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안디옥 교회에 내리신 성령의 지시
(사도행전 13 : 1 - 3)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의 성실한 목회에 힘입어 급성장하여 어느덧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일은 복음 사역의 중심자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옮겨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베드로의 활동은 숨겨지고 안디옥에서 파송된 바울의 활동무대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은 복음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금식하며 기도할 때 성령의 지시가 내려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교회에 사명을 주십니다.
1. 주를 섬겨 금식한 안디옥 교회
안디옥 교회에는 주님이 사용하실 일꾼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해 늘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 선교는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성령의 지시를 받기 위해 기도하는 일이야말로 복음 선교에 선행되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에서는 금식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 일관해야 합니다.
다른 이에게 보이려는 금식은 외식하는 금식으로 금식의 효과가 없습니다. 주의 일을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한 간절함에서 하는 금식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인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나 바울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예루살렘 교회의 환난으로 안디옥까지 이르게 된 다른 주님의 제자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어 세워졌습니다(행11:19-20).
바나바는 그 곳에 파송 받은 사람이요 바울은 바나바의 도움의 요청으로 다소에서 올라온 동역자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많은 일꾼이 생겼고 특히 바나바나 바울의 오른 팔처럼 일하는 일꾼들이 많았습니다. 이 일꾼들을 두 종류로 구분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선지자와 교사로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1)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직은 바나바와 시므온과 루기오입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 성경이 다
기록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각 교회에 이같은 선지자적 직분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들은 성령에 의해 예언하는 일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성경 주석가들은 이들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과 동일한 인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막15:21). 어떤 사람들은 루기오를 누가와 동일 인물로 여기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2) 교사직은 사울과 마나엔이 맡은 직분입니다. 교사한 말은 그 범위가 대단히 넓습니다. 교사라고 하는 디다스칼로
스( )란 말은 누구를 가르친다고 하는 말에서 나온 말로 선생님 혹은 스승으로 불려진 이름입니다. 교회에서는 가르
치는 직분이 가장 중요한 직분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마나엔이란 사람은 헤롯의 젖 동생이라고 말
하고 있는데 이 헤롯이란 인물은 헤롯 안디바를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의 생존시에 유다 지방의 분봉왕으로 있었던
자입니다. 젖 동생이란 친형제가 아니라 그 안디바의 가정에서 헤롯과 함께 자라난 관계에 있었던 사람임을 말합니다.
2. 성령의 지시
이같은 안디옥 교회에 성령의 지시가 내렸습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 금식한 기도의 응답이 성령의 지시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응답이 반드시 따른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응답이 성령의 지시로 내려졌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같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성삼위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1) 성부 하나님은 그의 섭리와 경륜으로 구원 받을 자들을 택정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2) 성자 하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자신을 낮추시어 세상에 오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십
자가에 죄인을 위한 대속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3) 성령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셔서 죄인을 부르시고 진리로 이끄시며 거듭나게 하시고
구원의 사역을 이루도록 일꾼을 부르시고 복음을 전파하게 하십니다. 이런 일은 성부 하나님 안에서 성삼위께서 함께
하셨고 성자 하나님 안에서 성삼위께서 함께 하셨으며 성령 하나님 안에서 성삼위께서 함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에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삼위 일체로 완전하게 그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는 이 두 사람을 위해 계속하여 금식하며 기도하고 안수한 후, 그 사명을 위해 파송했습니다. 그들은 사명을 받은 후,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임지로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금식하며 계속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결론 : 우리 한국에도 이 안디옥 교회처럼 선교적인 사명을 받은 교회가 많이 생겨서 복음이 전달되지 아니한 세계 오지
에 유능한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선교적 사명을 이루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안디오 교회와 같은 기도
가 따라야 할 것입니다.
(46) 거짓 선지자에게 나타난 바울의 권능
(사도행전 13 : 4 - 12 )
특별한 성교적 사명을 띠고 안디옥 교회를 떠나 살라미에 이른 바나바와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했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지시와 철저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의 복음 활동입니다. 주의 복음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성령의 지시와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 바울을 대적한 거짓 선지자
바나바와 바울은 그 곳 섬 가운데로 지나면서 바보란 곳에 이르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그 지역 총독으로 있는 서기오 바울을 만나 주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서기오 총독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바나바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는 그들을 불러 더 자세한 진리를 알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므로 서기오 총독이 하나님을 알려고 복음에 귀를 기우린 일은 지혜로운 일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런데 서기오 총독으로 복음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의 역사가 따랐습니다.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가 이 서기오 총독과 함께 있으면서 바나바와 바울을 대적하면서 훼방했습니다. '바예수'란 이름은 예수의 아들이란 뜻으로 이 자는 유대인의 거짓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란 이름이 붙어 있지만 예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로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란 이름은 '여호수아'의 음역으로 여호수아란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으로 이런 이름은 유대이들 중에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거짓 선지자의 정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짓 선지자란 하나님이 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하나님의 이름이나 다른 신의 이름으로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18:20).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성경에 없는 말을 전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양 다른 사람으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
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바를 말하기 때문에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전할지 모르지만 거짓 선지자들이 바로 이같은 수법
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더욱 기막힌 일은 그들은 자신들을 거짓 선지자로 인정을 하지 않을뿐더러 정말로 하나님의 선
지자인 줄 알고 있다는 사살입니다. 이스라엘의 아합왕은 많은 선지자들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말하는 영들의 지배를 받은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미가야란 하나님의 종이 왕에게 전쟁터에
나가지 말 것을 겨종했지만 왕은 미가야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예언해 주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
고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전쟁터에 나갔다가 참패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2) 초혼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
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18:10-12). 죽은 자의 혼을 불러 내는 자가 초혼자입니다. 길흉을 말하는 자란 인생사에 있어서 길한 일니나 흉한 일에
대해 예언해 주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복음은 예언이란 이름 아래 길흉을 점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과 그의 부활하심을 전하여 사람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일입니다.
2. 예수에게 나타난 바울의 권능
바나바와 바울을 대적한 이 바예수라고 하는 엘루마 박수에게 드디어 바울로부터 저주가 내려졌습니다. 바울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이 하나님의 대적자를 향하여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즉시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같은 권능을 행했을 때의 모습을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같은 권능을 행할 수 있도록 그 때 성령으로 충만함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일은 사울의 이름이 바울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9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에게는 원래가 두 개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란 이름은 그가 유대인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으로 이 이름을 사용하였고 바울이란 이름은 라틴어로 '작다'란 뜻으로 그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면서 부쳐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울이란 이름은 유대인 사회에서 기독교의 핍박자로 잘 알려졌던 이름이요 그가 본격적인 복음 사역에 나서면서 이 이름을 버리고 바울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론 :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바예수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들을 구별해
하며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잘 분별하여 미혹을 받지 말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자신
의 모습을 숨기고 양의 옷을 입고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들의 정체에 대하여 경계하시면서 우리에게 경종
해 주셨습니다.
(47) 다윗의 씨가 되신 예수
(사도행전 13 : 13 - 23)
바울의 복음을 위한 행보가 빨라졌습니다. 성령의 지시에 의해 일행과 함께 살라미에 이른 바울은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다시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세게를 그의 선교지로 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버가에서 마가라고 하는 요한이 일행에서 떨어지는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설명이 없지만 어린 요한에게는 힘겨운 전도 여행이어서 집 생각이 나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일이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여행을 위해 동행자를 결정할 때 크게 디툼을 갖게 한 한 원인이 되어 아시아 지역 선교에 중대한 영향을 가져온 것입니다.. (행15:36-41).
1. 바울의 설교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식일을 맞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에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회당의 예배 순서에 따라 화당장의 권고에 의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란 말로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일에 대한 뜻을 풀이해 나갔습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이같은 설교에서 전하고저 한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스라엘로부터 메시야를 태어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을 약속하실 때에 '네 씨'라고 하신 것을 바로 그로부터 태어나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갈3:16).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메시야를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특별히 선택 받은 백성이란 사실입니다. 결국 그들은 메시야를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었지만 그들 자신은 메시야를 믿지 아니하므로 버림을 당하기에 이른 것입니다(롬11:19-20).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을지라도 불신 가운데 처하면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어 드리고 자신은 버림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이루어나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9:27).
2.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게 하심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일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땅을 주지 아니하시고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도록 하신 것은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일로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용하지 않았다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국가이건 한 개인이건 그를 심판하시
는 일에 오래 참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버려야지 그 죄를 자꾸 쌓으면 회개의 시기를
잃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 주시려는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권능이 오랜 옛
날의 일이었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권능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위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없었던들 이런 하나님의 권능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
(3)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교회 생활의 그림자로 보여 주셨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할 것
을 교훈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까지 광야에서 패역한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들의 그 패역함을 참으시고 가나안에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서 선지자 사무엘까지 사사를 주셨
으며 그 후에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게 되어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40여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
고 그 다윗의 씨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태어나게 하셨는데 그 메기야가 예수 그리스
도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서 다윗을 만났을 때에 증거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 다윗은 진실한 사람이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사람을 그의 일꾼
으로 쓰십니다.
(2) 다윗은 맡은 일에 충성된 사람이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비의 집에서 양을 지킬
때에 나타낸 용맹과 충성심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는 적격한 인물이었습니다.
(3) 다윗은 회개의 사람이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기뻐하
십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후 그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린 회개를 볼 때 눈물로 밤새도록 침상을 적셨다
고 했습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 뜻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을 말합니다. 이 언약을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것입니다.
(48)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관
(사도행전 13 : 24 - 35)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 필요한 증거는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란 사실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유대인이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으며 그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고 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이심을 성경적으로 증거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같은 일의 증거로 선지자들과 다윗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므로 누구도 변박할 수 없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당하신 고난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선지자들과 다윗이 예언한 메시야의 예언과 결부시키는 논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1. 세례 요한이 증거한 메시야
예수의 메시야된 증거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세례 요한이 선지자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혹 세례 요한이 메시야가 아닌가? 기대 했을 때, 그는 분명히 밝히기를 '나는 메시야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고 말하고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증거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께서 메시야되심을 알게 된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 요한이 세례를 줄 때 누구든지 성령이 내려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 이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연설을 열심히 듣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제 더 적극적인 논법으로 예수가 고난을 당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성경을 응하게 함으로 예수가 메시야이심이 증거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 유대인의 관원들은 예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증거하신 예수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시므로 그의 말씀과 그의 증거는 모두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 드리지 아
니했습니다. 예수님은 요8:45절에서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하시면서 진리를 거역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보고 알 수 있었던 일은 그가 목수의 요셉의 아들이란 점과 그의 형제들이
자기들 중에 그들과 함께 있다고 하는 사실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많은 표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신 예수에 대하여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증거한 증거
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고 하시면서 '아버지 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
나 유대인들은 이같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신 증거에 대하여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모함했던 것입니다.
(2) 그들은 또한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선지자의 말이란 그 아들에 관한 증거를 의미합니다. 유대인
들은 그 마음이 완악한 연고로 선지자들이 전한 아들에 관한 예언을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던
것은 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따르는데 대한 시기에서 왔습니다.
2. 그의 부활로 드러난 메시야의 증거
바울은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죽으심과 죽음을 이기신 부활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1)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은 성경에 응하신 일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이사야의 증거가 예수로 인하여 그대로 이루어 짐으로 이 예수야말로 선지
자들이 증거한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2) 예수의 다시 살아나심도 성경에 응하신 일입니다. 바울은 시편 2편에 기록된 말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뜻하는 것임을 바울은 영감으로 밝혔습니다. 그리스
도의 다시 살아나신 일은 수많은 증인들과 목격자들이 있습니다.
(3)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다윗이 영감으로 받은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2:7절에 있는 말씀대로 육신으로
죽으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내신 일에 대하여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신 말씀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윗이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고 영감으로 예언한 말씀을 찾을 수 있는 것입
니다. 다윗이 말한 이 예언의 대상은 다윗을 말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한 것은 다윗은 그 후 죽어서 썩음을 당했기 때
문입니다.
결론 : 우리는 성경을 배우면 배울수록 그 성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예수
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자기들의 메시야를 성경대로 죽이는 완악함으로 버림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겸손히 주님께 순종하고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49) 이 사람을 힘 입어
(사도행전 13 : 36 - 41)
이제 바울의 전도 설교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언제나 설교는 복음으로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으로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의와 죄사함의 은혜가 이 예수로 말미암아 그를 힘입어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만약 사람이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복음을 멸시한다면 여러 선지자들로 경종하신 그 놀랄만한 예언이 그들에게 이를 것이라고 경종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1. 이 사람을 힘입어
바울은 예수가 선지자들이 예언한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신 사실을 그의 죽으심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을 통해서 명쾌하게 나타냈습니다.
(1) 바울은 예수를 '이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이 사람이란 이스라엘을
위해 세우신 다윗의 씨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고 했습니다.
(2) 이 사람이란 바로 세례 요한이 증거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
되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의 신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
리라'고 말한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3) 이 사람이란 선지자로 증거한 메시야이심을 증거한 말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고 말한 그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4) 바울은 이스라엘의 관원들이 빌라도에게 호소하여 십자가에서 죽인 예수, 이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이 기다린 메시
야라고 증거했습니다.
(5) 이 사람이란 다윗이 예언하여 증거한 대로 썩음을 당하지 않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말하고 있음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만이 이스라엘의 확실한 메시야이시며,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이 사람만이 하나님이 보
내신 메시야 되심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증거한 것입니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행4:12).
(6) 바울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사람 예수를 힘입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두 가지 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
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는 율법으로도 양심으로도 사함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람 예수를 힘입
어 이같은 죄의 사유함을 받는다고 증거했습니다.
다음에 바울은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하심을 얻는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롭다란 말은 하나님 앞에 온
전히 설 수 있는 의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소유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그를 믿는 자
에게 은혜로 주시기 때문에 이 사람 예수로 말미암아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2. 멸시하는 자들이 받을 화
바울은 전도설교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무서운 경종을 들려 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선지자의 글은 하박국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경종했던 예언입니다(합1:5).
(1)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은 놀라고 망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말씀을 증거하는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을 듣는 무리 가운
데서 얼마간의 유대인들로부터 멸시하는 듯한 거부 반응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한 엄중한 경종을 내린
것입니다. 멸시한다는 말은 업신여긴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전한 구원의 도리를 업신여기는 자는 구제의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놀라고 망하라고 저주한 것입니다.
놀란다는 말은 다우마조( )로 이상이 여긴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듣고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을 이상
히 여기는 자는 망하는 것입니다. 망한다는 말의 압하니조( )는 없어지다 멸망한다는 의미로 영원한 멸망을 가리킵니
다. 사도 요한은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2)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이룰지라도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이라고 경종했습니
다. 믿음으로 의를 얻고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일을 업수이 여겨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하실 것은 다른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계속 들려주고 경종할지라도 도무지 믿
지 못하게 하심으로 결국은 이상하게 여기다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종한 것입니다.
결론 : 복음은 믿는 자에게 죄 사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놀라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 사람' 예
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이 주어집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
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복음을 거역함으로 망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50) 은혜 가운데 있으라
(사도행전 13 : 42 - 43)
바울의 안디옥 회당에서의 전도 설교는 듣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샀습니다. 이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은 더 자세한 말씀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고 청한 것입니다. 경건이란 말은 세보( )란 헬라어로 그 기본 동사는 예배한다, 공경한다는 뜻입니다. 경건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잘 예배하는 사람,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서 나온 말입니다.
1. 하나님의 은혜
바울은 자기를 따른 경건한 사람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있으란 말은 헬라어도 머무르다, 체재하다, 묵다의 뜻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 복음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복음과 은혜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 곧 카리스( )란 말은 원래
가 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값없이 베푸는 호의로써 이 말의 뜻이 하나님이 죄인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종교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
게 값없이 죄사함과 의로우심을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고서는 은혜란 말은 전혀 무의미한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그 은혜
를 크게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의를 주실 뿐 아니라 그 자녀로 삼으시고 그 아들과 함께 기
업의 후사가 되게 하시려고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이같은 축복을 주신 것
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일을
말합니다.
(2)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신 구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는 일은 온전히 주 예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줄을 믿노라'고 말씀했습니다(행15:11). 여기서 은
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3) 하나님의 선택도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복된 그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복된 선택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은혜로 우
리에게 주셨다면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도 은혜로 산택하셨다고 하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11:5).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만 나타나며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찬송히라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
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엡1:3-5).
2. 은혜 가운데 있으라
바울이 그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한 말씀은 은혜안에 영주하라는 뜻으로 은혜에 붙어서 떠나지 말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떠나면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멸망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는 그 아무것도 침범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1) 예수 안에 거하는 생활은 은혜에 붙어 있는 생활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 말
라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은혜의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이 은혜 안에서의 생활인 것입니다.
(2) 예수 안에 붙어 있는 생활은 열매를 맺는 생활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머무르고 있는 사실을 무엇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가지로밖에 증거 될 수 없으며 그 증거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열매인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
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요15:5).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위
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
리신다'고 경종하셨습니다.
결론 :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있는 자리가 과연 어디인가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
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숩니다(고후13:5).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
은혜의 자리에서 떠나 세상 사람들이 서있는 세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서 떠나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51)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사도행전 13 : 44 - 48)
우리는 복음을 전하지만 때로는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한 복음의 열매가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이 그 복음을 받아 드려 영생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 유대인들의 시기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의 전도 설교는 대단한 반응을 보여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회당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큰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드디어 바울 일행을 핍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이 시기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1) 이방인들이 회당을 찾아온 목적이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였기 때문입
니다.
(2) 유대인들인 자신들의 성스러운 회당이 반 율법적인 교훈의 장소로 제공된 일에 대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이 자기들의 회당을 예수를 전하는 전도의 장소로 활용하는 일에 대하여 대단한 분격을 가졌을 것입니다. 율법
을 가르치는 회당에서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예수의 이름을 힙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설
교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이 자신들에게 유익이 안되고 오히려 큰 손상을 준다
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들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습니다.
2. 영생을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는 유대인들
바울과 유대인들간의 갑론을박으로 이제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 안은 난장 판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그들과의 변론이 무익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결론적으로 담대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유대인들은 바울이 말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전함을 받을 사람들이었지만 스스로 그것을 거역한 것입니다.
(1)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전함 받을 사람들이란 사실은 구원이 유대인들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요4:22). 예수님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마땅히 이 구원의 기쁜 소식
을 먼저 듣고 복음을 받아드려 복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같은 특권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
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롬3:1-2).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
인들에게만 주셨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맡아 오늘날까지 간수해 왔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민족입니다. 그러
면서도 그 말씀의 생명이 되는 그리스도를 거역한 것입니다.
(3) 메시야에 대한 약속은 원래가 유대인들에게 주신 언약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언약을 스스로 거역하고 그들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매다는 죄까지 범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 특권을 버리고 그
들 스스로가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했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에게로 향
하여 이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했을 때 이 말을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예정을 결정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있는데 이처럼 하나님이 작정하신 그 사람들은 다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영생이란 말은 보에 아이오니오스( )로 장차 올 시대의 생명을 뜻합니다. 이 생명은
부활의 생명으로 영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자에게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주시는 것
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한 몸은 아니지만 그 부활의 생명만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
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
다. 영생의 대상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하여 예정된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예정을 입었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반드시 복음을 통해서 부르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양
을 찾으시는 목자의 음성으로 복음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예정된 자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 자신도 자신의 택하심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
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분은 주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아무에게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자들을 반드시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의 시기와 장소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바울
은 그 지경에서 쫓겨났지만 그들이 전한 복음은 이미 그 온전히 전해져서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52) 복음과 핍박
(사도행전 13 : 49 - 52)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로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과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사도들이나 성도들 그리고 모든 시대의 성도들은 왜 핍박을 받으며 복음을 전한 것입니까?. 왜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핍박이 따르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1. 복음을 전하는 일에 고난이 따랐던 이유
고난 가운에서 한평생 복음을 전해 온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라고 불리우리만치 많은 고난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고난의 상급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도 복음을 위해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을 의미합니다.'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도 복음을 위한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처음 전파되는 곳엔 핍박이 아울러 따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 볼 때 어느 시대나 어느 국가에서나 동일했습니다. 이런 고난이나 핍박은 복음이 처음 우리들 가정에 들어올 때도 어둠의 권세를 통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10:34-36절 말씀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하셨습니다.
(1) 이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사탄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은 사탄의 권세인 사망 권세를
내쫓는 일을 하기 때문에 사탄은 복음에 호의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핍박과 고난이 따르는 일은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반드시 있어야 할 일입
니다. 교회에 핍박이 내려야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자들을 통하여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게 하십
니다. 그러므로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잠16:4).
2. 핍박을 당한 바울의 태도
바나바와 바울 일행은 이런 핍박을 당한 중에 어떤 태도를 가졌습니까? 이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살펴보고 우리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그들에게 기쁨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로 그들에게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하는 일에서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주를 위해 받는 핍박을 기뻐했던 것입니다(행5:41).
능욕을 받아 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일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핍박이 얼마나 귀한 영광이 따르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주님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은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이 그렇게도 감사했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일에 대해서 벧전4:13-14절에서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성령에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성도들의 성령 충만은 핍박 중에 온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과 상급을 바라보고 핍박을 이겨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면서 발의 먼지를 떨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않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많은 죄가 있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까닭없이 핍박하는 자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리킨 주신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하늘의 메시지입니다. 이 복음은 죽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핍박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범죄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도 매우 큰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집에 영접하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도 시대나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던 그런 핍박이나
고난의 시대는 아닙니다. 만약 이처럼 복음을 저하기에 좋은 시대에 우리의 입을 막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면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들입니까? 믿음의 선조를 따라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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