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제 12장
=====12:1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 '...에 대하여'의 헬라어 '페리'(* )는 고린도 교인들
의 서면(書面) 질문에 답하는 말이다. 이는 이미 독자들이 제기된 문제점에 관하여
바울이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여기서 바울이 '신령한 것'이라고 한 말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신령한 것'의 헬라어 '프뉴마티콘'(* )이란 단
어의 성(性)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1) 혹자는 14:37에서 '프뉴마티콘'이 '신령한
자'(* , 에 프뉴마티코스)로 사용되기 때문에 본문의 '프뉴마티
콘' 역시 남성 명사로서 '신령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본다(Hofmann, Edwards,
Holsten, Heinrici). (2) 혹자는 14:1에서와 같이 '신령한 것'(* , 타 프
뉴마티카)이 중성 명사로서 '은사'를 가리킨다고 본다(Calvin, Luther, Meyer, Godet
, Lenski). 본문의 '신령한 것'에 대한 성(性)이 불확실하며, 또한 (1),(2)의 내용이
서로 일맥 상통하므로 어느 한쪽으로 기울 필요는 없으나 본문의 문맥과 주제상 '신령
한 것'의 의미는 '은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원치 아니하노니 - 본문의 헬라어 '우 델로'(* , '내가 원하지 않는
다')는 바울적 표현으로 친근한 어구인 '아델포이'(* , '형제들이여')를 수
반한다(10:1;살전 4:13). 바울의 희망을 분명히 천명(闡明)하면서도 그 대상에 대하여
는 친근한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감정적인 문제로 비화될 여지를 최소화 한다. 사도 바
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의 목적과 그 기원에 대하여 그리고 은사의 다양성
에 대하여 무지한 결과 초래할 수 있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12:2
래 고린도 교인들의 대부분은 이방인 출신으로 이방의 우상 종교를 좇아갔던 과거
상태를 상기시켜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있는 현재 상태와 대조시키고 있다. 바울
은 성령의 현현(顯現) 이전과 이후를 이방인이란 단어로 분명히 구별짓고 있다.
말 못하는 우상 - 본 구절은 이방 종교의 허구성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표현으로 우
상은 생명이 없어서 사람의 요구에 반응할 수도 없고,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나타낼
수도 없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과거에 섬겼던 우상의 본질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이런 헛된 우상을 섬긴 것은 우매함과 세속적 탐심의 결과이고, 그 상태는 비극적인
것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 '끄는 그대로'의 헬라어 '호스 안 에게스데'(*
)에서 '호스 안'은 반복의 개념으로 쓰이는 코이네 헬라어의 관용어
로서 '끌림을 당할 때마다'라고 번역된다. 그리고 '끌려갔느니라'의 헬라어 '아파고메
노이'(* )는 아고(* , '내가 인도하다')의 미완료 수동태 분사이
다. 이는 과거의 고린도 교인들이 헛된 우상의 요구대로 이끌려 자기의 판단과 결정과
는 무관하게 비인격적인 숭배를 하였음을 보여준다.
=====12:3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저주할 자'의
헬라어 '아나데마'(* )는 '신에게 드려진 것'(눅 21:5) 혹은 '신의 저주
아래 놓인 것' 등의 의미이다. 본래 이 단어는 신성한 장소에 저축된 것을 의미하였다
가 신에게 바쳐진 것을 뜻하게 되었고, 바쳐진 것은 바치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잃어진
것이므로 '멸망된 것' 곧 '저주받은 것'의 뜻이 되었다. 바울은 저주의 대상에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16:22;롬 9:3;갈 1:8). 본절에서 바울은 '저주받은 예수'(*
, 아나데마 예수스)와 '주 예수'(' ,퀴
리오스 예수스)를 대비시키고 있다. 즉 2절에서 이교도에 대하여 언급하고나서 본절에
서는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인식하는 부류들과 기독교적 그
리스도관을 가지고 예수를 주 예수로 고백하는 자들을 비교하여 핵심에 접근하고 있
다. 본절에서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예수'라 지칭하고 있는 이유는 역사적인 인물
로서의 인간 예수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는 하나
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후 인류 역사에 종속되어 자발적인 삶
을 영위하시다가, 그의 택하신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
시다. 한편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을 '성령으로'(* ,
엔 프뉴마티 하기오)라고 정한 것은 고후 11:3, 4에서 제시한 것처럼 '다른 예수',
'다른 영' 그리고 '다른 복음'으로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른 예수'란 바
울의 증거에 위배되는 것으로 바울은 예수를 참 하나님(Vere Deus)인 동시에 참 인간
(Vere Homo)으로서 이해하였다. 본장 10절에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를 언급한 것도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서 다른 신앙 고백 내용을 가진 '다른 영' 때문일 것이다.
=====12:4
은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마톤'(' )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은혜의 선물'을 뜻한다. 이 단어는 바울 서신에 16회 나온다.
바울은 이 단어를 특별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어떤 신기하고 특별한 은사라는 의미
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값없이 주
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여러 가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이레세이스'(' )는 원래
'분배' 혹은 '분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를 여러 갈래 나눈다는 뜻이다. 이 단어
가 본장 11절에서는 분사형 '디아이룬'(* )으로 사용되어 '나눠주다'라
는 의미로 번역됨으로써 은사의 '다양성'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5, 6절의 '여러 가
지'에도 이와 동일한 헬라어가 사웅되었다.
성령은 같고 - 예수를 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 인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는 어떤
특정한 것들 만이 아니라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그 다양성 위에 한 성령의 역사가 있
음을 알아야 분쟁이나 다툼 따위의 문제가 사라질 것이다.
=====12:5
직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온'(* )는 '디아코네오'(*
, '섬기다', '봉사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아코니아'
는 여러 가지 의미를 포괄한다. (1) 이 말은 '사랑을 밑바탕으로 한 섬김'을 뜻하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봉사를 가리킨다. (2) 보다 특별한 의미로는 '어떤 의무의
수행'을 뜻하여 사도들이나 전도인들이나 마가 같은 조력자들이 맡은 책무를 수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3) 때로는 이 단어가 연보(捐補)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롬
15:31; 고후 8:1ff.). 연보는 부수적인 활동이 아니라 기독교적 사랑에서 나오는 참된
활동이기 때문이다. 본절에서의 직임은 이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염두에 두고 언급된
것이다.
주는 같으며 - 직임은 개개인의 공명심으로 말미암아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
의 주(主)'를 위한 것이다. 성도가 그 직임에 따라 각자에게 부여된 영역 속에서 봉사
하는 것은 곧 주를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직임의 열등성 또는 우월성을 따지고 그에 치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머
리되심을 잊은 처사이다.
=====12:6
역사는 여러 가지나...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 '역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르게마톤'(* )은 '에네르게오'(* , '활동하게하
다')에서 온 말로 헬라 세계에서는 사람의 사역이나 세상에 감도는 우주적이거나 물리
적인 힘을 가리켰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역이나 사단적인 힘을 지칭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TDNT).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사역하시는 작용을 의미한
다. 바울은 '역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삼위이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은사를 일
관성 있게 주관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Mare).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주관하시
는 성령의 은사는 성도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양하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상호 은사의 상이성을 인정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은사를 온전히 사용해야 할 것이다.
=====12:7
바울은 8-10절에서 은사의 목록을 열거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여러 은
사를 주신 것은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대원칙을 소개하고 있다.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하려 하심이라'의 헬라어 '프로스'(* )는 목적이
나 의도를 가리키는 전치사로서 본구절은 은사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은사의 목적
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여기서 밝히고 있다.
성령의 나타남 - '성령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프뉴마토스'(* )
는 소유격으로서 본 구절에서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쓰였는지 주격적 소유격으로 쓰
였는지 논의의 여지가 있다. (1) 주격적 소유격의 용법으로 쓰였다면 성령께서 나타나
신 것을 의미하고 (2) 목적격적 소유격의 용법으로 쓰였다면 사람이 성령의 내주(來
週)하심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된다. (2)의 견해는 고후 4:2의 '진리를 나타냄'(*
, 파네로세이 테스 알레데이아스)과 연관지어
설명된다(Meyer, Hofmann). 하지만 '성령'은 인격인 반면 '진리'는 비인격이라는 점에
서 명백히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Godet, Edwards). 따라서 (1)의
견해가 더욱 타당하다. 즉 성령은 인격자로서 은사를 주시고 성령께서 나타내시는 증
거가 은사임을 보여준다.
=====12:8
성령으로 말미암아...같은 성령을 따라 - 바울은 본절에서 성령과 연관지어 전치사
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먼저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는 '...
에 의해'(by means of)라는 뜻으로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혜는 성령의
조명(照明)에 의한 것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는 '...의 기준에 따라'(according to the standard of)라는 뜻으로 '지식'
과 관계되어 '지식'이 성령의 기준 내지 결정에 좌우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지혜와 말씀을...지식의 말씀을 - 혹자는 '지혜'(* , 소피아)와 '지식'(*
, 그노시스)이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만, 바울은
그들을 구별하고 있다. 본문에서 벵겔(Bengel)에 의하면 '지혜'(소피아)는 이론적인
성질을 내포하고 '지식'(그노시스)은 실제적인 성질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본절
에서는 전자는 실제적인 적용을, 후자는 이론적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특히 '지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비밀을 설명하는데 쓰이는 용어로 이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고후 10: 5)이며, '예수 그리스
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 3 : 8)이다. 결국 이 은사들은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결합되
어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씀으로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데 사용된다(고전 2 : 6-13; 엡
1:8, 17; 골 2:3). 혹자는 '지혜'는 '사도'와 '선지자'를 만들고, '지식'은 '교사'를
만든다고 한다(Godet). 이 점을 수용 한다면, '지혜의 말씀'은 본서 28절에 나오는
직임들 가운데 첫째와 둘째 것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직임과 관련되고, '지식의
말씀'은 그 다음의 직임인 '교사'의 직임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 견해는 '지
혜'와 '지식'을 '실제'와 '이론'으로 구분하여 생각하기보다는 동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첫번째와 두번째 은사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성령과 연관지어 말한 것은 '구원의 계획'(Heilsplan)이나 '구원의
내용'(Heilsgut)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 이해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12:9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 앞 구절에서는 '성령'을 제한하는 전치사가 '디아'와 '카
타'였는데 본절에서는 '엔'(* , '...안에', '...로')이 사용되었다. 전치사 '엔'은
성령께서 사역하시는 영역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수단으로서의 의미도 있어서 '디아'나
'카타'를 사용한 것보다 더 강력하게 성령께서 행동의 주체자임을 표현한다(롬
9:1ff). 믿음은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롬 1 : 17 ;3 :22) 본절의 '믿음'
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제한된 은사를 의미한다. 이는 바울이 8 : 2에서
일반적인 믿음과 특별한 은사로서의 믿음을 구분하고 있는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Godet). 본절에서의 '피스티스'(* , '믿음')는 영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으
로 발휘하는 능력의 개념을 내포한다. 믿음의 능력은 예언하고(히 11 : 3), 기적을
행하는(마 21: 21; 고전 13:2)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일반적으로 '피스티스'
는 모든 은사들의 기본이며, 이 '믿음'의 정도에 따라 은사는 보다 영향력있게 행사
(行使)될 수 있다.
병고치는 은사 - '병 고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야마톤'(* )은 복수 명
사로서 여러 종류의 질병이 치유의 대상이었음을 시사한다.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마타'(* ) 역시 복수 명사로 은사가 각기 다른 종류의 병을 치
료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병 고치는 은사'는 단지 사람의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자 마음과 정신의 치료까지 포괄하는 말이다.
=====12:10
능력 행함 - 이 은사는 '믿음'과 '병고치는 은사'와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의 법
칙을 초월한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도록 하여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C.P.Wagner). 이 은사는 '병 고치는 은사'보다 더 포괄적인 힘을 지닌다. 이것
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갑작스런 죽음(행 5:1ff.), 박수 엘루마를 소경으로 만든 일
(행 13:11)등과 같이 마귀를 대적하며, 그 추종 세력을 축출하는데 사용되는 능력이
다. 이러한 능력 행함으로 나타나는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방
편이 되며(Calvin) 동시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계시하는 수단이 된다.
예언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페테이아'(* )는 하나님의 계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은사로 하나님에 의해 수여된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단어는 '말을 토하여 내다', '미리 경고한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한다'는 의
미를 가진 '프로페튜오'(* )와 같은 어군으로 미래에 일어나리라고 예
측되는 상황과 현재 일어난 사건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예언'
을 하나님께서 교회를 가르치기 위해서 베푸신 가장 큰 은사 중의 하나로 보았다. 예
언은 교회를 신앙의 기초 위에 세우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을 설명해 준다. 신
약 성경에서 '예언'이란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
므로 계시가 완결된 현재에 있어 '예언'이란, 예언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이해하여 가
르치며 현재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을 가리킨다(계 1 : 3).
영들 분별함 - '영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톤'(* )은 악한 영들을
의미하며, '분별함'의 헬라어 '디아크리세이스'(* )는 '구별', '인
식', '가려냄', '심판' 등의 의미를 지닌다. 초대 교회 당시에도 거짓 선지자가 많았
으므로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그릇된 가르침을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영
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요일 4 : 1). 하지만 당시에는
기록된 말씀이 없었으므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가 필요했다. 이 은사는 교회를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으로부터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發露)였다. 영들을 분별하
는 은사는 어떤 현상의 이면에 있는 정신적인 영향력을 간파하는 능력으로 특수한 사
람들에게만 주어졌다.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거짓말 하는 영'이
들어 있는 것을 알았고(행 5 : 1-10), 마술사 시몬의 마음이 '악독하고 불의한 영'에
얽매여 있는 것을 간파하였다(행 8:23). 이러한 은사를 활용한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나
왔다고 주장하는 어떤 행위가 신적인 것인지 혹은 인간적인 것인지, 아니면 사단으로
부터 나온 것인지를 확실히 식별할 수 있다.
각종 방언 말함 - '각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 )는 '혈통', '민족',
'종류' 등을 의미하므로 방언의 종류가 여러 가지임을 가리키고 각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였음을 시사한다. 방언은 고린도 교인들이 가장 자랑으로 삼았던 은사 가운데 하
나로 교린도 교회에서의 방언의 형태는 각기 다른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적 흥분 상태에 이르렀을 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것까
지도 포함하였다.
방언들 통역함 - '통역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르메네이아'(* )는
'번역', '해석'을 뜻하며, 이 단어는 신약에서 본절과 본서 14:26에만 나온다. 이 특
별한 방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경우에 이 방언에서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이 방언을 통역할 사람이 있도록 성령의 통역 은사를 구해야 할 것이다
(14:13). 그런데 바울은 방언이 그 자체로는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으므로 자제할 것
을 권면한다(14:28). 본절에서도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함의 은사가 언급되는 것은,
은사가 교회에 유익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함을 전제한다.
=====12:11
은사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기원을 가진다. 6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언급한 데 반해서 여기서는 성령의 행하심을 언급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은사들을 발
생(發生) 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들은 서로의 은사들을 자기들의 관점에 비추어 비교하여 열등의식이나 우월감에 빠질
필요가 없다.
=====12:12
몸은 하나인데...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 '몸'과 지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에 비유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유기체(有機體)임을 이해시킨
다. '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다페르'(* ,'just as', '꼭...처럼')는
롬 12 : 4처럼 유사 비교를 이끌어 내고 있다. 본절에서 '그리스도'(* ,
크리스토스)는 단지 교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De Wette) 단순히 교회의 머리로
서의 그리스도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Chrysostom, Estius, Meyer).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교회를 몸으로 하는 인격적 주체자로서 간주한다(Edwards). 몸은 단일
체이면서도 많은 지체와 더불어 유기적 연관성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많은 지체
들로 구성되어 완전성과 통일성을 이룬다.
=====12:13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 그리스도 안에서 혈통적인 구별이나 신
분의 구분에 상관없이 한 몸이 되는 것은 성령이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바
울은 '하나됨'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하나되지 못
함에 대한 권면일 수도 있다(엡 4:4-6절). 바울은 '성령'(* , 프뉴마)과
'세례'(* , 밥티스마)와 '몸'(* , 소마)을 하나의 관계로 본다. 즉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하나된 몸, 곧 하나된 영적 유기체가 되었
다는 것이다. 이때 '성령으로 세례받는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어떤 외적인 방법인 물
로써 변화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적으로 작용하여 변화시키심을 의미한다.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는
전술한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설명을 이끄는 접속사로 쓰였다. 즉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을 '마시다'는 표현으로 보충한다. 우리의 주 예수께서도 성령을 받아 들이는
것을 가리켜 '생수를 마신다'라고 표현하신 바 있다(요 7:37-39). 이제 성령을 받아들
임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모두 다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분열과 다툼 따위를
종식(終熄)시키고, 공동 사역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12: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 12절에서 사용했던 상징적인 표현을 다시 사용
하여 교회가 갖는 독특한 성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인간의 몸을 비유
로 영적인 몸인 교회를 설명하고 있다. 즉 교회는 하나의 몸으로 되어 있지만 많은 기
능과 역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12절에서는 지체가 많다는 점에 역점을 두었다면,
본절은 '한' 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2:15,16
바울은 몸의 지체들 각각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손과 발을 대
비시키고 눈과 귀를 대비시키고 있다. 즉 비중있고 가치있는 손과 눈에 비해 덜 눈에
띄고 덜 사랑스런 발과 귀가 불평하는 것을 예로 들어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가치관
을 바로잡으려 한다. '발'과 '손' 그리고 '귀'와 '눈' 등은 은사가 각기 다른 사람들
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교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은사를 다른 사람의 것과 비
교하여 우월 의식이나 열등의식을 가지고 상대방에 대해 비난하거나 불평하는 것은 교
회의 건덕상 무익한 것이다. 영향력이 적고 보잘것없는 은사라 할지라도 전체적인 관
점에서 보면 귀중하다.
=====12: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냄새맡는 곳은 어디뇨 - 본절은 15, 16절에 대한 연속적인
설명으로 교회의 각 구성원의 은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바울은 가정법을
사용함으로써 이해를 용이하게 하고 있다. 온 몸은 듣는 곳이 없이 보기만 해서도 안
되며, 냄새 맡는 곳이 없이 듣기만 해서도 안된다. 따라서 지체의 다양성은 곧 몸의
효용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지체간의 관계 또한 상호 대립과 불평의 관계
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12:18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원하시는 대로'에 해당
하는 헬라어 '에델레센'(* )과 '두셨으니'의 헬라어 '에데토'(* )
는 부정 과거로서 하나님의 계획과 창조 행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많은 지체들로 구성 되도록 지으셨다. 이렇듯 각 지체들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원하
심에 근거하는 것으로 바울은 간주한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완전하므로 각 지체들이
존재하는 자리가 완벽한 것이고 각 지체에게 귀중한 역할이 있음을 본 구절은 보여준
다. 따라서 누구든 불평하거나 시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이며 하나
님의 창조 행위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
=====12:19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 17절의 내용에 대한 재설명이요 부연이다.
모두들 자기가 좋게 여기는 지체만 된다고 가정하면 몸은 정상적인 기능을 갖추지 못
한 불구가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성도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은사를 발전
하여 전체 공동체 속에서 자신이 갖는 독특한 역할을 잘 수행하여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바로 설 것이다.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 바울은 12절에서 몸의 단일성에서 지체와 다양
성으로 전개시켜 나가다가 본절에서는 다시 다양성에게 단일성으로 회귀(回歸)하고 있
다. 역시 강조점은 '하나'인 몸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각 지체들의 은
사는 다양할 수 있지만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통일된 교회로 존재한다.
=====12:21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 많은 지체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각 지체는 그 우선 순위나 중요도가 덜하다고 하여 그 존재 가치마저 없어지
는 것이 아니다. 몸에 붙은 모든 지체는 한 몸을 이루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고 한 지
체라도 없으면 다른 지체들이 자신의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12:22
더 약하게 보이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스테네스테라'(* )는
'약한', '병든' 등을 의미하는 말로 본절에서는 중요도가 전혀 없다는 것으로 간주(看
做)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바울은 원문상 강한 부정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지체들
이 각각의 고유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12:23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
'아름답지 못한 지체', 그리고 '부족한 지체'(24절)는 앞절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
체'를 다른 표현으로 설명한 동일한 의미들이다. 사람들이 가치기준을 어디에 두느냐
에 따라 지체 상호간에는 우열이나 차등이 있다고 간주될 수 있겠으나 하나님께서는
열등하다고 간주되는 지체들을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상을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
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적 세계의 통치 원리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신실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12:24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존귀를 더하사 - 바울은 18절에서 언급한 대로
몸의 형성(形成)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되었다고 반복
한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을 전제
하는 것이므로 몸의 조화도 완벽하다. 따라서 몸과 그 몸에 붙은 모든 지체들은 함께
존귀함을 얻는다.
=====12:25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 본절은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동으로 구성된 몸
의 본절은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동으로 구성된 몸의 지체들이 상호 대립 관계가 아니
라 상호 협력 관계임을 보여준다. 교회의 통일성이란 이러한 상호 관계 속에서 이루
어지며, 성도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한 몸으로 세우신 의도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교
회의 참된 지체가 될 수 있다.
=====12:26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 지체들은 서로 공동체
의식과 공동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각각 독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체적인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바울은 이처럼 하나의 유기체로 지음받은 사람의 몸이 갖고 있는 특
성을 설명하여 교회가 가져야 할 공동체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 본절은 12-26절과 28절 이하의 교
량적인 역할을 한다. 이제까지 몸과 지체에 대하여 의인법을 사용해온 바울은 이제 28
절 이하에서 다른 교회의 구성원에 대한 본격적인 지칭, 곧 '너희'를 사용한다. '너
희는'(* , 휘메이스)은 일반적으로 고린도 교인을 뜻하지만, 구체적으로는 교
회에서 은사와 직임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그리스도의 몸'(* ,
소마 크리스투)은 교회 전체를 가리키지만, '각 부분'(* , 에크 메루스)
은 '부분적으로'(in part)라는 의미로 각각의 구성원이 몸에 속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몸의 각 지체는 중요한 부분이라 하여 자신이 전체라고 주장할 수 없고 사소한
부분이라고 하여 전체에서 제외될 수 없다.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 '몇'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스 멘'(*
)은 바울이 자신의 의도(意圖)대로 몇몇 직임과 은사들을 구분하여 설명하
고자 함을 보여준다. 바울은 사도로부터 방언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서 중요하게 여
겨지는 사람과 은사만 언급하고 기타 다양하고 일반적인 은사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있
다.
사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루스'(* )는 '아포스텔로'(*
, '보내다')에서 온 말로 초대 교회 당시에 이 직분을 가진 사람은 매
우 중요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직분을 맡으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받
았으며(눅 6:13;롬 1:1), 이 직분에 대한 신약성경의 언급을 살펴보면 이 외에도 4
가지 특징을 갖는다. (1)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갈 1 : 15), (2) 교회에서 구별하여
따로 세웠고(행 13:1), (3) 전체 교회가 그를 사도로 인정하고(갈 2:7), (4) 사도의
표로 사도직이 확고하게 증명되었다(고후 12:12).
선지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페타스'(* , '대변자', '대리자')
는 사람들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대변자를 가리킨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교사 - 이들은 사도나 목사가 아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효과적으로 가르
쳐서 교인들을 온전히 세우는 사람들이다(고전 14:30;엡 3:5). 교사의 사역은 사도들
이나 예언자들과는 달리 한 지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에는
필사본이 매우 귀중해서 교인들 모두가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교회에서 교사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했다(Morris).
서로 돕는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틸렘프세이스'(* )는
'손을 거들어서 도움'의 의미로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행하는 모든 종류의
도움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교회와 연관지어 교회 안에서 베풀어지는 도움을 시사한
다(Grosheide). 이는 포괄적으로 돕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사람들
의 외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 은사를 말할 때 집사(執事)들의
직무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Chrysostom, Hodge).
다스리는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베르네세이스'(' )는 '선장'
이라는 의미로(행 27:11; 계 18:17) 배가 항해하기에 휘험한 모래톱 해안을 통과할 수
있도록 조종해 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권위를 가지고 회중을 인도하는 자,
곧 치리하는 사람들(rulers)을 가리킨다. 이들은 고대 교회에서는 '세니오레스 플레비
스'(Seniores Plebis, '평민 장로')라고 불리었으며(Hodge), '다스리는 것'은 교회의
감독들이나 장로들에게 필요한 은사로 간주되었다(딤전 5:17).
=====12:29,30
다 사도겠느냐...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 바울의 이 수사적인 질문에는 다음과 같
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 몸에 여러 지체가 존재하는 것과 같이 교회에서도 모두
가 동일한 은사와 동일한 직임을 가진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2) 모두 다 동일한
은사를 갖기를 원하는 마음을 억제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은사를 감당해야 한
다. (3) 은사는 우열을 비교하거나 대립 관계에서가 아니라 협조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교만하거나 그렇지 못한 자
들이 시기하고 불만을 갖는 것은 교회의 건덕상 무익하다.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 '더욱 큰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카리스
마타 타 메이조나'(* )는 '더욱 탁월한 은사'
라는 의미로 이는 은사들이 서로 상대적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모든 은사들
이 교회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라고 언급한 것과(21절ff.) 약간의 모순이 있는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표준을 가지고 '탁월한 것'을 생각하
고 있기 때문에 이를 수정해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말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
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특별히 방언 은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에 반해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은사는 교회 전체에 유익을 주기에 제일 효율적이고
광범위한 힘을 지닌 것이었다. 다시 말해 고린도 교회는 은사의 효율성 보다는 매력적
이고 대중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으나 바울은 모든 은사보다 뛰어난 은사를 새로운 관
점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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