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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로마서 2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4|조회수14,240 목록 댓글 0

로마서 제 2장
=====2:1
그러므로 - 전후 문맥으로 보아 이 접속사가 어떤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혹자는 이 접속사가 앞에서 설명된 이방인들의 부도덕한 행위와 관련
이 있다고 주장한다(Hendriksen). 또한 어떤 학자는 본절 전체를 1:20과 같이 삼단 논
법식으로 재구성하여 다음과 같은 사상적 전개로 이해하고자 했다(J. Murray). (1) 다
른 사람의 행동을 너는 판단한다. (2) 너도 똑같이 그 행동을 한다. (3) '그러므로'
너는 너의 행동을 정죄하는 것이고, 너도 핑계치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종종 어떤 문장을 다른 주제로 전환하고자 할 때 별 의미 없이 접속사를 사용하여 주
의를 환기시키는 문법 구조를 사용한다(삼하 8:1;10:1;13:1;히 4:14). 바울도 이와 같
이 이방인의 죄악상을 폭로하는 주제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별 의미없이 이 접속사를
사용하였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 '판단하는'의 헬라어 '크리논'( )은 하나님의
'판단'( , 크리마)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의심한다'(눅 24:38), '헤아린
다'(마 7:2), '구별하다'(마 13:30)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본절에서는 인간이 그 이웃
에 대하여 편견을 가졌다는 의미로 쓰여졌다(요 8:15;약 4:12). 한편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시하는지의 문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혹자는
이 부류의 사람을 스스로 남을 규탄하고 지도하며 판단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선생'(약 3:1)이라고 주장한다(Matthew Henry). (2) 또 혹자는 '판단하는 사람
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 호 크리논'( ) 가운데 '파스'
( , '모든')를 강조하여 '남을 판단하는 모든 사람'이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를 포함하며 판단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자들이라고 한다(J. Barmby). 그러나
본장 전체의 흐름으로 보아 본절의 이 말은 율법을 받고 자랑하면서 율법에 따라 살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칭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 같다. 물론 유대
인이라는 구체적 표현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삶이 이웃을 판단하는 교
만한 삶이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가장 적합한 대상이라는 견해를 마치
이방인은 이 부류에서 제외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또 다른 오해를 발생하게 할
것이다.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 바르트(Barth)는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부류에 하나님
을 모르는 사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포함시킨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비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더라도 유한한 인간이며 시간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라
고 한다. 즉 인간은 제한되고 연약한 존재로 항상 죄악 가운데 그 영향권 아래 살아가
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르트의 주장대로라면
핑계치 못할 자의 범주에 바울 자신도 포함되므로 바울 역시 또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본 절은 신앙에서 떠난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책
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Luther, Calving, Hendriksen). 유대인이 하나님
의 율법을 받아 이방인보다 더욱 밝은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
역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판단력이
무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의를 이룰 능력도 무력해졌다. 그렇기에 남을 판단하
는 자는 자신이 자신을 정죄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정죄함이니'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크리네이스'( )는 '카타'( , '...에 반대하여')와
'크리노'( , '구별하다, 판단하다')가 합쳐진 '카타크리노'(
)의 현재 직설법 2인칭 단수 동사로서 '세아우톤'( , '너 자신을')
과 함께 쓰여 스스로를 죄있다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에 의하면 이 '정죄'는
남을 저주했을 때 분만 아니라 용서했을 때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Lenski).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범하는 잘못이 이중
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Calvin). 즉 그들은 이방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
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신랄하게 정죄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
다. 이것을 좀더 간략하게 나타내자면 '어두움과 위선'(Murray)이 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리는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한다(마 7:1-5;툭 6:41, 42).

=====2:2
하나님의 판단 - 여기서의 '판단'( , 크리마)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내리
시는 심판 또는 정죄를 의미한다(약 3:1). 사람이 스스로 하는 판단은 항상 한계가 있
고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적인 표준이므로 모든 범죄자에 대해 심판과 정
죄를 내리심이 당연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심판)은 종말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지
는데, 어느 누구도 그의 심판에서 제외되거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
님은 진리이시므로 그의 절대적인 공의 성취하시기 때문이다(Murray).
진리대로 - 이 말에는 심판의 순결성과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내면을 감
찰하시어 판단하시는(삼상 16:7)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Calvin, Harrison, Barmby)
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아노라 - 본절에서 부울이 사용한 1인칭 복수 '우리'와 1:5에서의 '우리'는
그 지시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즉 본절에서는 수신자와 바울 자신을 같은 공동체로
여기고 '우리'라고 하고 있고, 1:5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 일행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송신자들을 의미하고 있다.

=====2: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행하는 사람아 - 바르트(Barth)는 본절을 매우 실존주의
적으로 해석한다. 즉 그는 판단하는 일이 어떤 체계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
며, 그러한 체계나 사상에서 나오는 선행은 인간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게 있어서 체계적인 사상은 복음의 생동력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이성을 통해 체계적인 사상을 통합하고자 했던 헤겔(Hegel)에 정면 도전한 키에르 케
고르(Kierkegaard)의 실존주의적 신앙 노선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체계적인
사상을 고집하면 복음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교회사를 통해서 입증될 수 있
다. 그러나 기독교는 논리와 사상의 체계에만 집착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
단적으로 사상의 체계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전자의 경우는 기독교를 논리의 체계 속
에 질식(窒息)시키게 하며, 후자는 신비 주의에로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기독교
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체계를 지님과 동시에 복음의 생명력을
지녀야 참 종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재물 바치는 것을 빙자하여 자기 부모를 부양하고 공궤
(供饋)할 책임을 회피했다(막 7:11).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종교라는 허울 아래 '하니
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 행위인 것이
다. 이 같은 이들은 겉모습과 말을 그럴 듯 하지만 속마음은 이미 부패해서 회칠한 무
덤(23:27, 28)과도 같이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공의로운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다(고후 5:10). 설령 그 사람이 유대인 중에 유대인
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정죄적 선언을 피할 수 없다. '피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프세'( )는 '사라지다' 또는 '도망가 안전한 곳을 찾다'(행
19:6)라는 뜻이 있고, '에크퓨고'( )의 미래중간태이다. 죄인이 여호와
의 낯을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시 139:8;벧전 3:12).

=====2:4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멸시하느뇨 - '인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게이'( )는 현재 직설법 3인칭 동사로서, 하나님의 지속적
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우상숭배와 부도덕,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 어떤 자들의 교만을 지켜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방향을 전환하여 마음과
태도를 바꾸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 곧 '인자하심' 때문이다. 본절에
서 '인자하심'은 거듭 사용되어 중요한 사상임을 보여 준다. 본 구절의 '인자하심'
( , 크레스토테토스)은 하반절의 '인자하심'( , 크
레스톤)과 의미상 별차이는 없지만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하며(11:22), 보다 포
괄적이고 근본적인 뜻을 갖는다. 이는 또한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것과 같은 성품을
시사한다(마 7:9-11). 그러나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용하여 오히려 자기의 의를 자랑할 뿐더러 그의 오래 참으심을 자신들의 안전을 보
장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인생들은 악한 일을 행함에도 속히 징벌을 행하
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였다(전 8:11).
본절에서 이와 같은 죄인의 태도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
카타프로네이스) 것이라고 지적된다. 유대인의 교만과 이방인의 부도덕은 같은 죄악으
로서 하나님을 깔보거나 업신여기는 방자한 행동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함을
멸시하는 죄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죄인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동시에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복음이 바로 죄인들에게 주어졌다(1:16).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
님의 택한 백성이기에 죄를 범할지라도 그 죄에 따라 공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든지, 아니면 자기들이 죄를 범해도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심판을 내리시지 않
기에 자기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별로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무시해 버렸다. 이것은 곧 하나
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도 소홀히 여겼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완악한
심령에 대하여 바울은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5절)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본
절의 '용납하심'( , 아노케)은 잠시 쉬는 것을 의미하며 '자제'
(self-restrain)의 개념을 지닌다. 본절에서는 '너그러움'을 뜻하며 구체적으로 '징벌
의 지연'을 뜻한다. 또한 '길이 참으심'( , 마크로뒤미아)은 '어
떤 충격에도 곧바로 반응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 두 단어는 '인자하심'(
, 크레스톤)과 합해져서 심판을 연기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벧후 3:15) 하나
님의 성품을 시사한다(Harrison).

■■=====2:5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 - 인간이 갖고 있는 완고함이나 회개치 않는 마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상반된 대조를 보인다. '회개치 아니한'의 헬라어 '아메타노에
톤'( )은 하나님의 권고적인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이안'(
)과 부정접두사 '아'( )의 합성어이다. 이는 하나님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개조되거나 변화되지 않는 마음을 뜻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거부하는 반항
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반항은 빛에 대한 거부로서 온순하고 순종적인 마음을
잊어 버린 완고한 행동이다. 또한 '고집'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클레로테타'(
)는 '완악', '완고' 또는 '잔인'을 뜻하는 '스클레로테스'(
)의 목적격으로서 영적으로 경화(硬化)되거나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태를 의
미한다. 이들 두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함께 자주 사용되었으며(신
9:27) 본절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서로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죄인은 자기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
를 쌓고 있는 것이다.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 '진노의 날'을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포위되어 함락되던 것과 반드시 연관지을 필요는 없다. 1
절에서 본절까지의 내용이 하나님을 거역한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것으로 생각될 수
도 있으나, 6절부터는 개인의 행위에 따른 심판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본
절은 민족적인 심판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행위에 대하여 보응하는 마지막
심판으로 이해해야 한다(Luther, Calvin, Hendriksen, Harrison). 한편 '그 날'(
, 헤 헤메라)은 종말론적인 용어로서 '주의 날'(
, 헤 헤메라 퀴리우). 곧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고전 3:13;살전 5:4). 16절에 언
급 된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은 구체적으로 마지막 심판 날을 가리
키므로 본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6
그 행한대로 - 심판의 기준이 되는 '행함'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가리
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바까지도 포함한다(시 139:1-4). 본절에서의 '행
함'은 특히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또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의미한
다고 볼 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선을 베
풀었을지라도 그의 선행이 아무 쓸모없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을 맺
었으나 그 믿음에 따른 행위가 없으면 그는 구원을 얻을지라도 상급은 없다. 그러므로
본절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행위에 그 보응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보응하시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도세이'( )는 '아포디도
미'( ) 의 미래 직설법으로 좋거나 나쁜 의미의 모든 보상을 뜻한
다. 따라서 본 구절에 의하면 믿는 자에게는 선한 상급이 주어지겠지만, 불신자는 그
형■편에 따라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고후 5:10). 그리고 그러한 심판은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공정한 것이다.

=====2:7
참고 선을 행하여 - 본문을 보면 바울이 6절에서 언급했던 '행위'가 단순히 율법적
인 차원의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성도가 영
광의 면류관을 향해 끊임없이 달음박질 해나가는 것(빌 3:12-14)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이신 칭의의 가르침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마 24:13;골 1:23;히 3:14;계 2:10).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이며 오직 하나님을 믿는 성도만 그
믿음에 따라 하나님과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의 선한 사
마리아인의 비유와(눅 10:25-37), 포도나무 비유(요 15;1-14)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성도의 선행이란 예수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와 연합된 가운데서 비롯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며(갈 5:16-18;6:8), 그렇
게 될 때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가운데 선이 나온다(갈 5:22, 23). 그리고 이 열매는
낙심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며 행할 때 거두게 된다(갈 6:9).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 - 이것들의 본질은 영생이며, 그것들이 나타나는 장소
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성도에게 주
어지는 특권을 이 세 가지로 표현했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
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영광'과는 다른 것으로서(1:23 주석 참조)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게 될 때에 나타나게 될 변화를 가리킨다(J.
Murray). 그리고 성도가 얻게 될 그 '영광'은 '존귀한 것'이며 결코 '썩지 아니하는
것'이다.
영생으로 하시고 - 영생( , 조엔 아이오니온)은 항상 궁극
적인 구원으로 표현되었다. 유대교도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준다는 것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생명얻기를 원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하면서 썩어질 육체의 증표(證標)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허락
되지 않았다(8:6). 영생은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6:23) 또한
그를 믿는 자들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요 1:12;3:15). 한편 본절에서 영
생은 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보응'의 목적격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8절의 '노와 분'이
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심판이라는 개념보다 생명이
라는 개념이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후 그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영생을 소망하며 다시 오
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삶을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2:8
당을 지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스 여스 에리데이아스'(
)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에리데이아'( )
가 '보수(報酬)에 얽매인 고용인'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에리도스'( )
에서 파생되었다면, 본절은 '이기적인 욕망이나 야망을 가진 자들에게'라고 번역될 수
있고, '다툼'이나 '논쟁'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에리스'( )에서 나왔다면,
'논쟁하는 자들에게'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빌 1:16에서의 '에리데이아'(
)는 분명히 '에리스'(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빌
2:3에서는 '다툼'이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인 욕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
다. 그외 갈 5:20이나 약 3:14 등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는 의미로 사용
되었다. 그리고 본절은 단순히 '당을 지어'로 번역되면 바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
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합쳐서 '이기적인 욕
망을 따라 논쟁에 가담하는 자들'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 즉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
가 없어 어떤 분쟁이 일어나면 항상 쉽게 발뺌할 수 있거나 이익이 되는 편에서는 자
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 민중들 사이에서
나타나던 공통된 특징이었다.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 - 진리와 의는 상호 보충적인 관계로 쓰여진
(엡 4;24) 반면 진리와 불의는 상반적인 관계로 쓰여졌다(1:18;고전 13:6;살후 2:12).
진리로 자기들의 생활을 다스리지 않고(1:21) 강퍅하게 회개치 않는 마음으로 자기의
의를 좇는 자는 결국 불의에 순종하는 자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진리와
불의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불순종은 불의에 순종하는 것
이며 또한 붕의에 순종하는 것은 궁극적인 영원한 의를 포기하는 행위이기에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분노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분노는 불
신앙에 따른 적극적인 불순종에 대하여 발생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시려는 궁극적인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보응은 더욱 가증될 것
이다. 바울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라고 같은 말을 반복한 것도 그
들에게 임할 진노의 강도를 보다 명백하게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 '노'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모스'( )는 보통 '분
노'로 번역되지만 '진노'( , 오르게)와 특별한 구별 없이 사용될 수 있다. 바
울이 유사한 의미를 가진 두 단어를 같이 사용한 것은 일종의 중복어법으로 하나님께
서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하여 무시무시한 진노로 보응하시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
다.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 '각 사람의 영'(
, 파산 프쉬켄 안드로푸)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 중 '영혼'만을 의
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 )를 '사
람'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13:1;행 2:41, 43). 또한 전후 문맥상 '사
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고데(Godet)의 견해에 따르면 9절과 10절의 구
성은 7절과 8절의 대조적 구성을 거꾸로 재배열 시킨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각 사람'이라는 말과 '각 사람의 영'이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로서 '모든 사람'을 의
미한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이라는 표현 역시 악의 계획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보응의 보편성(6절)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악을 행하
는 각 사람은 선을 행하는 각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행한대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된다.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 8절에 언급된 '노와 분'이 심판자이신 하나님 편에 속한
것이라면 본절의 '환난과 곤고'는 하나님이 발하신 '노와 분'으로 인하여 약한 자에게
내려지는 결과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인 '영광
과 존귀와 평강'과 반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혹자는 '환난'은 외적인 것으로 '곤고'는
내적인 것으로 설명한다(Hendriksen).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 본 구절은 다음 10절에서도 반복된다.
구원이나 은혜와 마찬가지로 심판과 형벌에 있어서도 유대인이 우선적이다. 언약과 약
속에 따른 복이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어졌듯이 그 복을 거절한 데에 대한 형벌도 유대
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우선적인 특권을 부여한 자에게 거기에 상응
하는 책임을 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이다(시 50:3-6;눅 12:47, 48;벧전
4:17). 한편 본절에 언급된 '헬라인'은 모든 이방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
당하다.

=====2:10
영광과 존귀와 평강 - 7절에서도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나왔으나 본절에
서는 '썩지 아니함' 대신 '평강'이 언급되었다 혹자는 이것을 '하나님과의 화목'(5:1)
으로 이해하기도 하며(Black, Murray), 또다른 학자는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모든 축복 속에서 새롭게 변화된 영혼과 육체로 영원히 즐거워하며 충
만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구원'이라고 설명한다(Hendriksen). 어떤 의미이든 바울은
악한 자에게 형벌로 내리시는 '환난과 곤고'(9절)에 대조를 이루는 용어로서 '평강'이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결과가 상반되는 것을 보여준다

=====2:11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 본절은 앞 부분(1-10절)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12-29절)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데, 문자적으로 '하나
님께서는 어떠한 불공평도 없으시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편애도 없으시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편파적(偏頗的)인 것이 될 수 없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라는 (5절) 구절이 이미 증명한 바 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특권
이나 지위가 아니라 사람이 행한 일들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냐의 문제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 , 프로소폴렘프시아)는 개념을 히브리적
사고에서 온 것으로서 재판관의 편견이나 편애를 지시하는 의미로 쓰여졌다(삼상
16:7;대하 19:7;욥 34:19). 하나님은 편견이나 편애가 없어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외형상 유대인에게 우선권을 부여한 사실과 모순을 이루는 것처럼 보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대인 역시 그의 행한대로 판단받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
서는 우선권이 부여된만큼 악행에 대하여 더 큰 환난과 곤고를 당해야 한다. 유대인이
기 때문에 편견과 편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라도 그분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마 20:15). 오직 공의로우신 그분만이 판단받는 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고려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로 있다.

=====2:12
본절에서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지는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이든지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든지 누구나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복했느냐 하지 않
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 '율법 없이'( , 아노모스)라는 말은 부사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서만 사용되었다. '율법 없이'( , 아노모스)의 명사형
'아노미아'( )나 형용사형 '아노모스'( )는 대개 '불법'이나
'범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에는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
다(고전 9:21). 즉 '아노모스'는 14절의 '타 메노몬 에콘타'(
, '율법을 갖지 아니한')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바, 계약을 맺
어 율법의 기준에 따라 살기로 약속한 일이 없는 자들, 곧 씌어진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로 이해되어야 한다(행 2:23).
율법 없이 망하고...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 바울은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들은 '망한다'( , 아폴룬타이)라고 서술하고 율법 아래서 범
죄한 자들은 '심판을 받으리라'( , 크리데손타이)고 서술한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수동태로서 하나님의 능동적인 보응이 있을 것을 시사한다. 율법을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우주 만물과 양심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지 않음으
로 인하여 파멸된 것이며(1:20),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게 되었
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율법의 기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특
별히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된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한 사상이
다. 바울은 율법을 자랑거리로 여기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정죄하거나 규제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율법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고, 율법 자체가
멸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 아래서 범죄한 자들은 이 율법을 기준으로 심판받아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J. Murray)

=====2:13
율법을 - 1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율법'( , 노모스)은 관사가 없이 사용
되었다. 공인 본문(Textus Receptus, Majority Text)에는 정관사 '투'( )가 '노
무'( , '율법의')앞에 있는데, 대부분의 고대 사본( , A. B)에는 이 관사가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노모스'( , '율법')에 관사가 붙고 안 붙고에 따라
약간의 의미상 차이가 있다. (1) '노모스' 앞에 정관사 '호'( )가 붙으면, 거의 대부
분 모세 율법을 의미한다. (2) '노모스' 앞에 관사가 붙어 있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모세의 율법이나 율법의 특정한 조문(條文)을 의미하기 보다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서 추상적인 법 개념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양심 속에 주어진 법이나, 자연적 계시
속에 나타난 법이나 어떤 순종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개념의 법을 가리킨다. (3) 특수
한 경우로서 관사가 생략되어 있으나 모세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경
우이다. 이는 헬라어 문법상 이미 알려진 어떤 확실한 개념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내거
나 그 단어의 본래적 개념을 강조하고나 할 때 관사를 생략하는 용법으로서 율법의 특
수한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로 쓰인 경우가 있다. 만약 본절을 관사없는 사본을
따라 해석한다 하더라도 '율법'은 12절의 '율법'과 같은 것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뜻하
는 특수한 경우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J. Murray).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익히 배우고 들어
서 잘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자랑거리다. 그렇지만 이 지식은 그들을 심판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힘이 될 수 없다. 율법을 들었으면 행해야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율
법이 의의 법칙일지라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만이 그것으로 인해 살리라고 가르친다(레
18:5;신 4:1). 그러나 본절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원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
니라 모든 사람이 범죄할 수밖에 없는 죄인(3:23)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논리를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본서에서 '의롭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데손타
이'( )가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단지 자신
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의롭게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문제가 달랐다(J. Murray). 글자 그대로 보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율법을 행하는 자
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기준과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
나님 편에서 보시는 판단에 의하여 칭의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14
이방인이 본성으로 -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본성(nature)을 따라 부분적으로 행할
수 있을지 모르나 완전히 행할 수는 없으므로 이방인 역시 죄인일 수밖에 없다. 간혹
이방인도 율법의 행위를 수행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바울이 전개하는 논리의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다. 비록 본절이나
앞절(13절)에서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표
현하였지만 계속되는 바울의 논리는 어느 누구도 율법의 요구대로 완전히 순종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3:9, 19). 무엇보
다도 본절은 율법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받은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방인들도 양심의 법칙을 따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
행위를 할 때가 있음을 가르침으로써 유대인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다.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 인간은 그 본성에 심어진 양심과
생각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에 직면하게 된다(J. Murray). 즉 인간들의 본성 속
에 존재하는 도덕적 성향은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서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양심의 소리를 수반한다(Murray).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본래적인 양심의 법을 따라 일반 계시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의 계시
를 유비적(類比的)으로 받는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은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
다. 이방인이 갖는 양심의 법은 간혹 모세 율법과 비슷한 법과 규례를 가질 수 있으
나, 율법의 궁극적인 의미에는 전혀 도달할 수 없다.

=====2:15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 '양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
)는 문자적으로 '함께 안다'라는 의미로서 본절에서는 '함께 증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쉼마르튀루세스'( )와 함께 쓰여 사람의 마
음속에서 연대적으로 증거하므로 율법처럼 증인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으로
쓰여졌다. 양심은 인간이 마음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살피면서 때로는 자신을 정죄하기
도 하며, 율법과 일치한 행동에 대하여는 스스로 선한 증거로 인정하기도 하는 인간의
'바른 인식의 주체'인 것이다(고전 8:7-12). 칼빈(Calvin)은 양심을 정의하면서 '합리
적인 행위에 대하여서는 변호하며 악한 행실에 대하여서는 고발하고 유죄 선고를 내리
기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양심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도덕적 성품을 보여준다(고호 4:2). 그러나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은 계속해서 죄 가
운데 자신을 방치하여 스스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거짓 속에서 멸망으로 나아
간다(갈 6:3;딤전 4:2;딛 1:15).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생각이 갈등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사람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그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한쪽에서는 그것을 합리화시키려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러한 갈
등이 반복되는 상태가 모든 사람의 내부에 존재한다. 이것이 곧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율법적인 요소인 것이다.
율법의 행위 - 율법에 따르는 행위로 해석되기 보다는 율법적인 요소가 인간의 양
심 가운데 활동하며 그것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통해
양심의 갈등을 느낀 후에 이전보다 나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2:16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 본 구절은 문자적으로 '내 복음을 따라'(
, 카타 토 유앙겔리온 무)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말은 바울 자신
이 전파한 복음을 근거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
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취했는데, 이것은 협소한 의미로 사용되어 '이신 칭의'의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파한 모든 내용을 가리킨다. 초대 교육 교부들은
이것을 '누가복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Origen, Jerome)여기서는
바울의 전파 내용 중 종말론적인 설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왜
냐하면 바울이 본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복음'의 출처가 자기 자신인 것처럼 나타내고 있
다. 그러나 이는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깊이 연관되는 표현으로 바울 자신이 예수께로
부터 사도로 세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인식을 드러내 주며 자기가
그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이
러한 부르심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반응한다는 뜻에서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이 용어가 원문에서는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
는 구절 뒤에 따라 나오지만,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복음과 연결지을
핑요는 없다(Calvin). 오히려 본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 아니
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요 5:27;행 17:31)하
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이 성취되어 인간들에게 주어졌듯
이 그 복음으로 인한 심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행되는 것이 정당한 절차일 것
이다. 예수께서도 심판날 왕권을 가지고 오실 것을 말슴하셨다(마 16:28).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 심판날에는 감추인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고전 4:5).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신
것도 어떤면에서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에 대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앞
에서는 선하게 행동하고 선한 말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에
외식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심판날에 남김없이 드러내실 것이다(마 12:36, 37).
그날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헤메라'( )는 문장 맨 앞에
위치하여 강조적으로 사용되었다. 바티칸 사본(B;codex Vaticanus)에서는 정관사 '헤'
( )가 표기되어 있는데 문법상으로는 맞는 듯하다. 그러나 이처럼 정관사를 생략하는
것은 바울의 서술 방법 중 하나이다(12절). 더욱이 5절에서 '그날'에 대해 언급하면서
정관사를 사용했기 때문에 굳이 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의미가 통하고 본절에서는 내용
자체가 마지막 심판 날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으므로 생략한 것 같다.

=====2:17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본절 첫머리에 '이데'( , '보라'), 혹은
'에이 데'( , '그러나 만약')가 있다. 흠정역(KJV)이 번역한 공인 본문
(Textus Receptus)은 전자를 취하지만, 대부분의 사본들과 비교적 오래된 사본들( ,
A, B, D, K, )은 후자를 취하였다. '에이 데'는 직설법과 함께 사용되어 실제로 발
생될 수 있는 상태를 가정하는 조건절을 갖는다. 따라서 본절의 '에이'( , '만약')
는 20절까지 조건문으로 취한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 '칭하는'의 헬라어 '에포노마제'( )
는 '이름을 붙이다' 또는 '칭함을 받다'라는 뜻을 가진 '에포노마조'(
)의 현재 조건문으로 그 의미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대인'( , 유다이오스)은 '히브리인'( , 헤브
라이오스)이나 '이스라엘인'( , 이스라엘리터스)이라는 용어와 구
별된다. 히브리인이라는 호칭은 언어 군(群)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고, 이스라엘인이라
는 호칭은 구속사적인 개념을 강조하는데, 유대인이라는 호칭은 헬라인이나 이방인들
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모세 율법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반영
한다.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특권을 자랑할 뿐 아니라 그 특권을 받지 못한 이
방인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이러한 우월감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함으로 나타났으
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들은 특권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
에 따르는 책임을 무시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에 걸맞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출
19:6) 특권을 유지하려면 '언약을 지켜야 할'(출 19:5) 책임이 있음을 무시했다. 그들
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내세웠으나 실상은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면서 그들이 부여받은 특권만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세례 요한의 책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마 3:9).

=====2:18
본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얻게 된 유익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셔야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서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셨기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백성
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구원 계시'를 가리키지만 좀더 폭넓게 하나
님의 섭리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용어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계시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
이 요청된다.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 본 구절에 대해서는 해석자들마다 약간씩 견해가
다르다. 예를 들어 틴델(Tyndale)은 '선악에 대한 경험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며,
모펫(Moffat)은 '종교에 있어서 생동력있는 것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
기도 한다. 또한 영역 성경중에서 이 구절을 '도덕적인 구분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한다(NEB). 이러한 해석상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칼빈(Calvin)
은 선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선악을 구별하는 것을 동시에 인정한다. 이러한 해석은
메튜 헨리(Mattew Henry)같은 주석가도 동의한다. 그렇지만 본문이 뜻하는 바는 칼빈
의 첫번째 견해에 더 접근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절은 유대인들이 단순히
선악간에 판단한다기 보다는 율법의 선한 교훈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 선한 것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그 선을 옳은 원리로 받아들였
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율법에 따르는 선한 삶을 살
지 않은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
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한'(1:21) 이방인들의 어리석음과 동일하다.

=====2:19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을
부산 구문의 형식으로, 직역하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서'가 된
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으로 이해하여 '지식과 진리
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므로'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영역 성경 중에서도 이 구절을 이
유를 나타내는 접속사(because)를 사용하여 번역했다(NIV).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흐
름상 적합하다고 본다. 한편 '지식'과 '진리'는 특별한 의미상의 구별 없이 중복어법
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한다(Black). 그리고 '규모'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
포시스'( )는 '모양'이나 '외모'를 뜻하지만 외적인 모양만을 가
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참된 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Barmby). 그래서 혹자는
'모르포시스'를 '본질'( , 휘포스타시스)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Black). 간혹 학자들 중에는 '모르포시스'를 유대인들의 '외식'과 같이 '과장된
외형'(Calvin)이나 '경건이 없는 겉 모양'(Matthew Henry)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러
한 해석은 본문의 성격상 적합하지 않다. 본문에서는 유대인이 율법을 통해 가진 지식
이나 진리가 거짓되다든지 알맹이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한
참된 지식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Murray, Barmby) 그 지식을 좇지 않
고 자기 임의대로 행하는 것을 책망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 - 성경에서 소경과 어두움에 있
는 자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눈이 먼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어둠 가운데서 헤매이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사 42:19;56:10;마 6:23;요
1:5;고후 4:4;요일 2:11). 여기서도 바울은 역시 중복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전하고
자 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어두움에 있는 자들의 빛'이라는 표현
은 이방인을 향한 유대인들의 사명을 시사한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자기의 등불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토라를 소유한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
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명마저도 자신들의 특권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
고 말았다. 오늘날 성도들도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라고(시 169:105) 고백하면서
빛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처럼 말씀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자랑하려 하는 잘못
을 범하는 것이다.

=====2: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 - 영적으로 '이리석은 자'와 '어린아이'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가 영적인 의미에서 상징하는 바가 '연약한 존
재'(고전 14:20;엡 4:14) 또는 '어리석은 존재'(잠 22:15)로 나타난 점으로 미루어 보
아 본 구절도 앞절과 마찬가지로 중복어법에 의한 강조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훈도'란 용어는 헬라어 '파이듀테스'( )로 보통 '선생'으로 번역되
는 헬라어 '디다스칼로스'( )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좁은 의
미에서 '파이듀테스'는 잘못을 범할 때 채찍질도 가하는 '엄한 선생'을 가리킨다.
스스로 믿으니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잘못은 특권을 부여받은 자들이라
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사
용하고 있는데(갈 6:3, 4) 본절과 같이 행함 없는 자랑을 위선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으로 말미암아 더 큰 행악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
의 신념을 신뢰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에 지나친 기대를 가
짐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가운데서 자신을 속이는 잘못을 범하였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은 그 이웃들에게 자신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짐들을 지우는 반율법적인
잘못을 범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신념은 자신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
홀히 여기는 결과를 초래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고 말았다.

=====2:21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 이 질문은 유대인들
의 형식적인 삶에 대하여 다음에 계속되는 네 가지 질문을 유도하기 위한 대표적인 의
문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유대 랍비들의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
(Hendriksen).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
며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부했고(요 9:34), 이 점은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신 바 있다
(ak 23:3).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자기들이 가르치는 바를 자신들은 지키지 않으면
서 의로운 체 하는 그들의 외식이었다(마 23:23-28). 이러한 의미에서 유대교 지도자
들은 여호와 신앙을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시킨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행동으로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심령은 전혀 하나님과 무관하며 단순히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종교 지도자에 불
과했다.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 '간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이큐오'(
)는 히브리적 표현에서 '영적 간음'이나 '우상 숭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
도 하였으나(계 2:22) 본절에서는 우상 숭배를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적
간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바울은 의도적이며 구체적인
사실을 선명하게 표현하면서 그들 가운데서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온갖 음행과 간통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장 엄격한 율법을 종교의 원리로 삼고 있었
지만, 그들의 도덕적 기준은 여전히 부패한 인간 본성의 심연에 머물러 있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 앞에서 언급된 '도적질'과
'간음'이란 용어를 비추어 볼 때 바울은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
대인은 십계명에 따라 우상을 가증스럽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나 우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을 탐내어 도적질했다. 신사(神社) 물건을
도적질 한 것이 악행인가에 대해서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그러한 행위가 죄인지 죄가 아닌
지에 대해서 논하고자 이 질문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가증스러이 여기는 우상 제물을
탐낸, 우상 숭배 이상의 죄악을 폭로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이 문제
를 암시적으로보여주면서 그 행위가 죄가 된다고 교훈하고 있다. 즉 신명기는 우상들
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어 취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그 금지의 이유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로 인해 올무에 빠질 것이 염려되기 때문인 것을 들고 있다(신 7:25).

=====2:23
학자들 사이에는 본절을 의문문으로 해석하느냐 평서문으로 해석하느냐에 대한 의
견이 분분하다. 평서문을 주장하는 학자들(Cranfield)은 24절에서 헬라어 원문상 24절
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 )가 사용되고 있으므로 본절은 그 접속사를
유도할 만한 이유를 묻는 의문문이 되든지 아니면 그 이유를 유도해 내는 평서문이 되
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본절은 이유를 묻는 의문문의 성격을 띠지 않았으므로
이유를 유도해 내거나 확정을 나타내는 평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본문 가운데서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24절의 접속사 '가르'
( )는 21절에서 23절까지에 언급된 다섯 가지 질문을 하게 된 근거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본절은 내용상 앞에서 언급된 네 가지 질문의 형식과 잘 부
합될 뿐 아니라 특히 21절에 언급된 첫번째 질문을 보다 구체화시켜 대비적으로 표현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나머지 세 가지 질문을 요약한 질문도 된다. 따라서 본절은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편이 본문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된다.
율법을 범함으로 - 이말은 유대인들이 범한 잘못들(22, 23절)이 곧 율법을 범한 행
위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21절에서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는 질문의
내용이 율법을 범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것임도 본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2:24
기록된 바와 같이 - 이 표현은 본절이 사 52:5의 인용구임을 시사해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권위를 내세우는 동시에 자신의 논리를 더욱 확고히
정당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바울이 이사야 선지자의 직접적인 선포를 간접적인
내용으로 변형시켰으나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 당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마치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을 소유한 거룩한 백성인 양 취급했다.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삶이 고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지나친 자랑에 이방인들이 속
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바울이 고발한 것과 같은 유대인의 범죄함을 발견
한다면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도구가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
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임을 바울은 분명하게 밝
히고 있다(J. Murray).

=====2: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 바울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율
법과 함께 또 다른 자랑거리인 할례의 문제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자신이 의도한 복
음의 본질에 한 걸음 더 접근하고 있다.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시키는 유일한 기준은
율법이지만 표식은 할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들
어 논리를 전개해 왔지만,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자랑거리요 표식인 할례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더욱더 유대인들이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서 '율법
을 행한다'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때 유대인들의 할례가 그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
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형식적인 할례 의식에 그치며 이는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
손으로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신적인 힘을 상실케 하고 만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바
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하나님이
능히 이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고 경고했던 것이다.
네 할 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가 의의 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오해했다. 실제로 유대교의 전승에 따
르면 '게헨나(지옥) 문 옆에 앉았을지라도 할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을 져 준다'는 내용의 교훈이 있다(Harrison). 이와 같이 유대
인들 사이에서는 할 례가 다른 어떤 의식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바울이 형식적인 유대인들의 할례는 무할례와 같다고 선포한 것은 혁명적인 선언
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선포로 인해 유대인의 자랑은 쓸모없는 것으로 변하게 되며 형
식적인 신앙에서 실제적인 신앙으로의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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