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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로마서 10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4|조회수16,658 목록 댓글 0

로마서 제 10장
=====10:1
형제들아 - 1:13 주석을 보라.
내 마음에 원하는 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절은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 )이다. 여
기 쓰인 '멘'(* , '한편')은 주로 '데'(* , '그러나', '또 한편')와 같이 쓰여
서 달리 내용을 구별할 때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개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데'와 상관없이 쓰여서 내용이 계속됨을 나타낸다. 즉, 본문은 9:33에 이어진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한 '에메스 카르디아스'(* )의 '에메스'('나
의')는 '무'(* , '나의')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이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경(心
境)을 드러낸다. '원하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아'(* )는 단순
히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라기보다 '기뻐하는 것'의 표현이다. 이
단어에서 바울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 '구하는 바'의 헬라어 표현은 '데에시스'(* ),
즉 '간구하는 것'이며 이는 '기도하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
)와 구별되는 강한 표현이다(엡 6:18). 따라서 본문에 쓰인 '내'(에메스) '원하
는 바'(유도키아), '구하는 바'(데에시스)등은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호소와
간구를 담은 강한 어조의 표현들이다.
구원을 얻게 함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소테리안'(*
)으로 구원을 향한 마음이 목적이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에 담
겨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확실히 언급했지만 동시에 동족에 대한 안
타까움과 슬픈 마음 또한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열망
은 행 13:46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은 신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10:2
내가 증거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 )는 공적(公
的)인 책임감과 엄숙함을 내포한 단어이다(Cranfield).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
엘의 열심을 개인적인 감정에 앞서 엄숙히 공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 '하나님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 )
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을 위한'이나 '하나님에 대한'으로 해석해야 한다. '열
심'을 표현하는 헬라어 '젤론'(* )은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나 '성전', '율
법'에 대해 충성하는 그런 열심을 나타낸다(왕상 19:10, 14;왕하 10:16;시 69:9).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성전, 율법들에 대해 대단한 열성을 가졌다. 바울 역시 유
대교에 심취했던 사람으로(갈 1:14)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성이었으므로(행 26:5) 이스
라엘의 열심에 대해 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으며 동정하는 마음에서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이는 하나님께 열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열
심이 비난받은 이유이다. '지식'을 나타내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
)는 '지식'을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헬라어 '그노시스'(* )보다
훨씬 강조된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 하나님이 실제(實在)하는
것 이상은 몰랐다. 즉 그들은 구원을 주는 지식(1:17)을 결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이 결여된 그들은 보아도 참으로 알지 못했으며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막 4:12). 그들의 완고한 마음과 고집은 오히려 우매하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
로막았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던 것
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 즉
구원을 주는 지식에 의해서 수반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10:3
바른 지식이 없는 유대인들이 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였다.
원인을 이끄는 문장 서두의 '가르'(* , '왜냐하면')는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는 2절 후반부의 설명을 이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 '하나님의 의'(*
, 투 데우 디카이오쉬넨)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으로서의 '의'라기보다 그리
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이뤄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신약에서 나오는 '의'
(Righteousness)는 주로 계약 관계를 전제로 한다. 계약을 수립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계약에 인간을 참여케 하시고 그 중간에 그리스도를 두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
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그것을 믿는 인간들을 '의롭다'하시기로 계약을 수립하
신 것이다. 따라서 이 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예수를 믿음이다. 하나님
의 자비하심은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다. 그
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길을 불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믿기를 거부
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르고'(* , 아그노운테스)는 '하나님의 의'
에 대해 지식이 없었으므로 기인된 '오해'를 의미한다(Meyer).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바른 지식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의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
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오해였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 '세우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사이'(*
)는 '세우다', '정하다', '확증하다'의 뜻이 있다. 즉 '하나님의 의'에 맞서 '자신
의 의'를 세워 불순종한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힘써'로 번역된 헬라어 '제툰테스'
(* )는 현재 분사형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계속 애써 온 것을 나
타낸다.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칭의'의 근원이며 이유이다. 즉, 의를 이루
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란 말은 뒤에 나오는 '율법의 마침'을 한정시키
는 말로 '율법의 마침'은 그 목적이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
는 유대인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자'들,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공평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일지라도 멸망을 받
으며 반면에 이방인일지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실로 '의'(*
, 디카이오쉬넨)은 율법으로나 인간의 행위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
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칭의의 의를 끝까지 불신한 것이다.
율법의 마침 - 혹자는 여기서 '율법'(* , 노모스)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이나 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Meyer, Sanday and Headlam). 또 혹자는 본
문의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특히 9:31)에
서 볼 때 여기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침'을 가
리키는 헬라어 '텔로스'(* )는 (1) 문제의 종결(end), 종료(termination) 혹
은 (2) 목적(aim), 의도(intention), 목표(goal)등 양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시켰다는 의미이다(13:10;Calvin, Erasmus, Lenski, Murray, Harrison). (2)는 그
리스도께서 율법의 실제 의미이며 목적과 의도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Hendriksen,
Cranfield). 그 중 (1)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데 이유인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
향하는 그림자로서 그 역할을 하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實體)로 인해 그 기
능이 종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진행되는 어떤
과정에서 역사상에 주어졌던 것이고 이제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다
는 의미이다.

=====10:5
모세가 기록하되 - 레 18:5에서 인용된 것으로 모세의 말이 인용된 것은 모세가 유
대인의 율법을 세운 자였기 때문이다. 이기에서 모세는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하나님의
율례'라는 표현을 통하여 구약 여러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느 9:29;겔 20:11,
13, 21) 또한 신약에 넘어와서도 그 사상을 계승되고 있다(7:10;마 19:17;눅 10:28;갈
3:12). 하지만 문제는 누가 과연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다.
연약한 인생 중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3:9-18). 오직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율법
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시고(8:3, 4)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신 유일한
분이시다(히 5:8, 9). '기록하되'를 가리키는 헬라어 '그라페이'(* )는 6,
8절에 나오는 '말하되'의 헬라어 '레게이'(* )와 의도적으로 대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레게이'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한 반면 '그라페이'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6절 주석 참조).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 '말미암은'의 헬라어 '에크'(* )는 '...에서 나온'이라
는 뜻으로 그 출신을 나타낸다. '율법에서 난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의이다.
이는 9:31, 32에 나오는 '행위에서 나온 의의 법'을 말한다.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며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결을 받는 길이었다(레
18:5;겔 20:11, 13, 21;눅 10:28). 따라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며 행할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罪性)은 율법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좇아 갔지만 법이 요구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9:31). 유대교의 구원
교리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율법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야 한
다고 보았다. 이렇게 율법을 성취하여 그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이 보장되고, 하나님으
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고 보았다(Strack-Billerbeck). 그러나 율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법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렘 31:33) 오순절의 성
령 보내심으로 성취되었다(욜 2:28ff.).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
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과 부활
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믿는 자들의 의가 되셨기 때문이다.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 본 구절은 앞절(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대조를
이루어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나타났음은 바울의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며 기독론적(christological)인 가르침
의 기본 구조이다(Ridderbos). 그리스도의 죽음은 종말론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며 의롭다하는 판결의 표시이다. 옛 시대(old aeon)와 옛 사람이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심판을 받았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게 했다.
이같이 말하되 - '믿음에서 난 의'를 의인화시켰다. 이런 수사법은 바울 당시 철학
적 연설을 할 때 종종 쓰였다. 의인화 용법으로써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대
조하여 '믿음에서 난 의'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 본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30:12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본 구절은 구약적 문맥에 비추어 보면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롭다하
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늘에 오르는 것은 (1) 사람으로서 불가
능할 뿐 아니라, (2) 이런 교만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오
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율법으로 의를 구하려는 자들의 교만함과
그들의 망상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근본 핵심은 버리고 자신들의 유
전과 행위를 통해 하늘, 즉 의에 이르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마음에...하지 말라 -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에이페스'(* )
는 '말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믿음을 통한 의'는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이것
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를 부인하였다. 이는 하
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그들 중에 오
셔서 생명을 주셨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10:7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 '음부'(* , 아뷩손)는 6절의 '하늘'
(* , 우라논)과 그 높고 깊음에서 대조를 이룬다. 음부의 헬라어 '아뵤소
스'(* )는 히브리어 '테홈'(* ) 대신 사용된 말이다. '테홈'은 '물들
의 깊음'(창 1:2)이나 '바다의 깊음'(시 107:26)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본문
의 의미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인 '땅의 깊은 곳'(시 71:20), 즉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스올'(* , Sheol)을 의미한다(시 139:8;암 9:2;Murray, Hodge, Cranfield). 음
부에 내려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당하신 죽음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無效)로 하는 것이며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 '모셔 올리는'의 헬라어 '아
나가게인'(* )은 부활을 언급할 때 쓰인다(히 13:20).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인들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은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받
아들이지도 않았다.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 앞에서 부정적인 진술을 계속하였지만, 이제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주제로 돌아 온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 신 30:14의 인용인
데, 70인역에는 '심히'에 해당하는 '스포드라'(* )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생
략하였다. 구약의 문맥에서는 율법을 통해 드러난(reveal)은 혜로운 면이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의 입과 마음에 두어 율법을 암송하며 묵상하였던 것이다(시 1:2). 여기서 '말씀
이 가깝다'는 것은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마음에 선물로서 그리스도
의 영이 와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은 상대적 위치인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
과 마음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성과 대조하면
서 구원받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밝히 드러낸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이 부분은 인용구에 바울이 첨가시킨 삽입구이
다. '전파하는'의 헬라어 본문 '케륏소멘'(* )는 '가르치다', '설교
하다', '선포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사도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복음의 말씀
을 뜻한다.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한정구는 '말씀이 멀리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견해에 있어서 바울이 모세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전파된 말씀은 유대인에게나 이
방인에게나 은혜의 말씀으로 구약에 계시된 약속의 말씀, 즉 믿음의 말씀이다. 여기서
'믿음의 말씀'은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Calvin, Cranfield). 그리고 이 말씀은 믿
음을 요구하는 말씀임을 뜻한다(Cranfield). 바울이 신 30:14에 나오는 '말씀'을 칭의
(justification)와 같게 본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말씀의 실체이며 실제적 의미이기 때
문이다.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네 입으로', '네 마음으로'는 8절의
'네 입에', '네 마음에'와 병행을 이룬다.
예수를 주로 - 이는 '예수는 주이시다'(Jesus in Lord)란 말이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는 헬라 세계에 있어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노예
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호칭이었다. 또한 신비 종교(Mystery Religion)
의 신들이었던 이시스(Isis)나 오시리스(Osiris)에게도 사용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통
치자에게 이 명칭을 붙였다. 특히, 하나님의 칭호 '야웨'(* )는 칠십인역에서
항상 '퀴리오스'로 번역했다. 즉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에 해당
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교회 최초의 신앙 고백의 형태로서(행 2:36;고전
12:3) 예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고백에는 경배의 대상이며 승천
하신 구주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 '살리신'의 헬라어 '에게이렌'(* )는
'일으키다'라는 말로서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 아파르케)가 되셨다는 뜻이다(고전 15: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서 부활하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소망케하는 종말론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
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로 높이심으로 하
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다시 사심을 고백했고 믿었던 것
이다(빌 2:9-11).
네 마음에 믿으면 -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에 믿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이
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에서 믿는 만큼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신
앙 고백을 전제한 것으로서 외식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입->마음의 순서는 인용문
신명기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10절에서는 그 바른 순서, 즉 마음속에 믿는 것과 입으
로 고백하는 자연적인 순서로 말한다.
구원을 얻으리니 - 헬라어 본문 '소데세'(* )는 미래형으로 종말론적 구
원(eschatological salvation)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의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입으로 시인하게 하며 구원에 이르게 한다.

=====10:10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마음'-'입',
'믿는 것'-'시인하는 것'은 문장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한다. 또한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본문에서 역으로 사용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 본절은 본서의
주제가 되는 1:16, 17의 구절을 기억시키는 내용으로서 믿고 시인함이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믿어'와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타이'(*
)와 '호몰로게이타이'(* )는 수동태로서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
음을 나타낸다. 즉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시인에 이
르게 됨을 나타낸 것이다(고후 5:14-15). '의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
어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
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이며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람 앞에서 주 예수를 입으
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는 것이다(마 10:32;막
8:38;눅 12:8). 특히, 시인(是認)은 지적인 확인을 넘어 생활의 차원에서 삶으로 고백
되어져야 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당하고 핍박받을 때 주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인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때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 탄압과 고
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구원을 정직하게 표명(表明)하는 차
원까지도 의미한다.

=====10:11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9:33과 같이 사 28:16로
부터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강조된 형태로 인용되었다. 즉 '저를 믿
는자'란 말 앞에 '누구든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Hendriksen). 이렇게 강조된 것은
앞에 언급된 4-10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
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이 유대 민족에게만 독점되어지고 또한 이방인에
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국한시켰던 것을 확장시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에게 허락되어졌음을 선포하고 있다(Godet).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부끄러움을 당
하지 않는다는 이 문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그 어떤 종족이든지 차별을 받지 않고 똑
같이 적용되어진다. 설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어떤면에 있어서는 '차별'(*
, 디아스톨레)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
(3:22). 그런데 바울은 실제로 그의 서신서에서 유대인의 우선권에 강조점을 두고 있
었고(1:16;2:9, 10),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Covenant) 아래서는 이스라엘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3:1, 2:9:4, 5). 그러나 이는 구원 경륜의 순서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특권을 받은 것을 나타낼 뿐이다.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과 헬라
인, 기타 이방인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Dunn).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 바울
은 구원이 유대인과 헬라인 그외 모든 이방 민족에게 차별이 없는 분명한 이유를 '한
주께서'(the same Lord)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Lenski).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주'(* , 퀴리
오스판톤, Lord of all)로 묘사하고 있는데 만일 유대인이 하나님을 주님(Lord)으로
믿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님이 되어야만 한다
(3:29, 30). 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구세주(救世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동일하
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Dunn).
더구나 주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부르는 모든 자를 부요하게 하신다.' 이는
주님의 부요함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보편적이고 동일한 은혜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의미이다(Godet). 여기서 '부요하시도다'는 헬라어로 '플루
톤'(*
)인데 능동적인 개념으로 '자비하다'와 '은혜롭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Calvin). 이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 능력은 무한하여 그가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선한 뜻은 결코 약화되거나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리
스도를 믿는 자는 부요하신 주 하나님께(시 50:10-12;학 2:8;엡 3:8;계 5:12)속하여
항상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됨으로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2:4;9:23;요
10:10;고후 8:9;엡 2:7).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앞절에서 말한 내용을 더욱 강력하게 확증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 욜 2:32에
예언되어 있었다(Godet).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구
원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하였다(Calvin). 요엘에 의해 약속된 하나님의 이 말
씀을, 베드로는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을 설명하면서 인용하였다(행 2:16-21). 바울도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요엘서의 '여호
와'(Jehova)를 '주'(Lord)와 동일시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는 '예수 그리스
도'를 가리킨다(Alford, Harrison). 실제로 70인역(LXX)에는 언제나 '야웨'를 관사가
없는 '퀴리오스'(* )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구약에서의 '야웨'가 곧 그리스도 예수와 동일한 하
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주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증거가 되
게 하며 또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구
원 사이에 완전한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Dunn).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란 주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자 곧 주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자
는 하나님의 칭의(justification)를 받아 구원 받은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10:14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바울은 이제 복음을 확장하여 범세계
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Bruce). 그래서 그는 믿음과의 관
계에서 제일 먼저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양자간에는 밀접한 연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Calvin). 주는 신뢰하고 믿을 만한 분이며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를 부
르는 일이 믿음의 첫걸음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어찌 부르리요'(How then shall they
call on, KJV, NIV)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포스 에피칼레손타이'(*
)로 '에피칼레손타이'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다'의 뜻을 가진
'에피칼레오'(* )의 3인칭 복수 부정과거 중간태로서 가정법으로 쓰여
졌다. 이는 '그들을 부를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 바울은 두번째로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그리스
도에 대하여 듣는 것으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도 '포스'(* ,
'어떻게')를 사용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표현법을 쓰고 있다. 그는 이러한 논리적인 논
증을 통해 믿음은 지식에 근거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려면 먼저 그 복음을 들어야함 한다. 한편 초대 교회 당시 대부분 사람
들의 복음 전수(傳受) 방법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었다. 비록 소수의 교회가 바울의
서신을 받기는 하였지만 신약성경이 문자와 글로 읽을 수 있는 기록으로 갖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복음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구두(口頭)로 전달되어야
했다. 이같은 일은 성경의 전 시대에 걸쳐 일반적으로 계속 행해져 내려왔다
(Harrison). 왜냐하면 전파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과 신앙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전파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전형적인 방법이 되었다(Calvin).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세번째로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사도나 전도자의 직책
을 중요시하고 있다(Bruce).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증언함으로 그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파자'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케륏손토스'(*
)로 '케륏소'(* , '전파하다', '가르치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여기서 '전파자'라는 말 앞에 관사가 없는데 이는 어떤 특별한 직책에 있는 사도들이
나 전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파하는 모든 자'(someone preaching, NIV)를 의
미한다(Lenski). 헬라어 '케륏소'(* )는 '전파하다', '알리다'의 뜻인데
이것은 왕이나 사령관의 메시지를 공개하여 알리는 전령의 행위로서 전령은 왕이 명령
한 이외의 말을 가감할 수 없었으며 단지 왕의 명령을 자신의 음성으로 대언(代言)하
는 역할만 하였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LXX)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
지자들이나 사도들 역시 이 말이 깊은 의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메시야에
대한 전파나 종말론적인 언급(사 61:1;막 1:4, 7, 14, 38, 39;눅 4:18, 19;행
20:25;28:31)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 단어를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의 견
지에서 사용하였다(갈 2:2;골 1:23).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바울은 전도자가 복음을 전한 것은
이미 그 이전에 누군가가 그 전도자에게 '보내심'의 권위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
고 있다(Hendriksen). 즉 전도자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권위는 그 선포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명령과 위임이라는 점에 있다(Bruce). 여기서 '보내심'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포스탈로신'(* )은 '아포스텔로'(* , '보내
다')의 부정과거 수동태 가정법으로 '사도'(* , 아포스톨로스)란 단
어가 이 동사에서 파생되었다(Robertson).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인간은 보다 높은 권위 아래 존재하며 (2) 보내심을 받은 자의
메시지는 그 자신이 아니라 보내는 자에 의해서 주어진다. 이러한 두 가지면에서 예언
자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었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요
3:34;7:16). 이것은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진다. 모든 성도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그가 세우시지
않은 복음 전파자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궁극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 전
도자로서 전세계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며 그 결과로 전파된 말씀을 듣고 열방
들이 기뻐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Godet).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 바울은 다시 한번 바벧론 포로 생
활 동안 황폐되어 있었던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선
지자 이사야의 말로써 그 자신의 이야기를 확증하고 있다. 이 말씀은 사 52:7의 인용
구절로서 원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까왔다는 기쁨과 평화의 선포였다. 그러나 신약
에서는 복음의 전달로 해석한다. 이스라엘이 바벧론왕 고레스 치하(治下)에서부터 구
출을 받은 것은 모세에 의하여 애굽왕 바로의 치하에서 구출을 받은 것처럼 죄와 사망
으로부터 구출받는,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질 보다 완전하고 큰 구원을 예
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 민족이 바벧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리
라는 메시지가 기쁜 소식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다는
메시지는 그보다 훨씬 더 기쁜 소식인 것이다.

=====10:16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 유대인들은 전파된 복음을 대부분 믿지
않았다. 바울은 이것을 완곡어법(litotes)을 사용하여 말하고 있다. 즉 그들 중 일부
만이 복음에 순종하였다는 의미이다(사 53:1;고전 10:5).
이사야가 가로되...누가 믿었나이까 - 바울은 사 53:1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
의 불순종을 확증하고 있다. 바울이 앞절에서 인용한 사 52:7과 본절에서 인용한 사
53:1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고난받는
종에 의한 구원의 메시지가 거부되리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말
씀은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의 불신앙을 예언하는 구절로 널리 사용되었으며(11:8) 친
히 예수께서도 공생애 동안 사역하시면서 그 백성이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는다는 사
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기도 하였다(Bruce). 그리고 역사는 그 예언을 확증해 왔
다(고전 1:23). 혹자(Calvin)는 이사야가 이 말을 한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빛을 우리 안에 조명해 주실 때에야 비로소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
졌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한 특별 계시에 의하여 구원은 내적으로 소명받은 자, 즉
선택 받은 자에게 국한되는 것을 보여준다(Calvin).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바
울은 결론적 접속사 '그러므로'(* , 아라;so then, KJV)를 사용하여 그의 논리를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는 믿음에 대해서 결론짓기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
서 온다고 정의한다. '들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코에스'(* )로 '듣는 행
위'(act of hearing)나 '들려 오는 것'(that which is heard)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절(16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할 때 '전하는 바'(아코에)와 동일하게 사용
되었다. 그러나 앞절과 차이점은 전자는 수동태로 '들려진 말'(was heard)의 의미로
쓰여진 반면에 본절에서는 능동태로 메시지를 '들음'(hearing)의 의미로 쓰여졌다
(Hendriksen). 또한 바울은 구원얻는 신앙 곧 믿음은 듣는 행위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
리스도의 말씀으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
, 레카토스 크리스투)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다
(Harrison). 따라서 바울은,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에
근거한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 바울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불신앙에 대한 이스라엘의 변명의 소지를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다. 즉, 이스라엘이 그
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는 가능성
을 차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믿음을 얻게 되는 '들음'(hearing)의 기회가
이스라엘에게는 가장 확실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듣
지 아니하였느뇨'(* , 메 우크 에쿠산)는 '그들이 듣지 못
했는가 ?'(새번역, 공동번역; Did they not hear ?, NIV)라는 의미가 좀더 적절하다.
여기서 헬라어 '메'와 '우크'는 부정을 강조하여 '그들이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렇지 ?'라는 말이다(Dunn, Lenski). 결국 바울은 유대인들이 결코 듣지 못해서, 즉 전
도를 받지 못해서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아니라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그 소리가...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 바울은 그의 이러한 논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시 19:4을 인용하면서 복음 전파의 편만성(遍滿性)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
을 복음이 전세계에 완전히 전파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바울이 시편의 말씀
을 인용한 초점은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복음 전파는 궁극적으로 전세
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당시나
초대 교회 시대에 복음이 매우 신속하게 편만히 전파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5:22-24;요 12:19;행 2:41, 47;4:4;17:6;빌 1:12, 13;골 1:6).

=====10:19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 바울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듣기는 했지만 깨닫지 못했으므로 거부했다는 반문이 나올 수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반박을 예상하여 앞절에서의 '들음'(hearing)에 관한 질문에서 전환하여 이제
'앎'(knowing)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여기서도 앞절에서와 같이 헬라어 부정불
변사 '메'(* )를 사용하여서 부정적인 대답을 암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
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거절한 것처럼 복음의 의미와 불신앙의 결과가 무
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절하였다(Lenski). 그러므로 바울
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복음에 대한 앎의 부족이나 깨달음의 결여로 비롯되었
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Harrison). 결국 이 말씀이 암시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그들이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으려 하는 마음이 없었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Hendriksen).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 이는 신 32:21의
인용으로 이 구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노래 중 일부인데,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
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언으로 많이 인용되었다(11:11).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의 사악성을 질책하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켰으
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질투를 야기시키는 어떤 일을 추진하게 된 것이
다. 그 일은 미련한 백성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백성 아닌 자'(*
, 에프 우크 에드네이)와 '미련한 백성'(* , 에프
에드네이 아수네토)은 다같이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단절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들
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고 또한 어리석은 민족들이었다(Bruce).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용을 베푸셔서 그가 친히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존귀하게 하심으
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시켰다.

=====10:20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 바울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에 대해 변명할 수 없
도록 이전의 증거보다 더욱 강력한 증거를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역설하고
있다. '매우 담대하여'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포톨마'(* )로 '담대한
태도를 취하다'의 뜻을 지닌 '아포톨마오'(* )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
으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온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나타났노라 - 이 말씀은 사 65:1의 인용으로 분
명히 앞절(신 32:21)에서 선포된 내용을 더욱 강하게 확증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
이다.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기까지 이스라엘이 불순종
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철저한 불순종을 증거하고 있다. 바
울은 이방인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어 정의하기를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은 자들'이라 하였다(Dunn). 그는 이방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틀에 박힌 멸
시와 배척, 자기 우월주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 이방
인들마저도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구원이 임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
라엘은 불순종함으로 구원을 거절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께 구하지도
문의 하지도 않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가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통해
서 자신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대로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주권적인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Hendriksen, Calvin).

=====10:21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 - 앞절에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로 복
음을 순종한 사건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사 65:1)을 통해서 인용하였다. 이번에는
역설적으로 사 65:2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스 라온 아페이둔타 카이 안틸레곤타'(*
)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
을 병행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페이둔타'(* )는 이스라엘의 불신
앙을 나타내는 것이고 '안틸레곤타'(* )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결과로 나타나는 완악한 행동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까지 포함하고 있
다(Lenski). 이처럼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
회가 없었다거나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원래부터,
즉 모세와 선지자들의 시대에서부터 완악하고 반역적인 기질이 있었으며 이러한 기질
로 인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이다(Harrison). 하나님을 향한 이러
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을 예수께서도 탄식하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
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
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7, 38)고 책망하고 있다.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베푸셨는가를 탄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종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렌 텐 헤메란'(* )
은 시간의 범위를 나타내는 목적격으로 '매일'(Michel), '지속적으로'(Cranfield)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Dunn). 또한 '손을 벌렸노
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여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
)로 부성애(父性愛)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의 품에 정
답게 안아 주기 위해서 손을 벌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인내와
사랑의 손을 벌리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눅 15:20).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
엘이 그에게 돌아와 그를 사랑하고 순종하게 하려는 뜻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의 백성
을 찾고 또 손을 뻗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참히 거절하고 말았다(Harrison).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自招)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은 완전한 이스라엘의 책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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