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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 12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2|조회수11,377 목록 댓글 0


사도행전 제 12장
=====12:1
그 때에 - 이야기의 무대가 다시 유대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그 시점이 언급되고 있
다. 여기서 말하는 그 때는 헤롯왕이 통치하던 시기이며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扶助)
를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이전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바나바와 사울은 헤
롯왕이 죽은 후에 방문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12:23-25). 연대기적으로는
A.D.44년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헤롯이 44년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헤롯이 44년
에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Thomas Whitelaw). 따라서 여기서 언급되는 이
야기의 시점은 헤롯이 죽던 해 즉 A.D.44년 유월절 전후로 볼 수 있다(3절).
헤롯 왕이 - 여기서 언급된 헤롯 왕은 헤롯 대왕(B.C.37-B.C.4)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Agrippa I, A.D.37-44)를 가르킨다. 그는 로마 황실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성장했
으면서도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 때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가 유대와 사마리아의
통치권을 받게 된 것은 A.D.41년 갈리굴라(Caligula)가 암살당한 후 글라우디오
(Claudio)가 황제로 즉위할 수 있도록 공헌한 데 대한 대가였다. 그는 친유대교적인
정책을 펴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본장에서
역시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독교인을 탄압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Lenski).
손을 들어 - 이 말은 헤롯에 의하여 기독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으로서 박해에 대한 헤롯의 직접적인 개입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
동번역은 `박해의 손을 뻗쳐'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4:3과 5:18에도
이와 유사한 문장이 언급되는데(* , 에
페발론 타스 케이라스) 체포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하반절과
2절에서 박해에 대한 구체적 진술이 나오므로 `체포하다'란 의미보다 `박해의 손을 뻗
치다'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 중 몇 사람 - 교회, 즉 기독교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몇 사람이 박해의 대상으
로 언급되고 있는데 몇 사람이라는 말이 교회 전체를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2,3절에
서 언급된 대로 야고보나 베드로와 같은 몇몇 지도자를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
다. 여기서 두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보면 교회에 대한 헤롯의 박해가 전체 기
독교인들에게 미쳤을 것이고 또한 그는 그중 몇 사람을 체포하여 죽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박해의 대상을 몇 사람으로 언급하여 헤롯이 유대의 교권주의자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시범적으로 몇 사람을 체포하여 죽이거나 투옥했던 사실을 보여 주
고자 했던 것같다. 따라서 헤롯에 의해 기독 교회 전체가 핍박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
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하려 하여 - `악을 행하다' 또는 `상처를 입히고 고통당하게 하다'이 뜻의 `카코
오'(* )는 70인역에서 60회 이상 사용된 단어이다(Haenchen). 본절에서 이
단어는 고통을 주거나 심지어 죽이는 것과 같이 핍박과 관련된 악행 행위 전체를 의미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 - 사도 중에서 첫 순교자로 언급되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세
베대의 아들로 언급되고 있다(마 4:@1;10:2). 그의 아버지 세베대는 어부이면서 선주
(船主)였던 것으로 보인다(막 1:20;눅 5:11). 야고보는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
와 요한과 함께 세 명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급하고(눅 9:53, 54) 이기
적인 성격이었으므로(막 10:37) 예수는 그에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보아
너게'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하였다(막 3:17). 그런데 이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야
고보(1:13)나 예수의 동생 야고보(15:13;21:18;갈 1:19)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12: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 사도 야고보를 처형한 헤롯의 행동에 대
해 유대인들이 매우 흡족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묘사된다.`기뻐하다'로 번역된 `아레
스토스'(* )는 `기분이 좋은' 또는 `만족한'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적
형용사인데 헤롯의 행위가 유대인들을 크게 만족시켰다는 뜻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헤롯의 이같은 행위에는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고 유대인들로부터 환심을 사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까지 옥에 가둔 헤롯의 행위는 백성들의 반응에 자심감을 얻어 광분한 독재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잡으로 할새 - 야고보의 참수형을 보고 기뻐하는 유대인들의 반응에 고무되어 헤롯
은 베드로까지 손을 뻗쳤다. 베드로가 제자들 중 우두머리 역할을 했으므로 헤롯은 그
를 잡게 되면 유대 지도자들이 자기를 더욱 지지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본
구절에서 두개의 동사형이 함께 나온다. 즉 개역 성경에는 정확하게 그 두 동사의 의
미가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 따라 본 구절을 직역하면 `추가하여 체포하다
'란 의미로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는데 그치지 않고 또 다시 베드로를 체포하려 했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특히 여기서 사용된 두 단어는 70인역에 나오는 히브리적 구문인데
(창 4:2;8:12;18:29) 누가는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유대인들과 헤롯이 기독교를 박해
한 공범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누가는 복음서에서와 같이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유대
민족으로부터 나왔음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복음서에서 누가는 유대의 지
도자 계급, 즉 사두개파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것으로 묘
사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유대 대중들도 기독교의 박해에 묵시적으로 동조하고 있
음을 언급하고 있다.
때는 무교절이라 - 베드로가 체포되었던 시기가 무교절(無較節)기간임을 말하고 있
는데(무교절에 관해서는 눅 22:1 주석 참조) 4절에서 언급된 유월절을 니산월 14일 저
녁 유월절 식사로 제한 한다면 군사들이 베드로를 유월절이 지난 후에 백성들에게 내
어 놓자는 이야기를 했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체포 시점은 유월절이 시작되는 시점을
전후한 것으로 보인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시점은 유월절이 시작되는 니산월 14
일 저녁 해지면서 15일이 시작되고 무교절의 첫날이 되며 유월절 식사가 시작되기 때
문이다. 그러나 유월절을 무교절과 같은 기간으로 볼 때(눅 22:1 주석 참조)에는 정확
한 시점을 규명하기 곤란하다. 다만 무교절 기간 중에 있었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
을 뿐이다(4절 주석 참조).

=====12:4
잡으매 옥에 가두어 - 이로써 베드로는 세번째로 투옥되는 셈이다(4:3;5:18). 이로
한 사도들의 모습은 예수가 걸어가셨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용기있게 따라가는 모습
으로 보여지기에 충분하다.
군사(軍士) 넷씩인 네 패(牌) - 옥에 갇힌 베드로를 경비하는 군사들의 근무 편성
을 소개하고 있는 본문은 (1) 베드로의 체포가 공권력에 의한 것임과 (2) 베드로가 중
죄인으로 취급받았음을 암시한다. 혹자는 베드로를 경비하기 위해 편성된 군인이 한
조에 네명씩으로 구성되어 모두 네 개의 조로 짜여져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하루
24시간을 한 조가 6시간씩 지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Lenski). 이에 반해서 혹
자는 밤에만 베드로를 지켰던 것으로 생각하여 세 시간씩 4교대로 보초를 섰을 것으로
단정한다(A.C.Hervey, 아사노중이찌). 이 외에 네일(Wiliam Neil)은 낮과 밤에 네 조
가 각기 돌아가면서 3시간씩 4교대로 보초를 선 것으로 추측한다. 혹자는 이러한 주장
중 당시 로마에서 투옥된 죄수를 지키던 관습이 두번째 주장과 같기 때문에 이 견해를
지지한다(I.H.Marshall). 베드로가 천사에 의해 풀려난 사건이 밤중에 일어 났으므로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아무튼 두 명은 묶인 죄수 옆에서, 두 사람은 옥문
밖에서 지켰을 것으로 추측된다(6절). 한편 이같은 근무 편성은 평소의 옥문지기보다
많은 수라고 주장하면서 이미 베드로가 탈옥한 전과가 있었으므로(5:19) 병력을 증가
시켰을 것이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Jacquier). 그러나 로마군에서는 4명이 한 조가 되
어서 세 시간씩 근무를 했다는 점에서 볼 때(Haenchen)헤롯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도
그에 준했을 것으로 보는 편이 가장 무난하다.
유월절 후에 - 베드로를 백성 앞에서 공개 재판하기로 작정한 날로 언급된 유월절
축제는 눅 22:1에서 언급된 바처럼 무교절과 동일시 되어 무교병을 먹는 일주일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Alford, Haenchen, Hervey). 따라서 유월절 후라면 적어도 니
산월 21일 후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유월절이 유월절 식사를 하는 니산월 14
일 저녁을 제한적으로 지칭하는 단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Lenski, Zahn, Ephraem
Syrus). 본문을 통해서는 이 두가지 견해의 타당성 여부를 구분할 근거를 찾아낼 수
없으나 누가가 유월절이라는 단어를 3절의 무교절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후 사용한 것
으로 보아 여기의 `유월절 후'는 무교절이 끝나는 니산월 21일 후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 백성들 앞에 베드로를 끌어내고자 하는 헤롯의 의도는 분
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백성들이 재판에 관여할 수 있는 합법적 근거도 없었기 때
문에 재판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Haenchen). 아마도 예수의 수난 설화(受難設
話)에 맞추기 위한 저자의 의도적 편집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Loisy).그렇지
않으면 사형 집행을 공개적으로 하겠다는 의도가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은 그가 유대인들을 만족시켰고 또한 자신도 유대인들의 기쁨에 매우 고무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2, 3절) 헤롯은 정치적 지지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베드로의 체포
를 선전하고 이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12:5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 베드로의 체포로 인해 교회가 하나
님께 기도했다는 본 구절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 의의를 지니고 있다. (1) 성도들이 베
드로의 체포를 교회의 위기로 판단했다는 점을 암시해 준다. 이미 영향력있는 사도 야
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베드로 역시 처형될 것이라는 결론은 자명했다. 따라서
핵심적 지도자의 상실은 곧 교회의 위기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2) 교회의 단결을 볼
수 있다. 교회가 기도했다는 것은 교회가 하나되어 뭉쳤다는 뜻이다. 즉 교회의 위기
앞에서 두려워 흩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단결하였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이는 고난
중에 있는 교회가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3) 고난 중에 해야
될 교회의 본분 중에 기도하는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었다. 따라서 당시 기독교인
들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했다. 그러나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전
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초능력만을 기대하는 현실도피적 신앙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만들어낸 불법적 힘에 맞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고 그것
을 따른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4) 기도하는 교회의 모습은 베드로에 관
한 이야기의 구성상 7-11절에서 나타난 기적적 사실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즉 교회의
기도는 기도로 끝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구출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음을 보
여주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단결과 기도하는 힘은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동기가 됨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누가는 이와 같은 교훈적 의미를 초대
교회에 시사해 주기 위해 본문의 이야기를 기록했을 것이다.

=====12:6
그 전날 밤에 -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의 본론이 시작되면서 또다시 이야기의 시점
이 언급되고 있다. 헤롯이 베드로를 끌어내기로 작정했던 그 날은 정확하게 알 수 없
다. 다만 4절에서 유월절 후라고만 언급하였기 때문에 유월절이 끝나는 바로 그 다음
날인지 아니면 막연하게 유월절이 지난 어느 날을 가리키는지 정확지 않다. 그러나 문
맥상 헤롯이 잡아내려 했다는 말을 볼 때 특정한 날이 지정되었음에 틀림없고 유월절
후라는 말은 유월절이 끝난 니산월 22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
하면 유월절은 유대인의 대명절로서 그 기간 중에는 죄인에게 형을 집행하지 않는 관
례(慣例)가 있었기 (마 26:5)때문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시점은 니산월 21일을 말하는
것인데 그들의 날짜 계산이 저녁 해질 무렵에 하루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미 유월절
기간이 끝나고 22일이 시작된 날 밤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자세한 것은 4절 주석을
참조하라.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 옥에 갇힌 베드로의 모습에서 두
가지 저자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1) 옥에 갇힌 베드로의 상황이 탈출이나 구출을
엄두도 못낼만큼 삼엄하고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베드로의
양 옆에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고 병사 두 명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는 장면 묘사는 도
저히 베드로가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
으로써 누가는 이 다음에 진술되는 베드로의 구출에 극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2) 베
드로 자신도 탈출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은 그가 잠자고 있었다는 사실로 잘 알 수 있
다(Bauernfeind). 이같은 장면에 대해서 베드로가 자신의 처형 날짜가 다가왔다는 것
을 몰랐을 리 없다고 전제하면서 베드로의 침착성과 경건성이 강조될 수도 있다.그러
나 누가는 문맥상 강조점을 베드로가 탈출에 대한 의사도 없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임을 말함으로써 베드로를 탈출시킨 하나님의 능력에 두고 있다. 한편 베드로가
두 군사 사이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진술은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1) 베드로
가 양 옆으로 쇠사슬에 묶여 있고 그 옆에서 두 군사가 지키고 있다. (2) 베드로를 묶
고 있는 두 쇠사슬은 각각 양편의 군사와 함께 묶여 있다. 베드로에 대해 철저히 감시
하려 한 헤롯의 의도로 보아 두번째 해석이 더 타당하다.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 감방 안에서도 두 사람의 경비병이 있고 문 밖에서도 두
사람 이상의 파수꾼이 지키고 있다는 것은 역시 베드로의 상황이 탈출이나 구출을 상
상할 수 없을 정도임을 강조한다. 이로써 누가는 베드로를 구출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극적으로 고조시켜 준다.

=====12:7
주의 사자 - 이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하늘의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누가는 `하나님의 사자'(10:3) 또는 단순히 `천사'(10:4,22;12:8)로도 묘사하고 있다.
주의 사자가 나타난 것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5절) 하나님의 응답을 암시하며 한편
으로는 베드로의 구출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것을 의미한다.
광채가 조요(照耀)하며 - 환한 빛이 감방을 비추었는데(공동번역) 이같은 묘사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그 영광이 임함을 표현하는 전통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마 28:8;눅 2:9;24:4).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 천사는 베드로를 깨우기 위한 수단으로 베드로의 옆구리를
쳤는데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파타쏘'(* )는`친다', `때린다' 외에
`때려 눕힌다'(strike down) 또는 `죽인다'(slay) 등으로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따라
서 이 표현은 천사가 베드로에게 세찬 충격을 준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것은 아마
도 베드로가 깊은 잠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암시해 주는 듯하다
(A.T.Robertson).

=====12:8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 이 명령은 계속 강조되고 있는 사실 즉 베드로 자신에게
는 탈출하려 하는 계획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베
드로가 허리띠를 풀고 신까지 벗어놓고 있었다는 점에서 잘 증명된다. 당시의 복장은
반드시 허리띠를 띠어야만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신(* , 산달
리아)는 나무나 가죽으로 밑바닥을 만들어 가죽끈을 이용해서 발목에 메는 것이었으므
로 벗었다가 신는데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편안한 상태에서 쉬고 있었음
을 보여준다. 여기서 천사의 일방적인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베드로의 모습은 전적으
로 하나님에 의해서 베드로의 구출이 계획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12:9
참인줄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 여기서 언급된 `환상'은 바로 앞의 `참'과 대조
되는 단어로서 실제적으로 경험되는 현실이 아닌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Haenchen).이같은 묘사 역시 베드로에게는 스스로 탈출하려는 계획이나 지금과 같은
상황을 상상도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의 구출 사건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능
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12:10
성으로 통한 쇠문 절로 열리는지라 - 성으로 통하는 쇠문은 `거리로 통하는 철문
'을 의미하는데 보다 문자적인 의미로는 도시 또는 시내로 향한 것을 뜻한다. 또한 쇠
로 된 문이란 매우 육중하고 함부로 열 수 없는 견고한 문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
서 `절로 열리는지라'는 말과 대조되어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해 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은 헤롯이 베드로를 성 중에서 가장 견고한 감옥에 구금
(拘禁)했음을 의미한다.

=====12:11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알겠노라 - 이 표현은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정신을 차렸다는 말은 곧이어 언급된 ` 알겠노라'와 같은 맥락에서 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구출한 까닭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2) 9절에서
베드로가 자신이 구출되고 있는 사실을 환상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환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본문의 전체적인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두번
째 해석이 더 타당하다. 베드로는 꿈인지 생시인지 의아해 하면서 천사를 따라 나온
후 천사가 떠나버리자 자기가 감옥 바깥에 확실히 나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환상
이 아님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사건의 전모에 대한 의미를 깨닫기 전에 베
드로에게 일어났던 심리 상태를 묘사해 준다. 베드로는 자신이 당한 일의 의미를 깨닫
기 전에 먼저 놀라운 사건이 환상인지 실제인지 인식해야 했다. 그 다음에 그는 자기
가 왜 하나님에 의해 구출되어야 했는지 알게 되는 인식의 과정을 거쳤다. 특히 여기
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 `오이다'(* )는 경험적인 지식에 주로 사용되는 `기
노스코'(* )와는 달리 직관적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베드로가 정
신이 들면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12:12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 베드로가 감옥으로부터 구출되어 처음으로 찾
아간 집을 언급하고 있는 본문은 마리아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가라는 요
한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요한의 이름이 당시 독자들에게 지명도(知
名度)가 높은 이름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이며(골
4:10) 바울과 바나바의 보조자이며 마가복음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한편 마가는 로마
식 이름이고 요한은 유대식 이름이다. 이는 바울이 로마식 이름이고 사울이 유대식 이
름인 것과 동일하다. 그는 바울의 제1차 여행때 바나바와 바울과 동행하였는데
(12:25;13:5) 2차 여행 때 그의 동행에 관한 문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되기도 한다(15:37,38). 또한 1:13이하에 언급되는 다락방이 본문과 동일한 장소라고
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 제자들이 수시로 모였던 것 같다.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 5절에서 언급되었듯이 성도들은 베드로가 체포된
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베드로가 구출되어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본절에는 미완료 동사와 분사형이 함께 사용되어 끊임없이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 강조되었다.

=====12:13
대문 - 혹자는 베드로가 찾은 이 집이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본체로 들어가는
큰 집이라고 주장한다(hAENCHEN). 그 근거는 `대문'에 해당하는 `퓔론'(*
)이 주로 `행랑의 대문' 또는 `궁전의 큰 대문'을 의미한다는데에 있다. 마가의 다락
방이 1:13에 언급된 것과 동일하다면 그 집은 상당히 큰 규모였을 것이며 정원도 지닌
집이었을 것이다. 한편 대문이 잠겨 있는 것은 일상적일 수도 있으나 헤롯의 박해 때
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계집 아이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스케'는 `계집아이' 또는 `처녀' 외
에 `하녀'도 의미한다. 이는 요 18:17에서 대제사장의 여종 곧 문 지키는 여종에게 동
일하게 적용된 용어다. 따라서 본절에서 `파이디스케'는 단순히 계집아이가 아니라 큰
집의 문간방에 거하면서 손님이 왔을 때 문을 열어 주는 `하녀'의 의미로 사용되었음
이 분명하다.
영접하러 - 이 말의 헬라어 `휘파쿠오'는 주로 `칭송하다' 또는 `따르다'의 의미로
사용되며(롬 6:16;엡 6:5;골 3:22;살후 1:8) 간혹 `열다'로도 사용된다.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2:14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 로데가 얼굴을 보지 않고서 음성만 듣고 베드로를 알아
보았다는 사실은 베드로가 마가 요한의 어머니 집에 자주 왔음과 그 가족들과 친밀한
관계였음을 시사해 준다.
기뻐하며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 너무 기뻐서 문여는 것조차 잊고 안으로 달려가
는 로데의 모습은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기적의 의외성
(意外性)을 보여준다. 즉 그녀의 행동은 베드로가 살아서 돌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잘 대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15절에서 로데의 증
언을 듣고서 `미쳤다'고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을 통해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당시
그 집에 모인 성도들은 사도 야고보가 순교당하고 베드로조차 투옥되어 핍박자의 손길
이 자기들에게도 미치리라 생각하여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함께 기도했었
다. 그러던 차에 베드로가 나타났으니 기쁘기도 하며 놀랍기도 했을 것이다.

=====12:15
네가 미쳤다 - 그들의 반응은 로데의 진술에 대한 강한 부정으로 나타난다. 즉 그
들은 베드로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무시했다. 베드로가 투옥된 후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했던 그들의 모습과 본절에서의 반응이 매우 상반된 듯이 보인
다. 그러나 이들의 반응이 불신앙에 근거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너무도 뜻밖의 소
식을 접했기에 그들은 로데가 잘못 본것으로 여겨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
이다.
힘써 말하되 - 이 표현은 성도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즉 로데
가 자신의 진술이 진실됨을 강하게 강조하는 만큼 성도들의 부정적인 반응도 그만큼
컸던 것이다.
그의 천사 - 이 말은 베드로를 지켜주는 수호 천사를 말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당
시 각 개인을 지켜주는 수호 천사가 있다고 믿었다(창 48:15,16;단 3:28;6:22;마
18:10;히 1:14).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를 지켜주는 천사가 찾아와 베드로의 죽음을 전
해주는 것으로 오해하였을 가능성도 있다(Lenski). 그들이 그렇게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베드로 체포 직전에 야고보가 참수형(斬首形)을 당했다는 사실과 밀접한 연
관인 있을 것이다.

=====12:16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 현재분사를 사용하여 나타내고 있다. 이같은 장
면묘사는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17절에 베드로가 급히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점(17절)과 병사들의 소동(18절)이 베드로에게 닥친 상황의 긴박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12:17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 베드로의 출현으로 사람들이 기쁨과 놀라움으로 흥분했
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손을 흔들어' 조용히 할 것을 요
청하고 있다.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은 자신의 구출이 헤롯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구출될 당시는 한밤이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6절) 아직 아
무도 베드로의 구출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출현이 알려져 또
다시 체포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이같은 조치를 취했을 수 있다. 그는 오래 머물수
없는 위급한 상황임을 직시하고 곧 떠나야 할 마음 때문에 같이 기뻐할 겨를도 없이
먼저 자신의 구출 경위를 증언하기 위해 조용히 할 것을 지시했던 것이다.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 여기서 언급된 야고보가 정확히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12사도 중의 하나인 알패오 야고보라는 설도 있으나(Calvin,Bengel) 대체적으로
모든 주석가들은 예수의 동생 야고보로 보고 있다(Alford, Meyer, Lumby, Knowling,
Lenski, Hervey). 여기서 언급된 인물은 당시 지명도가 높은 유명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총
회의 의장을 맡게 될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적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5:13:21:18;고전 15:7;갈 1:19;2:9,12). 그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고 때로는 비난했
던 적이 있으나(요 7:2-5) 그의 변화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1:14의 기록으로 미루
어 보아 초대 교회의 탁월한 지도자로서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15:12-21).이와는 달리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다.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 베드로는 그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행선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의 행선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다.
즉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과 클레멘트(Clement)
의 설교에 근거하여 베드로의 행선지가 로마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세비우
스의 기록 자체가 별로 신빙성이 없고 오히려 로마 교회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
으로 이 주장이 대두된 듯하다. 특히 이후에 베드로는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했으며
(A.D.44)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베드로도 그곳에 있었다(갈 2:9).
따라서 베드로가 이후에 로마에 머물면서 로마교회를 일으켰다는 카톨릭 신학자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고 본다.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지지되는 지명은 안디옥으
로 꼽히고 있다(Haenchen). 그러나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다. 아무튼 베드로는 헤롯
이 죽은 후(12:23) 예루살렘 회의 때 돌아오게 된다(15:7).

=====12:18
날이 새매 -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는 그가 마가의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감으로써
일단락되고 여기서는 이야기의 뒷마무리가 묘사되고 있다. 날이 밝아오는 아침이 언급
되는 것으로 보아 베드로의 구출 사건은 간밤에 감쪽같이 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의문점은 구출 사건이 한밤중이었다면 왜 아침까지 군사들이
몰랐을까 하는 것이다. 아마 군사들이 천사에 의해 깊은 잠에 빠졌거나 날이 샐 동안
베드로가 없어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시점은 4-6절에서 언급
된 바 있는 날 즉 헤롯이 베드로를 유대인들 앞에 끌어내려고 작정해 둔 날이었다.
적지 않게 소동하니 - 큰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적지 않게'라
는 표현이 사용되었다.이는 본서에서만 나타나는 누가의 독특한 용법이다
(15:2;17:4,12;19:23,24). 이는 소동하는 정도가 매우 심했음을 강조해 준다. 한편 `
소동하니'란 말은 어떤 문제가 야기되어 그 문제로 인해 야단법석이 난 상황에 적용된
다. 아마 군사들은 근무 교대 시간에 이르러 베드로가 없어진 사실을 발견하여 서로
놀라고 당황하였을 것이며 곧 그 사실을 헤롯에게 보고되었을 것이다. 이에 헤롯 궁전
안에는 큰 혼란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12:19
심문하고 - 여기서 언급된 법정 용어 `아나크리노'(* )는 `심문
하다', `질문하다' 또는 `조사하다'는 뜻 외에 `심판하다'와 `책임을 묻다'의 뜻을 갖
고 있다. 여기서는 `문책(問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죽이라 명하니라 - 베드로가 없어진 것에 대한 결과로 파수꾼들이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여기서 두 가지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1) 베드로의 구출이 헤롯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11절에서 베드로를 구출하는 주님의
뜻이 헤롯을 실망케 하려는데 있음을 베드로가 깨닫는 장면을 통해 이미 암시되었다.
(2) 베드로가 옥에 그대로 있었다면 야고보의 경우처럼 처형당했을 것이 분명하다는
추측이 가능하게 된다. 즉 헤롯이 파수꾼들을 처형시킬 정도였다면 그가 베드로를 체
포한 것이 어떤 중요한 목적을 위해서였음을 시사한다.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 예루살렘 북서쪽 약 104Km 지점에 있는 지중해 연안 항구
도시로서 고넬료가 있었던 곳이며(10:1) 로마 총독의 관저(官邸)가 있는 곳으로 팔레
스틴의 로마 행정 중심 도시이다. 헤롯이 갑자기 가이사랴로 내려간 이유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헤롯이 가이사랴로 내려갔다는 것은 헤롯의 박해가 사실상
실패했음을 시사한다. 가이사랴가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는 곳이기는 하나 헤롯 안티
파터(Antipater)에 의해 건축되었으므로, 헤롯 왕가는 그곳에 거할 장소를 가지고 있
었을 것이다. 본문에 언급된 헤롯 아그립바(1세)는 기습된 베드로의 탈출을 경험하고
박해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는 유월절 절기가 끝난 상황
이므로 그느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쉬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가이사랴가 예루살렘보다
북서쪽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가다'로 표현된 것은 위치의 표현에 대한 유대
인들의 전통에서 기인한다. 즉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가면 `올라간다'고 표현하
는 반면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면 방향이 어디든지 상관없이 `내려간다'고
표현한다.

=====12:20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 헤롯은 보복 조처로 시돈과 두로
지방에 대해 아마 식량 공급을 중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로와 시돈은 솔로몬 시대
이후(왕상 5:9;스 3:7) 식량을 유대지역으로부터 수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Josephus).

=====12: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 앞절과 연관하여 볼 때 아마도 이 `날'은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절단과 `평화 조약 체결'을 발표하는 날이었던 듯하다(Haenchen). 이와 달리 여
러 학자들은 요세푸스의 글을 인용하여 이 날이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영국에서 돌
아온 승리의 개선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경기일 둘째날이었다고 말한다(Lenski,
Whitelaw, H. Marshall, Bruce). 요세푸스가 묘사한 당시의 장면은 21-23절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므로 이보다 더 정확한 근거가 없는 한 부정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주가
가 다음절과 아무 연관이 없는 한절을 삽입시켰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헤롯
은 백성들이 기억할 수 있는 특별한 날을 정하였던 것이고, 이와같은 축제일을 기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의 사절단이 헤롯을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헤롯은 은으로 만든 빛나
는 옷을 입었으며 그 옷이 햇빛에 빛나자 아첨꾼들이 그를 신으로 추대하여 소리쳤다
고 전해진다.
백성을 효유(曉諭)한대 - `효유하다'란 말은 군중을 향해 연설을 한다는 의미다.
이는 어떤 공식적인 행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백성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
로스 아우투스'(* )는 직역하면 `그들에게'라고 해야 한다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KJV, NASB, RSV,JB, LB). 그런데 지시대명사의 성격상 앞에서
(20절) 언급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Haenchen). 하지
만 22절에서 헤롯의 연설에 반응을 보인 것은 `군중'을 뜻하는 `데모스'(*
)이다. 이는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축제 행사에 참석하
고 있는 모든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헤롯은 경기일 둘째날 모여
든 모든 군중들을 향해 승전을 기념하는 연설을 했을 것이다.

=====12:22
이것은 신의 소리요 -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대개의 경우 모든 자연을 신으로 보기
때문에, 신들의 질서는 인간 세계와 밀접하며, 범상하지 않은 사람은 신으로, 기이하
거나 거대한 자연 현상은 신적인 것으로 이해했다(14:11;28:6). 이와같은 범신론적인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신의 소리'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헤롯을 향
해 `신의 소리'라고 외친 사람들을 대해 요세푸스는 막연히 `아첨꾼들'이라고 묘사하
고 있다. 그런데 이 아첨꾼들을 유대인들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비
록 헬라나 로마 세계에서 범신론이 퍼져 있기는 해도 유일신 신앙을 가진 유대교는 그
것을 배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함성은 `두로와 시돈의 사절단'에게서 비롯되
었을 것이다.

=====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 이 말은 헤롯이 군중들이 자신
을 추켜 세우는 함성을 듣고 매우 만족해 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루스드라에서
그 주민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추대할 때 바울과 바나바가 옷을 찢으며 그들을
만류(挽留)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했던 것(14:8-18)과 매우 대조적이다.
주의 사자가 곧 치니 - 헤롯의 불경건을 벌하기 위해 나타난 것은 베드로를 구출하
기 위해 나타난 것과 같은 `주의 사자'였다. 그가 행한 것은 헤롯을 `쳤다'는 것으로
7절에서 잠들어 있는 베드로를 쳤을 때와 같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리적인 힘
을 가한 것이 아니라 그 사자가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어떤 조치를 취한 것으로 이해
된다. 요세푸스는 헤롯의 죽음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기를 헤롯이 갑작스러운 복통으
로 인해 5일 후에 죽게 됐는데 몸이 썩어 벌레가 생겨났다고 한다.
충이 먹어 - 헤롯이 죽어간 과정은 벌레에 먹히어 가는 과정이었다.어떻게 먹히게
된 것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교회를 박해했던 헤롯의 비참한
최후를 강조하는 것이다.누가는 이같은 묘사를 통해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맞게 되는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보여줌으로써 독재자들이 기타 교권주의자들이 박해를 못하
도록 경고하려 했던 것같다. 헤롯을 죽게 한 것이 주의 사자였다는 것은 박해자를 하
나님이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 헤롯의 비참한 최후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는 본문은 기독교의 확장이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
다. 이같은 형식의 문장은 6:7과 19:20에서도 나오는데 기독교의 거침없는 성장을 요
약해 주고 있다.

=====12:25
부조(扶助)의 일을 마치고 - 본문은 문맥상 매우 이질적이다. 11:30과 직접 연결되
는 이야기인데 사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동안 베드로 구출 사건과 헤롯의
죽음이 있었는지 아니면 베드로 사건과 헤롯의 죽음 이후에 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헌금을 예루
살렘 성도들에게 전달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의 기근을 디베
료 율리우스 알렉산더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발생한 것으로 기술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시점은 A.D.46년경으로 추정된다
(F.F.Bruce). 그렇지만 헤롯 아그립바가 A.D.44년 죽었으므로 그들의 예루살렘 방문은
베드로의 구출 사건과 2년 이상의 시간 간격을 두고 이루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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