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2장
=====2:1
십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 사
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세 번에 걸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첫번째 방문은 그가 회
심한지 삼년 후에 베드로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고(행 9:26), 두번째 방문은 안디옥 교
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행 11:29,30), 세번째 방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러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행 15:1 이하). 본절에 나타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이 이차 방문인지 삼차 방문인지
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갈라진다. 먼저 두번째 방문이라고 주장하는 견해
(Bruce, Calvin)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행 15장의 세번째 방문은 공적 회의에
참석한 것이지만, 2절에 의하면 바울은 개인적으로 예루살렘 지도자를 만났으므로 세
번째 방문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2) 행 15장에는 디도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
어 있으나 본절에는 디도와 바나바가 동행(同行)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본구절
의 방문은 세번째 방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3) 본절의 '다시'를 두번째 방문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견해는, 만일 1:18에 기록된 방문이 첫번째 방문이라
면 문맥상 본 구절의 방문이 두번째 방문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진다. 다음으로 세번째 방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Berkhof,
Eerdman, Findlay, Robertson). (1) 행 15장과 본장의 주제가 동일하다는 것인데, 두
곳 모두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할례'를 다루고 있다. (2) 행15장에서 지도자들
간의 연합을(행 15:8,9) 강조하고 있는데, 본장에서도 동일하게 연합을 서술하고 있다
(9절). (3) 행 15장이나 본장이 모두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이상의 견해들 가운데 본절이 말하는 바울의 방문이 세번째 방문이라는 것이 더
욱 타당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루살렘 공의회의 연대를 A.D. 49년경으로
보고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연대를 추정하면 1차는 A.D. 35년, 2차는 A.D. 46년(행
11:30;12:25), 3차 방문은 A.D. 49년에 이루어졌다. 여기서 만일 본장의 방문을 2차
방문과 연결시킨다면 바울의 1차 방문은 A.D. 46년에서 14년 전인 A.D. 32년의 되며
또한 그가 회심한 시기는 그보다 3년 전인 A.D. 29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때가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이어야 하므로 불가능하다.
(2) 두번째 방문을 주장하는 자들은 디도에 대한 언급이 행15장에 없다는 이유로 세번
째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디도에 대한 기록은 사도행전 전체에서 누락되어 있다.
(3) 바울이 두번째 방문을 생략한 것은 무슨 속임수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이
방인의 할례 문제를 다루는 본장에서 다른 주제, 즉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문제를
취급한 두번째 방문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성을 못느꼈기 때문이다. (4) '다시'(*
,팔린)는 두번째를 뜻하기도 하지만 요 18:27에서 베드로의 세번째 부인
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두번째'를 의미하는 헬라어 '듀테론'(* )
을 쓰지 않고 '팔린'을 사용한 것은 단지 방문의 반복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바나바 - 그는 레위 지파 출신의 유대인으로 구브로에서 태어나 바울보다 먼저 복
음을 받아들였던 사람으로서 이방인들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안디옥 교회로 파송되었다(행 11:22). 그의 본명은 요셉이
었으나 사도들은 그를 '권위자', '권위의 아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바나
바'로 불렀다(행 4:36).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로소(행 11:24) 초대 교회의 헌
신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고 바울의 체험을 변호하며
함께 사역하였으나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마가의 동행 문제로 바울과 결별(訣別)
하게 되었다(행 15:36-41).
디도 - 그는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으로서 고린도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목회자이다(고후 8;23;12:18). 본절에서 이방인의 할례 문제로 등장하는 그는 바
울이 '나의 참 아들 디도'라고 말할 만큼 바울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기록은 그가 로마에서 달마디아로 갔다는 것이다(딤후 4:10).
=====2:2
계시를 인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아포칼립신'(*
)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어떠한 인간적인 동기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님을
확실히 보여준다. 한편 행 13장에서는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이방인을 위해 파송되는
과정이 안디옥 교회의 결정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바울의 선교 사역이 교회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본절에서 언급된 바, 바울의 선교 사역의 동기가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은 서로 상반되지 않는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결정 배후
(背後)에 하나님의 계시하심이 있음을 확신하였을 것이다(Hendriksen)
달음질하는 것 - 바울은 개종 이후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당시의
운동 경기를 염두에 두어 묘사하였다. 그의 달음질은 향방없는 것이 아니라(고전
9:26) 분명하고 확고한 목표를 향한 것이었다.그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도자들을
사사로이 만나는 면밀한 계획을 갖기도 하였으며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해 지도자로
서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결국 변하거나 바울의 달음질을 헛되게 하는 것은 자
신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이었으므로 본절에는 바울 자신이 유대주의자들의 모든
거짓된 것들을 반드시 고치고야 말겠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2:3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
으시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거행하도록 명령하셨다(창
17:10-14). 그러나 세월이 경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의 언약적인 의미보다는
종족적이며 문화적인 우월감의 상징으로서 외적인 할례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급
기야는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교
회안의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과 함께 할례를 시행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
이 된다고 주장하여 이방인 신자들에게까지 할례를 강조했다. 할례에 대한 보다 자세
한 내용은 구약 호크마 창 17:1-14의 주제 강해 '할례 언약과 세례', 창 34:25-31의
주제 강해 '할례 실시에 따른 제반 사항'을 참조하라. 한편 '억지로...아니하였으니'
의 헬라어 '우데...에낭 카스데'(* ... )는 할례를 주장하는
강한 압력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는 바울의 굳건한 의지를 나타낸다.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회유(懷柔)에 말려들어 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한 상황에서 바
울이 할례받지 않은 디도를 유력한 증인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디도가 갈라디아 교회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2:4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 '거짓 형제'의 헬라어 '프슈다델푸스'(*
- )는 '프슈데스'(* )와 '아델포스'(*
)의 합성어이다.'프슈데스'는 '거짓 사도'(고후 11:13),'거짓 선지자'(벧후 2:1)
등에서 처럼 '거짓'이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본절에서 '파레
이사크투스'(* ,'가만히 들어온')와 함께 이 말을 사용하여
은밀하고 은근하게 복음을 훼손시키는 거짓 교사들의 교활한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한
편 바울이 1:11에서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된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라고 부른 것
은 그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본절에서 유대주의자들을 향하여 '거짓 형제'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 속에 그들이 설 자리가 없음을 나타낸다.그
러나 그들이 누구인가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들은 최소한 내부에서 믿음을 배반한
사도들이나 성도들은 아닐 것이다(Lenski).아마 '거짓 형제'는 (1) 예루살렘 공의회에
서 이방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하며 모세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
자들이거나 (2) 공의회의 결과가 갈라디아와 안디옥 교회에 소개되었다(행 15:30). 그
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에는 계속해서 교인들을 미혹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존재했으
며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케 된 성도들을 다시 율법 아래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신자인 것처럼 가장하여 열심은 있으나 실제로는 복음을 거부
하고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였다(고후 11:26;벧후 2:1). 이러한 갈라디아 교회의 형편
가운데서 디도가 할례 받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자유 얻은 자로 하여금 자유를 잃
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2:5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 복종을 요구하던 자는 디도에게 할례를 요구했던
무리들로 국한시켜 이해하기보다는 더욱 광범위한 의미에서 유대주의화를 꾀하던 '거
짓 형제'들이 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사도 바울 일행은 위의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이나 율법을 강조하는 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어떤 서방 사본들
에서는 '호이스우데'(* , '...한 자들에게 조금도...않다')가 생략되
어 본 구절이 '잠시동안만 복종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사본에 의하면 바울이 잠
시 동안만 평화를 위하여 타협할 수도 있었던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베자(Bezae) 사
본을 제외한 모든 언셜(Uncial) 사본과 오래된 파피루스 사본(P46), 그리고 고대 헬라
교부의 번역에서 '호이스 우데'는 생략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본장의 문맥상 바울이 거
짓 형제들과 조금이라도 타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헛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할례는 초대 교회의 최대 논쟁이
며 또한 복음에 대한 최대의 도전(挑戰)이었다. 이 논쟁 앞에서 바울이 진리를 양보했
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Lenski).
복음의 진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알레데이아 투 유앙겔리우'(*
)는 본절과 14절에만 나오는 것으로 '결
함이 전혀 없는 복음'(Lightfoot) 또는 '진리가 담겨 있고 진리에 속해 있는 복음'
(Burton)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복음을 들어 언급하는 것은 디도의 할
례 문제는 한 개인의 구원 문제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 문제에
직결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2: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 바울은 세 번에 걸쳐 '호이 도쿤데스'(*
,'유력한 자들')를 사용하여(2절) 베드로, 요한,야고보 등 예루살렘의 사도를
지칭하였다(9절). 이러한 호칭 후에 곧바로 하나님은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언급하
는 것을 보면 바울이 이 호칭을 풍자적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Cole).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 헬라어 본문에 나와 있는 후치사 '가르'(* )는
선행 구절을 보다 충분하게 설명해 주는 삽입구가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 구절은 선행 구절에서 제시된 '외모를 취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어떤 유
명한 자들일지라도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직
접 받은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과 동시에 예루살
렘 교회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전혀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
명하고자 했다.
=====2:7
내가 무할례자에게...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 여기서 '할
례자'와 '무할례자'는 구체적인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킨다(롬 4:9;엡 2:11 등). 유대주의자들은 베드로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서로 다른 것이 있다고 주장한 것 같다(Lenski). 그러나 바울은
사역상 서로 다른 책임이 있을 뿐 어디까지나 복음의 내용은 동일(同一)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할례자에게 복음 전하는 자로 열 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
를 대표로 내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1)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Lenski, Huxtable). 그러나 전자는 타당하
지 않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가
이사랴와 다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또한 그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행 15:7). 바울 역시 이방인들에
게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한
바 있다(행 23:11). 그는 또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행 26:20ff.)보아, 본절에서 바울이 의도
하는 바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 자신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베
드로와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2:8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 - '사도로'의 헬라어 '에이스 아포스톨렌'(*
)은 베드로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명확하게 인정하는 표현이
다. 바울은 베드로보다 가문이나 학문에서 뛰어난 자로소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
었으나 자신을 베드로보다 우월한자로 여기지 않는다. 여기에는 바울의 겸손함이 포함
되어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바울이 이와 같이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사도로
세우신 이가 동일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하
나님과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을 동일시함으로 자신의 사도됨을 증거하고 있
다. 두 사도 중에 하나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또 하나는 이방인을 중심으로 사역했으
나 그들의 사역의 내용은 같은 것이었으며 둘 다 동일한 섭리와 은혜에 의하여(고전
15:9,10)사도로 세우심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서 맺어지는 열매도 무할례자
이거나 할례자이거나 동일한 것이었다.
=====2:9
기둥같이 여기는 - '기둥'(* ,스튈로이)이라는 표현은 중요성을 강조하
는 말이다. 탈무드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이스라엘의 세 '기둥'(*
,암무딤)이라 하였고 이스라엘의 계약 공동체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그들 위에 세
워졌다고 한다(Longenecker).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여 바울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
'기둥'에 비유한 것 같다.실제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어가는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들이었다. 바울은 유대주의 자들을 향해 의도적으로 히브리적 개념을 도입
해 논리를 펴나가면서 세 사도가 갖는 비중(比重)을 강조하였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 - 이 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지도자적 입
장에 서 있었던 사실에 역점을 둔 것이다(행 15장). 먼저 야고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바울은 1:19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냥 '야고보'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본장의 전체 맥락이 예루살렘 공의회를 언급하
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이었다(1:19 주석 참조).
바울이 다른 두 사도보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의 이름을 먼저 기록한 것은 우연의 일
치라기보다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의장으로서의 야고보를
설명하기 위함인 것 같다(Boice). 그러나 다른 사도들의 이름이 뒤에 나왔다고 해서
예루살렘 교회 속에서 이들의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 다음으로, 바
울은 모두 아홉 번에 결쳐 베드로를 언급하는데 일곱번은 '게바'라고 불렀으며(14
절;1:18;고전 1:12;3:22;9:5;15:5) 두 번은 '베드로'로 칭하였다(7,8절). 특히 유대주
의자들과 논의할 때 게바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베드로와 자신의 관계를 오해없이
설명하려 한 것 같다(Huxtable). 끝으로, 요한이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였다는 기
록은 성경에서 본절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여러 곳에서 함께 등
장하며 또한 사역하였다(행 3:1;4:13;8:14 등)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덱시아스 에도칸 코이노니아스'
(* )는 '교제의 오른손을 주었다'
라고 직역된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우정을 돈독하게 하고 동의한다는 의사 표시였다
(Longenecker). 본절에 언급된 다섯 사람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즉 야고보와 게바, 요한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
방인을 위한 복음 전파에 주력하였다. 이 두 그룹은 서로 독자적이면서도 하나님의 나
라를 건설하는 사역에 협력하였다(행 15:25,26). 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았다는 것은
사적(私的)인 장소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는 의미보다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공식 석
상에서 결의한 사항을 실행할 때에 함께 협력하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손을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Lenski).
=====2:10
가난한 자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에 '톤 프토콘'(* )은 '가
난'을 뜻하는 일상 용어로서 돈이나 재산이나 생활 수단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는
뜻으로 쓰인 단어이다. 신약에서 이 말은 '거지'에게도 사용되었으며 (눅 16:20) 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자들에게 사용되었다(마 19:21;눅 19:8;요 13:29). 당시 가
난한 자들은 복음 전파의 주요 대상이었다(마 11:5).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부요하
게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셨으며 자신을 찾아온 부자들에게 재산을 팔아 가
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마 19:21) 자신과 제자들이 함
께 거하는 공동체 속에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준비된 공동궤를 가지고 있었다(요
13:29). 사도행전에 와서는 '엔데에스'(* )라는 말이 등장하는데(행 4:34)
이는 초대 교회 안의 '가난한 자','궁핍한 자'로서 다른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나누어
준 덕분에 살아가는 자들을 뜻한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문
제는 할례와 같이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히 행하여야 되는 임무로 인식되어 있었
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임무는 공의회의 결정에 의하여 수립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요 13:29), 또한 초대 교회의 출발부터 교회가 감당했던 사명이다(행 24:17).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 바울은 믿음과 구제 문제를 믿음과 할례 문제처럼 대
립시키지 않는다. 바울의 힘써 행하는 구제는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외식적인 것이 아
니다. 본절의 구제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알 수는 없으나 바울의 생애 가운데 구제의
사건은 여러 번 등장한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가 모은 구제 헌금을 가
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으며(행 11:29,30) 여러 서신서에서 구제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행 24;17;롬 15:25-27;고후 8:1-5). 또한 그는 구제에 대한 교훈을 남겼으며(롬
12:13;엡4:28;딤전 6:18)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그 일을 위하여 정
직하게 살 것을 요구한다(엡 4:28). 이러한 삶의 요구는 선행이 신앙의 살아 있는 증
거요(약 2:14-17) 신앙 고백의 진실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요일
3:17,18)
=====2:11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 여기서 베드로의 행위가 명백하게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
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더욱 뚜렷해진다. (1)'면책하였노라'의 헬라어 '안테
스텐'(* )이 문자적으로 '대항하다', '저항하다' 혹은 '반발하다'라는
의미로 베드로의 행위가 '복음의 진리'를 훼손(毁損)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있었음
을 시사한다. (2) '안텐스텐'의 시제가 부정과거로서 바울이 베드로를 성공적으로 책
망했으며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에 대항하지 못하고 굴복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Lenski). (3) 더욱이 바울은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아니고 공개적으로 면책하며 저지
했다는 사실로 베드로의 잘못의 심각성이 더해간다(Hendriksen). 이와 같이 바울은 예
루살렘에서와는 달리 안디옥에서는 베드로보다 높은 위치에 서서 성도들을 대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데, 이는 베드로의 잘못이 너무도 명백하여 견책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Robertson).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바울이, 신자라면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완전한 동등권을 항상 공격하며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좁고 치우
쳐 있는 유대 중심적 신앙관에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이며(Huxtable) (2) 예루살렘 교
회의 그 어떠한 권세자도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에 대하
여 책망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Cole).
=====2:12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 본 구절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식탁 교제나 성찬을 가리키는 것같다. 이것이 정식 예배였는지 아니면 비공식적인 그
리스도인의 모임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본절에서 초대교회 당시 유대 출신의 그리
스도인들이 이방 출신 그리스도인과의 식사를 꺼린 사실이 나와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
은 이유 때문이었다. (1) 유대인들은 레 11장에 있는 정함과 부정함에 관한 규례를
철저히 지켜왔고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준수하려 하였다(민 25장, 31장;단 1:8;토비
트 1:1-12;마카베오상 1:62).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그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이방인들이 먹는 음식 중에는 레 11장의 정결(精潔) 규례에 위배되는
것이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따라서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출신의 그
리스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지 않으려 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들을 부연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한 규정들 때문이다. 이러한 규정들은 그 종류가 대단
히 많고 다양했는데 초대교회 당시에는 하나님의 율법 못지않게 존중된 것으로 보인
다. 그 실례로 장로들의 유전에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
데, 이는 단순히 위생상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고 이방 사람들과 접촉하여 부정하게 된
손으로 음식을 먹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마 15;1-20;막 7:1-23). 위와
같은 이유로 오랫동안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심이 굳어져왔다.
이러한 것은 사마리아인도 인식하고 있는 일반적인 사실이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
인에게 물을 달라고 할 때 그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대답한다(요 4:7-9). 따라서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뿐 아니라 대단히 죄악된 행동으로 간주되
기까지 했다(Hendriksen).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약의 율법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실제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이며 삶이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러한 사
실을 인식하고 늘어나는 이방 그리스도인에 대해 몇가지 제한 사항을 제시하고 다른
어떠한 율법의 행위로도 짐을 지우지 않는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행 15:14-21).
저희가 오매...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베드로가 이방 그리스도인과 함께 식사
하는 것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사람이 오자 이방인들과 식사
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행동의 동기는 예루살렘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Hendriksen). 또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사랑이나 자기 확신에 의해 나온 행동이 아니라 거짓과 위선의 행동
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를 책망했다.
=====2:13
남은 유대인들도...외식하므로 - 주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 중 한 사람이요 공적
인 위치에 있었던 베드로가 한 외식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복음의 자유가 첨예(尖銳)
하게 대립되고 있는 초대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베드로의 이러한 실수는 단
순히 개인적인 외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1) 다른 사람들 심지어 바나바같은 지
도자까지도 외식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근거가 되며 (2) 예루살렘 공의회(A.D.
49)의 율법 무용론에 대한 결정을 무효화시키는 것이고 (3) 결과적으로는 율법주의에
굴복한다는 위미를 지닌다. 여기서 우리는 공적인 위치에 있는 지도자의 행동의 중요
성과 함께 한 사람의 외식적인 행동은 중요성과 함께 한 사람의 외식적인 행동은 다름
사람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막 7:1-23).
=====2:14
모든 자 앞에서 - 바울은 베드로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공개적으로 책망을 했다.
이는 (1) 베드로뿐만 아니라 여러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잘못을 했으며
(2) 공적인 잘못은 사적으로 고칠 수 없기 때문이고(Lenski) (3) 그러한 실수를 베드
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Hendriksen).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 본절에서 바울이 '본래 유대인'임을 밝히는 것은 그도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의 종교적 특권을 지녔음을 보여주어 다른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반감을 줄이게 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Cole).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 이방인들에게 '죄인'(* , 하마르톨로
이)이라고 말하는 것은 윤리적인 판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유대인의 독선에서 나오는
이방인에 대한 통상적인 언급이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지만 본문에서 바울은 그 특권을 자랑하거나 또는 이방인들을 조소하기 위
해 '죄인'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비록 바울이 유대교 내의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방 죄인'으로 표현하였지만 이 말 속에는 매우 반어적(反語的)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당시 유대인들에 의해 죄인으로 간주된 이방인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사실은 스스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을 하찮게 여기며 조금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독선적이고 교만한 태도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이다(Cole).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 본절에는 법정 용어인 '디카이오스'(* ,
'의로운')에서 파생된 말이 세 번 반복되고 있다. '의'는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것
이므로 그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다. 본절에서도 이 용어가 수동
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능동적인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뜻이지 '의
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의로움에 이를
수가 없다(롬 3:20). 그러나 의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
시는 것은 인간의 윤리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이며 신적 표준에
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 본서에서 처음 나타나는 '율법'에 해당하는 헬
라어 '노모스'(* )는 바울 서신 중 특히 로마서와 본서에 많이 등장하는데
'의'(* , 디카이오쉬네), '행위'(* , 에르곤) 등과 함
께 복음의 핵심을 설명할 때마다 '믿음'(* , 파스티스)과 관련되는 개
념으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관사없이 사용된 '노모스'는 모세의 율법을 지시하는 것
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선한 행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자 하는 인간들이 '자기 의'를
위해 구축한 규범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유대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거짓된 규범들이
다. 인간이 만들어낸 규범으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 인간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선언
하시게 되는 수단일뿐 절대적인 자격이나 요건이 되지 못한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믿
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자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다(롬 5:18,19). 죄악
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이 인간들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할 수 있으며 이를 신뢰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며 이러한 믿
음은 생명력이 있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역동적(力動的)인 삶을 살도
록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주의자들은 그 믿음에다가 할례와 같은 율법적이요
외적인 조건을 더 하려고 하였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본절은 시 143:2(LXX,
142:2)의 인용이며 아울러 롬 3:20 내용과 병행을 이룬다. 아래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편의 '파스존'(* , '모든 생명') 대신에 로마서에서는 '파사 사륵
스'(* , '모든 육체')를 사용하였고, 로마서와 본절에서는 시편에 없
는 '율법의 행위'를 부가(附加)시키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단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2:17
그리스도 안에서 - 이 말은 바울 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용어로서 그리스도와 성
도 간에 누리는 친밀한 개인적 교제를 시사한다. 그가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 사역
을 강조하는 것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며, 예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전파하는 것과 미래 세계에 대한 거룩한 소망을 가지는 것도 그가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며 동시에 전부라고 고백하
고 있다. 특히 바울 신학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아담 안에서'(롬
5:12-19)라고 표현과 대조를 이룬다. 아담은 죄와 사망의 옛사람을 대표하지만, 그리
스도는 자유와 생명의 새 사람을 대표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은 십자가의 죽
음과 부활을 실현하신 그리스도와 실존적으로 연합하여(롬 8:39;14:7;빌 2:1) 구원받
은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죄인으로 나타나면 - 본절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1) 바울이 유대주
의자들의 입장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Hendriksen). 다시 말해서 유
대주의자들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예수를 믿음으로 율법을 폐기하는 죄인이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할 경우에 대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회심을 독려하는 문구로 해석한다
(Cole). 이 견해에 따르면, 유대주의자들이 예수를 믿고 율법을 폐기했다면 그들은 스
스로 이방인과 같이 율법을 도외시하는 죄인이 된 것이고 그것은 모세 율법보다 저급
한 수단의 삶으로 여겨질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그리스도마저 '죄를 위한 봉사자'
(* , 하마르티아스 디아코노스)로 전락시키는 어리
석음을 범하는 것과 같다. (2)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는 견해이다. 즉 바
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속에 죄악의 본성이 남아 있음
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죄악된 옛 사람의 습관
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롬 7:24)라고 고백한
바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오히려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한다. 이
는 유대주의자들이 가진 의식법과 율법주의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죄인인 것을 시인하
는 역설이다(R.E. Howard). 그가 유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한다
고 해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1). 본절의 해석은 자신이 계속해서 죄
인으로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전체의 맥락과 연결시
킬 때 후자가 보다 타당할 것 같다.
=====2:18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며 - 본문은 다분히 베드로가 유대주의자들을 두려워하
여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로부터 떠나 다시 유대인의 옛 습관으로 돌아간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2:11). 바울은 다메섹의 체험(행 9:1-7)이후에는 한 번도 뒤를 돌아
보지 아니한 일관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한다. 또한 율법의 공로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결단코 없음을 밝힌다.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 '범법한 자'의 헬라어 '파라바텐'(*
)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가 정의되는 '하마르톨로스'(*
, '죄인')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파라바텐'은 문자적으로 '배신자','이단자'를
뜻하며 본절자서는 바울 자신이 다시 율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
(背信) 행위가 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 바울은 '나'라는 1인칭 대명사
를 사용함으로 자신에게 있었던 실제적인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을 향하여 '죽는
다'는 표현은 모든 관계가 단절된 것을 의미하며 더이상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었나니'의 헬라어 '아폐다논'(* )은 다음 절에 나
오는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쉬네스타우로마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들은 둘 다 단회적인 것으로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
갈 수 없으며 다시 십자가에 못박힐 수 없는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역설적으로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것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살아났다'는 표현이다. 로마서
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표현했는데(롬 7:4), 이 두 표현은 모두 단
순히 사변적인 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것을 고
백한 말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죄악으로부터 밀려오는 좌절감과 실패를 극복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율법은 인간 속에 있는 죄를 더욱 죄되게 만든다. 율법은 단지 죄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과 새 생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기능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2:20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본 구절은 본서의 여러 곳에 거듭 언급되
는 내용으로(1:4;3:1,13;6:12,14)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의 초점이
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본절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변화
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신학적인 논증을 나타낸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
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과 사랑에 대
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轉換)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이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
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
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W.G.Coltman).
한편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스타우로마이'(*
)는 성도가 그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본서에 처음 등장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
하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며(롬 8:4), 또
한 실존적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들을 완성한 역사적 사건이다. 바울은 그리스
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자유
와 해방을 얻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이 짧은 구절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
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롬 6:4). 그리스
도와 바울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옛 사람의 자기 교만과 바리새인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인하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롬 8:18).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본절에는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나'
대신에 '그리스도',(2) '율법' 대신에 '믿음',(3)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현재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종노
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롬 6:19),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다
(롬 8:4).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사는 것이
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르
다.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요 15:7)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아들을 믿
는 믿음안에'라고 말한다. 이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실때에는 말씀으로 존재하시며 우
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2:21
하나님의 은혜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바울 자신이 그 죽으심과 부
활에 참여하게 된 신비적 연합의 사건이 '하나님의 은혜'로 묘사되고 있다. '은혜'의
헬라어 '카린'(* )은 '하나님이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아들
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과 우리로 아들을 믿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
이다.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헛되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레안'(*
)은 '연고없이','이유나 목적이 없이','불필요하게'등의 의미를 지닌다. 갈라
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이 다시 율법으로 도아갈 것을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율법에
대한 애착심과 관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
들어 버리는 결정적인 잘못이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옛 생활에 대한 단순한 향수
(鄕愁)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자 하는 범죄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배신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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