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바울의 자비량
(사도행전 18 : 1 - 4)
전도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아굴라라고 하는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아굴라는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주의 복음 사역에 동역자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만나 큰 힘을 얻게 되었으며 복음 사역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진실한 전도인에게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좋은 동역자를 만나게 해 주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잘 만났을 때 그 사람의 길은 형통하고 일이 잘 진행되는 것입니다.
1. 아굴라 부부의 등장
아굴라는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난 후, 바울과 함께 복음 사역에 크게 기여하여 그의 이름이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해 주는 아굴라의 인적 사항은 그가 아시아 본도 지방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라고 밝혀진 사실과 그가 로마에서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떠나라는 명령에 의해 고린도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로마 황제가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추방령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지만 이방인들이 로마에 많이 몰려드는 현상을 막기 위한 정책상 조처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났을 때, 그가 과연 복음을 받아 드린 그리스도이었는지에 관해서는 문헌에 남겨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굴라 부부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없이 다만 그들의 직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들은 로마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굴라가 바울을 도와 복음 사역에 얼마나 협력했는지에 대해서는 로마서에서 바울의 안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문안을 부탁하라는 말과 함께 그 문안의 대상자로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언급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롬16:3-4).
2. 바울의 자비량
전도 바울과 아굴라 부부와의 만남이 누구의 소개로 인한 것이냐? 아니면 같은 직업 때문에 만나게 되었느냐에 대해서는 해답을 찾기 힘들지만 바울이 아굴라를 찾아 갔을 때 그들의 업이 서로 같았으므로 함께 거하며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직업에 대해서는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 점으로 천막을 제조하여 팔아 온 것으로 짐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바울은 당대에 박식한 학자요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인데 그가 어떻게 천막 제조업을 하면서 살았을까 하는 의문인 것입니다.
이 설명은 그 당시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들이나 율법학자들의 경건한 생활상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 유대인의 랍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대하여 그에 대한 보수를 받는 일은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간주되어 그들이 가진 직분을 영광스러운 명예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 간에는 이같은 명예스러운 직분외 그들의 생계를 이어 나가기 위한 한 가지씩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그들에게 자랑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은 마땅히 그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딤전5:17-18; 마10:9-10; 고전9:4-14).
(1) 그렇지만 바울은 마땅한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더 좋은 상급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들에게 복음을 전
하는 일꾼들에게 마땅히 그 삯을 받을 권이 있다는 사실을 이처럼 주장했으나 자신에 대해서는 스스로 이런 권리를 포
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늘의 보다 큰 영광을 바라보고 이런
상급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자비량하는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2) 바울은 한편 빚진 자의 자세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롬1:14). 생명의 빚을 갚고자 하는 그의 간절한 마음의 자세는 누구나 본 받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빚을 갚는 사람이 그 삯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그 어떤 것이라도 포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
장 고상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나 모든 유익한 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
백하고 있는 것입니다(빌3:7-9). 바울의 이같은 신앙적인 자세는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주님의 복음을 전할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실로 위대한 사역을 이루면서도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같은 일은 부득불한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했습니다. 부득불 했다는 말은 억지로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아니할 수 없었다고 하는 절실한 소명감에서 나온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바울과 같
은 이같은 정심을 본 받아 복음 사역의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71) 두려워 말며 잠잠하지 말라
(사도행전 18 : 5 - 10)
바울이 당도한 고린도는 퇴폐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런데다 그 곳 유대인들은 유달리 바울에 대해 분노와 핍박이 심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극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바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바울은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고 떠났기 때문에 그 교회들의 소식을 알고 싶어서 바울은 믿을만한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를 여러 곳에 보냈었습니다. 이제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온 이들은 바울에게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어려운 시련 가운데서도 그들의 믿음을 견고히 하고 있다는 디모데의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새 힘을 얻어 유대인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1. 말씀에 붙잡힌 바울
바울이 핍박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했다'고 했습니다.
(1) 바울의 마음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였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확실
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려진 말씀에는 이같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마음에는 말씀
이 살아 있을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 주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올라가 말할 수 없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생애 전
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은 사람이요 그 안에 파묻힌 사람입니다. 이런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갔다면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바울은 빚진 자의 책임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된 사명의 출발점은 빚진 자의 책임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바울과 같은 빚진 자의 자세만 서 있다면 빚을 갚아야 하겠다는 사명감과 두려움에 하나님
의 말씀에 붙잡히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바라본 것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바라본 것은 하늘의 상급이었습니다. 바울이 천막을 만들
어 팔아가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보다 좋은 상급에 대한 야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하늘
의 상을 얻으려고 달음직한 자세에 대하여 이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
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고전9:24). 하늘의 상급
을 얻는 일에는 양보가 없어야 합니다. 이런 일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욕심을 가지라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인 것
입니다.
2. 두려워말고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 곳 유대인들의 심한 대적과 훼방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이같은 핍박에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기를 포기하고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 유대인의 회당장과 그 곳 고린도인들이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1) 밤에 환상 중에 하나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환상이란 말은 호라마( )로 이 말의 뜻은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인가 보이는 양상입니다. 밤에 주님이 바울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보이셨는지에 대
해서는 아무런 언질이 없습니다. 이 때 주님이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사면에서 당하는 핍박과 좌절
하기 쉬운 그런 상태에서 바울에게 새 힘과 자신감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2)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두려움은 금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두려움이 없을 수 없습
니다. 베드로는 그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주님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몸이나 죽일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엄습해 오는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도 한때 생명의 위협 앞에서 두려워 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의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시어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시고 식물을 주며 힘을 주셨습니다(왕상19:1-8).
(3) 다음에 잠잠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해서 늘 근신하라고 하십니다. 혀에 자
갈을 물려 잠잠하라고 명하십니다. 지혜로운 자는 말을 적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잠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울에게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얼마나 우리의 입을
열었습니까? 왜 우리의 입은 세상 말은 잘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벙어리처럼 잠잠한 것입니까? 우리의 입을
크게 열어 때를 얻던지 얻지 못하던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 이같은 말씀을 들려 주신 것으로 인하여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린도 성
안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고 하신 말씀에 그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그는 더욱 힘을 얻어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72)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바울
(사도행전 18 : 11)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그의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복음 전파는 전도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로 복음을 받아 드린 사람들에게는 양육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 양육은 계속적이어야 합니다. 지상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이 계속적인 양육을 위해 서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런 양육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뿌려진 복음의 결실을 위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에 가르치는 직분을 주셔서 이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1. 구원의 세 가지 뜻
성경에는 구원에 관하여 세 가지 의미를 나타내는 말씀이 있습니다.
(1) 그 하나는 너희는 '구원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엡2:8).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에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사람에게는 구원이 이미 과거의 기정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
원을 얻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일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
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5:24).이처럼 구원을 얻은 사람의 구원은 누
구이거나 뺴앗을 수 없습니다. 그 구원을 회수하거나 유보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이미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2) 다음에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
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빌2:12). 이루라고 한 말씀은 노력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
로 애써서 완성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이 구원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구원입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약속
은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 그 날까지 우리가 얻은 구원이 나타나기를 사모하면서 인
내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은 얻었지만 그 구원이 현실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그 날
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구원이 온전히 이 루어질 때까지 그 구원을 계속적으로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안일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실현될 그 날까지 두
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
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3) 그리고 '천국에 이르도록 구원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
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딤후4:18).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완성됩니
다.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애써 구원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빌1:6).
2. 자라나는 믿음
그리스도인의 성화도 세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그의 완전한 의를 입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다른 어떤 의를 얻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의 생활에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열매가 없이는 신앙의 성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장이 없으면 그 신앙은 퇴보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성화는 성화의 완성입니다. 이 완성은 우리가 육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몸이 육신에서 벗어나 영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의 몸이 주님과 같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함을 받을 때 완성된 성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자라나야 합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라'고 말씀해 주심으로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완숙한 단계에까지 이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엡4:15). 그리고 믿음의 성장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고 병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기 때문에 늘 그 말씀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의 책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확실한 증거로서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의 터전 위에 서는 일은 승리적인 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결론 : 바울은 그가 개척한 각 교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냈으며 후에도 그들이 바른 신앙으로 성
장하고 있는가에 대해 점검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생산하며 우리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
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교육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73) 하나님의 뜻을 따른 바울
(사도행전 18 : 12 - 23)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세운 교회를 관리하는 일에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한가지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로 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고 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각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을 굳게 하는 일로 했습니다. 23절에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는 일에 힘쓴 바울의 노력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갈리오의 재판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바울은 고린도에서 오랜 기간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왔습니다. 이는 바울의 환상 중에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시어 '두려워 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말씀에 큰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갈리오의 재판자리로 끌어 갔다고 했습니다.
이제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시기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방법을 통해서 바울로 그 곳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어떤 때는 친히 말씀으로, 어떤 때는 환상으로 또 어떤 경우에는 주위 환경의 변화로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로 핍박을 받게 하신 일은 아름다운 의미가 주어져 있습니다.
(1) 하나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로 하늘의 놀라운 상급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
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했습니다(골1:14).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일은 우리의 주님의 무한하신 은혜에서 나온 축복입니다(빌1:29). 주님은 당신을 위해 고난을 받는 성도들이 받을 상
급에 대해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마5:11-12).
(2) 다음에 이같은 핍박이나 고난은 바울로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로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위
대하고 성숙한 전도인이 될 수 있었던 일은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고난에서 온 것입니다.
(3) 그리고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핍박이 따른 것은 바울로 겸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하시려는데 있었습
니다. 바울이 몸에 찌르는 가시로 비유된 고통의 질병으로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을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
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같은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
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리오 총독 앞에 선 일은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갈리오는 아가야 지역의 로마
총독으로 부임되어 온 자인데 아가야 지역은 그 당시 로마 황제에 의해 다스려 지는 식민지 행정 구역으로 고린도 지
역도 이곳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재판에 넘겨진 것입니다.
2. 바울의 서원
바울은 고린도에 여러 날 더 유하다가 수리아를 떠나 겐그리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어떤 서원 때문에 머리를 깎은 일이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했다고 하는 서원이란 말은 유케( )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또는 '맹세'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일찍 가지고 있었던 서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된바 없지만 서원이란 '하나님께 헌신하며 봉사하고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바치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의 종교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서원은 바울이 복음의 빚진 자로서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을 온전히 이루고저 하는 나머지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기대하는 자신의 서원을 표시함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같은 서원은 한번만 있었던 일이요 또 지속적으로 계속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어떤 서원을 위해 바울처럼 머리를 깎는 일이 잘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머리를 깎은 곳은 겐그리아인데 이곳은 고린도 항구입니다. 바울은 이곳을 다시 떠나 에베소로 왔습니다. 에베소에 온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과 변론하는 사역을 했지만 그는 그 곳에 오래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하나님이 그에게 어려움을 주신 일을 통하여 자신이 떠나야 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정든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다시 돌아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
이 복음을 전한 모든 곳을 두루 다니면서 모든 제자들을 굳게 했다고 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게 하고 은혜
의 자리에 굳게 서게 한 것입니다. 목회자는 언제나 자기 양무리들에 대하여 믿음에 굳게 서 있도록 해야 합
니다. 의심으로부터 믿음을 굳게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시험으로부터 믿음에 굳게 서도록 해야 합니다.
(74) 아볼로의 부족
(사도행전 18 : 24 - 28)
아볼로란 사람은 복음의 사역자로 뒤늦게 등장한 인물이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귀히 쓰임 받은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아볼로는 늦게야 바울이나 사도들에게 발굴되어 복음의 일꾼이 된 사람입니다. 그가 올바른 지도를 받은 후 복음을 위하여 능력 있게 일하는 활약상을 여러 곳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특히 고린도 교회에서 그 곳 교회들을 돌 보았으므로 고린도 교인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1. 아볼로의 등장
아볼로의 등장은 교회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그의 박식과 능변과 덕망과 열정은 가히 복음의 이론가로써 타인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1) 아볼로는 학문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학문이라고 하는 로기오스( )란 말은 박식한, 학식이 있는 이란 뜻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철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 말을 혹은 언변의 사람으로도 해석합니다. 아볼로가 태어난 알렉산드
리아는 주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립된 도시로 이 도시에는 전 인구의 삼분의 일이 유대인들로 알려지고 있
습니다.
이곳은 이방 학문과 유대 학문이 교차되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써 아볼로는 이 고장에서 교육받은 유명한 철학자였
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지식이나 학문을 오예물처럼 여겼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
식에 견주어 그렇게 한 것이지 그의 학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혀 무가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그 많은 학
문이나 지식은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있어서 놀라운 힘이 된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볼로의 능변과 유대
인들과의 그의 변론은 이같은 그의 많은 학문이 그 기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아볼로는 성경에 능한 자라고 했습니다. 아볼로는 유대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
래서 성경적인 지식이 많았습니다. 그에다 그의 탐구심과 하나님이 그를 들어 쓰시기 위해 베푸신 은혜로 인하여 그의
성경적 지식은 탁월하여 성경에 능한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에 능하다는 말은 성경을 바로 배운 것과 그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올바로 인식했다는 말입니다. 아볼로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 모든 것
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3) 다음에 아볼로는 일찍 주의 도를 베웠다고 했습니다. 아볼로가 주의 도를 어디서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하는 말씀에서 아볼로는 일찍 세례 요한의 제자로 요한으로
부터 메시야에 대한 가르침을 배웠을 것입니다. 주의 도란 '예수는 성경에서 악속된 그리스도'라고 증거되는 진리를
말합니다. 아볼로의 이같은 주의 도는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입니다.
요한은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준바 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4) 아볼로는 예수의 열심 있는 증거자였습니다.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열
심이란 말은 제오( )로 끓이다, 삶다, 뜨겁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의 증거자는 그 마음이 뜨거워야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했습니다(롬12:11). 아볼로의 이같은 열심은 그가 그 이후
얼마나 복음의 큰 일꾼으로 쓰임 받았는지에 대한 바른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볼로의 부족했던 점
아볼로는 어느모로 보나 나무랄 것이 없는 전도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아볼로의 부족한 것을 발견한 사람은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였습니다. 아볼로가 유대인의 회당에서 예수에 관한 증거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 그 증거를 아굴라 부부가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 아볼로를 데려다가 주의 도에 관한 자세한 말씀을 줌으로 아볼로로 하여금 훌륭한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게 했습니다.
아보로에게 부족했던 것은 아볼라가 그리스도의 세례를 몰랐었다는 점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다만 메시야를 맞이하기 위한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령과 불의 세례 곧 성령 세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예수님이 보내실 성령 세례의 선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은 요한의 세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볼라는 또한 구원의 참 도리에 대하여 확신 있는 전도를 못했습니다. 아볼로는 다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증거에만 전념했습니다. 예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서 오는 구원의 은혜를 몰랐습니다.
결론 : 아굴라 부부가 그의 설교를 통해서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이같은 십자가의 도리와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자세히 풀어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그 후 그의 설교에는 구원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났습니다.
그의 복음에는 생명력이 넘쳐 흘렀습니다.
(사도행전 18 : 1 - 4)
전도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아굴라라고 하는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아굴라는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주의 복음 사역에 동역자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만나 큰 힘을 얻게 되었으며 복음 사역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진실한 전도인에게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좋은 동역자를 만나게 해 주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잘 만났을 때 그 사람의 길은 형통하고 일이 잘 진행되는 것입니다.
1. 아굴라 부부의 등장
아굴라는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난 후, 바울과 함께 복음 사역에 크게 기여하여 그의 이름이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해 주는 아굴라의 인적 사항은 그가 아시아 본도 지방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라고 밝혀진 사실과 그가 로마에서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떠나라는 명령에 의해 고린도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로마 황제가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추방령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지만 이방인들이 로마에 많이 몰려드는 현상을 막기 위한 정책상 조처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났을 때, 그가 과연 복음을 받아 드린 그리스도이었는지에 관해서는 문헌에 남겨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굴라 부부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없이 다만 그들의 직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들은 로마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굴라가 바울을 도와 복음 사역에 얼마나 협력했는지에 대해서는 로마서에서 바울의 안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문안을 부탁하라는 말과 함께 그 문안의 대상자로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언급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롬16:3-4).
2. 바울의 자비량
전도 바울과 아굴라 부부와의 만남이 누구의 소개로 인한 것이냐? 아니면 같은 직업 때문에 만나게 되었느냐에 대해서는 해답을 찾기 힘들지만 바울이 아굴라를 찾아 갔을 때 그들의 업이 서로 같았으므로 함께 거하며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직업에 대해서는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 점으로 천막을 제조하여 팔아 온 것으로 짐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바울은 당대에 박식한 학자요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인데 그가 어떻게 천막 제조업을 하면서 살았을까 하는 의문인 것입니다.
이 설명은 그 당시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들이나 율법학자들의 경건한 생활상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 유대인의 랍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대하여 그에 대한 보수를 받는 일은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간주되어 그들이 가진 직분을 영광스러운 명예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 간에는 이같은 명예스러운 직분외 그들의 생계를 이어 나가기 위한 한 가지씩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그들에게 자랑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은 마땅히 그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딤전5:17-18; 마10:9-10; 고전9:4-14).
(1) 그렇지만 바울은 마땅한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더 좋은 상급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들에게 복음을 전
하는 일꾼들에게 마땅히 그 삯을 받을 권이 있다는 사실을 이처럼 주장했으나 자신에 대해서는 스스로 이런 권리를 포
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늘의 보다 큰 영광을 바라보고 이런
상급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자비량하는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2) 바울은 한편 빚진 자의 자세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롬1:14). 생명의 빚을 갚고자 하는 그의 간절한 마음의 자세는 누구나 본 받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빚을 갚는 사람이 그 삯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그 어떤 것이라도 포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
장 고상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나 모든 유익한 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
백하고 있는 것입니다(빌3:7-9). 바울의 이같은 신앙적인 자세는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주님의 복음을 전할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실로 위대한 사역을 이루면서도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같은 일은 부득불한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했습니다. 부득불 했다는 말은 억지로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아니할 수 없었다고 하는 절실한 소명감에서 나온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바울과 같
은 이같은 정심을 본 받아 복음 사역의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71) 두려워 말며 잠잠하지 말라
(사도행전 18 : 5 - 10)
바울이 당도한 고린도는 퇴폐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런데다 그 곳 유대인들은 유달리 바울에 대해 분노와 핍박이 심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극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바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바울은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고 떠났기 때문에 그 교회들의 소식을 알고 싶어서 바울은 믿을만한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를 여러 곳에 보냈었습니다. 이제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온 이들은 바울에게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어려운 시련 가운데서도 그들의 믿음을 견고히 하고 있다는 디모데의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새 힘을 얻어 유대인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1. 말씀에 붙잡힌 바울
바울이 핍박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했다'고 했습니다.
(1) 바울의 마음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였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확실
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려진 말씀에는 이같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마음에는 말씀
이 살아 있을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 주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올라가 말할 수 없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생애 전
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은 사람이요 그 안에 파묻힌 사람입니다. 이런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갔다면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바울은 빚진 자의 책임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된 사명의 출발점은 빚진 자의 책임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바울과 같은 빚진 자의 자세만 서 있다면 빚을 갚아야 하겠다는 사명감과 두려움에 하나님
의 말씀에 붙잡히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바라본 것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바라본 것은 하늘의 상급이었습니다. 바울이 천막을 만들
어 팔아가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보다 좋은 상급에 대한 야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하늘
의 상을 얻으려고 달음직한 자세에 대하여 이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
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고전9:24). 하늘의 상급
을 얻는 일에는 양보가 없어야 합니다. 이런 일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욕심을 가지라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인 것
입니다.
2. 두려워말고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 곳 유대인들의 심한 대적과 훼방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이같은 핍박에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기를 포기하고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 유대인의 회당장과 그 곳 고린도인들이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1) 밤에 환상 중에 하나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환상이란 말은 호라마( )로 이 말의 뜻은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인가 보이는 양상입니다. 밤에 주님이 바울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보이셨는지에 대
해서는 아무런 언질이 없습니다. 이 때 주님이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사면에서 당하는 핍박과 좌절
하기 쉬운 그런 상태에서 바울에게 새 힘과 자신감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2)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두려움은 금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두려움이 없을 수 없습
니다. 베드로는 그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주님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몸이나 죽일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엄습해 오는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도 한때 생명의 위협 앞에서 두려워 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의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시어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시고 식물을 주며 힘을 주셨습니다(왕상19:1-8).
(3) 다음에 잠잠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해서 늘 근신하라고 하십니다. 혀에 자
갈을 물려 잠잠하라고 명하십니다. 지혜로운 자는 말을 적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잠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울에게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얼마나 우리의 입을
열었습니까? 왜 우리의 입은 세상 말은 잘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벙어리처럼 잠잠한 것입니까? 우리의 입을
크게 열어 때를 얻던지 얻지 못하던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 이같은 말씀을 들려 주신 것으로 인하여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린도 성
안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고 하신 말씀에 그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그는 더욱 힘을 얻어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72)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바울
(사도행전 18 : 11)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그의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복음 전파는 전도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로 복음을 받아 드린 사람들에게는 양육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 양육은 계속적이어야 합니다. 지상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이 계속적인 양육을 위해 서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런 양육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뿌려진 복음의 결실을 위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에 가르치는 직분을 주셔서 이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1. 구원의 세 가지 뜻
성경에는 구원에 관하여 세 가지 의미를 나타내는 말씀이 있습니다.
(1) 그 하나는 너희는 '구원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엡2:8).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에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사람에게는 구원이 이미 과거의 기정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
원을 얻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일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
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5:24).이처럼 구원을 얻은 사람의 구원은 누
구이거나 뺴앗을 수 없습니다. 그 구원을 회수하거나 유보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이미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2) 다음에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
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빌2:12). 이루라고 한 말씀은 노력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
로 애써서 완성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이 구원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구원입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약속
은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 그 날까지 우리가 얻은 구원이 나타나기를 사모하면서 인
내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은 얻었지만 그 구원이 현실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그 날
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구원이 온전히 이 루어질 때까지 그 구원을 계속적으로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안일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실현될 그 날까지 두
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
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3) 그리고 '천국에 이르도록 구원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
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딤후4:18).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완성됩니
다.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애써 구원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빌1:6).
2. 자라나는 믿음
그리스도인의 성화도 세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그의 완전한 의를 입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다른 어떤 의를 얻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의 생활에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열매가 없이는 신앙의 성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장이 없으면 그 신앙은 퇴보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성화는 성화의 완성입니다. 이 완성은 우리가 육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몸이 육신에서 벗어나 영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의 몸이 주님과 같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함을 받을 때 완성된 성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자라나야 합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라'고 말씀해 주심으로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완숙한 단계에까지 이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엡4:15). 그리고 믿음의 성장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고 병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기 때문에 늘 그 말씀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의 책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확실한 증거로서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의 터전 위에 서는 일은 승리적인 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결론 : 바울은 그가 개척한 각 교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냈으며 후에도 그들이 바른 신앙으로 성
장하고 있는가에 대해 점검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생산하며 우리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
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교육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73) 하나님의 뜻을 따른 바울
(사도행전 18 : 12 - 23)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세운 교회를 관리하는 일에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한가지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로 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고 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각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을 굳게 하는 일로 했습니다. 23절에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는 일에 힘쓴 바울의 노력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갈리오의 재판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바울은 고린도에서 오랜 기간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왔습니다. 이는 바울의 환상 중에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시어 '두려워 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말씀에 큰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갈리오의 재판자리로 끌어 갔다고 했습니다.
이제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시기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방법을 통해서 바울로 그 곳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어떤 때는 친히 말씀으로, 어떤 때는 환상으로 또 어떤 경우에는 주위 환경의 변화로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로 핍박을 받게 하신 일은 아름다운 의미가 주어져 있습니다.
(1) 하나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로 하늘의 놀라운 상급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
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했습니다(골1:14).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일은 우리의 주님의 무한하신 은혜에서 나온 축복입니다(빌1:29). 주님은 당신을 위해 고난을 받는 성도들이 받을 상
급에 대해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마5:11-12).
(2) 다음에 이같은 핍박이나 고난은 바울로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로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위
대하고 성숙한 전도인이 될 수 있었던 일은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고난에서 온 것입니다.
(3) 그리고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핍박이 따른 것은 바울로 겸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하시려는데 있었습
니다. 바울이 몸에 찌르는 가시로 비유된 고통의 질병으로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을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
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같은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
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리오 총독 앞에 선 일은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갈리오는 아가야 지역의 로마
총독으로 부임되어 온 자인데 아가야 지역은 그 당시 로마 황제에 의해 다스려 지는 식민지 행정 구역으로 고린도 지
역도 이곳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재판에 넘겨진 것입니다.
2. 바울의 서원
바울은 고린도에 여러 날 더 유하다가 수리아를 떠나 겐그리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어떤 서원 때문에 머리를 깎은 일이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했다고 하는 서원이란 말은 유케( )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또는 '맹세'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일찍 가지고 있었던 서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된바 없지만 서원이란 '하나님께 헌신하며 봉사하고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바치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의 종교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서원은 바울이 복음의 빚진 자로서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을 온전히 이루고저 하는 나머지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기대하는 자신의 서원을 표시함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같은 서원은 한번만 있었던 일이요 또 지속적으로 계속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어떤 서원을 위해 바울처럼 머리를 깎는 일이 잘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머리를 깎은 곳은 겐그리아인데 이곳은 고린도 항구입니다. 바울은 이곳을 다시 떠나 에베소로 왔습니다. 에베소에 온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과 변론하는 사역을 했지만 그는 그 곳에 오래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하나님이 그에게 어려움을 주신 일을 통하여 자신이 떠나야 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정든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다시 돌아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
이 복음을 전한 모든 곳을 두루 다니면서 모든 제자들을 굳게 했다고 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게 하고 은혜
의 자리에 굳게 서게 한 것입니다. 목회자는 언제나 자기 양무리들에 대하여 믿음에 굳게 서 있도록 해야 합
니다. 의심으로부터 믿음을 굳게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시험으로부터 믿음에 굳게 서도록 해야 합니다.
(74) 아볼로의 부족
(사도행전 18 : 24 - 28)
아볼로란 사람은 복음의 사역자로 뒤늦게 등장한 인물이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귀히 쓰임 받은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아볼로는 늦게야 바울이나 사도들에게 발굴되어 복음의 일꾼이 된 사람입니다. 그가 올바른 지도를 받은 후 복음을 위하여 능력 있게 일하는 활약상을 여러 곳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특히 고린도 교회에서 그 곳 교회들을 돌 보았으므로 고린도 교인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1. 아볼로의 등장
아볼로의 등장은 교회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그의 박식과 능변과 덕망과 열정은 가히 복음의 이론가로써 타인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1) 아볼로는 학문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학문이라고 하는 로기오스( )란 말은 박식한, 학식이 있는 이란 뜻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철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 말을 혹은 언변의 사람으로도 해석합니다. 아볼로가 태어난 알렉산드
리아는 주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립된 도시로 이 도시에는 전 인구의 삼분의 일이 유대인들로 알려지고 있
습니다.
이곳은 이방 학문과 유대 학문이 교차되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써 아볼로는 이 고장에서 교육받은 유명한 철학자였
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지식이나 학문을 오예물처럼 여겼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
식에 견주어 그렇게 한 것이지 그의 학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혀 무가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그 많은 학
문이나 지식은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있어서 놀라운 힘이 된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볼로의 능변과 유대
인들과의 그의 변론은 이같은 그의 많은 학문이 그 기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아볼로는 성경에 능한 자라고 했습니다. 아볼로는 유대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
래서 성경적인 지식이 많았습니다. 그에다 그의 탐구심과 하나님이 그를 들어 쓰시기 위해 베푸신 은혜로 인하여 그의
성경적 지식은 탁월하여 성경에 능한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에 능하다는 말은 성경을 바로 배운 것과 그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올바로 인식했다는 말입니다. 아볼로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 모든 것
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3) 다음에 아볼로는 일찍 주의 도를 베웠다고 했습니다. 아볼로가 주의 도를 어디서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하는 말씀에서 아볼로는 일찍 세례 요한의 제자로 요한으로
부터 메시야에 대한 가르침을 배웠을 것입니다. 주의 도란 '예수는 성경에서 악속된 그리스도'라고 증거되는 진리를
말합니다. 아볼로의 이같은 주의 도는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입니다.
요한은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준바 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4) 아볼로는 예수의 열심 있는 증거자였습니다.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열
심이란 말은 제오( )로 끓이다, 삶다, 뜨겁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의 증거자는 그 마음이 뜨거워야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했습니다(롬12:11). 아볼로의 이같은 열심은 그가 그 이후
얼마나 복음의 큰 일꾼으로 쓰임 받았는지에 대한 바른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볼로의 부족했던 점
아볼로는 어느모로 보나 나무랄 것이 없는 전도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아볼로의 부족한 것을 발견한 사람은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였습니다. 아볼로가 유대인의 회당에서 예수에 관한 증거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 그 증거를 아굴라 부부가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 아볼로를 데려다가 주의 도에 관한 자세한 말씀을 줌으로 아볼로로 하여금 훌륭한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게 했습니다.
아보로에게 부족했던 것은 아볼라가 그리스도의 세례를 몰랐었다는 점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다만 메시야를 맞이하기 위한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령과 불의 세례 곧 성령 세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예수님이 보내실 성령 세례의 선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은 요한의 세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볼라는 또한 구원의 참 도리에 대하여 확신 있는 전도를 못했습니다. 아볼로는 다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증거에만 전념했습니다. 예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서 오는 구원의 은혜를 몰랐습니다.
결론 : 아굴라 부부가 그의 설교를 통해서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이같은 십자가의 도리와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자세히 풀어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그 후 그의 설교에는 구원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났습니다.
그의 복음에는 생명력이 넘쳐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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