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제 3장
=====3:1
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데테'(* )는 감탄사의 역할을 하는
명령형으로 복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 복수 형태는 가시적인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
되는 어법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음을 암시한다(Smalley, Westcott).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
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 '어떠한'의 헬라어 '포타펜'(* )은 신약
성경에서 대개 놀라움이나 경탄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마8:27; 막13:1; 벧후3:11),
본문에서는 '어떠한 정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에게 베풀어 주
신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의미한다(Brooke). 한편 '자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나'(* )는 실제적인 부자 관계에서의 자녀됨을 강하게 함축하는 단어
이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주로 '휘오스'(* , '아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 이것은 법적인 부자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이다(Plummer, Wilder).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써 값없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우신 사랑인가를 선포하고 있다(Calvin). 요한은 '우리가 그러하도다'를 부가하여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
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 '그러므로'에 해당
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 )는 문법적인 연결이 명백하지 않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혹자는 '디아 투토'가 뒷부분의 내용과 연결되어 '호티'(*
, '왜냐하면')이하의 절을 설명하는 것으로 본다(Smalley, Stott). (2)혹자는
'디아 투토'가 앞부분의 내용과 연결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보고, '호티' 다음에 따라오는 절은 부가적 기능만을
한다고 주장한다(Haas, Marshall). 어느 견해를 취해도 의미상 큰 변화는 없으나 문맥
상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를 모르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단순히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강조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가 누구
를 지칭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다(Haas). (2)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ultmann, Stott). (3)혹
자는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Briike). 본문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지만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
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1:3; 2:1,24). 요한은 세상이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라고 진술하고 있다. 사실 '세상에 속한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에 속한 자요
어두움에 거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한 자이다. 따라서 그들
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알 수가 없다.
=====3:2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
나. - 본문은 '지금...아직'이라는 종말론적 긴장 관계(eschatological tension)에 놓
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나타낸다.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을 알
아보든 못 알아보든 간에, 혹은 그리스도인의 현재 모습이 육체의 소욕(所慾)을 완전
히 벗어나지 못했을지라도 분명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다(Calvin, Stott).
신자의 미래에 대해서는 구원의 영광이 약속되었다. 그러나 비록 현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특권과 하나님의 성품을 누리며 미래에 주어질 구원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장차 되어질 그리스도인의 미래 상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계시 되지 않았
기에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야 신자는 장래에 자기 자신에게
일어날 구체적인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이다(Stott).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안 파네로데'(*
)에는 주어가 없어서 이를 해석하는데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
자는 '그'를 바로 앞 문장의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을 가리키는 비인격적 주어로 보면
서 바로 뒷 문장에 나타난 '그'는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Plummer, Bengel). (2)혹자는 '그'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Stott,
Barker, Bru- ce, Smalley). (1)의 견해는 두 가지 점에서 부당하다. 첫째로, 앞서 언
급한 바와 같이(1절) 본서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명백히 구분짓지 않고 있
음을 간과하였으며 둘째로, 이어지는 본문의 논의가 하나님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쪽으
로 발전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Smalley). 그러므로 본문에 사용
된 '그'는 후자의 견해와 같이 전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
다. 한편 우리가 주와 같을 줄 아는 것이 주의 계신 그대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그날에 '우리가 새사람을 입고'(엡4:24) '주와 같은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하게
되어서'(빌3:21) 주와 같이 됨을 의미한다(Stott).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 '소망'의 헬라어 '엘피다'(* )
는 바울 서신이나 베드로 서신에는 빈번하게 나타나지만(롬5:4; 8:24; 고후1:7; 벧전
1:3) 요한 복음이나 요한 서신 중에서는 본문에서 단 한 번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
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이루리라는 확신에 찬 기대'라는 소망의 개념은 2절에서 명백히 설명되고 있다
(Smalley). 따라서 '이 소망'은 2절에 나타난 장래의 일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리킨다(Barker).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요한은 처음으로 예수의 특징
을 '깨끗하심'으로 묘사하고 있다. '깨끗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그노스'(*
)는 '디카이오스'(* , '의로운')와 거의 같은 의미로 그리스도
의 정결하심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힘써 따라야 할 본보기임을 시사한다(2:1,29;3:7,
Smalley). 한편 '깨끗하게 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하그니제이'(* )
는 '하그노스'(* , '깨끗하심')와 같은 어원을 갖는 동사로 제의적 정결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출19:10,11; 민8:21; 요11:55; 행21:24). 그러나 본문에서는 시
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성품으로서 도덕적인 깨끗함을 의미한다(Law, Stott,
Smalley, Barker).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진 자는 주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하여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마5:48).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 본문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여 자신들은 죄가 없으며 불법을 행하
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요한은 죄를 짓는 사람은 모두가 예외없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영지주의의 거짓 가르침을 배격하고 있다.
죄는 불법이라. - 여기서 '불법'(* , 아노미안)은 문자적으로 '율
법을 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이 '율법'(* , 노모스)이란 용어
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불법'은 율법을 범한다는 의미라
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려는 인간의 본성적인 불법을 의미한다(Barker). 요
한은 자기 자신들이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실상 하나
님을 배반하는 무서운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 '죄'에 해당하
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 )는 복수형이다. 이는 죄악된 모든 행
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Smalley, Stott). 한편 '나타내신'의 헬라어 '에파네로데'(*
)는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것은 과거의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나
타내는 것으로 예수의 성육신이 역사적 사건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이러한 역사적인 실
재 사건을 기반으로 해서 예수의 '죄를 없애는 사역'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으며(요1:29), 모든 죄
를 친히 자기 몸에 짊어지심으로써 우리 죄를 없이 하셨다(사53:11,12; 히9:28; 벧전
2:24, Stott).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죄가 없다'는 말씀은 3절의 '깨끗하심'과 2:29; 3:7의
'의로우심'과 동일한 의미이다. 예수의 무죄성은 초대 교회의 케리그마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신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고후5:21; 히4:15; 벧전1:19). 한편 본문
에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에스틴'(* , '~이다')으로 현재형이다. 이것
은 예수께서 지상 사역 기간 동안만 죄로부터 자유로우셨던 것이 아니라 영원히 무죄
하심을 암시한다(Smalley).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
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 본문은 1:8,10의 진술과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이에
대해 네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주 안에 거하는 자의 인격에 주목하여 그리스도
인은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하는 것으로 해석한다(Wesley). (2)혹자는 요한
이 신자의 삶의 원리를 선포한 것으로 보고 '범죄치 아니함'을 신자의 이상적 특징으
로 해석한다(Alford, Calvin). (3)혹자는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Lange, Smith, Barker, Westcott, Stott). (4)혹자는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원리상 이미 범죄하지 않는 자이지만 실제상 아직 범죄하는 자라고 본다.
즉 그리스도인이 현재 긴장과 역설의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Smalley, Schn-
a ckenburg).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세 번째 견해의 경우 '범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타네이'(*
)는 현재형으로서 동작의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상태를 묘사해 주기 때문이며, 네
번째 견해의 경우 루터(Luther)가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말한 것
과 마찬가지로 주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치 아니하는 동시에 범죄한다고 이해할 수 있
기 때문이다(Smalley). 앞 절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죄와 상관
없는 깨끗한 분이시기에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와 상관없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
다. 만약 죄를 범한다면 그는 회개함을 용서함을 받고 불법의 생활을 버려야 한다. 그
러나 그가 지속적이며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죄를 좋아하며 죄 안에 거하길
즐겨한다면 그는 완전히 깨끗하신 그리스도를 알거나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알지도, 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요5:37,38; 8:19; 14:7,9; 요삼1:11,
Stott, Barker).
=====3: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 본문은 수신자 내에 있던 영지주
의를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요한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하나
니의 비밀스런 지식, 즉 영지(靈智)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이
라고 주장하였으며 영지를 깨달은 자는 육신에서 자유로워져 도덕적인 방종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신학과 윤리의 가르침은 요한
당시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시켰다. 그래서 요한은 사도들이 전하여 준 복음 이
외의 것을 가지고 미혹하는 자들을 멀리하며, 거절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 본문은 2:29의 반복이다. 여기
서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의로움의 동기와 근거를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가능함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문은 의를 행함이 조건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
게 된 자로서 그의 의로움을 행위로 보여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Bruce).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 본문은 7절
하반절과 정반대되는 내용으로서 대조를 이룬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다. 반면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다. 요한은 이러한 대조법을 사용하여서 수신
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누구에게 속하느냐'란 질문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동시에
영지주의자들이 방종을 통해 범죄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누구에게 속하였는가를 분별
할 수 있도록 한다. 한편 요한은 본문에서 마귀의 기원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주
지 않으며, 단지 죄의 기원이 마귀에게 있다는 사실만을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을 암시하는 듯하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하는 자로서 진리
가 그 안에 전혀 없기에(요8:44) 속이는 자이며 사람들로 범죄하게 한다. 이러한 죄의
기원에 대해 바울이 아담에게까지 소급시킨 것과 달리(롬5:12-19), 요한은 그보다 더
욱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Westcott).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 '마귀의 일'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들을 미혹시켜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창3:1-6). 이러한
마귀의 일을 파괴하고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그르스도께
서 세상에 오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죄인을 어둠에서 구하셔서 하나
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5절; 히9:28; 벧전2:24). 요컨대 그리스도의 오심
은 우리의 죄를 없애고 동시에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인 것이다(Plummer).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본절은 6절의 반복이다. 요한은
1:8,10에서 믿는 자들이 죄를 지을 가능성을 언급하였으나 본절에서는 믿는 자들이 범
죄치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절은 6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습관적으로
마귀와 같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하여는 본문이 수신자들 사이에 있
던 영지주의자들을 향한 경고인을 전제로 할 때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요한 당시의 영
지주의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영지를 깨달은 자는 육신에서 벗어나 완전
한 자가 되었으므로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죄가 영지를 깨
달은 자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으므로 범죄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는 부류이다. 요한은 전자의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범죄함을 역설하였고
(1:8,10), 후자의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신자들은 범죄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역설
하고 있다(6절).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
라. - '하나님의 씨'에 대한 견해는 다섯 가지이다. (1)혹자는 신적인 생명의 원리라
고 주장한다(Smith, Marshall). (2)혹자는 집합적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ohlenberg, Stott). (3)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Oecumenius, Theophylactus). (4)혹자는 말씀 또는 복음이라고 주장한다(Augustine,
Dodd). (5)혹자는 성령이라고 주장한다(Calvin). 다섯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Smalley).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말씀이 심기워 있음(시119:11; 렘
31:33)과 성령께서 내주하심(롬8:11; 고전3:16)은 동시적이고 불가분리적이다. '하나
님의 씨' 즉 말씀과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거할 때 그 그리스도인은 범죄하
지 않게 된다.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시며 모든 인간들을 낳으신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인간
들의 아버지가 아니다. 마귀의 자녀들도 있다(요8:44).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들
과 마귀의 자녀들이 섞여서 살고 있다(마13:24-30). 자녀들이 부모를 닮아 가듯이 하
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닮고, 마귀의 자녀들은 마귀를 닮는다(Stott, Bruce).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
하지 아니하니라. - 저자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마귀의 자녀인가를 판별하는 시금석으
로 '의와 사랑'을 제시한다. 의와 사랑이 없는 자는 자기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스
스로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드러낸다.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
에서든 아니면 타인과의 관계에서든간에 '온전함'을 의미하며 '사랑'은 타인에 대한
의로움을 뜻한다(Westcott, Plummer). 이러한 '의와 사랑'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깊
은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닮아야 할 하나님의 본성이다.
=====3: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 '사랑할지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
)은 현재형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
한다(Smalley).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 '처음부터'는 문맥상 요한의 수신자들이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를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은 틀림없이 복음의 본질이 사랑이며
(요3:16; 15:12; 눅10:27; 고후13:13) 사랑이 태초의 창조 원리에까지 미친다는 사실
(요17:24; 요일4:16)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한편 '소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
리아'(* )는 1:5와 동일한 단어이다. 1:5에서의 '소식'은 교리적 내용
을 담고 있어 하나님이 빛이심을 드러내는 반면 본절에서의 '소식'은 윤리적 내용을
담고 있다(Stott). 그 윤리적인 내용은 '복음의 본질인 동시에 근원적인 요구인 사랑
의 실천을 권면하는 것'이다.
=====3: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 저자는 8절과
10절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마귀의 자녀의 모델로 가인을 제시한다. 요한이 가인을 악
한 자에게 속한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로 가인은 동생 아벧의 의로움을 시기하여 죽임으로 자기 자신이 마귀에게 속하였음을
스스로 입증하였다(Burce). 둘재로, 요한 당시의 한 이단 종파인 에비온주의자들은 채
식주의자들이었다. 요한은 그들에게 고기를 드린 아벧은 열납되고 농산물을 드린 가인
은 거부되는 사건을 제시함으로써, 율법적인 채식주의보다는 사랑의 계명에의 순종이
우선임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Smalley).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 창
4장에 기록된 사건에서는 가인의 살인 동기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기
록된 가인에 대한 언급(히11:4; 유1:11)을 통하여 추론해보면, 가인은 믿음과 순종과
형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요한은
다른 어느 성경보다도 분명한 살인의 동기를 제시한다. 그 동기는 동생 아벧의 의로움
에 대한 시기이다.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물질적 축복이나 안녕보다는
의로움 자체를 더욱 시기하고 증오한다(Stott). 이런 의미에서 가인은 자신의 살인 행
위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 전후 문맥상 세상과 하
나님의 자녀와의 관계는 가인과 아벧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Law).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대립은 아벧-가인, 이삭-이스마엘, 야곱-에서를 통하여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
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요한은 '미워하거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세이'(*
)를 현재 시상으로 사용함으로 암시하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롭다는
사실만으로 미워하므로(12절) 양자간의 대립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세상의
증오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이김에 기초하여 넉넉히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요16:33; 요일4:4; 5:4, Bruce).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 본문
에서 요한은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서 형제 사랑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 생명으로 들어간 자의 증거로서 형제 사랑을 논하고 있다. 사랑은 율법의 대강령
이요(마22:34-40),율법의 완성이요(롬13:10),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최고 표현이
다(요13:35; 고전13:13). 그러므로 비록 세상이 영생의 근거는 아닐지라도 형제 사랑
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Calvin, Bruce).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 '사랑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폰'
(* )에는 목적어가 없다. 이 사실로 인해서 본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
하다. 하나는 '형제'를 목적어로 보아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로 해석하는 것이
다(Stott). 다른 하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다(Plummer, Smalley).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제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6절; 2:2). 한편 '거하느니라'의 헬라어 '메네이'(* )는 현재형
으로 사랑치 아니하는 자의 영적 죽음의 상태가 지속됨을 암시한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랑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과거 상태처럼 지속적으로 죽음과 진노하에 있는
상태이기에(엡2:2) 사망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사망에 거하고 있는 상태이
다.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자니. - 요한은 '사랑하지 않음'의 개념에서
'미워함'의 개념으로 발전시켜 진술하고 있다. 본문은 분명히 12절을 반영한 것으로
세 가지 즉 '사랑하지 않음'과 '미워함' 그리고 '살인'이 동일한 것임을 시사한다. 즉
사랑하지 않는 자는 미워하는 자요,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다(Plummer). 그러나
여기서 요한이 살인자의 회개와 사죄 가능성을 부인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도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의 사죄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이다(눅23:34, Smalley, Stott).
단지 요한은 본문에서 미움이 잠재적 살인이라는 사실, 즉 살인이 미움과 시기에서 비
롯된다는 사실과 살인하는 자의 현재는 영생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다.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영생
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우크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 엔
아우토 메누산'(*
)운 문자적으로 '그 속에 거하는 영생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
서 '가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이'(* )는 현재형으로서 '영생을 가질
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을 뜻한다(Haas). 이것은 살인하는 자의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차 있어서 영생을 소유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움에서 비롯된 살인과 사랑으
로 드러나는 영생이 서로 상극임을 시사한다.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 '알고'에 해
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멘'(* )은 완료형이다. 이 단어는 이 서
신의 다른 곳에서는 거의 현재형으로 쓰였으나(2:5,18,20; 5:15) 본문에서는 특히 완
료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우리가 알게 된 것이 특별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
기 때문이다. 요한은 15절에서 미워하는 자의 표본으로서 가인을 내세운 뒤 본절에서
사랑하는 자의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따하니라. -
요한은 상반절에서 자기 희생적 사랑의 본보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제시
함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본받아 자기 희생적
사랑을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한다(2:6). 이는 예수께서 친히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상토하는 것으로(요15:12,13)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행해야 할 사랑이 자기 부정임을 시사한다.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
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 '재물'의 헬라어 '비온'(* )은 단순
한 재물이 아니라 '삶의 수단으로서의 재물'을 의미한다(막12:44). 또한 '보고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로레'(* )는 그냥 한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오
랫동안 지켜보는 상태'를 가리킨다(Smalley). 본절에서 요한은 생활에서 충분히 실행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랑의 예로 최소한의 생활조차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제
시하고 있다. 요한은 생활이 어려운 형제를 보고도 그의 굽핍함을 고와주지 않면 하나
님의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한편 '하나님의 사랑'에 대
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4:10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랑으
로 해석한다(Plummer) (2)혹자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해석한다(Bro-
oke, Bengel, Alford). (3)혹자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같은 사랑으로 해석한다(Law,
Marshall). 본절의 중심 사상이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사랑하는자
는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말
과 혀'는 같은 의미로서 실천이 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행함과 진실함'
은 실천하는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Smalley). 즉
'행함'은 사랑의 역동적 측면을 나타내고, '진실함'은 사랑의 질적 측면을 나타낸다.
요한은 본절에서 사랑의 실천을 선언(약2:15-17)함으로써 이제까지 논해온 것, 즉 하
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의와 사랑이 있어야 함을 요약하고 있다.
=====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 '이로써'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다음절을 가리킨다
고 주장한다(Nauck, Brooke). (2)혹자는 앞에 언급된 내용과 뒤에 언급될 내용 둘 다
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3)혹자는 앞에서 언급된 10-18절까지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malley, Stott).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문맥
상 가장 타당하다. 한편 '굳세게 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소멘'(*
)에 대하여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확신케하다', 이 의미로 해석하려면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데 목적어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로
앞 문장인 '우리가 진리에 속함'을 목적어로 보는 견해와(Plummer) 2 20절 초두의
'호티'(* , '왜냐하면')가 이끄는 절을 목적어로 보는 견해이다(Bruce). 그러
나 양자 모두 무리한 문법적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2)'설득시키다'. 이것은 의미상
본문에 부적절하다. (3)'안심시키다'. 이 의미로 해석할 경우 '우리 마음의 두려움과
염려'라는 목적어가 생략된 것으로 본다(Westcott). 비록 만족스러운 해석은 되지 못
하나 그래도 세 가지 의미중 마지막 의미가 타당성을 지닌다(Stott, Smalley). 본절에
서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진리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
함과 동시에 20절과 연결하여 주 앞에서 두려움없이 담대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3: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
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 본절에서 두 번 사용된 '호티'(* , 왜냐하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명사절
을 이끄는 접속사(that)로 보고, 두번째 '호티'는 불필요한 반복으로 간주하여 생략한
다. 이 해석은 20절 전체를 19절의 '페이소멘'(* , '확신케 하다')
이란 동사의 목적어로 본다(Bruce). (2)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왜냐하면'으로 해석
한다. 이 경우 19절의 동사 '페이소멘'(* , '안심시키다')의 목적어
는 생략된 것으로 본다(AV). (3)혹자는 첫번째 '호티'(* )를 '호'(* )와 '티'
(* )로 분리시켜서 관계대명사 중성 명사로 보고, '에안'(* , '...이면')과
합쳐서 '...할 때마다'라는 의미로 본다. 이때 두번째 '호티'는 종속절을 이끄는 접속
사로서 '왜냐하면'의 뜻이 된다(Stott, Smalley).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
장 타당한 듯하다. 요한은 본서에서 서로 대조되는 구문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1:9,10; 2:10,11; 3:8,9) 본절 역시 21절과 대립되는 구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 본문에 대해서는 두 가
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한다(Alford,
Wohlenberg).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우리 자신도 우리 마음을 보시면 책망할 것이
너무 많을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2)혹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
한 묘사라고 주장한다(Brooke, Luther).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두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 마음을 책망할 때마다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는 의미
이다. 문맥상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3:21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 문장의 형식상 전절과 본절은 조
건문으로서 대조를 이루지만 내용상은 본절이 전절의 결과에 해당한다. 본문은 설사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서 책망할 것이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Bruce).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 위에서 담대함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항상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히10:19).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 '구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토멘'
(* )과 '받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람바노멘'(*
)은 모두 현재 시상이다. 이는 계속되는 기도와 계속되는 응답의 경험을 암시한다
(Stott).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상은 신약 여러 곳에 나타난다(마
7:7,8; 18:19; 요11:41,42; 15:7). 그러나 이 응답에 대한 약속에는 선행 조건이 있
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
다(요15:7, Smalley).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 그리스
도인들이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말한
공적이 아니라 신자의 마땅한 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 기도 응답의 조건이 되는 것처럼 말한 것은 하나님
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됨을 드러내는 외면적인 표현이기 때문이
다(Law, Stott). 예수께서도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아셨다(요8:28,29; 11:42).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
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 전절에서는 '계명들'(* , 엔톨
라스)이라고 하여 복수 형태를 취하는데 본절에서는 '계명'(* , 엔톨레)
이라고 하여 단수 형태를 취한다. 이는 본절의 두 가지 내용인 '믿음'과 '사랑'이 사
실은 불가분리적인 하나의 계명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여기서 '믿고'의 헬라어 '피스
튜소멘'(* )과 '사랑할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
멘'(* )은 시상이 서로 다르다. 즉 '피스튜소멘'은 부정과거형으로
서 '단번에 이루신 예수의 역사적 속죄 사역'(히9:28)을 믿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아
가포멘'은 현재형으로서 '형제 사랑이 변함없이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믿음은 사랑의 근거요 사랑은 믿
음의 증거이다.
=====3: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 헬라어 본
문에는 두 번의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아우토스'(* , '그')라는 인칭
대명사로 나타난다. 이 '아우토스'는 19-23절까지 계속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지칭했다
는 점을 고려하여,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Plummer, Stott,
Smalley). 그러나 사도 요한의 기독론(Christology) 자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구분을 뚜렷하게 짓지 않고 오히려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며, 요15:1-7의 말씀이 강하
게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하나님이 예수 안에 예수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요17:21) 내용상으
로는 '주'가 하나님이든지 예수이든지 같은 의미이다. 앞 절에서 언급된 두 가지 계
명, 즉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안에 거
하며, 하나님도 역시 그 안에 거하신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 본문에서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것을 알 수 있
는 증거로 성령이 제시된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주 안에, 주가 그리스도인 안에 거
하신다는 약속의 확실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保證)이다. 23,24절의 연결이 18,19절
의 연결처럼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안다'고 하지 않
고 성령을 등장시킨 점은 의미가 있다. 아마도 저자는 주 안에 거하기 위해 그리스도
인이 행해야 할 '사랑'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선
물'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러한 성령은 그리스도인에게 각종 은사를 주셔서(갈
5:22,23)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의롭게 행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Stott).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안
에 내주하심을 알게 된다.
=====3:1
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데테'(* )는 감탄사의 역할을 하는
명령형으로 복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 복수 형태는 가시적인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
되는 어법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음을 암시한다(Smalley, Westcott).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
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 '어떠한'의 헬라어 '포타펜'(* )은 신약
성경에서 대개 놀라움이나 경탄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마8:27; 막13:1; 벧후3:11),
본문에서는 '어떠한 정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에게 베풀어 주
신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의미한다(Brooke). 한편 '자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나'(* )는 실제적인 부자 관계에서의 자녀됨을 강하게 함축하는 단어
이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주로 '휘오스'(* , '아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 이것은 법적인 부자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이다(Plummer, Wilder).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써 값없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우신 사랑인가를 선포하고 있다(Calvin). 요한은 '우리가 그러하도다'를 부가하여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
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 '그러므로'에 해당
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 )는 문법적인 연결이 명백하지 않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혹자는 '디아 투토'가 뒷부분의 내용과 연결되어 '호티'(*
, '왜냐하면')이하의 절을 설명하는 것으로 본다(Smalley, Stott). (2)혹자는
'디아 투토'가 앞부분의 내용과 연결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보고, '호티' 다음에 따라오는 절은 부가적 기능만을
한다고 주장한다(Haas, Marshall). 어느 견해를 취해도 의미상 큰 변화는 없으나 문맥
상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를 모르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단순히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강조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가 누구
를 지칭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다(Haas). (2)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ultmann, Stott). (3)혹
자는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Briike). 본문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지만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
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1:3; 2:1,24). 요한은 세상이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라고 진술하고 있다. 사실 '세상에 속한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에 속한 자요
어두움에 거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한 자이다. 따라서 그들
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알 수가 없다.
=====3:2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
나. - 본문은 '지금...아직'이라는 종말론적 긴장 관계(eschatological tension)에 놓
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나타낸다.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을 알
아보든 못 알아보든 간에, 혹은 그리스도인의 현재 모습이 육체의 소욕(所慾)을 완전
히 벗어나지 못했을지라도 분명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다(Calvin, Stott).
신자의 미래에 대해서는 구원의 영광이 약속되었다. 그러나 비록 현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특권과 하나님의 성품을 누리며 미래에 주어질 구원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장차 되어질 그리스도인의 미래 상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계시 되지 않았
기에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야 신자는 장래에 자기 자신에게
일어날 구체적인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이다(Stott).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안 파네로데'(*
)에는 주어가 없어서 이를 해석하는데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
자는 '그'를 바로 앞 문장의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을 가리키는 비인격적 주어로 보면
서 바로 뒷 문장에 나타난 '그'는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Plummer, Bengel). (2)혹자는 '그'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Stott,
Barker, Bru- ce, Smalley). (1)의 견해는 두 가지 점에서 부당하다. 첫째로, 앞서 언
급한 바와 같이(1절) 본서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명백히 구분짓지 않고 있
음을 간과하였으며 둘째로, 이어지는 본문의 논의가 하나님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쪽으
로 발전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Smalley). 그러므로 본문에 사용
된 '그'는 후자의 견해와 같이 전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
다. 한편 우리가 주와 같을 줄 아는 것이 주의 계신 그대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그날에 '우리가 새사람을 입고'(엡4:24) '주와 같은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하게
되어서'(빌3:21) 주와 같이 됨을 의미한다(Stott).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 '소망'의 헬라어 '엘피다'(* )
는 바울 서신이나 베드로 서신에는 빈번하게 나타나지만(롬5:4; 8:24; 고후1:7; 벧전
1:3) 요한 복음이나 요한 서신 중에서는 본문에서 단 한 번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
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이루리라는 확신에 찬 기대'라는 소망의 개념은 2절에서 명백히 설명되고 있다
(Smalley). 따라서 '이 소망'은 2절에 나타난 장래의 일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리킨다(Barker).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요한은 처음으로 예수의 특징
을 '깨끗하심'으로 묘사하고 있다. '깨끗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그노스'(*
)는 '디카이오스'(* , '의로운')와 거의 같은 의미로 그리스도
의 정결하심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힘써 따라야 할 본보기임을 시사한다(2:1,29;3:7,
Smalley). 한편 '깨끗하게 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하그니제이'(* )
는 '하그노스'(* , '깨끗하심')와 같은 어원을 갖는 동사로 제의적 정결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출19:10,11; 민8:21; 요11:55; 행21:24). 그러나 본문에서는 시
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성품으로서 도덕적인 깨끗함을 의미한다(Law, Stott,
Smalley, Barker).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진 자는 주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하여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마5:48).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 본문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여 자신들은 죄가 없으며 불법을 행하
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요한은 죄를 짓는 사람은 모두가 예외없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영지주의의 거짓 가르침을 배격하고 있다.
죄는 불법이라. - 여기서 '불법'(* , 아노미안)은 문자적으로 '율
법을 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이 '율법'(* , 노모스)이란 용어
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불법'은 율법을 범한다는 의미라
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려는 인간의 본성적인 불법을 의미한다(Barker). 요
한은 자기 자신들이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실상 하나
님을 배반하는 무서운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 '죄'에 해당하
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 )는 복수형이다. 이는 죄악된 모든 행
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Smalley, Stott). 한편 '나타내신'의 헬라어 '에파네로데'(*
)는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것은 과거의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나
타내는 것으로 예수의 성육신이 역사적 사건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이러한 역사적인 실
재 사건을 기반으로 해서 예수의 '죄를 없애는 사역'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으며(요1:29), 모든 죄
를 친히 자기 몸에 짊어지심으로써 우리 죄를 없이 하셨다(사53:11,12; 히9:28; 벧전
2:24, Stott).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죄가 없다'는 말씀은 3절의 '깨끗하심'과 2:29; 3:7의
'의로우심'과 동일한 의미이다. 예수의 무죄성은 초대 교회의 케리그마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신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고후5:21; 히4:15; 벧전1:19). 한편 본문
에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에스틴'(* , '~이다')으로 현재형이다. 이것
은 예수께서 지상 사역 기간 동안만 죄로부터 자유로우셨던 것이 아니라 영원히 무죄
하심을 암시한다(Smalley).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
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 본문은 1:8,10의 진술과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이에
대해 네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주 안에 거하는 자의 인격에 주목하여 그리스도
인은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하는 것으로 해석한다(Wesley). (2)혹자는 요한
이 신자의 삶의 원리를 선포한 것으로 보고 '범죄치 아니함'을 신자의 이상적 특징으
로 해석한다(Alford, Calvin). (3)혹자는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Lange, Smith, Barker, Westcott, Stott). (4)혹자는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원리상 이미 범죄하지 않는 자이지만 실제상 아직 범죄하는 자라고 본다.
즉 그리스도인이 현재 긴장과 역설의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Smalley, Schn-
a ckenburg).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세 번째 견해의 경우 '범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타네이'(*
)는 현재형으로서 동작의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상태를 묘사해 주기 때문이며, 네
번째 견해의 경우 루터(Luther)가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말한 것
과 마찬가지로 주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치 아니하는 동시에 범죄한다고 이해할 수 있
기 때문이다(Smalley). 앞 절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죄와 상관
없는 깨끗한 분이시기에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와 상관없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
다. 만약 죄를 범한다면 그는 회개함을 용서함을 받고 불법의 생활을 버려야 한다. 그
러나 그가 지속적이며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죄를 좋아하며 죄 안에 거하길
즐겨한다면 그는 완전히 깨끗하신 그리스도를 알거나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알지도, 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요5:37,38; 8:19; 14:7,9; 요삼1:11,
Stott, Barker).
=====3: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 본문은 수신자 내에 있던 영지주
의를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요한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하나
니의 비밀스런 지식, 즉 영지(靈智)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이
라고 주장하였으며 영지를 깨달은 자는 육신에서 자유로워져 도덕적인 방종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신학과 윤리의 가르침은 요한
당시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시켰다. 그래서 요한은 사도들이 전하여 준 복음 이
외의 것을 가지고 미혹하는 자들을 멀리하며, 거절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 본문은 2:29의 반복이다. 여기
서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의로움의 동기와 근거를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가능함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문은 의를 행함이 조건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
게 된 자로서 그의 의로움을 행위로 보여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Bruce).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 본문은 7절
하반절과 정반대되는 내용으로서 대조를 이룬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다. 반면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다. 요한은 이러한 대조법을 사용하여서 수신
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누구에게 속하느냐'란 질문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동시에
영지주의자들이 방종을 통해 범죄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누구에게 속하였는가를 분별
할 수 있도록 한다. 한편 요한은 본문에서 마귀의 기원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주
지 않으며, 단지 죄의 기원이 마귀에게 있다는 사실만을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을 암시하는 듯하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하는 자로서 진리
가 그 안에 전혀 없기에(요8:44) 속이는 자이며 사람들로 범죄하게 한다. 이러한 죄의
기원에 대해 바울이 아담에게까지 소급시킨 것과 달리(롬5:12-19), 요한은 그보다 더
욱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Westcott).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 '마귀의 일'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들을 미혹시켜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창3:1-6). 이러한
마귀의 일을 파괴하고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그르스도께
서 세상에 오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죄인을 어둠에서 구하셔서 하나
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5절; 히9:28; 벧전2:24). 요컨대 그리스도의 오심
은 우리의 죄를 없애고 동시에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인 것이다(Plummer).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본절은 6절의 반복이다. 요한은
1:8,10에서 믿는 자들이 죄를 지을 가능성을 언급하였으나 본절에서는 믿는 자들이 범
죄치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절은 6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습관적으로
마귀와 같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하여는 본문이 수신자들 사이에 있
던 영지주의자들을 향한 경고인을 전제로 할 때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요한 당시의 영
지주의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영지를 깨달은 자는 육신에서 벗어나 완전
한 자가 되었으므로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죄가 영지를 깨
달은 자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으므로 범죄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는 부류이다. 요한은 전자의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범죄함을 역설하였고
(1:8,10), 후자의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신자들은 범죄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역설
하고 있다(6절).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
라. - '하나님의 씨'에 대한 견해는 다섯 가지이다. (1)혹자는 신적인 생명의 원리라
고 주장한다(Smith, Marshall). (2)혹자는 집합적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ohlenberg, Stott). (3)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Oecumenius, Theophylactus). (4)혹자는 말씀 또는 복음이라고 주장한다(Augustine,
Dodd). (5)혹자는 성령이라고 주장한다(Calvin). 다섯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Smalley).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말씀이 심기워 있음(시119:11; 렘
31:33)과 성령께서 내주하심(롬8:11; 고전3:16)은 동시적이고 불가분리적이다. '하나
님의 씨' 즉 말씀과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거할 때 그 그리스도인은 범죄하
지 않게 된다.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시며 모든 인간들을 낳으신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인간
들의 아버지가 아니다. 마귀의 자녀들도 있다(요8:44).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들
과 마귀의 자녀들이 섞여서 살고 있다(마13:24-30). 자녀들이 부모를 닮아 가듯이 하
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닮고, 마귀의 자녀들은 마귀를 닮는다(Stott, Bruce).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
하지 아니하니라. - 저자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마귀의 자녀인가를 판별하는 시금석으
로 '의와 사랑'을 제시한다. 의와 사랑이 없는 자는 자기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스
스로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드러낸다.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
에서든 아니면 타인과의 관계에서든간에 '온전함'을 의미하며 '사랑'은 타인에 대한
의로움을 뜻한다(Westcott, Plummer). 이러한 '의와 사랑'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깊
은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닮아야 할 하나님의 본성이다.
=====3: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 '사랑할지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
)은 현재형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
한다(Smalley).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 '처음부터'는 문맥상 요한의 수신자들이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를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은 틀림없이 복음의 본질이 사랑이며
(요3:16; 15:12; 눅10:27; 고후13:13) 사랑이 태초의 창조 원리에까지 미친다는 사실
(요17:24; 요일4:16)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한편 '소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
리아'(* )는 1:5와 동일한 단어이다. 1:5에서의 '소식'은 교리적 내용
을 담고 있어 하나님이 빛이심을 드러내는 반면 본절에서의 '소식'은 윤리적 내용을
담고 있다(Stott). 그 윤리적인 내용은 '복음의 본질인 동시에 근원적인 요구인 사랑
의 실천을 권면하는 것'이다.
=====3: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 저자는 8절과
10절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마귀의 자녀의 모델로 가인을 제시한다. 요한이 가인을 악
한 자에게 속한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로 가인은 동생 아벧의 의로움을 시기하여 죽임으로 자기 자신이 마귀에게 속하였음을
스스로 입증하였다(Burce). 둘재로, 요한 당시의 한 이단 종파인 에비온주의자들은 채
식주의자들이었다. 요한은 그들에게 고기를 드린 아벧은 열납되고 농산물을 드린 가인
은 거부되는 사건을 제시함으로써, 율법적인 채식주의보다는 사랑의 계명에의 순종이
우선임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Smalley).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 창
4장에 기록된 사건에서는 가인의 살인 동기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기
록된 가인에 대한 언급(히11:4; 유1:11)을 통하여 추론해보면, 가인은 믿음과 순종과
형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요한은
다른 어느 성경보다도 분명한 살인의 동기를 제시한다. 그 동기는 동생 아벧의 의로움
에 대한 시기이다.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물질적 축복이나 안녕보다는
의로움 자체를 더욱 시기하고 증오한다(Stott). 이런 의미에서 가인은 자신의 살인 행
위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 전후 문맥상 세상과 하
나님의 자녀와의 관계는 가인과 아벧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Law).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대립은 아벧-가인, 이삭-이스마엘, 야곱-에서를 통하여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
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요한은 '미워하거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세이'(*
)를 현재 시상으로 사용함으로 암시하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롭다는
사실만으로 미워하므로(12절) 양자간의 대립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세상의
증오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이김에 기초하여 넉넉히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요16:33; 요일4:4; 5:4, Bruce).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 본문
에서 요한은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서 형제 사랑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 생명으로 들어간 자의 증거로서 형제 사랑을 논하고 있다. 사랑은 율법의 대강령
이요(마22:34-40),율법의 완성이요(롬13:10),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최고 표현이
다(요13:35; 고전13:13). 그러므로 비록 세상이 영생의 근거는 아닐지라도 형제 사랑
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Calvin, Bruce).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 '사랑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폰'
(* )에는 목적어가 없다. 이 사실로 인해서 본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
하다. 하나는 '형제'를 목적어로 보아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로 해석하는 것이
다(Stott). 다른 하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다(Plummer, Smalley).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제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6절; 2:2). 한편 '거하느니라'의 헬라어 '메네이'(* )는 현재형
으로 사랑치 아니하는 자의 영적 죽음의 상태가 지속됨을 암시한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랑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과거 상태처럼 지속적으로 죽음과 진노하에 있는
상태이기에(엡2:2) 사망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사망에 거하고 있는 상태이
다.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자니. - 요한은 '사랑하지 않음'의 개념에서
'미워함'의 개념으로 발전시켜 진술하고 있다. 본문은 분명히 12절을 반영한 것으로
세 가지 즉 '사랑하지 않음'과 '미워함' 그리고 '살인'이 동일한 것임을 시사한다. 즉
사랑하지 않는 자는 미워하는 자요,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다(Plummer). 그러나
여기서 요한이 살인자의 회개와 사죄 가능성을 부인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도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의 사죄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이다(눅23:34, Smalley, Stott).
단지 요한은 본문에서 미움이 잠재적 살인이라는 사실, 즉 살인이 미움과 시기에서 비
롯된다는 사실과 살인하는 자의 현재는 영생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다.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영생
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우크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 엔
아우토 메누산'(*
)운 문자적으로 '그 속에 거하는 영생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
서 '가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이'(* )는 현재형으로서 '영생을 가질
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을 뜻한다(Haas). 이것은 살인하는 자의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차 있어서 영생을 소유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움에서 비롯된 살인과 사랑으
로 드러나는 영생이 서로 상극임을 시사한다.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 '알고'에 해
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멘'(* )은 완료형이다. 이 단어는 이 서
신의 다른 곳에서는 거의 현재형으로 쓰였으나(2:5,18,20; 5:15) 본문에서는 특히 완
료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우리가 알게 된 것이 특별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
기 때문이다. 요한은 15절에서 미워하는 자의 표본으로서 가인을 내세운 뒤 본절에서
사랑하는 자의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따하니라. -
요한은 상반절에서 자기 희생적 사랑의 본보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제시
함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본받아 자기 희생적
사랑을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한다(2:6). 이는 예수께서 친히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상토하는 것으로(요15:12,13)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행해야 할 사랑이 자기 부정임을 시사한다.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
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 '재물'의 헬라어 '비온'(* )은 단순
한 재물이 아니라 '삶의 수단으로서의 재물'을 의미한다(막12:44). 또한 '보고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로레'(* )는 그냥 한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오
랫동안 지켜보는 상태'를 가리킨다(Smalley). 본절에서 요한은 생활에서 충분히 실행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랑의 예로 최소한의 생활조차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제
시하고 있다. 요한은 생활이 어려운 형제를 보고도 그의 굽핍함을 고와주지 않면 하나
님의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한편 '하나님의 사랑'에 대
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4:10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랑으
로 해석한다(Plummer) (2)혹자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해석한다(Bro-
oke, Bengel, Alford). (3)혹자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같은 사랑으로 해석한다(Law,
Marshall). 본절의 중심 사상이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사랑하는자
는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말
과 혀'는 같은 의미로서 실천이 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행함과 진실함'
은 실천하는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Smalley). 즉
'행함'은 사랑의 역동적 측면을 나타내고, '진실함'은 사랑의 질적 측면을 나타낸다.
요한은 본절에서 사랑의 실천을 선언(약2:15-17)함으로써 이제까지 논해온 것, 즉 하
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의와 사랑이 있어야 함을 요약하고 있다.
=====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 '이로써'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다음절을 가리킨다
고 주장한다(Nauck, Brooke). (2)혹자는 앞에 언급된 내용과 뒤에 언급될 내용 둘 다
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3)혹자는 앞에서 언급된 10-18절까지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malley, Stott).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문맥
상 가장 타당하다. 한편 '굳세게 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소멘'(*
)에 대하여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확신케하다', 이 의미로 해석하려면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데 목적어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로
앞 문장인 '우리가 진리에 속함'을 목적어로 보는 견해와(Plummer) 2 20절 초두의
'호티'(* , '왜냐하면')가 이끄는 절을 목적어로 보는 견해이다(Bruce). 그러
나 양자 모두 무리한 문법적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2)'설득시키다'. 이것은 의미상
본문에 부적절하다. (3)'안심시키다'. 이 의미로 해석할 경우 '우리 마음의 두려움과
염려'라는 목적어가 생략된 것으로 본다(Westcott). 비록 만족스러운 해석은 되지 못
하나 그래도 세 가지 의미중 마지막 의미가 타당성을 지닌다(Stott, Smalley). 본절에
서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진리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
함과 동시에 20절과 연결하여 주 앞에서 두려움없이 담대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3: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
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 본절에서 두 번 사용된 '호티'(* , 왜냐하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명사절
을 이끄는 접속사(that)로 보고, 두번째 '호티'는 불필요한 반복으로 간주하여 생략한
다. 이 해석은 20절 전체를 19절의 '페이소멘'(* , '확신케 하다')
이란 동사의 목적어로 본다(Bruce). (2)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왜냐하면'으로 해석
한다. 이 경우 19절의 동사 '페이소멘'(* , '안심시키다')의 목적어
는 생략된 것으로 본다(AV). (3)혹자는 첫번째 '호티'(* )를 '호'(* )와 '티'
(* )로 분리시켜서 관계대명사 중성 명사로 보고, '에안'(* , '...이면')과
합쳐서 '...할 때마다'라는 의미로 본다. 이때 두번째 '호티'는 종속절을 이끄는 접속
사로서 '왜냐하면'의 뜻이 된다(Stott, Smalley).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
장 타당한 듯하다. 요한은 본서에서 서로 대조되는 구문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1:9,10; 2:10,11; 3:8,9) 본절 역시 21절과 대립되는 구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 본문에 대해서는 두 가
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한다(Alford,
Wohlenberg).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우리 자신도 우리 마음을 보시면 책망할 것이
너무 많을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2)혹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
한 묘사라고 주장한다(Brooke, Luther).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두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 마음을 책망할 때마다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는 의미
이다. 문맥상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3:21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 문장의 형식상 전절과 본절은 조
건문으로서 대조를 이루지만 내용상은 본절이 전절의 결과에 해당한다. 본문은 설사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서 책망할 것이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Bruce).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 위에서 담대함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항상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히10:19).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 '구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토멘'
(* )과 '받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람바노멘'(*
)은 모두 현재 시상이다. 이는 계속되는 기도와 계속되는 응답의 경험을 암시한다
(Stott).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상은 신약 여러 곳에 나타난다(마
7:7,8; 18:19; 요11:41,42; 15:7). 그러나 이 응답에 대한 약속에는 선행 조건이 있
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
다(요15:7, Smalley).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 그리스
도인들이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말한
공적이 아니라 신자의 마땅한 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 기도 응답의 조건이 되는 것처럼 말한 것은 하나님
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됨을 드러내는 외면적인 표현이기 때문이
다(Law, Stott). 예수께서도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아셨다(요8:28,29; 11:42).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
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 전절에서는 '계명들'(* , 엔톨
라스)이라고 하여 복수 형태를 취하는데 본절에서는 '계명'(* , 엔톨레)
이라고 하여 단수 형태를 취한다. 이는 본절의 두 가지 내용인 '믿음'과 '사랑'이 사
실은 불가분리적인 하나의 계명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여기서 '믿고'의 헬라어 '피스
튜소멘'(* )과 '사랑할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
멘'(* )은 시상이 서로 다르다. 즉 '피스튜소멘'은 부정과거형으로
서 '단번에 이루신 예수의 역사적 속죄 사역'(히9:28)을 믿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아
가포멘'은 현재형으로서 '형제 사랑이 변함없이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믿음은 사랑의 근거요 사랑은 믿
음의 증거이다.
=====3: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 헬라어 본
문에는 두 번의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아우토스'(* , '그')라는 인칭
대명사로 나타난다. 이 '아우토스'는 19-23절까지 계속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지칭했다
는 점을 고려하여,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Plummer, Stott,
Smalley). 그러나 사도 요한의 기독론(Christology) 자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구분을 뚜렷하게 짓지 않고 오히려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며, 요15:1-7의 말씀이 강하
게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하나님이 예수 안에 예수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요17:21) 내용상으
로는 '주'가 하나님이든지 예수이든지 같은 의미이다. 앞 절에서 언급된 두 가지 계
명, 즉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안에 거
하며, 하나님도 역시 그 안에 거하신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 본문에서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것을 알 수 있
는 증거로 성령이 제시된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주 안에, 주가 그리스도인 안에 거
하신다는 약속의 확실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保證)이다. 23,24절의 연결이 18,19절
의 연결처럼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안다'고 하지 않
고 성령을 등장시킨 점은 의미가 있다. 아마도 저자는 주 안에 거하기 위해 그리스도
인이 행해야 할 '사랑'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선
물'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러한 성령은 그리스도인에게 각종 은사를 주셔서(갈
5:22,23)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의롭게 행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Stott).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안
에 내주하심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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