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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로마서 6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4|조회수14,897 목록 댓글 0


로마서 제 6장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본절은 본장이 은혜와 죄의 관계를 설명하는 5:20,
21 내용을 이어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5장에서 바울이 주장한 내용은 '죄에 거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를 깨닫는 문제'였다. 율법을 통하여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죄가 드러나게 됨에 따라 인간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느끼게 된다. 그 당시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죄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오늘날
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은 기독교 진리의 깊은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수박 겉핥기'식의 표면적 지식을 가지고 애매하고 오해하기 쉬운 문제에 관심을 쏟는
다. 여기서 '죄에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메노멘 테 하마르티아'(*
)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이 문구가 현재 능
동태 가정법을 띤 것은 그 내용이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둘째, 이 문구는
'죄와 더불어 산다'는 의미로 죄와 더불어 전혀 투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자들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해 그
리스도를 섬기는 체하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런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色慾)
거리로 바꾸는 자들(유 1:4)이다. 사실상 칭의의 교리 자체를 조금이라도 오해한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저항(抵抗)을 약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전과정
이 인간의 행위를 배제시키고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게 됨으로 구원
교리도 역시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는 자유와 방종
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부도덕이 판을 쳐도 교리적으로 그것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
에 이르게 되었다(고전 5, 6장).

=====6:2
그럴 수 없느니라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1절의 가상적인
질문에 대한 단호한 부정의 대답이다. 바울은 악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장하고자 하
는 사악한 생각이 매우 모순됨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허용하는 면
허장이 아니라 성도의 의를 회복시키는 특허장이다. 한편 바울은 이와 다소 다른 문맥
에서(3:8, 9) 본문과 비슷한 어투로 대적들의 주장을 공박한 바 있다. 바울이 칭의론
(稱義論)을 가르치던 당시, 그의 가르침이 율법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
함으로써 자유 방임 사상을 만연시키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그러
한 종류의 반론을 제기했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답변은 짧은 기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수년간의 깊은 명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
고 본다.
죄에 대하여...더 살리요 - 바울은 이제 성도의 편에서 논증을 전개한다. 죄에 대
하여 죽은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셨고 이 속죄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죄가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전도(顚倒)시키는 행위이다(Calvin). 혹자는 본절의 '죄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하마르티아'(* )를 '죄로 인하여'(on account of sin)로 해석
한다(Michaelis, Cramer, Storr, Flatt, Nitzsch). 그러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그러
한 해석은 본절의 문맥상 바울이 의도하는 주장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함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죄와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악된 삶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交通)
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처럼 성도가 '죽었다'는 선포
를 종종한다(11절 ;7:4, 6;갈 2:19;골 2:20;3:3). 이러한 성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
음이요, 율법에 대한 죽음인데 실제적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옛 사람의 죽음이다.
이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라고 고백했다. 이
와 같은 체험적 고백이야 말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갖는 것이
다.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 또 죄에게 종노릇한다는 것
은 분명히 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해서 죄의 세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거나 죄를 결코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7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죄와 투쟁하게 된
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권
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초래하는 엄청난 불행들에 대하여 죽었으며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6, 14, 16, 17절 주석 참조).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바울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
는 것을 세례받음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세례는 단순한 의식(儀式)이나
성례전(聖禮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은유적 의미를
갖는다. 세례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은 다른 구절에서도 본절과 비슷한 연관성을 지닌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계기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게 된 경우가 그러하다(고전 10:2). 그들은 처음으로 모세와 연합하
였고, 모세의 지도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모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
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
하여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며, 함께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하며(고전 12:13), 이것은 성도의
신령한 체험이라느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와 성찬 자
체에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이 있는 것처럼 가르침으로써 교리적인 오류를 범하
고 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의 죽으심에 세례받아 연합되었다는 것은 성도들
역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함께 죽은 자된
성도들은 죄에 종노릇하던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계속 죄에서 종노릇하는 신분에 머물
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킴으로
써 바울은 많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더욱 처절하게 회개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있다.

=====6:4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 1-3절까지의 진술에 대한 결론을 유도해 내기 위해 사용되
었다. 특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도 연합한
자들이라는 3절의 진술을 본절에서 더욱 진전시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함께 장사되었나니 - 침례교도들은 본 구절이 물에 잠기게
되는 침례에 대한 영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절은 고전
15:3, 4과 같이 침례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
심과 장사되심이 갖는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5절 이하에
서 계속되는 바울의 설명에서 더욱 분명하게 밝혀진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
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을 '세례'라는 용어와 결부시킨 것은 성도와 그리스
도의 영적인 연합과 인격적인 연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Murray). 그러나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세례받음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생동적인 연합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는 사실이다. 바울은 비록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몸을 잠그는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葬事)되는 일로 묘사하였다. 여기서 '장사된다'(*
, 쉬네타페멘)함은 자연적인 출생으로 맺어지는 아담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던 옛 사람(엡 4:22;골 3:9)의 종말을 상징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하기 이전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과 행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의미
한다(갈 5:24;골 2:12).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 어떤 사람들은 '영광'을 '장엄한 권능'으로 해석한
다(Hendriksen, Harrison, Barmby, Calvin, Black, Phillips, Erdman, Stott). '하나
님의 영광'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Omnipotence)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
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용어를 '하나님의 장엄한 권능' 정도로 해석
하는 것은 '영광'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를 만족스럽게 드러내었다고 볼 수 없다. 본절
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새명 가운데 사는 것에 대
한 수단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광'
이란 용어 자체가 지닌 포괄적인 뜻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죄에 대하여 죽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까지 포함
됨을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성도가 단순히 죄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의(義)의 영역에서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는 것"이라는 말씀과(요 10:10) 잘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는 말은 '새 생명의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그 가운데서 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가운데 거하자'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오해한 자들이다.

=====6:5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 블랙(Black)은 본 구절을 '그리스도
인 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이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함으로써 그리스
도의 죽으심을 공유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머레이(Murray)도 이 해석에 동의한다. 이
해석은 '연합한'이라는 형용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쉽퓌토이'(* )가
'함께 심겨진' 또는 '함께 자라난'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
나 본장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에까지 자라
난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 따라서 본절의 '쉼퓌토이'는 이미 바울이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성도가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음을 구
체적으로 표현해 주는 용어일 뿐이다(Hendriksen, Barmby).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 '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소
메다'(* )가 미래 시제인 것은(shall be, KJV) 본절에서 바울이 장래에
일어날 성도들의 신체상의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한다
(Tertullian, Chrysostom, Ambrosiaster). 헬라어의 미래 시상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 외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논리적으로 또는 불가피하게 일
어날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후자(後者)의 의미를 살려 '에소메다'를 RSV는 '확실히
되리라'(shall certainly be)고 해석하였다. 또한 몇몇 주석가들은 본절의 미래 시제
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함으로써 당연히 초래되는 결과적 사실을 암시한다고 주장
한다(Murray, Meyer). 따라서 본절은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포괄한다
고 봄이 타당하다. 그러나 심사 숙고해야 할 사항은 바로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
에게 속한 자들에게 허락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연관시켰다. 그 삶은 장래 뿐만
아니라 현재에 속한 것이다.

=====6:6
우리가 알거니와 -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유대인이 아니라 바울 자신과 그의 복
음을 들은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단순히 로마에 있는 성
도들만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즉 바울은 진술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복음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진 자들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 옛 사람 - 바울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칭한다. '옛 사람'은 영적인 죽음 아래서 신음하며(엡 2:1;골 2:13) 본질적으로 마음
이 악하여 죄에게 종 노릇하는 사람이며(6절),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즉 '새 사람'에 대해서 바울은 이미 1:18-3:18에서 자
세하게 언급하였다. '옛 사람'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그 죄로 인해 아무
런 갈등을 느끼지 않으며, 바람에 밀려 다니는 돛단배와 같이 죄의 세력에 따라 이리
저리 끌려다닌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 이 표현은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세
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합하였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 말은 우리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낡은 질서에서 떠나 의와 평안이 있는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의
미도 된다(갈 2:20). 결국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더 이상 육체의 욕심
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생활하는 삶의 변화를 가리킨다(고
후 4:11;골 2:20).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옛 사람이
죽은 것과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죄
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한다. 비록 성도가 현재의 삶 속에서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
을 지니고 있으나 신분상으로 이미 죄의 몸은 죽은 상태에 놓여 있다. 옛 사람이 그리
스도와 함께 죽은 사건은 반복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도에게 단일회적인(once for all)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
명을 소유하게 되는 연합의 체험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성도의 현재적 삶은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 속에 머무르고 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했던 것이다. 이 권면은 한 마디로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라
는 의미가 된다.

=====6:7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 여기서 하나의 난제(難題)가 있다. '죽은 자'가 그리스
도를 지칭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한 그리스도
인들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비록 본절이 단수로 언급되었으
나 그리스도가 죄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본 구절이 일종의 일반 명제로서 할라카
(Halakah)에 언급된 랍비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유명한 유대인 교법사 가
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았고(행 22:3) 랍비의 지식과 유대인 전통에 정통(正統)했던
점을 미루어 보아 본절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기보다는 일반적인 명제로 언급되
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베드로도 일반 명제 형식을 빌어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적인 예로 스코틀
랜드에서는 사형 집행을 받은 사람은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한다고 한다. 한편 '죽은
자'와 연관해서 혹자는 '성도'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미 죽으신
그리스도와 같이 성도는 모든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죽었으므로 죄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에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Vaughan, Liddon). 그러나 그리스도나 성도가 죄
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세력, 죄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본절은 칭의의 순서적 과정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
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씻음이 이루어짐을 믿고 회개하는 자
에게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롭다 함
을 얻는 것이다. 칼빈(John Calvin)은 본절이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면서 재판관의 판결로 사면(赦免)을 받은 죄수가 그 순간 기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듯이 성도가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매우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은 본절을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으면
그것으로 율법의 의무에서 해방을 받는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
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날에 자기
의 죄를 책임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벧후 2:10).

=====6:8
본절은 내용상으로는 3절과 5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성
도의 연합이 인격적이고 생명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영원한 연합임을 보여주고 있다
(Murray).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3절에 언급된 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여기서 다시 이 말씀을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성화(聖化)의 생활이 부과됨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 여기서 '살 줄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제소멘'
(* )은 1인칭 복수 미래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우리가 살
것이다'(we shall live;KJV, RSV)이다. 이는 5절 주석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장래
적인 소망 곧 부활의 소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성
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살으심과 연합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곧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니 이 땅에서 소유케 된 생명(* , 조에)은 장래에 일어난 구속 사건의 모
든 결과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쉰제소멘'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 일어
날 성도의 부활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가 이 땅에서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소유하며 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
나 이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부활 생명과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
한편 본절에 '믿노니'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튜오멘'(* )은 1인칭
복수 현재 직설법으로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확실성 있는 견고한 믿음을 가리킨다. 이
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6:9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 '다시...아니하
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케티'(* )는 '절대로...아니다'는 의미로서
부정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로서는 가장 강력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의미를 살
려 KJV는 '우케티'를 '더이상...않다'(no more)로 RSV는 '결코...아니다'(never)로 번
역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자의적(自
意的)이며 절대적인 일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아무런 흠과 티가 없으
셨으나 인류 구원을 위한 성업(聖業)을 이루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고 또 다
시 살아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타의에 의해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면 거기에는 하나
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죽지 아니하시는', 즉
'결코 죽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보장이 되신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이 그를 주장한다면 성도의 신앙
은 진실로 헛된 것을 좇는 꼴이 될 것이다(고전 15:12-17).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
한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사건에 있다.
이 사건이 참이어야만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연합을 하여 살게 된다는 확신
이 참이 될 수 있다. 사망이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도
역시 주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주장이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일반 명제
에 대한 근거가 된다. 한편 본절이 자칫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
다는 어감을 줄 수 있다. 본래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는 결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
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8:3) 사망의 세력권 안에서 활동하게 되셨다. 그리고 죄인이 되시어 사망의
원리를 따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본절에서 이미 그리
스도께서 한번 사망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처럼 '다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 본절의 '죄에 대하여'(*
, 테 하마르티아)란 표현은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로 인한 필연적인 죽음(창 2:17)이 아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짐지우신 자기 백성의 죄와 허물을 위해 죽으셨다(사 53:4-6). 또한 본절의 '단번에'
(* , 에파팥스)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제사 규례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
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드렸으며 백성
들은 죄를 범할 때마다 희생 제물을 가져왔으니 그 제사는 반복적이었다. 그러나 대제
사장되신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들이 반복적(反復的)으로 드려왔던 그 제사
대신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 '오직 한번만'(once for all, RSV) 드림으로써 구약의 제
사를 완성하셨다(히 7:27;9:12;10:10).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피흘리신 제사는 구약의 모든 피제사의 최종적 제사요, 완전하고 영원한 제
사이기에 제사를 또 드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다.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 '하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을 '하나님
으로 말미암아'(throught God), 혹은 '하나님 안에서'(in God)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으나(Calvin, Chrysostom) 이보다는 '하나님을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
여'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Murray, Meyer, Hendriksen). 우선 본절의 '하
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은 '죄에 대하여'와 대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구의 해석은
'죄에 대하여'란 표현에 대한 해석과 문맥적 일치를 요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하
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맥락
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권고한 12-14절 내용과도 조화된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그의 서
신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함을 강조한 바있다(3:8, 14).

=====6:11
본절에 대해 스토트(John Stott)는 다음과 같이 매우 논리적이면서 간략하게 설명
했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죽으심이었으면, 그의 살으심이 하나님에
대해 살으심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 안에서 그와 연합되었다면, 우
리 자신은 죄에 대하여는 죽었으며(have deied)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다(have
risen).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이 여겨야 한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2절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
아 자유를 누림을 말한다.칼빈(Calvin)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성도는 영적 자유를 얻은만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육체의 소욕(所欲)을 제어하는 성화의 삶을 살도록 분투해야 한다. 이것
은 죄에서 완전히 끊어져 거룩함과 의 가운데 온전히 거할 때가지 해야 한다"고 하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엔 크리스토 예수) - 본
절에서 이 문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와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라는 전 후의
문구에 동일하게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는 죄의 세력으로부
터의 자유를 생각할 수 없고 생명의 부활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커다란 건축물의 초석(礎石)과도 같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 표현을 그의 서신에서 자주 사용하였던 바, 성도와 그리스도간의
관계성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
용에 관해서는 본장 주제 강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참조하라.
여길지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제스데'(* )는 현재 명
령형 복수 2인칭으로 '권고'로 해석해도 되며 '명령'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12절과 13절에 사용된 동사가 명백히 명령형으로 해석되므로 본절도 권고형보다는 명
령형으로 해석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즉 성도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
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렇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진 사건은 성도들을 그러한 신분으로 만든 사
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다'는 말은 실재가 아닌 사건을 실재인 것처럼 생각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적인 사건을 파악하여 그것을 굳게 붙잡는다는 의미이다.

=====6:12
그러므로 -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1, 2a 절)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교리적으로 피력했던 진술들을(2b-11절)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본 접속사를 사용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 바울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
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가 성도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
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이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고 있는가 ?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시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언급함으로써 죄에 대한 성
도의 죽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한다. 이것은 죄에 대한 성도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함
께 실재적으로 발생했던 사건에 대한 진술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죄가 성도들에게 왕
노릇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보장되어 있다. 다만 죄가 연약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고 이것 역시 현실이다. 그러나 죄가 이전과 같이 성도들에게 왕노
릇할 수는 없다. 성도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만 주인이다. 그런데도 죄는 성도들의 연
약한 몸을 통하여 역사하면서 자신이 주인인 체 할 수 있다. 이러한 거짓된 가장(假
裝)조차 허용하지 않기 위해 바울은 본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성도는 의
인이요 거룩한 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죽을 몸'을 지닌 현재는 아직 죄와 투쟁
하는 신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죽을 몸'의 '죽을'은 헬라어로 '드네토'(*
)이며 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벌로써 내려진
필연적인 죽음을 가리킨다(mortal;KJV, RSV).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기 전에 죽지 아
니하는 '생령'(生靈)을 가졌었다(창 2:7). 그러나 그가 범죄한 후부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이 사망의 진노는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내려졌다. 그러나 사망의
진노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에게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도
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면서 타락한 세상과 부딪히게 된다. 그렇기에 바
울은 더 이상 죄의 유혹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지속적으로 애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몸의 사욕(私慾)을 순종치 말고 - 죄는 우리 죽을 몸을 통해서 역사한다. 그 몸에
서 죄를 짓게 하는 욕구가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욕구대로 행하게 되면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도전(挑戰)을 받게 된다. 성도라면 당연히 죄와 투쟁할 준비가 되
어 있어야 하며 또한 투쟁해야 한다. 비록 죄에게 패배할 때가 많을지라도, 성도는 이
미 죄에 대한 승리를 보장받은 신분이므로 염려할 필요는 없다. 한편 '순종치 말고'라
는 말은 난폭하고 불같은 정욕대로 행할 것을 사단이 강요한다는 암시를 함축한다. 사
단의 세력은 성도가 단순히 죄와 연합하는 것을 지나 죄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죄의 심각성과 타격적인 지배성을 상기할 수 있다. 일찍이 사단은 그리스도께
도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조건을 내걸은바 있다(마 4: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
단의 유혹을 이기시고 꾸짖은 것처럼 성도는 죄악의 곁에 가지 말며 죄의 유혹을 단호
하게 거부해야 한다.

=====6:13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 '지체'라는말은 12절의 '죽을
몸'이라는 말과 내용상으로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불의의 병기'(*
, 호플라 아디키아스)란 표현은 각각의 지체가 죄의 종이 되어 불의를 행하는
도구가 됨을 나타낸다. 특히 바울은 '병기'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단순히 각 지체가
불의를 행함에 있어서 도구적인 의미보다 더 적극적인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성도라 할지라도 자기 몸의 지체를 제어(制御)하지 않으면 이미 그의 몸
은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오직 너희 자신을...하나님께 드리며 - '너희 자신'은 '너희 죽을 몸'(12절)과 '너
희 지체'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란 표현
은 11절 내용의 반복으로, 성도가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자의 신분임을 상기시
키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서, 새
생명을 소유한 신분으로 자기의 지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 이유는 성
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 6:15),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며(고전 6:19), 값
으로 산 것(고전 6:20)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혹자는 바울이 몸의 지체를 악에 대항
하고 의를 위해 전쟁하는데 사용되는 무기로 생각하게 된 것이 그의 선생들이나 스토
아 철학자들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Black).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매우 희
박하다. 오히려 바울은 구약의 '거룩한 전쟁'(holy war)에 대한 개념을 영적 전쟁에
적용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은 성도의 삶을 군사적 삶에 비유하는 표현법을 즐겨 사용
했다(고전 9:7;고후 6:7;엡 6:10-20;살전 5:8;딤후 2:3). 거듭난 성도는 자신의 몸을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죄와 투쟁하기 위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성도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싫어할 때, 이미 그는 자기의 몸이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떠한 의의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됨을 깨달아야 한다.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 성도가 자기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바쳤
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와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 수 없다. 그렇지만 자기 몸을 하나
님께 바치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그 사람에게 죄가 왕노릇할 수는 없다. 한편 '주관치
못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퀴리유세이'(* )는 미래 능
동태 직설법이다. 여기서 이 단어가 미래 시제인 것은 단순히 장래에 되어질 일을 언
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주관치 못한다는 내용을 강력하게 확증(確證)한다. 즉
죄가 성도를 주관치 못하는 것은 장래뿐만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도 확실히 그렇다는
것이다. 이 강력하고 확실성 있는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는다.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 본절에서 '법'(* , 노모
스)이 '은혜'(* , 카리스)와 대비되어 있으므로 이 '법'은 '법칙'이나 '세상
적인 법'이 아니라 '율법'을 의미한다. 바울이 '율법'과 '은혜'를 대비시킨 것은 죄가
성도를 주관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와는 관계없이 죄의 문제만으로 고민하여 항상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되니, 그 사람은 죄의 종이다. 그러나 은혜의 원리에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확신과 함께 죄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에 거하게 되므로
결코 죄가 그에게 왕노릇할 수 없다. 이 사실은 8:1, 2에서 바울이 선포했듯이 그리스
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을 뿐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
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6:15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 이 질문은 1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본절은 1절과 같은 질문이지만, 1절은 문제의 제
기이며 본절은 제기된 문제를 풀기 위해 그 동안 진술했던 내용을 재확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주제로의 전환을 위한 예비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
고 또한 강조점의 차이로 1절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해도 좋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며, 본절은 '죄에서 해방되어 은혜 아래 있으므로 계속 죄를 지어도 좋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자에 대한 반론이다. 한편 '죄를 지으리요'라는 표현도 역시 1
절의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자세한 것은 1절 주석을
참조하라.
그럴 수 없느니라(* , 메 게노이토) -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질
문한 사항에 대해 강한 부정의 대답을 하고 있다. KJV는 이 문구의 헬라어 '메 게노이
토'가 지닌 강력한 부정의 뜻을 살려 '하나님이 금하신다'(Good forbid)라고 해석하였
고 RSV는 '결코 그렇지 않다'(By no means !)라고 해석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당연히 방종한 마음과 생활을 거부하고 은혜에 합당한 생활을 해
야 한다.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로스'(* )는
'청지기' 또는 '집사'를 가리키는 '디아코노스'(* )와는 달리 철저히
주인에게 예속된 '노예'를 가리킨다(slave;RSV, NIV). 어떤 사람이 자기 몸을 노예로
바치면 이미 그는 자기 몸에 대한 주권을 포기해야 한다. 오직 주인에 대한 철저한 복
종만 있을 뿐이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 영적인 차원에서 사람은
'죄의 종'이든지 '순종의 종'이든지 어느 한 편에 속하게 되어 있다. 물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하니한'(계 3:15)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엄격한 의미에서 '죄의 종'에
속한다. 한편 본절에서는 '죄의 종'과 '순종의 종'이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죄의 종'은 '불순종의 종'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곧 '불순종의 아들들'(엡
5:6)로도 이해된다. 그리고 이들은 벧리알의 자손들로(신 13:13;삿 19:22) '불법의 사
람'이요, '멸망의 사람'이다(살후 2:3). 그리고 또 다른 대조로서 '사망'과 '의'가 언
급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죄의 종'과 '순종의 종'에게 각각 주어지는 열매다. 23절 말
씀과 연관지어 볼 때 본절의 '사망'은 '영원한 멸망'을 의미한다(살후 1:9). 반면에
'의'는 '사망'과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영생'으로 대치해도 무난하다.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혹자는 본절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가 하나님께
로 돌아온 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오늘날의 상태에 이르게 하신 하나
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주석했다(Hendriksen). 이 말은 바울이 로마 교회가 성화(聖
化)된 모습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절 이하에 계속된 바울의 진
술은 성화의 진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변화된
신분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 사망이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했으므로
(5:17) 그의 생명에 동참한 모든 사람은 죄의 종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지니고 있던 사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성화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 - 혹자는 본 구절이 딤후 1:13의 '바른 말'과 딤
전 1:10의 '바른교훈'(딤후 4:3;딛 1:9;2:1)과 같이 복음 중에서 윤리적인 부분에 대
한 설명에 속한다고 단언한다(Murray). 그러나 만일 이 주장을 따르면 곧이어 언급되
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절)는 선언이 믿음에 의한 것이 아
니라 윤리적인 본을 순종함으로써 주어진 결과임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기독
교를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려 놓는 결과를 초래하며 반(反)복음적인 가르침이다. 따라
서 '교훈의 본'은 복음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음으로 순종하여 - 이 표현은 바울이 10:10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
고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과 '순종'을 동
일 선상에서 설명한다(히 3:18, 19;4:2, 6). 따라서 본 구절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또는 '마음으로 믿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본절에서 '순종'이라는 단어에 너무 치
중하면 인간 행위가 강조되며 바울이 그동안 강조했던 '믿음'과는 별개(別個)인 것으
로 오해하기 쉽다.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 성도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죄의 몸이 멸하
여졌으며(6절), 동시에 죄에 대하여 죽은 그는 죄에서 벗어났다(7절). 이런 이유로 그
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 '종이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둘로데테'
(* )는 단순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순과거 시제
는 어떤 동작이 불확정직임을 나타낸다. 즉 동작의 결과가 완료되었음을 나타내지 않
는다. 바울은 성도가 '의에게 종이 된'것을 단순과거 시제로 표현함으로써 7절의 '교
훈의 본', 곧 복음을 믿은 결과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종이 된 상태가
현재에도 계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 '육신'(* , 사르크스)은 새로운 피조물로 옮겨질
수 있는 '몸'(* , 소마)과는 달리 이 세상의 존재 양식에 속하여 있고 이 세상
과 더불어 멸망당할 자로서의 인간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 '육신'은 '영'(성령)과 대
립을 이루면서 연약함과 허무 가운데 있는 인간성을 의미한다(Ridderbos). 따라서 본
절은 본 서신을 받아보게 될 로마교회가 영적인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영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예를 들었음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종에 대한 예를 가리킨다. 바울은 성도의 신분이 하나님의 신실
한 종이라는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종과 주인과의 관계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과 같이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는 표현
을 갈 3:15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전에 너희가...불법에 이른 것같이- 본 구절은 1:18에서 3:18까지 바울이 언급한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요약 설명으로 이해된다. 바울은 여기서 로마 교회 성도들
이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 '거룩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
스'(* )가 '성화'를 의미하는지 '성결'(holiness)을 의미하는지에 대
한 견해가 학자마다 다르다. 혹자는 고전 1:30;살전 4:3, 4, 7;살후 2:13;딤전 2:15;
히 12:14;벧전 1:2 등을 근거로 '하기아스모스'가 과정적인 의미를 지닌 '성화'
(sanctification)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상태를 가리키는 '거룩' 또는 '성별'을 뜻한다
고 이해한다(Murray, Barmby).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구절들 중에 살전 4:3, 4, 7과
딤전 2:15은 단순히 '성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그밖의 것들은 그렇
지 않다. 렌스키(Lenski)에 따르면 '하기아스모스'의 접미사 '모스'(* )는 '활
동'을 의미하는데, 이 '활동'은 우리 자신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고전 1:30;6:11에서 '하기아스모스'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거룩'을 의미하며 이 '거룩'함이 '의'와 '구속'과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전가됨을 가
르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하기아스모스'를 '거룩' 또는 '성별'로 해석하든지
'성화'로 해석하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을 위해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바울은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와 '구속'과 '거룩'(성화)을 믿음으로 전가받았으나 아직
연약한 육신에 매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몸의 구속'을 기대한다고도 했으며
(8:23)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듯이(13절) 당연히 '거룩함에 이
르라'고 권면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절에 언급된 바울의 권면은 '거룩'(성화)이 구원
의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실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 이 표현은 19절의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
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
기 이전에는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
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聯合)하여 자기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사람은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 의를 행해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었
다. 비록 자연인은 본성이 율법의 행위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2:14, 15). 그래서 칼빈(Calvin)은 "육체의 자유는 단지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서 우리를 자유케 하여 마귀에게 얽매이게 할 뿐이다"라고 진술했던 것이
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교훈과도 일맥 상통한다.

=====6:21
그 때에(* , 토테) - 바로 앞절에서 언급한 '죄의 종이 되었던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죄의 종이 되었던 때를 가리킨다.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 성경은 '열매'(* , 카르폰)에 대해 말할 때
'선한 열매'(마 3:8;요 4:36;갈 5:22;빌 1:11;약 3:17)와 '악한 열매'(22절;7:5)를 구
분한다. 혹자는 여기서 바울이 '선한 열매'를 의미한다고 단언한다(Murray, Barmby).
그리고 본절의 질문에 대하여 '전혀 없었다'란 대답이 암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
한 해석은 그다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르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때'
란 표현이 죄의 종이었던 때를 의미하므로 '열매'를 달리 해석하지 않고 '열매'란 표
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면 본절은 "너희가 죄의 종이었
을 때에 무슨 열매를 맺었느냐 ?"가 된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죄의 종으
로 사망에 이르는 열매가 아니었던가 ?"일 것이다.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 이 표현은 17절에서 20절까지의 진술이 그리스도
를 믿고 있으면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면 죄에 거하자'(1절)고 주장하는 로마 교회 성
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 상태의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한
것임을 보여준다. 성도가 하나님을 모르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힘써 대적했었으
나 하나님을 알면서부터 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그는 지난 날의 일들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 죄의 종이 된 결과는 오직 '사망'만 있을 뿐이다. 혹
자는 이 '사망'이 '영원한 사망'을 가리키는지 확실치 않다고 주장하지만(Barmby),
(1) '사망'이 '영생'과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는 점(22, 23절), 그리고 (2) '마지막'이
라는 단어가 종말론적 사건인 대심판에 대한 암시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의 '사
망'은 '영원한 죽음' 곧 지옥의 형벌을 의미한다.

=====6:22
그러나 이제는 - 이 표현은 극적인 전환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것
이다(3:21 주석 참조). 지금까지 바울은 죄에게 종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실존과 그
결말에 대해 설명했으나 본절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내용으로 전환(轉換)시키고자 이
같은 접속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 18절의 내용을 반복한다. 그리고 성도가 죄에서 해방
된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있다(6절).
하나님께 종이 되어 - 하나님께 종이 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행해
야 한다. 이 '의'는 (1)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도에게 이루어졌지만, (2) 연약한 육
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성도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천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록 바울이 18절에서는 '의에게'라고 언급했고 본절에서는 '하나님
께'라고 언급했을 뿐이지 그 두 단어는 본질상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 여기에 언급된 '거룩함'도 19절에서와 마찬가
지로 '하기아스모스'(* )이다. 이 '거룩'은 인간의 순수한 노력만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셨던 '성화'
(sanctfication)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는 해석상 애매한 표현이
지만 구체화시키자면 '거룩함의 열매' 또는 '성화의 열매'로 해석될 수 있다. 바울은
이 '성화의 열매'를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얻
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테'(* )의 시제가 개역성경과는 달리 현재
형이기 때문이다. 이 시제는 본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성화
의 열매'를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지 않고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19절의 '거룩함(성화)에 이르라'는 권면과 함께 종
합적으로 해석되어야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본절과 19절을 종합해 볼 때 성도는
'성화의 열매'를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으면서도(고전 1:30;6:11) 동시에 '성화'를 수행
해야 할 의무를 지닌 신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화' 자체도 '의'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성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것을 바라보면
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그것이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 예수의 가르침대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요
5:24;6:47, 54). 그렇지만 완전한 의미의 영생은 마지막 부활 때에 거룩함의 열매를
소유한 자에게 주어진다.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 -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죄에 계속 거하는 자에게 지불되는 대가가 사망이라는 의미이다. '삯'에 해당하는 헬
라어 '와소니아'(* )는 흔히 '병사들의 급료'의 의미로 사용된다
(Hendriksen, Murray, Calvin, Barmby, Black). 비록 '와소니아'가 딤전 5:18에서는
단순히 노동자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나머지 구절들
(눅 3:14;고전 9:7)에서는 군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
로써 일꾼과는 달리 군인들이 철저하게 군사적인 의무에 매여있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처럼, 사람이 '죄의 종'으로서 죄에게 충성함으로 '사망'이라는 대가를 받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와소니아'는 그 다음에 언급되는 은사(* ,
카리스마)와 대조되고 있다. 이 '은사'는 '일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
는'(4:6) 것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다. 그리고 이 '은사'는 성도가 죄
에서 해방되어(18, 22a절) 거룩의 열매를 얻게 된(22b절) 사실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
명하다. 이처럼 성도는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자신이 노력한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사로 값없이 '의', '성화',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되므로 결
코 자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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