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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고린도 후서 9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0|조회수6,983 목록 댓글 0

고린도후서 제 9장
=====9:1
성도를 섬기는 일 - 이는 8장에서부터 계속 다루어 온 문제로(8:4) 예루살렘 교회
의 성도들이 글라우디오 황제(A.D. 41-54) 때 몰아친 심한 기근으로 인해 생활이 몹
시 궁핍해졌기에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기 위한 구제 헌금 내는 일을 가리킨다. 바
울은 새삼 이 일에 대하여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 절(2절)에 제시된
다.

=====9:2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 구제 헌금을 모금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권고하는 편지를
쓸 필요가 없는 까닭은 그 일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자원했기 때문이다.
아가야에서는...자랑하였는데 - 아가야는 마게도냐의 남방에 있는 헬라 전토를 포
함하는 지역이다. 바울 당시 아가야는 로마의 식민지였고 고린도가 그 수도였다. 따라
서 아가야와 고린도는 동일시될 수 없는 것이고 다만 고린도는 아가야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고린도 교회 역시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였다. 고린도 시에 우리가
알 수 있는 지명으로 겐그레아나 아덴을 들 수 있는데 이 도시들에도 교회가 있었다
(롬 16:1). 한편 본문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사실은 바울이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
서는 일 년 전부터 구제금을 준비하였다고 자랑했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8:2, 6, 10
과 본절의 연결에 대해, (1) 8장과 본장이 한 편지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씌어졌다고 본다. (2) 8:10, 11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자발적인 헌신을 요구한 것은 그
들의 모범을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적극적인 헌신을 유도하기 위
한 것이라고 본다. (3) 바울이 8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헌신을 고무시키기 위해 마게
도냐 교인들의 모범에 관해 말한 것처럼 본장에서는 과거에 마게도냐 교인들을 격려하
기 위해 고린도 교인들의 열심을 소개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 중에서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첫번째 견해, 즉 8
장과 본장이 한 편지에 씌어진 것이 아니라는 견해는 학자들 사이에 지지를 받지 못하
고 있고(3절 주석 참조), 두번째 견해는 이미 마게도냐 교회에서의 모금이 끝났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격동시켰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레디센'(* )은 보통
나쁜 의미로서 '자극하다', '분내게 하다'를 뜻하나에서는 좋은 의미로 '건전한 경쟁
의식을 조장(助長)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J. Hering).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금에
대한 사업을 먼저 시작한 것은 사실인 듯하며(8:10) 이 소식이 마게도냐에 전해졌을
때 그들에게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의욕을 불러일으켰음도 사실인 듯하
다(8:2, 3).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범을 보고 늦게 시작
한 마게도냐인들은 매우어려운 상황임에도(8:2) 불구하고 이미 구제연보를 마쳤던 반
면, 먼저 시작하여 다른 성도들에게 동기를 부여한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도 끝을 맺지
못하고 있으며 이제는 도리어 마게도냐인들에 의해 자극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
다.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아직 구제 연보를 끝내지 못한 사실을 마
게도냐인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바울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실망하게 되
는 일이 생기는 것이었다(3-5절).

=====9:3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 여기서 '이 형제들'은 8:18, 22에 언급된 두 형제만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디도까지 포함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전자라고 보는 견해(Lowery)
보다 후자라고 보는 견해(Barrett, Harris)가 유력하다. 바울은 앞에서 디도와 나머지
두 형제를 구분하여 소개했었다(8:23). 그것은 아마 양자의 역할이나 위상(位相)의 차
이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디도는 바울의 대리인 자격으로 간 것이고 두 형제는
헌금 사업이 아무런 의혹을 일으키지 않고 공정하게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파견된 일종의 증인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양자는 구별된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이들 모두를 '형제들'로 표현한다. 이 호칭 속에서 디도 일행은 모두 고린도 교인들의
형제들로서 그들에게 다가가며 그들의 구제금에 대한 열심을 격려하게 될 것이다. 한
편 본문에서 언급되는 '형제들'이 디도와 마게도냐 교회에서 선출된 두 형제들을 가리
킨다고 볼 수 있는 것은 8장과의 연결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것이다(8:18, 22). 그렇
지 않고 본장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이 형제들'이 누구를 지시하는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8장과 본장은 한 편지 안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임이
분명해진다(2절 주석참조).
이 일에...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 '이 일'이라 함은 바울이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자랑하였던 바 고린도 교인들이 일 년 전부터 구제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을 가리킨
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한 자랑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형제들을 보낸다고 말
한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모금 운동이 바울의 자랑에 비해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
두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9:4
마게도냐인들이...두려워하노라 -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이 시작과는
달리 구제금을 다 모으지 못했음이 틀리없다. 이에 대해 바울은 두 가지로 걱정을 한
다. 첫째는, 만약 바울이 마게도냐인들과 함께 고린도를 방문할 때까지도 구제금 사업
이 지지 부진(遲遲不進)한다면 마게도냐인들이 보기에 고린도 교인들은 형제된 성도들
에 대한 사랑과 주님께 대한 헌신이 없는 형편없는 성도들로 보일 것이다. 둘째는, 마
게도냐 성도들에게 바울의 신뢰가 실추되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며 더 나아가 고린도
교인들을 믿었던 바울 자신에 대해서도 회의를 갖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런 일이 현
실화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

=====9:5
형제들로...미리 준비케 하도록 -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이 마
게도냐 교인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바울의 의지가 다시 드
러난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 일행을 보내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도록 권고하
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참연보 - 디도 일행이 해야 할 일은 단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과거에 한 약
속을 상기시켜주는 일뿐이다. 그 이상 고린도 교인들이 심리적으로 압력을 받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구제 헌금에 관한 모든 결정은 고린도 교인들 스
스로가 내리도록 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금에 대한
약속을 스스로 지켜주리라 믿고 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본절의 내용을 볼 때 고린
도 교인들이 구제금을 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
에 하나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연보를 미리 준비해 두지 않고 있다가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이 간 다음에 마지못해 연보를 한다면 그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되며 진정한 의
미에서의 연보가 아닌 것이다. 본문의 '연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기안'(*
)는 '좋은 말', '찬양', '후한 선물', '축복'의 의미를 갖는다. 본문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의미는 '축복'으로서 '참연보'는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축복
이 된다(Bruce)는 것으로 '참연보'는 의무에 의해서나, 체면 때문에,또는 자랑이나 자
기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 대한 책임 의식과 신앙적 사랑에 의해
서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참연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
었으며, 이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그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다.

=====9:6
적게 심는 자...많이 심는 자 - '연보'가 '축복'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본
절과 관련하여 더 분명해진다. 본절은 잠 11:24, 25;19:17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으로
'뿌리는 것에 비례해서 거둔다'는 추수의 비유를 통해 적극적인 헌금의 필요성 및 이
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이 베푸는 사람은 그 만
큼 많은 것으로 축복을 받지만, 적게 베푸는 사람은 그 아낀 것이 모아지지도 않을 뿐
더러 돌아오는 것도 적어 늘 가난할 뿐이다. 이것은 내세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타
인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은 곧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이므로 그렇게 한 사람은 하늘에
서도 많은 상급을 받지만, 남에게 베푸는데 인색한 사람은 그 쌓아둔 것이 없으므로
받을 상이 없는 것이다(마 6:19-21; 눅 12:33, 34; 갈 6:7)

=====9:7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 여기서는 연보의 액수가 많은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충동적이거나 우연한 결정이 아니라 내적인 결심에 의해 즐
거운 마음으로 연보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누가 자랑하거나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에
서 또는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많이 바쳤다면 그것은 참다운 연보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 주기 싫은 것을 아까워하면서 연보하거
나, 대의 명분이나 외부적 압력에 의해 연보를 하는 것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a cheerful giver, NIV)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본
문은 '하나님께서 즐겁게 주는 자를 축복하신다'는 70인역 잠 22:8의 인용이다
(Bruce).

=====9:8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 6절부터 시작된 동일한 주제가 점차 발전적
으로 진술되고 있다.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넘치도록 은
혜를 주실 능력이 있는데 이는 착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의미는 간
단하지만 여기에는 몇가지 중요한 주제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복주시는 주체는 하나
님이시며 복을 주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다. 이것은 많은 선행을 하는 것
이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되는 필연적인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불행에
처한 형제들을 위하여 구제금을 내는 것은 선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선행은 그가 그토록 반대하는 바 율법의 요구에 복종하여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율법주의에 대한 반대와 모순된다고 볼 수 있는가 ? 결
코 그렇지 않다. 바울에게 있어서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하나님의 요
구이다. 단 율법주의와 다른 것은 선한 행위를 하되 의롭게 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
라 새롭게 된 결과로 한다는 것이다. 셋째, '넉넉하여'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우타르케이안'(* )은 스토아 철학의 견유
학파에서 '자족', 또는 '충족'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자족' 또는 '충족'
의 스토아적 개념은 인간 자신의 내재적 잠재력 안에서 완전히 만족하는 존재, 즉 다
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만으로서 완전한, 독립적인 인격을 갖는 것을 의미한
다. 결국 스토아적인 '넉넉함'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울이
말하는 기독교적 '넉넉함'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 은혜의 결과이다. 바울은 이
스토아적 단어를 사용하되 스토아적 개념이 아닌 기독교적 의미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
는 것이다(TDNT).

=====9:9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 본절은 시
112:9(70인역 시 111:9)을 인용한 것으로 가난한 성도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의와 일
맥 상통(一脈相通)하는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연보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신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가난한 자를 돕는 의는 영원히 기억
되어 하나님의 보상을 받게 된다. 고린도 교인들이 이런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즉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의'(* , 디카이오쉬네)에 대해서는 마 6:1, 2에
서 나타난 '의' 개념과 동일하게 '자선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와
(Lietzmann), 바울이 말하는 법적 의미 즉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하나님의 뜻
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Barrett). 여기서는 바울의 교리적 '의' 개념인 후자의 입장에서 전자를 포괄하
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9:10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 - 바울은 본절에서 앞절과 같이 직접 인용 형식을 취
하지도 않고 구약의 권위에 호소하지도 않지만 사 55:10과 호 10:12의 내용을 간접적
으로 인용하고 있다(Martin). '씨와 먹을 양식'은 본래부터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추수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심을 것을 주시고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주신다.

=====9:11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인들을 부요하게 해주시는
것은 그들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하기 위해서이
다.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 고린도 교인들이 후한
구제 연보를 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에게 '의'가 되고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는 유익이
되며 더 나아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된다. 왜냐하면 구제 연보의 수혜자들이 그 연보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있기까지에는 '우리로
말미암아' 즉 바울 일행의 매개 역할이 중요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구제 연
보 사업의 최초 입안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그
들이 끝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9:12
이 봉사 - 이 말의 의미는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연보를 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
데 '봉사'라는 말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기아
스'(* )는 '공중(公衆)'을 뜻하는 '레이토스'(* )
와 '일'을 뜻하는 '에르곤'(* )의 합성어로 '공적인 섬김'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 대한 봉사', 특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
다(롬 15:27). 이렇게 볼 때 바울이 구제 연보 행위를 '봉사'라고 표현한 것은 단순히
'가난한 자'에 대한 선행의 의미를 넘어 예전적(禮典的)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의 구제 행위는 하나님께 드리는 자발적인 봉사 행위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는 구제 연보가 가난한 성도들의 부족을 채워줄 뿐
만 아니라 그 도움을 받는 자들이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드렸다는 표현에서 분명해
진다. 이것은 성도들의 구제 연보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의미 부여라고 할 수 있는
바, 이에 대해 혹자는 '바울이 실천없는 신학을 전개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교회들
로 하여금 신학적인 맥락으로부터 벗어난 자선 행위를 하도록 하지 않는다'고 해석한
다(Barrett).

=====9:13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의 직무(12절)를 잘 수행해 내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나 동정심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
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며 그것이 바로 참 믿음이다(롬
1:5).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구제 연보 행위는 그들이 가진 바 복음 안에서
의 믿음을 행동으로 고백한 것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보여준 것이다.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 고린도 교인들의 구제 헌금으로 예
루살렘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이유는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자신들을
도움으로써 고린도 교인들과 형제애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이방 땅에도
복음을 통한 참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이 생겨났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서 진정
한 기쁨과 감사한 마음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그리스도인으로
서의 성품과 덕행이 복음의 본토인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까지 인정을 받을만큼 보편
성을 갖게 되었음을 뜻한다.

=====9:14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 고린도 교인들의 예루살렘 성도들에 대한 헌신적인 섬김
은, 위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했고 자신들로서는 중보의 기도를 받을 수
있는 동지를 얻는 결과로 나타났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중보
(仲保) 기도를 한다는 것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에 형제애가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이와 같이 두 교회가 민족과 역사 그리고 문화적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연대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기독교가 더 넓게 뻗
어 나가는 역사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뜻한다. 이런 변화는 할례를 받아야 참된 그리스
도인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었을 만큼 유대인 성도와 헬라인 성도
사이에 있었던 좋지 않은 감정들(행 15:1-21)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변화라고 할 수 있
다.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 '사모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
피포둔톤'(* )은 '그리워하다', '애정을 보여주다'의 뜻으로
바울이 그의 개종자들을 만나보고 싶어하는 것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였다(롬 1:11;
빌 1:8; 살전 3:6). 본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고린도 교인들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을 묘사한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과 교우 관계를 맺고
형제애를 나누기 원한다는 것은 단지 예루살렘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경제적
인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과 교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지극한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이 기꺼이 구제 연보를 하는 것은 단순한 구제의 행위를 지나
하나님의 은혜를 성취(成就)하는 것이었다(8:6).

=====9:15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고린도 교인들이 베푼 은혜는 그들 스스로에
게서 온전한 의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그 참된 의미가 발견된다.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또 도울 수 있는 물질적 여력
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모든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은사'(* , 카리
스)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고린도 교인들의 풍성한 연보와 그것으로 말미암는 예
루살렘 성도들과 고린도 성도들 간의 화해를 포괄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지극한 은
혜'(14절)를 의미한다(Calvin, Tasker). (2)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즉 복음을 의미한다(Martin, Bruce). 연보에 대하여 언급하는 전후 문맥상으로 볼 때
(1) 의 견해가 적합한데 '은사'에 대한 바울의 용례나(롬 8:32) 이 말 앞에 '말할 수
없는'(* , 아네크디에게토)이란 수식어가 있는 것을 보면
(2)의 견해도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Harris)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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