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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1|조회수12,046 목록 댓글 0
히브리서 제 4장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 '두려워할지니'의 헬라어 '포베도멘'(*
)은 헬라어 본문에서 첫머리에 위치하여 그 의미가 강조되었다. 이것은 본
서의 수신자인 유대인 공동체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
에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함을 시사한다(Lane). 모든 사람들이 방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보다 민감한 태도를 지닐 것을 요구하는 저자의 목회자적 관심을 나타낸다(11
절;3:12).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 '안식'의 헬라어 '카타파우신'(*
)은 출애굽 세대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스라
엘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다(신
12:9-10).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대인 사이에서 이 안식의 개념은 주로 회당
에서의 가르침과 토론을 통해 형성된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Lane). 그래
서 시95:11의 '내 안식'은 본절에서 종말론적인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택
한 백성들을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의 안식을 의미한다(요14:1-4). 한편
'약속'(* , 에팡겔리아스)이라 함은 '안식'에 대한 약속을 말한다. 출애
굽한 제1세대는 죽었으나 제2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측면에서 안식에 대한 약속
이 성취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저자는 지역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약속
의 성취로 보지 않았다(Morris). 하나님께서 1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
셨던 안식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이행되지 않았으나 그 약속은 변치 않고 그리스도 안
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계속되어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이어받을 상속자
가 되었다(1:14;6:12,17;9:15).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 본절은 '있을까 함이라'로 번역된
헬라어 '도케'(* , '판단하다', '가정하다')를 해석하는 차이에 따라 달리 해석
된다. (1)혹자는 수신자들 중에 실제로 하나님께서 약속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
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로 해석한다(Moffatt, Stuart). (2)혹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
신 안식에 자신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Dods).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저자는 비록 안
식이 약속되었을지라도 그 약속을 상실한 사람들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Morris).

=====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 '복음 전함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엥겔리스메노이'(* )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조'(* )의 완료 수동형이다. 하나님의 좋은 소식은 가데스 광야
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졌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그
언약을 잘 지키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복된 소식을 전해들었다(출19:3-6;23:20-33). 이와 동일하게 당시
수신자들도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하
나님께서 주신 복음, 즉 안식에 대한 약속은 동일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화합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전혀 유익하지 못했다. '화합지'에 해당하
는 헬라어에 대한 독법은 두가지이다. (1)'말씀'(* , 로고스)과 연결되어서 단수
인 '슁케케라스메노스'(* )로 읽는다. 이 경우 본문은 '말씀과 이를
들은 자들의 믿음과 화합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2)'저희'(* , 에케이누
스)와 연결되어서 복수인 '슁케케라스메누스'(* )로 읽는다. 이
경우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자 즉 여호수아와 갈렙과 믿음
으로 화합되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 두 가지 경우 중 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
하면 문맥상 여호수아와 갈렙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Morris,
Moffatt, Hewitt). 한편 '믿음'의 헬라어 '피스테이'(* )는 본서에서 '순종'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3:18,19). 따라서 '믿음'은 정적인 신앙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을 향한 동적이며 실천적인 신앙임을 시사한다(Morris).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저자는 현
재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고 밝히고 있다. '들어가는도다'의 헬
라어 '에이세르코메다'(* )는 '에이세르코마이'(* )
의 현재 중간태이다. 이 단어를 근거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시
기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에이세르코메다'가 현재형으로 이미 믿
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미래에 보장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Kistemaker, Lane, Montefiore). (2)혹자는 그리스도
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현재이나 그 완성은 미래에 있다고 주장한다
(Bruce).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의 완성이 미래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에 누리
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안식'(* , 카타파우신)은 시95:11의 '내 안식'
(* , 카타파우시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안식'
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즐기시는 안식'을 의미한다(Morris, Bruce). 그
러므로 본절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즐기시는 안식에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동참하게 됨을 시사한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
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 이 구절
은 시95:11의 인용이다(3:11).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받은 하나님의 안식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하나님의 길을 의도적으로
거역한 결과이다. 그들이 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
노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안식이 폐지되었거나 혹은 안식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H-
ewitt, Morris). 세상 창조 때 완성된 하나님의 안식은 창2:2을 암시하는 것으로 하
나님의 안식이 창세 이후로 지속되고 있으며,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든
이가 참여해서 즐길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Bruce).

=====4:4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 저자는 본절에서 창2:2을 인용하면서
(출20:11;31:17) '어디 이렇게'(* , 푸 후토스)라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한
다. 이는 당시 성경에 장,절의 구별이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인 출처를 밝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 어느곳에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 저자는 창2:1-3에서 나타
나듯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 그의 안식을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 자
신이 행하신 일의 완성과 만족을 시사한다. '하나님이 쉬셨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상태에 들어가셨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섭
리 가운데 인간을 구속하시고 유지하시며 통치하시는 일을 행하신다(요5:17, Hewitt).
본절에서 저자가 인용문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이 미래에 인간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 이래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4:5
또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 '또다시'에 해당하는
'팔린'(* )은 앞에서 인용한 문구에 다른 인용구를 첨가시킬 때 저자가 사용하
는 독특한 표현방법이다(1:5;2:13;10:30). 본절은 3절에서 인용한 시95:11의 반복으
로서 저자는 이 반복된 인용을 통해서 창조 이후에 취하신 '하나님의 안식'과 '구원받
은 인간에게 약속된 안식'을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안식에 대한 약속의 특성을 설명하
여 수신자들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한다(Lane, Schroger). 그래서 본절에서는 시
95:11a에 언급된 하나님의 진노가 생략되어 있다.

=====4:6
본절은 앞에서 진술한 내용의 요약이다.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안식에 들어가는 일이 남아 있다. '남아 있거니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레이페타
이'(* )는 '뒤에 남겨두다'라는 의미로(9절) 설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을지라도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유
효함을 시사한다(Lane).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들은 성령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
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하는 자들이다(3:7).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
본절은 3:16-18과 4:2에 대한 요약이다(Lane).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이란 시
95:8-11에서 언급된 출애굽 세대를 가리킨다(민13:26;14:9). 출애굽 세대들은 불순종
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민14:11,12;21-23). '순종치 아니
함'이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시사한다(11절;3:10;롬
11:30).

=====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 '오랜 후에'(* , 메타 토수톤 크
로논)는 광야 시대 이후부터 다윗의 때에 이르는 시기를 가리킨다(Robertson). 한편
'다윗의 글에'는 인용문인 시 95편의 저자를 나타낸다. 그러나 '다윗의 글에'라는 표
현은 맛소라 본문(Massoretic text)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70인역에는 시 95편의 제목
으로 '아이노스 오데스 토 다우에이드'(* , '다윗의 찬양')이라
고 기록되어 다윗이 지은 시로 나타난다. 그래서 혹자는 70인역을 따라 '다윗의 글
에'라는 구절이 틀림없이 다윗이 쓴 시편임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elitzsch). 그러
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편의 저자 문제가 아니라 다윗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
셨다는 사실이다(Bruce).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
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 본절은 시 95:7b, 8a의 인용으로 그
초점은 '오늘날'에 있다. '오늘날'이라 함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폐지된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유효함을 시사
한다(Morris). 따라서 본절은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과거에 국한되지 아니하
고 현재에도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성취되는 종말론적인 것
임을 나타낸다(Lane, Hofius). 그러기에 저자는 본절의 인용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행했던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권
면한다.

=====4: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
으리라 -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안식'의 개념은 가나안 땅의 정착을 의미했
다(신3:20;12:9;25:19;수1:13). 그래서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진 후에는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나타난다(수21:44;22:4). 그러나 본절에서는 구약의 여호수아
를 통한 '가나안에 들어감'이라는 전통적인 안식과 시 95편에서의 '내 안식'사이에 차
이점이 발생한다(Lane). 전통적인 안식의 개념인 가나안에서의 정착은 진정한 의미의
안식에 대한 성취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실체인 다른 안식을 상징한
다. 만일 여호수아에 의해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시 95편에서 안식에 대
한 새로운 약속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린
안식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완전한 안식에 대한 상징으로서 진
정한 안식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이다. 한편 '여호수아'(* , 예수스)라
는 명칭은 '예수'라는 헬라식 발음을 히브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여호수아'는 예
수 그리스도와의 상관 관계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서 처음 '예수'(* , 예수스)
는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하였으나 나중의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인들을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심을 암시한다(Morris).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본절은 앞에서 언급된 내용
에 대한 결론으로 6a절과 구조적으로 병행을 이룬다(Lane).
결국 본절은 6절에서 내려진 결론을 다시 반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에
사용된 '안식'의 헬라어 '삽바티스모스'(* )의 의미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이것이 영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역적이며 세상적인 의미의 안식
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uchanan). (2)혹자는 '삽바티스모스'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
나안 정복을 완수하고 그곳에 정착해서 누리는 안식을 의미할 수 있으나(신25:19), 근
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영적인 의미의 완전한 안식을 의미한다
고 주장한다(Morris, Hewitt, Rendall). (3)혹자는 이것이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들에
게 주어질 안식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Justin, Hofius). 여기서는 '삽바티스모스'를
'축하한다'라는 뜻의 동사 '삽바티제인'(* )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아 단순
히 '안식'이라는 의미보다 미래에 누릴 '안식하는 즐거움'을 강조한다. 세 가지 중
(1)의 견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종말론적 의미로서의 영적인 안식을 강조하
는 본서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타당치 않으며 그외 나머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
을 지닌다. 따라서 '삽바티스모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영적인 의미의 안식으로서
(마11:28-30) 그 안식이 기쁘고 즐거운 것임을 나타낸다.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
라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
도'로 해석한다(Ebrard, Alford, KJV, LB). (2)혹자는 '그리스도인들'로 해석한다
(Morris, Hewitt). 이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장의 전후 문맥
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들어간'에 해당하는 헬
라어 '에이셀돈'(* )은 부정 과거 분사이나 일반적인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
로 현재형으로 나타난다(for whoever enters God's rest, RSV, NIV, De Wette, Vince-
nt).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안식을 누리게 된
다. 이렇게 누리게 된 안식의 시제성은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안식'은 안식일의 주인되신 그리스도께서 오
심으로써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하늘나라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 안식
을 누리고 있으나 아직 완전한 안식을 누린 것은 아니다. 완전한 안식은 하늘나라에
서 누리게 될 것이다(Morris).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 '힘쓸지니'의 헬라어 '스푸다소
멘'(* )은 '재촉하다', '열심히 노력하다'라는 의미로 의지를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지적인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
기에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3절, Lane).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6절과
평행을 이루는 것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을 암시한다(3:17,18). 이스
라엘의 불순종 행위는 현재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가져다 주는 모델이다. 여기서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데이그마티'(* )는 '본보기', '복사본'을
뜻하는 것으로 저자는 본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한
것을 경계로 삼아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함을 권면한다.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 '하나님의 말씀'은 앞에서 인용된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키고 있으나(Hewitt),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 말씀 전체를 가리킨다(Robertson, Morris).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
는 표현은 그 '말씀'이 '인격성'과 '역동성'을 지녀서 행위를 동반함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이들에게는 경고와 심판을 행하게 되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
들에게는 그들에게 약속된 말씀을 성취케 하는 말씀이다(Hewitt, Morris).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 세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수신자들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지닌 말씀으로서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
라 안식과 진노를 행한다(Trompf). 그 말씀은 '검'과 같아서 하나님의 음성에 계속
불순종할 때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아말렉과 가나안인들의 '검'(* ,
마카이란)에 패배(敗北)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민14:43-45). 마찬가지로 하나님
의 말씀은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악독(롬1:29) 등의
온갖 죄악을 예리하게 심판하는 '검'이 된다(Hofius, Lane).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
나니 - '혼과 영'(* , 프쉬케스 카이 프뉴마토스), '관절과
골수'(* , 하르몬 테 카이 뮈엘론)는 인간의 구조로 명명되는
'삼분법'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인간 정신의 전체적인 본성을 말하는 수사학적(修
辭學的)인 표현이다(Bruce, Morris, Robertson). 한편 '찔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이이크누메노스'(* )는 '꿰뚫다'라는 의미로 인간의 영혼과 육을 분할한
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깊은 내면을 꿰뚫어 잠재된 의식까지 들
춰내는 능력이 있음을 시사한다(Bruce, Robertson). 또한 '감찰하나니'의 헬라어 '크
리티코스'(* )는 법정용어로서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
씀이 사람 인격의 가장 깊은 곳까지 통찰할 수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함을 시사한다(시95:11, Lane).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 '지으신 것'이란 '창조 행
위' 혹은 '물질적인 우주'와 '영적인 존재'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고후5:17;갈6:15)
가리킨다. 한편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의 헬라어 '아파네스'(* )는 본문에만
사용된 형용사로서 부정 접두어 '아'(* )와 '보이다'를 의미하는 '파이노'(* )
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역동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마음과 뜻을
감찰하시는 능력이 있어(12절) 그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남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시
야에서 모든 창조물들이 벗어날 수 없다는 이러한 사상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상식적인
사실이었다(Lane).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 '우
리를 상관하시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 혼 헤민 호 로고스'(* )
는 동사가 없는 구문으로 해석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
석하면 '우리가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에게'라는 의미로(Morris),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시사한다(Robertson). 한편 '드러나느니라'의 헬라어
'테트라켈리스메나'(* )는 '목(* , 트라켈로스)을 뒤로 젖
히다'라는 의미로 레슬링 선수가 상대방의 목을 감아 뒤로 젖히는 행위나 짐승을 잡기
위해 뒷덜미를 젖혀서 목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 표현이다
(Morris). 이것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시야에서 어떤 것
도 은폐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저자는 12절과 본절의 문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난다는 것은(12절) 하나님 자신 앞에 드러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진술하
고 있다(Lane).

=====4:14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를 '큰 대제사장'(*
, 아르키에레아 메간)으로 지칭하고 있다. '큰 대제사장'은 '대제사장'
에 '큰'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으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우월
함을 나타낸다(Lane).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 예수의 우월성은 '승천하신 자'라는 초월
적인 표현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승천하신 자'의 헬라어 '디엘렐뤼도타 투스 우라
누스'(* )에서 '디엘렐뤼도타'는 '...통하여 지나가다'라
는 뜻을 지닌 동사 '디에르코마이'(* )의 완료 능동태 분사로 그리스도
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뜻보다는 하늘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지고(至高)한
곳으로 가셨음을 뜻한다(Morris).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이 땅의 성막에서 하나님
께 제사를 드렸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존재에서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시므
로 그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사역의 탁월성을 소유하고 있다(Hewitt). 한편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는 예수께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성을 소유하셨음을 나타낸다. 이는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유한성을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신성을 지
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행하신 모든 행위와 약속이 신뢰할 수 있는 확고한 것임을
시사한다(Hewitt).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 앞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초월
성, 더 나아가 그의 하나님의 아들되신 신성은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근거가
된다. 여기서 '믿는 도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기아스'(* )는 '고
백'을 뜻하는 말인데 이 고백의 내용은 당시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익히 알고
있는 공식화된 고백으로 본절 상반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킨다
(Lane, Neufeld, Bornkamm). 한편 '굳게 잡을지어다'의 헬라어 '크라토멘'(* )
은 '단단히 쥐다' 혹은 '들러붙다'의 뜻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끝까지 지
키라는 권고이다.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 '연약
함'은 죄의 유혹에 대한 인간의 연약성뿐만 이니라 인간이 지닌 모든 한계성을 함축하
고 있는 표현이다(Hewitt). 한편 '체휼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파데사이'(*
)는 '함께 수난당하다'라는 의미의 '쉼파스코'(* )에서 파생된
말로서 '동정하다'(to sympathize, NIV)라는 의미이다. '쉼파데사이'는 단순히 감정
을 공유한다는 의미로서의 '동정'(同情)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의 행위를 내포한다
(10:34;13:23;4Macc 4:25, Lane). 저자는 '아니하는...아니요'(* , 우...메)
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예수님 자신이 인간과 동일하게 연약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체휼하시는 예수'에 대한 강조는 예수께서 인간과 동일
하게 공감하시는 분으로서 능히 인간을 도우실 수 있음을 나타낸다(Schenk). 예수께
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인간성에 참여하셨기 때문
이다(2:17,18).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이것은 예수께
서도 인간과 똑같이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Lane, Cullmann) 예수께서 인간과 같이 되셔서 인간들이 겪는 모든 어려움을 경험하
셨음을 나타낸다(Bruce, Morris).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을 돕
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한편 '죄가 없으시니
라'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두가지 견해가 나타난다. (1)혹자는 본문의 내용 즉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점을 부인한다(Buchanan, Williamson). 이들은 '예수께서
본장에서 대제사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속죄제를 드리는 것처럼(5:3), 예수도 대제사장으로서 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통해서 순종해야 함을 알고 모델이 되셨다'(5:8)고 주장한다.
(2)혹자는 본문의 표현 그대로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죄의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
이 있었으나 범죄하시지 않았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Morris, Bruce). 이 두 가
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앞에서 언급된 '모든 일에 한결같이'에 해당하는 헬라
어 '카드 호모이오테타'(* )는 '같은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동일성 보
다는 유사성 내지는 구별성을 나타낸다(Lane). 예수께서는 인간이셨으나 인간과는 달
리 흠이 없으시며(9:14) 지상의 성막에서 제사드리는 대제사장과 같이 자신의 죄를 위
해 제사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었다(7:27). 따라서 본절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
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인간들처럼 시험에 넘어진 것
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극복하심으로 범죄하지 않으셨으며 시험을 인간과 동일하게
받으심으로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시험의 어려움을 낱낱이 아심을 나타낸다.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 '때를 따
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이론'(* )은 '좋은' 혹은 '옳게'를 뜻하는
'유'(* )와 '시기'를 뜻하는 '카이로스'(* )가 합쳐진 합성어로서 '적절한
시기'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하여 수시로 죄의 유혹에 넘어
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본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
의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때를 아실 뿐만 아니라 시기 적절하게 베풀어
주심을 나타낸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보좌'의 헬라어 '드로노'(* )
는 '왕의 보좌'를 뜻하는 말로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나 '그리스도의 보좌'
(1:3,8)를 나타낸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 사용되었다. 이 '은혜의 보좌'
는 하나님이 현존해 계시는 장소로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거하시는 상징적 장소인 성
막 안의 속죄소와 연관된다(9:5;출25:21,Bruce). 대제사장들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에 나아갈 수 있었으며 속죄의 행위가 받아들여졌을 때 지성소 안에
있는 그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시은소(施恩所)가
되었다(9:5;레16:2-34). 그러나 본절에서 저자가 말하는 '은혜의 보좌'는 더이상 모
세가 전해준 율법적인 속죄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우편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 좌정해 계신
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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