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이방 세상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롬 1:18-20)
본문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1)
도입
다른 편지와 달리 바울은 로마서의 서론을 매우 길고 자세하게 쓰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서론을 길게 쓴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1) 로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직 한 번도 로마 교회를 방문한 적이 없었습니다(1:10-11,13, 15:22). 그러므로 바울의 편지를 받을 로마 교회 성도들은 아직 바울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론을 말하기 전에 자신에 대해서 자세하게 소개해야만 했습니다. 2) 로마 교회 성도들은 아직 바울이 사도의 자격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서론을 통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복음의 내용을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다른 사도들과 일치하는 것임을 미리 말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울은 다른 편지와 달리 로마서의 서론은 길게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서론 부분(1:1-17)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바울 자신에 대한 소개(1:1), 2)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소개(1:2-6), 3)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한 언급과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1:7-13), 4)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주제(1:14-17). 우리는 오늘 첫 번째 주제로서 바울이 자신을 어떻게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1).
본문내용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현대인들은 편지를 쓸 때에 먼저 받는 사람의 이름으로 쓰고(사랑하는 ....에게), 편지를 다 쓴 후에 끝에 가서 자기 이름을 밝힙니다(....올림). 그러나 바울이 살던 당시의 세계는 오늘날과는 반대로 자신을 먼저 소개하고, 나중에 받는 사람의 이름을 밝혔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당시 관례를 따라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자신을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종"(둘로스)은 정확하게 말하면 "노예"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 당시 "노예'는 주인의 소유였으며 자기 뜻대로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예"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주인이 시키는 일 뿐이었습니다. 주인은 노예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리 할 수 있었으며, 노예는 짐승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자기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헌신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이름은 동시에 명예로운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비롯한 신앙의 위인들을 "여호와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때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사 43:1,10).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이 자기 뜻을 위해 특별히 택하여 세운 사람(또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매우 명예로운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할 때에도 바울은 매우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이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신앙의 위인들을 "여호와의 종"으로 소개한 것처럼, 바울도 자신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당당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이름은 겸손과 영광을 동시에 가진 이름이었습니다.
2. 사도
둘째로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아포스톨로스)"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열 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눅 6:12-13). 사도는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1) 예수께서 친히 부르시고 복음을 위임한 사람. 2)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 3)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도록 위임한 사람. 사도는 자기를 보낸 주님을 대신하는 자격을 위임받고 파송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바울은 예수님의 12사도의 무리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직접 나타나서 그에게 이방인에게 전할 복음을 위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열 두 제자의 무리에 속하진 않았지만, 분명히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도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종"인 동시에 "사도'라고 소개한 것은 특별히 인상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칭호는 크게 대조가 되는 칭호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겸손한 위치를 강조하는 칭호이지만, "사도"는 보낸 사람을 대신하는 특권을 강조하는 칭호였습니다. "종"은 일반적인 칭호였으나(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다), "사도"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칭호였습니다(12제자와 바울).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대조적인 이름을 사용해서 자신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이름으로 자신이 주님의 뜻을 순종해야 하는 종의 신분인 동시에 복음을 위임받은 사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던 것입니다.
3. 복음을 위해 구별됨
셋째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택정함을 입었다"(아포리스메노스)는 말은 "특별하게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특별하게 구별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 이 구벌에서 "구별하였다"는 말은 바울이 로마서(1:1)에서 말한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레미야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구별되었던 것처럼, 바울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특별하게 구별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목적이 복음을 변호하고, 보존하고, 선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유대인을 위해 베드로를 구별하셨고, 이방인을 위해 바울을 특별하게 구별하여 세워주셨습니다.
4. 하나님의 복음
넷째로 바울은 자신이 전할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자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메시지였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자기 사상이나 생각이 아닌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에는 신적인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도 자기 사상이나 생각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계시하고 맡긴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전하는 복음도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구원의 메시지였습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라고 소개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자신을 소개할 때에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말해보자.
2.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복음 전파를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는가?
3.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를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사상을 전하는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가?
하나님의 복음(롬 1:2-5)
본문말씀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
도입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되었다고 소개하였습니다(1). 그리고 나서 이제 두 번째로 자기가 전하려는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2-5). 그는 자기가 전하려는 복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
본문내용
1.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이다(2)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자기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교회가 전할 것은 하나님이 계시하고 약속하신 복음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사색이나 이론, 또는 인간이 만든 종교를 전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세상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목숨을 걸고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듯이, 교회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2. 성경이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2)
둘째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복음에 대해서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성경에 약속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받은 복음은 갑자기 주어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고하고 증거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과 신약의 메시지는 통일성이 있습니다. 주님도 구약 성경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5:39). 주님은 (단 7장)에 언급된 "인자"와 (사 53장)에 언급된 "고난받는 종"을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여러 번 제자들에게 자신이 구약에 예고된 대로 고난을 받고 부활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 24:25). 그리고 베드로도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을 때에 주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이 구약 예언의 성취였다고 했습니다(행 2:14절 이하). 이와 같이 복음은 이미 구약 성경이 미리 증거하고 약속한 것이었습니다.
3.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3-4)
셋째로 바울은 그가 전하는 복음은 "그(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것은 더 이상 복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3-4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3-4)." 바울은 주님이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의 후손인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성경에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주님은 다윗의 혈통을 따라 세상에 오셨고, 이 땅에서 육신의 한계를 체험하셨으며,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능력 가운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주님의 신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것은 부활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능력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 전에는 연약하고 낮은 가운데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 후에 권능 중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바울은 주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 (Lord) 란 말은 당시에 로마 황제에게 붙여진 칭호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삶을 통치하고 주관하시는 주님(Lord)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예수께서 진정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임을 알 때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예수"(구원)라는 이름은 주님의 탄생을 예고한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준 이름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주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믿을 때에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또는 메시아)라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님을 인류의 구속 자로 기름(성령)을 부어 세우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기름(성령)을 부어 세우신 분이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Lord)이시며, 인류의 구속을 위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4. 복음의 목적은 예수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다(5(하))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내용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5(상)). 바울을 부르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원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가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5(중)).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고 자신의 이름을 전하게 하시려고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그 이름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 영광이나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높이고 그 이름을 전해야 합니다.
5. 복음의 대상은 열방이다(5(하))
바울은 자신이 "모든 이방인을 위해"(5(하))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특정한 개인이나 민족을 위해서 사도로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특히 모든 이방인을 위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복음은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16).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방인을 위해서 바울을 사도로 불러 주셨습니다. 물론 바울은 그 이방인 중에는 로마 교회의 성도들도 포함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6). 복음은 전 인류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종, 민족, 사회적인 모든 편견과 배타심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구별하지 말고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6. 복음의 목적은 믿음과 순종이다(5(하))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고"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믿음과 순종을 요구합니다. 복음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을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은 외식과 자기 행위를 자랑하게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강요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게 해 줍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목적은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얻게 하며,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복음은 누가 주셨으며, 그 내용은 무엇인지 말해보자.
2. 복음이 구약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왜 중요한지 말해보자.
3.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는가? 이기적 목적을 위해 사는가?
4. 민족, 계층, 사회적인 편견과 배타심을 버리지 못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왜 위험한지 말해보자.
5. 우리는 복음을 믿고 순종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말해보자.
수신자: 로마 교회 성도들(롬 1:7-13)
본문말씀
도입
바울은 편지를 받게 될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 "로마"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서 사람들에게 선망의 도시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에 평화를 주는 도시였으며, 법의 원천이었고,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는 시인들과 웅변가들, 그리고 예술가들의 성지였고, 동시에 종교적으로 온갖 우상 숭배의 근거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곳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남겨두셨습니다.
본문내용
1. 바울의 인사(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
첫째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선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중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고 자기 백성으로 구별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은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또 자신에 대해서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로마 교회 기독교인들을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 즉 "거룩한 무리(백성)"는 원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별하여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낼 제사장 나라로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들도 거룩한 백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 교회에 있는 기독교인들 역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할 때에 우리는 세상과 복음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분명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로마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했습니다(민 6:25-26).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의미하고, "평강"은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죄인인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축복과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들과 이웃을 향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하며 살아갈 때에 교회와 이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로마 교회 성도에 대한 바울의 태도(8-13)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8)."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8). 바울은 곳곳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의 신앙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지만, 로마에 하나님의 백성이 증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의 전파와 확장에 대한 소식은 모든 성도들에게 감사와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식은 하나님께서도 가장 듣기 원하시는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통해서 더 많이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파될 수 있도록 복음의 확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9-10).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로 인해 감사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 교회 성도들을 위해 "항상", 그리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하나님이 증거해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만나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 대해 소식을 들을 때마다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후에 로마에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러한 기도의 열매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속히 하나님께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자기를 인도해서 로마교회에 있는 성도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매우 원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1-12)."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를 원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가지 원하는 이유는 1)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다. 신령한 은사는 (고전 12장, 롬 12장, 엡 4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은사들은 바울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주기 원했던 신령한 은사는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나 권고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가르침과 권면의 말을 통해서 로마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해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은사를 주기만 하지 않고, 자신도 그들을 통해서 위로를 받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자신도 위로를 받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4-15)."
바울은 자신이 여러 번 로마에 가려고 한 일을 성도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로마에 가서 다른 곳과 같이 복음의 열매를 거두기 원했습니다. 바울은 마치 부지런한 농사꾼과 같이 이곳 저 곳을 다니며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도 복음의 씨를 뿌리고, 그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러 번 로마에 가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까지는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을 보면서 그 곳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복음의 씨를 부리고 그 열매를 거두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러한 교회를 통해서 그 곳에 복음을 전하고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을 믿는가?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필요한지 해보자.
2. 우리는 날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신령한 은사(말씀과 성령)를 나누어주려고 애쓰고 있는가?
3. 우리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서 복음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솔직히 말해보자.
바울과 복음(롬 1:14-17)
본문말씀
도입
오늘 본문에는 복음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복음 전도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일이 보통이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특별한 경우에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빚진 자가 갚아야 할 빚으로 여겼습니다.
본문내용
1. 나는 복음에 빚진 자다!(14-15)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4-15)."
바울은 자신이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빚을 진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되었을까요? 빚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렸을 때에 갚아야 할 채무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세상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다는 말입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빚을 진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만일 A라는 사람이 B에게 전해 달라고 우리에게 10만원을 맡겼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B에게 10만원을 줄 책임(빚)이 있습니다. 바울이 빚을 졌다고 하는 것은 이와 비슷한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방인에게 전하라고 복음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책임(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는 남에게 줄 복음을 착복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그가 사는 일생 동안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있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사도는 아니지만 세상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종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복음은 특별한 사람이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이 듣고 구원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을 듣고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남에게 줄 것을 착복한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도 바울처럼 세상에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 그렇습니다(16)."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 원한 것은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적과 표적을 원했고, 헬라인들은 지혜(철학)를 원했으며, 로마인들은 명예와 권력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적이 있는 곳으로, 헬라인들은 지혜가 있는 곳으로(철학), 그리고 로마인들은 권력과 명예가 있는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적이나, 지혜, 또는 권력 대신 반역자로 몰려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를 전했습니다. 당시 사람의 눈으로 보면 로마에서 십자가를 전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복음 안에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 안에 숨겨진 능력을 아는 사람은 절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누구든지 믿는 자를 무조건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명예와 부, 그리고 지혜나 권력을 주지는 않지만,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 명예나 권력, 부나 지식을 주지 못한다고 부끄러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과 같이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에는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할 때에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적극적으로 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 그렇습니다(16)."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 원한 것은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적과 표적을 원했고, 헬라인들은 지혜(철학)를 원했으며, 로마인들은 명예와 권력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적이 있는 곳으로, 헬라인들은 지혜가 있는 곳으로(철학), 그리고 로마인들은 권력과 명예가 있는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적이나, 지혜, 또는 권력 대신 반역자로 몰려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를 전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로마에서 십자가를 전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복음에는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을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복음을 부끄러워 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누구든지 믿는 자를 무조건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명예와 부, 그리고 지혜나 권력을 주지는 않지만,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기독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 명예나 권력이나 부, 지혜와 지식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고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과 같이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에는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고, 사단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며, 죄의 종을 성령의 종이 되게 하는 올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면,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또 적극적으로 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부끄럽게 여깁니까? 아니면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적용을 위한질문
1. 왜 우리가 세상에 복음의 빚을 진 사람인지 설명해보자.
2. 우리는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3.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제목: 타락한 이방 세상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롬 1:18-20)
제 15호 (월-금요일 발행) 2000/06/23
이 잡지는 복음을 공부하고 복음의 원리를 따라 살기 위해 발행되는 크리스찬 잡지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로마서의 서론 부분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1:1-17). 바울은 로마서의 서론 부분에서 1) 자신과, 2) 자신이 전하는 복음, 그리고 3) 복음 전도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소개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서론적인 진술을 마치고 그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첫 번째 주제는 "모든 인류가 죄를 범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1:18-3;20). 바울은 차례로 이방인(1:18-32)과 양심적(도덕적)인 사람(2:1-16), 그리고 유대인(2:17-3:8)과 모든 사람의 죄(3:9-20)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불가피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진노(18) ************************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항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18)."
바울은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계속해서 왜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18).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것은 "하늘로부터"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나타난다는 말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늘보좌로부터 사람들의 불경함과 죄를 보시고 진노하시며 그들의 죄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하늘보좌에서 진노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불 경건함과 불의한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불 경건함"(아세베이산)은 하나님께 대한 죄를 의미하며, "불의"(아디키안)는 사람들에 대한 죄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불경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부인하며,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불 경건한 행동"을 보시고 하늘 보좌에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이웃과도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온갖 불의를 행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불의한 행동"을 보시고 하늘 보좌에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막는다"(카테콘톤)는 말은 "굳게 서서 계속한다", "소유한다", "억제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본문에서 "억누른다", "억제한다, "막는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고의적인 범죄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고의로 비 진리로 진리를 억누르고 막고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계시나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인지 계시해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계시나 뜻(진리)을 거부하고, 사람이 만든 사상이나 윤리, 또는 종교로 대치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불의를 보시고 하늘 보좌로부터 진노하시며 심판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19-20) *******************
19 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저희 속에 밝히 보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들에게 밝혀 보여주셨습니다. 20 이는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속성들이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알려져서, 그들이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언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셨단 말인가? 나는 하나님께 진리를 배운 적이 없는데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못 섬기는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 안에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서 자신의 신성과 능력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눈과 귀로 보거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제 3의 눈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신과 영적인 통찰력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힘을 가지고 신을 찾고 섬기며, 제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립니다. 세상에 많은 동물들이 있지만 그들은 신을 찾고 섬기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만이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살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종교 없는 부족이나 종족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교재할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이 주어져 있다는 좋은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보이지 않는 속성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충돌 없이 정교하게 돌아가고 있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별들을 봅니다. 그리고 한 개의 세포 속에 있는 정교한 유전자 구조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것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하나님의 영광과 속성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을 몰라서 섬기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왜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진노하고 계시는 지 함께 이야기해보자.
2. 하나님께 대한 불경과 인간에 대한 불의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 사례를 들어 보고, 오늘날 우리가 행하고 있는 불경함과 불의는 무엇이 있는지 말해보자.
3.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섬길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없는지 이야기 해보자.
제목: 죄의 원인(롬 1:21-23)
제 16호 (월-금요일 발행) 2000/06/26
사람들은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정욕을 좆아 온갖 불의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일로 인해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계속해서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께 불경하게 대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감사를 돌리지 않음(21(상))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였으며...(21(상))"
21절은 "왜냐하면"("디오티": 우리말 성경에는 이 말이 빠져있음)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20절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불경함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고의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생물 중에 인간을 제외하고 종교를 가진 생물은 없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짐승(예를 들면 진화론자들이 인간의 조상이라고 하는 원숭이)이라고 해도 교회나 사원, 또는 절을 짓고 그 곳에 가서 신을 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을 찾고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짐승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그들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에 자기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신을 찾고 신에게 나아가서 경배하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때에는 진노하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창조주 하나님으로 알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본성과 만물을 통해 계시된 영원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했습니다.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보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경배하며 성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인간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탁월한 신(그리이스의 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또는 유령이나 산신령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거나 감사드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불경한 행동은 고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변명 할 수 없습니다.
2. 생각과 마음이 어둡고 우둔해짐(21(하))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하))
바울은 사람들의 신지식이 잘못된 결과 그들의 "생각이 허망해 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디아로기스모스)이라는 말은 "생각", "추리", "의심", "논쟁"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성경에서 악하고 의심스러우며 논란의 여지가 많은 생각이나 이론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빌 2;14, 딤전 2:8 참조).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신지식을 의심하고, 자기 생각이나 추리, 또는 논쟁을 통해 스스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허망해졌다"(에마타이오테싼)는 말은 "허망해졌다"는 뜻 외에 "주객이 전도되다", "뒤바뀌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시를 버리고, 자기 상상으로 신을 만들어 주객을 전도시키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감사 드려야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상상과 추리로 하나님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불경한 해동에 대해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신지식을 임의로 바꾼 결과 "마음이 미련해지고 어두워져버렸습니다." "미련(무지)한 마음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에서 전혀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거부하고 자기의 상상으로 끝없이 하나님과, 세상의 기원, 그리고 사람의 본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아직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거부한 결과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밝은 마음은 밝히 아는 마음을 말하고, 어두운 마음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자기 생각으로 바꾸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감각을 잃고 어두움을 헤메는 무지한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림(22-23)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거부하고 과학이나 철학, 또는 스스로 만든 종교를 통해 서 지혜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거부하고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지혜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버린 결과 그들이 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23절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버린 결과 어떻게 어리석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창조주 하나님 대신 "짐승과 파충류 모양"의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겼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짐승과 파충류에게 돌려버리는 미련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롭게 되려고 하다가 결국 이러한 무지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짐승이나 벌레에게 돌리고, 썩어질 인간에게 돌리는 것은 인간이 어리석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왜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불 경건한 행동에 대해 변명할 수 없는가?
2.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경배와 감사를 드리고 있는가?
3.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거부하고, 자기들이 만든 생각이나 사상으로 바꾸어버린 실례를 몇 가지 들어보자. 우리 주변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는 예를 찾아보고 그 방법이 왜 어리석은 지 함께 토론해 보자.
제목: 죄의 결과(1): 성적 타락(롬 1:24-27)
제 17호 (월-금요일 발행) 2000/06/27
이방 세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지혜롭게 되려고 하다가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짐승이나 파충류의 모양의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리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올려놓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이방 세계 사람들의 불경한 행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정욕을 좆아 살도록 더러움에 버려 두심(24-25)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그들의 마음의 정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의 정욕에 이끌려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피조물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은총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간섭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정욕을 따라 살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 없이 강력한 자기의 정욕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악을 행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욕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고 본능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신의 몸을 수치스러운 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정욕을 좆아 자기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었으며, 이 일은 일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버리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찬양 받기에 합당한 창조주의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려버렸으며,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자기의 생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불경한 행동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들을 정욕에 방임하여 수치스런 존재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만이 찬양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사람들을 지으셨으며, 우주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지혜로우시며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위대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만물의 찬양을 받아 마땅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누구든지 "아멘!"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성적 타락(26-27)
"이를 인해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자연의 원리를 따라 사용하지 않고 순리를 거스려 사용하며(26)...."
하나님은 불경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정욕에 넘겨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정욕을 가리켜 "부끄러운 정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정욕을 좆으면 수치스러운 행동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정욕을 좆는 사람은 누구든지 수치스러운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버림받고 정욕을 좆아 사는 사람들은 이성간에 서로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여자들은 하나님이 세운 자연적인 원칙을 거스려 성적으로 부패한 행동을 했습니다. 바울이 특히 여자의 죄를 먼저 언급한 것은 바울 당시 여인들의 성적 문란이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성들의 성적 문란은 가정과 사회에 여러 가지 중대한 혼선을 가져왔습니다.
"이와 같이 남자들도 또한 자연의 원리대로 여인 쓰기를 떠나, 서로 서로 음욕이 불일듯하여,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합당한 보응을 스스로 돌려 받았느니라(27)."
그러나 성적인 범죄는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들 때에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하나님을 떠나 정욕을 좆은 결과 이러한 질서를 뒤바꾸고 말았습니다. 남자들은 여자가 아니라 같은 남자를 보고 성욕이 불처럼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동성 연애는 바울 당시 로마에 만연되어 있었으며,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린 사람들은 그 형벌로 이성의 위치를 뒤섞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이 한 불경한 행동에 대해 내린 합당한 보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돌리는 사람은 진리로 인도해 주시지만, 하나님대신 피조물을 섬기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방치해 두십니다. 바울 당시 동성연애는 이성을 비정상적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탈선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러한 비정상적인 일을 하도록 방임하심으로 그들의 행한 불경함에 대해 합당한 보응을 하셨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정욕에 넘겨져서 가공할만한 방탕한 행동을 하며 살게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18절에서 말한 "하늘로부터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정체였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온갖 부정한 윤리적 타락 현상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 반역한 결과로 일어난 현상이었습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오늘날 나타나는 온갖 성적 탈선 행위의 원인이 무엇인지 말해보자.
2.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할 때에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하는가?
3. 왜 바울은 성적 탈선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가?
제목: 죄의 결과(2): 비 윤리적인 삶(롬 1:28-32)
제 18호 (월-금요일 발행) 2000/06/28
바울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내린 형벌 중에서 특히 성적 부도덕에 대한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소외된 사람들의 가장 현저한 증거로 동성연애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소외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성적 부도덕 현상을 넘어 우리의 전 삶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ㅁ누제에 대해서 본문에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1:28)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사람들은 "자기 마음(지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싫어했다"는 말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이 아무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알거나 섬기는 일을 거부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경제나 실제 삶에 관한 일에는 민감한 반응과 관심을 보였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고 만물은 옛날부터 저절로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에 인격적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사람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그냥 버려 두셨습니다. "상실한 마음"(아도키몬 눈)은 "무가치한 마음", "버림받은 마음", "합당하지 못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무가치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들을 가치 없는 삶을 살도록 방임해 두셨습니다. 상실한 마음은 하나님께 버림받아 무가치한 것을 좆는 부적절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방임하신 결과 그들은 "사람의 본분에 벗어나는 일들"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은 인간의 본분을 벗어나서 하나님과 자신에게 미움과 증오를 받을 만한 일들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2. 유기의 결과(29-31)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 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제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결과 행하고 있는 "합당치 못한 일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 행위 중에 합당하지 못한 예들을 찾아 열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목록이 그 당시의 모든 죄를 다 제시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자기 시대와 그 이전 시대 사람들이 행했던 각종 불합리한 행동들에 대해 기억이 나는 일들을 차례로 열거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열거한 죄의 목록과 의미를 다음과 같습니다.
* 윤리적인 악함
바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결과 사람들이"불의"(아디키아: 잘못되고 거짓된 일, 부정이나 비행)와 "추악"(포르네이아: 윤리적으로 더럽고 깨끗하지 못한 일)과, "탐욕"(플레오넥시아: 분에 넘치는 욕심과 탐심), 그리고 "악의"(카키아: 악한 뜻(의지))가 가득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무가치한 마음에 방임한 결과로 사람들은 그릇되며 윤리적으로 부정한 일로 가득 찬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분수에 넘치는 것을 소유하려는 탐심으로 가득 찬 존재가 되었고, 악을 행하려는 의지로 가득 찬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 다툼과 분쟁
바울은 하나님의 버림받은 사람들은 "시기"(프쏘노스: 질투)와 "살인"(포노스: 다른 인격을 해치는 것)과 "분쟁"(에리도스: 다투기를 좋아하는 성품)을 일삼으며, "사기"(돌로스: 거짓으로 남에게 해를 입혀 이익을 취하는 것)와 "악독"(코코에쎄이아: 남을 해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찬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은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질투하며, 죽이고, 싸우며, 남을 속이고, 해치려는 마음이 가득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 언어의 타락
바울은 하나님이 버린 결과 사람들이 "수군수군하며(핍시쑤리테스: 은밀히 남을 모해하고 중상하는), 남을 "비방하는(카타라로스: 중상 모략하는) 존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정욕에 방임한 결과 사람들은 혀와 언어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말을 해여 할 입으로 남을 중상모략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 대신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 신성모독과 교만
또한 하나님의 버림받은 결과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며"(쎄오스투레스: 하나님을 조롱하고 거역하며 반대하는 자)와, "능욕하는 자"(휘브리스테스: 거만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자)가 되었으며, "교만하고"(휘페레화노스: 오만하고), "자랑하며"(알락쏜타스: 헛된 것을 추구하며 잘난 체 하며), "악한 일을 계획하는"(에퓨레테스 카콘: 악을 창작하여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모와 권위를 거역하였습니다"(고뉴시 아페이쎄이스: 권위를 거역함).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모독하며 교만하고 오만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악을 창작하여 갈수록 세상을 더 어둡게 만들었고, 자기를 낳아 준 부모와 권위를 거역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 저질스런 행동
사람들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결과 "우매하고"(아쓰네투스: 미련하며 도덕적으로 저질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아쑨쎄투스: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신용 없는), "정이 없는"(아스토르구스: 본능적인 감정마저 말라 버린)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우둔하고 저질스러운 행동을 하게 되었고, 약속을 쉽게 파기하는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되었으며, 인간에게 있는 기본적인 감정마저 사라진 무정한 존wo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행동들이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결과 나타난 현상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러한 행동을 자주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정욕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영적 질병의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악을 행하며 또 악행하는 자를 옳다 함 (32)
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 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이 무가치하며 또한 하나님의 심판(사형)을 받기에 합당한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형"은 육신의 생명을 빼앗는 것 뿐 아니라, 죽은 후에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런 행동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서는 안될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이 심판과 징계를 받을만한 일이라는 것도 잘 있습니다. 그 예로 우리 부모들은 절대로 자기 자녀들이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이런 일들이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계속 그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세상 사람들은 자기만 이런 일을 하지 않고,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옳다고 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서로 불의한 행동을 하는 이웃을 인정함으로 죄를 범하는 자신을 위로합니다. 그러나 이런 불의한 행동은 악을 더 악화시켜서 양심의 가책마저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방 세계의 타락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한 이유였습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자기 지식과 사상에 하나님 두기를 거부하는 실례를 들어보자.
2. 하나님의 유기의 결과로 인간이 취하게 된 무가치한 행동들을 5-6가지로 나누어 설명해보자. 그리고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말해보자.
3. 사람들은 왜 악이 나쁜 줄을 알면서, 자신들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다른 사람들도 옳다고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말해보자.
본문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1)
도입
다른 편지와 달리 바울은 로마서의 서론을 매우 길고 자세하게 쓰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서론을 길게 쓴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1) 로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직 한 번도 로마 교회를 방문한 적이 없었습니다(1:10-11,13, 15:22). 그러므로 바울의 편지를 받을 로마 교회 성도들은 아직 바울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론을 말하기 전에 자신에 대해서 자세하게 소개해야만 했습니다. 2) 로마 교회 성도들은 아직 바울이 사도의 자격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서론을 통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복음의 내용을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다른 사도들과 일치하는 것임을 미리 말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울은 다른 편지와 달리 로마서의 서론은 길게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서론 부분(1:1-17)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바울 자신에 대한 소개(1:1), 2)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소개(1:2-6), 3)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한 언급과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1:7-13), 4)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주제(1:14-17). 우리는 오늘 첫 번째 주제로서 바울이 자신을 어떻게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1).
본문내용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현대인들은 편지를 쓸 때에 먼저 받는 사람의 이름으로 쓰고(사랑하는 ....에게), 편지를 다 쓴 후에 끝에 가서 자기 이름을 밝힙니다(....올림). 그러나 바울이 살던 당시의 세계는 오늘날과는 반대로 자신을 먼저 소개하고, 나중에 받는 사람의 이름을 밝혔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당시 관례를 따라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자신을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종"(둘로스)은 정확하게 말하면 "노예"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 당시 "노예'는 주인의 소유였으며 자기 뜻대로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예"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주인이 시키는 일 뿐이었습니다. 주인은 노예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리 할 수 있었으며, 노예는 짐승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자기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헌신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이름은 동시에 명예로운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비롯한 신앙의 위인들을 "여호와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때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사 43:1,10).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이 자기 뜻을 위해 특별히 택하여 세운 사람(또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매우 명예로운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할 때에도 바울은 매우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이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신앙의 위인들을 "여호와의 종"으로 소개한 것처럼, 바울도 자신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당당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이름은 겸손과 영광을 동시에 가진 이름이었습니다.
2. 사도
둘째로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아포스톨로스)"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열 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눅 6:12-13). 사도는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1) 예수께서 친히 부르시고 복음을 위임한 사람. 2)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 3)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도록 위임한 사람. 사도는 자기를 보낸 주님을 대신하는 자격을 위임받고 파송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바울은 예수님의 12사도의 무리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직접 나타나서 그에게 이방인에게 전할 복음을 위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열 두 제자의 무리에 속하진 않았지만, 분명히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도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종"인 동시에 "사도'라고 소개한 것은 특별히 인상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칭호는 크게 대조가 되는 칭호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겸손한 위치를 강조하는 칭호이지만, "사도"는 보낸 사람을 대신하는 특권을 강조하는 칭호였습니다. "종"은 일반적인 칭호였으나(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다), "사도"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칭호였습니다(12제자와 바울).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대조적인 이름을 사용해서 자신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이름으로 자신이 주님의 뜻을 순종해야 하는 종의 신분인 동시에 복음을 위임받은 사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던 것입니다.
3. 복음을 위해 구별됨
셋째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택정함을 입었다"(아포리스메노스)는 말은 "특별하게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특별하게 구별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 이 구벌에서 "구별하였다"는 말은 바울이 로마서(1:1)에서 말한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레미야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구별되었던 것처럼, 바울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특별하게 구별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목적이 복음을 변호하고, 보존하고, 선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유대인을 위해 베드로를 구별하셨고, 이방인을 위해 바울을 특별하게 구별하여 세워주셨습니다.
4. 하나님의 복음
넷째로 바울은 자신이 전할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자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메시지였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자기 사상이나 생각이 아닌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에는 신적인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도 자기 사상이나 생각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계시하고 맡긴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전하는 복음도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구원의 메시지였습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라고 소개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자신을 소개할 때에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말해보자.
2.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복음 전파를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는가?
3.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를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사상을 전하는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가?
하나님의 복음(롬 1:2-5)
본문말씀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
도입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되었다고 소개하였습니다(1). 그리고 나서 이제 두 번째로 자기가 전하려는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2-5). 그는 자기가 전하려는 복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
본문내용
1.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이다(2)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자기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교회가 전할 것은 하나님이 계시하고 약속하신 복음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사색이나 이론, 또는 인간이 만든 종교를 전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세상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목숨을 걸고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듯이, 교회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2. 성경이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2)
둘째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복음에 대해서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성경에 약속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받은 복음은 갑자기 주어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고하고 증거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과 신약의 메시지는 통일성이 있습니다. 주님도 구약 성경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5:39). 주님은 (단 7장)에 언급된 "인자"와 (사 53장)에 언급된 "고난받는 종"을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여러 번 제자들에게 자신이 구약에 예고된 대로 고난을 받고 부활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 24:25). 그리고 베드로도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을 때에 주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이 구약 예언의 성취였다고 했습니다(행 2:14절 이하). 이와 같이 복음은 이미 구약 성경이 미리 증거하고 약속한 것이었습니다.
3.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3-4)
셋째로 바울은 그가 전하는 복음은 "그(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것은 더 이상 복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3-4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3-4)." 바울은 주님이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의 후손인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성경에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주님은 다윗의 혈통을 따라 세상에 오셨고, 이 땅에서 육신의 한계를 체험하셨으며,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능력 가운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주님의 신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것은 부활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능력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 전에는 연약하고 낮은 가운데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 후에 권능 중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바울은 주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 (Lord) 란 말은 당시에 로마 황제에게 붙여진 칭호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삶을 통치하고 주관하시는 주님(Lord)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예수께서 진정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임을 알 때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예수"(구원)라는 이름은 주님의 탄생을 예고한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준 이름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주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믿을 때에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또는 메시아)라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님을 인류의 구속 자로 기름(성령)을 부어 세우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기름(성령)을 부어 세우신 분이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Lord)이시며, 인류의 구속을 위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4. 복음의 목적은 예수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다(5(하))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내용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5(상)). 바울을 부르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원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가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5(중)).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고 자신의 이름을 전하게 하시려고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그 이름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 영광이나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높이고 그 이름을 전해야 합니다.
5. 복음의 대상은 열방이다(5(하))
바울은 자신이 "모든 이방인을 위해"(5(하))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특정한 개인이나 민족을 위해서 사도로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특히 모든 이방인을 위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복음은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16).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방인을 위해서 바울을 사도로 불러 주셨습니다. 물론 바울은 그 이방인 중에는 로마 교회의 성도들도 포함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6). 복음은 전 인류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종, 민족, 사회적인 모든 편견과 배타심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구별하지 말고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6. 복음의 목적은 믿음과 순종이다(5(하))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고"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믿음과 순종을 요구합니다. 복음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을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은 외식과 자기 행위를 자랑하게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강요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게 해 줍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목적은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얻게 하며,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복음은 누가 주셨으며, 그 내용은 무엇인지 말해보자.
2. 복음이 구약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왜 중요한지 말해보자.
3.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는가? 이기적 목적을 위해 사는가?
4. 민족, 계층, 사회적인 편견과 배타심을 버리지 못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왜 위험한지 말해보자.
5. 우리는 복음을 믿고 순종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말해보자.
수신자: 로마 교회 성도들(롬 1:7-13)
본문말씀
도입
바울은 편지를 받게 될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 "로마"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서 사람들에게 선망의 도시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에 평화를 주는 도시였으며, 법의 원천이었고,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는 시인들과 웅변가들, 그리고 예술가들의 성지였고, 동시에 종교적으로 온갖 우상 숭배의 근거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곳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남겨두셨습니다.
본문내용
1. 바울의 인사(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
첫째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선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중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고 자기 백성으로 구별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은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또 자신에 대해서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로마 교회 기독교인들을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 즉 "거룩한 무리(백성)"는 원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별하여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낼 제사장 나라로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들도 거룩한 백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 교회에 있는 기독교인들 역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할 때에 우리는 세상과 복음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분명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로마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했습니다(민 6:25-26).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의미하고, "평강"은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죄인인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축복과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들과 이웃을 향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하며 살아갈 때에 교회와 이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로마 교회 성도에 대한 바울의 태도(8-13)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8)."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8). 바울은 곳곳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의 신앙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지만, 로마에 하나님의 백성이 증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의 전파와 확장에 대한 소식은 모든 성도들에게 감사와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식은 하나님께서도 가장 듣기 원하시는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통해서 더 많이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파될 수 있도록 복음의 확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9-10).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로 인해 감사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 교회 성도들을 위해 "항상", 그리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하나님이 증거해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만나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 대해 소식을 들을 때마다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후에 로마에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러한 기도의 열매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속히 하나님께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자기를 인도해서 로마교회에 있는 성도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매우 원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1-12)."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를 원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가지 원하는 이유는 1)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다. 신령한 은사는 (고전 12장, 롬 12장, 엡 4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은사들은 바울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주기 원했던 신령한 은사는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나 권고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가르침과 권면의 말을 통해서 로마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해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은사를 주기만 하지 않고, 자신도 그들을 통해서 위로를 받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자신도 위로를 받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4-15)."
바울은 자신이 여러 번 로마에 가려고 한 일을 성도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로마에 가서 다른 곳과 같이 복음의 열매를 거두기 원했습니다. 바울은 마치 부지런한 농사꾼과 같이 이곳 저 곳을 다니며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도 복음의 씨를 뿌리고, 그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러 번 로마에 가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까지는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을 보면서 그 곳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복음의 씨를 부리고 그 열매를 거두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러한 교회를 통해서 그 곳에 복음을 전하고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을 믿는가?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필요한지 해보자.
2. 우리는 날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신령한 은사(말씀과 성령)를 나누어주려고 애쓰고 있는가?
3. 우리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서 복음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솔직히 말해보자.
바울과 복음(롬 1:14-17)
본문말씀
도입
오늘 본문에는 복음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복음 전도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일이 보통이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특별한 경우에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빚진 자가 갚아야 할 빚으로 여겼습니다.
본문내용
1. 나는 복음에 빚진 자다!(14-15)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4-15)."
바울은 자신이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빚을 진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되었을까요? 빚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렸을 때에 갚아야 할 채무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세상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다는 말입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빚을 진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만일 A라는 사람이 B에게 전해 달라고 우리에게 10만원을 맡겼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B에게 10만원을 줄 책임(빚)이 있습니다. 바울이 빚을 졌다고 하는 것은 이와 비슷한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방인에게 전하라고 복음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책임(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는 남에게 줄 복음을 착복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그가 사는 일생 동안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있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사도는 아니지만 세상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종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복음은 특별한 사람이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이 듣고 구원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을 듣고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남에게 줄 것을 착복한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도 바울처럼 세상에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 그렇습니다(16)."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 원한 것은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적과 표적을 원했고, 헬라인들은 지혜(철학)를 원했으며, 로마인들은 명예와 권력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적이 있는 곳으로, 헬라인들은 지혜가 있는 곳으로(철학), 그리고 로마인들은 권력과 명예가 있는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적이나, 지혜, 또는 권력 대신 반역자로 몰려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를 전했습니다. 당시 사람의 눈으로 보면 로마에서 십자가를 전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복음 안에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 안에 숨겨진 능력을 아는 사람은 절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누구든지 믿는 자를 무조건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명예와 부, 그리고 지혜나 권력을 주지는 않지만,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 명예나 권력, 부나 지식을 주지 못한다고 부끄러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과 같이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에는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할 때에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적극적으로 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 그렇습니다(16)."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 원한 것은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적과 표적을 원했고, 헬라인들은 지혜(철학)를 원했으며, 로마인들은 명예와 권력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적이 있는 곳으로, 헬라인들은 지혜가 있는 곳으로(철학), 그리고 로마인들은 권력과 명예가 있는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적이나, 지혜, 또는 권력 대신 반역자로 몰려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를 전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로마에서 십자가를 전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복음에는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을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복음을 부끄러워 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누구든지 믿는 자를 무조건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명예와 부, 그리고 지혜나 권력을 주지는 않지만,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기독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 명예나 권력이나 부, 지혜와 지식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고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과 같이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에는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고, 사단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며, 죄의 종을 성령의 종이 되게 하는 올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면,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또 적극적으로 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부끄럽게 여깁니까? 아니면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적용을 위한질문
1. 왜 우리가 세상에 복음의 빚을 진 사람인지 설명해보자.
2. 우리는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3.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제목: 타락한 이방 세상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롬 1:18-20)
제 15호 (월-금요일 발행) 2000/06/23
이 잡지는 복음을 공부하고 복음의 원리를 따라 살기 위해 발행되는 크리스찬 잡지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로마서의 서론 부분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1:1-17). 바울은 로마서의 서론 부분에서 1) 자신과, 2) 자신이 전하는 복음, 그리고 3) 복음 전도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소개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서론적인 진술을 마치고 그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첫 번째 주제는 "모든 인류가 죄를 범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1:18-3;20). 바울은 차례로 이방인(1:18-32)과 양심적(도덕적)인 사람(2:1-16), 그리고 유대인(2:17-3:8)과 모든 사람의 죄(3:9-20)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불가피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진노(18) ************************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항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18)."
바울은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계속해서 왜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18).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것은 "하늘로부터"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나타난다는 말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늘보좌로부터 사람들의 불경함과 죄를 보시고 진노하시며 그들의 죄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하늘보좌에서 진노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불 경건함과 불의한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불 경건함"(아세베이산)은 하나님께 대한 죄를 의미하며, "불의"(아디키안)는 사람들에 대한 죄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불경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부인하며,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불 경건한 행동"을 보시고 하늘 보좌에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이웃과도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온갖 불의를 행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불의한 행동"을 보시고 하늘 보좌에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막는다"(카테콘톤)는 말은 "굳게 서서 계속한다", "소유한다", "억제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본문에서 "억누른다", "억제한다, "막는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고의적인 범죄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고의로 비 진리로 진리를 억누르고 막고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계시나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인지 계시해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계시나 뜻(진리)을 거부하고, 사람이 만든 사상이나 윤리, 또는 종교로 대치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불의를 보시고 하늘 보좌로부터 진노하시며 심판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19-20) *******************
19 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저희 속에 밝히 보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들에게 밝혀 보여주셨습니다. 20 이는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속성들이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알려져서, 그들이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언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셨단 말인가? 나는 하나님께 진리를 배운 적이 없는데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못 섬기는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 안에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서 자신의 신성과 능력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눈과 귀로 보거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제 3의 눈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신과 영적인 통찰력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힘을 가지고 신을 찾고 섬기며, 제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립니다. 세상에 많은 동물들이 있지만 그들은 신을 찾고 섬기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만이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살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종교 없는 부족이나 종족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교재할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이 주어져 있다는 좋은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보이지 않는 속성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충돌 없이 정교하게 돌아가고 있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별들을 봅니다. 그리고 한 개의 세포 속에 있는 정교한 유전자 구조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것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하나님의 영광과 속성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을 몰라서 섬기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왜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진노하고 계시는 지 함께 이야기해보자.
2. 하나님께 대한 불경과 인간에 대한 불의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 사례를 들어 보고, 오늘날 우리가 행하고 있는 불경함과 불의는 무엇이 있는지 말해보자.
3.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섬길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없는지 이야기 해보자.
제목: 죄의 원인(롬 1:21-23)
제 16호 (월-금요일 발행) 2000/06/26
사람들은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정욕을 좆아 온갖 불의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일로 인해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계속해서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께 불경하게 대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감사를 돌리지 않음(21(상))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였으며...(21(상))"
21절은 "왜냐하면"("디오티": 우리말 성경에는 이 말이 빠져있음)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20절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불경함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고의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생물 중에 인간을 제외하고 종교를 가진 생물은 없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짐승(예를 들면 진화론자들이 인간의 조상이라고 하는 원숭이)이라고 해도 교회나 사원, 또는 절을 짓고 그 곳에 가서 신을 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을 찾고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짐승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그들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에 자기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신을 찾고 신에게 나아가서 경배하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때에는 진노하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창조주 하나님으로 알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본성과 만물을 통해 계시된 영원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했습니다.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보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경배하며 성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인간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탁월한 신(그리이스의 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또는 유령이나 산신령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거나 감사드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불경한 행동은 고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변명 할 수 없습니다.
2. 생각과 마음이 어둡고 우둔해짐(21(하))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하))
바울은 사람들의 신지식이 잘못된 결과 그들의 "생각이 허망해 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디아로기스모스)이라는 말은 "생각", "추리", "의심", "논쟁"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성경에서 악하고 의심스러우며 논란의 여지가 많은 생각이나 이론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빌 2;14, 딤전 2:8 참조).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신지식을 의심하고, 자기 생각이나 추리, 또는 논쟁을 통해 스스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허망해졌다"(에마타이오테싼)는 말은 "허망해졌다"는 뜻 외에 "주객이 전도되다", "뒤바뀌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시를 버리고, 자기 상상으로 신을 만들어 주객을 전도시키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감사 드려야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상상과 추리로 하나님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불경한 해동에 대해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신지식을 임의로 바꾼 결과 "마음이 미련해지고 어두워져버렸습니다." "미련(무지)한 마음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에서 전혀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거부하고 자기의 상상으로 끝없이 하나님과, 세상의 기원, 그리고 사람의 본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아직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거부한 결과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밝은 마음은 밝히 아는 마음을 말하고, 어두운 마음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자기 생각으로 바꾸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감각을 잃고 어두움을 헤메는 무지한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림(22-23)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거부하고 과학이나 철학, 또는 스스로 만든 종교를 통해 서 지혜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거부하고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지혜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버린 결과 그들이 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23절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버린 결과 어떻게 어리석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창조주 하나님 대신 "짐승과 파충류 모양"의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겼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짐승과 파충류에게 돌려버리는 미련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롭게 되려고 하다가 결국 이러한 무지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짐승이나 벌레에게 돌리고, 썩어질 인간에게 돌리는 것은 인간이 어리석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왜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불 경건한 행동에 대해 변명할 수 없는가?
2.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경배와 감사를 드리고 있는가?
3.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거부하고, 자기들이 만든 생각이나 사상으로 바꾸어버린 실례를 몇 가지 들어보자. 우리 주변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는 예를 찾아보고 그 방법이 왜 어리석은 지 함께 토론해 보자.
제목: 죄의 결과(1): 성적 타락(롬 1:24-27)
제 17호 (월-금요일 발행) 2000/06/27
이방 세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지혜롭게 되려고 하다가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짐승이나 파충류의 모양의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리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올려놓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이방 세계 사람들의 불경한 행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정욕을 좆아 살도록 더러움에 버려 두심(24-25)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그들의 마음의 정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의 정욕에 이끌려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피조물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은총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간섭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정욕을 따라 살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 없이 강력한 자기의 정욕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악을 행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욕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고 본능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신의 몸을 수치스러운 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정욕을 좆아 자기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었으며, 이 일은 일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버리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찬양 받기에 합당한 창조주의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려버렸으며,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자기의 생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불경한 행동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들을 정욕에 방임하여 수치스런 존재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만이 찬양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사람들을 지으셨으며, 우주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지혜로우시며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위대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만물의 찬양을 받아 마땅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누구든지 "아멘!"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성적 타락(26-27)
"이를 인해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자연의 원리를 따라 사용하지 않고 순리를 거스려 사용하며(26)...."
하나님은 불경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정욕에 넘겨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정욕을 가리켜 "부끄러운 정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정욕을 좆으면 수치스러운 행동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정욕을 좆는 사람은 누구든지 수치스러운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버림받고 정욕을 좆아 사는 사람들은 이성간에 서로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여자들은 하나님이 세운 자연적인 원칙을 거스려 성적으로 부패한 행동을 했습니다. 바울이 특히 여자의 죄를 먼저 언급한 것은 바울 당시 여인들의 성적 문란이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성들의 성적 문란은 가정과 사회에 여러 가지 중대한 혼선을 가져왔습니다.
"이와 같이 남자들도 또한 자연의 원리대로 여인 쓰기를 떠나, 서로 서로 음욕이 불일듯하여,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합당한 보응을 스스로 돌려 받았느니라(27)."
그러나 성적인 범죄는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들 때에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하나님을 떠나 정욕을 좆은 결과 이러한 질서를 뒤바꾸고 말았습니다. 남자들은 여자가 아니라 같은 남자를 보고 성욕이 불처럼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동성 연애는 바울 당시 로마에 만연되어 있었으며,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린 사람들은 그 형벌로 이성의 위치를 뒤섞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이 한 불경한 행동에 대해 내린 합당한 보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돌리는 사람은 진리로 인도해 주시지만, 하나님대신 피조물을 섬기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방치해 두십니다. 바울 당시 동성연애는 이성을 비정상적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탈선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러한 비정상적인 일을 하도록 방임하심으로 그들의 행한 불경함에 대해 합당한 보응을 하셨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정욕에 넘겨져서 가공할만한 방탕한 행동을 하며 살게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18절에서 말한 "하늘로부터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정체였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온갖 부정한 윤리적 타락 현상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 반역한 결과로 일어난 현상이었습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오늘날 나타나는 온갖 성적 탈선 행위의 원인이 무엇인지 말해보자.
2.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할 때에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하는가?
3. 왜 바울은 성적 탈선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가?
제목: 죄의 결과(2): 비 윤리적인 삶(롬 1:28-32)
제 18호 (월-금요일 발행) 2000/06/28
바울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내린 형벌 중에서 특히 성적 부도덕에 대한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소외된 사람들의 가장 현저한 증거로 동성연애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소외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성적 부도덕 현상을 넘어 우리의 전 삶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ㅁ누제에 대해서 본문에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1:28)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사람들은 "자기 마음(지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싫어했다"는 말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이 아무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알거나 섬기는 일을 거부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경제나 실제 삶에 관한 일에는 민감한 반응과 관심을 보였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고 만물은 옛날부터 저절로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에 인격적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사람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그냥 버려 두셨습니다. "상실한 마음"(아도키몬 눈)은 "무가치한 마음", "버림받은 마음", "합당하지 못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무가치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들을 가치 없는 삶을 살도록 방임해 두셨습니다. 상실한 마음은 하나님께 버림받아 무가치한 것을 좆는 부적절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방임하신 결과 그들은 "사람의 본분에 벗어나는 일들"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은 인간의 본분을 벗어나서 하나님과 자신에게 미움과 증오를 받을 만한 일들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2. 유기의 결과(29-31)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 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제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결과 행하고 있는 "합당치 못한 일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 행위 중에 합당하지 못한 예들을 찾아 열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목록이 그 당시의 모든 죄를 다 제시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자기 시대와 그 이전 시대 사람들이 행했던 각종 불합리한 행동들에 대해 기억이 나는 일들을 차례로 열거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열거한 죄의 목록과 의미를 다음과 같습니다.
* 윤리적인 악함
바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결과 사람들이"불의"(아디키아: 잘못되고 거짓된 일, 부정이나 비행)와 "추악"(포르네이아: 윤리적으로 더럽고 깨끗하지 못한 일)과, "탐욕"(플레오넥시아: 분에 넘치는 욕심과 탐심), 그리고 "악의"(카키아: 악한 뜻(의지))가 가득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무가치한 마음에 방임한 결과로 사람들은 그릇되며 윤리적으로 부정한 일로 가득 찬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분수에 넘치는 것을 소유하려는 탐심으로 가득 찬 존재가 되었고, 악을 행하려는 의지로 가득 찬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 다툼과 분쟁
바울은 하나님의 버림받은 사람들은 "시기"(프쏘노스: 질투)와 "살인"(포노스: 다른 인격을 해치는 것)과 "분쟁"(에리도스: 다투기를 좋아하는 성품)을 일삼으며, "사기"(돌로스: 거짓으로 남에게 해를 입혀 이익을 취하는 것)와 "악독"(코코에쎄이아: 남을 해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찬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은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질투하며, 죽이고, 싸우며, 남을 속이고, 해치려는 마음이 가득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 언어의 타락
바울은 하나님이 버린 결과 사람들이 "수군수군하며(핍시쑤리테스: 은밀히 남을 모해하고 중상하는), 남을 "비방하는(카타라로스: 중상 모략하는) 존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정욕에 방임한 결과 사람들은 혀와 언어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말을 해여 할 입으로 남을 중상모략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 대신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 신성모독과 교만
또한 하나님의 버림받은 결과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며"(쎄오스투레스: 하나님을 조롱하고 거역하며 반대하는 자)와, "능욕하는 자"(휘브리스테스: 거만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자)가 되었으며, "교만하고"(휘페레화노스: 오만하고), "자랑하며"(알락쏜타스: 헛된 것을 추구하며 잘난 체 하며), "악한 일을 계획하는"(에퓨레테스 카콘: 악을 창작하여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모와 권위를 거역하였습니다"(고뉴시 아페이쎄이스: 권위를 거역함).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모독하며 교만하고 오만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악을 창작하여 갈수록 세상을 더 어둡게 만들었고, 자기를 낳아 준 부모와 권위를 거역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 저질스런 행동
사람들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결과 "우매하고"(아쓰네투스: 미련하며 도덕적으로 저질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아쑨쎄투스: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신용 없는), "정이 없는"(아스토르구스: 본능적인 감정마저 말라 버린)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우둔하고 저질스러운 행동을 하게 되었고, 약속을 쉽게 파기하는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되었으며, 인간에게 있는 기본적인 감정마저 사라진 무정한 존wo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행동들이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결과 나타난 현상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러한 행동을 자주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정욕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영적 질병의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악을 행하며 또 악행하는 자를 옳다 함 (32)
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 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이 무가치하며 또한 하나님의 심판(사형)을 받기에 합당한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형"은 육신의 생명을 빼앗는 것 뿐 아니라, 죽은 후에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런 행동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서는 안될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이 심판과 징계를 받을만한 일이라는 것도 잘 있습니다. 그 예로 우리 부모들은 절대로 자기 자녀들이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이런 일들이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계속 그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세상 사람들은 자기만 이런 일을 하지 않고,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옳다고 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서로 불의한 행동을 하는 이웃을 인정함으로 죄를 범하는 자신을 위로합니다. 그러나 이런 불의한 행동은 악을 더 악화시켜서 양심의 가책마저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방 세계의 타락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한 이유였습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자기 지식과 사상에 하나님 두기를 거부하는 실례를 들어보자.
2. 하나님의 유기의 결과로 인간이 취하게 된 무가치한 행동들을 5-6가지로 나누어 설명해보자. 그리고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말해보자.
3. 사람들은 왜 악이 나쁜 줄을 알면서, 자신들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다른 사람들도 옳다고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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