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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갈라디아서 5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4|조회수13,601 목록 댓글 0

갈라디아서 제 5장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도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 여기 "자유"란 무엇인가?
이것은 사회 생활에 관한 것이 아니고, 신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에서
놓인(롬( 8:1-1)영적 자유를 말한다(요 8:36). 영적 자유란 것은 다음과 같이 해설된
다. (1)사람이 율법 하래서 행복을 도모하는 동안은 우선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된다.자
신의 욕구는 무수한데 그것들을 그 자신의 힘으로는 만족하게 실현시킬 수 없다. 그
는 평생 기쁨 없이 그것들의 종이 된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는 자
기의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께 맡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을 얻는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우선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된다. (2)금생 내세에 율법의 정죄에서 그는 해방된
다. 롬8:1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이 우리의 죄값을 담당하신 것이므로
하나님은 진실히 믿는 우리를 용서하시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신다. 다시
말하면, 그는 우리르 마얼마든지 용서하신다. 그렇지만 용서를 빙자하여 범죄를 두려
워하지 않고 짐짓 죄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이 용서하하시지 않는다. 히 10:26-31 참
조, 이 자유는 자유 그것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자유를 가지고 감심(甘心)으로 하나
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다시는 종의 멍애를 메지 말라 - 기독 신자가 율법에서 놓인 줄 모르고 아직도 율
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 줄 안다면 그것은 다시 율법의 종이 됨이다. 이방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받은 적이 없는데 여기서 "다시는(* )...메지말라"라고 경계
한 것이 그들에게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인류의 첫 조상이 에덴동산에서 선악
과를 "먹지말라"는 율법 아래 있었던 것이니 만큼, 이방인들도 그 점에서는(그들이 복
음을 믿기 전에는)율법의 멍에 아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모세의 율법은 본래 하나
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인류에게 주셨던 행위 계약(율법)을 확장한 것 뿐이다. 하나님께
서 아담에게 명령하여 선악과를 "먹지말라"고 하신 것은 행위계약 혹은 율법의 조종
(祖宗)이다.

=====5:2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리 - 여기에 "나"란 대명사와 "바울"이란 고유명사를 붙
여 기록함으로 사도 바울은 그의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중대성을 나타낸다
(Greijdanus).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 곧 갈
라디아 교인들이 구원의 공로로 (의를 얻으려고) 할례를 받는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구주로 믿지 않음과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들과는 상관이 없게 될 것이다.

======5:3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 누구든지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에 이르는 의
를 얻는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렇다면, 어찌하여 율법의 일부분인 할례만 지켜서 될 것인가? 인간으로서 율법을 완전
히 지킴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구주로 받는
믿음밖에 없다.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 율법은 그 의식적 부분이든지 도덕적 부분이든지 그 행하는 자에게
구원의 의를 주지 못한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의(義)의 최소(最小)부분도 율법 지킴
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율법 지킴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와 은혜를 포기하는 자이다(Calvin). 2:21 참조.

=====5:5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리 -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의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이유 접속사(* )가 있다. 진정한 의를 얻는 소망은 율법이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공로
(功勞)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저 받아지는 것이다.

=====5:6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 이것은 신앙의 특징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진
정한 신앙의 소유자는 사랑의 행위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사랑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신자가 그 신앙의 증표로 사랑을 지니고 있어
야 된다는 것이다. 행위는 믿음이 내어주는 열매이니, 선한 행위가 없으면 죽은 믿음
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약 2:21-26). 물론 사랑의 행위가 구원의 공로는 아니지만 참
신앙은 그것을 지니고 있다. 신앙 그것도 구원의 공로를 받는데 있어서 믿음은 절대
필요한 것이다. 이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 이것은 여기서 거짓교훈을 가리킨다. 고전
5:6 참조, (1) 적은 죄악을 용납하면 큰 죄악으로 확대되는 법이다. (2) 누룩이 소리
없이 은근히 떡반죽에 퍼짐과 같이, 적은 죄악도 사람의 생활을 지배하기까지 은근히
그의 마음을 점령하게 된다. 마귀의 장난은 이렇게 암암리에 죄를 퍼뜨린다. 마
13:24-25;딤후 2:16-17 참조.

=====5:10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 "다른 마음"은 바울이 이때
까지 가르친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以信得救)교리가 아닌 다른 사상을 의미한다.
그는 이때까지 그들에게 엄하게 훈계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표시한다.

=====5:11

십자가의 거치는 것 - 여기 "거치는 것"이란 말(* )은 넘어지게
하는 돌 같은 '장애물'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
(고전 1:23)이 된다고 하였다. 그들의 메시야상(象)은 이 세상에서 큰 권세와 능력으
로 행할 자라고 깊이 믿어 왔다. 그런데, 미천하게 살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
수님의 메시야 자격을 그들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넘어진다.

=====5: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 "스스로 베어 버
림"이란 말(* )은 몇 가지 해석을 가진다. (1)스스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2)유대주의자들이 할례를 주장할진대, 이방의 풍
속대로 아주 생식기를 수술한는 데까지 철저히 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것은 바울이 풍자적으로(諷刺的)으로 유대주의자들을 공격한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완
전하신 구주자격을 무시하고 할롑를 구원받는 조건으로 삼는 것은 복음을 "어지럽게
하는 하는" 큰 죄악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풍자적으로까지 그들을 공격한다.

=====5:13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 여기 "너희가"(* )란 말은 헬
라 원어의 어순(語順)대로 강세형(强勢形)이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유대주의자
들에게 비교하여 그들의 특수한 처지를 지적함이다. "자유"란 말(*
)은 종들을 놓아줌에 대하여 흔히 사용된 말이다(Greijdanus). 인간은 죄악의 종이
었음에 따라서 거기 심판자로 임한 율법에도 종이 된것이다(요 8:34; 갈 4:1-3, 5: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들은 죄에서 해방되
었고,율법에서도 놓였다(요 8:32,36; 롬 8:1).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 "육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삵스(* )인데, 여기
서는 인간의 부패성과 죄악성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
생시켜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정죄에서 구원받을 뿐 아니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려는것이다.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에서 멀어지
게 되는 것이 실제적 경험의 사실이다. 롬 3:31 참조. 그러므로 복음을 믿어 영적 자
유를 얻은 자로서 죄악에 접근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속죄 사업의 본의(本意)를 무시
하는 죄까지 범하는 자이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 복음을 믿어 영적 자유를 얻은 자가 율법의 멍에 아래
있지는 않으나, 그와 율법과의 관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성령에 의하여 기쁜 마
음으로 율법을 행한다. 이렇게 행함이 곧, 사랑이다. "종노릇 하라"란 말(*
)은 "섬기라"(serve)고 번역되어야 한다. "섬긴다"는 개념과 "종이 된다"는
개념는 다르다. 우리가 섬긴다는 것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여 돕는 행위이고, 그의
의지(옳은 소욕이나 옳지 않은 소욕)에 맹종함은 아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불의한 소
욕에는 응종하지 않음이 그를 사랑함이다. 그는 사랑의 동기로 율법을 행하고 노예적
심리로 행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율법을 행함은 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다음 귀절이 밝힌다.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 신구
약 성경에 인간의 행위의 법칙에 괸하여 "하라"혹은"하지말라"라고 한 명령들은 모두
다 율법에 속한 말씀이다. 이런 명령들이 많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사랑하라는 말
씀이다. 온 율법은 이웃 사랑에서 그 완성을 본다. 만일 누가 사랑의 동기 없이 율법
을 행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율법을 참되이 행한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만일 누
가 사랑을 행하면서 율법을 범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참되이 행한 것이 아니다. 율법
의 실행은 사랑 없는 기계적 동작이 아니며, 또한 사랑은 법 없는 무질서(無秩序)가
아니다. 사랑은 법을 초월하나 법을 무시하지 않는다.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 율법주의자들은 실상 사랑을 제
외하고 율법을 본다. 드들은 육체적 방법, 또는 사람의 힘만으로 율법을 기계적으로
순종하려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자유에서 얻어지는 사랑의 동기로 참되
이 행할 줄은 모른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네세우면서 율법을 잃어버렸고, 이웃을
해롭게 하는 불의한 싸움을 교회에 가져온다. 그들은 사랑의 정신으로 살지 못하는 것
만큼, "서로 물고 먹는"악행을 연출한다.

=====5:16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유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율법주의자들은
인력으로 조문(條文)을 하나 하나 실행하고자 한다. 그것은 결국 실패한다. 그러나 복
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은 기독신자는, (1) 사랑의 동기로 행하면서 율법을 괴로운
짐으로 여기지 않고 순종하며, (2) 성령님의 도우시는 힘으로 말미암아 그의 실행력이
강하고, (3)그의 행실에도 약점이 있으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 의미에서 신자 육체의 욕심대
로 따라가는 자는 아니다.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 첫머리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 )이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앞
절의 이유를 보여준다. 성령을 좇아 행함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하는 이유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는 육체를 거스려 싸워 육체의 야욕을 이루지 못하게 하기 때문
이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곧, 위
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싸움으로 인하여 육체(인간
의 부패한 성질)의 소원이 이루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영전(靈戰)은 참된 기독신
자에게만 있다. 영전이 있으므로 죄악에 대한 승리가 온다. 이 세상 전쟁에 있어서는
언제나 필승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영전에 가담하는 자는 반드시 승리하는 법이
다. 요 16:33 참조.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 "성령의
인도하시는바가 되"는 것은 무엇으로 식별할 수 있는가? 루터는 다음고 같이 말한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감심으로 육체(옛 사람)를 죽임이니 곧,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버리며, 심지어 자기 자신을 버림이다. 그것은 죽음과 죽음의
친구들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며, 허탄한 이 세상 쾌락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부패하고
더러운 열매를 내어 버림이며, 이 세상의 모든 좋다는것들을 버리고 그 대신 고난(환
란)을 위함이다. 이것은 우리 본성의 특징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이
다."(Vorlesung ber den R merbrief, 1965, s.270). 루터의 이 말은 물론 성령의 인
도하심이 된 자들의 그 표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위의 표준에 맞지 않는
행동 곧, 결점이 전연 없다는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결점이있으나 그들에게는 회개
(悔改)가 있다.
칼빈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된"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미 성
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마음이 간절하다. 그는 자기의
사욕을 따르지 않는다(벧후 1:21). 양이 목자를 따르는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는 하
나님의 말씀을 듣기 좋아한다. 이런 사람은 벌써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정죄를 면한
자이니(롬 8:1), 율법 아래 있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행실에 허물과 결점을 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허물 없는 것과 같이 보아주신다."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 "육체"란 것은 하나님과 원수된 부패성을 의미한다(롬
8:7). 이런 괴악한 것의 움직임이 우리의 눈에 감취어서 보이지 않느다면, 우리는 그
것을 정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저히 나타나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지적하여 멸절할 방침을 세울 수 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 이 세 가지는 성적 죄악(性的罪惡)이다. 하나님과 원수
된 육체(인간의 부패성)는 무엇보다 먼저 성적 죄악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성전인 몸
을 더럽힌다. 고전 3:16-17,6:13-20참조 성경은 사람의 성적 죄악이 자기 몸에 대한
범죄라는 의미로 말하기를,"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
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라"(고전 6:18)고 하였다. 곧, 그 성적 죄악은 몸이 주님의 성
전된 거룩한 소속임을 위반한다는 것이다. 다른 죄악은 외계(外界)의 남들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지만, 성적 죄악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다.특히 그
손해는 종교적인 면이 더욱 크다. 고전 6:15-17에 말하기를,"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
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
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몸을 가지고 성적 죄악을 범하면, 그것은 주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범성죄
(犯聖罪)이며, 주님 앞에 정절을 지키지 않는 훼절(毁節)의 죄도 된다. 안셈(Anselm)
은 말하기를, "다른 죄들은 대항하여 싸움으로 이길 수 있으나, 성적 죄악은 피함으로
야 이긴다"고 하였다. 요셉이 이 죄를 이긴 방법도 그러하였다. (창 39:1-18). 안셈의
말은 물론 "음행을 피하라"(고전 6:18)는 성경에 의거한 것이다. 죄악의 많은 종류 중
에는 매력을 가지고 유인하는 것들이 있는데, 성적 죄악이 거기에 속한다. 성적 죄악
은 외모의 미(美)를 가지고 사람을 꾀어 넘어뜨리는 독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독사
(毒蛇)의 이빨에서 나오는 살인독(殺人毒)과 같다. 또 그것은 마치 알프스산의 아름다
운 잔디 언덕과 같다. 많은 여행자들은 아름다운 잔디가 있는 땅을 든든히 디디고 발
을 붙이려다가 떨어져 죽는 일이 많다고 한다.
음행은 멸망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음행자를 가리켜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려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으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
함과 일반이니라"(잠 7:22-23)고 하였고, 그런 죄를 범하게 하는 집에 대하여 말하기
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잠 7:27)고 하였다.
"음행"(* )은 특수한 범행(犯行)으로서의 성적 죄악이고, "더러운
것"(* )은 일반적인 성적 불결의 행습을 의미하는 바, 남들에게 알
려지지 않은 것들일 수도 있다고 한다. "호색"(* )은 방종스러운 노골
화한 불결의 행습을 의미한다고 한다(Trenchm Syn New Testament).

========5:20

우상 숭배와 술수 - 이것들은 종교적 죄악이다. "우상 숭배"라는 것은 하나님늘 보
이는 형태로 만들어 섬기려는 동기에서 생긴 행동이나.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알거나, 혹은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그것에게 돌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육안(肉
眼)으로 보고 야 믿겠다는 마음이 역시 우상 숭배의 사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
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교만이요 어리석음인 것이다. 보이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상 속성인데,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분으로 여긴다면 그 얼
마나 교만한 행위인가? 죄 없는 스랍들도 두 날개로 그 얼굴을 가리우고, 하나님을 보
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한다(사 6:2). 출 33:20에 말하기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
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였다. 욥 9:11에는, "그가 내 앞으로 지나
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라" 하였고, 딤
전 6:16에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안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
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
어다"라고 하였고, 요일 4:12에는 말하기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라고 하였다(시 18:11;골 1:15 참조). 히 11:3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
아 된 것이 아니니라" 고 하였으니, 보이지 않으시는 그가 모든 보이는 것을 지으셨
다. 그러므로 그의 보이지 않으시는 성질은 더욱 우리의 신앙을 끈다. 예수님께서 말
씀하시기를, "나를...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하셨다. 보지
못하나 믿는 그 신앙은 더욱 고상하다. 그 이유는 ,(1) 보이는 감각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 참 신을 그대로 믿는 까닭이며, (2) 신앙을 방해하는 감각주의(感覺主義)의 마음
을 이기며 믿는 까닭이다.
"술수." "우상 숭배"가 제사적(祭祀的)인 방면의 범죄라면, "술수"(*
)는 예언적(豫言的)인 방면의 범죄이다. (1)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나온 예언은
천국을 중심한 하니님 말씀이지만, "술수"(術數)는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행위이
다. (2) 예언은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케 함을 목적한다. 그러나 "술수"는 인간으로 하
여금 낙심케 하든 지 혹은 요행수를 바라보게 하여 도덕적 반성을 잊어버리게 만든
다.(4) 예언은 그것을 받는 자가 거의 뜻밖에 자주 의식(自主意識)에 의하여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客觀的啓示)를 받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술수하는 자는 솔선적으로 공교
히 만든 소위 예언으로써 사람들을 속인다. 기독신자들 중에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의
미명(美名) 아래 숨어서 "술수"의 죄를 범하는 자들이 적지 아니하다. 예를 들면, 신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고 자기의 육적 야욕을 위하여 성령을 구하며 이용하
려 하는 것, 신자가 지식에 절제할 줄 모르고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고급 여계(靈
界)의 깊은 지식까지 알고자 하여 분수에 넘치는 사색을 일삼는 것, 하나님을 신종
(信從)하고 일상 생활의 평범한 책임을 다함에 주력하지 않으면서 기이(奇異)한 것만
을 탐하여 그것에 주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려진 하나님의 말씀(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이적(異蹟)
을 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적을 믿는다.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표준
이적들을 믿는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에 따라 그런 이적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시대에도 우리가 믿음으로 바로 살기만 하면 주님의 뜻인 경우 특별 섭리의 일들
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술수"의 잔재(殘滓)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버려
야 한다. 그 이유는, "술수"는 우리의 신양을 해롭게 하며 또한 하나님께 욕을 돌리기
때문이다.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 - 이 여덟
가지 죄악은 육체적으로 범하는 불화(不和)의 죄악이다. "원수르 맺는 것"(*
)은 성경이 여러 가지로 금한다. 사람이 원수를 맺음은 자기와 충돌된 상대방의 죄를
용서하지 않음에서 기인된다. 신자는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 출
23:4-5에,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
려두고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 하였고, 욥31:29에는,"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자의 멸망으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라고
하였고, 잠 24:17에는,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빠하지 말라"고 하였다. 롬 12:21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
라"고 하였다. 우리가 원수에 대하여 선을 행함으로 몇 가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된
다. (1) 하나님의 완전성이 나타남(마 5:48). (2)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심판장이
되는 참람한 죄를 면함(롬 12:19). (3) 용서하는 자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옴(잠
19:11). 원수를 갚는 자는 상대편의 악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대적하는악을 더
많이 만들어 놓는다. 요한 번연은 진리 파수를 위해서는 강경하였으나, 진리의 적들이
그를 욕할 때에는 온유하게 참았다고 한다.
"분쟁"(* )은 "원수를 맺는"일에서 나오는 법이다. 분쟁은 언제나 그것이
확대될 위험성의 있고 확대되면 수습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계한다. 잠25:8에,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하였고, 잠17:14
에는 "다누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
칠 것이니라"하였고, 잠18:19 에는,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
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고 하였다.
"시기"(* )는 남이 나 자신보다 웃해진 것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
다. 사람은 마땅히 남이 자기보다 우수함을 볼 때에 기뻐해야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나보다 우수한 자를 나의 선생으로 알 때에 기쁨을 가지게 됨. 선생이 없는
사람은 인도자 없는 소경과 같다. (2)이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 그것을 다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보다 우수한 자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
교회 역사를 보면, "시기"의 죄가 교회에 큰 손해를 끼쳤다. 크리소스톰
(Chrysostom)은 교권자 데오빌로 감독의 시기로 인하여 억울하게 탈직을 딩하였으며,
마침내 사막에 망명하여 종신(終身)하였고, 유명한 사무엘 루더포드(Ruderforth)도 사
이드 셀프라는 교권자의 시기로 인하여 투옥되어 수난하였다. 예수님은 대제 사장들의
시기로 인하여 잡히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분내"(* )에 대하여 성경에 여러가지 훈계가 있다. 잠12:26에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라고 하였고, 잠 16:32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
는 용사보다 낫고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하였고, 잠
27:33에는,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하였고, 전7:9에는,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하였고, 잠 27:4에는,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라고 하였
다.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분노"하는 성질이 있으면, 그것으로 인하
여 많은 손해를 당한다. 고대(古代)의 유명한 학자 제럼(Jerome)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공적이 있으나, "분노"하는 성질이 과도하여 어거스틴(Augustine)에게 보낸 편
지에도 분노를 나타냈다. 그것은 그의 업적에 커다란 오점(汚點)이 아닐 수 없다.
"당 짓는것"이란 말(* )은 어원적(語原的)으로는 '임금 노동자'(賃
金勞動者)를 의미한다(Greijdanus). 이 의미에서, 이것은 육체의 유익으로 매수되어
단결해서 진리를 항거(抗拒)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진리를 위하여 성령으로 하나되게
된 단결은 작든지 크든지, 집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그것은 당을 지음이 아니다. 다만
비진리를 세우기 위하여 육체적 수단으로 서로 단결한 것은 작당(作黨) 행위이다. 고
대의 제2에베소회의는 당파를 짓는 악한 사람 디오스코루스(Dioscorus)가 주회(主會)
한 회의인데, 그 회는 비상하게 경건한 플라비아누스(Flaviaus)를 축출하였고, 이단자
(異端者) 유두게를 포용하였다. 칼빈은 말하기를 ,"이 회의는 성령이 주장하시기 않았
다.나는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Institute of Christian
Religion, BK. 4. chap. 10).교회사(敎會史)에 나타난 대로 교황 그레고리(Gregory)
11세가 죽은(1378 A. D.)후에 교황권 쟁탈전으로 인하여 울반(Urban) 6세는 로마에서,
클레멘트 7세는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각각 교권을 가지고 근 30년을 분립하였으니, 이
것은 순전히 권리를 위한 당쟁이다.
"분리함"이란 말(* )은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화합성(和合性)
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참됨과 거짓됨은 그 교회의 공동 고백과 권징 실시 여
부(與否)로써 판별되고, 그 교회의 성원인 개인 신사들의 사생활의 완전 여부는 별도
의 문제이다. 만일 누가 교회의 개인 신사들의 결점으로 인하여 교회적 생활을 버리고
물러선다면, 그것은 혹시 "분리" 행위가 되기 쉽다. 그러나 만일 누가 교회의 부패를
경고하며 진리와 의(義)를 증거하다가 교권의 억압(抑壓)으로 축출을 당한다면 그는
"분리"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영광을 얻을 것뿐이다. 사
무엘 루더포드(Samuel Ruderforth)는 16세기의 영국인으로서 건전한 개혁교의 정신을
로 신앙생활을 했던 신앙 위인이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경 작성위원 중의 한 사람
이었다. 그는 일찌기 어느 교직자의 시기를 받아 수감(收監)되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
가 옥중에서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기를,"이 땅의 목사들을 따르지 말라"고 하
였다(1637년 7월 14일 아벧딘 옥에서).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가 "분리"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양떼로 하여금 이리와 같은 거짓 스승들에게 가지 않도록 하려
는 것이요, 양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한 것뿐이다. 마 7:15 참조
"이단"이란 말(* )은 "채택함"을 의미한다. 곧, 이것은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진리와 표준에 위배되는 의견을 채택함이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보면, "이단"이란 칭호가 타파(打破)에 대한 편견으로 사용되니 실례(實例)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옳은 편에서 그릇된 편을 향하여 부른 파명(派名)인 동시에,그릇된 편을
향하여서도 사용하였다. 공정한 의미에서 "이단"은 역사적으로 고백해온 성경적 교리
를 위반하고 다른 의견을 채택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 잘못된 다른 의견을 채택하였
다가도 조만간 그것을 버렸으면 그는 이단자 아니다.

=========5:21

투기 - 이것은 "시기"가 좀더 약화된 것이다. 이것은 남이 소유한 것에 대하여 심
술이 나서 그것을 빼앗으려고까지 생각하는 악심(惡心)이다.
술취함 - 신 구약 성경은 술에 취하는 것을 금한다. 잠23:29-35;엡 5:18 참조. 술
을 약으로 사용함이 허락되었는데 (딤전 5:23), 그것을 빙자하여 술을 탐해 먹는다면,
그것은 속이는 죄까지 범함이다.
신자가 술에 취하는 것이 불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생각할 때에 알 수
있다. (1) 신자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니(벧전 2:9),술에 취하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
과 진리를 분별하는 일에 실수하게 된다(레 10:9;겔 44:21), (2) 술에 취하면 일반적
행동에도 실수 하게 된다.(잠 23:29-35). 신자가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진
리를 다 준행하지 못하는데, 술에 취하여서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으랴? (3)
술에 취함은 건강을 해하는 것이다.
방탕함 - 이것은 음란 이외의 모든 무절제(無節制)한 향락주의를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는 진리를 악용(惡用)하여 이 세상 향락을 방종스러이 취할
수 있다고 생가하면 안된다. 신자는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나 이제는 감심으로 율법을
지켜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순종할 자유인이 된 것이 사
실이지만, 모든 사람들을 감심으롤 섬겨야 할 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향락을 자
기 마음껏 취할 처지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극기(克己)하며 사랑의 수고를
해야만 한다.

=======5:22

성령의 열매 - 여기 "열매"란 말(* )은 단수명사 되었다. 그것은 신자
의 여러가지 덕행(德行)이 성령의 단일하신 역사로 말미암아 여러 방면으로 나타난 것
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모든 덕행을 "열매"라고 한 것은, 그것들이 사람의 노력을
주로 하고 성립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에게서 나오는 것이
다.
사랑 - 이 "사랑"은 믿음과 함계 있는 사랑인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한다.고전
13:13에 말하기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
은 사랑이라"고 하였다. 신자의 사랑은 그가 하나님의 속죄의 사랑을 믿는 데서 반영
된 사랑이니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원천으로 하고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요일 4:10-11
참조.
희락 - "희락"은 언제나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열매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희
락(喜樂)이 있나니, 사랑하는 자도 기쁘고 사랑을 받는 자도 기쁜 법이다. 언제든지
남을 미워하는 자의 얼굴에는 수심과 번민과 고통의 그늘이 있지만, 남을 사랑하는 자
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속에서부터 솟아난다. 희락의 필요성은 육체의 건강을 위한 의
미도 있지만, 그 보다도 신앙을 건전하게 하려는 것고 하나님께 감사를 많이 하려는
것이다. 희락이 있어야 신앙이 자라나고 감사가 넘친다.
화평 - 이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열매인데, (1) 서로 사과함으로 이루어지
며(마 5:24-26), (2) 서로 용서함으로 성립된다.(엠4:2-3).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화평
이 이루어지지만, 그것도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자(힘쓰는 자, 히 12:14)에게 주시는
선물이다.(약3:17-18). 마 5:9; 막9:50 참조.
오래 참은(* ) - 이것은 '따가움을 멀리함'이란 뜻이다. 사람
은 대인관계(對人關界)에 있어서 혹은 무엇이 마음대로 안될 때에 그 심령이 따갑게
(안타깝게) 되기 쉽다. 이런 떼에 이기는 방법은 신앙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림
이다. 우리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떼에는 침착하여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 구
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림이 우선 안식의 복이 아닌가!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잡으려고 홍해까지 따라 올 떼에 모세는 말하기를, "다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
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하였고,
모압과 압몬 족속이 큰 무리로 유대에 육박하였을 떼에 여호사밧 왕이 말하기를, "이
전젱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
하는 것을 보라"(대하 20:17)고 하였다. 히 10:36에 말하기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
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하였고, 갈6:9에는 말하
기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
라"고 하였다.
자비. - "자비"란 말은(* ) 남에게 주는 '친절'을 의미한다. 그
러므로 "친절"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친절은 행실로만 아니라 말로도 나타난다. 우
리의 말은 중요하다. 잠 12:18에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
의 혀는 양약(良藥)과 같으니라"하였고, 잠15:1에는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
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하였고, 잠15:4에는, "온량한 혀는 곧 생명 나무라
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영시(英詩)에 말하기를 , "노여운
말 한마디가 한 친절한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부지중에 나온 실언(失言)이 앞날을 캄
캄하게 만들고, 찌르는 가시를 일평생 남겼도다. 그러나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슬펐던
마음에 광명을 주고, 동정의 말 한 미디가 한 영혼을 살려 놓고, 기쁨의 말 한마디가
캄캄하던 앞길을 광명하게 만든다. 남의 마음을 섭섭케 만드는 것은 네가 발표한 말
뿐이 아니다. 네가 말하지 아니하는 그 때에 많은 마음들이 아픈 상처를 받는다. 네가
말했더면 많은 아픈 마음이 풀어졌으리라. 사림들이 언필칭(言必稱) 공평을 부르짖으
며 사람에게 사납게 행한다. 그러나 격분된 말로 의(義)를 말할진대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양선. - "양선"(* )은 자선 행위를 말하는데 성령께서 주신것이
니만픔, 질적으로 선하다. 이 세상에는 자선 사업이나 적선(積善)을 말하는 자들도 많
고 실행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흔히 질적 선미(善美)를 지니지 못한 외부적 행동에
그치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자선이 아니라 생명없는 사업 혹은 외식(外飾)에 불과
하다. 진정한 자선은 끝날의 심판 때에 그대로 다 드러낼지라도 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되도록 행해지는 것이다.
충성. - 이것은 진실하게 주님의 부탁을 지킴이다. 우리는 구원의 소식을 전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어떤 새로운 공의(功義)를 기증할 필요는 없다. 만일 그럴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루신 구원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된다. 구원은 그리스도께
서 완성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그러면, 우리의 "충성"이란 것은 그리스도께
서 전하신 구원의 복음을 그대로 전함이다.
충성하는 자는 구체적으로 다음고 같은 자들이다.
(1) 주님을 두려워하는 약한 자. 주님께 충성하는 자는 반드시 영웅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겁약한 자라도 주님만을 두려워하게 되면 주님께 충성하는 자가 된다.
이 세상에 속한 충성을 살펴보면, 생래적(生來的)으로 영웅적 기질을 가지고 국가에
충성한 자들이 있다. 예를 들면, 헬쿨라네움(Herculaneum)이 함락당할 때에 로마 파수
병이 죽기까지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임무를 다한 것과 같다. 또 예를 들
면, 당(唐)나라의 충신 장흥(張興)이 역적(逆賊) 안록산(安祿山)의 부하에게 잡혀서도
항복하지 않고 콥에 키워 죽으면서 끝까지 원수를 꾸짖은 것 등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력을 가지고 썩을 것에게 충성한 것이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반드시 호걸이어
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 호걸은 자기의 잘난 것 때문에 하나님을 전
적으로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주님 앞에 진실한 자. - "충성"으로 번역된 말(* )은 진실을 의미
하기도 한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님께서 원하신다.(시51:6). 주님께 사로잡히지 않
은 지식인이나 모사는 하나님의 교회에 해를 끼치지만, 무식하여도 주님의 복음을 그
대로 진실해 전하는 자는 주님의 일에 유익하다. 사람이 거짓되게 행하기는 어려워도
진실히 행하기는 쉽다. 거짓되게 행하는 자는 계속적으로 거짓을 꾸미며 또 그렇게 처
신하게 된다. 그것은 양심에 괴로움을 주는 어료운 길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실히 행
하면 양심이 평안하고 그 길도 단순하다.
(3) 주님을 위한 의로운 생활(혹, 사업)에 변절하지 않는 자. - 그는 언제나 한결
같으며 유종의 미(有終之美)가 있다. 누구든지 선미(善美)한 길을 가다가 변하면 그는
썩은 뒤에 그들의 존재는 교회에 해가 된다. 그러나 썩기 시작할 때에 서둘러 치료하
면 회복할 수 있다. 그것은 시급히 회개함이다. 회개는 신자의 부패를 막는 유일한 치
료제이다. 인류 역사는 부패로 이어져서 보기도 싫은 역사이다. 그러나 니느웨의 회개
역사는 모든 부패를 막아 역사를 미화(美化) 시켰다. 그 역사는 보기 싫은 것이 아니
라, 도리어 부패했던 적이 없었던 역사보다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되는 역사이다. 우
리는 변절로 인한 허물된 인걱이 되지 말아야 한다. 교역자들이 처음에는 잘 하다가
점점 잘못한 예(例)가 얼마나 많은가? 혹은 명예심, 혹은 물질에 대한 탐심, 혹은 시
기심, 혹은 정욕, 혹은 혈기 등으로 잘못되어 타락하고 만다.

=======5: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온유"란 말(*
)은 특히 대적에게 복수하지 않고 부드러운 인격으로 이기는 덕을 가리킨다.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 덕을 소유하였다. 모세는 그 시대에 가장 온유의 근본이시다. (마
11:28-30,12:17-21). 크렌머(Cranmer)에 대한 후세(後世)의 속담은, "캔터베리의 감독
크렌머와 충돌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영원히 그의 친구사 되리라"고 하였다. 중세대의
성자 버나도(Bernard)는 그 눈이 비둘기 눈같은 온유한 인물이었고, 보나벤츄라를 보
면 아담이 범죄하지 않은 것다"고 하였다. 오리겐(Origen)은 말하기를 , "우리는 남을
위해서 지음이 되었고, 남을 저주하기 위함은 아니라"고 하면서 논쟁에 있어서도 온유
를 주장하였다. 키프리안(Cyprian)은 교회 정치가로서 권위를 존중히 여기면서 온유를
실천하였다.
"절제"란 말( )은 '자기 자신을 분잡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죄
를 범하지 못하게 자기를 제재함이다. 바울은 자기를 "쳐 복종하게"한다고 하였는데
(고전9:27), 그것이 바울의 자기 제재라고 생각된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율법이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하여 그기스도 신앙으로 행하는 자의 행실
(사랑으로 행하는 모든 행실)은 율법을 이루는 것뿐이다. 롬 3:31,13:8-10참조. 이 점
에 대하여 다음 귀절이 도욱 밝혀준다.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유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본절부터 26절까지는 앞 부분(13-23 "육체"대로 범죄하지 말고 사랑을 행하라고 한 보
든 말씀)에 대한 결론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속죄하여 그의 소유로 삼으쇼가 백
성을 가리킨다. "육체"는 인간의 부패성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모든 죄악의 근원이다.
"정"(* )은 의지적(意志的)으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죄악의 심리를 가리킨고, "욕심"(* )은 따갑게 일어나는 죄 되는 욕구
를 말한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함은 ,(1)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
을 떼에 그들과 정욕 사이의 관계는 원칙적으로 끊어졌다는 것이고(고후 5:14-17),
(2)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음으로 인하여 그들이 받은 영적 새 생명은 부단히
정욕과 싸워 그 정욕이 주장하지는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
다 함은, 그것을 현세에서부터 아주 없애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세에 기독신자에
게서 정욕이 아주 없어진다는 교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없다.(갈 5:17;요일 1:8)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 "성령으로 삶"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아 성령님의 역사가 신자들을 중생케 하며, 그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살도록
함을 가리킨다(고후 3:17). "성령으로 행할지니." 여기 "행함"이란 말(*
)은 행렬(行列)을 지어 서거나 가거나 함을 의미한다.(Greijdanus). 이것은 신
자들이 한 단체의 행렬처럼 성령님의 인도대로 규율 있게 순종함을 가리킨 듯하다. 빌
2:12-13 참조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 교회생활에 있어서
분쟁은 허영을 구함에서 일어난다. 교회의 단체 생활에서 누구든지 높아지기를 원하
면, 그것은 허영심이다. 그 이유는,이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을 언제든지 헛된 까닭이
다(벧전 1:24). 천국에서는 낮아지는 것이 실상 높아짐인데, 그와 반대로 높아지기를
원함은 어리석은 생각(마구적)이다(눅 18:14). "서로 격동함"은 서로 노엽게 함이고,
"서로 투기함"은 남의 잘됨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방해하는 악독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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