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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태복음 5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1|조회수29,312 목록 댓글 0


마태복음 제 5장
=====5:1
무리를 보시고 - '무리들'은 4:23-25에 언급된 '허다한 무리'를 가리킨다. 예수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이키신다. 이때의 예수의 사역은 이미 절
정에 달해 있었지만 사역의 내용은 단편적인 교훈을 포함한 병고침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 복음'(4:23)의 세밀한 내용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이다.
산에 올라가 - 마 5-7장을 '산상 수훈'이라고 일컫게 한 구절이다. 누가복음에는
이 장소가 평지(눅 6:17)로 되어 있어 '평지 수훈'이라 불리우는 바 이러한 차이에 의
하여 두 설교를 완전히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눅 6:17 주석, 강해
참조). '산'(* , 토 오로스)과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단순
히 '산악지역', '산이 많은 지방'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평지'가 산아래 평원(平
原)이 아니라 산에 있는 평평한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전승은 가버
나움과 디베랴 사이의 한 언덕을 산상 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의 산으로 전하
고 있으며 갈릴리에 내려오는 한 전설은 그 산 이름을 핫틴산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한편 고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일부러 산에 올라
가셨으며 그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모세와 새로운 계명을 가르치는 자신과의 유
사함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산을 흔히'신약의 시내
산'이라 일컫기도 한다(Carr and Delitsch). 실로 예수의 메시지는 율법의 완성으로
서의 복음이었고 예수께서는 모세보다 위대하신 새로운 모세의 실체이셨던 것이다.
앉으시니 - 유대의 랍비들이나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교수 태도이다
(13:2;23:2;24:3; 눅 4:20). 예수께서는 전도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친근하면서도
위엄있는 한 스승의 모습을 보인다.
제자들이 - (* , 호이 마데타이). 선택된 12제자들만 가리
키는말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동안 예수를 추종하며 교제하던 무리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Alford). 마태는 의도적으로 10:1 이전까지는 12제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
다. 또한 이 말은 완전히 성장한 신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도 이 말이 사용되기 때문이다(11:2). 누가복음의 평행구절에도
'제자의 허다한 무리'라는 표현과 동시에 '많은 백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눅
6:17). 이는 4:25 내용과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특별히 당
신을 진실히 따르기로 소원하는 무리들을 따로 불러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나아온지라 -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시내산에서와 갈이'(출19:12) 백성들을 접
근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일은 이 산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와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6)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계명을 듣고 지
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5:2
입을 열어 - 그리스도의 말씀의 엄숙한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13:35; 행
8:35;10:34)으로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였다(욥 3:1;33:2; 단 10:16). 이 표현은 주
로 격식이 갖춰진 상황이나 계시 전달의 장면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입이 열렸으
니 '떡으로만 살던'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4:4).
가르쳐 - (* , 에디다스켄). 이것은 미완료 과거형이며 동작의
시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예수의 사
역에는 가르침과 전파함과 치료함이 포함되어 있었다(4:23). 본문의 예수께서 행하신
'가르침'(* , 디다스코)의 최종 메시지는 천국'복음'(*
, 유앙겔리온;4:23)이었으며, 이 '천국 복음'이야말로 산상 수훈의 중심
주제인 것이다.

=====5:3
심령이 가난한 자(* , 호이 프토코
이 토 프뉴마티).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이 구절은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
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헬라어 '프토코스'(*
, 가난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중 가장 중요한 '아나임'
(* , 가난한 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
(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시 37:14;40:17;69:29; 잠 16:19). 이
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
들과 연관되어 있다(사 57:15;66:2). 더욱이 사 61:1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
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눅 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
신의 영적인 파탄(破綻)을 솔직이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시 69:29;70:5;74:21; 사
61:1; 습 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
에 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시 37:14;86:14), 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이다(시 34:6, 18;51:17; 사 66:2).
복이 있나니(* , 마카리오스) -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
리어 '아쉬레'(* )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
으나 여기서는 주.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축복받는 상태를 묘사한다. 이 단어의 배후
에는 모든 불행한 환경(예를들면 '가난', '애통', '주리고 목마름', '핍박받음'등)의
원천(origin)인 죄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불행을 완전하고도 효과적으로 치유(治癒)
할수있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
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
,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나타낸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 준
다. 천국은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메시야의 통치를 향유하고 그가
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이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
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다(Alford). 그러나 천
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
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present)이다. 한편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
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
되어 있어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
백하게 암시하고 있다(4:17;8:29;12:28).

=====5:4
애통하는 자(* , 호이 펜둔테스) - 앞 구절과 마찬
가지로 사 61:1의 반영이다. 70인역(LXX)에서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Mc Neile). 심령
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
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
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
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다.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
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들의 개
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
렸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신다(4:17).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
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온다. 여기서 '위로'(*
, 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 )와 '부른다'(* )의 합성어
이다. 따라서 이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주(內住)하시고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
로'(눅 2:25)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 14:16)가 되기 위함
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
이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 7:17;21:4)가 될 것이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
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이다.

=====5:5
온유한 자(* , 호이 프라 에이스) - '온유한'(* )
이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
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
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온유'란 외형적
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
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
(11:29; 약 3:13).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
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
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
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한편, 본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
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
(Wellhausen)하거나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야
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인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땅'(* , 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 지역(4:15;9:26,
31;11:24;27:45), 하늘과 땅 (천지) (5:18, 35), 하늘과구별되는 장소(6:10;9:6), 지
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
되었다. 본문의 땅은 시 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여기에서 땅을 은유적
으로만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
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
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계 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
이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시 37:1,
11, 22, 34).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
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17).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심령이 가난함'(3절), '온유함'(5절) 그리고 '애통함'(4
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신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
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
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
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시 42:2;63:1;107:9; 암 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
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 3:3, 5)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Alford).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
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
의'(稱義)라고 주장한다(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
, 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반대한다(Przybylski, pp.96-98).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
로움(Hill, Greek Words pp.127 ff;S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
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Ridderbos, pp. 190
ff).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
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
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
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이다(벧후 3:13)
배부를 것임이요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
)는 푸른 잔디(막 6:39)를 뜻하는 '코르토스 클로로스'(*
)와 마찬가지로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
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
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
미이다(요 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平安)함이 있으며,
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5:7
긍휼히 여기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엘레에모네스'(*
)는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 )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특히
70인역에서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 )와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 )의 변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
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발
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감정이나 성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
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그리
고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긍휼히 여길 대상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며, 성도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즉 성도에게만이 이 세상의 회복
자로서의 자질이 주어져 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죄악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든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이다(클레멘트 1서
13:2).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causal
ground)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occasional ground)계기
가 된다는 의미이다(6:14, 15). 실로 긍휼은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
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 세상의 죄악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또한 본절은 긍휼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
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진다(약 2:13).

=====5:8
마음이 청결한 자 -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 )란 그리이스인들
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 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
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이 용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레브'(* )나 '레
바브'(* )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1) 문자적로 '가
슴', (2)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삼상 12:12)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정.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
키는데 사용되었다(7:21; 눅 21:14; 요 16:6 등). 또한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
(* )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
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
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
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
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의 교제를 돈독(敦篤)히 하는
자를 의미한다(히 10:22-25 참조).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볼 것임이요'의 헬라어 '와손타이'(* )
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 )의 미래형이다. 특히 '호라오'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인 '블레포'(* )와 '눈여겨 보다'라는 뜻인 '데아오마이'(*
)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라
는 뜻이다. 한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 19:21;33:20;
삿 6:22 등). 이는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을을 의미했다. 그러
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이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 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
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5:9
화평케 하는자 -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
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 에이레니코스) 사람이 아니라 '화평
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한다. '화평'(* , 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 )과 견줄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
인 평화를 의미한다(사 54:10;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
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실
로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다(사 9:6, 7; 눅 2:14; 요 14:27). 화평케 하는 것은 단
순히 분쟁 등을 완화(緩和)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엡 2:15-17; 골 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
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신 14:1; 호 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
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
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inheritor)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Broadus).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Morison).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
본절의 설명구에 해당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없이 고
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
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
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
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
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이다(요
15:18-25; 행 14:22; 벧전 4:13, 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딤후 3:12).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
이 받는 복과 같은 것이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
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
라'는 것이다. 즉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
들의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
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5:11
나를 인하여...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이 구절에서는 10절의 핍박을 모욕과 박해
와 비방(slander)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키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증오도 포함하고 있
다(눅 6:22, 23).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라는 것이 핍박의 이유였으나 여기에서
예수는 '나를 인하여'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삶
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동시에 제자들과 예수
의 행하신 의를 동일시함으로써, 의로 가득차지 않고는 예수께 충성을 고백할 수없다
는 사실을 밝혀 준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기독론적인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 왜
냐하면 제자들과 비교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제자
들은 예수에 대한 충성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
지자에 비견(比肩)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하나
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상이 큼이라 - 여기서 먼저 '기뻐하다'(* , 카
이로)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좋은 감정, 벅찬 기쁨의 상태를 의미하며, '즐거워하
다'(* , 아갈리아오)란 외부로 넘치는 기쁨, 억제할 수 없는 역동적
인 환희 등의 뜻으로서 '카이로'보다는 좀더 점층된 기쁨의 상태를 암시한다(눅
1:47;10:21; 요 5:35).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핍박 중에 있더라도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그들의 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
러면 그들의 받을 '상'(* , 미스도스)이란 무엇일까? 혹자는 이에 대해
'합당한 보상이란 단순히 그것을 목표로 하는 행동에 항상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
다. 오히려 결국에는 그 행동 자체가 합당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Lewis)고 한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소금'(* , 할라스)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
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 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
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
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
(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
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는 혹지(Pliny)의 말처
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
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
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
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
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
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
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
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
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쩌(Schweizer)가 지적한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
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것이 '노새의 태(
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
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
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
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여야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Tasker).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
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
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
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
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
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
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
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
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
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비취느리라 -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에 다같이 나오는 기사이
다. 눅 8:16에는 씨뿌리는 비유 다음에 오고, 막 4:21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눅
11:33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이 기사는 문자적으로 유사해
서 그 중 어느 것도 독립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 누가의 구절(눅 8:16)은 서로간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중 특히 눅 11:33은 마태의 것을 닮았고, 막 4:21의 기
사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련의 이러한 일치성은 본문의 확신성을 더해주는 것이
다. 그런데 굳이 선택한다면 다른 구절에 비해 눅 11:33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
(The Pulpit Commentary).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 , 모디오스)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 그릇으로 보통 8.25리터의 양을 담을 수 있는 용기로 알려졌
다. 혹자는 이 말의 용도에 대해 등을 마루에 두고 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하
려고 곡식을 재는 용기로 그것을 덮어두면 얼마동안은 효과가 있다(Tholuck)고 한다.
그리고 이에 비해 '등경'은 복음서에 4회, 그 외에 8회 정도 등장하는데, 그 대부분은
촛대가 아니라 '등불 받침대'를 뜻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옥 구조상 이 등경은 방
하나에 한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등경이 빛을 멀리 비치게 하는데 큰 역할
을 하지만, 말은 빛을 비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말 아래 둔
다는 것은 빛을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형식주의, 금욕주의, 전통주
의의 제한성(制限性)에 연결된다(Lange). 그리고 등경은 성도와 교회의 개방적 특성
과 연결된다(계 1:20). 실로 복음사역자 들은 마치 산 꼭대기에 선(사2:2) 자처럼 모
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행실과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를 널리 전해야 한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을...영광을 돌리게 하라 - 여기에서 예수는 이 비유를 더 심화시키
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이다. 즉 그들
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의(義)를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한다. 혹시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10-12절).
그러나 박해를 두려워해서 빛을 감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를 영화롭
게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이 빛을 비추고 아버지
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理由)이다(고후 4:6; 벧젠
2:12). 또한 '증거한다'는 말에는 말 뿐 아니라 행동도 포함되는 것이다. 실로 선행
이 따르지 않는 선한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Stier). 이같이 천국의 규범
(3-12절)은 천국의 상속자들의 삶 속에서 작용하여 천국에 대한 증거를 만들어 낸다
(13-16절). '소금'(13절)이 부패를 늦추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제자들이 세상을 따
라 가거나 타협하게 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빛'(14-16절)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적극적인 면을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제자들이 세상에서 물러
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본회퍼(Bonhoeffer)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
다'고 하였다.

=====5:17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 여기서 먼저 '율법'이란 구약성경 전체를 뜻
하기도 하고 축약된 의미로서 모세 오경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선지자'는 구약
역사서들로 구성된 초기 선지서들과 이사야 이후의 후기 선지서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의미보다 오히려 예수 당시 유대인이 신약이
기술되기 전에 구약을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을 사용한 것
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7:12;11:13; 눅 16:16; 요 1:45; 행
13:15; 롬 3:21). 한편 '폐하다'(* , 카탈뤼사이)란 건축물의
파괴와 연관된 표현으로서(24:2;26:61;27:40) 여기서는 어떤 규범이나 제도의 완전한
개편 또는 폐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예수를 비난했던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
로가 율법의 손상자와 파괴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두개인들
은 선지서들을, 고지식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극단적인 엣세네파는 율법과 선지서들
을 부분적으로 폐기함으로써 결국 율법의 파괴자가 된 것이다. 이에 비해 그들의 비
난 대상이었던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의 완전한 성취자였던 것이다(Lange). 한편
'온 줄로'에서 '왔다'는 말은 예언자들에게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11:18, 19), 적
어도 예수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있다(Maier).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 이 부분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은 율법과
선지자가 예수를 지시하고 있다고 볼 때 예수가 그것들을 완전케 하는 자이고, 동시에
예수가 바로 그 성취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버리다'와 '행
하다'간의 대조가 아니라 '폐(廢)하다'와 '완전(完全)케하다'인 것이다. 그리고 마
태복음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율법에 대해 예수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가 아니
라 예수에 대해 율법이 어떻게 관계하는가인 것이다(Banks)' 한편 본문에 제시된 바
'완전케 하다'(* , 플레로오)는 말은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으로 여기
서는 '그 깊은 뜻과 충분한 의미를 드러낸다', '모두 실행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본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의 큰 목적을 제시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는
율법이 목적, 의도하는 그 온전한 뜻과 속깊은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NcNeile). 이러한 사실은 당신의 권위로써 그 율법의 각 조항을 문자적
해석 이상의 궁극적 목적과 의도를 밝히신 21-48절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실로 구
약성경이 가지는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권위는 구약성경의 풍성한 성취가 되시는 예수
의 품격과 가르침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의도하는 바는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거나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약이 지시해 준 자기 자신의 권
위에 입각하여 구약성경의 율법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이 갖는 기독론적인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이 구약이 지향
하는 종말론적인 목표(目標)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구약성경에 대하여
유일하게 권위있는 해석자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를 통해서만 구약성경의
근거를 얻고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는 초점은 바로
예수였으니, 바로 이 점이 바울과 마태가 모두 의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인 해석을 통하여 구약성경에 접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약 해석
의 기초를 놓은 분이 예수라는 점이 본 복음서에 의하여 분명해지는 것이다(Carson).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 가르 레
고 휘민) - '믿을 수 있는'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 말이
'틀림없이', '진실로'라는 부사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문장의 마지막에서 그 문장이
진실이거나 또는 진실임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의미로 사용된 용례가 자
주 보인다(기도에서 마지막에 '아멘'<amen>으로 화답하는 경우). 그리고 이 말로써
문장이 시작되기도 한다(렘 28:6; 계 7:12;19:4;22:20). 또는 '아멘'이 응답으로 쓰
이는 경우도 있다(신 27:15-26; 고전 14:16; 계 5:14). 어쨌든 예수께서 하신 '진실
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말씀은 당신의 절대적 권위에 입각해 어떤 한 진리를
단정적으로 선언하실 때 흔히 사용하셨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 이는 '세상의 종말까지는'으로 번역될수 있는 말로서 예
수의 재림을 지향한 표현이다. 진정 세상 종말까지는 율법과 선지자는 폐해질수 없다
는 것이 예수의 단정적 선언인 것이다.
일점 일획(一點 一劃)(* , 이오타 헨
에 미아 케라이아). '일점'이란 히브리어 문자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오드'(*
)를 가리키며 헬라어로는 '이오타'(* )정도의 가장 작은 문자를 뜻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획', 즉 '케라이아'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
이 있다. 일획에 대하여 슈바츠(G. Schwaz)는 히브리어 문자 '와우'(* )라고 하
고, 휠슨(Filson)과 렌스키(Lenski), 알렌(Allen), 잔(Zahn)은 비슷한 히브리어 문자
들(* ; / ; / ; )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작은 획이라고 이해
한다. 그리고 타스커(Tasker)와 슈니빈트(Schniewind)와 슈바이처(Schweizer)처럼 순
수히 장식적인 획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락스(Lachs)는 가장 작은
글자의 가장 작은 부분을 가리키기 위하여 '일점'과 연결지어서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
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간에 예수는 여기에서 구약성경이 '붓 한번 살짝 움직인 정
도'의 아주 조그마한 내용조차도 모두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같
은 예수의 생각이 구약성경에 대한 최상의 견해이다.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이는 분명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새 세
상에서까지도 율법의 권위와 그 효력성은 계속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24:35; 막 13:31). 그러나 이것으로써 이 구절의 의문점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문자적 측면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셨고(12:8), 이혼(divorce)에 관
한 모세의 규범을 거부하셨으며(5:31, 32), 특히 음식에 관한 규정을 무효화시키셨었
다(15:11). 그렇다면 땅이 지속되는 한 율법의 한 획도, 나아가 경건한 필사자(筆寫
者)가 덧붙인 수식어 중 어느 하나까지도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마태는 어떠한 방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마태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율법의 어느 것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엄격한 문자적 보존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율법이 의도하는
것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성취되며, 또한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으
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진정 그것
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에서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를 계속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서 이루어질 것이다.

=====5:19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지극히 작다 일컬음 -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큰 자 사이를 대조(對照)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구절은 천국
안에도 등급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11:11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
곳에서는 '극히 작은자'를 가리키는 말이 본절에 사용된 단어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18:1-4). 한편 본 구절에서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
나라도 버리는'자라는 표현은 자신들이 그릇된 판단에 의해 율법을 중요한 것과 중요
치 않은 것으로 나누어 놓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관에 일침을 가하는 표현이다
(Meyer, Westein).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위와 같이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
리는 자가 천국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인정되거나 중요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천국에서 특권을
누리는데 등급(grade)이 있다거나 천국에서도 수치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관복음
서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20:20-28; 눅 12:47, 48). 이런 구분은 그 사람이'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신실히 지켰는가에 따라 이루어질 뿐 아니라
그가 얼마나 열심히 타인의 올바른 삶을 위해 계명을 가르쳤는가 하는 점도 기준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계명'이란 모든 율법과 선지자로 지칭되는 구약성경의 계명을 가리
킨다. 이같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가 오심으로써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계명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실천되어야 한다(율
법을 구분하는데 대하여는 22:36;23:23 주석 참조).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 갖는 본질
적인 성격은 이미 17, 18절에서 규정 되었다. 율법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미리 지
시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길
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의 계시를 성취한 것이므로 천국에서 등급이
정해지는 문제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따르고 실천(實踐)했는가에 의하여 결정
된다. 따라서 구약이 미리 지시해 주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
(Carson).

=====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낫지 못하면 - 은혜의 시대를 여시는 예수의
가르침은 관대하고 편리하게 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온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한다
(48절). 따라서 본문의 요구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에게서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음
을 요구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보다 많은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
는 것이 아니라(마태는 근본적으로 유일한 계명,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
중 계명으로 축소시켰다) 그들이 새로운 의 즉, 훨씬 더 포괄적인 의를 이행해야 한다
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바리새인과 서기관(2:4;3:7 주석 참조)은 이스라엘에서는 가
장 엄격한 종교 집단의 무리들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Hill). 그들이
만들어 놓은 복잡하고 수많은 규정때문에 도덕적인 사회가 이뤄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
나 그로 인해 율법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실추되어 성경에서 요구한 성결이라는 철저한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는 바라새인들의 의가
부인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예수의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義)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보다 한 단계, 즉 결정적인 단계를
더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에 철저히 순종했는데, 그들은 모
든 세금 이외에도 정확하게 수입의 10%를 헌금했으며, 하나님의 안식일과 율법의 가르
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가장 잔인한 순교(martyrdom)를 당했으며, 또 자신들의 삶에
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들의 삶이 진정 인간
적인 삶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로는 진정 어떤 식으로도 비웃음
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로부터는 그들보다 더 풍성하고 우수한 의
(義)가 기대되었다. 즉 제자들은 형식적 삶과 선행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욱 우월한 하나님께 대한 내면적인 열정과 사랑과 경건이 요구되었
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義)의 결과로서 오직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참으로 인
간적 욕망을 탈피한 하나님 중심적인 의(義)가 요청되었다. 실로 그들은 사 61:3이
말하고 있는 '의의 나무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그들 안
에서 세력이되며 그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 들어오게 될것이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이말은 천국이 상대적으로 남보다 더 나은 자가 들어
가는 곳이 아니며 또한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정신(사랑)을 지키는 자,
율법을 지적으로 잘 아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나가는 자가 들어갈 곳임
을 강조하고 있다.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헬라어 본문은 '옛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된 것'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되어 있다'라는 드문 표현은 신약성경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즉 거의 독점적으로 성경 인용의 서두로 사용된다. 따라서 '옛 사람
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율법을 받은 '시내 산 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편 살인한 자가 재판(裁判)을 받는다는 것은 십계명 중에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세 율법에는 자주 이야기되어 있다(창 9:6; 출 21:12; 레 24:17; 민 35:16).
따라서 예수 당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율법 속에 살인을 금지하고
살인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살
인은 아무 생명이나 해하는 것이 모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또 살인을 금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상의 명령이었을 수도 있다(창 9:6). 그리고 '심판', 즉 '크리시스'(*
)란 마을마다 있었던 재판소(신 16:18; 대하 19:5;Jos, Antig. IV,
214;Wars II, 570-71)나 범죄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설립된 23인 평의회에서 진행되는
사법절차를 가리키는 것이다.
너희가 들었으나 - 예수께서는 율법에 깊은 이해가 있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에
게 말씀하실 때는 흔히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12:3, 5;19:5;21:16, 42)는 말로써
당신의 뜻을 전하시곤 하셨다. 본문의 이 '들음'에의 환기는 그 당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의 대부분이 종교적 특권에서 제외된 평범한 백성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 일반 평민들은 회당에서 율법 교사들이 들려주고 가르쳐 주는 율법을 통해 하나
님의 뜻을 간접 전달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요 12:34).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성취자로서의 신적
권위를 1인칭 주어 '나'(* , 에고)를 통해 역설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단순
한 문자적, 의식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넘어서서 그것의 궁극적, 본질적 차원에서의 율
법을 설명하시고 계신 것이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예수는 살인의 근원은 분노(忿怒)이
며, 분노도 원리상으로는 살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가르침을 율법이 실제로 지향하는
바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살인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더
나은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형제에 대하여 분노
하는 사람은 심판(* , 크리시스;21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
의 어떤 법정에서도 내면적인 분노의 사건을 다루지는 않기 때문에"(Scott)그 심판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심판이 분명하다. 한편 여기서
형제(* , 아델포스)란 남자 형제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마태복
음 에서는 이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명히 혈연상의 형제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언제나 예수가 사용한 말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좁은 의미
로 사용된 경우는 기자인 마태가 사용한 경우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서로를 '형제'
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습관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예수는 하나님
을 아버지로 가르치면서(6:9) 그러한 가르침의 한 부분으로 '형제'라는 말을 사용하였
을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형제간에는 분노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
서 심판이 점점 엄중(嚴重)해진다는 것을 표현해 주는 수사법은 찾아볼 수 없다
(Hendriksen).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범죄에도 등급이 나누어져서 점점 심
한 범죄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형제에게 노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와
형제를 '라가'라고 욕하는 자가 분명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한편 형제를 모욕하면
'(하나님의)법정' (* , '쉬네드리온'은 '산헤드린'을 뜻할 수도
있고<개역 성경>, 법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에 서게될 뿐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
게 되는 것이다(Carson).
지옥불(* , 게엔나 투 퓌로스). 문자적으로는
'불붙은 게엔나'라는 이 표현은 히브리어 '게힌놈'(* , 힌놈의 골짜기)에
서 나온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이방신 몰록
(Moloch)과 또한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몰록 제사 의식과 관련된 장소였다(왕하
23:10; 대하 28:3;33:6; 렘 7:31; 겔 16:20;23:37). 이러한 의식은 하나님이 금지한
것이었다(레 18:21). 요시야 왕이 그러한 의식을 폐지할 때에 그는 이 골짜기를 오물
과 죄인의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만들어서 더러운 곳이 되게 하였다(왕하 23:10). 후
기 전승에 따르면 1세기에도 이 골짜기는 쓰레기를 쌓아두는 곳이었고 연기와 불이 짝
찬 곳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꼴짜기는 종말론적인 심판이 행해지는 장소를 상징
하게 되었다. 지옥과 음부(11:23;16:18)는 각각 영원한 지옥과 심판 이전의 상태에
있는 죽은 자들의 거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이 가능
한 구절은 거의 없다. 두 단어가 모두 의미가 같고 '지옥'을 뜻하는 경우가 더 일반
적이다(Livingstone, Jeremias).
라가(* , 라카) - 이 단어는 '텅빈(무가치한)', '우둔한', '어리석은',
'멍청한'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레카'(* )를 음역한 것으로서 상대의 인격을
매우 경멸할때 사용하던 일종의 욕이다.
미련한 놈(* , 모레) -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의 모욕이다. 헬라인에게
는 '모레'가 '어리석다'는 의미를 갖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헬라어가
히브리어 '모레'(* )를 연상시키게 하는데, 이 말은 도덕적 배신, 반란, 악
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시 78:8<70인역 77:8>; 렘 5:23). 한편 혹자는(Bruce)는 이 양
자의 차이에 대해 '라카'는 '어리석은 놈'이라는 뜻으로서 그 지적 수준이 아주 저급
한 것을 꼬집는 말이며, '미련한 놈'은 '추악(醜惡)한 녀석'이라는 뜻으로서 그 인격
과 마음이 매우 천박한 상태를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두 용어 모두 상대
방의 인격에 참혹한 상처를 안기는 욕임에 틀림없다

=====5:23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생각나거든 - 본문과 같은 내용의 일들은 실제 생활에서
끝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물론 이 내용의 배경은 유대인의 예배 의식에서 연
유한 것(예물은 희생 제물로 짐승을 사용하며, 제단은 성전안 마당에 위치함)이지만
그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존전에서(in presence) 엄숙하게 예배드리다가 양심에 거스
리는 죄나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자기의 그릇된 행위가 기억난다면(막 11:25) 그리
스도의 제자들은 지체없이 화해의 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 모든 것을
익히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신변을 아무런 편견
없이 살피는 그 자신의 정직한 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형제 중 한 사람이 까닭없
이 어떤 형제를 비난하며 까닭없이 도리에 어긋나게 화를 낼 가능성도 있다. 그 때는
죄책이 비난 당한 당사자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있을 것이다(Lenski). 어쨌든 하나님
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등한히 하는 자의 예배와 헌신과 헌물은 절대 받으시지 않는
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사 1:10-17). 따라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힘쓸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에도 진력(盡
力)해야 할것이다.

=====5:24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예물을 드리라 - '먼저 화목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톤 디알라게디'(* )는 제 2부
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으로서 '화목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즉 이 말은 적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단어로서 '솔선하여 화해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동사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이후에, 상호 양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디알라게디'보
다 자주 사용되는 '카탈라쏘'(* )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Lightfoot). 한편 상호간의 화해란 측면이 강조되는 이유는 '카
타'(* )가 아닌 '디아'(* , '둘', '둘 사이')가 접두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Rovertson). 실로 제의적인것 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우위에 두는 것
(9:13;12:7;23:25, 26)은 마태의 기록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이며 그 경향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된다(막 7:15, 16). 여하튼 본문의 '먼저'라는 말은 '화목하고'
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의 가치나
중요성을 묻기 보다는 형제와의 화해가 얼마나 더 중요하며 가치 있는 일인가를 강조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위한 따뜻한 사
랑과, 격의없는 화해와, 생명을 내놓을 정도의 봉사 등일 것이다(25:40). 결국 구절
에서 강조하는 바는 예배가 이웃들과의 관계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가 예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terms)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Schweizer).

=====5:25
너를 송사하는 자...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본 비유에서 채무자는 전례(前例)에
따라 그의 형제에게 악을 행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채무자는 채무를
모두 변제할 때까지는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많은 채권자들은 이렇게 해결짓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눅 12:57-59) 이 상황을 응용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원래는 종말론적인 말 많은 학자들이 내린 결론이다. 그런 관계로 다음과 같
은 말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만일 시비가 있어 법정에 갈 때에 법정 밖에
서 문제를 청산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더 이상의 화해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오직 지옥의 고난에 직면하게 될것이다.' 한편 '길에 있을 때
에'라는 말은 누가의 기록에 근거해 볼 때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도중의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길'은 마지막 기회'의 장(場)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급히 사화하는 것'뿐이다. 실로 인간은 어떤 일을 쉽사리 미루어
버리는 게으른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 이상 더 이상 지체치 말아야 한다
는것이다. 그리하여 형제에게 마음을 다한 '사화'곧 화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
렇지 않고 이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송사자'의 고소를 받은 '재판관'은 정식 재판에
회부하고 말 것이다.
재판관이 관예에게 - 여기서 '관예'(* , 휘페레테스)란 배의 노
를 젖는 사람을 가리키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종이나 회당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시중
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눅 4:20조). 물론 본문에서는 재판관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집행하는 일종의 형리(刑吏)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교훈은 이 관예의 손에까지 넘
기우는 것을 원치 않고 어찌하든지 주어진 화해의 기회를 은혜롭게 선용하라는 데 집
중된다. 한편 '옥'(* , 퓔라케)은 상징적으로 지옥, 즉 '불붙는 게엔
나'를 묘사한다(22절). 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26절에 언급되고 있는 '네가 호리라
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전에는'이란 문구에 집중하여 '퓔라케'를 연옥(purgatory)으로
말하며 이 상징된 장소에서 우리의 죄책의 빚을 갚아 버릴 길을 찾는다. 그러나 '퓔
라케'는 연옥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심판적 공의와 완전한 상태에 관련된 것이 분명하
다(Lange).

=====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결문의 장엄한 이러한
표현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데, 일반적으로 이 결문은 종말적인 사건을 암시해
준다. 한편 18:34에 보면, 본절과 매우 유사한 표현이 비슷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비
유 속에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최종적인 유죄 선고를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마지막 빚 한 푼까지도 모두 지불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눅 12:59에서도 이 명제는 상황이 더 계속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이해되었다.
마태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협적인 심판을 암시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
(22:13;24:51;25:30, 46) 그는 확실히 여기에서도 심판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생
각했다(Schweizer).
호리라도(* , 톤 에스카톤 코드란텐).
이것은 라틴어의 '콰드란스'(quadrans), 즉 사분의 일 앗사리온(1앗사리온은 하루 품
삯에 해당하는 데나리온의 1/16정도에 불과)이나, 두 렙돈(막 12:42)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단위의 돈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빚을 다 갚기까지 형벌을 면키 심히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결코...하지 못하리라'는 뜻
의 '우메'(* )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더욱 강조되고 있다(Robertson).

=====5:27
간음(姦淫)치 말라 - 간음하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계명(출 20:14; 신 5:18)은 유대
교 문헌에서는 순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
다. 즉 간음이란 남의 아내(약혼자도 해당)를 '도둑질'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
서 예수는 그 행위를 모든 부녀자에게로 확대시키고 있다(28절).

=====5:28
여자를 보고...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예수는 제 7계명을 다른 차원, 즉 음욕조차
도 용납되지 않는 완전한 순결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제 10계명에서
이미 이러한 점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한편 '여자'를 나타내는 헬라어 '귀네'(*
)는 '아내'보다는 '여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예수는 유대 법에서 크게
문제시 하지 않는 범위까지 확대하는 철저한 도덕률을 원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율법을 무효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 의
도에 맞추어서 변경하는 것이다'(Davies).
음욕을 품는(* , 에피뒤메사이) - 이 단어는 과거 부정사로
사용되었으며 원형이 '에피뒤메오'로서 '갈망하다', '욕망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로 '원하다'는 뜻을 가질 수도 있으나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것
이 일반적이다. 롬 1:24에서는 분명히 성적인 욕망과 관련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본
구절, 즉 '여자를 보고 음욕(carnal desire)을 품는'의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
텐'(* )이라는 표현은 목적의
의미로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으려고'라는 뜻이 되거나, 결과적인 의미로 '그 여자
에게 음욕을 품게 되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즉 '아우테스'(* , 소유격)보다 '아우텐'의 의미인 것이다. 따라
서 여기에서 '아우텐'이라는 목적격은 부정사에 대한 지시의 목적격(즉 의미상의 주
어)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음욕을 갖게끔 하려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Carson). 따라서 카슨(Carson)은 이 구절에 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
이 기술하고 있다. "본문의 의미는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하려고 바라본
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의도가 성취되며 그는 '그 여자'와 간음을 하고, 여자도
간음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인하여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가 약화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문제의 핵심(核心)이 여전히 음욕과 마음속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 엔 테 카르디아 아우투) -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심장을 의미한 다거나 또는 인간이 지닌 지.정.의 가운데 감정적인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는 지.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을 가리킨다. 한편 이 말은 '떨리다', '두근거리다'라는 어원을 갖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외적인 행위 이전에 눈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간음에
그 중요성을 두신다(Robertson).

=====5:29,30
네 오른눈...빼어 내버리라 - 죄를 범하게끔 하는 신체의 부분들을 경계하라는 본
구절 때문에 오리겐(Origen)과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만족할 만큼 예수의 가르침에 철저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음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은 우리 신체
중 우리를 범죄하게 하는 것, 특히 성적인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가장 많이 비난을
받았던 부분이다(민 15:39; 잠 21:4;겔 6:9;18;12;20:8). 그리고 '오른눈'은 가장 좋
은 눈을 말한다. 한편 '실족케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
)는 '나로 인하여 걸림돌이 되다', '나로 인하여 범죄하게 하다'(18:6-9;
눅 17:2; 롬 14:21) 또는 '타인의 길을 방해하다', '믿지 못하게 하다'(11:6;15:12),
'오해하게 하다'(17:27; 요 6:61) 등의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명사 '스칸달론'(* )은 덫을 작동시키는 '미
끼가 달린 막대기', 즉 멸망으로 인도하는 유혹물(enticement)또는 '죄짓게 하는 유
혹'(temptation to sin)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사실과 본문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너로 실족케 하거든'이란 오른눈이 '너의 전존재를 죄짓는 유혹으로 이끌거든'이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오른눈은 유혹의 도구와 동기(動機)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음욕에 대한 것을 다루는 곳에 왜
'오른손'이 나오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를 들기 위한 것이거나 음욕도
도둑질의 일종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혹자(Lachs)는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이 말이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기 위한 완곡 어법이라고
한다. 즉 히브리어로 '야드'(* , '손')가 사 57:8에서는 이러한 용법으로 쓰였
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이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어쨌든 죄를 짓는 부
분을 잘라내거나 빼어 버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문자적인 것보다 상징성이 강한
교훈으로서 예수의 제자들은 죄의 문제를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해결하여야 한다는 점
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는 상상력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다. 그러나
눈으로 인하여 더러운 것만 보게 된다면 상상력은 오염되게 될 것이다. 성적인 죄 뿐
만 아니라 모든 죄가 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상상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 천국의 의(義)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빌 4:8). 모든 사
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다 똑같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28절). 그렇지 못하면 아예 멀리하고 바라보지도 말라
(Scott). 실로 이같이 죄악의 시초에서든 그 과정상에 있든 일단 자신의 죄악이 자각
되는 순간 어떠한 여유나 합리화도 용납치 않고 단호한 결단으로써 죄악의 본질을 근
절(根絶)하고 멀리하는 것만이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지혜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남는 것은 죄의 대가인 지옥 뿐이다. 이런 사실은 너무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예
수는 여러 곳에서 이것을 되풀이 하고있다(18:8, 9).

=====5:31
또 일렀으되 - 이 도입 공식문은 본장에 나오는 다른 표현들보다 짧으며, 특히 접
속사 '데'(* , 또)로 앞 부분과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31, 32절은 원래 대구절
의 형식을 갖고는 있지만 앞에 나오는 짤막한 가르침이 내용을 더 진전시키고 있는 것
이다.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 이 구절은 아내의 '수치스러운 일'에 관
계된 이혼 법령인 신 24:1에서 확립된 조치를 요약한 것이다. 이 말은 원래 28절의
예수의 말씀이 겨냥하고 있는 것, 즉 여인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정확히 가지고 있었
다. 사실 모세 당시의 이혼 증서는 순전히 매사에 피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인의 지위
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 보장책(安全保障策)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혼법은 차츰 남자의 손 안에서 편리한 도구가 되어갔는데, 남자들에게 일시적인 결
혼을 허용하게 했고 때에 따라서는 단 하루만의 결혼도 허용함으로써 성적(性的)인 방
종이 실제적으로 허용되는 악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여성은 다시 물건, 즉
남자가 버리거나 또는 취할 수 있는 남자의 소유물로 전락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류에 대한 보완으로써 바리새인 그룹 가운데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School of
Shammai)는 오직 이혼 조건이 부정(不貞)과 율법적인 위반에 국한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상당히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힐렐 학파(the Hillel school)는 어떤 이유이
든지 간에 어느 한 쪽에서 이혼 의사가 있을 때에는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19:3). 물론 각 파는 여자들의 인권(人權)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같은 법조문
을 만들어 내었으나 결국에는 단순히 자기네들이 내세운 법조문의 고수와 당위성 수립
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힐렐보다 샴마이 학파의 견해에 더
가까운 교훈을 주셨지만 실제로는 샴마이 학파보다 더 신중하게 여자들의 인격과 권위
를 옹호하셨음을 알 수 있다.

=====5:32
음행한 연고 없이...간음함이니라 - 예수께서는 음욕을 품는 것이 도덕적으로 볼
때 간음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할 뿐 아니라(27-30절) 무고(誣告)한 이혼은 간음의 가
능성을 낳는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이혼한 여자의 대부분이 재혼하게
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특별히 초대 교회 당시의 팔레스틴 에서는 결혼이 여
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쉽게 납득이 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결혼은 이혼당한 여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간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편
본문의 '음행한 연고 없이'란 다른 말로 '부정한 일을 저지른 확실한 사실이 없이'라
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막 10:2-12; 눅
16:18) 따르면 본 조건문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혹자는(McNail, De Wette,
Bruce 등) 이 부분을 초대 교회 당시의 복잡한 교회내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후기
편집자의 첨가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비평적 입장이고 이 주장이
19:8, 9의 교훈과 그 맥(脈)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분명 예수의 직접적인 교훈이라 확
신할 수 있다. 한편 본 조건문을 역으로 이해하게 되면 '음행'(* ,
포르네이아)을 한 자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결혼을 파기할 수 있다는 묵
시적 교훈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기독교 윤리
(基督敎 倫理)의 한 단계 더 높은 요구를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Meyer),즉 예수께서는
당시 인습적으로 이혼의 권한을 거의 전적으로 가지고 있던 남편들이 보호받아 마땅한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는 큰 사랑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을
것이다(Augustine). 즉 예수께서는 당시 샴마이 학파의 가르침보다 더 초월적이고 고
급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셨던 것이다.
버리면(* , 아폴뤼온) - '가게하다', '이혼하다'의 현재 분사로 한
번 이혼한 후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고 평생 버려두는, 그리하여 그 이혼당한 여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재혼(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간음죄에 해당)하게 만드는 악의적인 유기
(遺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간음하게 함이요(* , 모이큐데나이) - 이는 좀더 육체적이
고 적극적인 죄악의 면모를 나타내는 '포르네이아'(* ) 보다 약한 뜻
으로 어떤 법규정을 위반 했다는 일반적인 범법 행위로서의 간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로 보건대 이혼당하여 다시 재혼함으로써 간음하는 여인의 허물보다 고의적으로 아
내를 버린 남편의 죄과(罪過)가 더욱 크고 심대(甚大)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5:33
헛 맹세를 하지 말고...너희가 들었으나 - 마태는 이제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고 있
다. 여기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에 포함된 것은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
니라 출 20:7; 레 19:12; 민 30:2; 신 5:11;6:3;22:21-23 등의 내용을 정확하게 축약
한 요약문이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거짓 맹세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
과 서약을 깨뜨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일단 여호와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 이름을 걸
고 맹세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갚아야 할 채무(債務)가 되는 것이다. 마태는
23:16-22에 나오듯이 논쟁을 위한 배경 속에서 다시 이 주제를 다루는데, 거기에서 훌
륭한 예(例)들을 많이 들고 있다. 여기에서의 배경은 분명히 논쟁을 위한 것은 아니
고 다만 예수가 천국과 그 나라의 의를 어떻게 구약과 관련시키는가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5:34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 메 오모사이 호로스),
문법적으로 부정과거 부정사의 문형으로서 이를 정확히 해석하면 '절대 맹세하지 말
라'는 강한 명령문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맹세 자체의 무용성
(無用性)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 예수께서는 법정에선 스스로 맹
세하셨다(26:63, 64). 그리고 사도 바울도 자주 맹세와 서약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롬 1:19; 고후 1:23; 갈 1:20). 그런 점에서 본문에서 제시하는 바 예수께서 강조하
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범해 온 습관적이고, 진실치 못하고 위선적(형식적)인 맹세를
단호히 거부하는 명령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진실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마련된 맹세
라는 제도가 영리한 거짓과 궤변적인 속임수를 사용하는 기회가 되어 버린다면 예수는
그것을 폐기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방향은 근본적으로 순전하고도 일관된 진실성이
중요하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전혀 맹세하지 않는다면 그릇된 맹세를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실로 불완전한 인간에게 있어서의 맹세는 맹세 그
자체가 지니는 언어의 유희(遊戱)와 자기 합리화(合理化) 및 자기 변호의 추악한 도구
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로도 말라 - 예수는 사람이 무엇으로 맹세하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모든 맹세가 묵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역
설하였다. 이는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 심지어는 머리카락 조차도 하나님의 통치
와 소유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의 '하늘'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이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곧 그 창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 이는 사 66:1을 암시하는 표현으로써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
하늘의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해 주고 있다(행 7:48). 실로 그
초월한 권위를 지니신 하나님의 보좌와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경솔하고 습관
적이며 또 위선적인 맹세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같은 맹세는 철저히 삼가해야만 한다.

=====5:35
땅으로...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 하늘을 당신의 보좌 삼으신 하나님은 또한 땅을
당신의 발등상으로 삼으시고 그곳을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경우와 마찬가지
로 '땅' 도 맹세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루살렘으로...큰 임금의 성임이요 - 시 48:2;99:2 의 내용을 암시한 표현이다.
그런데 마태는 본문을 '...으로 맹세하다'(* , 옴뉘나이 엔)
는 앞의 두묘사(하늘로, 땅으로)와는 다른 히브리적인 표현법인 '...을 향하여 맹세하
다'(* , 옴뉘나이 에이스)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에
로의 지향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적 변형(變形)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대인들에게는 궁극적 본향(本鄕)이요, 지
향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기도와 맹세 등 각종 종교적 행위를 함에 있어서 항상 예
루살렘에로의 눈길을 돌리곤 하였다. 한편 '큰 임금'이라는 말 앞에는 관사가 붙어있
다. 이것은 곧, 그 임금이 너무도 잘 알려진 탁월한 존재임을 강조한다고 본다. 따
라서 '큰임금'은 모든 역사를 통해 잘 알려진 탁월한 왕, 곧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
는 것이라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25:34).

=====5:36
네 머리로도 말라 - 머리가 인간 신체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만물이 하나님께 관
련된 것 같이 우리의 머리도 하나님께 관련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라기 보다 하
나님의 것이다. 더구나 이 머리털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신 바 되었고, 또 그 머리카
락의 색이 희고(노령) 검게(청년)하는것(그 연수를 정하시고 생(生)과 사(死)를 정하
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소관에 속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만드셨
고 그것의 모든 원동력과 힘을 조성(造成)하셨다. 진정 인간은 자신의 머리털의 한
터럭도 희고 검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머리털의 원소유자는 하나님의 것이 된
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인간 자신의 머리로 맹세할 수 없다.

=====5:37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 본문을 헬라어 원문에 더 가깝게 해석하자면 '그
러나 너희는 옳다, 옳다라고 말하든지 아니오, 아니오라고 말하든지 하라'고 재번역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같은 말이 두 번씩 반복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났다.
어떤 랍비들의 의견에 의하면 '옳다'나'아니오'를 반복하여 쓸경우에는 그것이 맹세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바로 예수가 비난하고 있는 비뚤어진 결의론적
(決議論的) 사고라고 생각된다. 같은 말이 중복된 것은 NIV에서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설교자의 수사적 표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약 5:12). 이렇게 되면 이
단락(33-37절)에서 몇가지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첫째 전후 관계로 볼 때 이 구절
이 의도하는 것은 구약성경이 지향하는 진정한 방향, 즉 진실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
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맹세가 핑계로 이용되지 않고 진실성이 위협을 받지 않는
곳이라면 그처럼 무분별하게 맹세를 폐기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다. 둘째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언약을 세운다'(창 9:9-11; 시 16:10; 눅 1:68; 행
2:27-31). 그것은 하나님께서 때로는 거짓말을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한 것이다(히 6:17). 우리가 또한 바울의 경우로 판단해 본다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도 맹세를 하였다(롬 1:9 고후 1:23; 빌 1:8; 살전 2:5). 그
이유는 앞에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예수 자신도 맹세를 하고 증언을 하였다
(26:63-64). 또 우리는 예수의 설교가 대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5:27-30;6:5-8). 여기에서는 예수가 정식으로 구약의 율법을 논박하
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한다. 즉 율법이 허용(許容)하거나 명령하고 있
는 것(신 6:13)을 예수는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구약이 지향하는 바에 대하
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 권위가 있는 것이라면, 이제 그의 가르침으로 구약이 온전한
형태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D.A. Carson).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 여기서 '악으로 좇아'(*
, 투 포네루)란 '악로부터' 또는 '악한 자로부터'(거짓의 아비;요 8:44)
로 번역될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하고도 책임감 있는 답변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것을 넘어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구구한 맹세를 하는 것은 분명
'악한 자로부터' 생겨난 허위와 위선에 따른 결과임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 앞에
서 자신의 무흠을 확신할 수 있는 자는 '맹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그 옳
고 그름을 진솔히, 그리고 단호하게 고백할 수 있다.

=====5: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 출 21:24; 레 24:19-20; 신 19:21 등의 내용을
가리킨다. 이상과 같은 구약성경의 규정들은 복수를 조장(助長)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에서는 복수를 금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레 19:18). 구약
성경의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율법을 제정함으로써 복수행위가 결정적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은 아니나 미리 처벌 조항을 규정하여 하나님의 질서와 공의에 입각한 국
가적 사법제도를 만들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때로는 보복 대신으로 금전이
나 물건이 배상금으로 징수되기도 하였다(출 21:26, 27). 그리고 예수의 시대에는 법
정에서 동해 복수법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율법 규정에서 문
제가 되는 것은 보복을 제한하고 공정하게 처벌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법이 복수를 정
당화(正當化)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가 단지 동해 복수
범이 사법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만 반대하
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라면 예수가 들고 있는 예
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만일 누가 너희를 때리면 너도 같이
때리지 말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그를 때리게끔 하라는 식의 예로 나타났을 것이
다. 예수의 주장은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Carson).

=====5:39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왼편도 돌려대며 - 여기서 뺨을 치는 행위는 육체적인 아
픔을 주기 위하여 일격을 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야비하고 모욕적인 행위도 포함된다
(고후 11:20). 만일 오른손잡이가 다른 사람의 오른편 뺨을 쳤다면 그것은 손등으로
찰싹 때린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손바닥을 사용해서 때리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일로 간주되었다(M. Baba Kamma 8:6). 어쨌든 예수의 제자라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동해 복수법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적한다
는 것을 '법정에서 대항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둘째 예(40절)
를 보게 된다면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다. 따라서 33-37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가르침은 형식적으로는 구약성경의 율법과 상충된다. 그러나 17-20절의 문맥에서 보
면 예수가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즉 동해 복수법을 포함하여 모든 구약성경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
에 구약성경의 율법에서 이혼을 허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19:3-4)동해 복수법도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악을 억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는 한 발 양보하여서 인간의 악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폭력의 강물을 막아주는 방파
제로서 법률 규정을 주신 것이다(Piper). 율법의 원칙들이 율법을 지향하던 분에 의
하여 압도된 것과 같이 인간의 마음이 완악한 것도 그분에 의하여 압도되고 있다. 구
약성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령이 변화되어 새 언약 아래서 살아 갈 때
를 내다 보았다(렘 31:31-34;32:37-41; 겔 36:26). 종말론적 시대가 시작되면 사람들
의 죄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렘 31:34; 겔 36:25)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서 하나님께
복종할 것이다(렘 31:33; 겔 36:27). 이같이 이런 문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종말
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그의 나라 안에서(비록 부분적이지만)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고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종말론적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11:13). 그리고 종말을 지향함으로써 악을 억제하였던 예언들은 이제 새 시대와 그
에 따른 새 마음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Piper).

=====5:40
너를 송사(頌辭)하여...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비록 모세의 율법에서는 겉옷이
양도 불가능한 소유였지만(출 22:26; 신 24:13), 예수의 제자들은 누가 그들의 속옷
(보통 겉옷은 속옷보다 값어치가 더 나간다)을 요구한다면 자신의 만족을 찾지 말고
법적으로는 자신의 소유임이 인정되더라도 기쁘게 그것을 넘겨 주어야 한다. 눅 6:29
에서는 송사에 대해 겉옷과 속옷의 순서로 이야기하여서 순서가 마태복음과는 반대이
다. 이 때문에 혹자(Schweizer)는 누가복음에서는 겉옷을 빼앗아 가려는 강도가 전제
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속옷을 원하는 소송 대상자가 전제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밤에 입는 의복이며 덮개인 겉옷은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압류할 수 없기 때
문이라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순서가 단순히 옷을 벗어주는 정상적인 순서를 생각
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출 22:25, 26에서 이미 하나님 스스
로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는 법을 실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다른 사람에 대항
하여 자신의 권리를 재판에서 관철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벗은 채
로 살아가라는 예수의 전례 없는 진술 배후에는 불행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들어 있다(Schweizer).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웃의
유익을 위해 온갖 고난과 아픔을 무릎쓰는 적극적 이타주의의 실현에의 요구가 강조되
어 있다.

=====5:41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십리를 동행하고 - 세번째 예화에서는 길 안내자나 또
는 운반자로서 민간인들에게 동행할 것을 강요하는 로마 수비대의 권리에 대해서 다루
고 있다. 즉 본문에서 '억지로 가게하다'(* , 앙가류오)는 강제적
의미가 강한 '징발하다'는 뜻으로서 로마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징용하여 군수 물자를
규정된 거리(로마 도량형으로 1마일 곧 '5리', 우리나라 치수로는 약 3리 정도, 이는
보통 성인의 약 1,000보(步)에 해당)를 운반하게 했다(W. Hatch, Essays in the
Bibical Greek, pp.37-38). 한편 이 단어는 27:32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사용되
었는데, 로마인들은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에까지 운반하도록 강요한다.
이 경우와 비슷하게 로마 군인들은 자주 한 개인에게 그러한 봉사를 요구했는데, 법질
서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이 봉사를 요구했다(Schweizer). 이처럼 강제로
징용(徵用)을 당하게 되면 무고히 소송을 당한 경우처럼 분노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예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
이 아니라 도울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거절하지 말라 - 네번째의 예화에서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
도록 명령할 뿐 아니라(출 22:25; 레 25:37; 신 23:19) 관대한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신 15:7-11; 시 37:26;112:5). 이 구절에 대한 평행구절(눅 6:30)의 형태를 보면,
두 가지 요구가 아니라 한 가지 요구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는 곧 비슷한 것을
반복함으로써 요점(要點)을 더 분명하고 강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마지막 두
예화를 보면 38-39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 이야기 전체는
이웃을 향해 열려진 마음의 자세, 즉 더 나은 의(義)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네 개의
미담은 강한 충격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율법의 규정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본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돈을 꾸고자 하는 사람에게 무한정으로 돈
을 주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잠 11:15;17:18;22:26). 구하는 자에게 준다면 살인
자에게 칼도 줄것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한다(Tholuck).
이렇듯이 이 예화들이 수없이 애매모호한 설명들로 인하여 그 의미가 약화되거나 왜곡
되어서는 안된다. 신자들이 이러한 예화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에 대
응하는 자세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사랑과 성경에서 명하고 있는 것, 그리고 예
수의 심장을 닮은 뜨거운 열정 뿐이다.

=====5: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에 근거
한 실천적 윤리를 강조하신 예수의 교훈중에 최절정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적
하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율법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현존하는 랍비 문헌들 조차도 그처럼 대담하고 부정적인 결론으로
비약(飛躍)하는 것은 좀처럼 없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본문이 유대인의 가치관
을 비웃기 위해 기독교에서 후에 첨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가설일 뿐이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쿰란
공동체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라는 공동체 내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외부인들을 미워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
로 미루어 볼 때 당시 그것이 유대 사회 전체의 흐름이었을것이라 추측 된다. 사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자기들만이 신앙을 지키는, 소위 '남은 자들'(remnants)이라고 확
신하고 있었으므로 사랑과 미움의 대상을 그처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즉 이처럼 냉혹한 흑백 논리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매사를 판
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예수 당시에 이같은 식의 사고 방식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Davies). 한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앞 부분의 원칙은 레 19:18에
서 인용한 것으로 이 원칙의 범위는 이방인이 아니라 주로 선민으로 자처하는 이스라
엘 내부인들로만 해석되었다. 물론 때로 이스라엘에서 정주(定住)하고 있는 이방인에
게도 조건부로 적용되기도 했다(레 19:33, 34; 신 10:18, 19). 즉, 이것은 할례와 율
법을 순종함으로써 선민 공동체 속에 들어오는 이방인들에게만으로 제한되었던 것이
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원칙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간혹 그들은 이같은 단서
없이 원수 사랑을 인정하기도 했고(삼상 24:20), 가축이 관계된 문제에서나(출 23:4,
5) 또는 위급한 상태(잠 25:21, 22) 등과 같은 일상사(日常事)에서 이 원수애가 요구
되기도 했다. 한편 본절은 19:19;22:39 과는 달리 구약을 인용하면서 '네 몸과 같이'
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특히 레 19:33, 34에서는 이방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사랑을 베풀라고 명령하고 있는데도 본 인용구는 그런 명령까지도 무시하고 있다. 이
는 아마도 당시 일반 대중들은 하나님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였다면, 반대로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정되며 나아가서는 공인을 받은 것으로 생각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눅 10:25-37을 보면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
장되어야 하며, 또 믿는 자들에게는 오직 사랑할 의무만 있고 미워할 권리가 전혀 없
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5:45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따르고 그의 성
품에 동참하는 자는 윤리적 관점에서 그분의 '아들'이 되는 것을 뜻한다(9, 16절 참
조). 이 '아들'됨은 단순한 명예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런 신분과, 현재와 미래를 통틀
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와같은 영예(榮
譽)를 누릴 필수 요건이 바로 44절에 언급된 바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이다.
그 해를...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 예수의 사람들은 그 삶의 전형으로서 하나
님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한편 하나님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없이 사랑
하셔서 모두에게 똑같이 해를 비취게 하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의미하는 바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면에서든지 구별이 없고 따
라서 결국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된다고 결론 지어서는 안된다. 예수는 분명 선
인과 악인에게는, 특히 종말론적 측면에서 확실한 차등(差等)이 주어질 것이라고 가르
치셨다(25:3-46).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그 공평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각 개개인에
게 엄격한 도덕적 생활과 순종(順從)을 동시에 요구하신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요
15:9-11; 유 1:21). 그런데 칼빈(Calvin) 이후로 많은 신학자들은 44, 45절을 하나님
의 '일반 은총'과 관련시켜 왔다. 여기서 '일반 은총'이란 모든 인간에게 구별없이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은총을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써 모든 사람을 정죄하실 수
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계속하여 오래동안 은총을 베
푸셨다. 사실 '일반 은총'을 강조하는 자들의 견해로는 이구절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원수를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마음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도덕적인 면과는 무
관하다거나 종말론적으로는 아무 구별없이 주어지는 사랑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은 아
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구약성경에는 원수에 대하여 가혹한 태도
를 요구하고, 신약성경에서는 이러한 어두운 면을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극복(克服)하
고 있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관념은 그에 반대되는 증거들을
살펴보면 부인될 수밖에 없다. 즉 구약성경에는 형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을 명령하고 있는 곳이 많이 있다(출 23:4, 5; 레 19:18, 33, 34; 삼상 24:5; 욥
31:29; 시 7:4; 잠 24:17, 29;25:21, 22). 그리고 반면에 신약성경에서도 타락하여
버림 받은 자를 강력히 정죄하고 있다(눅 18:17; 고전 16:22; 살후 1:6-10; 딤후
4:18; 계 6:10). 오히려 44, 45절에서 주장하는 것은 43절에 인용된 구약성경의 율법
이 천국의 상속자(相續者)들이 보여 주어야 할 풍족한 사랑, 즉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
였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절의 핵심은 아들
이 되는 방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아들됨을 추구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자신을 예언자 계열 위에
놓는 것이다(5:12). 그러나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은 자신을 하
나님의 성품의 연장위에 놓는 것이다"(D. A. Carson).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
적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
(Plummer). 이 두 마디의 말이 보여주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 주위 사람들의
행동 양식보다 뛰어나게 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D.A. Carson).

=====5:46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공관복음에 나오는 세리들
은 로마 정부의 직접적 임명을 받은 조세징수(租稅徵收) 청부 계약의 주계약자가 아니
다(라틴어로는 Publicani). 그들은 통상적으로 외국인이었고 '세리'들이란 단지 그
밑에서 일하며 한지방을 맡아서 징수하는 본토(本土) 출신 사람(라틴어로는
Portitores)들이었다. 사실 이들은 멸시받는 존재였다. 그 이유는 조세 청부 제도가
대규모의 부정 부패(不正腐敗)를 낳게 할 뿐 아니라 엄격한 유대인의 눈에는 세리들이
그들을 지배하는 외세를 위하여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매국적인 행위를 하기 때문이었
다. 그 뿐 아니라 세리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더럽혀져서 부정
하게 되었을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상황은 조세징수의 계약자가 이방
인 상급자들과 거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위 계급의 세리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
다. 실로 세리들은 창녀와 다른 죄인들과 함께 취급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 즉 그의 모친이나 동료 세리들은 사랑하
는 것이다(D.A. Carson). 그것은 너무도 인간적이요 본능적인 사랑이다.
무슨 상이 있으리요 - 이 말은 결국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삶을 세밀히 평가하고
계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후 5:10). 사실 신령한 일에는 세상의 보상보다 더
공정하고 영화로운 상급(上級)이 주어진다(1-12절).

=====5:47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이방인들도... - 적절한 인사를 하는 것은 예
의와 존경의 표시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형제들', 즉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
은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다른 제자들에게만 그런 인사를 한다면 그들은 '이방
인'(* , 에드니코이)과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에드니코이'는 선민
(選民) 이스라엘에 반(反)하는 이방 민족들 전체를 가리키는데, 대부분의 이방인이 이
교도(異敎徒)이므로, 이 말은 결국 인종적 의미 이상의 영적인 조롱의 뜻을 갖게 되었
다. 사실 "사람이 친구를 사랑할 때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라 볼 수 있다. 즉 친구 사랑은 일종의 확장된 이기심인 것이다"(Broadus). 예수는
바로 이런 이기적 사랑과 예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 "타락한 옛 인간의 삶
은, 손해는 복수하고 유익은 돌려주는 소박한 정의에 입각한 삶이다. 그러나 구속받
은 새 사람의 삶은 복수를 거부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삶이
다"(Scott).

=====5: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온전하라 - 일부 학자들(Allen,
Hendriksen)은 이 절을 마지막 대립 명제(43-47절)의 결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
경우에는 여기에서 말하는 '온전'이란 '사랑의 온전'이다. 그러나 '온전함'에는 훨씬
더 넓은 의미가 들어 있으며, 48절은 본장 전체 대립 명제에 대한 결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한편 '온전'(* , 텔레이오스)이라는 구약성경의 '탐밈'(*
, 온전한)이라는 말을 반영하고 있다. 이 '탐밈'이라는 말은 희생 동물이
흠(欠)이 없는 것, 즉 하나님께 합당한 것을 말하기도 하고(출 12:5) 여호와께 전적으
로 헌신하는 것, 곧 의로움을 의미하기도한다(창 9:6; 신 18:13; 삼하 22:26). 이와
연결되는 헬라어 단어는 '성숙한' 또는 '다 성장한'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고전
14:20; 엡 4:13;히 5:14;6:1). 율법이 지향하는 것도 앞의 대립 명제와 관계된 권위
있는 율법 해석에서 보여졌듯이 하나님의 온전하심 그 자체인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이 진정으로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전케 하신 분(17절)을 따르는 제자라면 본받아야할
것이 바로 이런 온전함이다. 사실 복음서 기자들은 메시야와 신자들에 관계되는 맥락
(脈絡)안에서만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한다. 진정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의 제자들의 아버지이신 것이다(H. F. D.
Sparks). 따라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反映)하는 선민으로서
모든 불의한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그들의 독특한 표시였던 것처럼(레 11:44,
45;19:2;20:7, 26) 메시야 공동체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진정한 곳으로서 이같은 특
징(벧전 1:16)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France). 그러나 이 때문에 자신있게 예
수가, 무제약적인 온전함이 제자들에게 가능 하다고 가르친 거스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들이 영적으로 파산(破産)하였다(3절)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십사'(6:12)고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이 바라던 종말론적
인 목표인 아버지의 온전함을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추구(追求)하여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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