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11장
=====11:1
예수께서...마치시고 - 마태는 예수께서 특별한 강화를 끝맺으실 때마다(7:28;
13:53; 19:1; 26:1) 이와 유사한 형태의 종결 문장을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10장과 이 구절을 나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즉 본절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기 위해 훈련과 각종 선교 지침을 가르치셨던 가버나움 근처에서의
장면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사건에 뒤이어, 마가나 누가의 기록에는
제자들이 각처에서 전도하고 돌아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나(막 6:30; 눅 9:10) 마태
의 기록에는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마태가 사건의 진행 과정보다는 예수의 공
적 사역에 관심을 더욱 집중시키고 조금 전의 제자 파송이 예수 자신의 일을 덜기 위
함이 아니라 바로 천국을 널리 선포하기 위한 조처(management)였음을 보여주려는 집
필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저희 여러 동네 - 여기서 '저희'(* , 아우톤)라는 대명사는 '파송된
제자들'과 연관시킴으로써 (1) 제자들의 출생지(Zigabenus), 또는 (2) 제자들이 전도
한 각 동네로 보기도 하고(Fritzsche, Meyer), 그 당시 예수의 전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갈릴리 사람들'과 연관시켜 (3) 갈릴리 주변의 성읍들로 해석하기도 한다(D.A.
Carson). 이 견해들 중 (2), (3)번을 조화시킨 것이 가장 무난한 듯하다. 즉 예수께
서는 파송된 제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시고 갈릴리 근방의 성읍들을 찾아다니시며
당신의 사역을 수행하셨던 것 같다(Bruce, Chrysostome). 이 전도 여행을 끝마친 후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다시 모여 자신들이 행하고 가르친 모든 일들을 예수께 보고
(report)하게 된다(막 6:30).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 가르친다는 것과 전도한다는 것은 여기서 분명히 구별
되어 쓰이고 있다. 즉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모여드는 수많은 군중들에
게 사적(私的)으로 자신의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고, 전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음을 공개적(公開的)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사역자들
의 주임무가 신자들을 교육시키는 것(* , 디다케)과 비신자들에게 복음
을 전하는 것(* , 케뤼그마)임을 추론할 수 있겠다.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 여기서 '거기'란 제자 훈육(discipline)과 파송을 했었던
가버나움 주변의 한 곳을 가리킨다.
=====11:2
요한이 옥에서 - 헤롯은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였다가 세례 요한
의 솔직한 책망과 비난에 분노하여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둔 일이 있다(14:3, 4). 한편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때 헤롯 왕은 세례 요한을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
인 천연의 요새인 사해 동쪽의 마카이루스(Machaerus) 성에 감금해 두었다고 한다
(Josephus, Antiq. XVIII, 119<2절>). 이러한 세례 요한의 투옥 사건이 있자 예수께
서는 유대 지경을 벗어나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시게 된다(4:12).
한편 세례 요한은 이곳에서 1년 정도 감금된 후 사악한 헤로디아의 요구로 참수형(斬
首刑)에 처해지게 된다(14:1-12). 여하튼 그는 구약 최후의 선지자요, 메시야의 선구
자로서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설교를 외치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자기보다 능력
이 많고 또 그를 믿는 이에게 그분은 성령과 불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확신에 찬 언어
로 선포했었다.
그리스도의 하신 일 - 마태는 이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란 칭호로는 부르지 않고 있
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세례 요한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회의(懷疑)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아마도 마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세례 요한이 의심하고 잇는 그분
예수가 확실한 그리스도, 곧 오실 메시야이심을 깨우쳐 줌으로써 불필요한 회의를 막
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마태는 그의 책 서두(1:1)와 서론에
해당하는 1-2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제해 놓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요한이 들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대해서는 (1) 세리들 및 죄인들과
의 은혜스러운 교제(9장, F.R. Fay), (2) 예수의 이적과 교훈, 제자 파송 등의 사건들
(5-10장), (3) 특히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키신 일(눅 7:11-17, A.T.
Robertson), (4) 큰 이적과 기사를 베푸셨음에도 자신의 선구자요 친족이었던 세례 요
한의 투옥에는 무관심했던 일 등으로 이해하는 견해들이 있다.
제자들을 보내어 - 그 당시 요한은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 제자들을 두고 있었다
(9:14). 그때 제자들은 요한이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였으며 요한의 사후(死後)에도
무리를 이루어 약 3세기까지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었다고 한다. 개역 성경에는 번역
되지 않았지만, '제자들'앞에 전치사 '디아'(* , 통하여)가 들어 있어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께 자신의 말을 전하게 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KJV
에는 '디아'를 '뒤오'(* , 둘)로 번역하여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 중 둘만을
예수께 보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눅 7:19). 그런데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왜 예수께
보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들
어보면 (1) 메시야에 대한 회의 때문에(Tertullian, Bruce), (2) 자기 제자들의 의구
심을 풀어주기 위해(Chrysostom), (3) 예수가 과연 자기에게 세례를 받았던 전날의 그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4)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확신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
해(Holtzman)등이 있다. 그중 첫번째의 견해가 환영받고 있다(3절 주석 참조). 이에
비해 어떤 학자는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을 보낼 형편에 처해있
지 못했다는 사실을 들어 본문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견해를 내고 있다(D.F.
Strauss). 그러나 마가의 기록에는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
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막 6:20)
들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자들과 만나지도 못할 그런 상황은 아니었던 것
이 분명하다.
=====11:3
오실 그이(* , 호 에르코메노스) - 몇몇 랍비들은 이 말이
메시야 왕국의 선구자라고 주장하지만(McNeile), 이 말은 분명 메시야를 지칭하는 고
유 명사이다(막 11:9; 눅 13:35; 히 10:37). 이와 유사한 용어로서 '인자'(막 9:12),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시 118:26), '왕'(시 2:6), '정한때에 오시는 자'(합
2:3)등이 있다. 여하튼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하여 왔과 구약성경 전반
에 걸쳐 그의 오심이 에언되어 왔다(창 49:10; 사 9:1-6; 11:1-5; 35:4; 단 9:24-27
등). 따라서 메시야가 '오실그이'로 묘사될 수 있었다. 한편 누가는 요한의 제자들
이 당도했을 때 예수께서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고 소경을 보게 하였다는 내용
을 기록하고 있다(눅 7:21). 아마도 누가는 요한의 의심에 대한 해결책으로 '오실 그
이'가 왔을 때 일어날 메시야적 이적을 의도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이오니이까 - 헬라어의 어법상 주어가 없더라도 동사의 어미가 주어의 인칭을
나타내기 때문에 대명사는 흔히 생략되는데 본문에서는 주어를 강조하기 위해 '당신'
(* , 쉬)이란 대명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신이 바로 오실 그이오
니이까?'라고 번역할 수 있다. 실로 이 질문은 '메시야의 오심'이라는 전체 신앙의
의심에서가 아니라 예수가 과연 호에르코메노스'(* , 그 오시
는자)인지에 대한 역사적 진실에의 의문인 것이다.
우리가 다른 이를 -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낸 이유에 대해서는 전술한 바와 같
은 견해들이 있는데 최근에 와서는 요한이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한 데 그 원인
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면 예수를 두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했던
그가 왜 이런 회의를 품게 되었는가? (1) 아마도 그가 그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Bruce). 즉 시간이 갈수록 요한은 감옥에 갇혀
마음이 조급해진 반면 메시야로부터는 어떤 격려의 메시지도 없었던 것이다. (2) 그
리고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예수의 제자와 요한의 제자들 간의 경쟁 의식에서, 예수
의 명성이 높아가자 요한의 제자들이 질투심을 느낀데 그 원인이 있었을 수도 있다.
(3) 그러나 주된 원인은 예수가 그 당시 흔히 이해되고 있었던 민족적 차원의 메시야
사역을 충족시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요한은 자기가 선포한 바와 같이 "이
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찍혀 불에 던지우리라"(3:10; 요 3:36)는 심판을
기대했으나 예수는 심판보다는 사랑의 사역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Dunn). 즉 그는
적어도 예수가 오실 메시야라면 엘리야와 같은 메시야적 표정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
여야만 하지 않는가 라는 강한 의구심을 품었던 것이다(말 4:5; 요 1:19-21). 따라서
그는 예수의 행위가 메시야로서는 합당치 않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기다리오리이까(* , 프로스도코멘) - 이는 막연히, 수동
적 입장에서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절실한 기대를 안고 마치 사모하듯이 기다
려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실로 이 표현으로써 세례 요한의 타는 듯한 메시야 갈증
을 읽을 수 있다.
=====11:4
듣고 보는 것을 - 예수의 답변으로, 간결하고도 권위에 차 있었다. 즉 예수는 자
신의 메시야적 변호(辯護)를 일찌감치 접어두시고 단지 당신의 사역을 통해 메시야적
실재(實在)를 증거하셨다(사 29:18, 19; 35:5, 6; 61:1). 한편 누가는 "마침 그 시
(時)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눅 7:21)고 기록하
여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고 계시던 때에 도착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예수는 당신의 메시야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받기 전에 이미 온몸으로 답변하고 계
셨던 것이다. 그런데 '듣고 보는 것'이란 그 당신의 관용구인 '경험한 것'이라는 의
미보다 훨씬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즉 (1) 예수의 증거는 말과 행동이 완전 일치(一
致)됨에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요 (2) 듣는 것은 예수가 가르친 진리의 영적 의미에 대
한 해석이고, 보는것은 영적 진리의 진실성과 권위에 대한 증거로서, 결국 예수의 증
거는 완벽한 권위(權威)를 갖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같이 답변하
신 배경을 살펴보아야겠다. 실로 예수께서는 수감(收監)된 요한에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재고(再考)해 보아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즉 메시야
로 오신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나 기타 유대인들이 기대한 바와 같이 급작스럽고 난
폭한 심판보다는 사랑과 구원과 회복을 가지고 오셨다는 사실과 아직 때가 이르지 않
았기에 드러내놓고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발표할 수가 없다는 점을 요한에게 깨우치고
자 하셨던 것이다.
요한에게 고하되 - 예수의 답변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
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요한에게 주신 것이었다. 한편 예수께서 내세우신 이적들은
사실 선지자들도 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또 자기 자신
의 능력으로 이런 일들을 하셨지만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였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메시야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으며, 요한은 이 사실
을 듣고보아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어렵지 않게 추론(推論)할 수 있었을 것이다.
=====11:5
소경이 보며 -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면서 열거하시는 이 여섯 개의
표적들은 이사야가 메시야의 출현을 예언하면서 제시한 내용이다(사 29:18; 35:5, 6;
42:7; 61:1). 실로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될 새세계(new world)에는 모든 질병과 환난
과 곤비함, 그리고 애통하는 것이나 심지어 죽음까지도 없어지리라는 것이 그당시 팽
배해 있던 보편적인 확신이었다(외경 에녹서 25:5 ff; 제 4에스라서 8:52 ff). 따라
서 예수께서는 이런 기대와 구약적 사고를 지닌 자들에게 구약에 근거하여 당신의 메
시야직을 적절히 선포하셨다(Jeremias). 한편 예수께서는 당신의 메시야 이적 중 '소
경이 보는 것'을 육체적 회복의 시작으로 삼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영적
사역을 그 절정으로 보이셨다. 그런데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사 61:1에 언급된 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에 대한 사실은 의도적으로 인용치 않으셨던 것같다. 왜냐하
면 예수께서는 요한이 생각한 메시야 사역의 정치적 측면을 개인 회복 내지는 전인(全
人)적인 해방으로 그 초점을 맞추게 하시려 했던 까닭이다.
앉은뱅이, 귀머거리 - 메시야의 이적이 주로 현상(現象)적인 측면에서 육체적인 질
병을 고침받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이 아
니었다. 그러한 이적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소경된 자, 귀머거리, 앉은뱅이, 즉 하나
님을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을 알고 찬양할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죽은 자가 살아나며 - 예수께서는 여러차례 죽은 자를 살리신 적이 있는데
(9:18-26; 눅 7:11-15) 이는 메시야 사역 중 가장 탁월한 징표요 복음의 핵심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메시야의 표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들 이적들은 그리스도의 위
대한 능력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들일 뿐만 아니라 구원 사역에 대한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즉 영적인 의미에서 소경은 모든 죄인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들은 죄로 인해 눈이 어두워 참 진리와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들은 또한 의(義)의 길로 다니지 못하는 앉은뱅이이며, 죄로 오염된 문둥이로서 타인
에게 혐오감을 주며 또 자기의 병을 전염(傳染)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
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며,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
된 죽은 자들인 것이다. 이 모든 질병과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
스도의 능력 외에는 있을 수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능력만이 회개하는 심령들을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요체(要諦)가 아닌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 여기서 복음이란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이사야 선
지자가 예언한 바 '아름다운 소식'(사 61:1)과 같은 맥락을 이루는 말로서 예수 그리
스도가 죄인들을 구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말한다. 즉 그가 소경의
눈을 보게 하였으며 앉은뱅이를 걷게 했고 온작 부정(不淨)한 것으로 오염된 문둥병자
를 깨끗케 했고 죽은 자를 살렸다는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이것은 가난과 고통 중에
있는 자에게 메시야가 임했다는 기별(奇別)이고 통보였던 것이다. 한편 '가난한 자'
란 학자들에 따라 (1) 물질적 빈곤자(Robertson, De Wette), (2) 심령이 가난한 자
(Meyer), (3) 영.육이 모두 빈곤한 자 등으로 이해한다. 이중 (2)의 견해를 취하는
주석가들이 많으나 그 견해가 절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11:6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 여기서 '실족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스칸달리스데
(* )는 '길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된것에 부딪쳐 넘어지다',
또는 '그것에 걸려 비틀거리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세례 요한을 위시한 유대인들은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그리고 급격한 변화와 심판을
동반한 가시(可視)적인 해방을 가져다 주는 구속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오신 그리스도는 비천(卑賤)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현격히 다
른 메시야 사역을 행하고 계셨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쉽게 거부했던 것이
며 그 결과 그들은 예수께서 보인신 참 메시야관에 부딪혀 걸려 넘어지게 되었고 또한
결국에 그를 통한 구원의 혜택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
에 예수께서는 이런 점을 주의시키기 위해 자신을 인해 실족치 말 것을 당부하신 것이
다. 실로 계시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계시의 발전 과정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것
이라면 적어도 제한적 사고와 인식을 할수밖에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초
역사적인 계시의 한 과정에 걸려 실족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조명
(illumination)이나 그분의 능동적인 배려가 없이는 인간은 결단코 진리의 빛을 발견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이 있도다 - 이는 예수와 그의 사역을 믿으며 그를 참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찬 말씀이다. 그러나 불쌍히도
유대인들은 그릇된 메시야관으로 인해 참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고답적(高踏的)인 사고를 초월한 복음 사역과 그의 천한 모습과 겸손한 태도에 걸려
실족함으로써 그들이 누려야 할 복(福)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에수의 약하고 볼
품없는 모습과 그의 탈(脫)유대적 인간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과 능력으로 인해
그를 오실 메시야로 믿고 따르른 자는 그분의 나라에 속한 참으로 행복한 자인 것이
다. 실로 예수는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세상 진리의 한 측면이 아니라, 안
믿으면 영원한 심판과 형벌, 믿으면 영원한 생명과 복락이 보장되는 진리요 생존의 근
거가 된다(요 20:31).
=====11:7
저희가 떠나매(* , 투톤 포류오메몬) -
현재형 독립 속격 분사 구문으로서 '저물어 막 떠나가고 있을때'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제자들의 뒷모습을 아직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있을때로 보는 것이 좋
다.
예수께서...말씀하시되 - 이를 직역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Jesus
began to speak, NIV)가 된다. 즉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가고 있을 때 세
례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으로 인해 손상된 세례 요한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말씀을 꺼내셨던 것이다(F.R. Fay). 한편 혹자(Plummer)는 이때의 메시지가 바로 세
례 요한을 위한 장례사(葬禮辭)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요한에 대하여 -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을 기회로 삼아 요한의 참
된 사명에 관하여 무리들에게 가르치신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많은 사람
들이 그에게 나아가 그가 외치는 말씀을 들었으며 특이한 그의 외양(外樣)과 가르침에
상당히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3:1-12). 그러나 그 중에서 일부는 또한 그저
호기심에서 그를 보러 나갔던 것 같다. 아마 지금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무리들
도 요한에게 나아갔던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께서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하여 그들이 과연 요한에게 나아가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하
신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 여기서 먼저 '광야'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
를 베풀었던 유대 광야를 가리킨다(3:1). 실로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우뢰와 같은 메
시지 앞에 유대 군중들은 구름떼처럼 그곳 광야로 몰려들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
은 일시적이요 충동적이었을 뿐(요 5:35) 더 깊은 영적 진리에로 이르지는 못했다.
한편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 같이 질문하시게 된 또 하나의 의도는 그들이 세례 요한을
신(神)적 권위를 입은 선생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가 안내한 바 있는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불신앙을 깨우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먼저 여기 나오는 '갈대'(* , 칼라몬)
는 집합적인 단수로서 커다란 줄기를 가진 식물을 의미하며 요단강 하류 쪽에 많이 자
라고 있다. 이 갈대(calamus)는 가볍고 길어 글씨를 쓴 도구(요삼 1:13), 지휘대
(27:29), 측량자(계 11:1) 등으로 많이 사용 되었다. 한편 이 '갈대'가 목자 없는 양
과 같이 정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고 방황하는 유대민족을 가리킨다
는 견해도(Grotius, De Wette) 있으나 오히려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Allen, Bruce, D.A. Carson). 즉 갈대란 오늘은 이것을 믿고 이렇게 말하다
가 내일은 저것을 믿고 저렇게 말하는 불안정하고 변덕이 심한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
로서, '너희가 과연 요한을 그렇게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자로 이해하고 있었더냐'는
것이다. 실제로 요한은 수차에 걸쳐 예수가 메시야란 사실을 증언하였으며(3:11-14;
요 1:19-36; 3:27-30), 자신의 증언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갈대처럼 흔
들리지 않았고 일단 받아들인 진리를 계속해서 믿고 선포했던 것이다.
=====11:8
부드러운 옷 - 여기 '부드러운'(* , 말라코스)이란 부드럽다는 뜻
외에 '사치스러운', '방탕한', '나약한'이란 의미도 들어 있다(눅 7:25; 고전 6:9).
따라서 예수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분명 풍자적인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한편 '부
드러운 옷'은 왕실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주로 입던 가볍고 얇은 장식용 의
류를 말한다. 이 옷은 올이 가는 린넨 실로 만들어진 고가품(高價品)이었다.
입은 사람이냐 - 요한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띤 검소
한 옷차림을 하였다(3:4).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한 이 질문은, 그들이 광야에 요한을
보러나간 이유는 훌륭한 옷이나 외모를 보러나간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다. 여기
서 예수는 점층법적인 수사법을 쓰면서 마지막에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왕궁에 있느니라 - 이는 헤롯 궁정을 뜻한다. 즉 부드러운 옷 입은 자를 만날 곳
은 헤롯 안디바스의 궁정 같은 곳이지 요한이 있던 광야는 아닌것이다. 이런 옷은 부
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예수는 요한이 이 같은 부귀와 영화를 대변하는 인물
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요한 역시 예수와 마찬가지로 야생(野生)의 투박하고
천한 생활을 하였으며 고난을 겪었지만 확고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고난 당하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것이다.
=====11:9
어찌하여 나갔더냐 -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던 이유는 세상의 부귀 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메
시지의 핵심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과연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있는가?
선지자를 보려더냐 - 사실 그 당시는 말라기 이후 약 400년 동안 하늘의 음성이 단
절된 침묵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때로서 모든 백성들은 마음에 선지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런점에서 사람들은 분명히 광야에서 권위에 찬 메시지를 전하는 요한을 선
지자로 인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인정이 정당했음을 지적
하셨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무리들에게 세가지
질문(7, 8, 9절)을 던지시고 또한 스스로 답변을 제시하셨다. 이는 10, 11절의 진리
를 확실히 제시하시기 위해서 취한 문답식(問答式) 강론이었다. 특히 예수는 당신의
독자적 권위(내가...이르노니)로써 말씀하신 것이다.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 - 여기서 '나은 자'에 해당하는 원어 '페리쏘테론'
(* )은 남성형이라기 보다 중성형 단어로서 '넘치는', '능
가하는'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 자체가 비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그 뜻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즉 '페리소테론'이란 '무엇보다 더욱
탁월하다'(more excellent)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구약의 최후 선지
자이자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구자란 점에서 그 이전에 왔던 다른 선지자들보다 더
크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주의 길을 예비(豫備)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
이다(말 3:1). 이사야는 문학적으로 탁월한 예언서를 남겼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도 뒤
지지 않는 최고의 선지자란 인정을 받기에 충분하였으며, 더욱이 매우 분명하게 그리
스도의 오심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이사야보다 나은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야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이사야보다 더 분명하게 그의 오
심을 선포했고 또 메시야를 백성들 앞에 소개하는 일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11:10
기록된 바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탁월한 선지자적 성격에 대해 구약의 권위를
빌어 인준(認准)하신다.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 이는 말 3:1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의 인용인 것으로 보
인다(70인역과는 다른 표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어구는 말 3:1의 내용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하리라"와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난
다. 즉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메시야, 곧 자기를 위해 사자(messenger)를 보
내 메시야 앞에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계신반면, 말라기 선지자
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 당신 앞에서 길을 예비하게 할 것이며 또한 당신이
친히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에언하고 있다. 즉 말라기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분으
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 본문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
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내용이 아니다. 즉 이 차이는 결국 아버지
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는 것일 뿐이다. 사실 예언서에 의하면 성자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칭해졌던 것이다(사 9:6). 여하튼
세례 요한은 여호와의 나라를 예비하는 선지 엘리야로서(말 4:5, 6; 눅 1:76), 성육신
(Incarnation)하신 하나님의 선구자인 것이다.
예비하리라(* , 카타스큐아조) - 원뜻은 '세우다'로서 어
떤 일을 위해 미리 기반(base)을 닦아두는 것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특히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전(全)사역을 의미한다. 실로 요한은 백성들의 마음에 주
예수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킨 도구였다. 아마도 그는 예수께서 공생애에 들어서자마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함으로써 이 일을 했던 것 같다.
=====11:11
내가 진실로...말하노니 - 마태에 의해 독특하게 기록된 이 권위에 찬 선언은 세례
요한의 지위와 역할이 예수가 가르치는 천국에 얼마나 지대(至大)한 공헌을 했는가를
단정적으로 보여준다. 이 메시야적 증언을 통해 세례 요한의 권위와 한계가 정확하게
규명되었다.
여자가 낳은 자 - 직역하면 '여자들에 의해 태어난 자'이다. 이는 고난받는 자
(* , 엘루드 이솨, 욥 14:1) 욥에 의해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 죽음
과 고통아래 있는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이는 단수로 표현된 '한 여인에게서 나신
자'(창 3:15; 갈 4:4). 즉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과는 전혀 다른 표현이다.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없도다 - 이는 세례 요한의 인격, 권능, 종교적 지위 등
이 타(他) 선지자들보다 우수하다는 뜻이 아니라, 분명 이것은 천국의 주체이신 예수
와 관련해서 생각되어져야 한다. 즉 구약의 기라성 같은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메시야
왕국을 멀리서 고대하고, 메시야의 선구자를 예언하는 정도에 그친 반면 요한은 그 나
라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선구자, 예언의 대상이 되었다
(사 40:3; 말 3:1). 또 친히 메시야의 길을 준비했으며,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그를
만 백성에게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구약 선지자들 중 최고의 위치에 이른 것이다. 바
로 이런 점에서 그는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큰'자였던 것이다.
천국에서는 - 천국(Kingdom of heaven)은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되는 모든 영역으로
서 시간적, 지리적 제한을 받는 현존하는 이 땅의 나라들과는 다른 영원에서 영원까지
의 모든 나라 사람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나라이다. 그리고 천국은 현존하
는 질서와 세계를 심판한 후 이와는 질(質)적으로 차원이 다른 영원한 새 세계의 실현
을 의미하기도 한다(막 1:15 강해 '하나님 나라 개념' 참조). 따라서 그 나라에 입참
(入參)하는 자는 단순한 인간적 평가를 훨씬 초월하는 신적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
이다. 한편 세례 요한의 사역의 주(主) 내용은 바로 이 천국의 도래를 예비하고 선포
하는 것이었다(3:2).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 먼저 이러한 대조는 인간적 자질이나 윤리적 우
수성과 연관되지 않고, 계시의 발전적 측면 및 천국의 전혀 새롭고도 신적(神的)인 측
면과 연관된다. 한편 본문의 '작은 자, 큰 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1)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한 것으로 인해 요한을 작은 자로 보는 견해(Weiss), (2)
'작은 자'를 그리스도로 보아, 당시 요한의 인기와 영광에 의해 그 영광이 침해받은
작은 자는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될 것이라는 견해(Luther, Chrysostom, Origen), (3)
'작은 자'는 예수 이후의 모든 신약 교회의 성도들, 그리고 '큰 자'는 세례 요한으로
대표될 수 있는 구약의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Alford, Bengel, Calvin, Plummer)
등이 있다. 이 중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평가되고 있다. 실로 아무리 작은 자
라 하더라도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목격하거나 천국의
실체를 경험한 자들, 혹은 이 모든 것을 믿는 자들은 단지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데
그쳤던 세례 요한보다 더욱 크며, 더욱이 천국 계시의 종합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구약
의 어떤 위대한 인물보다 탁월하다. 한편 이 어구를 이상과 같이 이해하게 되면 에수
의 선구자로서, 그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이 3절에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
고 묻게 된 배경을 또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즉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한 사람이었
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救贖史)의 감추어진 의미를 아직 이해 못하고 있었
던 것이다. 그 반면에 신약 시대의 성도는 세례 요한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리
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 이말은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시점부터 마태가 이
글을 기록한 때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Albright, Mann). 그러나 이
보다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란 아람어적 표현으로, 그 의미하는 바는 세례 요한이 활
동하던 동안에 비록 예비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하늘나라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며
(Jeremias), '지금까지'란 표현은 한정된 시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 천국의 확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
을 것 같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 '침노를 당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비아제타이'
(* )는 수동태와 중간태 둘 다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 수동태로
이해하면 이 어구는 본문과 같이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의미로서 천국이 어떤 강력
한 힘을 소유한 자에 의해 강탈당하거나 거칠게 다루어져 강점(强占)되는 것을 의미한
다(Meyer, Lightfoot). 즉 천국은 습격에 의해서 정복된 성과 같이 빼앗아진다는 뜻
이다. 이를 중간태로 받아들이면 '힘으로 진격하다', '휘몰아쳐 오는 바람처럼 힘으
로 떠밀려 제 갈 길을 가다', '격렬하게 빼앗다'등의 뜻으로, 이는 NIV 성경에서처럼
'하늘 나라가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the Kingdom is forcefully advancing)는 의미
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분명 중간태의 의미로 이해하는것이 좋다. 실로
거룩한 능력과 막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땅에 기습적(奇襲的)으로 도래한 천국은 단지
침략과 약탈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역동적(dynamic)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짐으로서 열정적 신앙인들을 수용하게 된것이다(Ridderbos, Chilton,
Hendriksen).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 혹자는 본문의 '침노하는자'를 해석함에 있어서 앞 구
절의 '침노당하다'란 동사를 수동형으로 보아 '강탈자'나 '난폭한 자'등 부정적인 이
미지를 가진 자로 이해하려 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 어구를 '하늘나라는 맹렬한 공격
을 당하고 있으며, 난폭한 자들은 그 나라를 강탈하고 있다'란 의미로 해석한다(Hill,
Meier, Hobbs 등). 그러나 이 어구는 앞의 동사 '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해석함과
연결하여 '용기 있는 자' 또는 '강한 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것이다. 따라
서 본문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
고 지금은 용기 있는 자들 또는 강렬한 집념을 지닌 강한 자들이 그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혹 소심하거나 쉽게 낙담한 자는 그 나라를 얻을 수 없다'(Pamment,
Kummel)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실로 '침노하는 자'는 목적한 바를 쟁취하기 위해 결
사적인 노력과 지혜를 아끼지 않는 강하고 용기있는자인 것이다. 한편 본문의 '빼앗
느니라'(* , 하르파주신 아우텐)는 말은 마치 야수
나 거친 도적들 마냥 무엇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사력(死力)을 다해 움켜잡는 상태를
뜻한다. 물론 여기서는 순전히 선한 의미로서, 구원을 얻고 천국의 유업(遺業)을 얻
기 위해 온 정열로써 애쓰며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고 단정지으며 멸시했던
세리나, 창녀, 각종 범죄자들 및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간절히 갈
구(craving)하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눅 7:28-30). 실
로 그들은 의와 평화 그리고 기쁨의 나라를 얻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죄와
악한 동료들과의 단절(斷絶)이라는 수동적 변화와 더불어 난폭할 만큼 격렬한 신념과
용기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영혼들의 순수한 열정을 통해 천국은 더욱 역동적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11: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 - 본문의 선지자와 율법은 구약성경을 지칭하
는 말이며 일반적으로 율법이 선지자보다 앞선다(5:17; 7:12; 눅 16:16). 여기서 먼
저 '모든'이란 어떤 특정한 구절들에 국한(局限)해서만이 아니라 '전체를 망라해서',
또는 '전체적인 맥락에서'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본문에는 선지자 뿐 아니라 '율
법이 예언한다'는 특이한 표현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구
약 전체가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키며 앞으로 임할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
임을 뜻한다.
요한까지니 -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간 침묵의 기간이 흘렸으나 구약시대는
아직 마감되지 않았다. 이제 세례 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통해 구약은 최종 마감되
었으며, 이제부터는 계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로 인한 새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그런
데 어떤 이는 이 표현을 두고 선지자들과 율법이 세례 요한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고
해석한다(Sigal).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으로서 이는 선지자들과 율법이 세
례 요한때까지 그 예언적 기능을 다할 것이며 하늘나라가 시작되기에 앞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례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무대에 등장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마태는 본문에서 구원사의 새 전환점을 밝힘과 동시에 선지자들과 율법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시대가 이제 다가왔고 시작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특히 마태는 구약의 가
장 주요한 기능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이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늘
염두에 두고 본 복음서를 기술하였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11:14
즐겨 받을진대 - 먼저 '즐겨'에 해당하는 원어 '데레테'(* )는 '좋
아하다', '바라다'는 의미 외에 '뜻을 세우다', '선택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의지적이고 선택적인 결단에 의한 수용을 암시하는 말로서, 결국 진리를 수용하
는 일이 감정적 흥미에서가 아닌 의지적 선택이 수반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한편 유
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자기들에게 강력한 비판과 엄격한 회개를 요구하며, 그들로 하
여금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치 말라고 꾸짖기까지 했기 때문에, 더욱이 지
금 현재 그가 헤롯의 정치범으로 옥에 갇혀 있음을 보고 요한이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
라는 사실을 '즐겨 받지' 못했던 것이며, 또한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이 구약의 에언
과 율법적 기대가 성취된 것으로 '즐겨 받지' 못했던 것이다.
오리라 한 엘리야 - 엘리야에 대해서는 열왕기상.하에 잘 기록되어 있다시피 큰 권
능을 가졌던 유명한 선지자로서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승천(昇天)한
바 있다(왕하 2:11). 그런데 수백년 후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바로 그
엘리야가 보냄을 받을 것이며, 와서는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말
3:1; 4:1, 5).
이 사람이니라 - 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때 주의 사자는 그에
게 요한의 탄생을 고지(告知)하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예
비하리라"(눅 1:17)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요한은 엘리야의 인성과 모습을 가
지고 온 것은 아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한 자신은 엘리야임을 부인하였다(요 1:21).
그런데도 그 당시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승천 때와 같은 그런 인격적인 엘리야로 다시
올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실재하는 역사의 반복으로서 엘리야의 귀환을
고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엘리야의 도래(到來)는 육체적, 문자
적 도래라기 보다 종말론적 구원자의 선구자로서의 사역적, 정신적 도래라 할 수 있
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그의 사명상 엘리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한 주의 사자
(messenger)였던 것이다.
=====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이 말은 예수께서 빈번히 사용하신 관용적인 표현으로
서(13:9, 43; 눅 14:35; 계 2:7) 복음의 영적인 진리를 은유적으로 묘사할 때나 복음
의 영적인 진리에 진지한 호기심을 갖도록 하는데 흔히 사용되었다. 특히 '들을지어
다'(* , 아쿠오)란 말이 단순히 들으라는 뜻이 아니라 '주의하여 듣고 깨
달으라'는 강한 의미의 요청으로서 직면한 상황에 대해 환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앞에서 선언한 내용의 말씀들이 대단히 중요하고 분명한 것들이기 때문
에 듣고 확신해야만 함을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유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 조차도 분명한 진리의 말씀들을 듣고도 이를 경시(輕視)
하여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빛에 가까이 나아가면 자신들의 악한 행
위가 드러나기 때문에 귀를 막고 악의에 찬 방해를 서슴없이 감행하는 것이다. 실로
진리를 수용하고 믿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가 복있는 자일 것이다.
=====11:16
이 세대를 - '세대'(* , 게네아)란 '뿌리가 같은 한 족속', '동시대
사람들' 또는 '30년으로 끊어지는 한 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여기서는 요한과 그리
스도의 동시대 사람들(12절)을 가리킨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이 세대'란 말이 빈번
하게 언급되고 있는데(12:41, 42, 45; 23:36등), 이 말은 흔히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부인(否認)하는 내용과 함께 쓰이거나 예수께서 세상을 책망하실 때 사용되었다.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 이는 비유를 이끌어내기 위해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
던 교육기법이다(눅 7:31). 그런데 '비유할꼬'(* , 호모이오소)의
원뜻은 '무엇을 닮게 하다', '비교하다'로서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그 닮은 것을
곁에 두어 비교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영적인 지혜를 일상
생활의 사건들과 비교하여 설명하심으로써 무지한 백성들에게 깨달음을 제공하시고자
했던 것이다(Stier). 이처럼 예수는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목
도(睦睹)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아이들의 놀이까지 빠뜨리지 않
고 비유로 사용하여 이 세상의 성격을 규명하신 것이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 여기 '장터'란 말의 원어 '아고라'(* )는 원
래 '회합'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점차 '모이는 곳'이란 의미를 가지게 된 낱말로서,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란 의미보다는 오히려 대중들이 드나들며 대화하는 공적인 장
소라는 의미가 더욱 강하다. 물론 이곳에서 여러 보임 외에 상거래(商去來)가 형성되
기도 했다. 한편 본문에서 보듯이 에수께서는 지금껏 무관심 속에 버려졌었던 어린아
이들에 대한 관심이 매우 예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아이들의 불일치하
고 모순되며, 각자의 투정 때문에 함께 놀만한 어떤 놀이를 결정치 못하는 것(눅
7:31-35)을 예의 주시(銳意注視)하셨던 것이다(Wycliffe, A.T. Robertson).
제 동무를 불러 - 장터에서 아이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한쪽이 다른 쪽에게 어떤 놀
이를 제안하는 모습이다.
=====11:17
피리를 불어도...춤추지 않고 - '피리'와 '춤'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헬라, 로마인
들에게서도 결혼식과 같은 잔치집에서 기쁨을 표하는 방식의 하나로 짝을 이루는 것이
었다(Buxtorf). 이 당시 아이들은 어른들을 모방(imitation)하여 결혼식 놀이를 하였
던 것 같다.
애곡하여도...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 곡하고 가슴을 치는 것은 장례식의 풍습을
말한다(23:30; 겔 24:16). 즉 아이들은 처음에는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불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그 놀이에 참석하여 어른들처럼 춤을 추라고 권유하였으나 동무들
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같이 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놀이를 바꾸어
장례식 놀이를 하며 애곡(哀哭)하였는데, 이번에도 그들은 이 애곡에 맞추어 가슴을
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다. 이는 철저한 무시(無視)요 무관심과 불일치를
암시한다.
함과 같도다 - 예수께서 이 세대의 성격을 규명하신 말씀이다. 즉 아이들이 제 동
무들을 불러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피리를 불었으나 춤추지 않
고, 애곡하였으나 가슴을 치지 않았다. 적어도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했으나 그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과 예수의 동
시대 사람들이었던 유대인들은 회개와 애통해 할 것을 역설(力說)한 세례 요한에 대해
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구원과 해방과 기쁨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에 대해서도 반
응이 없는 무감각(insensibility)중에 빠져 있었다. 실로 그들은 내심 그 두 분을 모
두 멸시하고 철저히 무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현상은 오늘날에도 흔히 발견되
는 것이다. 즉 이 세대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기쁨도 없고 자기 죄악에 대한 안
타까운 눈물도 없는 것이다.
=====11:18
이 구절은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이 세대를 불일치와 무반응한 아이들의 놀이로 비
유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 요한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wild
honey)이었으며(3:4), 개인적인 식사 초대에는 쉽게 응하지 않았던 것같다. 그리고
요한은 나실인의 규례를 따라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였다(눅 1:15; 7:33).
즉 그는 금욕적인 절제의 생활을 하며 주의 길을 에비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였
다.
귀신이 들렸다 - 요한의 설교에 유대인들은 회개하거나 뉘우치지 아니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이제는 그를 두고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즉 주의 선구자
로서 금욕적인 모습으로 그가 나타나자 교만한 유대인들은 그를 '슬픔의 귀신'에 사로
잡혀(F.R. Fay) 어둡고도 침울한 생활을 하는 자로 매도(罵倒)하였던 것이다.
=====11:19
인자는 와서 - 인자란 칭호는 예수께서 자신을 지칭할 때 특히 공생애 후반기에 흔
히 사용하는 말로서 이 말 속에는 자신이 고난당하실 종말론적 메시야란(단 7:13) 사
실이 암시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눅 5:24 강해 '인자'참조).
먹고 마시매 - 이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처럼 금욕적이고 야생(野生)의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상의 생활을 하신 것을 말한다. 예수
께서는 또한 요한과는 달리 죄인들과 함께 자리하여 세리들과 식사하기도 하였으며 천
한 무리와 어울려 다니기도 하였다(9:10, 11; 눅 15:1, 2 등). 이는 예수의 관점에서
바리새인을 위시한 위선적 종교가들의 가식적 종교 형태를 온몸으로 비난하신 것이 되
며, 바리새인의 관점에서는 파행적 행동을 한 예수야말로 율법의 파괴자로 간주될 수
밖에 없었다. 여하튼 소외된 자, 죄인들과의 식사는 복음이 지닌 자유의 기쁨의 한
편린(片鱗)이었음에 분명하다.
먹기를 탐하고 -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
과도 같이 이 완고한 사람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세례 요한에게는 귀신이 들렸다
고 비난하더니 이제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예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는 대식
가(大食家)요,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으로 몰아세운다. 즉 이 세대는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도 메시지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직 진리를 향하여 악의에 가득
찬 비난거리만을 찾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 이 말은 문자적으로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술꾼이란
뜻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처럼 특이한 옷차림을 하였던 것도 아니며 나실인으로서 자
신을 성별(聖別)시킨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일상적인 방식에 따라 먹고 마셨으
며, 특히 포도주는 그 당시의 주요 음료 중의 하나였기에 마셨을 뿐인 것이다.
죄인의 친구로다 - 그들은 값싼 즐거움(pleasure)을 기다리다가 세례 요한의 절제
와 금욕 생활을 보고는 미쳤다고 비난했으며, 죄인들과 분리되기를 바라다가 이번에는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는 죄인의 친구, 곧 죄인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한
통속(secret society)이라고 비난한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 누가의 평행구에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
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 7:35)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두 평행구가
이런 차이점을 가지는 것은 원래 예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신 것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고대(古代)의 많은 필사자들은 이 부분을
누가의 기록대로 고쳐 '그 행한 일'을 '자기의 모든 자녀'로 표기하였다(레기우스 사
본, Vulgate역 등). 아마 누가의 기록이 원래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점에
서 본 구절은 '지헤의 요구 사항들은 모든 지혜의 자녀들에 의해 진정으로 입증된다'
고 해석되기도 한다. 여기서 '지혜의 모든 자녀들'이란 지혜의 사자(messenger)들(세
례 요한과 예수)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했다(눅 7:29, 30;
Marshall).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행한 일'(행위들, actions, NIV)로 변형되어 표
현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혹자(Suggs)는 본문의 '그 행한 일'이란 것은 지혜
의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기독론(Christology)적인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서, 지
혜는 그 지혜의 행위들에 의해 옳다고 입증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보고 있다. 한
편 구약에서 지혜는 인격화되어 표현되고 있으며(욥 28장; 잠 1:8등), 유대 전승들에
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는 어떤 대리자로서 하늘에 있는 반신 반인적인 존재(a
guasi - personal hypostasis)의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또한 신약에서는 그리스
도를 가리키는 말로도 표현되었다. 그러나 본문의 지헤는 하나님의 경륜과 뜻과 능력
의 원천이 되는(잠 8:12-16, 22-31; 눅 11:49)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하
는 것이 적절하겠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지혜와 관련된 기독론을 찾는다는 것은 올
바른 방법이 아닌것 같다.
옳다 함을 얻느니라 - 문맥 속에서 이 어구를 이해하면 이 어구는 앞의 비유와 연
결되어 있으며 또한 세례 요한과 예수의 생활 양식과 결부되어 있다. 즉 사람들은 요
한과 예수의 생활 방식을 모두 비난했으나 하나님의 지혜가 인도하는 대로 요한과 예
수는 바르게 살았으므로 그 두 사람의 행위는 결국에 가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것
이다.
=====11:20
권능(* , 뒤나미스) - 이말은 원래 자연의 물리적인 힘(롬 1:4)이
나 하나님의 능력(롬 1:16)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이적'또는 '초자
연적인 행위와 사건'을 가리킨 말로 쓰이고 있다. 한편 공관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이적적 사역을 표현함에 있어서 흔히 이 '권능'이란 말을 쓰고 있다.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 먼저 '고을'이란 신앙과 인격의 주체로서의 전체 성
읍을 가리킨다. 실로 고을의 운명은 그 거주자들의 신앙 유무(有無)에 따라 결정이
된다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사상이었다(창 18:22 ff).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선교 대상으로 삼았던 고을들이 당신을 배척하거나 비난했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 아니
었다. 에수께서는 당신이 곧 메시야시라는 신적(神的)인 이적들을 도시들에서 행하였
음에도(5, 6절)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당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이
다(3:2; 4:17). 이로써 확인하건대 인간이 심판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푼 이적이 부
족해서가 아니라 그 이적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것이다. 만일 주께서 그 고을의 사람
들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고와 이적들을 다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주님은
그들의 완고한 태도에 그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에 - 11:20-24의 내용은 눅 10:12-15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는 본문을
70인 전도파송 사건 다음에 다루고 있어 예수의 갈릴리 사역 중 후기에 해당하는 때임
을 알 수 있다. 반면 마태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온 사건 다음에 다루고 있다.
이중 누가의 시간 순서가 정확한 것으로 보이며, 그렇다면 이는 마태가 연대순
(chronological order)으로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그 때에'란 표현은 마태가 이를 엄밀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시간 부사로 사용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책망하시되 - 이 말의 원어 '에릍사토 오네이디제인'
(* )을 직역하면 '(비로소) 책망하기 시작하시
다'로서 그릇된 종교관을 지닌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의 공개적 질책(叱責)이 드디어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23장에 이르러 예수의 책망은 최고조에 이른다. 예수
께서는 그 고을들이 자신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책망했던것이 아니라 자신의 메시야 신
분을 입증해 주는 대부분의 이적들을 다른 곳이 아닌 그곳에서 보여주었는데도 그 도
시가 회개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이적들을 보고도 믿지 않는 자
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또 은혜를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즉 '새 언약, 곧 복음을 얻게 될 그리스도 이후의 신약 시대
사람들은 구약의 예언적 메시지를 들었던 자들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을 받거나 아니면
더욱 비참한 존재가 된다'(Bengel).
=====11:21
화가 있을진저 - 이 말의 원어 '우아이'(* )는 숙명적인 절망이나 엄숙
한 경고 또는 연민의 정을 표현할 때 쓰이는 일종의 감탄사이다.
고라신 - 이 도시는 신약에서 본문과 눅 10:13에만 등장하는 지명(地名)으로서 그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약 2마일 떨어진 오늘날
의 '키르베트 케라제'(Kirbet Keraze)에서 옛날에 파괴된 고라신의 유물들이 발견된다
고 한다. 여하튼 예수의 사역을 기록한 복음서에는 '고라신'과 '벱새다'에서의 활동
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나 예수의 선교 중심지였던 가버나움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 고을 선교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割愛)하셨을 것으로 본다.
벱새다 - 이 지명의 문자적인 뜻은 '사냥집'이며, 이곳은 안드레, 빌립, 베드로의
고향으로서(요 1:44) 갈릴리 호수와 강둑 위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람들은
거기서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했던 것 같다. 한편 이곳은 오늘날의 '알 텔'
(al-Tell), 또는 '마사디야'(Masadiya) 등으로 여겨지며 일찍이 분봉왕 빌립이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딸인 줄리아(Julia)를 기념하여 뱃새다 줄리아스라고 명명했
던 것 같다(눅 9:10).
두로와 시돈 - 이 두 도시는 팔레스틴 북부, 지중해 연안 뵈니게(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로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가끔 바알 우상 숭배지였던 이 도시에 대해 심판을 예언
하곤 하였다(사 23장; 겔 26-28장; 욜 3:4; 암 1:9, 10). 한편 솔로몬이 성전에 필요
한 건축 자재들을 두로 왕에게서 공급(供給)을 받았을 만큼 두로는 고대로부터 문물
(civilization)이 번성했던 것 같다(대하 2:11-16). 그리고 시돈은 아셀 지파의 구역
에 위치해 있었으나 아셀 지파는 시돈을 한 번도 점령해본 일이 없었다(수 19:28; 삿
1:31). 여하튼 이 두 도시는 무역과 항해로 대단히 잘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에도 이
도시들은 이방 우상 숭배와 더불어 대단한 부(富)와 향략을 누렸던 것같다.
베옷을 입고 - 베옷(sackcloth)은 낙타의 짧은 털로 짜 만든, 올이 거친 직물을 가
리키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슬픔을 당했을 때 비탄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맨
살에다 이 옷을 입곤 하였다(삼하 3:31; 왕상 21:27; 욘 3:5-8).
재에 앉아 - 사람들은 슬픔을 표하는 방법을 베옷을 입은 것 외에 재(ash)를 사용
하기도 하였다. 즉 그들은 재를 머리에 뿌리거나(삼하 13:19; 애 2:10), 재 위에 앉
거나 하였으며(욘 3:6), 또 그 위에 눕기도 하고(에 4:3) 심지어는 그 위에서 구르기
도 했다(렘 6:26; 미 1:10). 여하튼 이 두 행위는 모두 회개와 애통함을 상징하는 것
이다. 예수께서는 타락한 도시로 알려진 이방인의 도시들에게, 선민이라 자처하는 유
대 고을들에게 베풀어졌던 것같은 이적과 회개의 기회들을 제공했다면 그들은 벌써 회
개의 자리에 앉았을 것이라 단언하셨다. 여기서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런 기회를
제공치 않으셨는가 라는 의문점이 남는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먼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위해 보내셨던
것이다(10:6).
=====11:22
심판 날에 - 이는 마지막 심판 날을 가리키는데(Bengel), 이때 예수께서는 심판주
(審判主)로 임하실 것이다(10:15; 행 17:31; 벧후 2:9). 한편 예수께서는 이방 도시
보다는 유대인의 성읍인 고라신과 벱새다에게 많은 권능을 행하고 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들을 들려주었으나 그들은 회개치 않았으므로, 결국 그들은 그 이방 도시들보다
더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몇 가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1) 예수께서 고라신과 벱새다에 베푼 이적들을 두로와 시돈에다 베푸셨더라면 그 도
시들의 주민은 회개했을 것이다. 따라서 심판장은 이 점을 참작(consideration)하실
것이다. 그리고 (2)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 섭리 하에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만큼
심판 때에도 아주 공평(公平)하게 판단하실 것이며, 하늘나라의 축복 뿐만 아니라 지
옥의 형벌에도 여러 등급이 있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롬 1:20-2:16). (3) 많이 받
은 자에게 많은 것을 찾으실 것이다(눅 12:47, 48).
견디기 쉬우리라(* , 안네크토테론 에스타이)
- 직역하면 '훨씬 더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로, 그들의 도덕적 태도의 결과로 인한
보다 가벼운 심판을 암시하고 있다.
=====11:23
가버나움아 - 가버나움은 예수의 본 동리이며(9:1) 활동 무대(4:13)로서 예수께서
는 이곳에서 많은 이적들을 행하시어 어느 성읍들에서보다 더 많은 회개의 기회를 제
공하셨다(4:13).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 이 말은 최대의 번영과 특권을 누린다는 은유적 표현으
로 볼 수 있다. 즉 가버나움은 여태까지 수많은 주님의 이적과 권능을 목격하고 그
영예를 누려왔던 것이다. 실로 하늘나라가 바로 이 성읍에서 역동적으로 확산되고 있
는 시점에서 그들 가버나움은 오히려 교만의 머리를 하늘로 쳐들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 표현은 바벧론 멸망 예언(사 14:12-15) 구절과 유사한 것으로서 결국
그들의 처참한 멸망을 비소(誹笑)하고 있는 것이다.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 여기서 '음부'를 뜻하는 원어 '하데스'(* )는
히브리어로는 '스올'(* )로 번역되는 말이다. 이 말은 1차적으로 무덤을
가리킬 때 쓰였으며, 2차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영(靈)들의 세계를 뜻했다(눅 16:23;
계 1:18). 따라서 이 말을 저주받은 자들만이 가는 장소로 이해한다면 원어의 뜻을
적절하게 살리지 못한 결과가 된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이 말이 하늘과 대조를 이루
면서 앞의 '심판 날'과 조화를 이루어 교만한 자들이 종말론적으로 처하게 될 굴욕과
저주와 핍절과 멸망의 장소로 이해된다. 한편 예수의 이 예언은 영적 의미에서뿐 아
니라 역사적으로도 성취되었다. 즉 이 두 도시는 로마군과 유대인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焦土化) 되고 말았던 것이다.
=====11:24
심판 날에 소돔 땅이 - 소돔은 그들의 악한 죄로 심판받아 멸망한 도시이다(창 19
장). 그러나 그리스도는 가버나움에서 보여주신 이적과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
면 그 성이 회개하고 심판을 면하여 그때까지 존속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가버
나움 주민들의 죄악이 엄청난 특권을 부여(附與)받았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
았다는 점에서 차라리 아무런 이적도 보지 않았던 소돔의 죄악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는 뜻이다.
=====11:25
그 때에 - 마태는 이 시간의 어구를 역사적인 시점을 명시(明示)해 주는 시간적 표
현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만 앞뒤 문맥을 분명히 구분하며 잇는 연결 내지는 접속사적
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즉 20-24절의 내용이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묘사라
면 이 어구가 시작된 25절에서부터 30절까지는 하나님이 용납(容納)해 주신 자들에 대
한 설명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누가는 눅 10:21에서 이 어구와 비슷한 '이 때에'
(* , 엔 아우테 테 호라)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70인 전도
사역의 성공적인 결과와 연결시키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예수께서는 지금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갖는 엄숙하
고도 고결한 영적 교제의 분위기에 잠겨 계신다(A.T. Robertson). 실로 예수께서 막
힘없는 언어로 엮어낸 이하의 말씀은 당신의 경건한 영혼에서 우러나온 기도이자, 찬
양이며, 자기 성찰(省察)이기도 했다(Bruce).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 이는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가리킨 표현
이다. 특별히 '천지의 주재'라는 표현은(Tobit 7:18)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
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의 소유권이 그분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시
146:6; 사 42:5; 행 17:24). 그리고 '아버지'란 성부 하나님과의 인격적 일체(一體)
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한 것이다(6:9; 26:39;
요 11:41; 17:1). 한편 이 말들을 다음 절의 내용과 연결시키면 하나님은 우주의 주
권자이시므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그의 뜻을 나타내시기도 하며 감추
시기도 한다는 점이 암시(暗示)되어 있다.
이것을 - 예수의 이적을 가리킨 표현으로서 그 당시에 펼쳐지기 시작하였던 메시야
시대에 대한 인식과 예수가 가르치신 교훈의 의미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 - 어떤학자(Meyer)는 이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킨다
고 보고 있다. 그러나 문맥상 이 어구는 이 보다 더 넓고 포괄적인 대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예수는 16절에서 이 세대를, 그리고 20-24절에서는 몇몇 도시들을 책망
하셨던 바, 이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이적과 권능을 보고도 자고(自高)하여
예수를 영접지 않는 이 도시들의 주민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숨기시고 - 실로 자기 아집(我執)과 편견 및 이성적 판단으로서 예수와 그의 나라
를 영적으로 깨닫기는 불가능하다. 특히 본문의 '숨기시고', '나타내심'등의 표현은
이러한 영적 진리의 이해가 하나님의 주권적 배려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시사한다. 정
녕 성령의 도우시는 내적 조명(illumination)이 없이는 아무도 자연적 능력으로는 하
나님의 계시에 접근할 수 없다.
어린아이들 - 어린아이와 같이 솔직하고 순박한 자들로서(시 19:7; 119:130) 하나
님을 의지하며 주의 가르침에 기뻐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즉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
들이란 스스로 만족하며 자칭 지혜롭다 하여 주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인반면 어린아
이들이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자들인 것이다.
감사하나이다(* , 여소몰로구마이 소이) -
찬송을 연상시킬 만큼의 감격적인 고백을 뜻한다(수 7:19; 대하 30:22; 롬 15:9). 그
와 더불어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ruling)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同意)를 함축
하고 있기도 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
내고 계신 것이다.
=====11:26
옳소이다 - 이 말은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감사하신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본 절의 맨 앞부분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 ,
'왜냐하면')란 말이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고 있지 않으며, '아버지'란 호격(呼
格) 역시 번역에서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된 것 - 25절에 언급된 바 하나님의 독특하신 계시 전달 방법을 가리킨다.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직역하면 '당신 앞에 좋게 여겨지는 바가 되었습니다'가 된
다. 이를 아람어식 표현으로 이해할 때 '당신의 은혜로우신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로 번역할 수 있다(삿 13:23).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실현이 완전
히 합치(agreement)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는 곧 하나님의 즐거움이요 기쁨이 되
는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의지의 실현을 고대(苦待)하며 실현된
의지를 전적으로 수납(受納)했던 자들의 신앙 고백이 되기도 했다(말 1:15; B.
Berakhoth 17a, 296). 실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지상의 기이한 일들은 오직 하나
님의 뜻이란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때가 빈번히 있다. 즉 우리의 지식을 넘어선
신비로운 사건에 대해 그것이 정당했다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
의 뜻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 예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는 구별되는
성부에 의한 성자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주장하셨다(28:18; 요 13:3). 이 내용은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도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요 3:35; 6:46; 골 1:26, 27). 여기서 '모
든 것'이란 성부께서 위임(委任)한 모든 것에 대한 통치권(Meyer), 또는 모든 인류를
통괄하실 권위(Bengel, De Wette), 가시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
(Weiss), 전적인 위탁(委託)과 위임(McNeil), 그리스도의 진리에 관련된 모든 것
(Grotius, Kuinoel),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Wycliffe)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에의 위임은 성부의 통치가 중단되었음을 뜻하기 보다 그리스도
는 교회를 위하여 만물을 지배하고 계시며 또 온 우주가 그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구속할 수 있으며 그들을 영광스러운 곳으로 인도하실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실로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세상 뿐 아니라 오
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시다(엡 1:21). 한편 본문의 '주셨으니'
(* , 파레도데)란 무시간(無時間)적 부정 과거형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모든 것을 성자께 주셨음을 뜻하고 있으며, 결국
예수의 역사적 선재성(先在性)을 증거해 주고 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분명한
어구이다.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규정함
으로써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인격적 일체성을 이루는 특별한 것으로서 다른 어떤
피조물의 접근도 불허(不許)하고 계신다. 한편 '아는'에 해당하는 원어 '에피기노스
케이'(* )은 단순한 지적인 인식(* , 기
노스케이)을 훨씬 능가하는 의미이다. 즉 이는 완전한 상태의 지식, 또는 전인적이고
초월적인 앎을 뜻하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본질적인 동일성을 이루지 못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고전 2:10). 실로 아버
지와 아들 상호간의 지식은 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계시가 인간에게 전달되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 곧 성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 여기서 '소원대로'(* , 부레타이)
란 '...을 하기 원하는'이라는 뜻으로 강한 의지적 소망을 담고 있다. 이는 결국 성
자는 성부를 인간들에게 능히 계시(revelation)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계시하시고
자 하시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계심을 보여준다.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 이는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
하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본질적인 형상으로서의 성자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자요(골 1:15),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자(요 1:14,
18) 말씀 그 자체이시다(요 1:1). 하나님은 예수와 부자(父子) 관계에 있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기 때문에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자신을 나타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한
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버지를 계시하여 아버지를 알게
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을 권한도 부여받았던 것이다.
=====11:28
수고하고 - 원어 '호이 코피온테스'(* )는 현재 분사 능
동형으로 명사적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이는 스스로 많은 일들을 하여 계속해서 피
곤에 지친 상태를 말한다.
무거운 짐진 자 - 원어 '페포르티스메노이'(* )는 현
재분사 수동형으로서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있는 자들을 가리
킨다. 이는 죄와 염려의 고통이나 육체적 의무 외에 특별히 전통적으로 부과되고 있
는 율법과 유전(遺傳)의 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서기관들
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비난하신
적이 있다(23:1-4).
다 내게로 오라 - 예수는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죄인들을 초대
(invitation)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마음을 두고 나아오는
그 어떤 사람도 모두 받을만한 넓은 사랑과 모든 인간을 친히 부르실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시고 구원과 안식(rest)에의 초대를 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예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25절)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그리고 '아이같이 지혜는 없으나 순박한 자들'을
모두 초대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이것은 마지막날의 영원한 안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
라 일상 생활에서의 모든 갈등을 해소(解消)한 후의 평화와 안식까지도 가리키고 있
다. 즉 신자가 주께로 가면 신자는 죄에서의 해방과 율법의 속박에서의 해방, 불안과
염려, 고통에서의 해방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은 특히 '내가'
(* , 카고)란 말이 강조되어 있다. 즉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맡겼던 자들
과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친히 권위에 찬 초청에 걸맞게 절대적인 안식을 약속하셨
던 것이다.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이사야는 메시야를 겸손히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
하였고(사 42:2, 3; 53:1-2등), 다른 예언자들은 종말론적 메시야를 온유하고 겸손한
인격의 소유자로 소개하고 있다(슥 9:9). 마태는 이 예언의 성취(成就)를 지적하기
위해 예수의 겸허하며, 비천(卑賤)하신 모습을 종종 언급하였다. 여기서 '마음'
(* , 카르디아)이란 원래 심장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순히 육체의 일부
로서의 심장 기관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히브리적 관념으로 인간이 지닌
전인격의 핵심적 좌소(坐所)로 이해된다. 이는 결국 예수의 본질적 성품을 언급한 것
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뜻이 아니라 종(servant)으로서 타인을 섬기며 고난을 당해서 타인의 아픔을 안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있는 말이다.
나의 멍에를 메고 - 유대인 사회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훈육(訓育)관계를 가리
킬 때 이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멍에란 것은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들
을 지게 하여 그것들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서 당시 팔레스틴의 멍에는 혼자 메
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pair)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었는 바, 결국 예수께서
주신 멍에를 멘다는 것은 곧 예수와 함께 메는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여하튼
본문은 제자들의 영적인 신앙 생활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율법의 멍에(Pirke Aboth 3:6, 집회서 51:26)를 메게 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지고 있는
멍에를 질 것을 당부한다. 실로 율법과 세상의 멍에가 아니면 예수와 사랑의 멍에를
메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가 괴로움과 사망을 안겨다 주는 세
상과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방법, 곧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새롭고도 가벼운 멍에를 지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인생 질고(疾苦)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내게 배우라 - 이는 자신을 '모방하라', '자신의 경험을 배우라'(Stauffer)는 의미
가 아니라 자신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계시의 진리를 와서 배우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Schmid). 이는 결국 완전한 신앙 생활에의 부름일 것이다.
너희 마음이 - 여기서 '마음'(* , 프쉬케)이란 예수의 '마음'과는 구별
되는 것으로 생물학적인 생명의 요체(要諦) 또는 생명의 혼(soul)을 뜻한다. 이를 달
리 표현하면 자의지(自意志), 자아(自我)라 할 수 있다.
쉼을 얻으리니 - 이는 28절의 '쉬게 하리라'는 약속에 대한 응답이다. 여기서 '얻
으리니'(* , 휴레세테)란 원래 '찾다', '발견하다'는 뜻이다. 따
라서 참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 있었고, 또 그분이 주리라 약
속한 것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어구는 렘 6:16의 어구를 인용한 것
같다. 거기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
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
라"고 하셨다. 따라서 본문을 이 부분과 연관지어 이해하면 '옛적 길 곧 선한 길'로
행하려면 예수의 멍에를 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멍에는 율법학자들이 뒤
집어 씌운 그런 무거운 짐이 아니라 안식을 가져다 주며 평강을 가져다 주는 쉽고도
가벼운 것이다.
=====11:30
내 멍에는 쉽고...가벼움이라 - '쉽고'(* , 크레스토스)란 '부드
럽다', '좋다', '은혜스럽다', '안락하다', '친절하다'등의 다양한 뜻으로 해석된다.
실로 예수의 멍에는 이 다양한 의미를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도 가장 가벼운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어거스틴(Augustine)은 예수의 멍에를 새의 깃털에 비유하여 그 깃털
이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을 만큼 가볍다고 설교한 바 있다(F.R. Fay). 이와 같이
예수께서 제공하신 짐, 곧 그의 계명은 사랑의 게명(commandment of love)으로서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일 5:3). 그러나 이는 결코 예수의 가르침이 세상의 도덕이나
율법보다 무가치하거나 경박(輕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가르침보다 더 준엄하고
숭고(崇高)하며 엄정한 것이다(Clausner). 그러나 예수의 짐은 (1) 확실한 구원을 가
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2) 선하고, 바르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3) 항상 예수의 능
력에 의존하는 신앙이 전제되기 때문에, (4) 나 혼자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사랑으로
메기 때문에 가볍고, 또 영생을 동반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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