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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 14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2|조회수9,141 목록 댓글 0

사도행전 제 14장
=====14:1
이고니온 - 이고니온(Iconium)은 헬라인에 의하여 도시국가로 변형되었는데 비옥한
고원지대(高原地帶)에 형성된 도시이다. 이곳은 당시 루가오니아(Lycaonia)의 수도였
으며 로마로부터 자유로운 도시였으나 하드리안(Hadrian) 황제에 의해 식민지화되었
다. 현재의 터키의 중요한 상업도시로 '코냐'(Konya)라 불리어진다. 이곳에도 역시
비시디아 안디옥처럼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회당을 중심으로하여 신앙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마찬가지로 안식일
의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회당에 들어갔을 것이다. 여기서는 어떻게 설교를 하게 되
었는지 언급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아마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문화적 배
려라고 볼 수 있다.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 이 문장 역시 안디옥에서와 같이 이고니온
에서도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별없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4:2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 - 이 말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받아
들이지 않는, 즉 불신앙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유대인이 바울과 바나
바의 반대자로 언급된 것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동일하다
(13:45 주석 참조).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
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집단적인 공격 형태의 움직임까지 나타내고 있
다.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 여기서 언급된 '형제들'(* , 아델
폰)은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말로서 바울의 설교에서는 '형제들'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
다. 여기서의 '형제들'은 1절에서 언급한 '허다한 무리'에 속한 유대인과 이방인 개
종자를 가리키며 누가가 본서에서 즐겨 사용하는 '제자'(6:1,2,7;9:1,10,19,25,26,38;
11:26,29;13:52;15:10;16:1)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 개역성경에서는 명확하게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
서는 이 문장은 접속사 '멘 운'(* , '뜻')과 함께 시작되어 앞에 진술된
내용과 본절 이후의 진술이 서로 인과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말을 '그
래서'로 번역하여 인과 관계를 분명히 해주는 편이 좋다. 그런데 이 인과 관계가 서
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학자나 번역본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1)'개종
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반대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두 사도는
오래 남아 있었다'(Knowling). (2)'주께서 그들에게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행하게 하
셔서 하나님의 은총에 관하여 그들이 전하는 말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 그
래서 두 사도는 계속 남아 대담하게 말씀을 전했다'(공동번역). 그런데 접속사 '멘
운'이 본절 초두에 나와서 2절과 본절을 인과절로 접속시키고 있다. 따라서 두 사도
가 이고니온에 오래 머문 직접적인 이유는 유대인들의 선동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대
부분의 영역 성경은 이와같은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 NIV, MB).
표적과 기사 - 복음서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언급된 곳은 마24:24와 요4:48 두 곳
뿐이나 본서에서는 본절 외에도 2:22,43;4:30;5:12;6:8;8:13 등 수 차례 언급되었다.
이는 누가가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 그 두 단어를 함께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14: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 이고니온 성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두 부류 즉 바울과
바나바를 추종하는 무리와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해 바울 일행에 악감을 품은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것은 곧 논쟁의 출발이며 바울 일행이 겪는 박해의 시작이다.
당시 헬라계 성읍에서 이와같은 파벌적 대립과 분열 그리고 그에 따른 논쟁은 흔히 있
었던 일이었으므로(Alford)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두 사도 - 이는 바울과 바나바를 지칭하는 말로서 본서에 12명의 제자가 아닌 예수
추종자에게 사도라는 명칭이 처음 붙여지게 된다. 물론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계속하
여 자신의 사도됨을 강조한 적이 있다(롬1:1;고전1:1;9:1;15:9;고후1:1;갈1:1;딤전
1:1;딤후1:1). 그런데 본서의 저자 누가가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도의 칭호를 적용시
켰다는 사실은 당시 바울과 바나바의 지위가 사도로서 인정받았을 수 있었다는 점과
사도라는 말이 예수를 직접 수행한 12명의 제자 이외의 사람에게도 폭넓게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갈1:19).

=====14:5
그 관원들이 -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는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로 그 지역
을 통치하는 지도자들(공동번역)이다. 다시 말해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박해가 단순
히 회당 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한 박해만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 지도자들까지
가담하여 조직적이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공격적 박해임을 말해주고 있다.
능욕하며 - 무례하고 모욕적인 언사(言辭)를 나타내는 '휘브리사이'(* )
는 앙심을 갖고 조롱하고 학대하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공동번역). 이것은 육체적
으로 상해를 입히는 폭력행위라기보다는 경멸하는 어투와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괴롭
히는 것을 나타낸다.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 그들의 능욕 행위는 투석을 통한 폭력행위로 발전하였다.
본래 돌로 사람을 쳐죽이는 처형법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형 집행 방법이었다. 이
는 처형당하는 죄인에 대한 저주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미 이와 같은 투석 행위는
스데반에게도 있었던 일이다(7:58). 스데반을 향해 유대인들이 돌을 던질 때 그 일에
가담했던 바울이 스데반과 똑같은 폭력을 당하게 될 위기에 직면한 것은 9:16의 예언
이 그에게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묘사는 당시의 전도자가 필연적으로
져야 할 공통적인 십자가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런데 돌을 던지려는 행위가 실제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이 상황 묘사는 박해자들이 돌을 던질 만큼 험악한 분위기에 다
달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돌로 쳐 죽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라고 번
역하여 생동감있게 표현하였다.

=====14: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 여기서 '도망하여'는 헬라어로 '카타퓨고'(* )
이며 뜻은 '도망하다' 외에 '피난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같은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단순히 폭력을 두려워해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박해자들과 무리한 충
돌을 피하기 위해 다른곳으로 옮겨갔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도망했다는 표현보다는
피하였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루가오니아 - 루아오니아(Lycaonia)는 소아시아의 중남부 지방으로 북쪽으로는 갈
라디아가 있고, 동쪽에는 가바도기아, 서쪽에는 브루기아 비시디아가 인접하여 있다.
이 지역은 마게도냐에 정복된 적이 있으므로 코이네 헬라어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
다.
후스드라 - 루스드라(Lystra0는 루가오니아의 중남부 지방에 위치한 성으로서 이고
니온 성에서 약 38km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소수의 로마군이 지배하고 있는 전
원 도시였다. 이곳은 해상을 통한 무역을 할 수 없었으므로 그곳 주민은 주로 농사와
목축에 의존했다. 약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으나 회당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Robertson). 이곳에서 디모데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가 살았고(16:2,3;딤후1:5) 바울
일행은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 같다.
더베 - 이곳은 루스드라에서 동남쪽으로 약 3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길리기아와
인접한 곳으로 로마의 글라우디우스 황제의 이름을 따 글라우디우스 티베라 불리기도
한다. 바울은 이곳에서 1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 짓고 안디옥으로 되돌아 가지만 그
후 제2차 전도 여행 때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16:1). 특히 이곳은 아시아까지
바울과 동행한 가이오의 출신지로 알려져 있다(20:4).

=====14: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 이 말은 6절에서 도망했다는 진술이 반대자들을 두려워
해서 숨어버린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과의 충돌을 피해 활동 무대를 옮겨간 것임을 나
타내고 있다. 즉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이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
하는 일에만 전심 전력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로버트슨(Robertson)은 바울
과 바나바가 이곳 언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안디옥이나 이고니온에서 온 사람들의 도
움을 받아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렌스키(Lenski)는 어디서나 헬
라어가 통용되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 지역은 팔레스틴 지역
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점령된 적이 있었으므로 헬라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는 이 지역에서 코이네(Koine) 헬라어가 통용되었을 가능성이 큼을 암시한
다. 따라서 렌스키의 의견이 설득력 있다고 볼 수 있다(11절 주석 참조).

=====14:8
나면서 앉은뱅이 - 이 환자는 발이 있으나 무기력하여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있
었다. 저자는 이러한 상태가 태어나면서부터 있었다고 보충 설명을 하여 그의 질병이
치유 불가능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 이야기는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성전 미문(美
門) 앞에서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 이야기와 비슷하다(3:2). 아마도 누가는 앉은뱅이
를 고친 두 사건에 중요한 의미를 둔 것 같다. (1)베드로처럼 바울도 앉은뱅이를 고
침으로써 동등한 사도권이 바울에게도 인정됨을 암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2)베드로
는 유대인을, 바울은 이방인을 치료한 사실을 대비시킴으로써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바울을 부각시키고 있는 듯하다.

=====14:9
구원받을 만한 믿음 - 이 표현은 앉은뱅이 환자가 바울의 설교에 귀기울이고 있었
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울은 이러한 그를 눈여겨 보았기에 그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병고침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으
로 '믿음'이 언급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병고침의 전제는 주로 환자의 믿
음과 관계된 것으로 묘사되었다(3:16;막9:21-29;눅5:20;7:50;8:48;18:42). 여기서 언
급된 '구원받을'(* , 소조)이라는 말은 '구원하다'란 의미 외에 '온전하게 하
다' 또는 '건강하게 하다'의 뜻도 지닌다.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앉은뱅이의 무기력한
발이 완전하게 되어 건강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의 표현을 앉은뱅
이의 영적 구원과 반드시 연결지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믿음'이란 말도 바울 신학
의 핵심 주제로서의 '믿음'과 동일시할 필요가 없다(롬1:8-17 주제 강해 '이신 득의의
이해'). 한편 본 치유사건은 3:2-6에서 언급되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와 내용상 다
르게 언급된다. 즉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는 단순히 무엇을 얻을까 하는 구결인으로
묘사된 반면 본문에서는 앉은뱅이의 마음 속에 치료받을만한 믿음이 있다고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는 저자인 누가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는 듯하다. 즉 그는 이방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치병 기적을 언급함으로써 이방인에
게도 구원받을 자격이 있음을 나타내며 또한 바울의 이방 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선포
하고자 의도했을 것이다.

=====14:10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 여기서 바울이 큰 소리로 외쳐 말한 것은 아마 환자에게
믿음을 북돋우고 확신을 주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그런데 이는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앉은뱅이에게 한 말과 차이점이 있다. 즉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명
령하였으나 바울은 예수처럼(막3:5) 자신이 직접 명령했다. 이에대해 C와 D사본은 바
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 말을 첨가시켰지만 대부분의 사본은 그 구절을 첨가하
지 않았다.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 이 묘사는 3장에서 언급된 미문의 앉은뱅이가 구원받은
묘사와 비슷하다. 즉 걸을 뿐만 아니라 뛰기도 했다는 이 표현은 구원 곧 치유가 바
울의 소리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앉은뱅이가
차츰차츰 걷게 되었다든가 다소 불편한 걸음이 아니라 완전히 회복된 정상적인 모습을
갖추었다는 강조적 표현이다.

=====14:11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 본구절은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는 현장을
목격한 루가오니아 사람들이 놀라와하며 흥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은 흥
분하여 격앙된 목소리로 기적의 현장을 떠들석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하였다는 표현은 이제까지 루가오니아 말로 하지 않고 다른말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네일(W.Neil)에 따르면 소아시아의 다른 성읍들과 마찬가지로
루스드라는 평상시 3개의 언어가 통용되었다고 한다. (1)라틴어:루스드라는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라틴어가 공식적인 언어였다. (2)헬라어:로마의 상용어(Lingue
franca)로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었다. (3)모국어:이는
성읍 사람들끼리의 통상적인 의사 소통 수단이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이 언어
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Haenchen, Bruce). 바울이 설교하는 동안 헬라어가 사
용되었을 것이나 그들이 흥분한 나머지 자기들의 언어인 루가오니아말로 소리쳐 말하
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는 믿음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이는 헬라의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들과 동일
한 생활을 하며 사고방식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교리는 헬라 문화권에 결코 생소
한 것이 아니었다.

=====14:12
쓰스...허메 - '쓰스'는 헬라어로 '제우스'(* )인데 본 구절에서는 여격
(* , 디아)이 언급되어 있다. '제우스'는 헬라 신화에서 모든 신들의 우두머리
로 묘사되어 있으며 '허메'는 제우스의 대변자로서 언어를 지배하는 신으로 묘사되어
있다(Jamblichus). 아마 바나바는 당당한 체구와 존경받을 만한 위용(威容)을 지닌
사람(Chrysostom, Zahn)이었기에 '제우스'로 불리었을 것이며, 바울은 앉은뱅이에게
말을 하였다는 점에서 언어를 지배하는 신인 허메로 불리어졌을 것이다. 한편 루스드
라에 사는 사람들이 헬라 신화 속에 나오는 신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이해한 것은 앉은
뱅이를 고친 사건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적인 사건이었는지를 암시해준다.

=====14:13
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 - 일반적으로 헬라 지역 내의 도시들은 신전을 중심으로
방사선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루스드라의 쓰스 신당과 같이 헬라 지역 이외
의 신전들은 성 밖에 세워졌던 것 같다. 그리고 뷔켄하우저(Wikenhauser)에 따르면
신전이 성 밖에 있었던 것은 그렇게 드물지 않았다고 전한다. 한편 신당과 제사장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종교적인 제사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 지역은
본래 헬라 문화권 밖에 있었으나 알렉산더에 의해 소아시아 지방이 헬라화될 때 헬라
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이때 헬라의 다신교가 이곳에 전해져 정착된 것 같다.
소와 화관 - 이는 제사장이 예배하기 위해 가져온 제물이다. '소'로 번역된 헬라
어 '타우로스'(* )는 엄격한 의미에서 황소를 뜻한다. 그리고 화관은 꽃
다발(harland, RSV)을 뜻한다. 당시 제우스와 머큐리 신에게는 황소를 제물로 바쳐
제사하며 화환을 함께 올려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obertson).
대문 앞 - 바울의 설교가 행해졌고 앉은뱅이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신당의
제사장이 달려온 이 장소는 대문 앞이라고만 언급되어 있으므로 정확한 위치와 장소를
알 수 없다. 성 밖에 있는 신당의 대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Ramsay, Bruce) 문맥상
바울의 설교가 성 안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오히려 성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즉 성 안의 자신들이 머물렸던 집 대문이라든가 아니
면 어떤 큰 집 대문을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Alford, Lumby). 그러나 대중 설교를
할 수 있는 대문이라면 가정 집이라기보다는 대중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성문 앞으로
생각할 수 있다(Hervey, Blass). 당시 이곳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구걸도 하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거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과 새 번역도 '성문 앞'이
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된 대문 앞은 성문 앞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14:14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 옷을 찢는 행위는 참을 수 없는 울분과 비
통한 심정이나 절망과 증오를 위한 것으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습관이었다(창
37:29,34;수7:6;삼하13:19;왕하18:37;19:1;마26:65). 그리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는 묘사는 옷을 찢는 행위를 통해 보여준 바울과 바나바의 단호한 의지를 더욱 강조하
고 있다. 즉 그들은 루스드라 주민들의 그같은 행위를 절대 용납할 수 없음을 단호하
게 보여준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는 처음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말할 때
는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다가(11절 주석 참조) 제사를 준비하게 되자 그 내용을 알아
차리고 당황하여 다급한 심정으로 이 같은 행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14:15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라 -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서 제사를 받을 수 있는 존재
가 아님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성정(性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호모이오파데
이스'(* )로 동일한 본성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의 몸을 취했
으나 인간과 본성이 다른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 헛된 일 - 헛된 일은 제우스 신에게 제사하는 행위 또는 사람을 신으로 알고 경
배하는 행위를 말한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두고 그렇
게 말한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곧 루스드라인들에게 신관(神觀)에 대한 새로운 대
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14:16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삶을 살아가는 가치관
이나 종교적 진리, 세계관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지
금까지 각 이방 나라의 관습과 종교생활 등에 대해 책망하시거나 벌하시지 않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14:17
그러나 - 이말의 헬라어 '카이토이게'(* )는 '그렇다해도', '그러
면서도'(공동번역)를 의미하는 복합 접속사이다. 이 접속사는 앞 문장과 뒷 문장을
반대적 의미로 연결한다기보다는 앞의 진술과 관련이 있으면서 또 다른 내용의 진술로
전환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 각 민족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종교, 가치
관, 세계관을 갖고 살아왔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고 자연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각 민족들에게 계시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15절에서 언급
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께서 자연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셨으므로 자연을 통해서 사람
은 누구나 하나님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자연 계시에 대한 진술이다. 바울은
17:24-29과 로마서 1:19,20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설교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민
족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열려 있었다는 말이 된다.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 이 말은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하게 주어졌으며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것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 주는 것이다. 즉 모든 민족을 하나님은 공평히
사랑해 왔음을 말하는 일반 은총에 대한 진술이다.

=====14:18
겨우 무리를 말려 -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잘못
된 열심을 꺾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음을 '겨우'라는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다.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활동을 시기하며
비방했던 안디옥 유대인들(13:14 주석참조)과,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로 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이고니온에 사는 유대인들(2,5절)이 루스드라까지 쫓아와서
박해를 가하였음을 진술한다.
무리를 초인(招引)하여 - '초인하여'의 헬라어 '페이산테스'(* )
는 '설득하다'(공동번역)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여기서는 '선동하다'란 의미를 더 강하
게 나타낸다. 그들이 루스드라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선동했는지 본문에는 전혀 언
급되지 않았으나 짐작건대 그 두 사람이 마술과 같은 속임수로 루스드라 사람들의 종
교를 파괴하려 한다고 선동했을 것이다. 실제로 본서 19장에서 은장색(銀匠色) 데메
드리오가 에베소 지방의 사람들을 선동할 때도 바울이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를 무시
하고 그 종교를 폐하려 한다고 소리쳤다(19:26,27).
돌로 바울을 쳐서 - 본절에서 돌에 맞은 사람이 바울 한사람으로 언급되고 있다.
왜 바울만 폭력을 당하고 바나바는 언급이 없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
만 바울이 말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12절) 표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여기서 돌로 친 주체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맥상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
인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미 이고니온에서 음모가(5절) 루스드라에서 성공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면서 누가는 그들의 핍박이 매우 집요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
건을 바울은 고후 11:25에서 회상하며 언급하고 있다.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 이 표현으로 보아 바울을 돌로 친 현장이 성 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13절에서 언급된 장소, 즉 앉은뱅이를 고치고 설교하던 곳에서(13절 주
석 참조) 폭행을 당한 듯하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일 때는 성 밖으로 스데반을 끌어
낸 다음 돌로 쳤으나(7:58) 바울은 성 안에서 돌에 맞은 후 밖으로 끌어내졌다는 점에
서 두 사건은 서로 대조된다. 이는 바울을 쳐죽이려 하는 무리들이 절차를 무시할 정
도로 격분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그들의 박해가 스데반보다
더 잔인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누가는 이 사실을 부각시켜 스데반
의 박해자가 스데반과 똑같은 방식으로, 더 나아가 훨씬 더 잔인하게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4: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 19절에서 바울이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어 성 밖으로 내다
버려졌던 사실이 언급되었듯이 바울은 죽음에 이를 만큼 깊은 상처를 입고 고통의 신
음을 하고 있었을 자리에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누가는 그 일
의 증인들로서 제자들을 언급했다. 이 제자들이 쓰러진 바울을 중심으로 둘러섰던 것
은 바울의 상태를 알아보고 죽었으면 장례 절차를 집행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Robertson, Bengel).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쓰러진 바울에게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
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누가는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
에 의해 건강하게 일어선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그의 주위에
둘러서서 어떤 행위를 취하기 전에 바울이 일어났음을 암시한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더베 - 루스드라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 여행의 마
지막 지점인 더베(Derbe)로 오게 된다. 이곳에 대해서는 6절 주석을 참조하라.

=====14:21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 이곳 더베에서는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처럼 박해를
받았다는 언급이 없으며 설교의 내용이나 기적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고 간략
하게 이 곳에서의 활동만이 서술되어 있다. 아마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 없었거나 순
조롭게 전도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루스드라에까지 쫓아와서 바울을 돌
로 쳤던 유대인들은 그가 죽은 줄 알았으므로(19절)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유대인이 거주하던 더베에서는 박해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바
울의 1차 전도여행을 마감하면서 저자는 많은 제자를 얻었다는 성공적인 성과를 언급
함으로써 바울의 선교 전체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뿐
만 아니라 간결한 어투와 함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그리고 안디옥으로 돌아갔다는 짤
막한 언급은 그곳에서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결실을
맺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바울의 믿음을 암시한 듯하다. 이는 초기 기독교 공동
체에 대한 바울의 깊은 애정과 세심한 배려를 보여준다.

=====14:22
마음을 굳게 하여 -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에피스테리조'(* )
는 '힘있게 해준다', '튼튼하게 만든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바울이 방문한 곳에
서 개종자들을 격려하며(공동번역) 믿음 위에 굳게 서게 하였다는 말이다.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 이같은 바울 일행의 권면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잘 반영해 준다. 즉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고통과 박해를 겪는 것으
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이것은 초기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
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하는 것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모
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실존(實存)에 해당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
울의 이 말은 당시 바울 및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당했던 박해와 수난들에 신학적 의
미를 부여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받는 모든 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14:23
각 교회에서 - 바나바와 바울이 전도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에 신앙 공동체
가 성립되었음을 명시해 주고 있다.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기들을 따르는 제자
들을 계속 배출했으며(4,20,21절)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방지역에서 견고한 조직체를
만들어 갓다.
장로들을 택하여 - 집단적인 공동체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활동적으로 이끌기 위
한 지도자로 장로를 택하게 되었는데 이미 11:30에서 장로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
러나 장로를 택하여 세웠다는 언급은 여기서 처음 나온다. 장로(elder, NIV)는 감독
자라는 직분으로 언급되기도 하며(20:28) 다스리며(롬12:8;살전5:12) 수고하는 자(고
전16:16)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만으로 당시 장로들의 정확한 직분
을 규명하기 곤란하다. 단순한 교회의 봉사직으로서 설교할 권한은 부여되지 않았다
는 주장(Zahn)도 있으나 오늘날의 목회자와 같은 기능을 하며 성도들을 돌보는 자로서
언급된 점으로 보아(딛1:5;약5:14) 사실상 목회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자세
한 내용은 6:1-7의 주제 강해 '교회의 직분'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서 장로를 어떠
한 방법으로 택했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예루살렘이나 기존 교회들로부터
파송된 사람이 장로의 직분을 맡았는지 아니면 각 지역 자치 내에서 믿음이 충만한 자
를 택하여 그 일을 맡겼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이나 안디
옥 등과 같이 기존의 교회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장로를 세운 점으로 보아 각 지역
자체 내에서 장로들을 선출하여 임명한 것 같다.
금식 기도하며...주께 부탁하고 -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세우면서 금식하고 기
도하며 지도자들을 주께 부탁한 것은 선출된 자들에게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직분의 거
룩성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바울이 사도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음을 암
시하고 있다. 즉 누가는 하나님과 교회 지도자를 중재(仲載)하는 바울의 역할을 보여
줌으로써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암시적으로 내세웠다.

=====14:24
비시디아...밤빌리아 -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음을 간략하게 언급함으로써 빠르
게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이들 지역에 대해서는 13:13,14 주석을 참조하라.

=====14:25
앗달리아 - 바울 일행은 버가(13:13)를 거쳐 앗달리아(Attalia)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하게 된다. 왜 방향을 바꾸어 앗달리아로 갔는지 그 이유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
만 버가에서도 복음을 전한 점으로 보아 귀환 길에도 쉬임없이 전도활동을 계속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전도의 목적을 갖고 앗달리아로 갔을 것이다. 앗달
리아는 항구도시(port city)로서 버가의 서남쪽 약 26km에 위치해 있는데 이 항구도시
는 B.C.159-138에 버가몬의 왕으로 지냈던 아탈루스(Attalus II) 왕이 건설한 것이다
(Jacquier). 지금은 아달라(Adala)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도
시를 찾은 것은 소아시아의 남단에서 이 도시가 가장 큰 항구도시로 인구가 많아 전도
전략상 중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14:26
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 앗달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또한 전도 여행시 처음 찾은 곳인 구브로(Cyprus)섬(13:4-12)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
로 안디옥으로 직행한 이유도 밝히지 않고 있다. 이는 앗달리아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의 선교 사역과 비교해 볼 때 뚜렷한 성과나 특별한 일이 없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 - 여기서 누가는 바울 일행이 구브로를 거쳐 비시디
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등에서 성공적 결과를 거둔 전도 활동이 안디옥 교회에서
출발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부탁하다'라는 말은 23절에서 언급된 '파라티
데미'(* )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 '파라디도미'(* )
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는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전도자로 임명하여 파송
한 사실을 다시 확인시키는 것이다(13:1-3 주석 참조).

=====14:27
교회를 모아 - 그들이 돌아와 교회를 모았다는 것은 교회 신도들을(공동번역) 불러
모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모임이라는 주장은(Fern-
ux) 자연스럽지 못하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의 귀환은 안디옥 교회의 큰 경사로 받아
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온 교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교 보고회를 열었던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 - 본절에서 누가는 이방인의 개종 사실이 하나
님의 역사하심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밝힘으로써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시작된 이방인
에 대한 선교(宣敎) 활동이 하나님에 의한 일임을 밝혀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물론 베드로나(9:32;11:18) 빌립보에 의해서도(8:4-13)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이루
어졌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것처럼 본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특히 이방 선교를
위해 안디옥 교회가 직접 나서서 이방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점에서 큰 의의를 지
니고 있다.

=====14:28
오래 있으니라 - 이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
았음을 의미한다. 이미 누가는 9:43과 10:48에서도 베드로가 한 곳에 오래 유(留)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베드로의 선교 활동이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해 준 바 있
다. 여기서도 역시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활동에 대해 안디옥 교회가 열렬히 찬사를
보내고 환영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오래 머물렀다는 말은 긴 휴식을 취했다는
의미로 선교 활동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한 간접적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제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바울은 여기서 예루살렘
으로 올라가기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상당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 기간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약 1년 안팎으로 본다(Levin, Alford, Lenski). 이렇게
함으로써 안디옥은 이방 선교를 위한 중심 교회로서 그 자리를 굳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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