,메리 아그리온) - 석청(石淸)은 야생꿀로서 나무의
수액(樹液)이라는 견해(Meyer, Burce, Diodorus)도 있고, 야생 벌꿀(Bengel, Carr)이
라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으나, 구약 셩경에서 이 단어
가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바위 틈새에 만들어진 야생 벌꿀(삿 14:8, 9;삼상
14:25-29;시 81:16)로 생각된다.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 생활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연상시키고, 철저한 자기 절제와 고독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들의 경건한 행위를 암
시해 준다. 실로 세례 요한은 의복과 음식으로 백성들에게 회개와 임박한 천국을 전
했던 것이다(Bengel).
=====3:5
이 때에...다 그에게 나아와 - '이 때에'는 세례자가 '회개'와 '천국' 선포 사역을
시작한 때(1절)를 가리킨다. 실로 400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
갈'의 암울한 시대의 절망 속에 살아가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그들의 영적 가
뭄을올 해갈(解渴)시켜줄 단비로 여겼으며 그중에서도 어떤 이는 그를 예언된 메시야
로 기대하며(눅 3:15;요 1:20) 그에게 모여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나오는 지명
(地名)들은 2:3과 마찬가지로 장소를 의인화시킨 것으로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회개
자로서 제일 먼저 광야로 향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긔고 '온 유대'에서 '온'이라
는 말은 그 당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환대(歡待)를 암시한다. 그리고 '요단 강 사
방'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이두매, 베레아, 사마리아등의 이른바 종교적으
로 소외된 지역 전반을 가리키며, 또 요한 사역의 본거지가 요단강인 것과 사역의 내
용이 '회개 촉구'와 '세례 베푸는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3: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 이는 자기들이 범한 죄를 조목조목 고백했음을 가리킨
다. 이에 대해 역사가 요세푸스이(Josephus)는 '그들이 자신들의 범죄와 율법에 대한
죄를 고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죄의 고백은 율법에 규정된 의무로서 범죄한 당사
자의 책임(레 5:5;26:40)이자 제사장의 의무 중 하나였다(레 16:21). 이스라엘이 영
적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는 이러한 고백이 순조롭게 이뤄졌으나(느 9:2, 3;시 32:5)
영적 기갈 상태에서는 침묵하고 있을뿐이었다. 한편 막 1:4과 눅 3:3에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한다. 그러나 마태는 세례의 선행 조건으로 '죄의
고백'을 언급했을 뿐 '죄 사함'은 예수가 죽을 때(26:28)까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
다. 이것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의 세례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증거가 된다
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개인적인
'죄의 자복'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적이 없었다. 바야흐로 메시야 도래의 기운
이 전국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요단강(* ) - 히브리어 '야라드'(* , 내려가다)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빨리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 이 강은 헤르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
리 바다를 경유(經由)한 다음 사해에 달하는 강이다. 요단의 수원(水源)에서 사해
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217km인데, 전장(全長)은 강의 굴곡과 경사 때문에 400km 이
상이 된다. 요단은 팔레스틴 최대의 강이며, 이스라엘 산업의 젓줄이 되는 중요한
강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와도 필연적인 깊은 관계를 갖게 되는 바, 아브라함과
롯의 분가(창 13:10)로부터 야곱의 밧단아람 피신(창 32:10),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
성(신 3:26-29), 사사시대에는 에홋(삿 3:26-30), 기드온(삿 7:24,25), 입다(삿
12:5,6)의 전장(戰場)으로, 엘리야의 승천(왕하 2:6-11), 엘리사의 나아만치유(왕하
5:1-14) 등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바로 이곳에서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것은 의
미 심장한 일이라 하겠다. 한편 요단강은 물살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
중한 여울에 자리잡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을 것이다.
세례를 받더니(* , 카이 에밥티존토) - 할례
(circumcision)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 의미
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 세례 행위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세례에 죄에 대
한 고백과 씻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부가된 것은
요한에게서 유래한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는 증언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세
례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예비 행위로서 의로운 행위, 곧 죄 고
백을 요구했다고 한다. 따라서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받음으로써 메시야의 오심을 준
비하자고 강력히 촉구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공개적으로 죄와 인연을 끊는 것이 세례
의 전제 조건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또한 쿰란(Qumran) 종파는 제의적 부정
(祭衣的 不淨)을 제거키 위해 정결례(淨潔禮)를 행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랍비들은
유대인이 아닌 한도내에서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여하튼 요한의 세례가
온몸을 물에 잠기게 하는 침례(浸禮)를 행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세례 의식
이 침수(浸水)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상징하는 '회개와 사죄',
그로말미암아 얻어지는 '새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요한은 계시 수준의 세례를 베풀
었고, 예수께서는 완성된 사역의 서례를 베푸셨다(26:28).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고 유대 민족을 새 생명의 길로 불러내고 있었다(Robertson).
=====3:7
바리새인(* , 파리사이온) -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바
리새파는 사두개파와 함께 마카비 독립 운동시대 초기(B.C. 167)에서 대제사장 요나단
(B.C. 159-143)치하 사이에 기원(起源)된 경건주의자들로 보여지며, '바리새'라는 이
름으로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은 요한 힐카너스 당시(B.C. 135-105)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이름은 히브리어 '파라쉬'(* )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구별하다'란 의미를 가
진다. 즉 바리새인은 '성별된 자'로서 율법과 구전(口傳)된 조상들의 모든 전통을 엄
격히 지키고 영혼 불멸, 부활과 내세, 천사의 존재 등을 신앙하며 배타성이 강한 일단
의 무리들을 가리킨다(행 23:8). 그러나 그들의 분리주의는 율법의 순수한 정신과 내
면적 경건을 무시하고 형식주의적인 위선과 의모를 중시하는 외식주의로 전락하여 그
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다(눅 11:43,44;12:1).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표리
부동(表裏不同)한 신앙으로 인하여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본래의 모습은 율법의 수호자(守護者)로 자처할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고 의
로운 이스라엘을 고대하며, 장차 도래할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
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온 것은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지대한
관심을 겉으로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현
장에 회개에는 유념치않고 외식의 옷만을 걸치고 거만하게 나타난 것이다. 한편
'많은'이라는 말에서 그들의 수(數)를 측정할수는 없겠지만 요세푸스(Josephus)에 따
르면 대헤롯이 죽을 때 바리새인들은 6천명 이상이나 되었다 한다.
사두개인(* , 사두카이온) - 이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는
(1) 알렉산더 대왕 당시의(B.C. 323) 사독이란 사람에게서 유래하였다 (2) 히브리어로
'체디크'(* ), 헬라어로 '아포 디카이오쉬네스'(*
), 즉 '의'라는 말에서 근거하였다(Epiphanius)는 견해가 있으나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왕상 1:38)이란 인물에게서 기원하
였다(Thayer, Carr)고 한다. 이들 중 후자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이들은 민
족주의자들로서 바리새파, 엣세네파와 함께 유대의 3대 종파의 하나이며 바리새인들과
는 적대적인 파당이었다. 또한 그들은 바리새파보다 숫적로 열세였지만 정치, 경제적
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특히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은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제사
장급의 고위층이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 이외에는 모든 전승을 부인하였고, 내세도,
부활도, 천사도, 심지어 하나님의 섭리도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유전(遺傳)의
위험은 피하였지만, 무익한 세상적인 열심과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 기준을 두는 오류
(mistake)에 빠져 들어갔다(Alford).
오는 것을(* , 엘코메누스)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을 한 부
류로 묵어 기록한 것은 본서에 5회(16:1, 6, 11, 12) 나타난다. 상호 적대적인 두 파
가 함께 왔다는 데에는 이의(異意)가 없으나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가능성에 대
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혤라어 본문에서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 새례 장소에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지 분명한 구별을 짓지 않고 있다. 그
러나 뒤이어 나오는 세례 요한의 질책(叱責)으로 보아 그들은 세례 모습을 관찰하러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Bruce). 실로 이 두파는 종교적 목적에서는 상호 적대적이었지
만 예수를 정치적으로 대적하는 목적에서는 연합하였다 (16:1;22:23, 34;행 4:1).
독사의 지식들아 - 이는 예언적 전통에 속한 선언이다(사 14:29;30:6). 요한은 광
야에서 흔히 블 수 있는 독사들을 보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간교한 뱀
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현대처럼 저속한 욕설이없던 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
였던 그들에게 저주받은 뱀(창 3:14)의 후예라고 욕한 것은 위선과 변절, 기만 등으로
길들여진 그들을 향한 신적 권위에 의거한 화(禍)의 선포였다. 예수께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해 같은 책망을 하신 적이 있다(23:33). 이 욕설은 '아브라함의 자손'
(9절)으로 자랑하던 그들에게 사단의 도구인 뱀의 후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사악
한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누가...피하라 하더냐 - 이 말은 '너희가 무슨 근거로 나는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의 질책성 질문이다. 엘리야로 예언된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
하기 위해 등장하여 등장하여 천국을 선포(2절)할 때 이미 '임박한 진노'가 암시되어
있었다(말 3:1, 2;4:1, 5). 그런데 세례 요한의 이 당황스런 질문이 지향하는 궁극적
인 목적은 단지 임박한 진노를 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자각케 하고 끝
내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데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
란 말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감정을 인격화한 표현으로서 이것은 하나의 정
태적(靜態的) 감정이 아니라 참으로 무서운 실제적이며 존재론적 극형(極刑)을 수반하
는 것이었다. 한편 '임박한 진노'는 이방인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
영접을 준비(회개)하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홀연히 다가오는 종말론적인 것이
다(살전 1:10). 물론 이 진노는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훼파
됨으로서 1차 성취되었지만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마지막 심판 때에 온전히 성취될 것
이다(계6:16, 17).
=====3: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한 참된 방법이 제시된다.
즉 사단이 그들에게 귀뜸해준 위선적 종교 행위와 같이 단지 형식적인 세례 행위로는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 운)외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참
된 회개(2절 참조)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란 말이다. 여기서 '합당한'(* ,
앝시오스)이란 단어는 '같은 분량의'란 뜻으로서 마음속의 실제 회개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행위(열매)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으로는 많은
의로운 일들(righteousness actions)을 행하였으나 그들의 내면은 결코 의롭지 않기
(not righteousness)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는 합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사람이
건 외견상 의로운 행동들을 할 수 있으나 그에 합당한 열매는 맺지못한다. 즉 내면이
청결한 사람만이 오직 의로운(올바른, 좋은) 행동들과 하나님께 기억될만한 열매들을
추수할 수 있는 것이다(Bruce). 한편 여기서는 열매가 단수(* , 칼폰)로
묘사되었는데 비해 본절과 평행 구절인 눅 3:8에는 복수(* , 칼푸스)
로 표현되었다. 이 차이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조화가 가능하다. 즉 회개에 합당
한 열매가 변화된 삶에 따른 여러 종류의 은혜로 여겨지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될 수
있으며(21:3), 그 열매들의 뿌리는 오직 하나라는 점에서 단수(갈 5:22)로 묘사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3:9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말라 -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일어난 공적신학
(功積神學, merit theology)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용
어는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의 공적이 그 후손에게 효력을 미
친다고 생각케 했다(Carson, Divine Sovereignty, pp.39ff). 유대인트리포(Trypho) 순
교자 저스틴(Justine)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육신을 따
라 다윗의 흩어진 자손들에게 저희가 죄인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패역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나라가 주어지리라는 생각에서 당신들도 그것을 준행하였고'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Alford). 랍비들의 교훈에도 '할례를 받은 자 중에 지옥에 갈 자는 아무도 없
다'라는 말이있다. 여기서 '생각지 말라'(* , 메 독세테)는 부정
명령법의 단호한 명령으로써 요한 자신과 그들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커다란 괴리
(estrangement)가 존재하고 있음을 명백히 나타낸다(Robertson). 그리고 '속으로'
(* , 레게인 엔 헤아우토이스)라는 표현은 그들
의 외적 상황(아브라함의 혈통)이 마음의 생각(구원받을 것임)으로 변한동작을 표
시하는데 사용된다(Beck). 그러나 구원의 참된 조건은 육적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영적 자손이 되는 데에 있는 것이다(롬4장). 이처럼 자신들의 종교적 특권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오해는 사실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을 탐
하는 가증한 위선적 범법 행위였다. (1) 하나님이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은 사실
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사 전개의 중심이요 도구로 삼기 위하신 것이었지 그들을 무
조건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2) 구약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바대로 그들이 선
민이 된 것은 결코 무슨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이 선민의 지위를 유지
하여 온 것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용서 덕택이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도 여느 인
간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타락과 교만의 역사였음을 보여 준다. (3) 따라서 그들이
선민의 혈통에 끼이게 된 것은 그저 감사할 조건일 따름이지 결코 아무때나 내세
우는 특권층 신분증명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돌들로도(* ,에크 톤 리돈투톤) - 이
것이 요한의 발 밑에 있던 요단 강변의 돌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고(Carr,
Virnect), '아브라함의 자손'과는 무관한 이방인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
(Chrysostom). 그런데 문맥상 이 견해들을 모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히브리
어나 아람어에서 '자손들'(banim)과 '돌들'(abanim)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풍유
(諷諭)가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은 '돌'처럼 여기는 아브
라함의 '자손'(유대인)들의 악한 교만 때문에 그들이 마찬가지로 '돌'처럼 여기는 이
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들어 약속의 '자손'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실로 하나님
은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창 2:7) 당신이 원하시기만하면 발 밑의 돌이나
아니면 유대인들의 발 밑의 돌처럼 천하게 여기는 이방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재창조
하실 수 있는 것이다(롬 4:17)여기서 요한은 이방인 역시 선민의 대열(교회)에 들어와
아브라함의 특권과, 품성을 소유할 수 있다는, 그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3:10
이미...놓였으니 - 메시야의 진노가 임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곧 시간적
여유가 더이상 없는 바로 이 시점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별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Broadus). 한편 세례 요한은 '열매 맺음'을 언급할 때에 '타작마당'(12절), '나무와
뿌리, 알곡과 쭉정이, 도끼질과 사르는 불' 등을 연상했을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심판을 도끼로 나무를 찍는 일에 비한 사실은 구약의 관
용적인 용어(사 10:33, 34;렘 46:22 등)에 준해서 심판을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
이다. 여하튼 이제 천국이 가까이 옴(2절)과 동시에 심판도 가까이 왔다. 이 천국과
심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역동적인 것으로서 천국을 선포하는 것은, 곧 심판의 도
래를 선언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다. 더욱이 세례 요한은 그
도끼가 줄기 혹은 가지에가 아니라 '뿌리에' 놓임으로 심판이 완전할 것임을 명백히
했다. '놓였으니'(* ,케이타이)는 현재 완료형으로 시행할 준비가 끝났음
을 암시한다. 더욱이 이 현재적 시상이 '찍어', '던지우리라'는 말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서 심판 준비가 다 되어 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불에 던지우리라 - 심판은 성경에서 곧잘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불로 묘사된다
(말 4:1;마 13:40;18:8, 9;막 9:43;요 15:6). 이 심판은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것이다(히 6:8).
=====3:11
나는...세례를 주거니와 -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란 말이 막 1:8이나 눅
3:16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마태가 요한을 예수보다 하위에 두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취한것으로 보려는 학자도 있으나(Hill), 막 1:4과 눅 3:3에서도 요한의 세례
를 회개의 세례라고한 사실과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에 이말은 단지 '나는 회개
와 관련한 세례를 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즉 그의 '물로'(* ,엔
휘다티) 세례를 베푸는 행위는 예수의 속죄사역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예수께서 베
푸신'성령과 불'의 세례가 없다면 물 속에 침수하는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선구자적인 사역에 불과한 것임
을 요한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 뒤에 오시는 이 - '내 뒤에'(* , 오피소 무)는 시간적 순서
로 '후에'란 의미이다. 요한은 이 표현에서 자신과 메시야의 사역적, 개인적 관계
를 서술한다. '오시는 이'(* , 호 엘코메노스)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에 대한 정치적인 색채를 피한 칭호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메시
야에 대한 잘 알려진 관용적 표현으로써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10)와 같은 구약
의 진술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즉 본 구절은 요한이 담대하게 사역함으로써 백성들에
게 자신이 그리스도로 인식되는 것을(눅 3:15) 스스로 불식시키기 위하여 자신은 단지
메시야의 전구(前驅)임을 명백히 밝힌 표현이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 '뒤에 오는 이'가 능력이 더 많고 귀하다는 것은 정상적
인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 덜 귀한 사람이나 제자가 뒤를 따르는 것이 상례
(常例)였기 때문이다(16:24). 특히 '능력있다'(* , 이스퀴로스)라는
말은 후천적인 지위나 능력이 아닌 자생적 권위와 능력이 있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적
용하고 있으며(렘 32:18;사 40:10;단 9:4), '능력이 많으시니'(*
,이스퀴로테로스)는 능력의 자의적(自意的)이고 인격적인 소유를 말한다.
더욱이 선지자보다 나은 자인 세례 요한이 노예들이나 하는 일인 신을 들고 다니는 일
조차 감당치못할 그러한 분은 누구인가.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의 지극한 겸손이지
만 과장된 겸손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오시는 이'는 바로 '말씀'(* ,
로고스)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신을 들기도 -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아주 천한 신분의 노예가 자기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고, 제자들이 스승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Edersheim). 그런데 요한은 자신이 그러한 천한 일 조차도 수행할 수 없는 비천한 존
재임을 극구 시인하고 있다.
감당치못하겠노라 - 이는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 영적으로 그 일을 수
행할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실로 요한의 이 고백은 예수의 충
만한 신성(神性)을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가능했다(사 6:5).
그는 성령과 불로...세례를 주싶 것이요 - 마태와 누가는 공히 '성령 세례'란 말에
'불'이란 단어를 추가하고 있다(눅 3:16). 그런데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제시
되고 있다. (1) 신자에 대한 구원 이후에 나타나는 불신자에의 심판이다. 즉 '성령'
(* , 프뉴마)을 '바람'으로 해석하여 신자들이 성령의 거룩한 바람에
불려가고 그나머지는 심판의 불에 태워진다는 이동적 의미의 해석이다(Bruce). (2) 성
령은 의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은사(恩賜)요, 불은 악인 위에 내리는 맹렬한 심판이다.
그러나 위의 견해들보다 가장 당한 것은 두 단어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
의 백성에 대한 성령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즉 원문에서 '...으로'라는 한 개의 전치
사인 '엔'(* )은 성령과 불을 모두 받음으로써 이 둘을 한 개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불'은 성령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연단하는 자의 불로(말 3:2, 3), 정결케 하
는 불로(사 6:6;슥 13:9;벧전 1:7), 또는 성령 강림의 상징으로(행 2:3) 나타나기
때문에 두 단어는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는 상이한 표현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물
세례가 눈에 보이는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신앙 고백적, 공식적 의
식이라면 성령 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씻음과 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유효한 인정의
결과이다. 한편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진 것으로서
(겔 36:25-27;39:29;욜 2:28) 신약 성경에만 사용되는 특별한 용어가 아니다.
=====3:12
손에 키틀 들고...타작 마당을 - 먼저 '키'는 풍력(風力)을 이용하여 곡식의 쭉정
이를 분리해 내는 일종의 소쿠리이다. 한편 '손에'(* , 토 프투온)
든 키는 10절의 '놓여있는' 도끼보다 더욱 강렬한 심판의 상징이다. 한국과 유사한 유
대 농촌을 연상시키는 이런 심판의 비유는 구약에서도 자주 보인다(4:1). 키를 '손에
든' 메시야는 '타작 마당'(시 1:4;사 5:24;단 2:35;호 13:3)으로 비유된 자신의 세상
에서 신자로 비유된 알곡과 불신자로 비유된 쭉정이를 철저히 나누실 것이며, 또한 그
각각을 심판 내지는 구원이라는 하나의 단위로('모아') 취급할 것이다. 한편 '곡간'은
중근동지방에서 주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하또는 토굴에 설치해 두었었다. 물
론 본문에서는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피난처, 곧 어떤 악한 세력에도 노출되지 않
는 안전한 처소로 이해할수 있다(시 71:7). 계속해서 '꺼지지 않는 불'은 어떤 한 시
점에 이르러 소멸되는 불이 아니라 어떠한 결핍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화력을 지닌 불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벌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종말론적인 심
판과(사 34:10;66:24;렘 7:20), 지옥을 의미하기도 한다(5:22). 현실에 반드시 존
재할 이 무서운 '불'에 알곡 아닌 모든 쭉정이를 남김없이 태워 자신의 타작 마당
을 정하게 하실것이다. 한편 '정하게 하사'(* , 디아카다리
에이)의 '디아'(* )와 '태우시리아라'(* ,카타카우세이)의
'카타'(* )는 완료형이며 종료(終了)의 뜻을 가지고 있어 악한 자를 멸절시키
는 최종 심판이 철저하고 완전한 것임을 강조한다.
=====3:13
이 때에(* , 토테) - 세례 요한의 등장(1절)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현재 접
속사를 사용하여 전절과 적접 연결된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이 절정에 달해 있을 바
로 그때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 이 장면의 평행 구절인 막 1:9에는 '예수
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본서 2:23의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라는 말과 연결시켜볼 때 예수께서 애굽에서 귀국하신 이래 계속해
서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고 계셨음을 알 수있다. 한편 요단강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톤'(* )이 제시된 것은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지로 잘 알려진 요단강
의 바로 그지점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행위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메시야적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으며(눅 2:49), 요한이 메시야를 위한 자신의 선구자적 소명을 자각하
고 있듯이(11절)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죄에
대해서 무관하신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가 이다. 이는
예수께서 개인적인 죄 의식을 느끼셨기 때문이(Bauer, Strauss) 아니고, 요한의 세례
를 보증하기 위한 것도(Kuinoel, Kern) 아니고, 그가 율볍에 복종했다는 것을 나타내
기 위한 것(Hoffmann, Krabbe, Osiander)도 아니다. 예수의 수세(受洗)의 참 뜻은 말
씀에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요(15절;신 6:25), 그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시기(사 53:4-6) 위함이다.
=====3:14
말려(* , 디에코뤼엔) -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저 한번 '말려
보는'(* , 코뤼오) 정도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집요하게 만류했음을 암시
한다. 요한은 예수의 종교적, 윤리적인 우월성과 순결한 자태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지극히 비천함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세례 요한
은 30년전 마리아가 엘리사벱을 방문했던 일(눅 1:39-45)그리고 예수가 자기의 출생
사건보다 더 놀라운 출생 사건을 통해 태어났으며, 어린아이로서는 경이로운 성경
지식을 가졌었다는 사실(눅 2:41-52)을 알고 있었올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직.간접
의 지식보다 자신 앞에 서신 예수를 직접 대면하고나서 그의 탁월한 성결성과 영적 심
화력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한은 성령의 하강(descent)하시는
신적 표적이 있기전까지는 아직 예수의 메시야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이 확
실하다. 그것은 요 1:31-32의 평행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 받는 것
을 만류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요한은 예수가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보고 그에게서 성령과 불로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이 견해는 마태복음의
주제가 성령이 아니고 의(義)란 점에서 동감하기 어렵다. 예수의 답변을 보더라도(15
절) '의'가 강조되고 있다. 더욱이 마태는 예수가 누구에게나 성령과 불의 세례를 주
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춰 기록하
고 있는것이다. 사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행 2장) 이후였기
때문에 마태는 성령의 세례가 주어진 것은 그가 기록하려는 시대보다 뒤의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11:2-12에서는 세례 준 후에도 요한이 예수를 완전히 '알지' 못
하였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2)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
라, 죄의 고백과 회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은 겸손한 인물로서 예수가
자기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는 알고 있었으나 예
수에게는 회개해야 할 죄릍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예수가 자기에게 세
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마태는 요한이 언제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깨달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태는 예수의 무죄함과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 세례 요한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
하튼 요한이 흠(欠)이 있는 자신으로서는 순결 무흠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었
다.
=====3:15
이제 허락하라 - 본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최초의 말씀이다. 여기서 '이제'(*
,알티)라는 말은 특별한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즉 예수는 요한의 반대(14절)가
원칙적으로 옳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제'(지금), 즉 구속사중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
는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가 종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보여야 했고, 그분이 스스로 벡성들과 같이 되었
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수세(受洗) 전부터
자신의 메시야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여하튼 메시야
이신 주님만이 이러한 명령을 세례 요한에게 할 수있었다. 실로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
를 베풂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자신을 복
종시킨 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 예수께서 '나'라는 1인칭 단수 명사를 쓰시지 않고 '우
리'라는 복수 형태를 취하신 것은 예수와 요한, 곧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모든 의를
이루어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이어지는 '이와 같이 하여'란 말은 단순
히 세례와 같은 어떤 절차를 강조하는 말이라기 보다 모든 의를 이루기위한 순종의 자
세, 또는 순종의 마음을 강조한 말이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 여기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1) 예수
의 세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의'를 성취하는 것이다(O. Cullmann). 이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사 53:13-53:12)에도 나타나듯이 예수가 당할 죽음의 세례를 예시한 것이
다. 그러나 '의'를 예수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2) 예수는 하나님의 명령('모든 의')을 모두 순종('이루다')해야 했으며 세례도 그
명령 중 하나이다. 이 견해는 세례가 '의'가 아니라 '회개와 죄의 고백'의 관계에 있
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는 부적당하다. 가장 적당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3)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뜻('모든 의')이며, 예수께서 요
한과 함께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하나
님의 뜻을 따라 그의 사적 생애를 마감하고 메시야 직무를 수행하는 공생애로 들어가
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Bruce, Erdman). 더욱이 예수의 수세의 주제는 모든
죄인을 대신한 고난이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적 메시지에 따르면 예수는 고난
받는 종(사 42:1-9;49:1-6;50:4-9;52:13-53:12)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
은 세례를 베푼 후 즉시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 불렀고, 예수 자신
도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세례로 표현했다(눅 12:50).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요한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예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무흠한 신성(神性)의 소유자이시지만, 그분 곧 메시야에게 합당한
세례를 베푼다. 이로써 예수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동역자의 선상에
서게 된다. 한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데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이는 모
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즉 공생애에 앞서 예수는 이
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직의 자격과 능력이 구비되었으나 인간적 수준에서 또 인
간들의 이해를 위해서도 교회의 선한 전승(inheritance)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실제
로 이런 예수의 자세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16절의 성령 강림과 17절의 천성(天聲)을
통해 예수가 모든 의를 갖추신 자임을 공표(公表)하셨다. (2) 이를 통해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도래했음과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했다(요 1:31-34).
(3) 회개, 세례가 필요없었던 예수는 수세를 통해 죄로 타락된 인간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켰고 우리를 대신하는 일을 시작하셨다(고후 5:21). (4)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
신 것은 그를 믿는 자에게 보이신 수세의 모범이었다.
=====3:16
예수께서...곧...올라오실세 - '곧'(* , 유뒤스)은 '올라오실세'
(* , 아네베)에 속하는 말로서 예수가 세례받은 후 곧바로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 뿐 아니라 성령의 증거도 역시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그런 점에서 이
말은 성령이 임하실 때에는 그가 물 속에 있지 않고 강둑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암시
한다. 한편 '물에서 올라 오실세'란 말을 근거로 예수의 침례설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례를 준다'는 뜻의 '배티조'(* )란 단어는 원래 '잠그다'의
의미뿐 아니라 '물로 무엇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도 지닌다(막 7:4;딛 3:5). 그리고
관용적으로 어떤 것에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접근을 통해 예
수의 수세를 침례 또는 세례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그 자체가 지니는 영적 의미와 거룩한 정신을 외면한 채 세례냐 침례냐의 어떤 외적
의식만을 절대적 규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세례의
참의미를 무시하는 형식주의적 독선이 될 수 있다. 한편 '올라 오실세'는 비둘기같이
'내려'(* , 에르코메논)란 말과 연결되어 마치 땅과 하늘이 화답
하는 것같은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하늘이 열리고(* , 아네와데산 아우토) - 이 구절
은 구약성경의 환상들(사 64:1;겔 1:1;행 7:56;계 4:1;19:11)을 연상시킨다. 고대 신
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표현은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께 대한 하나님의
비상(非常)하신 역사개입이지 예수의 한낱 환상이 아니다. 한편 어떤 사본들(에브라
임, 베자)에는 이 부분이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로 표현되어 하늘이 예수에게만 국한
되어 열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즉 다른 그 누구도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때 예수의 선지자였던 요한은 하늘
의 열림을 직접 목격했었을 것이다(Olshausen). 그리고 대중들도 하늘의 열림과 동시
에 하늘로서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
난 이후(창 3:24) 극히 부분적으로만 열렸던 하늘이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열려 하나의 새릅고 신비한 교제(交際)가 가능케 된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다.
비둘기같이(* ,호세이 페리스테란) - 여기 사용
된 직유법은 성령과 비둘기를 명백히 관련시킨다. 즉 이 말은 성령 강림의 방식이 비
둘기 같다는 뜻도 되고, 성령이 비둘기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는 뜻일수도 있다. 누가
복음에는 후자의 견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형체로'(*
, 소마티코 에이데이)가 첨가되어 있다. 한편 성령에 관하여 이와 같은 유추적
표현이 나오는 구약성경은 창 1:2 뿐이다. 탈무드(Talmud)에는 창1:2이 '하나님의 신
은 비둘기같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해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어느 합
리주의자는 비둘기 한마리가 예수의 머리 위에 날개치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
것이 환상적 장면이든 아니든 분명 성령이 신인(God-Man)이신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수
행하도록 돕기 위해 예수 위에 임하신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
시면서 성령의 적극적이고도 완전한 후원을 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웨스트
코트(Westcott)는 '예수의 참 인간으로써 합당한 은사인 성령을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디디셨다. 주관적으로 볼 때 신인을 연합시킨 성령이 육화(肉化)하신 말씀
(예수) 위에 임하셨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공
개적으로 계시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비
둘기는 성령의 교통하는 힘의 온유(11:29)와 순결(1:16)과 생명의 충만(창 1:2;요
7:37-39)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은 예수의 품성과 사역의 특질과 좋은 비교가 되고있
다.
자기 위에 임하심 - 예수께 성령이 임하심은 시 45:7에 예언된 관유(灌油,기름부
음)의 성취였다. 실로 율법에 있어서도 흠 잡을 것이 없는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한 나
이 30세(민 4:3) 때에 공개적 절차를 통해 공식적인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
심으로 우리의 선지자, 대제사장, 왕으로서 취임하셨던 것이다(Luther). 여기에서 물
과 불과 성령의 삼각 세례가 완성되었다(Alford).
=====3:17
헬라어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감탄사 '보라'(* ,
이두)가 문두에 언급되어 있다. 이 '이두'는 어떤 사건의 중요성.급작성을 강조하거나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본문에서는 위의 두기능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하늘로서 소리 - 본문의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에 관해 어떤 학자들은 랍비 문
학과 연관시켜 해석하려 한다. 즉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
였던 영(靈)과 예언자가 잠잠해진 400년동안의 침묵기에 하나님의 영의 소리를 반영
해 전달해 주는 수단을 통털어 히브리어로 '바트콜'(* )이라 불렀는데,
번역하면 '소리의 딸'이란 의미이다. 물론 그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본문을 단순한 '바트 콜', 즉
지금까지 있어왔던 평범한 하늘의 계시정도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
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더 강력하다. 실로 이 '소리'(* , 포네)는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침묵을 깨뜨리시고 다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계시이다. 결국 이것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분명한
징조요, 그것을 공적으로 입증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소리였던 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이 말은 소위 '고난받는 종의 노
래'라 일컬어지는 사 42:1을 반영하고 있으며, '너는 내 아들이라'고 노래한 시 2:7의
변형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들려진 하늘의 소리는,
곧 그를'고난받는 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이는 내 아들이요'라는 말은
예수 주위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도 하늘의 증거를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
다. 아마도 많은 무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태의 주관
심사가 아니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내 아들'로 부르심으로 2:15을 확인하고
있고 다음 장에서 사단에 의해 즉시 사용되게된다(4:3, 6). 이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아들로 공적 인준(認准)을 받고 신격(神格)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라
는 사실이 확증된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 성령, 성삼위의 거룩한 해후(邂逅)가 이루
어지며, 성부의 음성은 변화산상(17:5)에서와 수난기간(요 12:28)에 다시 들린다. 한
편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성령 강림이 있은 후 위와같은 하나
님의 공적인 인준이 있기 전까지 육체에 속한 한 자연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인준으로 신적 본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십자가 상에서 성부 하나님의
버리심을 고백(27:46)할 때에 그 신성이 다시 벗겨졌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요일
4:2,3). 그러나 이는 예수의 영원 현존성과 영원하신 신성을 간과한 이단적 견해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아들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령을 반영한 용어인 '사
랑하는'(* ,아가페토스)이란 말은 질적인 측면을 강조한 '유일한 사
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가음에 나오는 '기뻐하는'(* , 유도
케사)이 초시간적인 부정과거인 점으로 보아 이 '사랑하는'이란 용어는 심정적언 측면
뿐 아니라 '선택'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직역하면 '내가 그를 선택함으로 인
해 기뻬하였던 자'이다. 이는 메시야를 시간이 있기 전, 곧 영원 전에 선택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영원성을 강력히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요단강에
성육신(Incarnation)하여 우뚝 서 계신 아들의 영원한 신적 선택의 위대한 역사적 사
실이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 것이다. 정녕 아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아버
지께서는 감추어진 방법으로 그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고, 백성들의 대표자이며, 고난받는 종으로 동시에 나타내 보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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