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제 9장
=====9: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 이 표현은 지금부터 진
술될 내용의 권위를 보다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주
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바울의 독특한 어법으로서(엡 1장)
이것이 맹세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사심으로'라는 표현으로
맹세했던 것과 일맥 상통(一脈相通)한다. 바울은 자기의 말과 계시의 최종적인 권위를
나타낼 필요가 있을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다(갈 1:1, 12).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 - 바울에게 있는 큰
근심과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것
이다. 비록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사역을 하고 있으나(갈 2:8) 자기
동족에 대한 깊은 애정은 여전함을 보여 주고 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 본 구절에서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자기의 애정이 거짓이 아님을 더욱 확증하고 있다. 초두에서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으로 자신의 진술의 권위를 세운 반면 본 구절에서는 자기와 함께 계시
며 자신의 생각을 다 아시는 '성령'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의 진실성을 입증시키고 있
다. 따라서 바울은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동족에 대한 큰 근심
과 고통의 비중(比重)과 지속성 그리고 그 깊이를 보여 주고 있다(Liddon, Murray).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따라 났으며 언약과 약속에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4-13절).
내 자신이 저주를...끊어질지라도 -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에 있어서 공통된 저주
의 의미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멸망당한다는 것이다(Murray).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주가 되신 사건도 이러한 의미의 저주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면 바울
은 실제로 자기 동족을 위해 저주를 받기를 원했는가 ?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던 모세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세는 자기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죄를 속(贖)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주의 기록하
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2)라고 탄원했다. 이때 모세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져내고자 하는 열심에서 그런 기도를 했다. 이것은 자기
를 정말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연민과 열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즉 바울
은 모세와 같이 자기 구원을 포기할 만큼 자기 동족을 사랑하고 있음을 로마 교회의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Calvin, Murray, Barmby).
=====9:4
양자됨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구약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출 4:22;신 14:1;32:6;사 63:16;64:8;호 11:1;말 1:6;2:10). 그러나 이 부자 관계는
고대 근동 지방의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 당시 왕은 신하와 백성
의 어버이와 같은 존재이자 신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어버이와
같이 경배되었던 것이지 신약 시대와 같이 친밀한 가족 관계에 있어서의 부자(父子)관
계로는 파악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문이나 기타 다른
문헌에 하나님의 성호가 가족적인 의미의 친밀한 용어인 '아바'(* , 압바)로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댈 수 있다(8:15 주석참조).
영광 - 여기서의 영광은 조직 신학적인 포괄적 의미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영광'은 머레이(Murray)가 지적한 대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나타나셔서 임하던
그 영광이며(출 24:16, 17), 성막을 덮었던 영광이며(출 40:34-38), 지성소의 시은좌
에 나타난 영광이며(레 16:2), 성전을 가득 채웠던 영광이다(왕상 8:10, 11;대하 7:1,
2;겔 1:28). 그리고 좀더 비약하자면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도(고후 3:7)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언약들 - 구약의 언약(Covenant)은 로버트슨(Robertson)에 따르면 아담(시초의 언
약, 창 3:14-19), 노아(보존의 언약, 창 6:17-22;8:20-22;9:1-7, 8-17), 아브라함(약
속의 언약, 창 12:1;15:1-18;17:1, 2), 모세(율법의 언약, 출 34:28;신 4:13;9:9,
11), 그리고 다윗(왕국의 언약, 삼하 7:1-29)등과 맺은 다섯 가지 언약이 있다. 물론
혹자는 아브라함에게 맺어진 동일한 의미의 두 언약(창 15:18-21;17:1-21)만을 본절의
'언약들'이라고 주장하지만(Murray), 그렇다고 그가 다른 언약들을 배제하지는 않는
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언약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궁극적
으로는 전체 인류 구속을 목표로 하는 언약들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세우신 것 - 모세를 통해서 시내 산에서 율법이 공포된 것은(신 4;13, 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보증하시는 선언이었다.
예배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제사 제도는 우상 숭배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포함하는 구속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스
라엘 백성은 제사 제도에 계시된 구속사적 의의를 망각하고 형식적인 예배의 본질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데 있음을 가르치셨다(요 4:23).
약속들 - 특별히 '언약'이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
이에 성립된 것에 강조점을 두는 반면,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속들에게
주신 말씀(창 12:2, 3;18:18;22:18;26:4;28:14) 자체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다시 말
해서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성을 강하게 반영하며 '약속'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개별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시사한다. 따라서 '언약'이 '약속'
에 비해 포괄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용상 이를 명백히 구분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
가 안 된다. '언약'과 '약속'은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
이다(Dunn).
=====9:5
조상들 - 족장들 곧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일컫는다(7-13절). 그런데 혹
자는 '조상들'을 세 사람의 족장으로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하며 다윗도 포함시켜야 한
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1:3에서 예수께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본장에서 그리스도의 나심을 세 족장들과 연
관지어 설명하고 있으므로 굳이 다윗을 '조상들'의 범주에 넣을 필요가 없다.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 본 구절은 골
1:15-17과 더불어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묘사한 독특한 표현이다. 그런데
혹자는 본 구절을 의도적으로 변형시켜 '저는 만물 위에 계시면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
실 그 하나님께 속한 자이시다'(Who belongs to God over all, blessed for ever)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이단으로 낙인찍힌 소시니안파(Socinianist)의
견해에 가까운 해석에 불과하다(Black).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사도 요한의 그것과 내용상 차이가 없다(요 1:1-5, 10). 한편 본 구절은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께 세세에 찬양이 있으리로다 아멘'과 같은 송영(doxology)으로 해석
될 수도 있으나 형식상으로 다른 송영과 비교할 때 송영이 아니라 분명히 주장을 내세
우는 진술이다(Barmby). 아무튼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가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 구세주이심
을 강조하고 있다.
=====9:6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 바르트(K. Barth)는 본절과 관련된 주
석에서 현재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완전하기 때
문에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킬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을 해석하여 선포하는 즉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참됨을 상실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러
한 바르트의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는 듯이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인간의 언
어에 의해 제한되거나 왜곡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뜻을 완전하게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바르트의 생각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
님의 계시를 너무 과소 평가한 데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이 구원받는 데
필요 충분하며 인간은 미약하지만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는 깨달음을 통해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 계시를 이해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된 말씀으로 불충분하고
그 진리성이 의심된다면 인간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살필 수 있는
가 ?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으나 완전하다. 본절에서
도 사도 바울은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에 주어진 율법과 약속이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에 성취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3:3-6에서 바울
이 취급했던 것이지만, 본장에서는 다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관련하여 보다 자세하
게 언급될 필요가 있었다. 즉 이스라엘이 실패했다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폐하여
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구원 섭리 속에는 온 인류에 대한 계
획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스라엘은 구속사의 전개 과정에서 모형적 선민으로 선택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혈통적 특권 의식에만 젖어든 채 그 구원 섭리를 잘못
이해하여 자기들의 역사에 그릇되게 적용시켰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 머레이(John Murray) 본 구절을
압축하여 그들이 모두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표현하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
여 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에게서 난'이란 표현
이 족장들의 혈통적 후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Murray, Harrison,
Kasemann). 즉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혈통적인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
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납득되기 어려운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본 구절의 첫번째 '이스
라엘'을 반드시 야곱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 모두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9:7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 본절은 6절 후반 구절 내용의 정당성을 입
증하고 반증하기 위한 설명이다. 이는 본절의 초두에 있는 '또한...아니다'를 가리키
는 부정사 '우드 호티'(* )가 앞절(6절)의 '...아니요'라고 번역된 부정
사 '우크 호티'(* ... )와 논리적인 연속성을 갖고 있는데서 더욱 확인된다
(Dunn). 본 구절에서 '씨'(* , 스페르마)와 '자녀'(* , 테크나)는
본절 전체에 대한 해석을 좌우한다. 먼저 이 문장에 대한 대부분의 역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이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번역한다
(RSV, NEB, NIV, NJB). 여기서 '아브라함의 씨'와 '그의 자녀'에 대한 주석가들의 의
견은 다음과 같다. (1) '아브라함의 씨'란 '자연적, 혹은 육체적 후손'을 가리키며
'그의 자녀'란 약속을 좇아서 난 참된 이스라엘, 즉 '믿는 자'를 말한다(Hendriksen,
Murray). (2) 이스마엘과 이삭은 다 아브라함의 씨였지만 여기서 말한 '자녀'는 이스
마엘을 제외한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이 육신
적인 혈연에 의존하지 않음을 보여준다(C.K. Barrett, Calvin).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 이것은 창 21:12의 70인역(LXX)
에서 문자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 알 엔 이사악)는, 문자적으로 '오직 이삭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그렇
다면 '오직 이삭 안에서'란 무슨 의미인가 ? 여기서 '엔'(* )은 제한적 의미를 가진
전치사로서 '...으로부터만'이라는 뜻이다(Dunn). 따라서 이 말은 이삭을 통해서만 아
브라함의 참 자녀라는 이름과 지위를 가지고 약속의 후사로 인정될 후손이 나오리라는
의미이다(Meyer). 그런데 바울 사도가 여기서 왜 유달리도 '오직 이삭으로부터'란 말
을 강조했을까 ? (1) 언약의 후손에 참여할 수 있는 범주를 이삭으로부터 시작한 그
후손으로만 제한하는 의미이다. (2) 이스마엘이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이삭은 하나
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씨'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녀로(창 17:16;히 11:17, 18) 이 씨의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
킨다. 따라서 앞 구절에서 사용된 '씨'가 제한된 범주로 해석된 반면에 본 구절에서
사용되 '씨'는 앞 구절 '자녀'(* , 테크나)와 같은 것으로 아브라함의 혈통
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을 뛰어 넘어 믿는 자 누구든지를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보다 광
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칭하리라'고 번역된 헬라어 '클레데세타이'(*
)는 창 21:12에 나오는 '칭할 것임이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관용구로서 3인칭 단수 미
래 수동형이다. 이 뜻은 '이름이 주어지다', '선택되다'이다(Dunn).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아브라함의 참된 씨라 일컬음 받은 계열에 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한 일방적인 은혜로 되는 것임을 '수동형'이란 점이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이스마엘이 서출(庶出)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씨가 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은
매우 인간적이고 단순한 발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뜻대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12족장과 유다의 계열을 택하셔서 아브라함의 씨라 칭해질 계통을 정하신
것이다. 또한 이 동사가 미래형으로 쓰인 것은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시작
으로 하여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영적 후손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 일어
날 것을 암시하고 있다.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 본절은 앞 구절들(6절ff.)에 대한 부
연 설명으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혈통에서 태어난 자녀라고 해서 모두가
정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문장 구조에서
더욱 잘 나타나는데, 앞 구절(3절)과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오직'에 해당하는 헬라
어 '알라'(* )로 연결되어 앞뒤 문장을 대치시키면서 뒷문장을 강조해주는 형식
을 취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앞절에서 언급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는 것과 연결된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약속의 자녀라는 것이다. 본
구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약속'에 의한 것임을 보여 주는데, '약속'(*
, 에팡켈리아)의 개념은 4장의 진술을 강력하게 반복하는 것으로 보인
다(4:13, 14, 16, 20). 바울은 이러한 진술을 통해 그 약속이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인정된 자들에게만 적용됨을 보여준다(Calvin). 약속의
자녀라고 할 때에 그 '약속'이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예정'과 연관되는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
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그 약속의 범주에 넣고 어떤 사람은 제외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모든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으며 누구나 믿음으로써 그 약속이 제
시하는 것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근거로 갈 3:26과 바울이 이방
인 신자들도 그 약속 안에 포함시켰다는 것을 제시한다. 즉 약속이 모든 자연인에게
주어지지 않고 일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택자(澤子)들에게만 주어졌다면 어
떻게 이방인들이 그 약속의 범주안에 들어 올 수 있었겠는가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만이 그 약속을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예정을 가지고 계시며 그 택자들에게 약속의 능력
으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약속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다만 인간들은 그 예정이 구
체적으로 누구에게 적용되어지는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지 못할 뿐이다.
=====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 '약속'(* , 에팡겔리아스)이라는 단
어를 의도적으로 앞으로 두어서 강조하고 있다. 즉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아들
이고 이스마엘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또 다른 성경의증거를 들어 제시
한다. 이는 6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았다는 진술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혹자는 이것이 약속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언급하려는 것이지 약속의 자녀로
서의 '이삭'과 육신의 자녀로서의 '이스마엘'을 대조 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
다(Lenski). 그의 주장대로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인간들이 믿음이
라는 것으로 반응함으로써 그 약속의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의 선
택은 육신적인 혈통에 의한 것도 어떤 공로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E.M.
Braiklock).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
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특별한 배려로 이삭이 태어났다. 아브라함
은 무능력했으며 사라는 이미 아기를 가질 수 없었음을 볼 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았음이 더욱 분명해진다(Harrison).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 본 구절은 구약의 인용인데, 바울은 구약을 인용함
에 있어서 문자 그대로 인용할 때도 있지만(3:4) 자유롭게 인용하기도 하며(3:10-19)
단순한 암시만 하기도 한다(20, 21절). 본절은 70인역의 창 18:10, 14을 자유롭게 취
사 선택(取捨選擇)하여 인용하였다(Godet, Robertson, Braiklock, Matthew Henry).
=====9:10
이뿐 아니라 -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말씀이 단산(斷産)된 사라에게
서 성취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이삭에게서도 성취 되었음을 증명하려 한다.
이러한 사실은 나이 많아 폐경된 사라에게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약속 안에서 성
취된 것과 같이 또 다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외부의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선택되었음을 나타낸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 혹자는 이삭과 이스마엘 중에 선택되고 하나
는 유기(遺棄)된 것이 그 외부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즉 하나는 종의
자녀이며 하나는 주인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가 순수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외부적인 신분에 의하여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똑같은 환경과 신분 속에서도 하나는 선택되고 하나는 유기된 실
례를 제시함으로써 다시 한번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한다. 그것은 한 아버지와
한 아내의 태 속에서 잉태된 쌍둥이의 선택과 유기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그의 어머
니와 같은 아버지, 그 뿐만 아니라 같은 날 잉태되어 같은 날 태어나게 된 동일한 환
경과 신분을 소유한 자들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의 약속이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리브가에게도 주어졌으며(J. Calvin) 그의
약속은 육신적 후손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후손에 의하여 완전한 하
나님의 선택으로 성취됨을 보여준다.
=====9:11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 - 이들은 육체
적으로 쌍둥이라는 합법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선악을 구별할 수도 없는 무능력한 조건 속에 있다. 바울은 태어나기 전 상태의 동일
함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선택한 하나님의 주권을 더욱 선명하게 강조한다. 한편 나
지도 아니한 때에 선택했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이 태어날 자의 행위에 근거
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들이 태어나기 이
전에 이미 그들의 행위가 선택받기에 합당할 것인지 불합당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다(J. Calvin). 결국 그들의 주장은 선택이 행위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결론
이다. 그러나 본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보다
분명하게 뒤에 나오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라는 표현이 이를 반증한다. 바울은 지
금 한 사람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역사적 사실을 제기함으로써
혈육의 관계를 떠나 많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증
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도 없
이 선택하신다라는 말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은혜를 필연적으로 베풀어
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
님의 약속과 긍휼에 근거할 뿐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어떤 자들은 간
과하며 또 어떤 자들은 선택하는 것이다(8:28). 야곱과 에서, 이들 두 사람이 모두 기
도의 응답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창 25:21) 이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택과 유
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절대적 권위를 더욱 선명하게 강조한다(엡 1:11).
=====9:12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 바울은 창 25:23 중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 창세
기 본문에서 두 아들에 대한 계시는 바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주제로 전개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본절에 사용된 '큰 자'(* , 호 메이존)와 '어린 자'(*
, 토 엘랏소니)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분분하다. 혹자는 창세기의 본문이 민족과 국가에 대한 예언으로 전
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출발은 분명히 개인에 대한 섬김이라고 주장한다
(Hendriksen). 이를 주장하는 이는 창세기에 사용된 '국민'이라는 단어가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보다 근본적인 출발에서 개인에 대한 예언임을 주장
한다. 또한 혹자는 이 예언은 에서와 야곱 개인들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
인 에돔 족속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언이라고 주장한다(F.F. Bruce). 그는 증거로
서, 에서는 그의 생애 중에 야곱을 섬기지 않았다는 점과 실제로 에돔 족속이 이스라
엘이나 유다에 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속박 되어 있었음을 제시한다(삼하 8:14;왕상
22:47). 실제로 야곱은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은 이후에 형으로부터 섬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망다녀야 하는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으며 또한 형에게 용서
를 구해야 하는 궁지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 대한 해설은 보다 포괄
적인 의미에서 이해 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개인이나 민족 또는 후손에 대한 예언이라
는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나 그들의 개인에서 출발한 예언이 궁극적으로 메시야 왕국
속에서 성취되었다는 통시적(洞視的)인 시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개인적인
생애 속에서 동생이 장자권을 이어 받는 것이나 에돔 족속이 속박되는 것으로 제한하
기보다는 보다 큰 약속 속에서 예언의 의미를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J. Calvin). 다시
말해서 이 예언은 장자권 양도와 에돔 족속의 속박 등과 같은 역사적 성취뿐만 아니라
메시야 왕국이 궁극적으로 불의로부터 승리할 것을 계시하고 있다.
=====9:13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바울은 말 1:2, 3을 인용하여 개인들에게 예
언된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성취되어졌는가를 증명한다. 한편 여기서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을 감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셈어적인 개념을 가진 '미워하였다'(* , 에
미세사)라는 말이 상대적인 개념으로 '덜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S.
Jeremias). 따라서 여기서 사용된 '미움'이란 말은 단지 에서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
는 대상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Harrison). 하나님은 에서와 그의 후손들을 자신의
특별 은총으로부터 제외시킴으로써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하도록 작
정하신 것이다(말 1:4). 바울은 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 하나님의 사랑과 미워하심을
대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가 또 다른 많은 백성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
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명분과 기득권을 가진 유대 민족일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섭리로 버려질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9:14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하나님은 에서를 유기하시고 야곱을 선택하실 때에 그들
이 다 자랄 것을 기다리지 아니하셨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의 다 자람을 지켜보시고
또한 그들의 업적과 공로를 다 살피신 후에 선택과 유기를 하셨다면 진정한 선택과 유
기의 의미는 상실되고 말 것이다(Harrison). 실로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의 행위와 아
무런 상관이 없다. 그의 선택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목적에 기인하는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에서에 대한 불공평한 대우와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항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면 야곱 조차도 결코 선택될 수
가 없었을 것이다. 야곱에게 있어서 축복은, 행위와 업적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약속
의 씨로 선택되었다는 것에 더 큰 사랑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선택의 축복이 포
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 본절에서 '불의'(* , 아디키아)는 그것이 하
나님의 속성에 대한 것인지 또는 그의 행위를 지시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의 속성이나 행위에 있어서 '불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헬라
어 '아디키아'는 어떤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서 법적인 불의를 뜻한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보다 근본적인 근거에서 창조주의 의의 개념을 제시한다(20절). 다시
말해서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거나 유기하는 것은 양자 모두에게 불
평등한 것이나 잘못된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9:15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 바울은 또 다른 역사적 사건 곧 이스라엘 백성
과 모세를 선택하시고 애굽을 유기하신 사건을 통하여 다시 한번 선택의 절대 주권적
의미를 강조한다. 이에 대한 이해는, 바울이 인용한 출 33:19 당시 상황을 이해한 후
에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은혜를 체험
하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는 큰 죄악을 범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신 점이다. 이
에 대하여 모세는 하나님께 애굽을 용서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백성을 용
서하셨는가에 대하여 그 근거를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한다(출 33:16, 18).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나의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
느니라"(출 33:19)였다. 즉,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다. 그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 그 어떠한 외부적인 환경과 조건에도 구애됨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뜻이라는 '작정' 외에 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J. Calvin). 그러므로 출
33:19의 내용을 인용하여 인간에게 내려지는 구원의 은총이 인간의 노력이나 공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자비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
서 값없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의 축복(구원)을 누릴 수가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는 결코 값주고 살 수 없는 절대적인 은혜인 것
이다.
=====9:16
원하는 자로...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 '원하는 자'(*
, 델론토스)와 '달음박질하는 자'(* , 트레콘토스)는 앞에서 언
급된 에서와 야곱뿐만 아니라 모세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을 의미한다. 바울은 일반적
으로 '트레코'(* , '달리다', '경주하다')라는 단어를 긍적적인 의미로서 고
대 운동 경기의 승리자를 묘사할 때나(고전 9:24)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최선
의 노력을 경주하는 자신의 삶을 묘사할 때에 사용하였다(갈 2:2;빌 2:16). 그러나 본
절에서는 보다 사실적인 의미로서 모세의 소원과 민족을 위한 노력들마저도 아무런 칭
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였다(Meyer). 아브라함과 모세뿐만 아니
라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경주로 구원을 이룰 자는 아무도 없다. 뿐만 아니라 달음박
질조차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 여기서 다시 논리의 전개는 유기(遺棄)의 표본으로 세
워진 바로에게로 넘어간다. 바울은 '성경'(* , 헤 그라페)을 의인화시킴으
로 당시 바로에게 직접 행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주권적 의지를 보다 생생하게 상기시
키고 있다(Bruce, Harrison).
내가...너를 세웠으니 - '세웠으니'에 해당하는 '여세게이라'(* )가
70인경에서는 '디아테레오'(* , '지키다', '보존하다')의 부정과거 수
동태인 '디에테레데스'(* )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능동
태 1인칭으로 바꿈으로써 하나님의 예정 의지를 보다 선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특히
70인경과는 달리 '여세게이로'(* , '내가 일으키다')를 사용하여 그 의
미를 변형시킨 것은 단순히 70인경을 번역하지 않고 보다 원문에 가까운 뜻을 찾기 위
함인 것 같다(Bruce).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의 바로를 단순히 존재케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뜻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남겨두셨다(Hendriksen.
Harrison. Ridderbos). 역사상에 나타난 바로는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
며 하나님의 백성을 점점 더 궁지로 몰아가는 악행을 범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 구원
을 더 영광된 것으로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J. Calvin). 하나님은 그를
믿고 섬기는 자들뿐 아니라 그를 대적하는 자들을 통하여서도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
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영광을 위하여 죄를 조성하였다고 판단 할수는 없
다(6:1, 2 주석 참조). 본절의 핵심은 죄를 조성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
적에 따라 인간들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내 능력을 보이고...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다 - 하나님이 바로를 세우신 것은 하반
절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나님이 바로를 왕으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명을 보존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창조주
의 권위를 만방에 알리시기 위함이다. '능력'(* , 뒤나민)과 '이름'(*
, 오노마)은 서로 다른 단어로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왜냐하면
눈에 드러나는 이적적(異蹟的)인 기사들은 하나님의 속성 곧 그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
이기 때문이다(Kasemann). 실제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
사건은 그 이후에 다른 모든 민족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
였다(수 2:10, 11;9:9;삼상 4:8).
=====9:18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 -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강퍅하게 되었
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긍휼을 입었다는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행위는 자유롭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원하는 자'(*
, 델론토스)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16절) '그의 원하는'(* , 델
레이) 바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긍휼은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베푸시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에 속하는 문제로서(마 20:15) 그의 판단은 인간의 거짓된 생각들과는 달
리 항상 참되시며 공의로우시다(3:4). 따라서 바울은 본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적
섭리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면서 바로와 관련된 삽화를 종결시키고 있다.
강퍅케 하시느니라 - '그가 강퍅케 하셨다'(* , 스클레뤼네이)라
는 표현은 '내가 너를 남겨 두었다'(* , 디아테레오)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이 강퍅케 하도록 결정하셨다는 문자적 의미보
다 그의 죄악과 본성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이
것은 본서의 1장에 서술된 원리와 긴밀히 관계되어 있다(1:24, 26, 28, 32). 그는 스
스로 마음이 완악해지고 또한 스스로 더 큰 죄악을 범함으로 인하여(출 7:14;8:19) 돌
이킬 수 없는 심판에 이르게 되었으며 또한 그는 완고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
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17절). 하나님은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지도 아니하
셨으며 또한 고의적으로 그의 죄악을 조성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더 큰 죄와 완악함을 만들어 낸 것이다(A. Barnes).
=====9:19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 15-18절 사이에 기록된 내용은 본절과 같은 의
문을 제기 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과 유기를 작정하시고 바로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죄인을 강퍅케 하시고 또한 그로 인하여 더 큰 죄에 빠지도록 버려두셨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책망하며 흠잡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다. 즉, 유기된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느냐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이나 멸망을 예정하셨다고
해서 이것을 숙명론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가시적(可視
的) 규범은 언제나 동일한 결론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한다(11:7,
11).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판
단 속에서 하나님을 판단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Hendriksen).
=====9:20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 '힐문하다'(* , 안타포크
리노마이)라는 단어는 '시비하다' 또는 '계속하여 말대꾸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
다. 바울은, 반대자가 누가 '대적하겠느냐'(* , 안데스테케)라고 야
유섞인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인간 존재는 하나님과 더불
어 논쟁하거나 그의 뜻에 대하여 정당성을 요구할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이는 '감히'(* , 메눈게)라는 말 속에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논쟁하며 법적인
항변(* , 안데스테케)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다(Lenski).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 바울은 사 29:16;45:9;렘 18:1-10을 인용하면서 하나님
과 동등자가 될 수 없는 피조물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창조자를 판단할 만한
지혜를 가지지 못한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항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렘 18:4). 또
한 하나님이 자신의 공의로우신 뜻을 따라 선택과 유기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에 그의 선하신 뜻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신 29:29). 따라서 사도가
하나님의 선택적 섭리를 다룬 후 하나의 가상적 질문을 제시한 19절에 대한 답변은 지
음을 받은 피조물이 마치 전능자를 판단할 충분한 지혜를 갖추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
께 항의를 하는 것은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사도는 다음절에서 토기장이
와 진흙을 예로 들고 있다. 바울은 단지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자
신의 절대적인 권리와 능력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결정에 대적할 수 없다
는 것을 시사할 뿐이다.
=====9:21
진흙 한 덩이로...권이 없느냐 - 이것은 구약의 대표적인 두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
미야에 의해서 사용된 예화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 가
를 대변해 주고 있다(사 29:16;렘 18:6). 아울러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처럼 인간
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에 달려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
하면 '인간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면 인간의 노력은 전혀 무익한 것이냐'하
는 존재론적 운명론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 빠질 위험에 봉착한다. 그러나 바울은
19, 20절에서 이에 대한 논리적 답변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
간의 바른 태도는 순종과 헌신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렌스키(Lenski)는 본절의 의
미가 단지 천하게 만들어진 그릇이 토기장에서 항변할 수 없듯이 강퍅하도록 내버려진
자들도 항의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은 보다 포
괄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귀하게 만들었느냐 천하게 만들었느
냐 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일을 행하실 때에 자유하다는 사
상, 즉 하나님의 주권은 무한한 자율성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 강조점이 있다.
=====9:22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 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로부터 한 단계 발전된 진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를 논증한다. 죄인의
형벌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바울은 자주 다른 표현으로 기록한
다(2:4). 하나님은 죄인의 멸망을 고의적으로 조성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단지 오래
참으심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에 관여하신다. 특히 그의 인내심은 진노의 그릇이라 할
지라도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시며 또한 회개한 자를 기꺼이 용납하고자 하시는 증거이
다(벧후 3:9). 따라서 본절에서 '멸하기로 준비된'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
을 끝내 무시하고 심판에 직면하는 죄인의 최종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Harrison), '준비된'(* , 카테르티스메나)이
라는 말이 '완료 수동태'로서 누군가에 의하여 멸망이 '완료 수동태'로서 누군가에 의
하여 멸망이 준비되었으며 그의 멸망의 때는 무르익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으
로 그 멸망을 준비한 자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설령 그가 하나님이라고 할
지라도 이는 죄인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강퍅케한 행동에 대한 형벌이라고 할 수밖
에 없다(Hendriksen).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멸망의 도구가 아니라 스
스로 범죄한 죄로 인하여 멸망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들이라고 할 수 있
다(Bruce). 그러므로 왜 누구는 택하시고 안 택하시느냐 ? 또, 택함을 받지 못한 것은
누구의 책임이냐 ?를 하나님께 묻는 것이 잘못된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즉 하나님은
모두가 죄인인 상태에서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을 오로지 당신의 사랑으로 마음에
합당한 자를 일부 구원하신 것이지 근본적으로 누구는 조금 낫고 누구는 조금 못한데
도 불구하고 불평등한 처사를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는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오고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는 것이고(엡 2:7) 반면에
멸망당하는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본래 죄값으로 멸
망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문제의 근원은 죄인인 인간편에 있음을 보여준다.
=====9:23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 본절은 22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양쪽에 사용된
상징적인 표현들의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동일한 원리로 작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진노의 그릇들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
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지만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오
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富饒)함을 알게 하고자 하는데 목적
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양자 모두를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섭리였
으나 그들이 초래한 결과는 전혀 다른 신분을 만들고야 말았다. '긍휼의 그릇'들은
'진노의 그릇'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풍요함을 인하여 구원의 기쁨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를 경험하게 되었다(8:30). 따라서 본절의 '영
광'은 개인의 구원에 관계된 하나님의 은혜일 뿐만 아니라 민족과 개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죄의 타락으로부터(3:23)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Hendriksen, Barmby).
=====9:24
이 그릇은 우리니...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 바울은 은혜의 충만함이 유
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임하였음을 선언하다. '긍휼의 그릇'은 23절에
서 '진노의 그릇'이 완고한 유대인들을 칭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과는 대조적
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문이 모든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음을 시사한다. 23절의 '예비하
셨다'(* , 프로에토이마센)에서 암시된 약속은 '부르셨다'(*
, 에칼레센)라는 선언 속에서 성취되었다. 특히 바울이 유대인들을 전
체로 묘사하지 않고 '중에서'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유효적(有效的) 소
명으로서 참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임을 시사한다(6절;2:28, 29;11:5, 7). 또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참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보편적 교회의 일원으로 세우심을 받는다(Hendriksen). 결
국 바울은 '긍휼의 그릇'이라는 개념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초월하여 오직
성령의 내적 소명에 의해서만 형성되어지는 참 이스라엘, 즉 우주적 교회를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1:13-16;2:10, 11;3:22-24, 30;4:11, 12;8:32;16:26;갈 3:9, 29;엡
2:14-18).
=====9:25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 바울은 이방이 유효적 부르심을 통하여 하
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것을 호 2:23을 인용하며 논증한다.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호 2:23은 이방인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고멜의 방탕과 같은 죄와 형벌 속에 처해 있
는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기를 상징하는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호세아는 고멜의 방탕중에 잉태한 네 자녀의 이름 중 두 자녀의 이름을 '로루
하마'(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사하지 않을 것)과 '로암미'(내 백성이 아님)라는
상징적 의미로 지음으로써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함을 묘사하였다. 그러
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셨다(F.F.
Bruce).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바울이 초대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당시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베드로도 벧전 2:10에서 호 2:23
을 이방 신자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는데 이와같은 적용은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의 원리
가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음을 시사한다(Hendriksen).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불러 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3:22).
=====9:26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 본절은 호 1:10의 인용으로 혹자는 앞절과는
달리 본절이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예언이라고 주장한다(Barmby). 즉 당
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때 이 호세아서의 예언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등에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들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의 구원 원리가 이방인에게나 유대인들에게 동일하다는 것을 생각할때 여러 곳에 흩어
져 있는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시는 것은 동일한 예언속에 포함
되어 있는 사실이지만 본절은 특별히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
직하다(Hendriksen. Harrison). 이방인들뿐 아니라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도 보편적인
교회의 일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9:27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무효화되지 않았으며 유대인
들도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얻게 될것이라고 논증한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창조자의 영광 속에서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묘사된 반면(22절) 유대
인들은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다고 묘사돼 있다. 유대인의 구원은 더 이상 민족 단위
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야곱의 자손 중에서도 그의 선하신 뜻에 의하여 남겨진 자들만이 구원
을 얻게 될 것이다(Kasemann). 사실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의 글은(사 10:22, 23) 당시
이스라엘의 위치 속에서 백성의 보존을 예언한 글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앗수르에 멸
망한 이스라엘 중에 남은자들 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만 그 궁극적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떠난 이스라엘 유대 민족 중에 여호와의 능력을 의지
한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시사한다(Hendriksen). 따라서 '남은 자'에 대한 이
사야서의 예언은 구별된 유대 민족들 중에서도 연단(鍊鍛)의 심판을 통해 그 수효가
감소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Harrison) 또한 하나님의 긍
휼과 신실성을 더 크게 나타내는 구약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예서 더 큰 구
원의 약속을 발견한 것이다.
=====9:28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 사 10:23에 대한 인용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의지가 반드
시 실현될 것을 표명한다. 이는 '남은 자'의 구원이라는 사상 속에 공의로우신 하나님
의 심판이 성취될 것도 포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앗수르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그 중에 남은 자를 회복하신 것과 같이 완악한 유대인들에 대
한 구원과 심판도 절대적으로 성취될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9:29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성경
에서 그 성민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철저히 멸망당한 대표적인 성
읍들이다(창 18:20;19:23-28;신 29:23;렘 50:40;암 4:11). 본절에서 유대인의 멸망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비유한 것은 유대인들이 완악함으로 인하여 심판받게 될 것임
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완악한 유대 민족을 소돔과 고모
라와 같이 완전히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씨'를 남겨두신 것은 그분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주장한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하여 완
전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이나 보다 강조점을 두고 보아야 하
는 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상황 속에 적은 자를 남겨 두셨다는 사상이다. 만일 하나님
께서 그들에게 씨, 곧 '남은 자'(the remnant)들을 남겨두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선민
(選民)임을 고사하고 제 2의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 저주받은 민족의 대명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선민이라고 자처하며 구원의 독점성을 주장하던 이스라엘의 적나라한
실상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죄악의 심층부에 자리한 소돔 고모라 사
이의 윤리성을 사실상 백지 한 장 차이도 안 되었다. 그러기에 더욱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이 돋보이는 것이다.
=====9:30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이 표현은 14절에서도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한 것
이 아니다. 14절에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반대자들의 논리를 반박하는 의미로 쓰였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의미로 사용되
었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나니 -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철저한 율법
속에서 의의 성취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이 버림받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인간
의 죄악을 무시하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된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받을 때에 구원을 얻게 된다. 그
런데 이 변화는 오직 믿음에서 난 '의'로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흑암
에 거하던 이방인들 속에서 복음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그들의 믿음으로 성취되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믿음에서 난 의요 - 이방인들이 의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이방인 속에는 어
떠한 윤리와 도덕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 보
다 못한 윤리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거나 또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뜻
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 그 '의'의 개념은 윤리와 도덕이 아닌 구원의 개념으로 이
해해야 할 것이다(Kasemann). 유대인들이 '의'의 성취를 위하여 그토록 노력하였으나
'의'의 성취는 불행하게도 이방인 가운데서 성취되었다. 사도는 이것은 믿음에서 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복음에 순종하는 자가 약속의 자녀요 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인해
그들은 의로 여기신 바 되었던 것이다(3:28, 30).
=====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 이스라엘의 실패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곡해하여 잘못된 의를 추구한 데 있다
(10:2).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의를 추구하였으나 율법을 그릇된 방법으로 해
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와는 동떨어진 개인의 공로와 업적을 자랑하는 육신의 법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개인의 의를 자랑하는 육신의 법으로써는 의를 성취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율법의 의는 육체의 법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자들 속에서 성취
되었다(8:4). 한편 바울은 '좇다'(* , 디오콘)라는 단어를 경주(競走)와 같
은 의미로 사용하여 유대인의 열심있는 경주는 결국 이방인들에게 승리를 빼앗기는 결
과를 가져왔다는 역설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Harrison). 이방인의 승리는 그들이 영
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믿음으로써 의가 주어졌다
는 칭의를 증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의를 추구한 이
스라엘의 행위가 얼마나 쓸모없는 것임을 폭로한다.
=====9:32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 이 인용문은
사 28:16과, 8:14의 내용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말씀이다.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
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
정, 올무가 되시리니"(사 8:14). 바울은 이 두 구절의 핵심을 매우 능숙한 솜씨로 배
합하여 한 문장으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사실은 사 8:14에서 여
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인 '거치는 돌'이 바울의 인용문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
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민으로 모든 특권을 누리던 이스라엘에게
제시된 복음은 거치는 돌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사야는 앗수르의 침략 속에서 그들에
게 구원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손길을 반석으로 묘사하고 있다(사 8:13-15).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반석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될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도움을 구하는 자는 오히려 그 반석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부러질 것이라고 예
언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제시된 복음은 완고한 유대인들에게 거치
는 돌이 되고, 넘어지는 돌이 되었다(Bruce).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행위의 율법을 자랑함으로써 스스로 함정과 올무에 빠지게 된 것이다. 행위를
자랑하고 말씀과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유대 민족들은 그들에게 제시된 구원과 십자가
를 오히려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벧전 2:8).
=====9:33
내가 부딪히는 돌과...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이 '돌'
(* , 페트란)은 시편 118:22에 기록된 '버린 돌'과 사 28:16에 기록된 '시
온의 기초 돌'로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킨다(눅 20:17). 이것은 또한 단
2:34절에 기록된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로 이는 세상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
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시온에 두신 돌은 멸망과 저주를 선포하는 돌이 아니라
구원과 영광을 선포하는 피난처이었으나 유대인들은 이 돌을 거침돌로 만듦으로서 스
스로 저주와 멸망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고전 1:18, 23). 그들은 행위와 그리스도라는
양자 택일의 선택에서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되었으나 십
자가는 오히려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되었다(Harrison). 여기서 바울
의 결론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십
자가를 의지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찾으려 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
라고 강조한다(Hendriksen). 믿음 안에서 복음에 순종하는 자는 피난처이신 시온의 반
석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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