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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태복음 13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1|조회수21,008 목록 댓글 0


마태복음 제 13장
=====13:1
그 날에 - '그것' 또는 '그 사실' 등 바로 앞 내용을 가리키는 말인 '에케이노스'
(* )가 첨가된 '그 날'이라는 말은 어느 특정한 사건 또는 일이 발생
된 바로 그 날을 뜻하는 말로, 과거의 어느 막연한 시기 혹은 시간을 가리키는 말인
'그 무렵 쯤'의 뜻을 가진 '그때에'(* , 토테)와는 구별되는 말이다. 본문
의 경우에 이 말은 천국 비유를 베푸신 그날은 자신의 육적(肉的) 모친과 그 동생들이
주님을 찾아온 바로 그 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즉 예수 자신의 참
형제자매와 참 부모는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임을 가르치셨던 날
과 같은 날로서, 예수가 바로 이날 자신의 육적 가족을 만나 대접하는데 힘쓰지 않고
영원히 영적 가족이 될 이런 자들에게 천국에 대한 비유를 가르치는데에 먼저 힘쓴 것
은 결국 예수가 죄인들 모두를 당신의 가족으로 여겨 주시며 그들에게 천국을 가르치
시느라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강력히 암시해 주고 있다. 마태가 굳이 '에케이
노스'를 사용한 것도 바로 이 이유이다.
집에서 나가사 - 예수께서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과 잠시 집으로 들어가셨다가 다시
집 밖 바닷가로 나오시는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집'은 갈릴리 가버나움에 있
는 베드로의 집일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는 집안에서는 비교적 구원된 무리들, 즉 12
제자를 중심한 그 가족과 동료들을 위한 제자훈련에 힘을 쓰셨던 것이다. 한편 옥외
(屋外)에서는 많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 장소는 산
(5-7장의 산상수훈), 바닷가, 길가, 뽕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 등 다양한 여러 곳으
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든지 그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지
런히 말씀을 전파하셨다.
바닷가에 앉으시매 - 갈릴리 바다 혹은 디베랴 바다 또는 게네사렛 호수라고 불리
우는 이곳의 해변가는 예로부터 레바논 산과 어우러진 푸른 물로 인해서 풍경이 아름
다울 뿐만 아니라 어업(fishery)이 성해 소금에 절인 어류들이 멀리 스페인에까지 수
출되었으며 전 국토가 메마르고 험한 팔레스틴에서는 비교적 기름진 곳으로서 디베랴,
벱새다, 가버나움, 고라신 등의 많은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었다. 예수께서 비
교적 한적한 시간과 때를 택하여 이곳에 앉아서 둘러싼 무리를 향하여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단순한 목가풍(牧歌風)의 수채화적 감상을 넘어 일상생활의
타성(楕性)을 깨는 진리에 귀기울이는 구도자(求道者)들의 기쁨과 진실함을 느끼게 해
준다.

=====13:2
무리 - 원어 '오클로스'(* )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가리
키는 말인 '플레도스'(* )나 '데모스'(* )와는 달리 천민
집단, 속(俗)된 무리라는 뜻으로 일종의 가치판단이 개입된 말이다. 또한 '오클로스'
는 유대교권주의자들이 율법을 잘 준수치않고 또 그럴 능력조차 갖고 있지 않는 낮고
천한 지위나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모욕적으로 부르는 말인 히브리어 '암 하아레
츠'(* ), 즉 '땅의 백성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서 복음서와 사도행전
에서는 주로 예수께로 달려나온다거나(13:2), 예수를 찾아다닌다거나(눅 8:40), 예수
의 전도여행에 줄곧 동행하던(막 5:27; 눅 7:9) 무리들을 지칭하여 당시의 정치, 경
제, 종교의 상류층 사람들이 부르던 말이다. 어떤 경우에 '오클레스'는 예수의 친족
보다도 더 그와 가까운 관계가 되기도 하였으나(막 3:31 ff)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은
예수를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구원자로서만 이해하고, 인간의 영
원함과 관련된 영혼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는 메시야로서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께서 천국비유를 전파하시던 그 당시에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배 -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소형 어선은 보통 하나의 돛대와 두 개의
노(櫓)가 달렸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배를 타시게 되었는데, 이 배는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므로써 순식간에 형성된 군중집회에서 하늘나라의 새 소식이 조
용하게 때로는 엄숙하게 선포되는 설교강단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대개의 학자
들이 인정하듯이 육성(肉聲) 이외의 특별한 기계설비가 없던 때였으므로 비록 군중집
회였다 하더라도 예수의 이 호반(湖畔) 설교의 분위기는 매우 고요하고 진지했을 것이
다.

=====13:3
비유 - 예수께서 비유 교수법(method of teaching)을 창시한 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비유를 활용하여 영적 진리를 유효 적절하게 가르친 사실에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보
다 탁월하다. 여기서 '비유'(* , 파라볼레)란 '곁에'라는 뜻의
'파라'(* )와 '던지다'는 뜻의 '발로(* )의 합성어이다. 즉
이는 '옆에 던지다'는 뜻으로 한 사물을 또 다른 사물 곁에 놓아두고 대조, 비교함으
로써 그 사물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게 하는 진리 교육의 한 방법이다.
씨를 뿌리는 자(* , 호 스페이론) - 여기 사용된 정관사
(* )는 대표 단수로서 어떤 계층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결국 '씨 뿌리는
자'란 농사를 짓는 모든 사람, 즉 농부를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말 속에
는 '농부라면 일반적으로 다 경험하듯이'라는 뉘앙스가 은근히 내포되어 있다. 여기
서 '씨 뿌리는 자'란 말은 결국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위시한 중근동 지방에서는 밭에 씨를 뿌릴 때 농부가 직접 손으로 갈아놓
은 이랑에 뿌리기도 하고 가축을 이용하여(가축의 등에 씨앗 담은 주머니를 달아 이동
할 때마다 주머니에 뚫린 구멍으로 조금씩 씨앗이 떨어지게 함) 씨앗을 뿌리기도 한
다. 본문의 비유는 그러한 씨뿌리는 방법에 대한 관심보다 씨뿌려지는 밭으로 비유된
사람들의 마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한편 '씨 뿌리는 자'란 다음 세가지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1)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는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유추(類
推)해 볼 수 있는데, 특히 예레미야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를 예언하면서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라"(렘 31:27)라고 선포
했다. 실로 남은 자들의 거룩한 씨는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고 심기워져서 하나님 나
라의 건설과 완성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 자신. 예수 이전에도
선지자와 많은 교사들이 율법의 씨를 부지런히 뿌렸으나 많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 자신은 밭의 종류에 따라 엄청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사랑과 복음
의 씨를 뿌리신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직접적으로 표현된 37절에 따라
예수를 씨뿌리는 자로 이해하는 이러한 경우에 이 비유는 바로 자서전(自敍傳)적 요소
를 갖고 있는 셈이다(Buttrick). (3) 모든 기독교인들. 귀중한 복음의 씨를 뿌린다
고 하는 것은 먼저 믿은 자들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라고 약속하셨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로 하여금 신령한 씨를 뿌리도록 권고하였다(고전 9:11).

=====13:4
길 가(* , 파라 텐호돈) - 이를 직역하면 '길을 따
라'가 된다. 이는 밭고랑 사이를 따라 만들어진 길을 가리키는데 이 길은 뭇사람들의
발길에 의해서 단단하고 반질반질하게 다져진다. 본문에서는 이 길이 마음의 문을 굳
게 걸어 잠근 청중(audience)을 의미한다. 본 비유에서 '길가'의 결정적 특징은 마음
이 굳어져 새로운 씨가 자신의 내부에 뿌려질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결국 인간 영혼이 복음으로 대표되는 새 진리에 대하여 아예 처
음부터 철저히 배격, 거부하는 것을 가리키는 바 우리는 그 이유를 다음 두가지 경우
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의식적 원인 :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학식만을 최고
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만을 고집하는 교만과 독선, (2) 무의식적 원인 : 이 땅에서
의 삶이나 목숨보다는 영생의 문제라고 하는 복음의 중대성과 심각성을 채 깨닫지 못
하여 아예 처음부터 복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경솔한 무지와 부주의한 태만
에 의한 것이다.
새 - 팔레스틴에는 약 삼백여 종(種) 이상의 새가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흔한 새
가 바로 '참새매'이다. 레 11:16과 신 14:15에서 부정한 새로 분류된 이 새는 유대
땅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특별히 이
새를 염두에 두셨는지는 정확치 않다. 그러나 새에 의해 상징되는 악한 자, 즉 사단
은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으면서, 복음의 씨앗을 그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방치(放置)하고 있거나 나중 일로 미루어 지체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진리
를 경험할 가능성을 갖지 못하게 하는 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
은 복음의 씨앗은 그대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에 의하여 신속히 제거된다
고 하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받을 수 있다. 실로 길가 밭과 같은 사람은 씨앗을 대수
롭지 않게 생각하고 거부하였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선과 악, 하나님과 사단, 천국과
멸망의 길이 판가름나는 결정적인 것이다. 사실 복음의 반대 세력은 지금도 기회만
있으면 거부된 씨앗을 앗아가기 위해 혈안(血眼)이 된 채 적극 활동하고 있다.
먹어 버렸고(* , 카테파겐) - 이는 '철저하다'는 뜻의 '카타'
(* )와 '먹다'는 뜻의 '에스디오'(* )의 합성어로 조금도 남김
없이 완전히 먹어치워버렸음을 나타낸다.

=====13:5
흙이 얇은 돌밭 - 팔레스틴에서는 매우 흔한 지형으로, 석회석 지층 위에 얇은 지
표가 형성되어 있어서 자연히 바위의 온기(溫氣)에 의해 뿌리가 쉽게 나오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뿌리가 계속 성장할 수 없는 곳을 가리킨다.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들은 진리를 전혀 인식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돌밭의 경우와
같은 사람들은 진리를 단순하고도 피상(皮相)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을 대표한다. 흙의
얕음은, 곧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신앙 인격의 천박성 또는 경박성을 매우 효과적
으로 형상화시켜 주는 표현이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그 행동은 빠르나 지속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 물질문명과 기계의 발달로 극도의 속도와 거대한 분량만
을 추구함으로써 대부분 인간의 심성이 표피화되어가며 또한 기계화된 현대 사회에서
는 돌밭 유형의 사람들을 더욱 빈번하게 만나고 발견할 수 있다. 실로 복음의 진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영적 토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어떤 선한 목적을 추구한다해도 선한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결과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표피화(表皮化)된 인간
심성과 경박함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13:6
해가 돋은 후에 - 식물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영양분도 필요하지만 태양열
또한 필요한 것이다. 태양열은 탄소동화 작용등을 통하여 식물의 생장에 결정적 원동
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흙이 씨로 비유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영혼
의 상태를, 뿌리가 씨(복음) 자체에서 나온 생장력을 가리킨다면 여기 해는 그 복음의
씨가 계속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각종 연단과 훈육을 가리킨다 하겠다. 즉 씨 뿌
리는 행위가 단회적인 반면 여기 해는 계속적인 에너지 공급 행위, 즉 일반적 신앙 생
활을 통한 신앙 훈련을 가리킨다 하겠다. 아니면 여기 해가 돋은 후에는 순간적 감격
이 끝나고 이제 신앙인이 되어 일상적 신앙생활이 시작된 후에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7절의 가시와 비교하자면 둘다 땅위에서 연단(鍊鍛)을 준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해가 응당 치러야 할 운명을 가리킨다면 가시는 제 욕심, 염려에 의한 불필요
한 시련을 가리킨다고 보겠다. 여기서 밭은 곧 인간의 영혼 상태의 상징이며, 얕은
돌밭은 결국 껍데기는 부드럽지만 그 속은 아직도 채 깨어지지 않은 완악한 상태의 심
성을 지닌 사람을 가리킨다. 즉 겉마음은 경박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 속마음은 성령
에 의하여 부서지지 않고 자기 아집과 주장으로 가득찬 상태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
런 밭으로는 복음의 뿌리가 내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일관성과 성실성 그리고 끈기가
요구되는 신앙 생활이 시작되어 해, 곧 시련이 봉착하게 되면 곧 그 복음의 씨는 말라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자에게는 영적 소망을 기대할 수 없다.

=====13:7
가시떨기 - 이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칸다'(* )는 '열매가 없어서
쓸모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기후가 건조한 팔레스틴에서는
거의 사계절에 다 볼 수 있으며, 그 종류도 약 200여 가지가 된다고 한다. 성경에서
가시는 주로 약을 행하는 자(삼하 23:6; 미 7:4), 이스라엘의 적(민 33:55; 수 23:13;
겔 28:24), 저주(창 3:18), 황폐함(사 9:18) 등으로 상징되고 있는데 본문에서의 가시
떨기는 천국복음에 대한 신앙적 장애요소로서, 복음의 씨의 기운을 꺾어 버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가시떨기 밭은 가시가 자랄 수 있을 정도의 지력(地
力)이 감춰진 곳이지만 생장력이 강한 가시나무 외에 다른 채소나 곡식은 결코 함께
자랄 수 없는 거친 땅이다. 팔레스틴 땅에서는 개간(開墾)된 밭 옆에 흔한 가시떨기
가 자라는데 이곳에 밀이나 보리 씨가 떨어져 같이 자라는 수가 있다고 한다. 이때
곡식 낟알의 푸른 껍질까지는 생기지만 내용물은 전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를 알고 믿은지 상당히 오래 되었으나 의와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성도들의 대
부분은 이 세번째 부류의 땅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기운을 막았고 - 헬라어의 문자적 의미로는 '숨을 막아 질식시키는 것'을 말한다.
한편 영적인 의미로는 이 '숨' 또는 '기운'은 프뉴마(* )를 번역한 말
로 '성령'의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가시떨기가 '기운을 막았다'함은 믿는 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 나가는 모든 영적생활을 훼방하거나 혼돈시키는 것을 말한
다. 길가밭과 돌밭의 경우는 주로 밭내부가 문제였으나 여기 가시밭은 밭 외부가 문
제임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앞의 경우들은 마음 밭이 아예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이지만 이 경우는 마음 밭 자체는 쓸만한데 그 마음 밭에 영적 성장에 장애가 될
만한 부정적 씨앗이 더 많은게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이
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마음 밭 내부도 좋아야 하지만 외적으로 각종 신앙적 장애
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기운찬 영적 생명력과 진취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3:8
좋은 땅 - '좋은'의 뜻으로 사용된 '칼로스'(* )라는 말은 자연의 아
름다움과 도덕적으로 선한 상태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좋은 땅이란 땅이 기름지고
수분이 충분할 뿐만 아니라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위치하며, 적절한 지력(地力)이 보존
되어 있고(레 25:4, 5), 그리고 또 잡초들과 같은 씨앗의 성장에 불필요한 것들이 미
리 제거된 순수한 땅을 가리킨다. 이는 결국 이 비유의 원래 의미와 연관시켜 생각해
본다면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혼의 심지가 깊고 성실한 자, 신앙적 줏대(fixed
principle)가 있고 진리에 대해 순박한 자를 가리킨다 하겠다.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 -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의 놀라운 수확량은 4분
의 3의 상실, 즉 길가, 돌밭,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으로 인해서 생겨난 모든 손
실을 충분히 보상하고서도 남음이 있었다. 한편 결실의 창이에 대해서 포세트
(Pausett)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삼십 배는 가장 적은 결실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
며, 육십 배는 중간 정도의 결실이며, 백 배라고 하는 것은 한 개의 곡식 낟알이 맺을
수 있는 최고의 결실을 나타내기 위한 예로서 사용된 숫자이므로 모든 결실이 항상
30, 60, 100배의 숫자로 거두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경우에 따라서 200
배 혹은 300배 까지도 결실을 맺을 수 있다(Herodotus). 어찌되었든지 이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데에 정도의 차이가 있었듯이 결실을 맺는 데에도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음
을 보여 준다.
결실을 하였느니라(* , 에디두 카르폰) - 헬라어 원
문은 미완료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결실이 어떤 한계점에 도달할 만큼 겨우
이뤄진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생명력 넘치게 결실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한편
여기 결실은 (1) 내적으로는 복음 씨앗을 받은 각 성도의 영적 진보를, (2) 외적으로
는 구속사 전개에 따른 천국 시민의 숫적 증가를 동시에 가리킬 수 있다.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성경의 여러 용례에서 '귀'는 복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자주
등장한다. 즉 귀는 이해력과 아울러 순종하려는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
였던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 개념을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물로 대치시켜 표현하는
것은 특히 히브리인이 즐겨쓰던 표현법이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
함이며 따라서 그 말씀을 욕으로 여겨서 즐겨 듣지 않는다고 하였다(렘 6:10). 이러
한 경우에 그들은 영적인 귀머거리인 셈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귀있는 자'란 하나
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분별력이 있는 자요 그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는 마
음을 준비하는 자를 의미한다. 한편 이는 비유 자체가 갖는 이중 목적, 즉 순종하는
자에게는 더욱 뜻을 명료하게, 순종할 의사가 없는 자에게는 오히려 참 진의를 숨기기
위한 목적과 일맥 상통(一脈相通)하는 말이다.

=====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 여기서 제자들이라고 해서 '12사도'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평행구절인 막 4:10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곳에는 '함께 한 사람
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 묻자오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예수께 나아온 제
자들의 정체(正體)는 그렇다 해도 이들이 예수께 나아온 시점은 분명치 않다. 36절의
표현과 연결지을 때에는 군중집회중 잠시 틈을 내었을 때의 일로 볼 수 있고 시간적
순서를 무시한 마태의 기본적 편집 태도로 보면 아예 군중 집회가 완전히 파(罷)한 뒤
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일반 군중들 중에서 소수 제자들이 특별히 예
수께 나아왔다는 사실만은 중요하다. 그들은 예수 앞으로 나아오기까지 먼저 예수의
계신 곳을 찾는 수고의 과정을 겪었으며(연단), 바닷가에서 만난 예수의 비유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참고 기다린 이후에(인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를
제대로 알기 위해 예수께 나아와 질문을 하였으며(적극성), 그 결과 그들은 천국 도래
의 비밀을 알게 되는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어찌하여 ...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 이 물음은 이중적인 뜻을 담고 있다. 하나
는 비유의 사용 목적에 관한 질문이며, 다른 하나는 방금 말씀하신 비유의 의미에 관
한 질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11-17절까지는 비유 사용의 목적에 대하여 가르치시
고, 18-23절까지는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해석해 주시고 있다.

=====13:11
천국의 비밀 - 여기서 먼저 '비밀'(* , 뮈스테리온)은 원래
'닫다', '가두다'는 의미의 '전수(傳授)받은 자'란 뜻인 '뮈스테스'
(* )가 파생되었고, 이 '뮈스테이'에서 바로 '뮈스테리온'이 파생되었
다. 그런데 혹자는(Robertson) 이 용어를 단순히 동방의 신비 종교의 입문, 교리 교
육 등에 관계된 용어로만 단정짓지만 오히려 이것은 어느 정도의 종말론적인 비밀을
지닌 셈족어의 '라즈'(* )라는 말과 연관짓는 것이 좋다(R. E. Brown). 이
말은 다니엘서에서 언급된 바 있는데(단 2:18, 19, 27, 28, 30),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이 미래에 일어나게 될 징조임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이 헬라어 '뮈스테
리온'은 히브리어 '소드'(* , 비밀)를 반영하는데, 이 '소드'는 사해사본에서
확실히 발견할 수 있듯이, 천상의 회의에서 유래된 말이다(Brown). 결국 '뮈스테리
온'은 하나님의 계획 또는 뜻으로서, 때로 은밀한 말로 전달되기도 하며, 선택받은 자
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항상 종말론적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 한편 '천국의'라는
말이 비밀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비밀'이라는 말은 천국에 관한 내용이 문자
그대로 '닫아 둔 것'(* )이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천국
에 대한 일은 인간 스스로는 결코 알거나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그것을 닫아 둔
것을 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영역의 진리임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본문에 있어서 천
국비밀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
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킬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결코 비밀
이 아닌 공공연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천국의 비
밀이란 유대인들은 상상조차 못한 천국이 역사 안에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을 의미한다(Ladd).
너희에게는 ... 저희에게는 - '너희'는 12제자와 함께 주님에게로 모여든 소수의
무리, 즉 영적 의미로는 남은 자(remnant)들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에 있는 자
들이다. 그러나 '저희'는 외인들(* , 토이스 여소)로서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저희에 속하는 자들은 당장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어
차피 우리는 비유를 깨닫는 자의 놀라운 은혜를 허락받지 못한 자들이므로 비유를 못
알아 듣는 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은혜 밖에 있음은 하나
님께서 그들에게 은혜주시기를 싫어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요 3:16; 딤전 2:4; 벧
후 3:9),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깊이
고찰할 때 우리는 신학의 한 핵심인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심각한 문
제에 직면하게 된다(엡 1:3-13강해 참조). 그리고 '저희'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주어진 은혜의 말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
는 유대교권주의자들, (2) 병고침, 오병이어의 기적만을 기대하고 모여든 군중들로,
결국 그들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예치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김
을 당할 것이다(25:30).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밖에 있는 '저희'의 자리가 아니라 예
수 안에 있는 '너희'의 자리에 있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13:12
있는 자 ... 없는 자 - 이 말은 격언적 교훈으로서 마치 비정한 자본주의적 논리에
예수가 동조(同調)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는 물질계에 객관적으로 나타나
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심으로써 영적 차원에서도 진리를 깨달은 자는 더욱 더
깨닫게 되고 진리를 거부한 자는 오히려 더욱 더 비참해 진다는 사실을 빗대어 말씀하
신 것으로 조소(嘲笑)가 아니라 경고의 말인 것이다. 여기에서 있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자를 의미하며, 없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거나 천
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있는 자나 없는 자가 공통으로 가
지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것'이며 그가 행한 기적들을 '본 것'이
다. 그러나 없는 자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그 보고 들은 것을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
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해 오고 있다고 하는 깨달음이
다. 깨닫고 믿는 자에게는 그 나라에 참예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며 영생이 보장되
어 있으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그에게 베풀어졌던 천국복음 마저도 악한 자들에게 빼
앗기게 됨으로써 마침내 영원한 멸망에 처해 질 수 밖에 없다.

=====13:13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 11절이 비유를 사용하는 궁극적 원인이
라고 한다면 본 구절은 그 현상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사실 그대로 말해
도 그들을 수동적으로 보자면 알아듣지 못할 것이고 적극적으로 보자면 아예 알아들으
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보는 것(seeing)이 그대로 아는 것
(knowing)이 되지 못하며, 듣는 것(hearing)이 바로 깨닫는 것(perceiving)이 되지 못
하는 것은 결국 영적 불구자의 심령 상태, 곧 영적 소경(사 59:10; 막 4:12; 요
12:40; 롬 11:25), 영적 귀머거리(렘 6:10; 겔 12:2; 슥 7:11; 행 28:26)인 죄인의 영
혼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13:14
이사야의 예언이 - 예수께서 인용하신 이사야의 예언은 사 6:9, 10에 해당하는 70
인역(LXX)의 번역을 옮긴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두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 이 문장은 이사야 본문에서는 문자 그대로 미래에 대한 직접적 예언이 아
니라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선지자 소명을 주시는 중에 백성의 완악성(頑惡性)을 꾸짖
는 말로 주신 간접적 예언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 말씀이 당시의 비유를 듣는 무리들
의 심령 상태에도 잘 적용되었기 때문에 동질성(同質性)이란 측면에서, 즉 이사야의
말이 당시의 무리에게도 잘 적용된다는 측면에서 예언으로 보았던 것이다. (2) 이하
인용된 14, 15절의 말씀은 70인역(LXX)의 번역을 옮긴 것으로서 문맥이 조금 불분명한
감(感)이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사야서의 해당 본문 자체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
을 듯하다. 어찌되었든 이 말씀도 11절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만 살펴서 형식논리
로만 생각한다면 백성이 악하기 전에 마치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악하게 만드신 것처
럼 오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실(其實)은 스스로의 자유 의지(free will)에 따라
완악해진 인간을 하나님이 그대로 방치해 두시겠다는 구체적 의지를 강조 표명한 것으
로서, 즉 사태에 대한 당신의 주권적 작정의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서 이는 11절에 인
용된 바대로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 의지란 심오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이루었으니 - 이에 해당되는 헬라어 동사 '아나프레루타이'
(* )의 시제는 현재 완료형이라기 보다는 진행형으로 보아
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이사야의 해당 본문이 예수 자신의 시대에까지 적용되고 있음
으로 해서 예언적 본문이 된 것이라는 예수의 해석을 가능케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동사를 진행형으로 보면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은 계속 적용되고 있는 것으
로서 일부 사람들이 복음 선교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는 현상적 원인(13절)과 그렇게
된 궁극적 원인(14절)을 잘 이해할 수 있다.

=====13:15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 '완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퀴노'
(* )는 살이찌고 둔하여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생명력으로 자
기 사상과 자기 의지에 제 스스로 살찐자가 되어서 영적 감수성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
킴을 알 수 있다. 실로 인간이 자기(육체적 삶) 중심적일 때 필연적으로 하나님(영적
생명력)과의 관계는 단절, 상실되고 만다. 이것은 곧 허무와 절망의 제 1 보(步)이
다.
듣기에 둔하고 - 여기서 '둔하고'란 말의 원뜻은 '눌러 내리다'(oppress), '짐을
지우다'(burden), '가리우다'(curtain)로서 가는 귀가 먹거나 말귀를 못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듣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를 말함을 알 수 있다.
눈은 감았으니 - 여기서 눈을 '감다'로 번역된 '캄뮈오'(* )는 원래
'내리닫다'의 뜻으로서 눈에 밀납이나 기름 등을 바름으로써 억지로 감기게 한다고 하
는 의미가 있다. 실지로 고대 사회에서는 누에 밀납을 칠해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도
록 하는 형벌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스스로 눈을 감아 진리 보
는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자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돌이켜(* , 에피스트려소신) - 이 말은 하나님 보다는
죄된 세상을 더 사랑하던 사람이 그 전존재를 하나님께로 복귀하는 행위라는 뜻으로서
'회심' 혹은 '회개'(* , 메타노이아)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
'돌이킴'은 신앙 생활로 들어가는 제 1단계로서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5:7; 고후
7:10)과 제 2단계로서의 새생활에로의 전반적인 변화(막 1:15; 눅 13:3, 5; 행 2:38)
로 나뉘어 질 수 있다. 물론 제 1단계의 자각은 죄된 인간 자신의 반성과 회개에 의
해서만 가능하고, 제 2단계의 새로운 변화는 하나님께 '고침을 받게' 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보다 일차적인 문제는 인간 스스로의 돌이킴(자각)이
다(눅 15:17).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자각 조차 하지 않는 완악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길로 그대로 가도록 허락하심은 그들을 벌하시고자 결정하신 연고이다.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 '...하지나 않을까'라는 뜻의 미래 직설법 접
속사 '메포테'(* )의 지배를 받아 '내가 고치다, 내가 낫게 하다'의 뜻
인 '이아오마이'(* )가 미래형으로 변형되었다. 이 문장을 영어로 고
치면 'lest ... and I should heal them'으로, 주절과 합쳐진 전체 문장의 주어는 그
들(they)이 된다. 따라서 이사야 본문에서는 두려워하는 주체가 하나님 자신인 것과
는 달리 본서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은 백성들 스스로가 돌이키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될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
을 받게 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로
부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증거를 접하고서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
은 행위를 말함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유대인에게, 나중에 이방인에게 전해야 하
나, 유대인들이 이를 거부하고 멸망받을 자로 자처한 행위를 말한다(행 13:46). 이것
은 그들의 영원을 결정짓는 지상 최대의 실수였다.

=====13:16
너희 눈은 ... 귀는 - 단순히 보고 듣는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보고 듣는 사건의
의미를 탐구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영적 의지와 감수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문장
을 '너희 눈은 보니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으니 복이 있다'로 보다 정확히 번역해 보
면 15절의 닫힌 눈과 막힌 귀와 잘 대조가 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이나 천국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구평히, 객관적으로 제시되나 그
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주관에 따라 그야말로 극과 극의 결과를 가져옴을 발견하게 된
다. 이를 역(逆)으로 보면 천국 복음은 들으면 좋고 안들으면 그만인 선택(option)의
문제가 아니라 생과 사를 가늠하는 필수(obligation) 문제임을 발견하게 된다.
봄으로 ... 들음으로 - 여기 보고 듣는 대상은 11절에 전제한 천국의 비밀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 비밀의 구체적 내용은 지금껏 구약에서는 예언으로만 존재하던 천
국, 즉 메시야의 나라가 이 역사 안으로 들어 와서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주권)에 의하여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무리들(국민)을 규합하여 이 세상에서 새
하늘과 새 땅(영토)에 이르게 하기 위해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16
절은 단지 개인적 관점에서 지금 주어진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복이 있다는 사실
만을 말하지만 17절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너희들은 이전 시대 사람들은 보고 또
들으려고 원해도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없었는데 이것이 너희에게는 이미 주어져 있음
을 새삼 강조하면서 예수 이후 시대 사람들의 구속사적 특권과 책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복이 있도다(* , 마카리오이) -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행복을
찬양하는 말로 사용되었다(5:3). 성경적 용례를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듣
는 자들, 이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눅 1:45), 헛된 요구를 하지 않는 자
들(요 20:29),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깨닫는 자들(요 13:17)이 각각 복이 있는 자들이
라고 불리웠다.

=====13:17
내가 진실로 - '진실로'라는 뜻의 헬라어 '아멘'(* )은 구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 즉 축복이나 저주 등의 수락(受諾)을 확증하는 것
으로서(대상 16:36), 또는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입증(대상 16:36)하기
위하여 기도와 송영의 끝에 붙여서 사용하였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말과 행위 그리
고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찬양이 타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구속력이 있는 것임을 인정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말을 당신이 특별히 강조하고 싶으신 내
용에 앞서 사용함으로써 이하 전개되는 말씀의 진정성(verity)과 진실성(truth)을 미
리 확증하시면서 우리를 각성시키고자 하실 때 사용하셨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 못하였느니라 - 많은 선지자와 의인(righteous men)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뤘던 구약의 선지자들과 그밖의 사람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고대(苦待)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메시야를 영접했던 사람들 또는 그 이
후의 우리들이야말로 단지 예언을 통해 메시야를 대망했을 뿐이며(히 11:13, 39) 믿음
의 선진(先進)들이 열망했던 그 영광스런 특권의 실질적인 수혜자(受惠者)인 것이다
(벧전 1:10-12, Homer A. Kent, Jr). 한편 그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 그들의
개인적 자질이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뒤졌거나 또는 그들이 듣고 보기를 싫어하였기 때
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세워진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
의 질적 차이 때문이었다. 신약 시대의 우월성은 그 신약 시대에 속한 우리들로 하여
금 교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1) 더 큰 감사와 (2) 더 큰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원해서 신약 시대의 축복이 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많이 받은
자가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개 때문이다. 한편 이런 구약과 신약의 질적 차이
에 대한 언급으로는 11:11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신약 시대의 우리는 그 위대한 구약
의 이사야와 다니엘, 아브라함과 다윗도 보고 듣지 못한 천국의 위대한 비밀을 알게된
큰 축복을 받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13:18
그런즉 ... 들으라 -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 안된 '너희'(* , 휘메
이스)란 단어가 특히 강조된 구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이해하라'는 정도(De
Wette)의 의미 이상의 뜻으로서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갖기를 원하고 완악한 자
들이 단호히 거부했던 영적인 진리를 알 특권이 '너희에게'까지 확대되었다는 측면에
서 '너희는' 반드시 들어야만 한다는 강조적 구절이다.

=====13:19
아무나(* , 판토스) - '모든 것',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파
스'(* )속격으로, 본문에서는 '들으면서'(* , 아쿠온토
스)도 '깨닫지 못하는'(* , 쉬니엔토스)의 뜻인 두 분사를 취하
여 '누구든지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Ereryone hearing ... and not
understanding)의 뜻으로, 말씀을 듣고도 현재 깨닫지 못하여 그 말씀을 잠시 유보하
거나(행 24:25), 또 다른 말씀, 즉 거짓 진리에 대해서도 귀기울이며 이것 저것을 망
서리는 사람은 누구나가 다 같이 그리스도의 천국 진리의 말씀을 잃게 된다고 하는 말
이다.
천국 말씀 - 막 4:14과 눅 8:11에 의하면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 씨
는 기록된 말씀들로서의 구약의 율법을 가리키기 보다는 아직 기록되지 않은 말씀, 즉
예수의 복음이며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천국이 도
래했다는 벅찬 내용으로 전파되고 있는 말씀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으므로(요 1:1) 그분 자신이 바로 보이지 않는 씨이다. 이런 점
에서 성령은 살아있는 말씀으로 오신 그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요 5:39).
악한 자 - 마가는 이를 '사단'이라고 (막 4:15) 했으며, 누가는 '마귀'라고(눅
8:12) 표현하였는데 이들의 역할은 모두 사람의 마음에 뿌리워진 씨앗으로 하여금 결
실을 맺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직접적 개입이나 그 하수인(새
들)을 통해 복음의 청취자가 지닌 영적인 은혜를 즉각 앗아간다(Homer A. Kent, Jr.,
렘 5:26, 27). 실로 악한 자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가 하
면(벧전 5:8)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진리의 말씀에 회의하고 외면하는 자
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파멸의 길로 이끈다.
길가에 뿌리운 자(* , 호돈 스파레이스) - 이는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3절에서의 '씨 뿌리는 자'
(* , 호 스페이론)와 대구를 이룬다. 즉 '뿌리운 자'는 씨를
받는 자, 즉 선포하는 말씀을 듣는 청중을 가리키며, '씨 뿌리는 자'는 선포자로서의
예수, 혹은 제자들, 혹은 전도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은 아직 말씀을 받아 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진지하게 경청하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로서, 말씀에 대해 전혀 반응
하거나 응답하지 않는 청중(the unresponsive hearer)이다. 그 사람들은 '새'로 비유
되고 있는 사단에 의해 결국 말씀에 응답할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 '씨가 뿌리워진 돌밭'과 같은 사람이라 함은 흙이 얇은
관계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싹과 비유하여 '심지가 굳지 못하며 경박한 마음의
청중'(the shallow hearer), 또는 철저히 감정적인 청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진리를 듣는 순간 그것을 긍정적
으로 받아들이고 즉시 신앙 생활을 시작하지만 성장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시련들(태양)에 대해서 인내로써 대처하지 못하고 그 시련에 의해 넘어지는 자이
다.
기쁨으로 받되 - 말씀을 들을 때 기쁜 마음을 가지고서 귀기울이거나 또는 말씀을
기쁨의 대상, 즉 은혜나 복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의
말씀을 인류 구원을 위한 참된 진리로 알게 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러
한 절대적 가치를 인정(agree)하면서도 그들은 확신(assurance)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
한다는 것이다.

=====13:21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 여기서 뿌리가 없다는 것은 결국 복음에 대한 그 개
인의 인격적 확신이 결여(缺如)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에 대해 누가는 '잠깐 믿다
가'라는 연결구를 덧붙임으로써(눅 8:13) 복음에 대한 즉각적 수용 뿐만 아니라 인격
적 확신에 근거한 지속적인 보존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환난이나 핍박 - 환난을 뜻하는 말인 '들리프시스'(* )는 '밀어대
다, 몰려대다, 답답하게 하다'의 뜻인 '들리보'(* )에서 나온 말로서, 삶
의 여러 조건들을 통해서 억압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핍박을 뜻하는 말인 '디
오그모스'(* )는 도망가는 노예를 잡기 위해서 개를 보내 추격하게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디오코'(* )에서 나온 말로서, 본문에서
는 종교상의 '박해'를 가리킨다. 결국 이 두 낱말은 한 개인의 생활 전반에 걸쳐 만
날 수 있는 모든 고난과 거침돌을 의미한다.
넘어지는(* , 스칸달리조) - 함정, 올가미, 덫 또는 죄를
짓게 하는 유혹을 뜻하는 '스칸달론'(* )에서 나온 말로서, 여기
서는 죄에 빠지다, 배반, 배교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또한 환난이나 핍박으
로 인해서 생겨난 갈등으로 어리둥절하거나 휘청거리는(stumble)상태를 의미하기도 한
다.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 자신의 내부적인 문제와 갈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
위의 환경, 물질 등의 외부적 요소가 가져오는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방황
하는 사람의 상태를 의미한다. 즉 가시떨기 밭은 그 토양 자체는 비옥하나 밭 위가
손질되지 않아 유익한 곡식과 가시떨기가 함께 자라난, 즉 순수와 세속이 혼재(混在)
된 자아의 분열된 심적 상태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과 세상의 재물을 겸(兼)하여
섬기려는 사람이며, 세상의 유혹에 귀기울이므로써 말씀이 그 마음 안에서 질식(窒息)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이를 한마디로 말해서 '세속에 물든 청중'(the
worldly hearer)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인격은 결단코 영적 성숙에 이르지 못한
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 세상의 염려란 내세(來世)에 대한 관심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6:25-34). 즉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눅 12:22)하는 현세 위주의 생각으로 영원한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와 용
기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서 '염려'라는 뜻의 헬라어 '메림나'
(* )는 '마음이 나뉘다, 분열되다'라는 뜻이다. 실로 감정과 생각과
판단이 세상을 향한 욕구로 혼탁해지고 나누어진 사람은 모든 일에 있어서 정(淨)함이
없다(약 1:8). 그리고 재리의 유혹은 '재물의 즐거움'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부요한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더 많은 재물을 얻고자하는 욕망에 빠지게 하는 것을 의
미한다. '재리'란 '많다', '풍성하다'의 뜻에서 나온 '플루토스'
(* )라는 말로서, '풍성한 재물' 혹은 '부요함'을 가리킨다. 그러므
로 재리의 유혹이란 재물 자체에 대한 필요 욕구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위하여 필
요 이상의 재물을 쌓아두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오류(誤謬)에 빠짐을 의미한다. 그
러나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주께서 그 쓸 것을 미리 알고 채워주시므로 현재의 삶에
서 겪게 되는 물질의 빈곤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또한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한 '부'보다는 하나님께 부요함으로써 영원한 기쁨과 세상이 주는
거짓 기쁨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말씀이 막혀 - 여기서 '막혀'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프니게이'
(* )는 '질식시키다', '숨막히게 하다'는 뜻이다. 이는 세상 욕
심이 영혼의 양식과 청결한 공기 및 거룩한 햇빛을 날마다 공급받아야 하는 우리의 영
적 숨통을 졸라 질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정녕 말씀의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
다는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주는 환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 세상이 지닌 파괴
적 영향력으로 인해 거룩한 신앙적 성품과 영적 생명력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결실치 못하는 자 - 천국 복음을 수용한 자의 궁극적 목적은 한 인격에 내재한 복
음의 넘치는 생명력으로 인해 풍성한 열매를 맺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열
매 맺는 전(前)단계(싹, 잎, 줄기 등)가 아무리 탁월하다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 - 이는 귀기울여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순종하는 겸손한
마음을 소유함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갈 5:22, 23) 성공적인 청중들(the
successful hearer)의 상태를 일컫는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 철저한 자기 부인과 겸손한 수용의지를 통해 복음을 듣
고, 수납(受納)하고, 그에 합당하게 생활함으로써 풍성한 영적 결실을 이루게 된 자를
가리킨다.
혹 백 배 ... 혹 삼십 배 - 소출(所出)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사의 다양성 및 천국
복음을 받아들인 각 개인의 기질과 능력의 차이로 이해해야 한다(25:24-30).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결실을 한 땅이라 해도 결실했다는 그 자체로서 '좋은 땅'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데 유의해야만 한다.

=====13:24
천국은 ... 사람과 같으니 - 여기서 ' ... 과 같다'는 말은 아람어의 관용적 표현
인 'X의 경우는 Y의 경우와 같다'는 뜻을 반영하고 있다(Jeremias). 따라서 본 구절
은 '천국은 ... 한 사람의 상황(경우)과 같으니'라고 해석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
다.
좋은 씨 -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한 종류의 좋은 씨앗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 반면 본문의 좋은 씨는 마지막 주님의 심판을 직면(直面)해야 하는 성도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제 밭에 뿌린 사람 -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하는 설명(37절)에 따르면
본문의 구절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대하여 그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말씀이다.
주의 몸된 교회만이 그의 것이 아니라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다(시 24:1). 따라서 '제 밭'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창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말과 의미상 동일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이후에 그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관여나 관심을 기울
이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처럼 사람의 거듭난 탄생을 위하여 세상을 보호하시
고 가꾸신다. 세계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쓸모없는 땅이 아니라 악이 만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좋은 땅이다.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 여기서 '잘 때에'란 농부의 태만함을 꼬집는 말이 아니라 원수
가 농부 모르게 슬그머니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를 암시하는 말이
다. 사실 악한 어두움의 세력은 주로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경계(警戒)도 하지 않는
평화와 안식의 시간인 밤에(at night) 활동한다. 여기 농부의 원수도 농부가 휴식을
취한 밤에 몰래 들어와 악한 씨앗을 뿌리고 간 것이다. 한편 그 당시 로마에서는 보
복하기 위해 상대방의 밭에 가라지와 같은 잡초들을 뿌리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라지(* , 지자니온) - 독보리(lolium temulentum)의 일종으로
'가짜 밀'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싹의 모습이 밀이나 보리와 아주 흡사하여 실제로
이삭이 패기까지는 얼른 식별하기 어렵고, 잘못해서 먹었을 경우 급한 설사와 구토 등
의 여러 증상이 있으며, 심할 경우에는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예수의 설명에 의
하면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로서(38절), 사람들을 의의 자리에서 넘어지게 하는
자이며, 또한 불법과 부정을 행하는 자들이다(41절). 그들의 특징은 (1) 위장성(僞裝
性). 곡식과 가라지가 싹이 난 초기부터 결실을 거둘 때까지 사람들의 눈에 잘 분별
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끝이 올 때까지는 성도들과 잘 분간되지 않도
록 위장되어 있다. (2) 잠복성(潛伏性). 이삭이 나오기까지 평상시에는 곡식과 마찬
가지의 외형과 생장 과정을 보이는데 일단 이삭이 패면서부터 알곡과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즉 가라지들이 평소에는 잠복해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그 감춰진 마각(馬
脚)을 드러내 놓고 알곡에게 해를 끼친다. (3) 해독성(害毒性). 가라지는 알곡 뿐
아니라 인체에까지 큰 피해를 안긴다.
덧뿌리고 갔더니(* , 에피스페이로) - '위에'를 뜻하는 말인
'에피'(* )와 '씨를 뿌리다'의 뜻인 '스페이로'(* )의 합성어
로서, 뿌린 시 위에 한 번 더 씨를 뿌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레 19:19과 신 22:9에서
는 다른 종류의 씨앗을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는 규정이 있다. 이는 두 씨앗 중 어느
한 씨앗의 열매조차도 올바로 수확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조항인 동시에 여호와 신
앙의 순수성과 비타협성을 상징하는 교훈적 율법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과 민족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가나안의 이방신앙과 그들과의 혼혈 결
혼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악한 씨앗, 곧 가라지의 씨앗을 곡식의
씨앗 사이에 덧뿌려 놓은 원수의 행위는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모두 부정한 것이었
음이 명백해진다.

=====13:26
결실할 때에 - 열매로써 그 나무나 씨앗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7:17). 여기 가라지도 생장기에는 그 악한 실체를 감출 수 있을지 모르나 그 결실기
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결실의 때는 영
적으로 최후심판이라고 하는 마지막 추수기 이전까지의 기간으로 악의 세력과 죄악의
관영이 그 절정에 달한 시기를 상징한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때는 고
난의 때이고 신앙의 시련을 통과하는 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과 영생이라고 하는 주님의 약속이 곧이어 실현되려고 하
는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10:22).

=====13:27
집 주인 - 씨뿌리는 자의 비유(3-23절)에서는 예수를 비롯한 12제자들과 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씨뿌리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가라지 비유에서의 씨를 뿌
리는 일은 오로지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비록 종들이 가라지의 연유(緣由)를 알지 못
하는 상황에서도 그 집 주인은 직관적으로 그것이 원수의 방문에 의한 것임을 감지했
던 것이다. 이러한 선과 악의 구별 및 그 기원에 대한 완전한 통찰력을 가지신 한 분
은 오직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뿐이시다.
주여(* , 퀴리에) - '주'라고 하는 호칭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던 표현
이다. 예수를 부를 때 '주'라고 하는 호칭과 '선생'이라고 하는 호칭이 자주 사용되
고 있는데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자들은 주로 제자들(8:25; 14:28; 16:22) 또는 예
수가 메시야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8:8; 20:30)이며, 예수를 '선생'으로 부르는
자들은 바리새인, 서기관 등의 유대 지도층을 중심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를 '주'라 함은 예수를 하나님으로서,
즉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선생'이라고 함은 그를 다만 예언자들중
의 하나 또는 본받고 따라야 할 모범으로서만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
는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는 대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시므로 마땅히 우리가 불러야
할 호칭은 '랍비'(선생)가 아니라 '퀴리오스'(주님)이다.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 종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사실은 바로 '좋은 씨 사
이에 어떻게 가라지가 섞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악이 이 세상 혹은 교회에 들어와 있는
가 하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적 물음이다. 악은 인간의 생명과 삶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해를 입히는 유형, 무형의 부정적 실재로서 이는 현상학적으로 말하는 선
(善)의 부재 혹은 결핍의 상태(Augustine) 이상을 의미한다. 아무튼 '인류역사의 모
든 시대에서 사상을 괴롭혔고 신앙을 시험한 이 악의 기원에 관한 악명높은 물음'
(John S. Whale)에 대해서 성경은 종말의 날에 모든 악은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파
멸당할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롬 16:20; 요일 3:8; 계 20:2, 10).

=====13:28
원수 - '미움', '증오'의 뜻인 '에크드로스'(* )에서 파생된 말로
문자적인 의미로는 '원수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부정하는 자이며 예수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성도들을 미혹하고 박해하는 적그리스
도(antichrist)이다.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 종들의 이 두번째 질문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밭에 있는
가라지를 지금 당장 모조리 뽑아 버리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의 이
러한 성급함과 경솔은 추수(秋收)의 '때'(* , 카이로스)를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영적 우둔함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13:29
가만 두어라 - '그대로 가만 두고 지켜보도록 하라'는 의미로서, 이는 바로 이 세
상의 악의 세력들에 대한 주님의 지혜롭고 여유있는 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악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악의 근절(根絶)을 아예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
께서 사단의 악행을 허락하시는 경우는 하나님의 은혜가 일층 더해지기 위한 도구로
사단이 이용되는 때 뿐이다(욥 2:4-7; 눅 13:16).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 곡식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과 염려 때문에 주님께서
는 악을 멸하시지 않고 있다. 가라지는 보통 곡식보다 더 강한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리지를 뽑을 때는 종종 어리고 약한 곡식이 함께 뽑힌다. 따라서 곡식에 대
한 주인의 관심이 가라지에 대한 관심에서 생겨난 종들의 열의 보다 우선적인 것이다.

=====13:30
추수 때에(* , 엔 카이로 투 데리
스무) - 추수는 마지막 심판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비유이다. 심판이 행해지는 종말의
때는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시간적 의미를 가짐과 함게 성취, 완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나버리며 최후의 대
심판에 의해 악한 자는 영원히 멸망할 곳으로, 의인은 추수가 끝난 마당에서의 축제와
같이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함께 자라게 두어라 - 여기서 '두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테'
(* )는 '완전히 포기하여 버린 상태대로 방치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결국 집 주인의 주권적 명령으로서 '내가 그대로 자라게 내버려두기로 결정했으니 너
희들은 관여치 말라. 너희들의 소관(所關)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 비유는 로마 제국의 여러 황제들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아 수
많은 순교자와 배교자를 낼 수밖에 없었던 초대 기독교회의 현실에서 자주 인용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대박해때 어쩔 수 없이 배교(背敎)를 했던 많은 사
람들이 박해가 끝나자(A.D. 4C경)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자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들의 행동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교회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도나티스트파) 한 번 배교하여 파문(破門)을 당한 사람은 영
원히 교회에 들어올 수 없는 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점차 심하여지자
성(聖)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교회는 완전히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들만이
모이는 완벽한 곳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치 못한 자들을 함부로 제거해서 교
회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실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
을(16:17, 18)토대로 하여 세워진 하나의 거룩한 몸이다. 그런데 세상의 교회는 절대
완전한 천국 상태에 있다기 보다는 세상 끝날까지 알곡과 가라지, 즉 의인과 악인의
복합체(複合體)의 상태로 존속(存續)할 것이다.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 결실기에 이르게 되면 가라지는 알곡과 확연
히 구별된다. 이로써 추수 일꾼은 손쉽게 가라지를 수거(收去)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알곡보다 먼저 가라지를 거두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알곡이 가라지보다 많이 수
확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와 더불어 가라지를 단으로 묶는다고 하는 표현은 가라지의
숫자도 꽤 많은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일상적인 추수 방법, 즉 알곡을 먼저 단으로
묶어 곳간에 들인 다음 쭉정이는 한 곳에 모아서 불사르는 것과는 달리 가라지를 먼저
추수하는 독특한 방식은 재림하신 예수께서 그의 대적 마귀의 우두머리를 먼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처넣기 위에 결박하는 것으로부터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신다는 사실
을 암시한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죄악이 완전히 도말되는 것으로부터 완성될 것이
다.
곳간(* , 아포테케) - '위'를 가리키는 말인 '아포'(* )
와 '두다', '쌓다'의 뜻인 '티데미'(* )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물건을 넣어두는 창고나 곡식을 쌓아두는 곳간을 가리킨다. 이는 예수께서 다시 오셔
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와 함께 거하실 안전한 처소, 곧 하늘에 예비해 두신 하나님
의 집으로 의인(義認)된 성도들만이 들어가기를 허락받는 곳이다.

=====13:31
겨자씨(* , 시나피) - 겨자는 배추과의 일년생 또는 이년생 풀로서,
씨가 많고 향기롭기 때문에 양념과 약재로 사용되며 잎과 줄기는 식용으로 이용된다.
겨자씨는 다른 모든 씨앗 보다 작은 것(32절)이지만 생장력(生長力)이 대단하여 보통
1m 정도로 크게 자라며, 특히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약 3m 가량 자라 마치 나무처럼 무
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 중에는 그것을 정원수로 심기도 했다고 한다(F.R.
Fay). 이러한 겨자씨를 예수께서 천국에 비유하신 것은 겨자씨가 지니는 몇 가지 특
성 때문이다. (1) 은밀성. 겨자씨의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는 드러나
지 않는 방식으로 성장해 나간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확연히 노출되지 않은채 조용히
성장해 간다. (2) 확장성. 겨자씨와 마찬가지로 천국이 비록 현재는 미약하고 보잘
것 없게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나중은 창대해질 것이다. (3) 변화성. 겨자씨는
크기에 반해 놀랄만한 변화를 남긴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그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
의 아주 작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크고 놀라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마 17:20).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시작과 성숙한 끝맺음의 유기적 결합(Dahl)
으로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고대하는 바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크고 웅장하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예수의 사역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임하였다. 또한 살아있는 씨앗처럼 생명력을 가진 복음의 결
과로서의 교회는 예수 - 12제자 - 120문도에 의해서 발전되어 현재는 온 인류의 구원
을 가능케 하는 큰 나무로 성장하게 되었다.

=====13:32
모든 씨보다 작은 것 - 예수께서 비유로 사용하신 검은 겨자씨(sinapis nigra)는
비교급 '미크로테론'(* )이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가장
작은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 '보다 작은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당시 유대 격언에
서는 가장 작은 것을 의미할 때 '겨자씨 만큼 작은 것'이라고 말했을 만큼 그 크기는
매우 작은 것으로 공동 인식하고 있었다(Buxtorf). 더욱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씨
의 크기가 아니라 씨의 결과인 나무의 크기이다.
공중의 새들 - 겔 31:6과 단 4:12에서의 '공중에 나는 새'는 하늘까지 닿은 나무로
상징된 '대제국 앗수르'의 속국들과 '대제국 바벧론'의 속국들, 곧 제국의 도움을 요
청하기 위하여 모여드는 많은 나라와 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겨자씨 비유에서
의 공중의 새들은 겨자 나무, 곧 천국의 실체가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가를 보여 주는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영적으로 좀더 확대 해석하면 세계 각처에 흩
어져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도 볼 수 있다. 즉 고통에 지쳐 평안과
안식을 갈망하며 쉴만한 곳을 찾는 인생들. 이들은 참 포도나무요 생명 나무이신 그
리스도 안에서만 참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깃들이느니라(* , 카타스케노오) - 천막을 가리키는 말은
'스케노마'(* )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살다' '거주하다'의 뜻을 나
타내는 '스케노오'(* )와 '아래', '밑'을 가리키는 전치사인 '카타'
(* )의 합성어로서, '장막을 세우다', '장막에 들어가다', '진을 치다'의
의미로 민 14:30; 신 33:12; 시 16:9에 의하면 안전하고도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행 2:25에 인용된 시 16:8에 의하면 부활 이후의 삶을 가리키기
도 한다. 겨자씨 비유에서의 새의 깃들임도 역시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
다가 다시 날아가 버리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 방울새와 홍방울새와 같
이 겨자나무에 떼를 지어 지속적으로 깃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13:33
본 누룩 비유는 해석상 여러 견해가 전해진다. (1) 부정적 측면에서, 여자를 악한
존재(슥 5:7, 8), 곧 이세벧(계 2:20), 큰 음녀(계 17:1) 등으로 이해하여 가루로 표
현된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키는 누룩으로 보는 것이다(랍비전승). (2) 긍정적 측면
에서, 교회의 지역적 확장 내지는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 등으로 이해한
다. 물론 두 견해 모두 그 타당성이 있으나 두번째 견해가 더욱 적절할 것 같다.
여자가(* , 귀네) - 누룩의 헬라어인 '쥐메'(* )와 대구를 이
루도록 선택하신 예수의 의도를 살펴볼 수 있게 하는 단어이다. 한편 남자의 활동이
앞의 겨자씨의 비유에서 처럼 외적(外的)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자는 본
문에서의 누룩의 역할과도 같이 집과 교회와 다른 여러 사회공동체 속에서 그 활동이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그 사회를 놀랍게 변혁, 성장시키는 내적(內的)인
변화를 가져온다.
가루 서말(* , 사타 트리아) - NIV성경은 가루 서말을 '많은
양의 가루'(a large amount of flour)라고 번역하였는데 아마도 가루 서말이란 여인이
하루에 빵을 구울 수 있는 최대한의 양을 의미하는 데서 표현된 말일 것이다. 여기서
'말'을 뜻하는 '사타'는 히브리어로는 스아(* )이며 에바의 3분의 1에 해당한
다. 따라서 '서말'은 1에바로서 약 22-23리터에 해당된다. 이것은 구약에서 아브라
함이 여호와의 사자 세 사람을 대접하기 위하여 준비한 분량(창 18:6)이나,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무교전병(無교煎餠)을 만들어 드린 양(삿 6:19), 사무엘의 모친 한
나가 그를 여호와께 드릴 때 제물로 가져가던 소제의 양(삼상 1:24)과 일치한다. 그
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 1오멜(Omer 약 2.34l)로
하루를 지낼 수 있었던 것(출 16:33, 36)에 비추어 볼 때 하루서말의 분량 1에바는 10
오멜에 해당하므로 아마도 가족 9-10명의 하루 세끼 분량의 음식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누룩과 같으니라 - '끓어 오르다', '끓이다'의 뜻인 '제오'(* )에서 유래
한 말인 '쥐메'(* )는 누룩, 효모(yeast)를 가리킨다. 성경에서의 누룩은
보통 교만이나 죄된 욕망(고전 5:6), 또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대적자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부패하고 썩게 하는 요소(16:6; 막 8:15; 눅 12:1)를 가리킨다. 그러나 본
문의 예수의 비유 속에서의 누룩의 의미는 그것의 부정적, 긍정적 결과의 중요성에 있
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낳는 놀라운 변화력과 정복(征服) 능력에 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보잘 것 없이 시작된 천국 복음은 세상
곳곳을 묵묵히 정복해 들어가 그곳의 많은 사람들을 죄된 욕망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진정한 변화의 요인이 되었다.

=====13:34
비유가 아니면 ...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 말씀하지 않았다는 뜻의 동사 '엘랄레
이'(* )는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과거의 단 한 번의 동작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과는 달리 습관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 말이 ' ... 을 제외하
고', '밖에'라는 부사 '코리스'(* )와 연결됨으로써 본문이 예수께서 오
로지 비유로만 이야기하고 다른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았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를 통해 볼 때, 그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비유였던 것은 결코 아
니었다. 본문은 단지 그날은 '천국'을 이해시키고 깨닫게 하기 위해 특별히 비유로만
말씀하셨다고 하는 해석이 더욱 적절하다.

=====13:35
선지자로 - '선지자를 통해서(* ) 말씀하신 바'라는 의미로, 어떤 사본(시
내 사본, 에티오피아 사본 등)에 의하면 선지자라는 말과 더불어 '이사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인용문은 시 78:2에서 인용한 것
으로 (70인역에서는 시 77편으로 기록) 저자는 '아삽'으로 알려져 있다.따라서 이 선
지자는 이사야가 아닌 아삽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사실 대하 29:30에
의하면 히스기야왕은 아삽을 선견자로 부른 적이 있었다. 한편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
의 치하에서 찬송의 책임을 맡았던 베레갸의 아들로서 시편 중 12편의 뛰어난 시(시
50, 73 - 83편)를 지었다. 그의 이름은 헤만과 여두둔과 함께 다윗의 세 악사로서 언
약궤를 에벧에돔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에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특별히 여두둔
과 아삽은 왕의 선견자(先見者)라고 불리웠다(대상 25:5, 6; 대하 35:15).
내가 ... 비유로 말하고 - 이를 원문에 좀더 가깝게 해석하면 '내가 다른 일들과
비교해 가면서 말하고'가 될 것이다.
창세부터(* , 카바볼레스) - 이는 '밑으로'의 뜻인 '카타'
(* )와 '던지다'의 뜻인 '발로'(* )의 합성어로서 '기초', '창
건', '시작'을 뜻하는 말인 '카타볼레'(* )의 소유격이다. 따라서
'창세부터'라는 말은 '세상(코스모스)의 기초가 놓여지던 때부터'의 의미를 나타낸다.
구약에서의 이 말은 '옛부터'(민니 - 케뎀,* )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70인역(LXX)에서는 '태초로부터'(* , 아프 아르케스)로 번역되었
다. 한편 어떤 학자에 의하면 시 78편의 문맥이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
속행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창세부터'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the
beginning of the nation)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은 바
로 전(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의지와 뜻이므로 어느 특정된 한 민족과는 관계없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부터 계획되었던 것일 것이다.
감추인 것들(* , 케크륌메나) - '수수께끼', '가려진 말'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히도트'(* )와 같은 말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소극적 의미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게 하기 위하여 숨긴 것이라고 하는 적극적
의미가 잇다. '창세부터 감추인 것' 또는 '옛 비밀한 말'(시 78:2)은 바로 구속(救
贖)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위들(Lindars)이며 과거의 사건들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크고 깊은 영적 가르침이다. 이것은 이제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밝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전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시는 계시자(啓示者)인 동시에 자신에 대해서 이미 예언, 선포되었던 구속의 역
사를 성취하시는 완성자가 되신다.
드러내리라(* , 에르소마이) - 감추인 것을 가리키는 말인
'케크뤼메나'가 본래 사람이 은밀하게 선언한 것을 의미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에르
소마이'는 '선포하다', '크게 말하다'의 뜻으로 거칠고(rough) 큰(aloud) 한 마디의
'말을 토해 내다', 강물이 콸콸 소리내어 흐르듯이 열정적인 마음으로 '연설을 하다'
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아삽이 비유를 통하여 유대의 지나간 역사와 사건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발표(發表)했듯이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당
시의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대제사장, 서기관 등의 교권주의자들에게는 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고 하는 '시대'(* , 카이로스)의 비밀을 군중들에게 밝히
계시하셨다. 더구나 이 비밀들은 서기관이 율법을 가르치듯이 말씀되지 않았고 마치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을 받아 그 감동 속에서 진리를 선포하듯이 권위에 찬 음성으로
선언되었던 것이다.

=====13:36
무리를 떠나사 - KJV에 의하면 예수게서 무리들을 해산시킨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
며 RSV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떠나사'에 해당
하는 헬라어 '아페이스'(* )는 '아피에미'(* )의 현재 수
동형으로서, '가게 하다'(let go), '보내 버리다'(send away) 또는 '버려두다'
(leave), '포기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께서 들을 귀와 볼 눈을 갖지 못
한 많은 무리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시고 그의 비유속에 무엇인가가 숨기워져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앞서 떠났던(13:1)집으로 다시 돌아오셨음을 나
타낸 장면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36절 이후의 3개 혹은 4개의 비유들(보화, 진
주, 그물, 서기관)의 청중들은 일반 무리들이 아닌 소수의 제자들로 바뀌었으며 비유
의 목적도 깨닫지 못하도록 감추는 것이 아니라 깨우치기 위해, 밝히 알리기 위해 사
용되었으며, 또한 알려진 천국 도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제자들의 계속적인
노력을 촉구(促求)하기 위하여 베풀어졌다.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 '설명하여 주다'의 뜻인 동사 '디아사페손'
(* )은 '뚫다', '통하다'의 의미인 전치사 '디아'(* )
와 '맑은', '깨끗한'의 뜻인 '사페스'(* )의 합성으로 되어진 말로서,
'철저히 말하다', '분명히 가르치다' 또는 '밝히 말하다'의 의미이다. 한편 18:31에
서 이 동사는 '낱낱이 고하다'(report)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아무튼 이 단어는 제자
들이 예수의 비유 중 그 어느 하나도 자신들의 힘으로는 풀거나 해석할 수 없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어떻게든 예수의 말씀을 철저히 알기를 원했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
다. 신령한 말씀은 신령한 영의 도움으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예수께
서는 이처럼 겸손하고도 열정적으로 진리를 알기 원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비밀스런 진
리들을 가르쳐 주신다(10절).

=====13:37
인자 - 복음서 중에 나타나고 있는 '인자'(the Son of Man)라는 표현들은 그 칭호
와 관련된 주제에 따라 (1) 종말의 날에 영광 가운데서 임재하실 묵시적인 의미의 인
자 (2) 고난받다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어가는 인자 (3) 현재 이 세상 안에서 자신
이 위탁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인자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본문에서의 씨 뿌리는 자로
서의 '인자'의 의미는 세번째 유형으로서 복음의 첫 선포자로서의 예수 자신을 가리킨
다(참조, 누가복음 5장 주제 강해).

=====13:38
밭은 세상이요 - 이 표현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미칠
것을 암시한다. 이같은 사실은 본문의 헬라어 표현, 곧 '밭'과 '세상'이라는 명사 앞
에 각각 동일한 관사(* , 호)가 붙어 있음으로써 양자는 서로 위치를 바꾸더라도
의미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따라서 지나칠 정도의 출교
(excommuication)를 강조하는 도나티스트들(Donatists)과 싸우기 위해 '밭은 교회'이
며, 또한 그곳에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함께 섞여 있는 것이 바로 교회에 대한 '표
적'이라고 말한 어거스틴(Augustine)의 주장은 자신이 살던 시대 상황을 고려한 협의
적(狹義的)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천국의 아들들 - 인자에 의해(37절) 이 세상에 뿌려진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메시야 왕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언약의 권리를 포기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
인 '그 나라 자손들'(8:12)과는 달리 하나님의 은총으로 메시야의 왕국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참백성들로서, 법적권리, 즉 상속권을 소유한 아들의 신분에 있는 자들
을 가리킨다(5:9). 특히 '천국의 아들들'이란 히브리적 표현으로서 그들이 천국에 어
울리는 속성을 지닌 자들이라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천국에 어울리는 속성이
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하나님과 그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성품이며 성령의
여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믿음과 인내를 소유한 것을 가리킨다.
악한 자의 아들들 - 악한 자에 의해 세상에 흩뿌려진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멸
망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자들이며 그 나라의 특성에 맞게 사악한 속성을 지닌 자들
이다.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사악한 근성을 가진 자들이다. 따라서 그
들은 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복음과 율법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
다.

=====13:39
원수는 마귀요 - '원수', '대적자'를 뜻하는 말인 '에크드로스'(* )
는 '적의', '불화', '이간', '분리'를 가리키는 말인 '에크드라'(* )에서
유래한 말로서, '분리되어 나온 자'를 의미한다. 한편 마귀를 가리키는 말인 '디아볼
로스'(* )는 '사이에'를 뜻하는 '디아'(* )와 '밀어넣
다', '끼어넣다', '던지다'의 뜻인 '발로'(* )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말로
서, '중상(中傷)하는 자', '비방, 거짓 고소하는 자', '밀고자'의 의미이다. 따라서
원수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버린 자로서의 악의 기원과 그 정체성(正體
性)을 나타내며, 마귀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비방하는 행위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불화를 조성(助成)하는 그들의 사악한 행위(work)를 드러내 주는 말이다. 하
나님에게서 분리되어 나간 자는 마귀의 역할, 즉 사악의 영향력을 세상에 퍼뜨리는 일
을 담당한다(4장 강해 '사단과 귀신' 참조).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 여기서 '세상 끝'
(* , 쉰테레이아 아이오노스)이란 문자적으로
'이 시대의 완료(결말)'를 의미한다. 결국 이때가 이르면 현존하는 이 시간들이 완료
되고 동시에 영광스런 새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이때는 예언된 다니엘의
70이레(Seventy Weeks)의 끝(단 9:24-27; 계 11:1-13), 곧 예수의 재림의 때를 암시한
다.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 천사들은 구약에서 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
(창 18:2-15; 출 3:2; 삿 13:6-21)을 하는 것으로서 묘사되었다. 그런데 신약에서,
특히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중의 천사의 중대한 역할과 책임은 종말에 인자와 함께 세
상에 와서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며 악임을 멸망의 장소로 인도하여 영원히 파멸하게
하는 것이다(마 24:31; 25:31-46; 막 13:27; 계 14:17-20). 더 자세한 내용은 히 1장
강해 '천사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13:40
불에 사르는 것 같이 - 세상 끝날 곧 종말에 있을 가장 놀라운 사건 중에 하나는
가라지(악한 자들)의 묶음이 영영한 멸망의 불에 던져진다는 것이다(계 14:9-11). 이
는 단지 상징적, 교훈적 차원에서의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내세(來世)를 가늠하는 존
재론적 심판이다(42절).

=====13:41
보내리니(* , 아포스텔로) - '앞', '미리', '전에'를 뜻하는
말인 '아포'(* )와 '차례로 놓다', '준비하다'의 뜻인 '스텔로'
(* )의 합성어로서, '사명을 띠고 목적한 장소로 가게 하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위임받은 자', '보내심을 받은 자'를 가리키는 말인 '아포스톨로스'
(* )는 특별히 예수께서 선택하신 12제자를 일컫는 말로(10:2),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본문의 천사들도 그들
과 마찬가지로 예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인 것이
다.
그 나라에서 - 문자적인 의미는 '그의 왕국 안에서'(in his kingdom)의 뜻으로, 하
늘 나라는 바로 아버지의 나라(the kingdom of the Father)이며, 인자의 나라(the
kingdom of the Son of Man)로서 예수의 지상 사역(ministry)에 의해서 이미 시작된
종말의 나라이며 그의 뜻이 실현되고, 통치되는 나라이다. 그런데 분명 '그의 나라'
는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Bornkamm). 왜냐하면 부활과 재림 이후의 예수의 통
치 영역은 온 우주에까지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28:18).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 - 이 말은 습 1:3의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 이라는 원문을 완곡하게 번역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습 1:3에서의
'거치게 하는 것'은 주로 우상을 가리키는 말로서, 선민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악에 빠
져들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마태의 표현도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걸려넘어지게 하는
함정이나 미끼 또는 그러한 것을 통해서 악을 행하게 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불
법을 행하는 자들이란 문자적으로 '법을 무시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들
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7:23). 한편 바울은 불법의 사람을 가리켜 멸망의 아
들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고 했는데(살후 2:3-4), 이는 그가, 곧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13:42
풀무 불 - 이는 마태의 기록 중 본절과 50절에만 언급된 말로서 직역하면 '화덕',
'불을 지피는 아궁이'를 가리킨다. 이는 하늘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무서운 불로
영원히 형벌을 받는 장소를 가리킨다. 이것은 흔히 '불못' 또는 '지옥'으로도 일컬어
지고 있다(렘 29:22; 단 3:6; 계 20:15; 에스드라서 7:36). 모든 불의한 것들이 징계
되고 일소(一掃)되는 이곳에서 악인들은 종말적인 영원한 운명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울다'의 의미인 '클라우드모스'
(* )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哀悼)를 가리키는 말로 라마에서 라
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우는 것이나(마 2:18), 회당장의 집에서 훤화 하는 것(막
5:38) 등에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를 갈다', '이를 악물다'는 뜻인 '브뤼그모스'
(* )는 '물어 뜯다'란 뜻의 '브뤼코'(* )에서 나온 말로
굶주림에 계속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모습이나, 분노로 씩씩대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행 7:54에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은 유대인들이 '이를
갈거늘' 이라는 표현에도 사용되었다.

=====13:43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 본문의 말씀은 단 12:3의 내용을 암시해주고 있
으나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다니엘서의 기록과는 달리 '지혜있는 자들'(이해하는 자들,
* , 호이수니엔테스)이란 말이 생략되고 단지 '의인들'
(* , 호이 다카이오이)이란 말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는 예수께서 그 당시 당신의 메시지를 지혜롭게 이해하는 자들이었던 제자들만을 이상
화 시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따라서 '의인들'이란 복음의 빛을 수용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의인들은 바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아버지의 나라' 곧 영원한 본향으로 삼고 있다.
해와 같이 빛나리라 - 여기서 '빛나리라'에 해당하는 '에크람프수신'
(* )이란 '...로부터'(from)의 뜻인 '에크'(* )와 '등
불'이란 뜻인 '람파스'(* )가 합쳐진 말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결국 의인들의 빛남이 마치 어둠가운데 있는 모든 사물들을 밝히 볼 수 있게 하는 등
불과 같이 빛나게 된다는 의미로 세상 끝날에 성도들이 덧입게 될 영광의 광채의 아름
다움을 묘사한 말이다. 한편 의인들의 해같이 빛나는 모습의 예표는 바로 변화산에서
의 변형된 예수의 모습(17:2), 또는 예수의 무덤 속에 앉아있던 주의 천사의 모습
(28:3)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의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모든 만물이 다 해처럼 빛날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던 처음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되찾을 것이다.

=====13:44
밭에 감추인 보화 - 팔레스틴 지역은 약탈(plunder)이 빈번하고 오늘날의 은행과
같이 재물을 맡길만한 공식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 주민들은 자기의 소유를 땅에
감춰두는 예가 흔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처럼 보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일생
에 단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Huffman). 이처럼 본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최상
의 가치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랍비 율법에 따르면 만일 일꾼이 밭
에서 일하다가 보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파내었으면 그 보물은 당연히 그 밭 주인의 소
유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Derrett). 그러나 본문의 사람은 매우 신중하여 자기가
그 밭을 살 때까지 보물을 파지 않았다. 따라서 이 비유는 법과 도덕성에 관한 문제
가 아니라 보화의 가치가 그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얻을 만한 것임을 가르치는데
그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사실 그 사람은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그 밭을 삼으로써
결국 치른 대가보다 훨씬 더한 이익을 얻게 되었다. 그러면 보화는 왜 감춰져야만 했
는가? 이는 (1)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가치한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기 위함이다.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께서 천국의 비밀을 비유
로 말씀하신 것과같다. (2)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근면성을 시험하기 위하여 보
화는 감추어졌다. 부지런히 말씀을 사모하는 자만이 천국복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
다. (3) 보화가 밭에 감추어진 까닭은 그것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의 인내를 시험하기
위해서이다. 천국복음의 진리는 그것을 발견하기까지는 계속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귀
중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다. 그러면 밭에 감추인 보화는 어떤 사람들이 발견하기 어
렵게 숨기워져 있는가! (1) 스스로 지혜롭고 의롭다고 생각하여 보물을 찾아 나서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물이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자신이 소유한 사상이나
철학, 종교만이 최고의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들은 결국 멸망으로의 길을 안내받고 있는 셈이다. (2) 그
보화는 진리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며, 감각적인 쾌락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감추어
져 있다. 이들은 영원한 삶과 부활에 대해 완전히 무감각하기 때문에 밭에 보화가 감
추어져 있다고 아무리 열심히 권고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
게 마련이다. 보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생명을 찾으려는 자에게는 너무나도 쉽
게 발견될 수 있는 일상의 삶속에 감추어져 있다. 한편 보화라는 말은 귀하고 값진
모든 물건들을 총칭(總稱)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것이 보석이든 금괴이든 간에
보화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을 상징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사람에게 있어서 추구
되어야 하는 가치(예를 들어 부귀, 명예, 자기의 이상과 주의등)는 비록 사람에 따라
다르고 다양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최고의 가치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사죄(赦罪)의 은총과 죄에서의 해방된 삶, 곧 천국의 삶이다.
이러한 값진 진리를 발견한 사람의 기쁨은 족히 비교할 것이 없을 것이다.
돌아가서...다 팔아...샀느니라 - 여기 제시된 세 동사의 시제는 모두 현재형으로
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행동의 일면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절대적 가치 앞에 상대적 가치를 단호히 거부할 줄 아는 용기있는 진리 추구자의 모습
이다. 성경에서 무엇인가를 사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돈 없이, 값 없이
사는 것이며(사 55:1, 계 21:6), 둘째는 본문에서처럼 모든 소유를 다 투자하여 사는
것인데, 이는 얻고자 하는 것에 비하여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 모두 무익하거나 오
히려 해(害)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빌 3:7, 8). 이에 비해 마 19:21, 22에 나오는 청
년은 보물이 무엇임을(온전하여지는 것) 알고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한
다는 것을 배웠으면서도 이미 획득한 가치들을 포기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놓쳐버리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13:45
좋은 진주 - 진주는 그 당시 페르시아만과 인도양 등지에서 채취한 것이 가장 고가
품(高價品)으로 여겨졌다. 그 당시만 해도 부자가 아니고서는 이 지역들에서 '진주'
를 구입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흔히 성경에서는 이 '진주'를 고결한 것을 상징하는
물품으로 취급하고 있다(7:6; 잠 3:15). 그런데 본문에 언급된 장사는 바로 이러한
'좋은 진주'를 구하고 있었다. 즉 그는 결코 흠이나 티가 있거나, 모양이 좋지 않은
저가품을 구한 것이 아니라 매우 값나가는 진주에만 관심이 있었다.
장사(* , 엠포로스) - 여행을 뜻하는 말인 '포로스'
(* )에서 나온 말로, 주로 이곳 저곳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부유한 도매 상인을 가리킨다. 밭에서 우연히 보물을 발견한 평범한 농부와는 달리
진주장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전문적인 안목(眼目)을 갖고 진주가 나올만한 곳을 찾아
다닌다고 하는 점에서 인생의 허망한 것을 좇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이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진리가 무엇이며, 어떻게 찾아 얻을 수 있는가에 유
념치 않고 그냥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애써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진리를 찾
아 다니는 구도자(求道者)이다.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 - 여기서 '극히 값진'에 해당하는 '폴뤼티몬'
(* )은 45절의 '좋은'을 뜻하는 '칼루스'(* )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값 나가는 것을 나타낸다. 실로 그 상인은 자신이 목적하고 소망했
던 것보다 더 좋은 진주를 만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위해 자신의 전의지(意
志)를 불사르는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헤이다. 더불어 본문에서 '하나'
(* , 헤나)란 여럿 중의 하나란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the only)라는 의미로
서 그 진주의 희귀성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한편 하나님과 죄된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한 대속(代贖)의 피값은 결코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크고 귀한 것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여기의 '극히 값진 진
주'와 비교될 수 있다.

=====13:47
각종 물고기 - 예수께서 비유를 베푸셨던 곳은 갈릴리 주변 동리이다. 따라서 예
수께서 적어도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는 갈릴리 어부 출신 제자들과 갈릴리의 어족(魚
族)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한편 갈릴리 바다에는 약 22종 이상의 물고기들이 생존
한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는 결국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사
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국한(局限)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여러 인종과 민족이
이에 포함될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각종 물고기'라는 말은 비유의 의미상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모두 담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며 밀과 가라지와 같이 의인과 악
인이 함께 섞여 살아가는 상태를 암시한다. 그러나 비유 자체 내에서 좋고 나쁨의 구
분은 도덕적 의미에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먹기에 좋고 크기도 알맞은 고
기와 그렇지 못한 고기를 가리키는 말로, 좋은 고기란 가치가 있는 것, 그리고 나븐
고기란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고기를 말한다.
그물(* , 사게네) - 이는 4:18의 그것과는 크기와 사용법에서 차이
가 난다. 여기의 그물은 두 배 사이에 묶어서 끌고 다니거나 아니면 한 쪽 끝은 해안
가에 고정시키고 다른 한 쪽 끝은 배에다 달아매어 긴 밧줄로 끌어당겨 밖으로 끌고
나올 수 있게 만든 것으로서, 무거운 납을 달아 바다 밑바닥까지 훑어 대량으로 고기
를 잡는 대단히 큰 그물이다. 욥 19:6과 시 66:11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
성들로 하여금 그 그물속에 들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다. 한편 이 그물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세계 도처에 복음이 확산되는 것과 더불어 그 확산의 결과로서의 신앙
공동체, 곧 교회를 상징한다. 실로 그 교회는 종말의 심판 때까지 참 성도와 거짓 성
도가 함께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는 흔히 '바다'를 영적 혼미
(stupefaction)의 와중에 처한 세상 족속들을 상징한다(단 7:3; 눅 21:25).

=====13:48
물가로 끌어내고 - '물가'란 시간적인 개념으로서, 종말의 심판과 영원한 하늘나라
의 완성 사이의 중간 시기를 의미한다. 그물에 걸린 고기가 물가에서 버리워진든지
아니면 그릇에 담기워지든가 하듯이 종말에 악인들은 영영한 형벌의 처소로, 성도들은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심판과 천년 통치를 경험하는 자리고 영원히
분리된다. 이런 의미 속에서 물가의 장소적 개념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심판
의 현장이라 할 것이다.

=====13:49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 여기에서 '갈라내어'(* ,
아포리우신)란 완전한 격리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이는 마지막 심판 날에 실행될 의
인과 악인에 대한 분리 작업의 냉엄한 장면을 예감케 한다.

=====13:50
풀무 불에...울며 이를 갊이 - 이 비유의 초점에 해당하는 구절이다. 이는 마지막
심판 때에 있을 악인들의 영원한 형벌의 상황(the situation)에 대한 경고적 메시지이
다(42절; 8:12; 22:13).

=====13: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 '영적 이해력을 소유하게 되었는가'하는 뜻이다. 이같
은 예수의 말씀은 비유 설명을 요구하던 제자들의 의문점을(10절) 깨끗이 해소시켜 주
었을 것이라고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 모든 것, 즉 에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Filson, Plummer, Schweizer, Schmid)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밀'(Grundmann,
Bonnard, Hill, Fenton)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잘못 이
해하면서 나머지 것들은 제대로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하오이다 -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였다고 그들 스스로 확신(確信)하며
강한 자부심에 따라 대답한 것이다. 이는 결코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한 확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Alford). 이같은 사실은 그들이 얼마 안 가서(15:16) 예수로부터 어리
석다고 하는 책망을 듣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하튼 그 당시 제자들은 분명
히 무리들보다 많은 이해를 하게 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3:52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 이 난해한 비유에 관한 해석은 참으로 다양하다. 즉
(1) '천국의 제자가 된 서기관'이라고 말하는가하면(Jeremias), (2) '기독교 공동체에
연합하게 된 유대 서기관'(Hummel), 또는 (3) 교회 안에서 마치 유대 서기관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 율법사'를 가리킨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Kilpatrick). 그러
나 일반적으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란 예수 당시의 서기관들의 역할, 즉 율법 및
경전에 대한 해석과 율법 교육은 물론하고 그 이외에도 하늘나라에 대한 교훈을 깨닫
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한 가지 더 붙는 새로운 의미에서의 서기
관을 가리킨다. 결국 이 말은 '모세 율법의 제자된 유대 서기관'과는 질적으로 다른
천국의 비밀을 깨닫고 그에 준하여 생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가리킨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발 아래서 겸손히 배우고 소박한 마음으로 그 진리를 수용한 자들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해를 겸비(combination)한 랍비가 유대인들의 서기관보
다 더 탁월하고 이상적인 제자의 모습일 것이다.
새 것과 옛 것 -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깨달을 수도 없었던 것이었으나 예수께서
새롭게 계시하신 새 진리가 새 것이라고 한다면 오래 전부터 알려지고 깨우쳐진 옛 진
리, 곧 구약의 율법을 옛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 서기관들은 율
법을 지나치게 자구(字句)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사람들의 영혼을 감동시키지 못했고 전
체 율법 속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간과(overlooking)
해 버렸으며 다만 교조적(敎條的)으로 옛 것(율법과 전승)만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고
암송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천국의 제자'된 자는 이러한 형식의 틀에서 벗어나
예수로 인해 시작된 새 것과 전해오던 옛 것을 동시에 취합(聚合), 활용할 수 있는자
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사실은 계시는 오직 하나이며 그 계
시의 초점은 "옛 것"을 성취하며 새롭게하는 '새 것'에 있다는 점이다(Bonnard). 실
로 구약의 율법과 신앙은 물론 메시야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들도 모두 '새 것'을
이끄신 예수의 인격안에서 성취된다. 따라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이러한 사실
들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새롭게 변화된 시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꺼내어 온
다.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 여기서 '곳간'(* ,
데사우로스)이란 말은 주로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말이다(12:35). 따라
서 본문은 천국 제자가 된 서기관이 그의 마음, 곧 그의 지각과 인격과 그 존재 자체
내에서 그 무엇을 꺼내어 온다고 이해해야 한다. 특별히 본문의 곳간은 진리가 전수
되고, 보관되어 오는 곳으로서, 구약과 신약을 모두 포함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사
건의 역사가 쌓인 마음의 창고이다. 따라서 집주인과 같은 주의 제자들은 주께서 맡
기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비밀들을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끄집어 내어 사
람들에게 끊임없이 제공하고 그 의미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

=====13:53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 이 구절은 마태복음에서의 설교들을 매듭짓는 다섯
개의 형식적인 결론들 가운데 하나이다(7:28; 11:1; 19:1; 26:1). 특별히 본문에서는
지금까지의 천국 비유가 종결되고 이제 새로운 사건, 곧 예수의 고향 주민들의 배척에
대한 사건으로의 자연스러운 전환을 나타내 준다.

=====13:54
고향으로 돌아가사 - 예수의 공생애 중에 있었던 세차례의 갈릴리 전도 사역 가운
데서 제 2차의 갈릴리 사역(8:5-13:58)을 종결(終結)하시기 위해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 처음 고향으로 귀환(歸還)하시는 모습이다. 예수의 고향은 물론 나사렛을 가리
킨다(눅 4:16). 이 때부터 예수께서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그의 말씀 전파 사역을 감
당하셨고, 따라서 그에게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반감(反感)이 한층 더 고조되기 시작
한 시기이다. 예수와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대립은 그의 고향에서부터 그 갈등이 표면
화되었다.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 마태는 유대교인들과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모임을
구별하기 위하여 특별히 '저희'라고 하는 표현을 회당 앞에 사용하였다. 예수께서는
믿고 따르는 자들의 모임인 제자들의 집단이나 이적을 바라며 찾아다니는 무리들의 모
임에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그를 모함(謀陷)하고 해하려는 무리들이 공식적으로 모이는
회당에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이는 예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그의 사역, 즉 가르치
심(teaching), 복음을 전파하심(preaching), 병을 고치심(healing)에 최선을 다하시려
고 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 순전히 회당에서만 가르치시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주로 회당에서 천국 복음을 소개하셨으며,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
작하셨던'(* , 에디다스켄)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눅 4:16-30의
강해 '유대교의 회당'을 참조하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 묻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의문점
은 예수가 권위자이심을 증명해 주는 그의 지혜와 능력, 즉 진리를 가르치는 것과 기
적을 행하는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인지 바알세불에게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것
이었다. 그들 자신도 예수의 지혜와 가르침이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것이라
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나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결코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예수의 출신과 배움의 정도를 알고 있
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신적 권위가 초경험적이며 지적 이해를 초월한
초이성적인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13:55
목수의 아들 - 예수는 실제로 목수였다(막 6:3). 사실 당시의 유대 관습에 의하면
자녀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繼承)했다고 전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도 공
생애 이전까지는 목수의 일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의 주택들은 대부
분 흙벽돌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목수'란 넓은 의미에서 건축 기술자 또는 목
공 기술자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순교자 저스틴(Justine Martyr, A.D. 150년)은
예수가 쟁기와 멍에를 만들었다고도 증언한다. 한편 본문의 '목수'라는 단어앞에 정
관사 '투'(* )가 사용됨으로써 나사렛 동네에는 오직 한 사람 또는 한 집안의
목수가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그 형제들 - 이들이 예수의 이복(異腹) 형제 또는 사촌들이라는 견해들이 있으나
요셉과 마리아 사이의 아들들, 곧 예수의 친 동생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12:46 참
조). 여기서 '야고보'는 후에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자(행 15:13) 야고보서의
저자로 여겨진다. 그리고 유다는 유다서의 저자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을 위시(爲
始)한 그외의 형제들(그들의 신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음)은 예수의 공생애 때만 하더
라도 예수를 구주로 신앙치 않았으나(요 7:5)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승천 이후
그들의 믿음이 온전하여진 것 같다(행 1:14).

=====13: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 예수의 형제와 모친은 일찍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
으로 이주한 것 같고(4:13), 그의 누이들은 결혼을 하여 나사렛에 계속 정착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예수의 누이들이 복수로 표기된것으로 보아 적어도 2명 이상
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외에 그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막
6:3))

=====13:57
배척한지라 -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들이 걸려 넘어졌다', '그들의 감정이
매우 상했다', '그들이 적대시했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그들
은 예수에 대해 매우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고 또한 예수를 도무지 용납치 않을 태세였
음을 알 수 있다. 실로 예수는 고향방문 때마다 모두 거절되고 배척당하였다(눅
4:29). 고향에서 조차 배척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첫째, 장차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의 유대인들로부터 거부 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구속 사건을 예고한다. 둘째, 예
수의 지혜와 권능이 저희들에게는 거침돌이 되어 저들이 예수의 말씀을 거부함에 따라
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셋째, 예수를 배척함으로써
그들은 예수로부터 그들의 육신과 영혼의 질병을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loss)
하게 되었다.
선지자가...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 이는 유대 뿐 아니라 그리이스와 로마
의 문학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격언구이다(Logia of Jusus, Oxyrincus Papyri). 그
런데 구약 선지자 중에 예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배척을 당한 선지자는 바
로 예레미야이다. 아나돗의 제사장의 아들(렘 1:1)이었던 그에 대하여 그곳 사람들은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렘
11:21)고 하였다. 한편 평행구절인 막 6:6에서 예수께서 그들의 불신에 대해서 놀라
움과 경악을 금치 못하셨는데, 이는 6절 하반부에서 드러나는 대로 나사렛을 제외한
모든 촌에서는 에수께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푸는 일이 가능했으나 고향에서만큼은
그에 대한 불신과 시기가 지나치게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선지자의 자연적 속
성을 익히 알고 있는 자는 그 선지자가 지닌 초자연적 속성(신적 권위에 의한)을 소극
적으로 간과해 버리거나 적극적으로는 배척한다(Bengel).

=====13:58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 이 구절과 평행 대조되는 막 6:5의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라는 말의 뜻은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실제로 권능을 행하실 능력
이 없다거나 행하실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기간에 많은 기적을 행하신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오천 명을 먹이심,
풍랑을 잠잠케 하심등등). 따라서 마가가 행하실 수 없다고 표현한 것도 예수의 기적
을 행하시는 능력 자체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의 복음전파의 사명과 관련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나타내시며 전파하시고자 할 때만 그의 기적을 행하
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의 고향 사람들이 자신이 하늘로서 난 자이며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행하시는 자라고 하는 사실과 천국이 이미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말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적을 행치 않으셨던 것이다. 계시(믿음)의 문이 열리지 않은
자들에게는 기적과 치유의 문도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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