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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로마서 13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4|조회수9,899 목록 댓글 0

로마서 제 13장
=====13:1
각 사람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파사 프쉬케'(* )로 직역하면
'모든 영혼'(every soul)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모든 사람'(every man)이나
'모든 성도'(every believer)라고 표현하지 않고 '모든 영혼'으로 표현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 혹 여기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의 권력에 대해 성도
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의 질서에 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각 사람'(* )이라는 표현이 모든 사람 개개인
을 표시하는 구약적 용법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런 의문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본문의 '각 사람'(* , every soul)은 몸(body)과
다른 것으로 구분되는 영혼(soul)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person)을 말하는 것이
다. 결국 본문은 소위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
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바울의 이 서신을 읽게 되는 로마의 기독교인 각
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 있는 권세들 - '위에 있는 권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대체로는 국가의 정치적 권세, 인간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좀더 구체적으
로 말하자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로마의 권력(權力)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디벧리우스(Dibelius)에 의해 제기되어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에
의해 결정적으로 주장된 다른 견해도 있다. 쿨만에 의하면 본문의 '권세들'(*
, 여수시아이)은 인간의 권세와 천사적 권세 모두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바울이 '권세'(* , 여수시아)의 복수형을 사용했을 때 그것이 악
한 천사나 선한 천사를 가리키는 용법으로 사용됐던 사례가 있다는 데 있다(8:38;엡
1:21;3:10;4:12;골 1:16). 이 주장이 어느정도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1-7절의 맥락에서 볼 때 '권세'라는 말에 인간적인 것 외에 천사적인 존재가 내포된다
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세금'에 관한 언급은 이것이 세상의 인간적인 통치 권세를 말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굴복하라 - 굴복(subjection)이라는 말은 순종(obedience)이라는 말보다 더 범위가
넓고 엄격한 관계를 표현해준다. 머레이(John Murray)는 이 굴복의 의미가 정부 관리
들의 재판권과의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즉 독자들은 그들 각자가 정부
관리들의 재판권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 그들의 권위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
이다. 한편 브루스(Bruce)는 본문으로 부터 쿨만(Cullmann)의 견해 즉 '권세들'(*
, 여수시아이)이 천사적 세력(특히 악한 천사)을 가리킨다고 하는 주장을 반박한다.
브루스의 주장의 요지는 바울이 천사적인 세력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에게 굴복해야
한다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천사적 세력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며 창조주이자 모든 악한 세력을 이기신 그리스도에게 연합
되어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골 1:16;2:10, 15).
권세는...모든 권세는 - 전자는 대표 단수형이고 후자는 복수형이다. 따라서 전자
는 세상에 인간적 질서를 세우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일반 원칙임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개개의 구체적인 권력이 다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것임을 밝히
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정치 권력에 대해 굴복하는 태도를 가
져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따라
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는 세상의 권세에 대해서도 복종해야 한다. 너무나도 단순하
면서도 자명한 원리이다. 그러나 이 말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보편화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적용시키려고 하거나, 신앙인과 국가 권력과의 관계를 규정
(規定)짓는 말로 확립하고자 할 때는 논란이 생길 수 있다. 만약 어떤 권세가 악을 징
벌하고 선을 장려하며, 선한 양심에 반(反)하는 방식으로 그 권세를 행사하지 않는다
면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권세가 '사랑과 정의'라고 하는 하나님
의 계율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행사되고 불의를 조장하며 악을 도모한다면 그때에는 그
권세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 이에 대하여는 본장 1-7절 주제강해 '시
민 복종과 불복종의 한계'와 '사회 참여에 관하여'를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모든
권세에 복종하라'고 한 바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바울은 후자
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며 전자의 가능성 즉 이상적인 국가 권력과 그것의
집행에 대해서만 원칙적인 언급을 하는 것이다. 바울이 국가의 권세에 대해서 (실제로
는 로마의 권력) 그와 같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법치주의에 근거한 로마의 권력이 그의 선교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
이 작용했을 수 있다(행 28:16-28). (2) 모든 국가의 권력이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다
는 것은 구약 성경적 배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라는 애굽의
왕은 적어도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악명높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로를 왕좌에 오르게
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이 구약의 증거이고 또한 바울이 취한 신앙이었다
(9:17). 이런 의미에서 모든 국가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
고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라는 안목으로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서 중요한 것은 권력 그 자체의 정당성 보다는 모든 권력 위에서 결정권을 가지고 섭
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바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서 또하나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유대교 또는 유대주의와의 관계이다. 전통적으로 유
대인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를 싫어했고 그들로부터 자기들의 나라
를 독립시키는 것을 소원했으며 더 나아가 반(反) 로마적인 행동도 불사했다(마
22:16, 17;막 12:14;눅 20:21, 22;요 8:33;행 5:36, 37). 이런 사정을 로마 권력도 알
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로마의 권력자들이 기독교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권력에 복종하라고 가르침으로써 불필요
한 경계와 오해를 불식(拂拭)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4) 기독교 자체에서 생겨난
문제로 열광주의자에 관한 것이 있는데 이들은 하늘의 시민권 사상과 그리스도의 왕되
심에 대한 열광 때문에 지상의 권력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멸시하고 무시하는 태
도를 가졌다. 이런 신앙은 그 자체로도 문제려니와 로마인들에게도 좋지 않은 반작용
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배경에 두고 볼 때, 위에 있는 권세들에
게 복종하라고 한 바울의 진술은 열광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이라고 볼 수 있다.

=====13:2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심판을 자취하리라 - 논리는 매우 간단하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주셨다. 그러므로 그 권세를 거스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니 심
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선한 사자들로서 선과 악을 구
분하여 상과 벌을 준다면(3, 4절) 이 말은 수긍할 수 있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브
루스(F.F. Bruce)가 제기한 질문처럼 만일 가이사가 자기 권세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
의 영역을 주장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 어떠한 권력이나 위정자가 하나님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우, 가령 가이사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부여해준 권세의 범
위를 넘어 하나님의 자리에서 경배받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이런 경우
우리는, 즉 사람과 하나님이 대립되는 경우, 그리고 반드시 양자 택일을 해야하는 경
우에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선택해야 한다(행 4:19, 20;5:29). 만약 그렇지 않고 이
본문이 시간과 공간, 조건을 초월하여 적용되는 불변의 원리라면 이것은 공의와 정의
에 반(反)하는 각종 전제 정치 체재와 독재체재를 정당화해주는 구실을 할 수 있게 된
다. 이에 대해 혹자는 넓은 의미 즉 하나님의 섭리의 면에서 본문을 이해하려 한다.
이들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바로'라고 하는 악한 왕도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세워졌던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높으신 뜻과 경륜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어떤 권력
은 하나님의 정의에 합당하지 않으나 그것은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질서의 한 부
분을 이룬다는 것이다(Lenski). 반면 혹자는 본문을 사도들의 서신 전체 문맥에서 이
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럴 경우 어떠한 권력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세의 목적과(3,
4) 범위 내에서만 복종을 요구할 수 있고 기독교인 역시 그러한 범위 안에서만 복종의
의무를 질 뿐, 정도를 벗어나 하나님께 돌려야 할 충성마저도 권력이 요구할 때는 저
항할 수 있고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본다(Bruce). 어떠한 개인이나 국가가 정권이나
권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목적이 있는 것
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기대하는 바와 상관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세를 오용
(誤用)하거나 남용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감안할 때 후자의 견해가, 권력에 대한 성
도들의 태도를 바로 세우는데 타당한 견해라고 여겨진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심
판'은 더이상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료하게 판단하기가 어
렵다. 가령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받게 될 궁극적인 심판을 뜻하는지 아니면 지상의 권
력에 의한 형벌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다. 그런데 3, 4절에 나타난 관원에 대한 언급
과 '두려움의 동기'는 후자의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고 본다. 일단 그것이 선한 것이
든 악한 것이든 간에 사람이 지상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면 그에 상응하는 법
적 제재 및 보복적인 조치가 뒤따르는 것이 상례이다. 실제 성도들 가운데는 바르지
않은 권력에 저항하여 목숨까지 잃은 경우도 많은데, 목숨을 잃은 것은 말하자면 권력
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인간의 심판을 받는 것이
낫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구약의 선지자적 정신의 구현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4:19;5:29)는
사도들의 신앙정신과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
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는 예수의 가
르침에 근거해서 신앙의 정조를 지키다가 당하는 숭고한 믿음의 결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권세를 거스려 '심판'을 자취하는 자는 정당한 신앙적 이유
를 떠나서 권세자들에 대한 그릇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이 세원 권위에 반항하여 불순
종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3:3
관원들은 - 공동번역은 본문을 '통치자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복수형은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통치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
하다. 즉 '통치자들'로 표현되는 대상은 권력의 상충부 즉 최고 통지권자만을 가리키
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로마의 관리들을 다 포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표현 속에서 바울은 아마 자기가 겪었던 로마의 관리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
다(행 19:35-41;21:31-40;22:24-30;24:10).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 공동번역은 '악
한 일', '선한 일'을 '악을 행하는 자',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것이 정확한 번역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본문의 '악한일...선한일'은 추상적인 개념으
로서의 행위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한편 통치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나 두려운 존재이지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려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1, 2절에 나오는 권세의 개념이 어떤 전제를 가지고 있음
을 말해준다. 즉 권세는 선을 보장하고 악을 규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이다. 만
약 어떤 권세가 이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선을 담보하거나 악을 제어하는 기능에
서 이탈하여 애초의 전제에 반(反)하는 방식으로 권세가 행사될 때 그 권세는 권세의
수여자(授與者)인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2절). 그런데 바울은 이런 상황
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아마 이것은 바울의 경험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로마법
에 의한 통치 또는 법에 의한 질서 유지가 여러차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네가...아니하려느냐 - 공동번역은 본문을 의문문으로 보지 않고 서술문으로 보아
"통치자를 두려워하지 않으려거든 선을 행하십시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에는 의문문으로 표현한 개역성경의 번역이 바울이 강조한 바를 더욱 강하게 나타내
보여준다고 본다. 바울은 복수를 사용하지 않고 '너'라는 2인칭 대표단수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복수를 써서 표현하는 것보다 강한 인상을 주는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
다. 즉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는 표현은 매우 간결하면
서도 대단히 강한 인상을 남기는 수사적 표현이다. 사실 권력은 사람들에게 두려운 대
상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막강한 힘으로 사람의 정신과 육체에 타격을 주거나 제한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
여기서의 '악'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악, 즉 법에 위반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통치자들의 권한이, 궁극적인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허락된 권력과 그 권력의 효력이 미치는 영역 내에서의 질서를 깨뜨리는 행
위 즉 실정법(實定法)을 위반하는 행위만을 처벌하는 것으로 한정됨을 의미한다.
선을 행하라...칭찬을 받으리라 - 본문에서 '그에게'는 물론 통치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칭찬을 받는다'는 말은 어떤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확
실히 여기에는 보상의 개념이 없으며 단지 인정을 받는다는 정도의 의미가 있을 뿐이
다. 따라서 여기서 선을 행해야 하는 동기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세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상당히 현실적인
동기이다.

=====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 공동번역은 본문을 "통치자
는 결국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선을 이루는 자'라는 표현보다는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심부름꾼'이 더 적절한 번역
이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권세라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
진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다만 악을 제거하고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대다수의 선량한
국민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그 본질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역사
적, 현상적 고찰에서부터 얻어진 결론일 뿐 권세를 세우신 하나님의 원칙이라고 이야
기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 위에 모든 제도, 특히 통치 권력 제도를 세우
신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
다. (1) 천지 창조에서도 나타나듯 질서와 조직은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다. (2) 또한
그 질서와 조직을 통하여서만이 교회와 성도가 이 땅 위에서 보호받으며 원래의 사명
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다(딤전 2:1, 2). 실로 모든 권위와 통치의 모체이신 하나님
께서 당신의 이러한 뜻을 이 땅위에서 실제로 구현시키기 위하여 파생적으로 그 권력
의 일부를 국가의 통치자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통치자는 그 통치권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범위(category)내에 있을 때 그 권세의 신적인 기원을 가질 수 있
다. 그러나 그 법을 월권할 때는 이미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며 단지 성도를 단련
시키는 하나의 악한 도구로 전락될 뿐이다. 따라서 성도는 원(源) 권력이자 모법(母
法)인 하나님의 뜻과 법을 따라 마음으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선지
자적 경고를 부단히 해야 한다. 이러한 통치자와 성도간의 관계성은 '주 안에서 부모
를 순종하라'(엡 6:1)는 사도 바울의 또 다른 메시지와 일맥 상통한다.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 여기서는 '두려움'의 동기가 강조되고 있다.
본문에서 '공연히'는 '근거없이', '목적없이'의 뜻이다. 그리고 '칼'은 헬라어 '마카
이라'(* )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로마의 단검을 가리키는 말로 시민을 사
형시킬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칼'이 구체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세의 힘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사소한 잘못에서부터 극형에 이르기
까지 그 형벌을 부과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세의 총체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
야 할 것이다. 이 '칼'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합법적인 권세이며, 목적없이 임의
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노하심 - 여기서의 '진노'는 헬라어 '오르게'(* )의 번역인데 이 말이 신
적 진노 곧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세속적 진노 곧 통치자의 진노를 가리
키는지 분명치 않다. 혹자는 '진노'(* , 오르게)라는 말이 본서에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근거로 하여(1:18;4:15)
전자, 즉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Lenski, Morrison). 그러나 다른 학
자는 3-5절의 문맥상 후자, 즉 지상적 통치자의 진노를 가리킨다고 본다(Kasemann).
원칙적인 면에서 보면 지상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기능, 즉 선을 도모하
고 악을 징벌하는 기능에 충실하다고 할 때 이 권세에 의한 진노는 곧 하나님의 진노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어떤 통치자가 선을 금하는 법을 만들고 악을 도모한다
고 할 때 그 법에 저항하다가 당하는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
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본
문의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이자 그것의 대행자인 지상적 통치자의 진노라고 할 수 있
다. 이렇게 볼 때 통치자는 막중한 책임을 느끼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행
(代行)하는 자로서 선을 추구하고 악을 제거해야 하는 본연의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한계 안에서 그에게 주어진 '칼'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13:5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 국가의 권세에 굴복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 '권세'가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그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이유는 권세자가 하나님의 사자 즉 하나님의 대리인
으로서 선을 장려하며 악을 징계한다는 대의 명분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권
력이 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성도는 그 권한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노를 인하여만...양심을 인하여 - 본문의 '노를 인하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
기 위하여'(to avoid God's Wrath)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RSV). 권세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므로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가 뒤따른다고 볼 수 있고, 국가 권력은 이를 대행하는 역할을 한
다. 한편 바울은 '양심'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행 23:1;24:16;고후 1:12;4:2;딤
전 1:5) 이 양심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고 악에 대해서는
죄의식을 느끼며 또한 하나님께 대해서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양심을 따라 정당한 권세에 굴복해야 한다. 결국 본문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
는 것은, 기독교인이 권세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자명한 당위성(當爲性)을 갖는 것이
라고 할진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도 권세에 굴복해야 하지만 적
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감과 충성을 위해서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권력에 복종하는 동기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양심의
준수에서 나타나야 한다. 한편 '양심을 인하여' 즉 '양심을 따르기 위해서'(공동번역)
라는 표현은 기독교인이 지상의 권력에 대하여 지녀야 할 태도의 기준이 융통성 있다
는 것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해석하게 한다. 여기서의 양심은 분명히 하나님 말씀의 법
에 근거한 양심이다. 따라서 어떤 지상의 권력이 '권선징악'에 합당하게 그 권위를 행
사한다면 마땅히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 권력에 복종해야 하겠지만 혹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 양심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칼을 휘두른다면(4절) 지상의 권력에
의한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행 4:19, 20). 또
한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감이므로 모든 제도에 대해 순종함에 있어서 주
를 위한다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벧전 2:13).

=====13:6
공세를 바치는 것 - 바울은 국가에 대한 의무 이행 즉 복종의 구체적인 예로 납세
(納稅)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본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이미 로마 국가가 부과한
세금을 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납세를 거부하거나
납세에 대한 저항을 하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혹 로마의 기독교인
들 가운데는 이교도의 국가인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징벌이 두려워서 억지로 세금을 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비록 이교 국가라 하더라도 로마 정부가 가진 권위
를 부여하신 분이 하나님이므로 세금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양심에 거
리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자는 세속적인 권력에 대한 납세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는 바울의 납세관이 복음서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는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 영향받았다고 본다(Lenski). 한편 일부 영
지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여기에 나온 권세에의 복종은 지상의 권세에 대
한 복종이 아니라 천사나 보이지 않는 권세자들에 대한 복종이라고 했는데, 이레니우
스(Irenaeus)는 그의 저서 '이단 논박'(Against Heresies, V. 24)에서 본 구절에 대하
여 이 문맥에서 말하는 권세에의 복종을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이 아니라 지상의 통치
세력에 대한 복종임을 증거했다.
하나님의 일군 - 본문의 '일군'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고이'(*
)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본래 제정 일치(祭政一致) 사회의 왕
적 제사장직에서 온 말로 70인역에서는 '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코이네(Koine) 헬라어 개념에서는 일반적인 국가의 관리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또한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의 문헌들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고귀한 봉사를 나타내는 말
로 사용되기도 했다(15:16, 27;눅 1:23;행 13:2;고후 9:12 등). 대개의 학자들은 이
말이 4절의 '사자'(* , 디아코노스)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 말이라고 본
다(Murray, Bruce).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 여기서 '이 일'이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가리킨다고 볼
경우 이는 관원들의 직무를 부분적으로만 표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원들이 오직
세금을 징수하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일'이 하나님의 일꾼으
로서의 직무를 가리킨다고 보는데(Lenski) 이렇게 보는 것이 본문의 의미를 좀더 명확
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관원들이 세금 징수의 일을 하는데 그 일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통치자들에게도 깊은 의미를 제공한다. 즉 통치자
들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위임해준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해
야 하며 그들의 직무가 갖는 이러한 성격을 잘 인식하고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 안
에 머물러야 한다. 한편 '항상 힘쓰느니라'는 말은 적어도 통치자들이 공공의 일을 충
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13:7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 '공세'
(* , 포론)는 피정복민이 지배 국가에 바치는 '조공'(朝貢)을 의미하며 '국
세'(* , 텔로스)는 국가에 내는 세금을 가리킨다. 6절에서는 독자들이 세금을
바쳐야 하는 근거와 세금을 부과하는 정당서을 묘사한 것이고 본절에서는 마땅히 납세
를 해야 할 것임을 언급한다. 만약 당시의 모든 성도들이 다 세금내는 일을 잘 준수하
였다면 바울이 본절을 말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로 보아 당시에 세금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이들이 세상의 일상적인 질서, 현세
의 정치 질서를 부정하는 열광주의자들이었을 것이라고 본다(Kasemann). 따라서 바울
은 본절을 통해 그들에게 현세의 질서는 하나님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이
질서 안에 머물러 있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 여기서 두려움과 존경은 실제적
으로 권력 또는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내면적인 태도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
은 권력에 대해서 절대적인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秩序)
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정당한 두려움과 존경을 품어야 한다.

=====13:8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지
니고 있다. 첫째는, 성도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갚지 않고 남겨두는 빚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랑이란 성도들이 지불해야 하는 빚으로서 '다갚음'이 없는 영
원한 부채라는 것이다. 한편 '아무에게든지'라는 표현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 대
상이 '성도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 '다 이루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켄'(* )은 현재완료형이다. 이는 사랑하는 순간 율법을
이룬 것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율법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마
5:7).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 바울은 율법의 예
로 십계명을 들고 있다(6, 7, 8, 10계명).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율법인
십계명의 조항을 들어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 사랑이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가를 말해
주려고 한다. 인용에 있어서 부모 공경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조항은 생략했는데,
이는 바울이 자신의 논리 전개상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Calvin). 즉 바울은 사랑과 관련하여 이웃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항목들을 선택했
거나, 아니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항에 해당되는 율법 조
항을 들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는 '...을 하지 말라'하는 금령(禁令)이
'사랑'이라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규범으로 대치되고 있음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 바울은
레 19:18을 예증 문구로 인용하면서 사랑의 결정적인 가치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 계명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율법의 핵심이고 완성임을 명백히
보여준다(막 12:31;갈 5:14;약 2:8).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본문
은 사랑의 소극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성도들은 이런 의미에서의 사랑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이런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사랑도 강조되어
야 한다. 사랑은 능동적인 것이고 따라서 모종의 행동을 필연적으로 유발시키지만 그
것이 결코 이웃을 해롭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의 '완성'
(* , 플레로마)은 '충만'으로 번역될 수도 있으나 8절의 '율법을 다 이루었느
니라'와의 조화를 생각할 때 전자의 번역이 더 분명한 의미를 드러낸다고 본다. 그러
나 사랑으로 율법이 충만해진다고 하는 것도 의미있는 것이다.

=====13:11
이 시기를 알거니와 - 본문의 '시기'(* , 카이로스)는 연대기적으로 흐
르는 '시간'(* , 크로노스)이 아니라 '계절'(season)과 같이 어떤 특성을
가진 개념의 시간이다. 여기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이론'(*
, '그 시기를')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주의 재림으로
오게 될 역사의 종말을 그 시기의 성격이나 현상들을 통해 깨닫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은 주의 가르침(마 24장)에 근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가 주는
의미를 바로 깨달으라고 하는 바울의 촉구가 담겨있는 표현이다.
우리의 구원이 - 본문의 '구원'은 현재의 고난으로부터의 탈피 또는 점진적인 구원
의 과정에 참여함이 아니라 종말론적이고 최종적인 완성으로서의 구원을 가리킨다. 따
라서 이는 주의 강림 때 일어날 미래적 구원의 정점(定點)이 더 가까와지고 있다는 것
이다.
처음 믿을 때보다 - 믿기 시작했을 때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으나 혹자는 이것을 세
례와 관련시켜 세례받은 때로 보기도한다(Kasemann). 적어도 초대교회에서 믿음을 갖
는 것과 세례를 받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었으므로 '처음 믿을 때'를 세례받을
때로 보아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가까왔음이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귀테론'(* )은 비교급
으로 보다 더 가까이에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이 확실히 보장되
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역사가 종말과 우주적인 구원을 목표로 하고 진전되고 있
음을 보여준다. 역사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이루어진다.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 '깊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에콰센'(*
)은 '진전되었다', '많이 지났다'의 의미를 갖는 '프로코프토'(*
)의 부정 과거 시제로서 '밤이 많이 지났다'는 의미도 포함되지만, '이미 밤이 지
났다'는 의미가 더욱 많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낮이 '가까왔으니'(*
, 엥기켄)는 완료형으로 '이미 와 있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 선포를
한 시점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왔다(* , 엥기켄)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해석이 더욱 타당하다. 한편 '밤'이 현세상이라면 '낮'은 구원이 있는 천
국을 가리킨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신천 신지(新天新地)가 가까왔
음을 말해주는데 이 종말의 가까움에 관한 바울의 표현에 대해 독자들은 그럼에도 불
구하고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날'이 임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1) 바울의 '가까움'에 대한 강조를
인간들이 계산하는 연대기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예언적 전망'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
3:8)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2) 바울의 '가까움'에 대한 강조가 어
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감옷을 입자"
는 결론으로 향하고 있다. 이는 현재적 경건의 삶을 촉구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미 참
빛이 왔기 때문에 낮의 세력이 성도들에게 임하였으나 실제로는 밤이다. 즉 성도들은
여전히 악한 세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눅 16:8). 따라서 지금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죄의 세력에 대한 전투적인 삶이다.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 - 바울은 낮과 밤에 다른 옷을 입는 것에 착안하여
지금 벗어버려야 할 것과 새로 입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본문은 어두움으로 상징
되는 죄악 곧 사단의 일과 빛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일의 대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두움을 악한 세력으로, 빛을 선한 세력으로 대비시키는 것은 당시에 일반화된 관행
이었으므로 독자들은 이것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 쿰란 문서에
의하면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누인다. 한 부류는 어두움의 사자에 의해 지배를 받고
다른 한 부류는 빛의 왕자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그러다가 말세에는 이들 두 세력이
큰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빛의 아들들과 어두움의 아들들의 전쟁'이라
고 한다(Vermes). 바울은 전쟁용사의 무장(武裝)에 대해서 엡 6:13-17에 자세히 기록
한 바 있는데 본 구절의 '갑옷'도 성도의 전투적인 삶을 잘 보여준다. 성도들은 비록
어두움의 세상과 접하며 살지만, 성도의 실체는 낮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싸움이 수반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하지만
성도의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것이므로 주의 강림으로 드러날 영광과 변화될 삶을 기
대하며 살아간다(고후 3:18;4:14).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시기하지 말며 - '낮에와 같이'라는 표현은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성도들이 실
제로 낮에 살고 있다고 여기고 생활하라는 것이다. '방탕과 술취함', '음란과 호색, '
쟁투와 시기'가 나열되고 있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단정히 행하는 것과 상반된다. 이러
한 무절제한 성적인 방탕과 시기로 인한 싸움은 죄된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러한
속성을 이겨내지 못하면 파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한편 바울이 본서를 쓰고 있던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분위기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Harrison).

=====13: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 본 구절은 신자의 전신 갑주(엡 6:13-17)를 요약적
으로 명제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칼빈(Calvin)은 본문을 가리켜 '영의 권능으로 강하
여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모든 성결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를 뜻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로 더불어 옷 입는다는 말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
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한 바 됨을 의미한다(6:1-10).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공동번역은 본문을 "육체의 정욕을 만
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요"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
는 것은 육신의 일 자체를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욕을 추구하기 위해 몸을 내어
두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육신에 관한한 모든 것이 악하다고 하는 의미가 전혀
없다. 다만 그것이 정욕을 충족시키려는 것으로 움직여질 때 죄악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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