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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 11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2|조회수11,621 목록 댓글 0

사도행전 제 11장
=====11:1
사도들과 형제들이 - 이방인 선교에 대한 초대 교회의 논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면
서 사도들과 형제들이 언급되는 것은 당시 교회 내에서 이방인 선교에 관한 논쟁이 매
우 심각하게 논의되었음을 반증해 준다. 여기서 언급된 `사도들'은 12사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형제들'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기독교인을 뜻하는 누가의 다양한 표현법
중 하나이다. 누가는 이 형제들을 `도를 좇는 사람'(9:2), `주의 성도'(9:13) `성도'
(9:32,41)라고 다양하게 묘사했다.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 `말씀을 받았다'란 말은 로넬료의 성령 체
험 사건(10:44-46)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당시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며칠 머물렀다
는 점에서(10:48)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고넬료에 관한 소문이 예루살렘
까지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본절은 이방인 선교에 관한 정당성을 강조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시작되는 이야기의 발단이 된다.

=====11:2
할례자들이 - 이방인 선교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로서 `할례자'들이 언
급되는데 이는 `할례받은 사람들'(* , 호이
에크 페리토메스)로서 유대인을 가리키는 일반적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할
례자들은 개종한 유대 기독교인을 가리킨다.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무할례에 대하여 상당한 우월 의식을 갖고 있음은 무할례자에 대한 그들의 노골적 편
견에서 잘 입증된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으로서 모두 할례자였
다는 점에서 볼 때 여기서는 막연하게 유대 기독교인을 지칭했다기 보다는 특별히 할
례를 강조하거나 유대적 전통을 자랑하는 자들로서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던 자들
(15:5)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이는 초기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의 우월감
이 잔존하여 공동체 안에서 갈등적 요소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힐난하여 -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방인들과 함께 하였던 베드로의 행
위에 대해, 할례자들은 단순히 문제점을 제기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단죄(斷
罪)하여 비난하는 차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는 `힐난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크
리노'(* )가 단순히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론을 내
리기 위해 집요하게 따지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11:3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 할례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이방
인으로 언급되는 무할례자와의 식사에 관한 것이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머무는 동
안의 행적이 10장에서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베드로가 실제로 이방인들과 식사
를 함께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런데 할례자들의 힐란에 대해 직
접 베드로가 변명하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넬료의 집에 며칠 머물면서 함께
식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할례자들이 무할례자들과 함께 식사한 것만을 이유로
베드로를 힐난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본절 이후 계속된 베드로의 변론 내
용은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타당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구절의 표현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전도한 사실에 대한 것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
다.

=====11:4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 비난하여 문제를 제기해 오는 할례자들을 대하는 베드
로의 자세는 매우 장중(莊重)하고 권위있는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다(Haenchen). 특히
본 구절에서 사용된 `설명하여'라는 단어 `여세티데토'(* )는
`선포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크티데미'(* )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서 어떤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목조목 분명하게 밝혀 선언하고자 하는 베드로
의 의지가 암시되어 있다(A.T.Robertson).

=====11:5
내 앞까지 드리우거늘 - 10:11에서는 `땅에 드리웠더라'로 묘사되어 있다. 두 표현
다 내용물을 베드로가 볼 수 있게 광주리가 드리워진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두 가
지 표현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11:6
들짐승 - `네 발 가진 것'에 대한 더 구체적인 묘사인 것 같다.

=====11:7
내게 이르되 - 10:13에서 이 구절은 생략되었다. 그 이유는 본 구절이 베드로의 직
접적인 진술인 반면 10:13은 누가의 간접적인 묘사이기 때문이다.

=====11:8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 10:14에서는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니다
'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표현상의 차이일 뿐 내용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11:9
하늘로부터 내게 대답하되 - 10:15에서 이 표현은 생략되어 있다. 이는 베드로
자신에게 주어진 응답을 보다 구체적으로 성명해 주며 동시에 그 응답의 근원이 하나
님께 있음을 보여준다.

=====11:11
세 사람이 - 10:19에서 고넬료가 욥 바로 보낸 사람이 두명으로 진술되어 있으므로
본절과 숫자상의 모순이 발생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계수(計數)
할 때 여자나 어린아이, 시종(노예 포함)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두 구절을 종
합해 볼 때 두 사람을 수행하기 위해 시종도 함께 왔음을 알 수 있다(10:7).

=====11:12
이 여섯 형제 - 10:23에 베드로와 동행한 욥바의 형제는 두어 명이었다.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과, 베드로와 동행한 욥바의 두어 형제를 합치면 모두 여섯 명 정도 된
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1절) 자기와 동행했던 사람 모두 데리
고 갔던 것이 분명하다.

=====11:14
그가 너와 온 집의 네게 이르리라 - 10장에서 이 표현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본 구절은 천사에 의해 고넬료에게 주어진 내용을 요약하여 보다 강조한 것으로 짐작
된다. 그리고 10장 가운데서는 생략되었으나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여 고넬료
로부터 들은 보다 자세한 이야기 중에 본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 - 베드로의 증언에 의하면 고넬료의 일가와 친구들에게 성령
이 임재한 때가 베드로 자신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된다. 그러나 10:34-44에 따르면
베드로의 설교가 한참 진행된 뒤거나 아니면 설교가 끝났을 때쯤이라고 언급된다
(10:44 주석 참조). 여기서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한 시점에 차이가 생긴다. 이에
대해서 다음 두 가지의 해결책을 모색해 볼 수 있다. (1) 혹자는 본문의 강조점이, 예
기치 않게 갑자기 나타난 성령 강림 현상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주장한다(Haenchen).
따라서 본문에서는 성령이 임한 시점이 언제인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2)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할 때 이미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해서 설교가 끝날쯤에 오순절에 임했던
것과 같은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고넬료의 집에 있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이는 베드로
의 설교 전체를 성령이 주장하셨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듣는 모든 사람들의 심령도 시
종일관 주장하셨음을 가리킨다.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 10:47에서 베드로가 언급했던 말이 다시 반복되지
만 여기서는 베드로가 `처음'(* , 엔 아르케)이라는 단어를 첨가시키
고 있다. 즉 베드로와 사도들이 오순절(五旬節) 성령 강림을 체험했을 때를 가리키고
있다.

=====11:16
주의 말씀에 세례 받으리라 - 이 말은 10:47,48에서 베드로가 자신있게 이방인에
대한 세례 선언을 하게 된 숨겨진 배경을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가 기억해낸 주의 말
씀은 1:5에 나오는 부활한 예수의 말씀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베드로는 자기 및 다른
형제들과 이방인의 성령 체험을 동일시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성령 체험을 예수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으로 언급함으로써 이방인의 구원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로써 베드로 자신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한 사실도 정당화될 수
있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10:47에서 베드로가 언급한 바 있듯이 성령 세례가 기독교
인 됨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권위있는 보증임을 말해주고 있다.

=====11:17
하나님이 주신 것과 같은 선물 - 베드로는 성령의 임재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
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로 이해하면서 이방인들도 사도된 자신들이 받았던
것과 동등한 선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
분하지 않고 하나됨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가 체포되시기 전 하셨던 기도의 성취
로도 이해된다(요 17:22).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 본문은 10:47에서 언급한 베드로의 말과
비슷한 내용으로서 이방인을 기독교인으로 용납하고 세례를 베풀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서 한 형제됨을 인정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못박고 있다. 그리고 또
한 베드로 자신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만을 따름을 암시한다(5:29). 이러한 베드로의
선교 자세는 바울과 일치한다(갈 1:10).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 이 표현은 베드로에게 비난섞인 공격을 하였던 자
들이 베드로의 설명에 아무런 이의(異意)를 제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베드로
의 설명이 그들에게도 인정받았다는 간접 묘사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 베드로에게 도전해 왔던 할례자들이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
로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 표현은 베드로가 계속하여 강조해 왔듯이 이방인에
대한 성령의 임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행위이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동사 `돝사조'(* )는 일반적으로 `영광을 돌리다'로 번역
되지만 `찬양하다'란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는 이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새로운 감격으로 다가왔기에 기쁨으로 그 뜻
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 베드로가 언급했을 법한 결론적 이야기
를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이 먼저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주신 구원의 의
미에 대해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다. 즉 이방인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져 있음이 반대자들이었던 할례자들에 의해 선언됨으로써 초대 교회 안에 있어온
이견들이 통합되어 이방인 선교가 확실한 권위와 보증을 받게 되었다.

=====11:19
때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멘 운'(* )을 `때에'라고 번역하는 것
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때'로 번역될 경우 어떤 사건의 시점을 의미하므로 18절에
서 언급된 사건과 시간적 연관성이 강조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장을 접속하거나 이
야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멘'(* )은 반의적
(反意的) 의미를 연결하는 상관 접속사로서 `그러나' 또는 `한편' 등의 뜻을 갖고 있
다. 그리고 `운'(* )은 앞에서 언급된 내용의 결과로 나타나는 의미나 사건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그래서' 또는 `결국'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또 때
에 따라서 `그러나'와 같은 반의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본절의 접속사는 앞
의 사건과 시간적 연결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접속사로 이해하여
야 한다. 여기서는 `한편'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 - 본 구절은 독자로 하여금 과거의 일을 회상하도록 촉
구하면서 새로운 이야기의 배경을 설정하고 있다. 이는 스데반의 순교 후(7:54, 60)
교회에 닥친 박해(8:1-4)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9장에서는 박해의 손길이 유대땅이
아닌 다메섹까지 미쳤음이 나타나 있다. 박해의 범위가 타 지역(이방 지역)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가리킨다. 아마 이 같은 일련의 박해로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던 성도들
은 이방나라로까지 이주했을 것이며 그곳에서 전도를 하다가 박해의 손길이 그곳까지
미치게 되자 또 다시 점점 더 멀리 흩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주의자들의
박해가 복음을 전세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역사한다.
베니게 -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서 갈멜산과 레바논산 사이에 위치했으며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에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도시가 속해 있는데 이미 예
수는 갈릴리 선교 당시 이 두 곳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그곳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
쳐준 바 있다(막 7:24-30). 따라서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생소한 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브로 - 지중해 동북부에 위치하여 안디옥과 다소, 그리고 길리기아 지역과 마주
하고 있는 섬으로 구약 시대에는 `깃딤'(민 24:24)이라고 불리어졌으며 오늘에는 `키
프러스'(Cyprus)로 알려져 있다. 바나바는 이 섬 출신이며(4:36) 그곳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고 바울도 바나바가 함께 그곳에서 설교한 적이 있다(13:4-12).
안디옥- 행정 구역상 수리아 지역의 지중해에서 약 32Km 내륙에 위치한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8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안디옥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
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성경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본절의 수리아 안디옥 두
곳이 언급되어 있다(13:14). 수리아 안디옥은 기원전 300년경에 셀류쿠스 니카토르 1
세(Seleucus Nicator I)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
'(Antiochus)의 이름을 따라 도시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디옥은 A.D.1
세기에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레산드리아에 이어 인구 약 50만에 달하는 큰 도시
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Josephus). 지역의 위치상 안디옥은 동 서 문화가 혼합되어
상존했으며 전체 인구 중 1/7정도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A.D.37-41년에는 갈리굴
라(Caligula) 통치 아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무서운 도시로도 알려져 있
다. 신약성경에서 안디옥은 외국 선교의 전진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13:1-3)처음으로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던 곳이며
(11:26) 이방인 개종자의 할례 문제에 관한 논쟁이 처음있었던 곳이다(15:1,2;갈
2:11-21). 이와 같이 이방 지역 선교를 위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안디옥 교회는
초기에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 지도되었고 2세기에는 이그나타우스와
데오빌로, 3,4세기에는 루시안, 데오도르, 크리소스톰 등의 유명한 지도자들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로마와 함께 중요한 신학적 본산(本産)이 되었다.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는 본문의 의도는 1-3
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유대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과 지금까지
이방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11:20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 - 구브로에 대해서는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구레네는 북
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의 중심 도시로서 B.C.7세기경 설립되었으며 헬라 문화권에 속
한 지역이다. 또한 이곳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시몬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눅 23:26). 여기서 언급된 구레네 몇 사람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
하여 선교 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의 배타적(排他的) 우
월 의식을 버렸기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헬라인에게도 - 이 말은 19절에서 언급된 `유대인에게만'이라는 단어와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헬라인'을
뜻하는 헬라어 `헬레나스' 대신 `헬라파'라는 의미의 `헬레니스타스'(*
)로 표현된 사본들이 있어(B, E, H, L, P)논란이 되고 있다. 즉 `헬레니스타스'라고
할 경우에는 `헬라화된 유대인' 또는 `헬라 지역에 사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
기 때문에(6:1)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어느 사본을 선택하
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헬레나스'(*
)를 본문으로 인정한다(Alford, Chrysostom, Knowling, Bruce, Vincent).왜냐하면 헬
라파 유대인은 19절의 `유대인'이라는 말 속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
인을 굳이 `헬라인'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헬라파로 구분할 때에는
`히브리파'와 대립하여 사용되는데(6:1) 여기서는 `유대인'과 (19절) 대립되어 사용된
점으로 보아 `이방인'을 지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에 `헬라인'으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헬레니스타스'라고 언급한 사본들은 19절과의 대립적 묘사를 피하고,
뿐만 아니라 이방 선교가 바울의 활동 이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이방 선교에 대
한 바울의 공로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수정했을 가능성이 높다(Haenchen).
주 예수를 전파하니 - 그들의 선교활동의 중심 내용은 예수가 `주님'임을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좀더 구체적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했다는 의미다.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 누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는 구약적 표현
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삼하 3:12). 누가는 이같은 구약적 표현을 통하여 그들의 이
방 선교 활동이 구약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여
이방 전도의 정당성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본서의 일관된 내용이기도 하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 기독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음을
표현하는 이 어투는 누가의 독특한 수사법이다(Haenchen). 이방인들이 `예수를 주로
믿고 돌아왔다'는 표현은 곧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지만 세례를 베풀
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아직 교회가 조직되지 못한 상태이므로 세례는 시행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11:22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 8:14과 비슷한 이야기로 지방 교회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문을 듣고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중앙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서 대표를 파견하게 된다. 사마리아에 파견되었던 대표는 요한과 베드로였으나 여기서
는 바나바가 파견된다. 바나바는 구브로섬 출신으로서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으나 설교
를 잘하여 바나바라는 이름이 주어졌다(4:36). 그는 자기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쳤
으며(4:37) 회심한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했던 장본인으로 안디옥
교회의 교사이기도 하다(13:1). 또한 아디옥 교회가 확장되자 바울을 다소에서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와 가르치게 하였으며(11:26) 바울의 선교 여행의 동역자로서 바울을
돕기도 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여 바울을 능가하는 능력을 인정받은 흔적이 있다
(13:2;15:12)에서는 바울 이름보다 바나바 이름이 먼저 언급됨). 그는 마가를 선교 여
행에 동행시킬 것인가에 관하여 바울이 반대하므로 바울과 결별을 하게 된다
(15:36-39). 이처럼 그는 초기 기독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했었던 인물임에 틀
림없다. 안디옥에 바나바가 파송된 것에 대해 혹자는 당시 모든 사도들이 베드로처럼
선교 활동에 여념이 없어 예루살렘에 부재(不在)중이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기도 한다
(Lenski). 그러나 헨헨(Hasnchen)은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권한을 부여받아
안디옥 교회의 선교 활동을 합법화할 수 있는 전권을 행사했다고 본다. 바나바를 예루
살렘 교회에서 파송했다면 그를 파송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부
재중이었을 거라는 전자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가까운 구브로
사람이고, 고향 사람들이 안디옥에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을 할 때 그곳에 파송받
는 데는 적격자였을 것이다. 아무튼 예루살렘 교회는 지방 교회를 공인하고 합법화하
는 권한을 지닌 교회임을 여기서는 암시해 주고 있다(8:14 주석 참조).

=====11:23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21절에서 언급된 이방인
의 개종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21절에서 많은 이방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들어
오는 것이 `주의 손'에 의한 것이라고 묘사했듯이 바나바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
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바나바가 `기뻐했다'는 말은 안디옥 교회의 선교 활동을 공
인(公認)한다는 표현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기독교인들을 기독교 공동체로 인정한
다는 뜻이다.
굳은 마음으로 - 이 마음은 한 목적을 향해 흔들림이 없음을 뜻한다. `굳은'으로
번역된 `프로데세이'(* )는 본래 여러 사람 앞에 차려놓고 진열하
는 것을 뜻하며(마 12:4;막 2:26;눅 6:4;히 9:2) 또한 `계획, 결의, 의지'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따라서 여러 사람 앞에서 맹세하듯 또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주를 따르라는 말이다.
주께 붙어 있으라 - 이 말은 초기 기독교의 메시지로 예수를 삶의 중심이 되게 하
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가 모든 삶의 원리이며 기준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말은 모든 종교적 율법과 유대교적 전통들로부터 자유하여 예수에게로 돌아오고 오
직 예수만을 규범으로 삼고 살아가야 함을 뜻한다.

=====11:24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 - 바나바에 대한 누가의 평가라고 할 수
있는 본문은 바나바가 선언한 23절의 내용을 정당화하고 보증(保證)하기 위한 묘사라
고 할 수 있다. 즉 바나바가 안디옥에 있는 이방 기독교인을 인정한 것이 정당한 것임
을 보증하고 나아가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한 것임을 암시하기 위한 누가의
의도이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 바나바의 안디옥 방문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쇼회
의 확장을 가속화시켰는데, 그 이유가 바나바의 착함과 성령이 충만한 믿음 때문임을
누가는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이에'라는 말은 헬라어 접속사 `호티'(*
)를 번역한 말인데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원문에서 이 접속사는 본래 본절의
처음에 나와서 큰 무리가 주께 더 나오는 까닭을 말해주는 문장을 이끌고 있다. 따라
서 본절 전체를 직역하면,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많은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가 된다.

=====11:25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 9:30에서 사울이 다소로 보내진 사실이 언급된 후 처
음으로 사울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가게 된 것은 환상
중에 받은 명령에 따른 것으로 사울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2:17-21). 사울이 다소로 가서 머문 기간이 얼마인지 정확
히는 알 수 없지만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 것으로 보인다(Haenchen, Ramsay). 왜
냐하면 예루살렘 2차 방문이 14년만에 이루어졌다고 사울 스스로 밝히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갈 2:1) 안디옥에서의 1년을 빼면(26절), 약 13년 정도의 시간이 남기 때
문이다. 바나바가 찾아간 다소는 안디옥에서 북서쪽으로 약 12.9Km의 거리에 위치한
길리기아의 중요한 도시로 무역이 성행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계(中繼) 무역을 했
으므로 헬라 철학을 비롯한 헬라 문화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곳은 사울의
고향이기도 하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간 뚜렷한 이유에 대해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안디옥 교회를 바나바 혼자 이끌 수 없었고, 대상이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이방인을 위
해 부름받은(갈 1:16) 사울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바나
바의 모습은 9:27의 내용과 함께 사울을 초대 교회의 중요한 사역자로 등장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로 묘사되었던 것이다.

=====11:26
일 년간 모여 있어 - 바나바와 사울이 협력하여 안디옥 교회에 사역하는 기간이 일
년으로 언급되는데 그 시기가 A.D. 43-44년경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Lenski), 정확
한 시점은 알 수 없다. 여기서 `일 년간' 이란 표현은 아마 바울과 바나바가 부근의
일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난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 같다.
제자들이 - 여기서 언급된 제자들이란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
의 하나이며 이방 기독교인들과 유대 기독교인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로 이해된다. 혹
자는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과 그 성격은 비유대적인 것으로서 유대적 기독교와는 구별
되는 이방적 기독교 공동체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한다(Bickermann). 왜냐하
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안디옥에서 처음 붙여졌다는 점에서 유대 기도
교와는 구준되는 점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안디
옥의 50만 인구 중 약 1/7 정도가 유대인이었으므로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 중에 유대
인들이 포함되었음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 - 이 단어는 기독교인들에게 붙여진 고유한 명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수치스럽고 간교한 것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한다. 에릭 피터슨(Erik Peterson)은 로마 당국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서
유대교 안의 반정부적인 정치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가가 당
시 친로마적이고 로마 정부에 호의적인 방식으로 본서를 기록했다는 개론적(槪論的)
이해와 모순되기 때문에 피터슨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Haenchen). 신약에서 세 번
언급되는(26:28;벧전 4:16) 이 말은 비기독교인에 의해 붙여졌다는 의미에서 경멸적인
별명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본문에서 누가가 소개하는 어투를 보면 그렇기 불명예스
러운 칭호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바나바와 사울과 같은 쟁쟁한 사람이
이끄는 기독교인에 대해 수치스러운 단어를 소개한다는 것은 문맥상 부자연스럽기 때
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로서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는 집단을 표현한 말로 이해
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 안디옥 교회는 타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음으로
써 참으로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임을 인정받게 되고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로
부터 교회의 설립에 대한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보즌받게 될 수 있었다. 당시 추종하는
대상의 이름을 따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에서(`
헤롯당', 막 3:6)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에게 붙여진 지극히 당
연한 칭호였다(11:19-26 주제 강해 `그리스도인'참조).따라서 이제 기독교는 안디옥에
서 유대교와 전혀 구별되는 새롭고 독특한 종파로서 부각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유대
교와 완전히 구분된 종파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문제는 다음 두 가지로 고려된다.(1)
로마 제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박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유대교와
같은 합법적 종교가 아니라 신흥 종교(新興宗敎)로 구분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점이
다.(2) 구약성경과의 관계성에 관한 문제다. 즉 구약 시대의 구원사를 이해하는 데 유
대교와 무관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이다. 사실 바울은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였
고 유대교적 전통과 기독교를 조화있게 연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Haenchen).
이런 점에서 당시 로마 당국자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sect)로 이해했다.

=====11:27
그 때에 - 앞에서 언급한 바나바와 사울의 활동 기간을(일 년) 지시하는 것으로 보
인다. 이때의 황제는 글라우지오로 그는 A.D.41-54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다. 그의 통치
에 대한 전승(傳承)에 의하면 그 기간 동안 로마 제국 내에 심한 기근이 여러 번 있었
다고 전해진다. 바울의 고린도 전도 여행시에도 글라우디오가 아직 황제로 있었으며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에게 로마에서 떠나라고 명한 것은 A.D.50-52년 사이에 이루어
졌다(18:1,2). 그리고 12장에 언급된 헤롯이 죽은 시기는 A.D.44년 경이다. 만약 본서
가 연대적인 순서를 철저히 따른 기록이라면 본 구절의 `그 때'는 A.D.44년을 넘지 않
는다. 특히 12:25에서 언급된 대로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扶助)의 일을 마치고 안디옥
으로 돌아온 시점과 헤롯의 사망 시기가 서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본절은 A.D.44년경에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흉년 이전의 어느 때를 가리킨다.
선지자들(* , 프로페타이) - 본서와 바울 서신에만 언급
되고 있는(13:1;15:32;21:9,10;롬 12:6;고전 12:10;13:2,8;14:6;살전 5:20) 이들은 초
대 기독교에서 영감있는 교사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성경에 관해 가르치고 예언의 은사
를 받아 예언을 하기도 하며(롬 12:6;고전 12:10) 사도 다음으로 중요한 직분으로 인
정받았다(고전 12:28;엡 2:20;4:11).
예루살렘 이르니 -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오게 된 구체적인 이유에 대
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28절에서 예언이 언급된 점으로 보아 흉년에 대한 예언을 전
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흉년을 대비해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요청하기 위해 그들이 안디옥을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당시
에 있었던 헤롯의 박해(12:1)를 피해 이 곳을 찾았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11:28
아가보 -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아가보는 유대 출신 기독교
인으로 보인다. 그는 두 가지를 예언한 것으로 본서에서 언급되는데 본문 외에 21:10,
11에서 사울의 투옥에 관하여 예언하였으며, 이 두 가지 모두 성취되었다.
성령으로 말하되 - `말하되'로 번역된 `세마이노'(* )는 `표시
하다',`지시하다',`알리다'의 뜻을 갖고 있는데 신탁(信託)을 전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Haenchen). 특히 이 동사의 명사형 `세메이온'(* )은 요한
복음에서 `표적'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세마이노'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발생하는
특별한 사건을 나타냄을 암시한다.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 - 이 말은 과장된 표현이다. 그 당시 개별 지역에 흉년이
들었다는 전승은 있으나 세계 전역은 아니었다. 특히 46-48년 사이에는 팔레스틴에 큰
기근이 있었지만 역시 세계적인 것은 아니었다(Haenchen). 누가는 당시 로마 제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지역을 `천하'라고 했다. 특히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 헌금한 점으로 비추어 보아 아가보가 예언한 흉년은 팔레스틴 지역에서 극
심했던 것 같다. 그런데 본절의 흉년은 A.D.46-48년 사이에 있었던 팔레스틴 지역의
큰 흉년을 지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절의 흉년은 A.D.46년 이전과 관련된 기록이
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27절 주석을 참조하라.
글라우디오(Claudius) - 그는 헤롯 아그립바 1세(12:1)의 정치적 세력을 배경으로
등극하였다. 그는 초기에는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폈으나 말년에 가서는 유대
인들의 종교 집회를 금지아였을뿐 아니라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시키기도 했다
(18:2). 그리고 그는 바울에 대한 유대인의 고소를 기각(棄却)시켰다(18:12). 또한 그
는 황제 예배를 강요한 대표적인 로마 황제로 알려졌다. 그는 조모를 여신으로, 조부
를 신으로 모시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두게 하여 유
대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11:29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 유대에 사는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기근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지칭한다.
부조(扶助)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 )는 본
래 `봉사'의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구제 헌금'의 의미로 예루살렘에서 기근으
로 고통당하는 기독교인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 예루살렘을 위
해 헌금한 교회는 안디옥 교회뿐만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갈 2:10), 고린도 교회(고전
16:1), 그리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롬 15:26)로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 즉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을 했다는 사실을 이방 교
회와 유대 교회와의 우호적 관계를 시사해 주는 것이다(F.F.Bruce). 이방 교회 역시
독립된 교회로서의 위치가 확인될 뿐만 아니라 유대 교회와 동일한 기독교 공동체로서
인정된 것이다. 이제는 유대와 이방인라는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와 성(聖)과 속
(俗)으로 구분짓는 배타적 분리주의도 없어졌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유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11:30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 안디옥 교회가 헌금한 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대
표로 사울과 바나바가 언급된다. `손으로'라는 말은 `통해'라는 단순한 의미로 70인역
에 자주 사용되었다(Haenchen). 그러나 여기서 누가는 단순히 전달된 사실을 강조하기
보다 오히려 전달자인 바나바와 사울을 강조하여 안디옥 교회의 대표성을 바나바와 사
울에 두었다. 이는 이방 교회의 대표로서 바나바와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가 받아들인
다면 곧 이방 쇼회가 실제적인 기독교 공동체로 공인됨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 안디옥 교회에서 보내는 헌금의 수령자(受領者)가 장로로
언급됨으로써 처음으로 신약적인 의미의 장로라는 직분이 나타나고 있다. 유대인들에
게 있어서 장로란 생소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장로와 신약 시대의 장로
는 차이점이 있다. 구약 시대의 `장로'는 성읍의 정신적, 행정적 지도자로서 백성들간
에 분쟁이 생겼을 때 재판관 노릇을 하여 공의를 확립하였다. 이 외에도 장로는 사회
기강을 확립하는 제반 업무 및 중요한 정치, 종교, 사법적인 일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
했으며 간혹 군사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수 8:10;삼상 4:3). 이에 대해 자세
한 것은 신 21:1-6 주제 강해 `성경에 나타난 장로직'을 참조하라. 신약 시대에는 `장
로'가 목회 임무를 수행하며(벧전 5:1-4;약 5:14) 가르치며 권면하는 일도 행했다. 일
반적으로 사도들은 교회를 개척한 후 그 교회의 대표자로 `장로'를 세웠다. 그런데 `
장로'란 말이 간혹 사도들에게도 적용되기도 했다(벧전 5:1;요이 1절; 요삼 1절). 그
리고 이 직분은 초대 교회 당시 `감독'의 직분과 별 구분이 없었으나 후에 이그나티우
스(Ignatius)에 의해 장로직과 감독직이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장로직'에 대한 자세
한 내용은 6:1-6 주제 강해 `교회의 직분'을 참조하라. 아무튼 본절에 언급된 `장로'
가 사도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6장에서 언급된 일곱 집사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누가는 본서에서 사도들을 장로로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
아 장로와 사도가 동일시 될 수 없다. 누가는 구제를 위해 선출된 집사에게 장로라는
직함을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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