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26장
=====26:1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 마태복음에는 다섯개의 설교가 나오는데, 매 설교마다 이
종결 문구가 나온다(7:28 ; 11:1 ; 13:53 ; 19:1). 여기서는 마지막 다섯번째 감람산
설교가 모두 끝났다는 의미에서 '마치시고'라는 말 앞에 '다'(* , 판타스)
라는 복수 형태의 수식어가 첨가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예수께서는 가르치는 자로서
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시고 드디어 십자가 제단에서 인류의 구속을 위해 희생당하시는
제사장적 사역에로 발길을 옮기셨다. 바야흐로 예수의 수난의 때는 시작된 것이다
(1:21 ; 20:18, 19).
=====26:2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 마가는 이 부분을(막 14:1) 하나의 보고 형식으로 기
술한 데 비해 마태는 예수의 직접적인 언급으로 표현하여 그 당시의 상황을 더욱 생생
히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는 말을 첨가시킴으로써 수난의 때가 분명히 도래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한편 예
수께서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마태는 본서에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유월절이란 시간적 정황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요한은 그의 복음서
에서 3번(요 2:13 ; 6:4 ; 13:1) 기록하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예수의 공생애 기간이
3년간이었다는 확실한 중거를 찾기도 한다. 여하튼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가
운데 가장 크고 중요한 절기로서 출애굽 사건과 밀접(密接)한 연관을 맺는다(출 12
장). 이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아빕 월, 곧 니산월 14일인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7일
간 계속된다. 그런데 본문에 언급된 '이틀'이란, 시간적으로 정확히 48시간이 채되지
않는 기간일 것이다. 특히 본서에 기술된 사건의 시간대를 살펴볼 때(21:23-22:46 ;
23:1-36 ; 24:1-3),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지금의 시각이 화요일이 아직 지나지
않은 때임을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화요일 늦게 감람산에서 이 말씀을 하셨던 것
으로 보인다. 그날은 해질녁(오후 6시경)에서부터 하루가 시작되는 유대인의 요일 계
산법에 의하면 수요일이 시작되는 때이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이미 여러
번 예고해 오신 바 있다(16:21 ; 17:22 ; 20:18). 그런데 여기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당신의 죽음 사건이 유월절 기간 중에 발생할 것이라 비로소 말씀하고 계신다.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유월절을 연결시킴으로 해서 당신의 죽음을 '유월절 희생
양'으로 상징화하고 있다. 그리고 유월절 사건을 통해 바로의 압제 아래서 고통받고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셔서 자유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아들 예수
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츨애굽, 즉 새로운 구원의 때를 열어갈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바울이나(고전 5:7), 요한(요 1:29)의 신앙관과도 일치한다. 한편 예수께
서 유월절 양이 된다는 것은 곧 최후의 유월절 양이 된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구약
의 유월절이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 거룩한 성찬으로 대체(代替)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유월절은 죄의 저주를 통한 하나님의 화해 의지에 근거하고 있다(요일 4:
10). 그리고 그 성격상 화해하신 하나님 자신의 유일회적 죽음이었므로 그때로부터 영
원토록 속죄제를 위한 제물로서의 양은 필요없게 되었다. 한편 본문의 팔리우리라(
* , 파라디도타이)는 수동태의 현재 직설법을 취하고 있다. 즉 본
문은 현재 시제가 지니는 명확성과 긴급성 및 예언된 미래와 필연적인 성취 등을 내포
하고 있음으로 인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임박했으며, 또 그것이 유월절 기간 내에
필연코 이뤄질 것임이 예시되고 있다. 또한 수동형을 취함으로해서 예수의 죽음이 하
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간접 시사해 준다. 한편 이 '팔리움'은 유다의
배신 행위와 더불어 유대인들의 완악한 고소를 모두 염두에 둔 말씀으로서, 사형권을
지니고 있던 로마 정부 또는 그 파견 근무자에게 제소(提訴)될 것임을 의미한다.
=====26:3
그때(* , 토테) - 시간적 부사로서 본문에는 '바로 그 시점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여하튼 자신이 팔리우리라던 예수의 말씀과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는 모
임사이를 '그때'라는 말로 연결함으로써 사태의 심각성과 급박함을 강조하고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 본문과 평행구릍 이루는 마가복음에는 '대제사장
과 서기관들(율법학자들)'이라고했는데, 본문에서는 서기관들(율법학자들) 대신에 '백
성의 장로들'로 기술하고 있다.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떤 학자는 마태가 '서
기관들'을 '백성의 장로들'로 표현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백성이 떠맡았
다는 것을(27:25) 미리 예시하기 위함이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종교의 최고 재판소 역할을 했던 산해드린(Shanhedrin) 공회원들로서
예수를 못 박기 위해 소집되었던 자들의 면면들을 각자 다른 관점에서 묘사한 것이라
고 본다(16:21 ;21:23).
가야바라하는 대제사장 - 마태복음과 요한복옴(요 11:49)에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
이라고 언급되는데 반해 누가복음에서는(눅 3:2 ; 행 4:6) 안나스가 대제사장이라 언
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두 기록에 차이가 있다고 해서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야
바의 본래 이름은 요셉이라고 하는데, '가야바'와 '안나스'의 관계는 '장인', '사위'
의 관계이다. 가야바에 앞서 그의 장인 안나스는 총독 구레뇨에 의해 A.D. 6년에 대제
사장이 되었다가 9년만인 A.D. 15년에 해임되었다. 그 자리를 이스마엘, 안나스의 아
들인 엘르아살, 시몬 등이 차례로 승계하다가 A.D. 18년에 가야바가 빌라도의 전임 총
독인 '발레리오 그라토'(Valerius Gratius, A.D. 15-26)의 후원으로 대제사장이 되어
A.D. 36년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대제사장에 머무른다.
그런데 가야바의 대제사장직은 유대법에 의하면 불법이다. 왜냐하면 유대범은(민
20:25, 26) 대제사장직을 종신제, 세습제로 규정하는 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었을
때는 그의 장인 안나스가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로마
가 팔레스틴을 점령한 후 자기들이 통치하기에 편리한 인물로 피지배국의 종교 지도자
들을 임의(任意)로 선출하고, 정치적 목직에 따라 자주 교체했기 때문이다. 실로 종교
적 자주권을 상실했던 B.C. 37년부터 성전이 파멸되기 전 마지막 대제사장이 임명되었
던 B.C. 67년 사이에 무려 28명 이상의 제사장들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나타
내 준다. 여하튼 사람들은 대제사장 가문에 소속된 자들을 모두 대제사장이라 칭했던
그 당시 관례에 따라 안나스와 가야바를 모두 대제사장이라고 불렀고 가야바의 장인으
로서 안나스는 사임 뒤에도 그의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수 있
다.
아문에 모여 - 산헤드린 의회가 열렸음을 시사해주는 말이다. 사실 대제사장의 아
문에서 열리는 회의는 유대 최고의 법정인 산헤드린의 공식회의가 아니라 비공식 회의
이다. 이곳 '아문'은 대제사장 집 안 뜰(atrium)로서 그 주위에 궁전 건물들이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서 열리는 회의는 비공식 회의이고, 공식 회의는 대제사장 궁전의 뜰
남쪽에 있는 다듬은 돌로 건측된 공회당(Gazith,Chanujoth)에서 열렸다. 한편 산헤드
린의 구성을 볼 것 깊으면 총 72인의 공회원으로 구성되는데, 대제사장, 서기관, 족장
급의 장로 등 세 계층에서 각24이씩 차지한다. 이 회의의 의장은 '나시'(Nasi,방백)
라 불려지는데, 로마 총독의 임명을 받은 대제사장이 이 직을 맡았으며 그아래 심판
장관급인 '압벧딘'(Ad Beth Din)과 대변인격인 '차참'(Chacham)이 있었다. 이 회의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의결 기관으로 형식적으로는 생사여탈권(生死
與奪權)을 가졌었으나 실제로는 로마 총독의 인준하에서 그 권력이 행사되었다.
=====26:4
궤계로 잡아 - 공동번역과 새번역에서는 '궤계'라는단어를 '흉계'로 번역하고 있는
데 어떻게 번역이 되었든지 저들이 예수를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정당한 명분없이
음해하려했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려고
준비하시는 예수의 모습과 궤계로써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거짓된 종묘인들의
권모 술수(權謀術數)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십자가의 고난을 향하는 예수
의 정정당당한 발걸음과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비열한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영적으로, 정신적로 깊은 병에 든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대비
되고 있는 것0]다.
의논하되(* , 쉬네불류산토). 이는 '협의하다',
'계략을 짜다'는 뜻인 '쉼불류오'(* )의 부정과거 중간태 직설법으
로서 그들의 모의가 상당히 다급하고 긴장된 상태로 진행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실로
그들은 비밀리에 죄인아닌 죄인을 극형에 처하기 위해 몹시도 당황했었던 것이다
(Robertson).
=====26:5
민요가 낱까 하노니 - 유대사가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Jos, Wars 12:1-2)메
시야 대망 사상이 심히 고조되었던 A.D. 1세기를 전후하여 백성들의 봉기와 소란이 빈
번히 발생했다고 전한다(행 21:34). 사실 유월절 기간에는 각 지역, 특히 예수의 선교
중심지였던 갈릴리 지역 주민들이 예루살롑으로 많이 모여들 것이기 때문에 예수를 처
형할 경우 민란의 위험성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명절에는 말자 - '명절',곧 유대 최대의 절기인 유월절(2절)기간 동안에 예루살렘
은 수많은 인파와 고조되는 종교적 열기, 여기에다가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띤 메시야
사상의 고조 등으로 조그마한 사건이라도 커다란 폭동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
다. 실제로 이 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는지는 역사가 요
세푸스가 잘 알려 주고 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총독 케스티우스(Castius) 때에 유d
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엄청난 숫자의 유대 군중들이 통치자에게 얼마나 위협적
인가를 네로 황제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유월절에 제물로 드리
기 위해 잡는 양의 수를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 때 조사한바에 의하면
256,500마리의 양이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이다. 양 한 마리 당 대개의 경우 10정도가
한무식가 되어 제물을 드리며, 어떤 경우에는 20명이 한무려를 이룰 때도 있다고한
다. 이렇게 볼 때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숫자는 약 200만명을 훨씬 능가하
는 숫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가릴리 사란들을 비롯해서 예
수를 메시야로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공개적으로 예수를 체포하거나 위해(위해)
하려는 시도는 폭동이나 민란을 일으킬 것은 뻔한 일이므로 명절을 피해서 예수를 죽
이고자 하는 저들의 의도는 너무나 당연하다. 즉 그들은 7일간의 유월절 공식 기간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에 운집했던 무리들이 각기 고향으로 흩어질 때 예수를 처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예정은 유다의 배반으로 바뀔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단지 유다의 배반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예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적어도 예수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며, 사람들
의 계획은 그 앞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26:6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 본절 이하의 예수 도유(unction) 사건은
사복음서 모두가 기술한 이야기(막 14:3-9 ; 눅 7:37-39 ; 요 12:1-8)이다. 그중 요한
복음의 경우 마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집에서 일어난 것 같은 인상을 주
지만 사실상 주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다만 요한복음은 나사로의 가족들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그렇다면 마태, 마가, 요한복음이 모두
'베다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시간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으로 동일한 사건으
로 보는데 있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사실 본문 이하의 사건은 예수께서 예루살
렘에 입성하시기 하루 전, 베다니에서 안식일을 보내실 때(21:1-11)인 유월절 엿새전
에(요 12:1, 니산월 8일로 추정) 일어난 일로서 마태가 시간상의 순서를 무시하고 이
곳에 수록한 까닭은 예수의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속사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12절). 한편 누가복음과는 사건, 장소, 시간, 인물 등의 차이때문에 같은 사건으로
볼 수 없다(Calvin, Bruce, Meyer). 그러나 혹자는(Robinson, Chrysostom)시몬이라는
이름의 일치를 이유로 동일한 사건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에 시몬이라는 이름은 워낙
흔한 이름이었다. 그 실례로 신약성경에만 '시몬'이라는 이름이 10회 가량이나 나오는
데, 그들은 열심당 시몬 (눅 6:15), 마술사 시몬(행 8:9, 24), 구두장이 시몬(행
10:6) 등 별명과 함께 불리어졌다. 따라서 누가복음의 '시몬'과 마태복음의 '시몬'은
동명 이인(同名異人)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예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사건은 당신의 생애중에 두 차례 있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Plummer, Bengel). 한편
'문둥이 시몬'이라고 해서 '시몬'이라는 사람이 문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적
어도 예수와 그 일행이 종교적 의식법에 개의치 않고 집에 들어갈 때는 이 사람이 문
둥병 환자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추측컨대 일전에 그는 예수로부터 병고침을 받
았을 것이고 그 답례로 이같은 잔치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Roberson, Wycliffe,
lange). 따라서 문둥이 시몬이라는 이름은 더이상 그에게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며, 오
히려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울 때마다, 예수의 은총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렸을 것이다.
이는 사도가 된 후에도 세리란 명칭으로 불리웠던 마태의 경우와 그 의미를 같이한다.
한편 전설에 의하면 이 문둥이 시몬은 나사로의 아버지, 또는 마르다의 남편이었을것
이라 보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26:7
한여자 - 본문과 평행 구절인 요 12:3에 의할 것 같으면 이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
이자 마르다의 동생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본문과 마가복음은 이 여자가 누구인지 이
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마태와 마가가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당시에 생
존해 있던 마리아와 그녀의 가족들을 유대인의 핍박으로부터 보호해 주기 위함이 아니
었나 추측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성을 은연중 경시(輕視)하는 이스라엘의 문화를 반
영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재산 목록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다(출 20:17).
매우 귀한 향유 - 마태는 그 향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고 단지 '매
우 귀한 것'이라고 표현한다. 평행본문인 막 14:3에 의하면 이 향유는 '나드'향이었
다. '나드'향은 인도산 식물 나드의 뿌리 부위에서 얻어지는 휘발성이 강한 향인데,
매우 귀하고 값이 비싸서 주로 왕과 같은 고귀하신분에게 바쳐지는 것이었다고 한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캄비새스가 에디오피아 왕에게 보낸 다섯
가지 선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나드향이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향유 한
옥합의 가격이 '300 데나리온'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300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 한
사람이 일년간 벌어들이는 소득과 맞먹는 액수였다. 요한복음에서는 계산에 밝고 재물
에 욕심이 많은 유다를 강조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고 있는데 반해 마태복
음에서는 여인의 해위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매우 귀한'이라는 형용사
로 표현함으로써 여인의 행위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옥합 - '옥합'으로 번역된 헬라어 '알라바스터 병'이라는 뜻인데, '알라바스터'
(alabaster)는 석회 또는 황산 석회 성분을 띤 부드러은, 반(半) 투명의 대리석 비슷
한 광물이며 그 주산지(애굽)의 이름을 딴것이다. 이런 병들은 값비싼 기름이나 향을
넣어두기 위해 사용되는데, 몸체가 둥글고 목이 긴 모양을 하고 있어 사용할 때는 인
봉(印封)한 주둥이를 깨고 그 안에 든 모든 향유를 꺼내어 쓰게 되어 있다.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 식사 도중에 그 잔치의 가장 귀한 예빈에게 향
유를 부음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유대의 전통적 관습이었다(시 23:5). 한편 본
문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요 12:3)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부었다고 한다.일설에 의
하면 사실 기름을 부은 곳은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몸 전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것을 복음서 제자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하튼
발이든, 머리이든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즉 기름을 부은 부위가 문
제가 아니라 기름부음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 한편 향유를 붓는 것은 여러 가지 의
미를 가지는데, 성경에 나타난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거룩하게 하는 고대
적 예식으로 향유를 붓는다(창 28:18), (2) 제사장들의 의식적 성별에 사용되었다(레
8:12). (3) 선지자로 세울 때 기름을 붓는다(왕상 19:16). (4) 왕을 세울 때 기름을
붓는다(삼상 10:1 ; 왕상 19:16). (5) 손님을 환대하는 데도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6) 전통 장례법에 따라 시신에 바른다(요 19:40). 이중 본문에서 묘사하는 바 한 여
인이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장면은 위에서 열거한 도유식(塗油式, 머리에 기름을
븟는 예식) 가운데 왕의 취임식을 시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의 육
신적 조상인 다윗은 사무엘의 기름부음에 의해서 왕이 되었고(삼상 16:13), 그의 후계
자들은 하나님이 '기름부은 자들'이었다(시 45:7 ; 89:20). 이 고대 의식에서 유추하
여 다윗 가문의 메시야도 마찬가지로 기름부음 의식에 의해서 임명될 것으로 기대되었
다. 그러나 베다니에서의 예수의 기름부음 받음은 다윗의 임명식의 모든 국면들을 극
적으로 뒤엎어 버린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기름부음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예루살
렘과 그곳의 '성전 밖'에 그리고 '한 평범한 처소에서' 기름부음을 받는다. 또한 예수
의 즉위식은 왕이나 사제가 임명을 받을 때의 그 화려함과 장관 속에서의 축하가 아니
라 '한 초라한 집'에서의 식탁 친교에서이다. 그리고 예수는 사제나 대제사장에 의해
서가 아니라 한 익명의 여인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는다. 더욱이 예수의 기름부음 받
음은 환영과 갈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난을 받는다(8절). 따라서 본문의 도
유식은 예수께서 인정하신 바대로 장사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12절)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울 것이다. 비록 그 여인은 순수하게 예수께 대한 다함없는 헌신과 사랑의 표
로 기름을 부었다 할지라도 그 도유는, 곧 예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구속사에 있
어서 크나큰 역할을 수행한 것이 되었다.
=====26:8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 요한복음에 의하면(요 12:4) 유다가 이러한 불만의 주동자
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제자들이 분을 낸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들은 두로의
이방여인에게도 분을 내었고(15:23), 어린 아이들을 주께 데려왔을 때도 그러했으며
(19:13),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의 제안에 대하여도 분을 내었다(20:24). 이것은 자
기들의 생각이 나타난 현상들과 배치될 때 일어나는 성급하고 악향 감정이었다. 실로
타락한 인간 본성(本性)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경륜을 받아들이기에는 장애와 반
발 요인이 너무 많다. 진정 누구보다도 사태의 진전을 잘 알아서 대처해야 할 제자들
이었건만 그들은 이 기름부음 사건이 갖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
의 진정한 인격과 십자가를 향한 일련의 사건들이 갖는 의미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허비하느뇨 - '허비하느뇨'로 번역된 헬라어 '아폴레이아(* )는 일
말의 생산적인 결과조차 기대할 수 없는 완전한 낭비, 즉 값진 것을 무용(無用)하게
모두 소모해 버린 것을 뜻한다. 결국 이 말은 제자들의 관심이 오직 노동자 1년치 임
금에 해당하는 그 물질에 집착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실로 그들의 물질 중심의 평가
는 신앙 중심, 사랑 중심의 '한 여인'의 순수한 마음을 무참히도 짓밟아버린 것이 되
었다. 정녕 신앙적 무지는 자기 만용과 이웃과의 관계 파괴라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낳
곤 한다.
=====26:9
많은 값에 팔아 -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향유의 가치를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설명하여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고 있다.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은 하나의 관행(慣行)이었다. 사실 예수께서도 가난한 자들
을 구제할 것을 누누이 전하셨다(19:21 ; 25:35). 실제로 이 도유 사건이 일어난 곳으
로부터 수십리 안팎에 수천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로 위선
적이고 가증한 유다가 가지고 있던 동기(요 12:6)가 무엇이었든 간에 다른 사람들은
적어도 의로운 분노 때문에 그 여인을 비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기에 저
들의 태도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요 물질 중심적인 것이었으며 이제 곧 일어나게 될 예
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었다. 정녕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 곁에 있지만 하나님의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26:10
아시고(* , 그누스) - '알다'라는 헬라어 '기노스코'(* )의
제 2 과거형 분사로서 예수께서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그 정확한 상황을 이미 알고 계
셨음을 뜻한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직관적(直觀的)인식이야말로 인간이 안고 있
는 모든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된다(16:8).
괴롭게 하느냐 - 여기서 '괴롭히다'는 뜻의 헬라어 '코포스'(* )는
'때리다', '치다', '자르다'를 뜻하는 '코페'(* )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거의 폭
력에 가까운 압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 당시 이 여인이 제자들의 비난과 따가
운 눈총앞에 얼마나 괴로운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를 알수 있다.
내게 좋은 일 - 이는 그저 선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기쁘게 받으실
만하며 영원히 기억하고 인정할 만한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의 이같은 신적 인
준에 의해 받아들여진 이 일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비난받을 수 없었으며, 모든 사람
들의 모범이 될 만한(막 14:7) 선행이었던 것이다. 실로 예수는 당신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향유로 삼아 쏟아 부은 모든 수교자들에게도 이같은 아름
다운 변호를 해주실 것이다.
=====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함께 있거니 -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께서 세계의 가난을
뿌리뽑을 수 없다고 말씀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다만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
에게 선행을 베푸는 일과 자신에게 사랑을 표시한 것을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
유는 예수께서 육신으로는 항상 그들과 함께 있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다시는 그런
선행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땅위에 존재할 것이다(신 15:11). 이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해 베푸신 하
나님의 지혜에 근거한다. 따라서 가난한 이웃을 구제할 시간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맞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매우 특수한 것이며, 이 여인은 이 순간을
올바로 포착(捕捉)한 것이다. 곧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하는 그 순간
의 중요성을 포착하여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음으써 그의 장례를 예비한 것이다. 적어
도 이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결단코 다시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300
데나리온의 돈은 매우 많은 것이며 그 돈으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300 데나리온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놀라운, 곧 인류
구속의 위업을 수행하실 것이다. 그 여인은 바로 그 값진 일에 자신의 사랑을 쏟아부
은 것이다.
=====26:12
내 장사를 위하여 -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례에 의하면 장례 절차 가운데 도유하는
의식이 있었다(대하 16:14). 그런데 막 16:1에 의하면 첫 부활절 아침에 세 여인이 예
수의 몸에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에 찾아갔으나 예수께서 이미 부활했기 때문에 기름을
바를 수가 없었다. 따라서 베다니에서의 기름부음 받음이 예수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기름부음이었고, 예수는 죽음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이미 기름부음을 받은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여인이 자기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은 예수 자신의 '장사를 위해'
자기 몸에 기름을 부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누차
공개하셨다(16:21 ; 17:22 ; 20:18). 그런데 오직 그 여인만이 예수께서 다가오는 자
신의 죽음에 대해 되풀이하여 말했던 바를 이해하며 그 운명의 시간을 준비(準備)해
왔던 것이다. 즉 그 여인은 나름대로의 영적 안목으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장례
예식으로서의 도유의 기회가 오지 않을 것으로 알고, 미리 예수께 찾아와 관례에 따라
기름을 부은 것이다(Wycliffe).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정치적 왕국에 대한
자기들의 그릇된 관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에 직면해 있는 예수와 조
그마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조차 없었던 것이다.
=====26:13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다 기념하리라 - 이렇게 귀중한 약속이 담겨져 있는 13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예레미아스(Jeremias)에 의하면, '어디에서든지'라는 의미의
헬라어 '호푸'(* )를 '... 때로' 해석하여 이 구절은 재림때 온 세상에 복된
소식이 하나님의 천사들에 의해 당당하게 선포될 때에 이 여자의 행위도 기억될 것이
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따르면 '복음'이라는 말
이 이상하게 사용된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이 제자들의
전도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갈 것을 예견하셨고(8:11),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전
파될 것임도 예언하셨다(24:14). 13절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서든지 이 여인
과 이 여인의 행위가 기억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More). 정녕
예수의 복음은 그 복음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그 죽음을 장식한 이 여인의 행
위는 복음과 함께 없어지지 아니한다. 또한 이 여인의 행동은 사랑, 믿음, 용기, 그리
고 자기 희생 등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신앙적 자질들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
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된다. 실로 한 사람의 평범한 여인이 베푼 사랑의 행위가 이처
럼 구속사의 한 모퉁이가 될 만큼 인정되고 기억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편 '저
를 기념하리라'는 말은 그 여인의 행적이 영영히 기억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 예언은
지금 그대로 성취(成就)되고 있다.
=====26:14
그 때에 - 향유 도유에 관계된 예수의 말씀이 막 끝난 때이자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기 위해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간 때를 지시한다. 결국 이 장면은 대제사장들이 가야
바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잡기 위해 모의하던 내용(1-4절)과 연결된다.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 - 거룩한 만수(滿數)인 '열 두' 사도의 목록에는 대
부분 맨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가 언급된다(10:4). 한편 이 말석에 위치한 제자 가룟
유다는 베다니도유 사건을 기화(奇貨)로 예수를 불의한 자들의 손에 넘길 것을 결심하
게 된다. 즉 가룟 유다는 예수의 장사라는 암울한 예고와 무모한 물질의 허비 등으로
인해 예수 제자의 길을 포기하고 배반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물론 가룟 유다
배반의 근본 동인은 사단이지만(눅 22:3)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있었다. 한
편 3절에서는 당국자들의 행위가 전혀 부각되었다면, 여기서는 유다의 배반이 '그 때
그가 갔다'는 마태의 전형적인 표현과 더불어 기름부음 직후에 일어난다. 특히 '열 둘
중에 하나'라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준다. 즉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마
저도 이런 죄에 빠지시는 것을 보아도 우리 성도는 한층 더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
이라 하겠다. 사단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순간, 가장 신뢰하는 자들을 통해서도 능히
우리를 실족시킬 수 있다(10:36 ; 미 7:6).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 가룟 유다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언제 대제사장에게 접근했는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배반 의지가 어떤 장애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매우 적극성을 띤 것이었다는 점이다.
=====26:15
내가 예수를...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 유다는 요 12:6에서 볼 수 있듯이
의 욕심이 많은 자였다. 이제 그는 그러한 탐욕스런 본성을 분명히 노출시켜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정식으로 팔려고 그 값을 흥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같은 사악한
흥정에 대해 마가복음에서는 간접 화법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본문에서는 직접 화법으
로 묘사함으로써 돈을 탐하는 유다의 죄성이 더 강조되고 있다. 마가와 누가복음에는
약속만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는 돈을 직접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그의 물욕
에 가득찬 행동을 더욱 생생히 보여 준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넘겨 준다'는 말은 그
가 직접 예수를 묶어 공회에 넘긴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예수를 불의한 죄목(罪目)을
뒤집어 씌워 고소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예수가
피소(被訴)된 것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그들 수하에 있는 자들에 의해서였다(57-68
절). 따라서 '넘겨 준다'는 말은 가룟 유다가 예수를 체포할 만한 적기(適期)를 마련
하고 또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파송된 무리에게 예수가 손쉽게 체포될 수 있는 여건
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16, 47-59절). 여하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
명을 놓고 벌어진 흥정은 순식간에 완결되었다. 실로 죄악된 계획은 죽음의 화살처럼
빨리 진행되는 것이다.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기로 하고 받은 돈은 은30
세겔이다. 출 21:32에 의하면 황소가 남의 노예를 죽였을 때 은 삼십 세겔을 배상하
도록 되어있었다. 따라서 예수는 노예의 값어치에 불과한 적은 액수로 불의한 자들의
손에 거래된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적은 액수에 거래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으며,
이것은 단지 '그들은 은 삼십으로 그를 팔았다'는 슥 11:12의 예언을 자구적으로 맞추
기 위해 그 액수의 양을 축소하여 기술한 것이라고 한다(Meyer). 그러나 이것은 무리
한 해석인 듯하며 오히려 그 당시 공회와 유다 양자간에 예수를 노예 정도의 하찮은
존재로 취급하고 멸시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Robertson). 정
녕 예수는 가장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또한 가장 고통받고 멸시
받는 존재로 이 땅의 마지막 생을 마감하신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 비하(自己卑
下)를 통해 예수께서는 이 땅에 멸시받고 고난받는 자들과 죄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던
영혼들을 구원하셨던 것이다(히 4:14-16). 한편 가룟 유다가 예수를 은 30세겔에 팔아
넘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특이한 견해가 있다. (1) 예수에 대한 실망 때문에 예
수를 배반하게 되었다. 유다는 예수를 정치적 메시야로, 즉 민족 해방운동의 지도자로
생각했었는데 반해,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는데, 바로 이 점이 유다의 기대
에 어긋났다. 결국 실망 속에서 유다의 헌신은 미움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마침내는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2) 유다가 예수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
넣어 그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봉기하게 만들려고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넘겨주었다고
생각한다. 즉 예수가 마지막 순간에 이르게 되면 자기가 기대했던 대로 봉기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다의 배반 동기를 확실하게 알 수가 없
다. 적어도 그의 배반 동기는 탐욕과 예수에 대한 실망 등이 뒤섞인 벅합적인 것이었
을 것이다. 사실 마태에게 있어서 유다의 배반 동기는 그렇게 큰 중요성을 지니지 않
는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유다의 배반 사건이 성경의 예언(슥 11:12)의 온전한 성취
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다.
=====26:16
기회 - '기회'의 헬라 원어인 '유카이리아'(* )는 본래 '좋은 시
기를 뜻한다. 아마 예수를 넘겨주기에 '무리가 없을 때'를 찾는 것이리라.
=====26:17
무교절의 첫날에 - 이는 문자적으로 '누룩없는 떡의 첫번째 날에'가 된다. 무교절
은 본래 유대력으로 니산월(태양력 3, 4월경) 15일부터 그달 21일까지 7일동안 지키는
유대인들의 큰 절기이다(출 12:15-20 ; 레 21:6 ; 민 28:17). 그러나 유대인들은 니산
월 14일인 유월절 저녁부터(출 12:6) 무교병을 먹는 바 흔히 유월절과 무교절이란 말
을 상호 교호적(교호적)으로 사용하였다(출 12:18). 그리고 그들은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13일경부터 집안의 모든 누룩을 제거하였는데 이날을 준비일로 좀다. 여기서 가
리키는 '무교절의 첫날'이란 '유월절', 곧 '양 잡는 날'(출 12:6)이 아니라 하루전 날
인, 니산월 13일인 준비일을 의미한다고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왜
냐하면 본문의 평행구인 막 14:12과 눅 22:7에는 이 날을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잡는 날', '유월절 양잡을 무교절 일'등으로 각각 기술함으로써 이때가 니산월 14일
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Lange, Hengstenberg, Anddrews 등 ). 그리고 본
장 19절에 그들이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공관복음서보다 대체로 시간적으로 엄격, 정확한 요한복음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즉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예수께서 밤을 세워 기도하시고 그 다음 새
벽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서로마 관정으로 끌려갔을 때를 기록한 요 18:28부분
에서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유월절 잔치'는, 곧 '유
월절 양을 먹는 것'을 가리킨다(Dods, Godet, Bermasd 등). 따라서 이때는 니산월 14
일 ,곧 성(聖) 금요일 새벽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께서 심문당하시고 십자가 형을
당하신 때를 '유월절의 예비일'(요 19:14, 31),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인 니산월 14일
(출 12:6)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결국 예수께서는 이같이 심문과 죽음이 있기 전날인
니산월 13일, 곧 목요일('무교절의 첫날')에 최후의 만찬을 준비토록 하셨던 것이다.
이 만찬은 정규 유월절 식사보다 만 하루 앞선 날에 베풀어졌다. 유월절 최후 만찬의
시간 문제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요 13,18,19장 강해를 각각 참조하라.
유월절 잡수실 것 - 유월절 식사는 원래 니산월 14일 해지기 전에 양을 잡아 쓴나
물과 함께 준비해 두었다가 해가 지는 시점(P.M.6t시)을 전후로 하여 식사를 개시한
다. 물론 본문의 사건은 이 정례적 행사일보다 만 하루 앞선다. 한편 유월절 식사의
순서를 살펴보면 (1) 먼저 손을 씻고 결례(潔禮)를 행한 후 가장이 축제에 대한 감사
(유월절 키두쉬,kiddush)를 드리고 네번에 걸쳐 마시게 되는 물을 탄 포도주 중 그 첫
째 잔을 마실 때 기도함으로써 시작된다. (2) 계속해서 채소와 쓴나믈을 전체로 먹은
(양념에 찍어 먹음) 뒤에는(애굽에서의 고역 상징) 유월절 학가다(Haggadash)와 할렐
(Hallel) 찬양의 첫 부분(시 113편 또는 113, 114편)이 이어진다.(3) 유월절 학가다에
서는 집안의 자녀들이 이 예식의 의미를 묻고(출 13:8) 가장(家長)이 출애굽 사건에
비추어서 이러한 상징이 갖는 의미를 설명해주게 된다(M. Oesahim 10:4-5). 그 다음에
이어지는 순서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4) 대체로 포도주를 두번째 마심으로써
본 만찬이 시작되고, 이때 양고기가 식탁에 오른다. (5) 그 뒤에는 세번째 포도주 잔
이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축복의 잔'(고전 10:16)이라고 알려져 있고 이 잔을 마
실 때 또 한번 감사의 기도가 있게 된다. (6) 그때 참석자들은 할렐 찬양의 나머지를
부른다(시 114-118편 또는 115-118편). 그리고는 네번째의 포도주 잔을 들이키는 것으
로 식사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보듯이 유월절 식사를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이 상당
히 많았다.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이었
고 수많은 군중들이 그 날을 성전에서 맞이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을 것이
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 장소를 마련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다. 그와 더불
어 그 식사에 필요한 각종 준비물(어린양, 무교병, 포도주, 쓴나물, 등불 등)이 여간
손이 가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식사 장소에는 누룩이 모두 제거되어야 했기에(출
12:15) 미리 청소도 해야만했다.이러한 복잡한 준비 작업으로 인해 제자들은 예수의
의사를 묻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제자들은 예수께서 유월절 식사를 적어도 정규
식사일인 금요일 곧 니산월 14, 15일 걸치는 저녁보다 하루 앞에 먹을 것이라고는 감
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하루 앞서 행하신 유월절 식사에는 율
법에 정해진대로 내일까지 양을 먹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어린양 고기는 식탁에 오르
지 않았을 것이다(19절, the Pulpit Commentary). 이것은 결코 우연(偶然)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정한 것이 아닌, 새로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양잡는
날, 곧 니산월 14일 오후에 당신이 친히 십자가라는 유월절 식탁에 오를 예정이었던
것이다.
=====26:18
성 안 아무에게 가서 -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만찬을 준비하는 과정이 상당히
이적적인데 반해(막 14:2-16 ; 눅 22:7-13) 마태복음에서는 마지막 만찬이 이적적으로
즉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리 계획되어 있었던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공동 번
역 성경에서는 '성 안에 들어가면 이러 이러한 사람이있을 터이니'라고 번역되어 있
고, 새번역에는 '성안에 있는 "그" 사람에게 가서'로 번역되어있다. 더구나 '아무'라
는 뜻의 혤라어(* , 톤 데이나)에는 관사가 붙어있어 예수가 이미 인
지하고 있는 어떤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음이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마태는 그 사람
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당시의 정황에서 그 이유
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그 당시 예수께서는 당국자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고 있
었으며 살해 음모가 진행되고 있던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와 그 일당에게 만찬
잔치를 제공한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
황에서도 만찬 자리를 제공해 준 사람을 보호해 주기 위혜서 예수께서는 '아무개'라고
만 말할 뿐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예수일행에게 장
소를 제공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니라 예수의 무명 친구라는 견해도 있다. 이 무명친구
가 예수에게 비밀 장소를 공급하였는데, 이 친구는 큰 다락방을 소유하고 있을 만큼
부유하고 종들도 있었으나 매우 겸손하여 만찬에 참석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혹자는(Zahn) 이 사람이 요한 마가의 아버지라는 견해를 펼치기도 하고, 개심한 니고
데모 또는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라고도 하나 모두 확실한 증거가 없다.
선생님 말씀이 -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해들을 사람이 적어도 당신을 '선생
님'(* , 디다스칼로스)이라고 호칭해도 깨달을 정도의 안면이
있고, 또 신앙이 성숙해 있는 자임을(Lenski) 암시한다.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예언으로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문
구이다. 여기서 '때'라는 말은 '정해진 때' 곧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신 때를 의미
한다(옙 1:9). 그러나 당시의 제자들이나 그 집의 주인이 듣기에는 그 말이 유월절 식
사에 예수께서 시간을 맞추려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하여 미리 준비를 하려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하여 미리 준비를 하려 한다는 의미로 들렸을 것이다. 후에 예수의 부활을 경
험하고 나서야 비로서 예수의 그 말씀이 그 당시 임박한 십자가, 즉 인류 구속을 위한
대속적(代贖的) 죽음의 성취를 가리키는 것임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마태가 본문을 기록 할 때, 그는 예수의 죽음과 순차적 사건들이었음을 분명히 이해하
게 된 것이다.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한 구속사의 순차적 사
건들이었음을 분명히 이해했을 것이다.
=====26:19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예수께서 예언한 바대로 모든 것이 되어 있음을 제자들이
발견하였다는 말 대신에(막 14;16)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의 명령에 따라서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는 말로 대신한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 유월절 식사가 준비
된 곳은 큰 다락방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만찬이 준비된 곳이 다락방이라는 암
시는 없다. 유월절 행사에 있어서 양을 잡는 일은 가장 핵심이 되는 일이었다(17절).
그런데 본문에서는 유월절 양을 잡은 것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유
월절 준비를 위해 '집', 곧 '방'만을 준비하고 정작 유월절 식사에 필요한 '양'에 대
한 언급이 없는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을 유월절 양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즉 예수깨
서 친히 유월절 양이 되므로 또다른 유월절 양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17절).
=====26:20
저물 때에 - 유대력에 의하면 니산월 13일이 끝나고 14일이 막 시작하려는 시간(오
후 6시 전후), 곧 성(聖) 목요일에서 성(聖) 금요일로 접어드는 시점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엄밀히 따져서 예수 최후의 만찬은 니산월 13일에서 시작하여 14일까지 계속되
었다고 볼 수 있다.
앉으셨더니 - 여기서 '앉으셨다'(* , 안나케이마이)는 말은 '기
대어 앉았다'는 뜻이며, 이것은 왼쪽으로 비스듬히 식탁쪽으로 기대어 오른팔을 자유
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유대인의 식탁 자세에서 연유한다(8:11). 여하튼 예수께
서는 모든 외부 인사를 물리치시고 오직 당신의 12제자들과 더불어 내밀하고도 뜨거운
교제를 나누시고 계신 것이다(눅 22:14, 15 ; 요 13장).
=====26:21
저희가 먹을 때 - 역사적인 유월절 식사가 시작되었다(유월절 식사 절차는 17절과
요 13장을 참조하라). 예수께서 제자들로 더불어 나누신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잔치였
고,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이것은 최후의 유월절이었다. 즉 유대인의 유월절 잔치가
예표하는 바 '구속'은 그 다음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완성된 것이며, 여기
서부터 유월절의 지위는 우리 주의 성만찬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인의 성례가 되었다(막
14:22-25, '유월절과 성만찬' 눅 22:19, '성만찬과 성찬식' 참조).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 당신이 친히 선택한 사랑하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는 이 선언은 마태, 마가, 요한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유다는 은밀한 중에 예수를 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그
것을 이미 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되어가는 일에 대해서 알 리가 없었다. 만약 제자
들이 그 계획을 알았다면 유다는 그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실로 이 말씀은,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으며, 유다에게는 예수께서 자신의 배반
적인 거래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신 것은 물론 그 죽음에 이르는 절차(節次)까지도 은연중에
예견하신 바 있다(2절 ; 17:22 ; 20:18). 한편 예수께서는 유다의 악행을 아셨으나 그
를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너희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말로 마지막까지도
그의 마음을 돌이킬 것을 권고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매우 완곡한 사랑의 호
소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인을 위압, 강요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회개를 호소하신
다.
=====26:22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 요한은 이때 '서로 마주보며'라고 기록함
로써(13:22) 제자들의 의아한 심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한편 공동 번역과 새번역
운 '저마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본래의 뜻은 '각자가 한 사람씩'이라는 뜻이다. 그
런 상황이라면 각자가 한 사람씩 확인해보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이다.
주여 내니이까(* , 메티에고 에이미 퀴리에)
- 여기서 의문사 '메티'는 질문자 쪽에서 '아니라'는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즉 이를 달리 번역하면 "저는결코 아닙니다. 그렇죠? " 정도의 질문이 될 것
이다. 사실 11제자들은 이러한 본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질문
을 통해 적어도 자신들의 연약함을 직시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그들은 자
신들이 부지 불식간(不知不識間)예수를 해칠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느끼
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제자들은 '주여'라는 말을 함으로써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즉 신앙의 주(主)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는 '랍비여'라는 말로 부름으로써(25
절) 예수를 단지 '선생님'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26:23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 이 '그릇'은 과일이나 식초를 혼합하여 만든
소스를 담은 '대접'으로서 도구를 사용치 않고 주로 손으로 취식(取食)하는 유대인들
의 관습에 따라 쓴 채소와 함께 음식을 여기에 담갔다가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이때가 구운 양고기를 먹는 시간이었다면 '그릇'에는 나물과 과일 그리고 퓨레(puree)
가 담겨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누룩없는 떡과 함께 그것을 먹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 있는 대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라는 말로만 가지고는 그 당사
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유월절 식사 때에는 함께 자리한 사람들
각자가 그 그릇에 손을 넣어 찍어먹기 때문에 예수께서 손을 넣으실 때 전부는 아니더
라도 몇 사람이 함께 손을 넣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
해 이에 대한설명도 여러가지가 있다. 즉, 이말은 (1) 예수와 동시에 찍어 먹는 자
(Bengel), (2) 예수가 말씀하실 그 순간에 그릇에 손을 넣은 자(Plummer)등의 견해가
있다. 이외에도 휀샴(Fensham)이라는 학자는 쿰란 공동체의 규율에 따라서 유다가 예
수와 함께 손을 그릇에 넣은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쿰란 공동체에서는 그릇
에 손을 넣는 순서가 있는데 그것은 계급에 따라서 차례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가 예수와 함깨 그릇에 손을 넣었다는 것은 유다가 예수의 지도자적 권위를 부인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반역의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전체 분위
기상 큰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한편 마가복음에서는 단지 예수와 함께 같은 접시에
서 먹는 한 사람이 그를 배반할 것이라고 말할 뿐인데(막 14:18), 마태복음에서는 방
금 그의 손을 예수와 함께 접시에 넣은자가 배반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당사자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암시이다. 더욱이 예수 자신이 떡 조각을 찍어다가 유다에게 주는 것을
기록한 요 13:26, 27에서는 배반자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하튼 가장 친근한 사
람끼리 마음을 터놓고 식사하는 유대인의 풍습에 비춰볼 때 식사 중에 가룟 유다의 배
신 예고를 한 것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시 41:9). 그것은 곧 예수께서 다함없
는 사랑을 베푼 바로 그가 예수에게 가장 해로운 배신(背信)을 한 것이었다.
=====26:24
인자는...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하는 구약 예언에 대한
일반적 언급이다('인자'에 대해서는 눅 5:24 강해를 참조하라). 그러나 본문에 있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가 의미하는 것을 설명해 줄 수있는 구약 성경 인용구는 찾을
수 없다. 혹 고난받는 종을 노래한 이사야 53:7-9이나 다니엘 9:26과 같은 구절을 생
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유월절 어린양과 같은 예언적 유형론(2:15 ; 5:17-20)을 염두
에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두 가지가 결합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
면 이 말을 하나님이 작정하신대로,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경륜(經綸)대로 되어진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편 '간다'는 말은 죽음을 향하여 갈 길을 간다는 말로 생
각할 수도 있겠으나(요 7:33 ; 8:21, 22) 이 단어의 직접적 의미는 죽는다는 뜻이기보
다 차라리 '떠나간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대하여 예언
한대로 고난의 길을 '갈'뿐 아니라 그 길을 통과한 후 영광을 받아 아버지께로 '간다'
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인간의 책임
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예정된 대로 죽음을 겪게 되지만 그를 파는 자
의 죄는 결코 가벼워질 수 없다. 따라서 유다는 결국 자기가 한 일 때문에 심판을 받
게 될 것이고, 그의 형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한 그런 종류의 형
벌인 것이다. 아뭏든 이는 유다의 배신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모두 관
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주권은 구원의 효력을 발생시키고 구속사가 성취되
도록 한다. 그러나 인간의 책임은 악한 마음의 유혹에 넘어간 잘못에 대한 것이다.
그 결과로 해서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하여 메시야의 백성이 죄에서 구원받게 되고
(1:21), 인간이 유혹에 빠짐으로 인해서 영원한 심판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 가룟 유다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비참하게
될 것을 아시고 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이는 당시 랍
비들이 흔히 사용하는 속담적 표현으로 욥기(욥 3:2, 10, 11)와 외경(에녹 38:2)에서
도 발견된다. 한편 배신하여 절망적 운명에 처하는 것보다 차라리 세상 햇빛을 보지
않은 자가 훨씬 좋았겠다는 이 비극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계속 자신의 반역 의
지를 실천해 갔다. 그리고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바로 이때 유다가 밖으로 뛰쳐나간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요 13:30).
=====26:25
랍비여 내니이까 - 이 문장 앞에 나오는 '예수를 파는 유다'라는 문구는 마태가 열
두 제자의 명단(10:4)을 제시할 때마다 덧붙였던 형용구였다. 여하튼 이미 예수를 팔
기로 공회원들과 내통하고 있었으며(14-16절), 더욱이 예수의 회개에의 권고성 발언에
도(21절) 불구하고 그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의 양심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지독한 위선(僞善)이다. 더구나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랍비'라는 호칭으로
예수를 부른다(22절). 이것은 유다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주로 보는 것을 거부
하고 예수의 메시야성을 철저히 무시한 언사이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적대자
들이 '랍비'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그런데 유다 역시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적대자
들의 반열에 서고 있는 것이다. 유다는 이 칭호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배반하는
순간에 또 한 번 사용할 것이다.(49절).
=====26:26
저희가 먼을 때에 - 본절 이하 사건의 시간적 위치를 말해 주는 기록이다(21절).
아마 이때는 유월절 본 식사가 끝나기 전, 곧 '축복의 잔'인 세째번 잔이 비워지기 전
으로 추정된다(17절 참조).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 떡기 '떡'은 무교병 큰 덩이일 것이다(출 12
:15 ; 13:3, 7). 그리고 '축복하였다'는 것은 마치 '오병 이어'에서처럼 감사와 찬양
의 평이한 식기도가 아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식탁의 전통적 관례에 따라 감사를 드린다
는 뜻이다. 여기서 ''떡'이라는 단어는 (1) '들어'(took), (2) '축사하시고'
(blessed), (3) '떼어'(broke), (4) '주셨다'(gave)는 네 동사와 연결되는데 본래 이
동사들은 유대인들이 식탁에서 감사드릴 때 하는 동작을 나타내 주는 일반적인
표현이었다(17절). 아마 이때 예수께서는 유월절 식사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던 공식
문구인 '우리 주 하나넘, 우주의 왕이시여, 땅에서 떡을 내신 당신께 영광이 있기를'
과 같은 말로 축사하셨을 것이다.
떼어 - 떡을 떼는 행위는 공동식사에서 혼히있는 일로 식탁의 주체자의 고유한 일
이다. 그런테 여기서 페는 행위는 단순히 먹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구약 시대
에서는 이 떼내어진 떡은 곧 선민 이스라엘의 뼈아픈 과거의 고통을 상징했었다. 그러
나 이제 새 시대의 문을 여선 예수께서 친히 떡을 또시며 당신과 연관시킴으로써 장차
고난받아 쨔기실 당신의 몸을 예시하신 것으로 볼수 있다.
제자들을 주시며...받아 먹으라 - 떡을 떼어 건네는 것은 상호간의 신뢰와 두터운
관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받아 먹으라'는 명령 문구는 예수의 죽음과 그죽음이 가
져다주는 죄로부터의 혜방(解放)과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라는 축복의 말씀으로 간주
할 수 있다.
이것이 내 몸이니라 - 바울과 누가는 여기에 '너희를 위한'이라는 수석어를 첨가
시켰고 더불어 '이것을 행하며 나를 기념하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눅 22:19 ; 고전
11:24) 당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육체로는 더이상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을 예수 자신
을 기억하도록하며 또 그들을 위해 대속의 희생양이 되신 예수를 기념하도록 가르치고
계신다. 이에 비해 마가와 마태는 그냥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만 말하면서 '떡'을
곧 죽게 될 예수의 몸과 나란히 연간시키로 있다. 이로써 앞에서 암시했듯이(19절) 예
수께서 유월절의 희생양이 되어 그들을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새로운 구
속사가 시작될 것이다. 즉 떡이 여러 조각으로 떼어진 것처럼 예수의 몸도 찢어질 것
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구원을 하나넘이 정해 주신 유월절 식사
와 관련시키듯이, 메시야의 백성들도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을 그분의 권위로 제정된
성례와 연결시킬 것이다. 한편 본문에 제시된 '...이니라'( , 에스티)는 말은 주
어진 술어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계사(繫辭, 영어의 is에 해당)로서 이 말이
뜻하는 바가 진정 실제적 동질성을 언급한 것인지, 단지 상징적인 대비에 불과한 것
인지, 아니면 성령에 의한 결과론적인 임재를 뜻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여하튼 예
수께서는 친히 화육(化肉)하신 분으로 당신의 사람들에게 당신이 가르치신 성체
(聖體, 살과 피)를 근거한 성만찬을 통해 당신이 주시고자 하시는 크고 놀라운 은혜
와 축복을 전달하시고자 한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해 주의 말씀에 경청했던 그당시
제자들은 이 메시지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예수께서 주신 이 거룩한 성
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영적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능히
알았을 것이다(요 6:53). 따라서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은 단순히 기념 예식일
수 없으며, 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하나의 절차일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의 희생과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 그들이 과거에 얻지 못했던 것을 얻는 것
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순하고도 순수한 열정으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만찬
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예식에 참여하여 성체를 기념하기만 한다면 말로 다할 수
없는 크나큰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the Pulilit Commentary). 한편 본문의
성만찬과 관련된 제견해들을 역사적 변천 과정을 따라 살펴보면 아래와 갈다.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 이것이 유월절 식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잔'은
세번째 곧 '축복의 잔'이었을 것이다(17절 참조).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다시 추사하시
고 '오 우리 주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포도의 열매를 창조하신 당신에게 영광 돌
리럽니다'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한편 여기 사용된 '사례하다'는 뜻인 원어 '유카리스
테사스'(* )는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테오'(
* )의 분사로서 여기서 '성만찬'을 뜻하는 '유카리스트'(Eucharist
)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저희에게 주시며 - 여기 '주시며'에 해당하는 원어 '에도켄'(* )은 부정
과거형으로 단 1회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즉 예수께서는 사례하신 후 단 한번만 잔을
주셨을 것이다. 따라서 잔을 받은 제자들은 그 잔을 받고 차례로 돌려가며 마셨을
것이다.
다 이것을 마시라 - 마가는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막 14:23)라고 기록
하고 있는데, 마태는 이 본문을 '너희가 다 이것을 먹으라'고 명령한 것과 일치시킴으
로써 더욱 이 장면을 생동감있게 전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다'라는 말이 강조된
것은 떡을 먹은 사람이면 '모두' 잔을 마시는 일에 참여해야 할 것을 암시한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은 사제들만을 잔 마시는 행사에 참여시키고 있는 로마 카톨릭의 예전(禮
典)의 그릇됨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 실로 그들은 사도들에게 돌려진 잔은 오직
사제들만이 계승한다는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일반 신도들의 성찬 예식을 잘못 인도하
고 있다. 그러나 주의 살과 마찬가지로 주의 피는 우리 모든 신자의 신령한 음식이요
음료가 되어야 한다.
=====26:28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 구약 제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체(要諦) 죄용서를 얻
게 하는 대속 제물의 '피'였다. 실로 피 없이는 하나님께 속죄받을수 없었다(히 9:22)
.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짐승으로서의 대속 제물은 임시적이요, 단편적이며, 불완전
한 효능을 가지고있어 인간을 죄악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제
주께서는 그 대속제물의 궁극적 완성자요 영원한 표상으로서 친히 십자가 제단에 오르
시려 하신 것이다(요일 1:7). 정녕 당신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는 유일하고
도, 가장 확실한 근거이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 히브리 관용구에 의하면 '많은 사람'은 '모든 사
람'을 뜻한다. 즉 예수께서 어떤 특정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었으며,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죽지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죽음은 본질적으로 세상 모두
를 위해서 죽었다는 의미이다(20:28). 그러나 이 죽음의 선한 영향력이 각자의 믿음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흘리는 바'에 해당하는 원
어 '에크퀸노메논'(* )은 현재수동태 분사를 취한 단어로서
당신의 대속적 죽음이 확정적 사실이며, 지금부터 영원토록 흘려질(상징적임)
당신의 피흘림으로 인해 그대속의 효력이 영속할 것임을 드러내고 계신다.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예수의 이같은 선인은 구약의 출 24:8 ; 렘 31:31-34
; 슥 9:11 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특히 바울과 누가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
이라는 말을 사용함로써 렘 31:31-34의 내용과 긴밀히 연관시키고 있다(눅 22:19 ; 고
전 11:25). 한편 본문에 언급된 '언약'(* , 테스디아데케스)이
란 말은 '둘'(* , 디아) 사이에 무엇을 '세우는 것'(* , 티데미), 곧
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뜻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개념에 있어서 이 언약(계
약)은 피흘린 생명을 근거로 맺는 그야말로 전존재론적 약속을 의미한다(창 24:5-8 ;
히 8:6-13). 이졔 예수께서는 당신의 피, 곧 십자가 회생을 담보로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계신 것이다. 즉 그 옛날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직후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로 맺었던 '옛 언약'의 시대를 마감하시고(출 24:5-8 ; 히 8:6-13) , 이제 그 옛
언약이 상징하는 바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당신의 피흘림을 통해 온 인류와 교회
앞에 본질적으로 '새로운 언약'을 수립하셨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여 이 예수의 흘
린 피를 마시는 자는 개별적으로 내밀(內密)하게 이새 언약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26:29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마시지 아니하리라 - 먼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
란 유대인들이 기도 중 포도주를 가리키는 통상적 표현이다(M. Berakoth 6:1).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유월절 식사 중 마지막 네번째 잔을 마신 후(17절 참
조)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적절하다. 즉 예수께서는 이 최후의 만찬의 마지막 잔을 들
이키심으로써 구약 술법에의한 유월절 식사가 최종 마감되었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 자신의 관점에서는 이 지상에서 오직 '고난의 잔'만을 남겨놓고 계신것이
며, 구속사적 관점에서는 구약의 유월절 예식이 마감되고 새언약에 따른 성찬 예
식이 새롭게 제정된 것이다. 한편 유월절 식사 중 잔을 네 번 마시는 것은 출 6:6,
7의 네 가지 약속에 대응된다. 따라서 예수가 성례 제정에서 말씀한 세번째 축복의 잔
은 구속과 관계되는데 비해(출 6:6), 네번째 잔은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출 6:7)라는 약속에 대응되는 것이다(Lane, Dauble). 이제 예수께
서는 이 네번째 잔을 드시며, 더 이상의 잔을 물리치심으로써 제자들의 관심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자로서의 시각에 의한 '아버지의 나라'와 그곳에서의 '기쁨의 잔치'에
로 돌리게 하신다.
내 아버지의 나리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 예수께서는 유월절 예식을 마감하
시는 자리에서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한 예식 곧 '그 나라'에서의 잔치를 고대(苦
待)하고 계신다. 이 종말론적 기대감 속에서 '하나님 나라'(막 14:25)를 '내 아버지의
나라'라고 말씀하신다. 진정 이 아버지의 나라는 예수의 나라이기도 하다(16:28 ; 눅
22:16, 18). 뿐만 아니라 '너희와 함께' 마실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완성의 때에 예수
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질 영속적이고도 친밀한 교제와 운명적 연대성이 강하게
암시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오늘 이 시대, 우리들에게도 적용되고 약속되는 바이다.
한편 본문의 '새 것'(* , 카이노스)이란 옛 것과 비교해서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는 의미이지 단지 시간적으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 *
, 네오스)이라는 의미가 아니다(벧후 3:13). 이는 아버지의 나라 곧 새하늘과 새 땅은
현세의 기존 질서와 차원을 달리하는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임을 암시해 준다. 따
라서 예수께서 하신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는 말씀
은 단지 작별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될 것과 모든 하나
님의 백성들이 메시야의 축제에 다같이 참여하리라는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 즉 첫번
째의 유월절이 애굽에서의 구원 뿐 아니라 약속의 땅에 정착할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이 최후의 만찬도 앞으로 이루어질 나라에서의 구원과 삶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
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결코 실패나 영원한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영광에의 진입로였다. 결국 그의 갈보리로의 행로(行路는 하나
넘 나라의 보좌로 올라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26:30
저희가 찬미하고 - 이 찬미는 유월절식사의 마지막 부분에 노래하는 할렐(Hallel)
의 후반부(시 114-118편 또는 115-118편)이다(17절 주석 참조). 이것은 보통 교송(交
頌)으로 불려지는데, 이때 식사의 인도자이신 예수께서 찬송을 부르면 제자들이'할렐
루야'로 응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 찬미 직전에 요 14장 강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 예수께 있어서 감람산은 묵상과 기도의 처소인 동시에 시
련과 고통의 장소였다(눅 21:37 ;22:39). 그러나 주께서는 제자들과 더불어 승직의 찬
미를 부르면서 이 형극(形棘)의 장소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율법의 원 형태에 따
르면(출 12:22) 유월절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아침까지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나아가신 이유는 원 율법을 어기셨다기보다, 오히려 율법의
전수 과정에서 많은 변천을 통해 통상적으로 바깥 출입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어두운
밤길을 헤치고 나아가셨을 것으로 볼 수 있다.
=====26:31
때에 예수께서...이르시되 - 31-35절 부분은 평행 구절을 대비시켜 볼 때(막
14:27-31 ; 눅 22:31-38 ; 요 13:36-38) 예수의 무리가 감람산으로 이동하시기 전(30
절), '한' 다락방에서 유월절 식사를 하시던 도중에 일어난 사건임이 분명하다. 마태
가 이 사건을 시간순서를 무시하고 예수의 체포 장면이 다뤄져 있는 36-56절 앞에 수
록한 것은 참으로 예수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가를 또렷이 제시하기 위해서였
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 '오늘밤에'라는 문구는 마태복음에 만 나오는
말이다. 한편 예수께서 특별히 '오늘밤'이라고 못박음으로써 임박한 운명의 시간을 분
명히 알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본문을 헬라어
원문에 의해 직역하면 '너희가 다 나 때문에 걸려 넘어질것이다'가 된다. 여기서 '걸
려 넘어지다'는 뜻의 헬라어 '스칸달리조'(* )는 13:21 ; 24:10에
서도 사용되고 있는 말로서 여기서는 '실족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
다. 즉 이 말은 예수께 일어날 사건과 연관하여 그들이 함정에 빠져들 것이라는 의미
이다(Lenski). 실로 그들 11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실족할 것이었다. 결과적으
로 이것은 가룟 유다의 적극적 배신 행위에 대비되는 11제자들의 소극적 배신 행위를
지적한 것이다(56절).
기록된 바 - 히브리 맛소라 사본에 의한 슥 13:7의 자의적 해석구이다. 실제로 문
자적 일치는 부족하지만 그 본래의 의도하는 내용은 그대로 담고 있다. 여하튼 예수께
서는 당신의 죽음과 제자들의 배신 행위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구약 예언의 성취(成
就)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보이기 위해 스가랴의 예언을 빌어온 것이다. 한편 9 :36
과 25:32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양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본문에서의 '양'은 제자들에
게 한정된다. 본문을 통해서도 분명해지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철저하게 구약의 예언
을 성취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의도 아래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
어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사실은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됨
으로해서, 곧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게 될지라도 그 근본에 있어서는 양자간
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이 예수를 로마인들에
게 넘겨주고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예시한 부분이다. 그러나 스가랴 본
문에 의거하건대 여기서 예수를 죽이는 궁극적인 동인은 '내가', 곧 하나님 자신이다.
그런데 소망적인 사실은, 스가랴 13장의 전후 문맥을 보면 참 목자가 해를 받음으로
대부분의 양떼가 사라져 버리나(슥 13:8, 9) 양떼의 3분지 1은 남아서 연단을 받은 후
에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희망찬 메세지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제자들은 예수를 팔고(48절), 버리고(56절), 부인함으로써(69-75절) 흩어
지게 된다. 하지만 선택된 자들은 연단을 통과한 후 분연히 일어나 예수께서 그리스도
이심을 만방에 담대하게 증거하게 될 것이다(행 2:14-36 ;4:10 ; 18:5, 28)
=====26:32
으로 나타나고 있는 부활 예고이다. 실로 예수의 메시지의 근본 취지는 당신의 수난
과 제자들의 배신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모든 과정 이후에 있게 될 당신의 부
활을 밝히는데 있었다. 진정 당신의 부활은 '흩어짐'을 '모음'으로, '배신'을 '회개와
충성'으로 바꿔 놓을 것이었다. 한편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는 말은 '너희
를 갈릴리로 인도하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가리로다'(* , 프
로앝소)는 말의 본래 뜻은 목자가 양을 '앞서서 인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프로앝소'라는 동사를 이처럼 적극적 행위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은 전체 문맥
상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이 동사를 자연스럽게 해석하는 것이 좋다. 즉 목자가 공격
당하여 양들이 흩어진다는 것은 제자들이 상심(喪心)하여 예수를 유대 지경의 무덤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갈릴리의 집으로 돌아갈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앝
소'를 그들 실망한 제자들이 갈릴리에 닿기 전에 부할하신 예수께서 '그들보다 먼저
도착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Stonehouse).
=====26:33
다 주를 버릴지리도 나는 언재든지 - 여기서 '언제든지'(* ,우데포
테)는 원래 '결코 아니', '절대로 아니'라는 강한 부정의 뜻을 담고 있는 부사로서
'너희가 다' '오늘밤'에 버릴 것이라는 예언적 말씀에 대해 그것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결의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다 넘어질지라도 나는 결코 넘어지지 않겠다는 베드로의
자신에 찬 선언은 직선적이고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다. 비록 당시의 그의 심정이 진정한 충성심에 불타고 있었고 그것을 순수하게 표현하
였다 하더라도 그 배후(背後)에는 지나친 교만이 숨어있다. 그는 은연중 다른 제자들
을 가볍게 보면서 '다른 제자들은 주를 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절대로 아닙
니다'라고 소영웅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인간의 신앙적 절개는 인간의 의지력
도 매우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에 의하지 않고는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베드로는 알았어야 했다.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가장 강해지는 비결
인 것이다. 여하튼 그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
냐"(요 21:15)는 예수의 중요한 질문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본문의 이 자신 만만했던
결심을 회고(恢古)했을 것이다.
=====26:34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유월 의식에 젖어있는 베드로의 자만을 단호히 거부하시는
권위에 찬 선언이다. 실로 베드로의 변절(變節)은 바로 눈앞의 사실이었던 것이다.
닭 울기전에 - 마가복음에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
라'고(막 14:30) 되어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두 번'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채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팔레스틴 지방에서 닭은
밤 12시30분경, 1시30분경, 2시30분경에 각각 우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Hans
Kosmala). 따라서 새벽 12시부터 3시까지를 '닭우는 시간'으로 부르기도 했다. 여하튼
본문의 '닭 울기 전'이란 적어도 새벽 동이 트기 이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한
편 당시의 예루살렘에는 부정한 짐승에 속하는 닭 기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닭 울기 전'이라는 말은 이른 아침을 나타내기 위한 속담적 표현이었다고 하는 견해
가 있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기르는 닭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기르는 닭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고 이른 아침에 로마 경비병들의 당번 교환을 알리는 나팔소리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을 확실히 증명할 만한 근거는 없다. 한편
베드로의 선언이 강한 만큼 예수께서도 '진실로' 네게 이른다는 강조적 표현으로 베드
로의 배반을 다시금 예언하신다. 더구나 하늘의 숫자인 '세 번'을 사용하여 베드로의
완전하고도 철저한 부인을 예시한다. 이 예언은 69-75절에서 그대로 성취되고 있다.
=====26:35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 마가복음에서는 '힘 있게 말하되'라는 표현을 곁들여
(14:31) 강한 결의를 거듭해서 나타내고 있다. 특히 본문은 '결코...하지 않을 것'이
라는 이중부정 구문(* , 우 메)이 첨가되어 반대 의사를 더욱 크게 부각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본문의 초두에 아주 드문 경우의 가정법(* ,데이)이 사용된 것
으로 보아 베드로는 아직 예수의 죽음을 믿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제자들도
동의한 바 베드로의 강력한 장담은 예수께서는 결코 십자가에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
는 나름대로의 의중(意中)을 드러낸 것이었다. 과연 제자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화
려하게 왕위에 등극(登極)하실 것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사태의 진전에 대한 제자들의 완전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주님은 장래를
미리 아셨기 때문에 고통이었고, 제자들은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였다.
=====26:36
겟세마네 - 기드론 골짜기 너머 감람나무가 우거진 감람산 기슭에 있으며 예루살렘
의 동쯤 벽으로부터 약 1.1Km 정도 떨어져있다. 이 '겟세마네'라는 지명은 아랍어 명
칭로서 '기름 짜는 틀'(olipress)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곳에서 감람산의 감람
기름을 짰기 때문에 생긴 이름일 것이다. 이곳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서 예수와 그
의 제자들이 자주 들른 곳이었다(눅 22:39 ; 요 18:1, 2). 이처럼 감람기름을 짜는 곳
에서 예수께서는 피와 같은 땀을 짜시면서 기도하였다. 이러한 연유로해서 오늘날 그
곳에는 '땀흘린 교회'(The Chple of the Sweat)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내가...기도할 동안에...여기 앉아 있으리 - 이때 예수의 정확한 장소 지정에 따라
여덟 제자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게 되었고 세 제자는 예수와 더욱 가까이 있게 되었
으며 그들과 조금 떨어져 예수가 위치하여 속깊은 마음을 제자들에게 꺼내보이지 않으
시고 오직 홀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호소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26: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 마가는 좀더 구체적으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막 14:33)이라고 그들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실로 이 세 제자들은 예수께 가
장 신임받던 자들로서 변화산에서도 예수의 영광을 목격했었다(17:1). 그러나 이제 그
들은 이곳 겟세마네에서 예수의 '고민과 슬픔'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실로 그들은 예
수의 영광의 증인이요, 고난의 증인으로 오늘 우리에게 예수의 마지막 행적을 전해 주
고 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 마가는 이 장면에 대해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막 14:33)라는
말로 그 감정의 폭을 더욱 심도 깊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고민하고''(* , 아데모네인)란 극심한 불안과 근심을 뜻하는 말이며(빌 2:26), '슬퍼하사'(* , 뤼페이스다이)란 마음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슬픔을 의미한다. 실로
예수께서 지금과 같이 곤경에 처한 적은 없었다. 바야흐로 예수의 수난의 고통이 실제
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 있어서 죽음의 육체적 고통은 물
론이지만 그것보다도 한층 심한 고통이 되는것은 인류의 죄를 지고 스스로 죄인이 되
어(고후5:21) 하나님으로부터 저주(詛呪)를 받은 바 되는 것이었다(갈 3:13). 정녕 이
고통이야 말로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
까?"(27:46)라는 십자가상의 절규에서 그 고통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26:38
예수의 최후의 기도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 70인역(LXX)에 의한 시 42:5을 인용한 문구이다. '마
음'의 헬라어 '프쉬케'(* )는 '바람'또는 인간의 '영혼'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데, 특히 본문에서는 성육신하신 예수의 인간적 고뇌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즉 인간으
로 비하하신(빌 2:5-8) 예수의 심적 갈등이 이 단어 속에 침통히 새겨져 있다. 실로
인간이 되신 예수께서는 신적 노여움의 잔을 마셔야 하는 그의 인성의 고통을 철두철
미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죽게 되었으니 - 혹자는 본 구절을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뜻으
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구약중의 말투(사 38:1 ; 욘4:9)를 받아들여 슬픔이
너무 심해서 거의 죽을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좋다(Taylor,
Hill).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 '나와 함께'라는 문구는 마가복음에는 없는 부분인데 마
태는 이를 '함께'라는 말과 더불어 부각시켜 스승과 제자사이의 긴밀한 관계성을 보여
준다.즉 예수께서는 비록 제자들이 자신의 고난에 본질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다 할지
라도 인간적인 연민(憐憫)과 격려로써 그 제자들이 자기곁에 있어 주기를 원하셨다.
비록 그것이 주의 인간적인 고민의 표현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근심은 오직 혼자만 아
는 근심이었다. 주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류 대속의 죽음의 그림자를 분명하게
보고 계셨다. 한편 예수께서 긴히 당부하신 바 '깨어있으라'(* ,
그레고레이테)는 현재형 동사로서 계속적으로 잠에서 깨어 일어나 있으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 말씀은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경계(警戒)의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26:39
조금 나아가사 - 누가복음에서는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눅 22:41)라고
되어 있다. 아마 그 거리는 30-50m 사이의 짧은 거리였을 것이다. 따라서 깊은 밤중에
극한 심적 갈등을 겪으시며 간구하시는(히 5:7) 예수의 기도 소리는 제자들의 귀에 또
렷이 들렸을 것이며 그 애타는 심정은 그들 제자들의 마음에 넉넉히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 유대인의 기도 자세에는 서서 두 손을 들고 하는 기
도(막 11:25), 무릎 끓어서 하는 기도(행 7:60 ; 엡 3:15)등이 있다. 실로 주께서 머
리를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였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비운 절대 겸손의 표시로
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적극적인 복종의 표현이다.
내 아버지여( , 파테르 무) - 마가는 아랍어적인 표현인 '아바
(Abba) 아버지여'로 기술함으로써 그 호소의 뜨거운 호소의 뜨거운 정을 더욱 강조하
고 있다. 진정 최후의 순간을 눈 앞에 둔 예수가 바라볼 수 있는 최선의 대상은 당신
을 이 땅에 내려보내셨으며 또한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게 하실 성부 하나님 밖에는
없었다.
만일 할만하시거든 - 평행 구절인 막 14:36에는 '아버지께는 모든것이 가능하오
니'로 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의지'를 나타낸 말로서 예수의 전적순종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인성(人性)으로서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
이 자신의 죽음 이외에 또다른 그 무엇이 있다면 차라리 그것을 이뤄 달라는 애타는
호소를 하고 계신 것이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 '잔'은 구약 성경에서 축복이건(시 23:5)저주
이건(시 11:6 ; 75:8 ; 사 51:17, 22) 하나님에 의해 전달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잔'은 분명 사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전달되는
잔을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요 10:17, 18 ; 18:11). 한편 예수께
있어서 이 '잔'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서 예수께서 친히 감당하실 십
자가에서의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야심에찬 요청을 하려고 왔
을 때,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 말을 사용하여 '나의 마시려는 잔'(20:22)이
라고 하신 바 있다. 물론 이는 단순한 생물적 죽음 이상의 의미로서 하나님과의 단절
이라는 영적 고통도 내포하고 있다(27:46). 이와 더불어 본문의 '지나가다'라는 동사
는 유월절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출 12:23에서는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
엘의 집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지나가는'라는 장면이 나온다. 따라서 '지나가다'는
말은 죽음의 재난을 피한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를 소망하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예수의 인성(人性)에 의한 불안과 고뇌에 찬
갈등의 시간이 다하고 신성(神性)에 의한 전적인 순복(順服)이 이뤄낸 궁극적 결론이
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의지를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굴복시킴으로써 그잔을
마시기로 결연히 다짐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의 기도의 주제는 이 '잔'을 마실터인데
충분히 그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능력을 더하여 주십사는 것으로 변
하게 된다(눅 22:43). 한편 성부 하나님은 성자의 이 순결한 호소에 '부활'로써 응답
하신다(히 5:7, Homer A. Kent Jr.).
=====26:40
제자들에게 오사...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 예수는 당신의 고난의 헌장에 함께 동
참하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당부하셨던(38절) 세제자에게로 돌아왔으나 그들은 하나같
이 잠들어 있었다. 누가는 이 장면에 '슬픔을 인하여' 잠들어있었다는 말을 첨가함으
로(눅 22:45) 그들의 수면을 좀더 동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질문은
비록 베드로에게 향했지만 복수형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들 세 제자 모두를 포함한다
하겠다(16:15, 16).
너희가 나와 함께...깨어 있을수 없더냐 - 제자들은 얼마전 주와 함께 죽겠다고 단
호한 어조로 맹세하였었다.그러나 그들은 주와 함께 깨어 기도조차 하지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녕 그들은 육체와 감정이 모두 인내의 도(道)를 넘어서고 있는 터에 영적
긴장마저 헤이해져 있었기 때문에 잠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
서는 이처럼 조그마한 당부마저 너희들이 감내할 수 없느냐는 투의 연민에 찬 질문을
그들에게 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홀로 외로이 서야 하며 홀로 결정해야 하셨다.
한시 동안도 - 이는 문자적으로 정확히 한시간 동안을 뜻한다고 볼 수 없다. 오히
려 그들 제자들이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는 적절한 시간동안으로 보는 것이 좋다. 정
녕 '깨어 있음로써' 오는 시점을 직시할 수 있고 '기독함로써' 그 시점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the Pulpit Commentary). 한편 '깨어있으라'는 명령은 이
미 24:42절과 25:13에서 강조된 바 있다. 특히 오늘밤에 제자들이 배신할 것이라는 조
금 앞서의 예고(31절)는 그들이 기도해야 한다는 시급한 요청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오직 기도만이 다가오는 '시험'에서 그들을 구해 줄 수 있다고 말
하는 것이다. 늘 깨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갈대같이 약한
우리의 뜻은 쉽게 꺽이고 말 것이다.
=====26:41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 이는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 ,프뉴만)은 뒤이어 나오는 '육신'과 반대 개념
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누어 주신 신의 형상, 곧 '영혼'과 사리를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의미한다(사 31:3 롬 7:25). 진정 '육신'적 유혹과 충동은 이 '마음'의
선한 의지를 무참히 짓밟아 버릴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유약성(柔弱性)이다.
여하튼 닥쳐올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어려움보다 훨씬 덜한 제자들의 어려움을 염려
해 주셨던 것이다. 실로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의 본성을 지닌 인간은 당면한 시험
을 이기지 못한다. 육신의 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깨어서 기도하는'길 뿐 다른 대
안은 없다.
=====26:42
아버지의 원대로 - 두번째 기도는 첫번째 기도와(39절) 내용이 유사하지만 분명
새로이 아뢰어진 것이다. 특히 이 기도는 첫번째 기도와는 달리 고난의 잔은 당신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만 하는 것임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 이제 더이상의 인성(人性)
의 갈등은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즉, 철저한 자기 부정과 완전한 순종만이 있을 뿐이
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는 주기도문(6:10)과 표현이 일치한다. 헬라어 원문에
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로 되어 있다. 어쨌든 이 기도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의 절대적인 복종을 나타낸 것이며(빌2:8), 예수 공동체의 모든 기도의 모범과 근
거가 된다. 실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자신이 가르친 순종의 교훈을 가장
잘 실천한 모범을 보이셨다. 처음으로 창조된 인간이 살던 동산에서 '당신의 뜻이 아
닌 나의 주장함으로써 낙원이 광야로 변하였고,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겟세마네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히 뜻을 따르겠다'고 기도함으
로써 광야같은 세상을 천국(天國)으로 바꾸셨고, 그 결과 고통의 갯세마네 행로는 영
광으로의 문이 된 것이다.
=====26: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 죽음을 눈앞에 둔 채 찢기고 상한 심령으로 간절
히 기도하신 예수와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졸음에 겨워 잠에 빠져 있었다. 여기서 '눈
이 피곤함일러라'는 헬라어로 과거 완료 수동태로 그들의 눈꺼풀이 무거워져서 내려
감겨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제자들의 영적 게으름을 반영하고 있는 문구이다. 한
편 마가는 이때의 상황을 좀더 세밀하게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막 14:40)를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잠에 취한 상태가 얼마나 깊었으며 그들
의 생각이 얼마나 안이해 있었던가를 넌지시 나타내 보이고 있다.
======26:44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후 - '동일한 말씀'은 두번째 기도의 반복이었을
것이다(42절). 이때 예수께서 기도하신 예수에 대해 복음서들 간에 조금씩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지만 마태븍음에서는 예수께서 세번 기도하신것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이 세번의 기도는 (1) 예수의 기도의 간절성과 (2)그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
상황의 긴박감 및 (3) 예수의 아버지께 대한 순종의 절대성과 적극성등을 강조해 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 그 자체의 중요성이 은연중 강조되고 있다.
=====26:45
이제는 자고 쉬라 - 본문의 의미는 확실치 않다. 이 문구는 직설법으로 또는 명령
법으로 번역될 수 있어서 그 해석도 다음과 같이 매우 다양하다. (1) 이 말씀을 문자
적 의미로 받아들여 주께서 체포당하시기 전까지 잠을 자둠으로 다가올 시련에 대비하
여 고단한 몸의 피로를 풀라는 권면으로 해석한다(A.L. William). 이례게 해석할 경우
다음 절과의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2) '나로서는 너희들이 이제는 무한정 자고
쉬어도 상관치 않겠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녀희들의 주의 깊은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
는다'고 해석한다(Bruce). (3) '기도하라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졸고 있구나'라는 의미
로 해석한다(Mcneil). (4) '이 후에 자고 쉬라', 즉 지금은 말고 나중에 다른 때에 쉬
라는 것이다(Knox). 이중 어떠한 견해만을 취하기는 힘들지만 (2)의 견해가 가장 적절
할 것 같다.즉 예수께서는 이 부분에서 부드러우면서도 비꼬는 투의 풍자적(諷刺的)인
명령을 하고 계신 것이다. 즉 수난의 시간이 가까왔고 기도하거나 닥쳐올 시험에 대비
하여 힘을 얻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이제는 잠을 자도 무방한 것이다.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 예수의 갑작스런 이 선언은 완료 시상으로서 바로 그 시간
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께서 원수의 손에 잡히어 최악의 순간을 맞을 그 수난
의 때가 이미 온 것이다. 예수께서는 적어도 등불을 들고 기드론 시내를 걸어 겟세마
네로 통하는 길을 따라 당신을 잡으러 접근하는 무리들의 험악한 발자욱소리를 멀리서
부터 듣고 계셨을 것이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 여기서 '죄인'은 배신과 고발의 첫 행위자인
가룟 유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 '죄인'은 산헤드린 공회원, 백성의 지도자, 일
반 백성, 그리고 로마 행정 당국자들 모두를 내포한다. 더욱이 이 '죄인'은 미래적 관
점에서 예수의 십자가 형을 필요로 했던 거의 모든 인류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회피하지 않으시고 의
연(毅然)하게 맞으시려 하셨다(요 18:4). 그리고 그들 세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의연함
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담대한 태도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
복의 한 단면이었다.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노니 - 6절에서는 '때가 가까왔다'고 말하셨었다. 여기서
도 완료시상이 사용되어 유다에 의해 예수께서 죄인들의 손에 넘겨질 때가 이미 곁에
온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주께서는 번민 중에 기도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는 당
신의 '때'에 대한 분명하고도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침착하게 일어나셔서 자신을 팔
자를 맞으러 나가신것이다.
======26: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회피하지 않으시고 의
연(毅然)하게 맞으시려 하셨다(요 18:4). 그리고 그들 세 자들에게도 그러한 의연함
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담대한 태도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
복의 단 한면이었다.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 45절에서는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었
다. 여기서도 완료시상이 사용되어 유다에 의해 예수께서 죄인들의 손에 넘겨질 때가
이미 곁에 온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주께서는 번민 중에 기도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는 당신의 번민 중에 기도 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는 당신의 '때'에 대한 분명하
고도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침착하게 일어나셔서 자신을 팔 자를 맞으러 나가신 것이
다.
=====26:47
말씀하실 때에 - 예수의 체포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대화를 막 끝마치는 것과 더불어 체포자들이 예수의 무
리 모인 곳으로 들이닥쳤던 것이다.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 - 공관복음서 모두가 유다를 '열 둘 중에 하나'로 기술하
고 있다(막 14:43 ; 눅 22:47). 아마 이것은 당시에 일반화된 유다의 별칭이거나 아니
면 배신 행위가 얼마나 가증스럽고 불충(不忠)한 것인지를 드러내보이기 위한 표현인
듯하다. 실로 '열 둘'이라는 숫자는 지극히 명예로운 대명사였지만 그 중의 '하나'는
지극히 저주스러운 대명사가 되었다. 마태는 유다가 언제 제자들 사이에서 빠져 나가
예수를 잡으려하는 자들과 어울렸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반면에 요한은 유다가 마
지막 만찬 때에 떡조각을 받은 후 제자들의 무리로부터 이탈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요
13:30). 아마 유다가 대가를 받고 알려 주기로 한 것은 민란을 일으키지 않고 어느 조
용한 곳에서 예수를 체포할수 있는가에 대한 정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주로
어떤 곳을 자주 찾으시는지를 익히 알고있던 유다는 그분이 유월절 식사 후 감람산 겟
세마네로 가실 것을 알고 나가서 무리를 끌고 그 곳으로 왔던 것이다.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 이때 유다를 따라온 '큰 무리'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사람', 곧 산헤드린의 서기관들과 평의원들이었다(21:23). 이와
더불어 녹 22:52에는 '성전의 군관들'로, 요 18:3에는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
'로 되어 있다. 특히 요 18:3, 12에 사용된 군사용어로 미뤄볼 때 성전 경비대 및 기
타 고용된 건달패 그리고 로마 군인들도 다수 있었던 것같다. 비록 많은 학자들이 이
때는 아직까지 로마군인들이 개입치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어느 정도는 그 자리에 있었
을 것이다. 특히 로마 병사들은 명절 기간의 치안 유지를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산헤
드린으로부터의 병사 파견 요청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빌라도는
처음부터 이 음모의 내막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것을
아내에게 이야기해줬다고 가정한다면 그 아내가 꾸었던 꿈을 설명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27:19). 한편 '검'은 로마 군인을, '몽치', 곧 곤봉은 유대인 성전 수비대의
사병들을 지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마태는 '큰무리'라는 표현으로 예수
를 잡으러온 사람들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혹자는 이때에 예수를잡으러
파견된 자가 약 200명에 달했으며, 그 주위의 구경꾼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Lenski). 그리고 55, 56절에 비추어볼 때, 예수께서 스스로 기꺼이 고난의 잔을 받아
들이고 있으므로 그렇게 많은 무리는 사실 필요가 없었다.
=====26:48
예수를 파는 자가...군호를 짜 - 당시는 사진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리고 우거진 감람나무 사이의 어두운 밤이었므로 요주의(要注意) 인물을 찾아내기가
상당히 까다로웠을 것이다. 따라서 유다는 예수가 있는 곳에 도달하기 전에 무리들과
신호를 맞추어 손쉽게 체포하도록 했다.
입맞추는 자 - 당시 유대인들에게 입맞춤이란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일반적인 인
사법이었다(삼하 20:9). 정상적인 인사 형태인 입맞춤이 어둠 속에서 체포의 군호로
사용됨으로써 마침내 배신과 위선의 상징으로 굳혀지고 말았다. 아마 이곳에 몰려온
무리들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때 그의 말을 들었던 무리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입 맞춤에 의한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49절에서 다시 반복해 사용
된 '입맞추다(* , 카타필레오)는 동사는 본절에서 사용된 '입맞추
다'라는 동사와 어근은 같으나 형태가 약간 다르다. 즉 본절의 입맡춤은 단순한 인사
로서의 한 형식을, 49절에서 사용된 동사의 의미는 '반복해서 거듭 입맞추다' 또는
'친밀하고도 뜨거운 포옹' 정도의 뜻이다. 여하튼 제자와 스승 사이에 있어서 제자가
먼저 스승에게 입맞추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고 한다. 제자가 스승에게 먼저 입맞출 수
없는 이유는 제자와 스승이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다의 입맞춤은 예수와
의 사제(師弟) 관계가 최종적으로 부정되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유다의 이 행동
은 일종의 모욕적 행위를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 장면은 다읫시대 요
압이 아마사에게 입맞추려는 체하면서 칼로 그를 찔러 죽인 사건을 연상시켜 준다(삼
하 20:9, 10). 바로 이러한 야누스(Janus)적인 성격이 사단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악
인의 전형적 속성인데 그들은 겉으로는 평화와 정의와 사랑을 부르짖지만 속으로는 파
멸과 불의와 탐욕을 획책한다(고후 11:13-15).
=====26:49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 이는 통상적인 인사말이었는데, 여기서는 예수께 대한 존경
의 표시이기보다 따라온 무리들에게 확연히 들리도록 하는 또 하나의 신호였다. 한편
마태복음 전체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랍비여', 즉 '선생님이여'라고 부른 경우는 본절
과 25절에 두 곳 뿐인데 두 경우 모두 예수를 팔아넘길 가룟 유다에 의해서 불리어진
다(25절 참조). 보통 제자들이 예수를 부르는 호칭은 '주님이여'이다.
=====26:50
친구여 - '친구'의 헬라어 '헤타이로(* )는 동의어 '필로스'(*
)가 개인적 친분을 뜻하는 것과는 달리 주로 직업적인 동료 관계를 가리키는 말
로 사용된다. 따사서 그 말 속에는 적의나 반감이 없을 뿐 아니라 그렇다고 애틋한 사
랑이 내포되어 있지도 않다. 예수께서는 유다를 '배신자' 또는 '악한 자'로 비난하지
않으시고 정중한 예의로 인내하신다.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 이 말은 마가복음에는 없는 부분이고, 누가복
음에는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 22:48)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헬라어 표현인 '에프 호 파레이'(* )의 의미는 확실치가 않다.
새번역에는 '네가 무엇을 하러 여기 왔느냐 ? '라는 의문형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오늘
날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의문형보다는 오히려 생략적인 명령형으로이해하고 있다(사실
원문에는 '행하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공동 번역에서는 '어서 할 일
이나 하라'는 명령형으로 번역하고있다. 즉 '네가 온 목적을 행하라'는 뜻이다. 한편
요 13:27에서는 예수께서 '네가 할 일을 어서 하라'(새번역)고 말씀하시는데, 의미는
일맥 상통한다. 결국 예수의 이 말씀은 자신에게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알고 계셨고
또한 의연히 그 일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즉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服從)
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저희가...손을 대어 잡는지라 - 이때 성전 수비 대장 또는 로마의 하위급 장교의
명령에 의해 예수께서 결박당하셨을 것이다(요 18:12). 그리고 예수는 그 어느 죄인보
다 더 손쉽게 그들이 결박에 응했음이 분명하다.
=====26:51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 - 다른 공관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마태복음도 검을 빼어 대
제사장의 종의 귀를 다치게 한 주인공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 장본인은 바로 베드로였다(요 18:10). 더불어 요한은 베드로에게 귀를 잘렸던 대제
사장의 종이 '말고'라는 이름의 사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혹자는(Robertson) 마태복
음을 비롯하여 공관복음서가 베드로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복음서가 기록된 후인
A.D. 68년까지 생존했었던 베드로의 안전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하튼 베드로
의 행동은 심리적으로 보아도 수긍이 간다. 예수로부터 여러 번에 걸쳐서 변절(變節)
하리라는 경고를 들은 그로서는 자신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때가 드디어 왔다고 생각했
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신의 폭력 행위를 말리고, 또 순순히 결박
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는 충동적인 용기가 사그러졌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극히 감정
적인 충성심의 표현은 사실상 주께서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베드로가 참
다운 충성심을 보여 줄 수 있기 위해서는 하직은 더 많은 연단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한편 베드로가 체포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내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예수
께서 즉시 상황을 진정시켰을 뿐 아니라 떨어진 귀를 원상 회복시켜 주었으므로 더이
상의 문책(問責)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눅 22:51). 한편 예수의 제자 중 한 명
이 '검'을 휘둘렀던 점과 눅 22:49에서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라고 '우리'를 언급
한 것을 근거로 제자들 모두가 '검'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예수의 제자
들이 열심당의 극좌파인 '시카리'파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
자들도 있다(10:34 ; 눅 12:49-51 ; 22:36).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해석인 듯하다. 오
히려 이때 베드로는 예수의 수난 예고가 있은 후부터 예수의 신변을 보존할 목적으로
단검을 준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26:52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 이 명령은 베드로의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단호
히 거부하시는 말씀이다.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리라 - 52-54절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평행구가 없다. 한편 계 13:10에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라는 말이 나오며, 창 9:6에도 이와 비슷한 의미의 말이 나온다. 따라서 이
말은 적어도 하나의 격언구로 사용된 듯 하며 예수에 의해 영원한 진리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물론 예수께서는 이와 흡사한 맥락에서 5:39 이하에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
복하지말라고 가르치신 바 있다. 적어도 이 말씀 속에는 생명예 대한 존엄 사상이 들
어있는 바,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신성하며 그것을 해하는 자에게 징벌이 주어질 것이
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意志)가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검을 가지
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단순한 평화주의에의 호소라
고 해석한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한 것이지 내어 버리라고는 하지 않았다고 하는 점을 강조하며 검의 사용에 대해 긍정
적 평가를 내리려 한다. 두 가지 주장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으나 본문의 직접적인 뜻
과는 거리가 멀다. 적어도 본문의 문맥상 검의 사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근거를
이끌어 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무력 앞에서의 무기력한 굴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몇 가지 저의는 (1) 칼을 사용함으로써 불의한
판결을 일삼는 사악한 집단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꼴이 되며(Luther), (2) 칼은 하나님
나라의 지배 원리에 반하는 세상 국가들의 힘의 통치력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칼의 사
용을 금하신 것이다.(요 18:36). 이와 함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해하려고 검
과 몽치를 가지고 올라온 무리와 그 무리의 배후 세력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계신
다. 즉 너희들이 '검'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고귀한 생명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려 하
지만 결국에는 너희 자신들이 '검'앞에 거꾸러짐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26:53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 이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성부께 대한 성자의 귀속이
나 의지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씀은 성부와 하나된 자이신 성자께서 마치
동맹군의 원조를 호소하듯 성부께 청원하는 것을 의미한다(the Pulpit Commentary).
열 두영 더 되는 천사 - '열 둘'이라는 숫자는 제자들의 수와 일치하고 열 두 지파의
수와도 일치하는 매우 의미깊은 슷자로서 성경 문학적으로 '완전수'에 해당한다. 그리
고 '영'으로 번역된 헬라어 '레기온'(* )은 로마 군대의 일개 군단(軍團)
을 뜻하는데 예수 시대를 전후하여 팔레스틴에는 상당수의 로마군대가 주둔해 있었다
고 한다.이들은 주로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의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했었는데 아우구스
투스 당시의 일개 정규 군단은 보병 6100명, 말 726필 규모였다(Robertson). 따라서 '
열 두 영 더 되는' 하늘의 군대를 호출하기만 한다면 그 힘은 불과 몇백명에 불과한
체포자들을 능히 무찌를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예수께서 저들에게 잡히신 것은 자기
자신을 막아낼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주님께서 만일 '지금'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
면 아버지께서 지금 당장에 열 두 영도 넘는 천사를 보내셔서 원수들을 쳐부술 것이었
다. 이것은 왕하 6: 17처럼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하나님의 도움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지식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불병거(왕하 6:17), 스
랍(사 6:1-3), 그룹(창 3:22-24), 천천 만만의 천사(단 7:10)의 통치권자로서 광야 시
험 후 천사의 수종을 받으셨으며(4:11),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천사의 도움을
받으셨다(눅 22:43). 다만 예수께서는 성경들에서 가리킨(54절) 바와 같이 아버지의
뜻 곧 인류 대속의 완성을 이루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잡혀 주신 것이다(히 1:14장 강
해 '천사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26:54
만안 그렇게 하면 - 베드로가 휘두른 '검'으로나 하늘 천군 천사의 도움을 빌어 저
들에게 잡히지 아니하면, 즉 순간적인 인간의 충동대로 행동하면이라는 뜻이다
(Bruce).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강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철저한 마태의 신학, 즉 예수께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요,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하여 나타내는 것이
다. 이에 비해 누가복음의 경우,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예
는 드물다. 그리고 마가 역시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막 14:49) 말이 있기는
하지만 마태의 거듭되는 강조적 표헌(표현)보다는 그 강도가 약하다. 여하튼 마태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당하는 배반과 체포, 그리고 그가 당해야 할 고난과 죽음은 결코 단
순히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경륜)에 당신의 전 관심과 의지를 집중시키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런 일이있으리라 한 성경'은 예수의 수난과 관계된 구약의 여러 예언들로서
가룟육다의 배신(시 41:9), 은 삼십에 팔림(슥 11:12), 죄인들과 함께 못박힘(사
53:12), 수족이 찔리심(슥 12:10)등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예수께서 체포당하시는 장
면에 대한 예언으로서 사 53:7에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라고 기록듸어 있다.
=====26:55
강도를 잡는 것 같이 - '강도'(* , 레스테스)라는 말은 조직적이고 폭
압적인 강탈자라는 뜻 외에 극단의 민족주의자들의 추앙을 받는 혁명가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Josephus). 사실 예수께서 하시려는 일이 겨우 몇몇의 동지를 규합해서
로마나 유대 당국을 전복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은밀한 곳에서 모의를 하
는 흉기를 든 '강도'와는 전혀 다른 분이셨다. 늘 공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으
며, 그 가르침의 내용도 '사랑과 평화'였다. 물론 그분은 악한 세력에 대혜서는 비겁
하게 침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원수들을 무서워하지 않으시고 성전을 정화(정화)하
셨다. 하지만 그것이 타락한 무법자요 강도의 행동과 같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쨌
든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되실 때 흉악한 두 강도 사이에 달리심으로((27:38) 로마와
유대 당국으로부터 끝까지 강도 취급을 당하고 마셨다.
날마다 - 이 문구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가르치신 기간이 공관복음이 말해 주는
것보다는 훨씬 더 오랜기간이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의 공생에 기간을
길게 잡고 있는 요한복음은 이같은 사실을 어느 정도 디받침해 주고 있다.
성전에 앉아 - 마태는 예수께서 성전에 '앉아'가르쳤다고 강조한다. 마태복음의
다섯 설교가운데 세 설교가 예수께서 앉아서 하신 설교이다(5:1 ; 13:1, 2 ; 2:3). 실
로 마태는 예수의 가르치는 권위를 그가 '앉아' 가르쳤음을 말함으로써 강조하고 있는
데, 그것은 유대 랍비들이 교훈을 베풀 때 대개 앉아서 하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 구약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문구이
다(1:22, 23 ; 2:15-18 ; 2:23 ; 13:34, 35 ; 21:3-5 등). 마태가 여기서 '선지자'라
고 말했을 때 그는 아마 스가랴나(슥 13:7)의 예언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54절)그러
나 '선지자의 글'이란 율법서와 성문서를 완전히 배제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
면 다른 곳에서는 모세와 다윗도 '선지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며, 또 그 예언들을 베
푼 자가 왕이나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주로 예언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 이로써 31절에서 예수께서 예언하신 것이 성취되었
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35절) 주님곁을 떠나지 않겠다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가 버렸다. 특별히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벌거벗은 채 도망간 청년
=====26:56
예수를...끌고 대제사장 가야비에게로 가니 - 마태는 예수께서 전직 대제사장이자,
현대제사장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가 예비심문받으신 사실(요 18:12, 13)을 생략하
고 불법적인 야간 심문을 위해 가야바의 처소에 모인 산헤드린 공회쪽으로 독자들을
인도하고있다(예수의 재판 절차에 대해서는 강해를 참조하라). 아마 그 당시 가야바와
안나스는 같은 건물 내에서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거주했던 것같다(Wycliffe). 여하튼
3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마태는 다른 공관복음서와 달리 대제사장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가야바는 분명 예수를 합법적 절차에 의해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자이다(요 18:14). 그리고 '서기관과 장로들'이 함께 언급되는 것을 보아 이모임
이 산헤드린 공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이 예수를 붙들어 오자
마자 심문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으나(61절), 누가에 의하면 심문은 날이 샌 후 이뤄
졌고, 심문이 시작되기 전까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치욕스런 장면과 백성들의
희롱과 조소(嘲笑)가 계속되었다고 한다(눅 22:54-65). 한편 당시의 법에 의하면 해
가 뜨기 전 어둠 속에서는 산헤드린의 공식적 회집(會集)이 금지되었으며 어떠한 심문
이나 재판도 불가능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누가의 견해만을 취하는 학자도 있다. 그
러나 이것은 절차상의 차이로 보아 안나스에게 먼저 예비 심문을 받으신 후 가야바에
게 끌려와서 해뜨기 전에 비공식 심문을 받으신 후,날이 샌 후에야 비로소 공식 심문
을 받으신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재판 과정에서 빚어진 몇
가지 불법을 살펴보면 (1) 해뜨기 전에 이뤄진 재판, (2) 예수에게 변호인이 전혀 없
음, (3) 재판 소송은 적어도 이틀간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안식일, 유원절, 장막절 등
의 절기 전날에는 자연히 새로운 재판이 집행될 수 없었는데도, 이것을 무시한 채 하
룻밤만에 모든 절차를 진행시킴, (4) 산헤드린의 공식적 회집 장소에서가 아닌 가야바
의 거처에서 재판이 속개됨, (5) 안나스 앞에서의 증인 없는 심문, (6) 대제사장의 직
접 심문, (7) 이미 잠정적인 사형 언도를 내려놓은 후 모든 재판 과정을 그것에 맞추
어 진행한 점 등이다. 실로 심문을 받고 엄중한 판결에 의해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
오히려 예수를 불법적으로 심문하고 거짓 증거로 그분을 처형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26:57
예수를...끌고 대제사장 가야비에게로 가니 - 마태는 예수께서 전직 대제사장이자,
현대제사장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가 예비 심문받으신 사실(요 18:12-23)을 생략하
고 불법적인 야간 심문을 위해 가야바의 처소에 모인 산헤드린 공회쪽으로 독자들을
인도하고 있다(예수의 재판 절차에 대해서는 강해를 참조하라). 아마 그 당시 가야바
와 안나스는 같은 건물 내에서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거주했던 것 같다(Wycleffe). 여
하튼 3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마태는 다른 공관복음서와 달리 대제사장의 이름을 기
록하고 있다. 가야바는 분명 예수를 합법적 절차에 의해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테 큰
역할을 했던 자이다(요 18:14). 그리고 '서기관과 장로들'이 함께 언급되는 것을 보아
이 모임이 산헤드린 공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이 예수를 붙들
어 오자마자 심문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으나(61절), 누가에 의하면 심문은 날이 샌
후 이뤄졌고, 심문이 시작되기 전까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치욕스런 장면과 백
성들의 희롱과 조소(嘲笑)가 계속되었다고 한다(눅 22:54-65). 한편 당시의 법에 의하
면 해가 뜨기 전 어둠 속에서는 산헤드린의 공식적 회집(會集)이 금지되었으며 어떠한
심문이나 재판도 불가능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누가의 견해만을 취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절차상의 차이로 보아 안나스에게 먼저 예비 심문을 받으신 후 가야바
에게 끌려와서 해뜨기 전에 비공식 심문을 받으신 후, 날이 샌 후에야 비로소 공식
심문을 받으신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재판 과정에서 빚어
진 몇 가지 불법을 살펴보면 (1) 해뜨기 전에 이뤄진 재판, (2)예수에게 변호인이
전혀 없음, (3)재판 소송은 적어도 이틀간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안식일, 유월절, 장막
절 등의 절기 전날에는 자연히 새로운 재판이 집행될 수 없었는데도, 이것을 무시한
채 하룻밤만에 모든 절차를 진행시킴, (4)산헤드린의 공식적 회집 장소에서가 아님 가
야바의 거처에서 재판이 속개됨, (5) 안나스 앞에서의 증인 없는 심문, (6) 대제사장
의 직접 심문, (7) 이미 잠정적인 사형 언도를 내려놓은 후 모든 재판 과정을 그것에
맞추어 진행한 점 등이다. 실로 심문을 받고 엄중한 판결에 의해 벌을 받아야 할 자들
이 오히려 예수를 불법적으로 심문하고 거짓 증거로 그분을 처형하려 하고있는 것이
다.
=====26: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쫓아 - 57-75절은 예수에 관한 장면과 베드로에 관한 장
면이 한번씩 번갈아 나오는 교체 편집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57절의 예수의
장면에 이어 베드로가 등장하고 있다. 베드로는 용기와(51절) 비겁(56,70절) 사이의
망설임 속에서, '멀찍이' 예수를 따랐다(Brngel). 한편 요 18:15, 16에는 베드로가 요
한의 도움으로 대제사장의 안뜰에 들어갈 수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있다. 여하튼 수제
자로서 예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는 비록 처음은 도피했었지만, 이제 다시
정신을 차려 예수의 신변을 돌아보려는 애타는 심정으로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 결국을 보려고...하속들과...앉았더라 - 베드로는 마당에 피워놓은 숯불에 둘
러선 '하속들', 곧 산헤드린의 관원들과 대제사장의 시중들 틈에끼어 들어 예수에게
되어지는 '결국', 곧 심문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보려고 하였다. 아마 이때 요한은 예
수의 심문 장소에 좀더 접근(接近)해 있었음이 분명하다(요 18:16). 바로 그 요한이후
에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는 말씀을 남겠는데(요일 4:18), 이는 베
드로의 안절부절한 행동에 대해 무언가를 지적해 주는 듯하다.
=====26:59
온 공회 - 이 공회가 불법적 공회였다는 견해와 법적으로 공회가 밤에야 열릴 수가
없었으므로 이 모임이 밝은 다음에 모일 정식 공회를 위한 예비 모임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한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자의 견해에서 산헤드
린은 세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도급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다. 그리고
산헤드린의 전체 회원수는 72명이나 회의의 정족수는 23명이면 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온 공회'는 모든사람이다 참여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산헤드린이 어떤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정족 인원이 모였을 뿐 아니라 그 회의의 핵심적(核心的 ) 인물들과(대제사
장 등)이 모여 그 심문에 있어서 하나의 주체로서 관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와 함께 후자의 견해를 살펴보면 한밤중에, 그것도 유월절 밤에 온 산헤드린 공회가
다모였을 가능성은 없다. 랍비들의 법에 의하면 범인을 심문하는 것은 낮에 해야 하며
낮 동안에 끝내야 한다. 밤에 모인 그 모임은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정식으로 의회를
소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구차하게도 그들은 비공식적으로 모여 예비 심문을 한 것으
로 봐야 한다. 이중 두번째 견해를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으나 첫번째 견해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26: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 예수를 옭아매기 위하여 여러 거짓 증언자들이 나타났
지만 그들의 증언에는 일치된 것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마태는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막 14:56)는 마가의 평행구를 축소하는 대신
마가에는 없는 '두 사람'의 증인이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여하튼 이 두 증
인들은 추측컨대 공회에 매수된 자였거나 아니면 윗 사람의 비유를 맞출 목적으로 증
인의 자리에 선 것으로 보인다.
=====26:61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수 있다 - 드디어 두 증인의 일치된 증거가 나왔
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다. 분명히 이 언급은 예수의 생애의 사실들에 부합되게 보인다. 실로 예수께서는 성
전을 실격시키고 삼 일 후에 자신의 부활할 것을 고지하신 바 있다(요 :19). 확실히
주님은 성전을 비난하고 그 건물의 무너짐을 예언했었다. 그러나 증인들은 성전을 정
죄한 예수를 성전 파괴를 직접 감행할 범법자로 혼동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
라면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불경죄로 처형되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
신이 직접 성전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결코 말씀하지 않았다. 단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일밖에는 없다(요 2:19-21). 더욱이
그 말씀의 참 뜻은 자신이 죽은 후 사흘만에 있을 그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지 옛 성전
이 몰락한 후 사흘만에 성전을 짓겠다는 예언을 한 것은 정녕 아니었다. 그러므로 중
인들의 말은 순전히 오해에 의한 증언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 두사람의 증거는 서로
일치하지 못함으로써(막 14:59) 그 증언의 신빙성마저 결여되고 있었다. 한편 렘
26:1-19에 의하면 예레미야가 성전 멸망을 예고(豫告)한 것 때문에 죽음의 위협을 당
했던 일이 있었다.
=====26:62
대제장이 일어서서...아무 대답도 없느냐 - 예수께서는 법적으로 자기를 변호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대제사장은 예수께 그러한 기회를 주고 있다. 그러나 거짓 증거
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어떻게든 예수를 해하려고 하는 교활한 가야바가 진정한 의미
에서 자기를 변호할 기회를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예수의 진술에서 무언가
또 다른 걸림돌을 찾아내려는 조급한 상태에서 변론의 기회를 준 것이분명하다. 이러
한 저들의 비겁한 공작 (工作)은 예수의 위엄있는 침묵으로 인해 무너져 버린다. 한편
예수의 침묵하는 모습에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
음이여'(사 53:7)라는 구약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진정 때로는
거짓앞에서 침묵하는 것이 거짓을 이기는 방법일 수도 있다. 진리는 거짓 증거에 대
하여 굳이 자신을 변명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 속에서 그 진실성을 밝힐 뿐이다.
=====26:63
잠잠하시거늘(* , 에시오파) - 이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예수의 침묵
이 순간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진정 침묵의 시간이 계속됨에 따라
그 무겁게 내리깔린 무언(無言)의 언어가 사악한 산헤드린회원들의 가슴마다에 웅변적
으로 스며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거짓된 증언을 확
연히 들여다 볼 수 있게끔 되었을 것이다.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 이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또는 판단하시고 보수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게 한다
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맹세 형식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마태만의 독톡한 것인데,
재판석에서 피고에게 서약시키는 형식이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 이것은 예수께서 과연 메시야냐 아니냐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이전에도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어 왔었다(12:28-42 ; 16:1-4 ;
21:1-11, 14-16, 23). 그런데 이 질문에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죄책(罪責)이 분명히 나
타나고 있다. 즉 비록 예수를 판 자는 가룟 유다였지만 율법의 교묘한 올가미와 교권
주의자들의 사악한 질문을 통해 예수를 처형할 합법적 이유를 구체적으로 마련한 자는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였던 것이다. 실로 가야바는 이 적나라한 질문을 통해 율법적으
로는 신성 모독의 범죄를 찾고자 했으며 정치적으로는 반란 음모죄를 찾고자 했던 것
이다. 여하튼 가야바가 던진 질문 중에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물음은 네가 영원 전부
터 하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산적 속성을 지니고 있느냐는 것이며, 네
가 '그리스도'냐는 물음은 네가 이 세상을구원할 사역을 지니고 온 메시야이냐는 질문
이다. 이러한 질문은 구약 시대 이래로 메시야를 대망해 온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중
요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결국 그 질문으로써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선포할 또
한 번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64절).
=====26:64
네가 말하였느니라(* , 쉬 에이파스) - 예수의 이 대답은 마가복음
'에고 에이미'(* ), 즉 '내가 그니라'는 직접적인 대답보다는 약하다
(14:62). 즉 '네가 말했다'는 예수의 말씀은 대제사장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긍정하는 말이다(25절 주석 참조). 한편 이러한 답변을 통해서 예
수께서는 5:33-37에서 친히가르치신 바 '맹세하지 말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친히 실행
하신 것이다.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것...너희가 보리라 - 이 말씀은 예수 자신에 관한 가장
은밀한 신비를 밝히는 것으로서 비록 지금은 죄인으로 가장 낮고 천한 위치에 있지만,
당신의 때에는 그 모든 것이 변하여 영광과 권능으로 변할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예
수께서는 이미 변화산상에서 그 전조(前兆)를 보이신 바 있다(17:2-13). 진정 그 당시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예수의 십자가만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수
께서는 그 십자가 이후에 전개될 영광스런 장면들을 선취적(先取的)으로 보고 계신 것
이다. 한편 예수의 영광스런 광휘(光輝)의 장면, 곧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대한 이같
은 선취적인 고백은 대제사장을 깊이 당황케 했을 것이며 그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여
지없이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진정 '네가 말했다' 그리고 '너희는 볼 것이다'는
예수의 권위에 찬 응답은 그의 현재의 권위를 확인하고 장차 있을 그의 영원한 왕권을
암시해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이란 표현은 시 110:1
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행위와 통치권을 전해받으실 것을 내포한 말이
다. 이는 결국 성부 하나님과의 동격을 이루실 예수의 신적 선언인 것이다. 그리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단 7;13, 14)에서 유래한 표현으로서 위엄과 영광으로
임하실 예수의 최고의 자기 계시이다. 어찌 되었든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사실상
동일시하신 이 말씀은 자신이 죄를 용서한다고 말한 이전의 주장 만큼이나 불경스러운
것으로 보였을 것이며 그들에게 확실한 고소거리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26:65
옷을 찢으며 -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자로 '하
나님을 모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한편 본문의 '옷'(* , 히마티아)
은 겉옷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인데, 여기서는 대제사장의 예복을 가리킬 것이다.
이에 비해 마가복음에는 속옷올 가리키는 '키토나스'(* )라는 말이 나
온다. 아마 이때 가야바는 속옷과 겉옷을 동시에 잡고 자기 목 부위에서 가슴이 노출
될 만큼 찢어 내렸던 것 같다. 여하튼 옷을 찢는 것은 극한 슬픔에 직면했거나 의로운
분노의 한 표현으로 행하던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동이었다(왕하 1:37 ; 1 Macc
11:71). 특히 랍비들이 규정한 바에 의하면 율법에 중대한 위협이 발생했을 때 법관은
일어나 옷을 찢도록 했다. 그리고 그 찢는 부분이나 길이등의 세밀한 면까지 제시하고
있다.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에블라스페메센) - 이를 직역하면
'하나님께 모독하는 말을 하였다'가 된다. 즉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
이심을 선언하심으로써 이제 신성 모독의 가장 중한 범죄자가 된 것이다(레 24:16).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의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그들에게는
신성 모독죄에 해당하는 중한 범죄로 인정되었지만 예수는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26:66
생각이 어떠하뇨 - 대제사장 가야바는 귀중한 한 생명의 생사가 달린 시점에 정식
재판 과정을 거치는 신중함을 보이지 않고 마치 군중을 선동하듯이 분위기를 이끌므로
써 거의 환호에 가까운 사형 판결을 이끌어 냈다. 아마 이때 산헤드린을 위시한 군중
들은 만장 일치로 예수의 사형을 연호(연호)하였을 것이다(막 14:64).
사형에 해당하니라 - 오직 마태복음만이 사형 판결을 직접 화법으로 보도함으로써
그 당시 고조된 분위기를 더욱 생생하게 소개한다. 그 대신에 마태복음에는 '모든 사
람'이 거기에 찬성하였다는 부분이 없다(막14:64). 한편 공의회의 사형 판결은 아마
신성 모독의 법조문에 해당하는 레 24:16을 근거로 한 것 같은데, 이 판결은 여러가지
로 불법이었다. 사실 탈무드에 가르치기를 '산헤드린은 생명을 구할 것이지 멸망시켜
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밖에도, 궐석(궐석 ) 판결을 하지 말 것, 다수의 동의가 아
니면 판결을 내리지 말 것, 사형 선고 받은 자는 판결 당일에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 원칙이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법규는 죄인에게 가급적으로 자비를 베풀라는 것
인데 지금의 이 상황에서는 그 선한 정신이 전혀 준수되지 않고 있다. 또한 산헤드린
법 4:1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1) 범죄인 심문은 반드시 낮에 할 것, 또 해지
기 전에 끝마칠 것, (2) 만일 선고가 무죄일 때는 심문의 날에 선고할 것이나, 유죄일
때는 다음날에 선고할 것이다. 그러나 산헤드린은 이와 같은 법규를 어기고 예수의 심
문을 유월절 절기와 안식일의 임박으로 인해 조급하게 행했다. 즉 그들은 예수를 심문
한 당일에 선고를 내리고 당일에 형을 집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악한 통치자와 타락한 종교와 의식이 없는 백성들이 만날 때는 항상 이렇게
진리를 왜곡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무시하게 된다.
=====26:67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사 50:6의 예언, 곧 "나를 때
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 하였느니라"는 메시지가 성취되고 있음
을 보여 준다. 실로 불법 판결이 끝나자 주위에 기다리고 있던 하속들이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모와 학대와 조롱을 일삼은 것이다(막 14:65). 정녕 그들은 생각할 수조
차 없는 최악의 수치를 예수께 안겨준 것이다. 여기서 남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것
은 언제 어디서나 더할 수 없는 모욕이다(민 12:14 ; 욥 30:10).
주먹으로 치고...손바닥으로 때리며 - 도무지 반격할 수 없는 자에게 물리적인 폭
력을 가하는 것은 더더욱 야만적이다. 한편 누가는 이때 그들이 예수를 조롱하고 구타
하기 위해 얼굴을 가리웠다고 증언하고 있다(눅 22:64). 이와 함께 본문의 '손바닥으
로 때리며'(* , 에르라피산)는 '몽둥이로 때리다' 뜻하는 '라피스
마'(* )에서 유래한 단어로 그 당시 하속들은 손바닥 뿐 아니라 몽둥이
로도 예수를 심하게 구타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실로 그들은 신성 모독자를 구타한
것이 아니라 신성 모독의 범죄를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영적 무지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26:68
琉■볕돗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 여기서 마태복음과 다른 공관복음은
상호보충적이다. 즉 각 기사는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들
을 포함하고있다. 그중 마가와 누가는 조롱하는 자들이 예수의 눈을 가리고 나서 그에
게 선지자 노릇을하도륵 강요하며 조롱했다고 한다(막 14:65 ; 눅 22:64). 한편 마태
는 눈을 가리웠다는 말을 생략하는 대신 그 조롱하는 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야'라고
불렀으며, 눈을 가리운 채 구타한 후 '너를 친 자가 누구냐'는 조롱조의 질문을 함으
로써 메시야의 신적 통찰력과 능력을 보이라고 빈정거렸다고 한다. 사실 유대인의 그
리스도(메시야)관은 불의를 정복하고 각종 능력을 행사하며 민중을 압도하는 어떤 탁
월함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한 그들이 보기에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침묵(침묵)으로
일관하는 자가 그리스도 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편
여기서 '선지자 노릇 하라'는 말은 장래의 일을 예언하라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지
식을 드러내라는 뜻이다. 즉 메시야라고 하면 비록 눈이 가리워져 있어도 자기를 친
자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느냐는 비아냥거림이다.
=====26:69
5藥寬 바깥 뜰에 앉았더니 - 이 구절은 본래 58절의 연속이었을 것으로 보여진
다. 그렇게 연결해보면 자연스럽다. 다시 장면은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로 돌아
가고 있다. 베드로는 요한의 도움으로 가야바의 궁 내로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는 성전 수비대의 경비에 의해 예수가 심문받고 계신 궁전의 실내로 들어갈 수 없었으
므로, 궁궐이 둘러싸여 하늘을 볼 수 있는 궁전 안 마당에 앉아 산헤드린의 판결이 어
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한 비자가...가로되 -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이 '한 비자'(a servant girl, NIV)는
베드로를 궁 내로 들어가게 한 여자 문지기임을알 수 있다(요 18:16, 17). 그 여자 문
지기는 아마 베드로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나사렛 예수'와 함
께 있었다고 하는데(막 14:67) 마태복음에서는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추궁한다. 결국 이 두 표현(나사렛, 갈릴리)은 지리적 문화적 우월감에 젖어있는 예루
살렘인들이 흔히 사용하던 심히 멸시적인 용어이다(요 :46). 여하튼 그 '비자'는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의 얼굴이 불빛에 노출되자 그가 심히 당황하고 초조해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며, 또 자기와 안면이 있는 요한과 그가 함께 궁내로 들어왔음을 보아
적어도 그가 예수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자라는 추론을 하게 된 듯하다.
=====26:70
醍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 마태는 '모든 사람 앞에서'라는 문구를 강조하고 있
는데, 아마도 예수의 말씀 곧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10:33)는 말씀과 연관지어 이 장면을 기록했을 것
이다. 진정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장면에 직면한 베드로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여 공
개적으로, 크고 단호한 음성으로 예수와 자신의 관계성을 부인했다. 이 베드로의 부인
은 마치 공식적인 법정에서의 선서와 유사한 형태이다(M.Scebuoth 8:3).
네 말하는 것이 무엇언지 알지 못하겠노라 - 결정적인 답변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베드로는 자기와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한다. 이처럼 자기 안전을 도모하려고 거짓을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한 제자이자 기독교 교회의 반석이라고 할 만한 베드로에게 있
어서는 실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연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
면 누구나 겪게 될 장면인 것이다. 한편 이 베드로의 치욕스러운 자기 부정적 패배는
그에게 있어서 매우 귀중한 연단의 기회였을 수 있다. 베드로는 매사에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 자신의 유약함을 깊이 깨달은 자만이 결정적인 상황에
서 겸손히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간구할 수 있다.
======26:71
앞문까지 나아가니 - 여기서 '앞문'은 가야바 궁 밖으로 나가는, 그리고 불빛이
그곳까지 잘 미치지 못하는 출구였을 것이다. 이때 베드로는 다가오는 공포의 그림자
를 떨치지 못해 아마 피신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비자가...말하되 - 두번째 부인(否認)은 '다른 여종' 앞에서였다. 그러나 마
가복음에서는 첫번째 부인과 두번째 부인이 같은 '여종'앞에서 진행된 듯한 암시를 준
다(막 14:69). 요한복음에는 '여종' 앞에서 부인한 적이 없으며, 누가복음에서는 세
번 부인한 것 가운데 맨 처음만 '여종' 앞에서 했을 뿐 나머지 두번은 다른 사람(남
자) 앞에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베드로의 두번째 부인이 여러 사람에 의해 집
중적으로 추궁되어진 뒤에 되어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여하튼 베드로는 불가의 밝은
곳을 피하여 어두운 곳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곳도 괴로운 질문을 피하기에는 안전한
곳이 못되었다. 한편 마가는 이러한 와중에 자정이 지났음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울
렸다고 전하고 있다(막 14:30).
=====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 여기서 '맹세'(oath)는 어떤 자기 진실을 고백
하기 전에 먼저 선언하던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습관으로서(Robertson), 이는 베드로
자신이 만약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저주(詛呪)내리시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어떤 거룩한 것에 호소한 것으로 보인다(5:33, 34 ; 23:16-22). 어쨌든 베드로
는 첫번째 부인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예수를 부인하고 말았다. 내가 그 사람
을 알지 못하노라. 자기를 가장 사랑했던 스승을 '그 사람'이라는 경멸적 표현으로 부
인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다.
=====26:73
조금 후에 - 누가복음에는 '한 시쯤 있다가'라고 기록하고 있다(눅 22:59). 이 시
간동안 예수는 공회에서 사형언도와 하속들에게서 수치를 당하고 나신 후 안 뜰을 바
라 볼 수 있는 또 다른 방으로 이송 된 듯하며, 어쨌든 거듭되는 위험의 증대와 부인
가운데서도 아직 예수의 신상이 염려되어 떠나지 못하는 베드로의 인간미가 엿보인다.
곁에 섰던 사람들 - 요한의 보고에 따르면 이 무리 중 감람산에서 베드로의 칼에
귀가 떨어졌었던 말고의 친척이 있었다고 전한다(요 18:26). 아마 그 친척은 불 주위
의 사람들이 웅성대며 예수와 한 통속인자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것이며, 그리하
여 말고의 일로 조금은 흥분된 감정으로 베드로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진실로 그 당이라 - 헬라어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틀림없이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
'가 된다. 이제 주변 사람들은 단순한 추측에서 확신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의 말투는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감출 수 없게 한다.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 북부 갈릴리지방의 말과 발음은 잘 다듬어진 남쪽 유
대지방의 말과 현저하게 달라서 금방 구별될 수 있었다. 좀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갈
릴리 사람들은 히브리 알파벱 중 '알렵'(* ), '헤트'(* ), '아인'(* )같은 후두 문
자를 정확히 발음하지 못했으며 '쉰'(* )을 '타우'(* )로, '베트'(* )를 '페'(*
)로 발음했다고 한다(the Pulpit Commenatary). 베드로는 '내가 그 사람을' 할때
'사람'의 '이쉬'(* ) 발음을 '아투'(* )로 발음하였을 것이다. 이와 비슷
한 경우가 사사 시대 때 있었는데, 에브라임 사람들이 '십볼렛'을 '씹볼렛'이라고
발음하여 자기의 출신지를 나타냄으로써 죽임을 당했던 예가 있다(삿 12:6).
=====26:74
저주하며 맹세하여 - 처음에는 부인, 다음에는 맹세로 부인, 그 다음에는 저주로
부인한다. 이는 죄악과 위선의 가속력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베드로의
반(반)고백들은 예수의 결정적인 고백에 맞서 있다. 즉 예수의 진실한 고백은 사형을
초래했으나, 반면에 베드로의 세 차례 거짓 고백은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시도들
이었다. 정녕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키 위한 신성 모독의 중한 죄악까지 스스럼없이
자행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다(16:25).
닭이 곧 울더라 - 베드로의 마지막 고백과 더불어 닭 울음 소리가 베드로의 귓전을
때린다. 새벽이 되기 전 그 밤동안 닭은 두번 울어댔다(막 14:72). 한편 이 닭 울음소
리는 베드로의 혼란스럽고 완악해진 마음을 돌이켜 참회의 눈물로 변화시킨 일종의
신선한 경종이었다.
======26:75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생각나서 - 34절에 나온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 실
로 베드로는 지금껏 자기를 과신했기 때문에 예수의 경고를 개의치 않았으나, 회개에
의 부름이라 할 수 있는 닭 울음소리에 마침내 연약하고 무기력한 자신의 실체를 발견
하게 된 것이다. 한편 누가복음에 의하면(눅22:61) 닭이 우는바로 그 순간 베드로는
그의 스승 예수와 눈이 마주치자 곧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한다. 실로 당신의 죽
음이 선포된 바로 그 순간까지도 연약한 제자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다함없는 연민의
정을 쏟아 부어 주시는 예수의 초월적인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로써 베드로의 장담은
(35절) 철저히 부정되었고 예수의 예언은(34절) 완전히 성취되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베드로는 더이상 자신이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히롱하는 무리들이 모여 있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찢어
지는 가슴을 감싸안고 황급히 그곳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나 베드로의 발길은 어두운
밤으로 치닫은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새벽에로 무겁고도 어렵게 내리달렸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찢고 통곡하는 회개로 인해 그는 서서히 참 신앙인의 자리로 돌
아오게 되었다. 즉 그는 유다와 같이 약하여 주를 배반했지만 통곡하고 회개함으로 평
화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몇날 후 예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
으며(막 16:7), 오순절 때는 대중을 향해 반석같이 설 수 있었다(행 :2:14). 한편 전
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 후로 닭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
지는데, 이는 베드로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말해 준다. 사실 이같은 전설을
빌지 않더라도 베드로의 비통(悲痛)의 눈물은 그의 사는 날 동안 전보다 더 심령을 가
난하게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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