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3장
=====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 이는 연속적으로 기록된 다섯 번의 충돌 기사
중 마지막 사건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마가는 시기(時期)나 지리적 위치
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는 단순히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서 사용된 또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란 2장의 직접적인
반복을 일컫지 않는다. 다만 내용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가가 의도적으로 붙인
연결구라 할 수 있다. 한편 본구절은 1:21, 39에서와 같이 예수가 회당에 들어가셨음
을 평범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같은 묘사를 통해 본구절은 예수가 자주 안식
일에 회당에 가시는 분이심을 은연중에 시사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본
문은 어떤 안식일에 만난 특별한 사건이 이야기되고 있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야 옳을 것이다(눅 4:16 주석 참조).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 여기서 손 마른 상태를 묘사한 헬라어 '엑세람메넨'(*
)은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서 이는 그의 신체 장애가 선천적인 것
이기보다 후천적인 것으로, 어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근육이 마비되고 손이 말라 버
려 활동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Robertson, Vincent). 한편 누가는
힘의 상징인 그의 오른 손이 마른 것이라 표현함으로써(눅 6:6) 그 처지가 절박했던
사실을 더욱 세밀히 묘사해 주고 있다. 혹자는 이것을 중풍병이라 보기도 한다(Donald
W. Burdick). 어쨌든 말라 비틀어진 이 손은 결국 그의 삶의 위축과 장애 상태
(Gebrauchsun fahigkeit)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제
롬(Jerome)이 언급한 바, 나사렛파(the Nazarenes)와 에비온파(the Ebionites)에서 쓰
는 묵시 복음서(Apocryphal Gospel)와 외경 히브리 복음서(Hebraerevangelium)에는 이
병자가 미장이로서 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사람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자 자신이 수치스럽게 구걸하지 않도록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줄 것을 호
소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병자의 처지가 그렇게 다급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 단지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안식일 개념이 과연 어떠
한 것인가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3: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 마가는 여기에 등장하는 반대편 사람들의 신분을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마가가 막연하게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그들의 정
체는 분명하다. 6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언급되고, 평행 구절인 눅 6:7에서는 '서기관
과 바리새인들'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예수께서는 이미 율법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
았을 때 비정통적인 언행을 일삼고 있었고, 특히 안식일 규정에 대한 매우 위험한 교
훈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번 안식일 논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예수에
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에게 있었으므로 큰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
런데 이제 예수가 안식일 규정을 직접 파기하기 직전 상황에 있었으므로 서기관과 바
리새인들은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수의 행동 거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의 허물을 찾으려고 눈에 빛을 내고 있던 그들의 목적 의식에 대해
'송사하려 하여'(a reason to accuse, NIV)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마 12:10;눅
6:7). 이는 결국 그 적대자들이 예수를 고발하기로 이미 작정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
다. 사실 그 당시 회당은 지방 법정 역할까지도 수행하던 곳이었다는 점에서(마
12:10) 예수의 회당 안(內) 치유 사역은 어쩌면 상당히 불리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안식일에...고치시는가 엿보거늘 - '엿보거늘'(* , 파레테룬)은
'지켜보다', '주시하다'는 뜻인 '파라테레오'(* )의 미완료 과거 시
제로서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고소거리를 찾기 위해 계속적으로 예수 주변에 머물면서
적의에 찬 눈으로 면밀(綿密)히 바라보고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눅 14:1;20:20). 사실
당시 안식일 규정에는 매우 세밀한 조항까지 만들어 가며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고 있
던 터였다. 한 가지 실례로써 어떤 사람 위에 집이 무너질 경우 생명이 위협을 받으므
로 구조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 밑에 깔린 자가 이미 죽은 것이 판명
되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 구조 작업이 연기되어야만 했을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그 '손 마른 자'는 긴급한 생명 구조가 필요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
사역은 부당한 것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
시는가 엿보거늘'이란 말씀으로 보아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실 능력을 가
지셨음을 깨닫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관심은 '할 수 있는가'에 있지 않고 '할 것
인가'에 있었다(Gnilka).
=====3:3
예수께서...일어서라 하시고 - 예수께서는 마치 적대자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
듯이 병자에게 '한가운데 일어서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나 이 요구는 안식일의 참의미
를 주위에 앉은 모든 사람들에게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다. 실로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
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찬 창조 사역을 기리고 또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거룩한 날
이다(창 2:2;출 16:23;20:8-11). 바로 이날에 지금껏 하나님의 창조 원형에서 어그러
진 불구의 몸으로 고생하며 참평안을 몰랐던 손 마른 사람에게 온전한 몸으로 되돌려
주는 것처럼 안식일을 참되게 보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특별히 본 기적의 시위적인
(demonstrative) 성격은 2:1-12에 제시된 중풍병자 치유 사역을 연상시켜 주며, 동시
에 은연중에 예수의 안식을 규정 파기를 기대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던 적대자들의 악의
에 찬 행동에 크나큰 충격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정 예수는 당신의 적대자들이
가만히 엿보던 비겁함과는 대조적으로 그 손 마른 자를 일으켜서 한 가운데 나가게 하
셨다. 그리하여 당신의 초월적인 권능을 공개적으로 제시하심으로써 당신이야말로 참
된 의원이요 오실 메시야이심을 강력히 내비치셨다.
=====3:4
안식일에...어느 것이 옳으냐 - 당신의 고소를 전제한 적대자들의 예민한 촉각을
향해 예수께서는 병행 구조로 된 이중적인 질문으로 그들의 불타오르는 적개심에 오히
려 도전하셨다. 한편 이 같은 예수의 질문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무엇이 요청되는가
에 대한 필요성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다(Donald W. Burdick). 실로 인간에게 궁극적으
로 유익을 제공하고 생명을 보존하게 하는 일은 그것이 곧 최상의 선(Summum bonum)이
요, 타인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더 나아가 법조문에 얽
매여 자신의 무관심을 합리화하는 것은 그것이 곧 악(惡)인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을 돕는 선한 행위를 생명을 구하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심으로써 안식일에
그러한 일들이 허락될 수 있다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하다고 간주하심으로써 적대자들의 견해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이렇게 인간을 위해 정열적으로 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지한
노력을 단순히 도덕적인 선행으로 평가 절하(平價切下)해서는 안 된다. 진정 예수의
이 같은 노력은 왜곡된 진리를 바로잡고 인생들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허락하시기 위한
신적(神的)인 사랑의 행위인 것이다. 한편 본문에 제시된 반립(反立)명제를 요약하면
(1) 살인 행위와 곤궁에 빠진 자를 구하려 하지 않는 행위는 별 차이가 없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Calvin). 실로 선행을 거부하는 것은 곧 살인과 같은 악행을 간접 조장하
는 것이다(약 4:17). (2)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구하는 것, 즉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
이지 6절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살인 음모를 꾸미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사악한 마음을 간파하시고 본문의 말씀을 하셨을 수도 있다. (3) 여기에
는 사단의 음모를 멸하시는 예수의 사명(使命)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다. 병과 상처는
궁극적으로 사단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멸하러 오셨다. 한편 사단은 1주일 내내
악을 행하기 때문에 다른 엿새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에도 사단과의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T. W. Manson).
저희가 잠잠하거늘(* , 호이 데 에시오폰) - 이는 3인칭
미완료 시상으로 예수의 적대자들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한 채 계속 머뭇거리고 있
었음을 보여 준다(욥 5:16;시 63:11;행 4:14;딛 2:8;벧전 2:15). 실로 그들은 자신들
이 지닌 형식주의적 율법관에도 자신이 없었을 뿐 아니라 참 진리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는 무기력한 종교인들이었던 것이다.
=====3:5
저희 마음의 완악(頑惡)함을 근심하사 - 여기서 '완악함'(* , 포로세
이)이란 마치 대리석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완고한 마음 상태를 일컫는다. 진정 유대인
의 개념으로 볼 때 '마음'은 인간의 지.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의 좌소로서 마
음이 굳어버리면 예수가 전하고 보여 주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올바른
행동을 할 수도 없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완고함을 목도하시고 '근심하셨다'. 여기
'근심하사'(* , 쉴뤼푸메노스)란 '함께'란 뜻의 '쉰'(*
)과 '걱정하다'는 뜻의 '뤼페오'(* )의 합성어로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
서 함께 염려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의미한다. 특별히 이 '뤼페오'는 현재 시상을
이루고 있어 예수의 근심하시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인
간의 완악함으로 인한 무지(無知)를 애끓는 심령으로 바라보시는 예수의 이 같은 모습
은 바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한계와 아픔에 함께
동참하시기를 원하시는 예수의 뜨거운 인간애(人間愛)를 보여 준다.
노하심으로...둘러보시고 - 여기 '노하심으로'(* , 메트 오르게스)
란 마치 이글거리는 눈으로 보듯이 매우 분노하신 상태를 암시한다. 이것이 바로 마가
의 복음서가 지닌 특징이다. 즉 마가는 전혀 숨김 없이 예수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10:14). 사실 예수께서 노하셨다는 표현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1:41). 그런데 그가 노하신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감정에 상처
를 받았기 때문에 표현된 적은 결코 없다. 이 '분노'는 곧 부정과 부패에 대한 정의의
분노 곧 의분(義憤)으로서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기본 덕목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과 조화를 이룬다(Grant). 실로 예수는 당신의 적대자들이 지닌 그릇된 마음, 죄악에
가득찬 눈길에 분노를 터뜨리셨지만 그 영혼에 대해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근심해 주셨
던 것이다. 한편 '둘러 보시고'(* , 페리블렙사메노스)는
주로 많은 목격자들이 있음을 보여 줄 때 사용된 용어로(34절;5:32;9:8;10:23;11:11)
순간적으로 쭉 한번 둘러보셨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는 곧 예수의 분노의 대상이
주위 많은 사람들이었음을 간접 시사해 주고 있다.
네 손을 내밀라...회복되었더라 -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시고자 하셨다(4절).
그리하여 병자에게 명령하셨고 그 병자는 즉시 순종함으로써 완전한 회복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때 예수는 오직 '말씀'으로 그 능력을 행사하셨다. 이 '말씀'은 곧 당신께
서 친히 태초에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의 그 능력과 동일한 능력을 지닌 것이다(요
1:1-3). 따라서 예수의 그 말씀 한마디는 그 어떤 비뚤어지고 파괴된 것이라 할지라도
능히 원래의 모습으로 온전케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능력은
예수의 명령에 오직 순종으로, 오직 신앙으로 대답하는 자에게만 창조 원형으로의 완
전함을 제공한다.
=====3:6
바리새인들이...헤롯당과 함께 - 병고침의 결과는 놀람도 환호도 아니고 오히려 적
대감을 증대시켰을 뿐이다(H. Van der Loos, The Miracle of Jesus, p. 438). 바리새
인들은 이제 헤롯당과 함께 손을 잡고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했다. 헤롯당은 종교적 집
단이기보다 해롯가문에 정치적으로 봉사하는 정치적 당파였다. 즉 헤롯당은 갈릴리를
관할하던 헤롯 안디바를 중심으로 하여 헤롯 왕가의 부흥을 꾀한 집단으로서 사회. 종
교적 기존 질서와 법률의 고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Grant, Taylor). 그리고 그들
은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로마 제국의 지배에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소위
민족적으로 비애국적 집단이었다. 이에 비해 철저한 애국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외
세를 철저히 배격하는 보수주의자들인 관계로, 헤롯당과는 평소에도 원수처럼 지내던
사이로서 양자간의 동맹(同盟)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자
신들의 기득권과 기존 질서를 와해시킬 위험성이 다분한 예수 제거에 있어서만은 생각
이 일치함으로써 참으로 어색한 동맹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
가 갈릴리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갈릴리를 관할하던 헤롯 안디바 추종자들과의 제휴를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 바리새인들은 조금 전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에 대한 예수의 질문에 대해 예수를 안식일 파기자(破棄者)로 단죄하고(출 31:14)
'어떻게 죽일꼬'하는 사악한 답변을 세속적 집단(헤롯당)과 함께 진지하게 의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종교와 정치가 결합할 때 생겨나는 필연적인 발상이다. 실로 참진
리에 대한 세속 집단의 반응은 이처럼 항상 진리 파괴적 성향을 띠지만 겸손한 영혼의
반응은 항상 자기 파괴(자기 부인)적 경향을 띠게 된다(행 2:37). 어쨌든 이로써 예수
의 적대 세력은 노골적으로 예수를 처형키 위한 계획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3:7
예수께서...바다로 물러가시니 - 왜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셨는가 ? 마가
는 그 이유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마 12:15에 헬라어 '그누스'(*
, '아시고', 즉 예수께서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에 대하여 아시고)라는 말
이 사용된 것을 볼 때 예수께서 계셨던 곳(가버나움)에서 떠나신 이유는 유대 종교 지
도자들이 자신을 잡아 죽이기로 결정한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죽음의 순간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다 어느 한적한 곳으
로 물러가셨던 것이다(6:31, 46;7:24, 31;9:2;10:1;14:32). 그러나 거기서 예수께서는
또 다시 무리들을 만나게 되었다.
=====3:8
유대와...시돈 근처에서...나아오는지라 - 예수께서 몰려들었던 무리들은 가버나움
근방에서뿐 아니라 남쪽 지방(예루살렘, 이두매), 동쪽 지방(요단강 건너편), 북서쪽
지방(두로와 시돈) 등 온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마가가 여러 지방 이름을 여기서 언급
한 것은 팔레스틴 전역에서 무리들이 예수께 나아왔음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이에 대
해 슈바이쩌(Schweizer)는 '예수께서 활동하신 곳이 갈릴리(1-6장), 두로, 시돈, 데가
볼리(7장)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과 예루살렘으로 언급된 것으로 보아 마가복음의 지리
적 범위의 윤곽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 여기에는 예수께서 직접 활동하시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두매 곧 헤브론 남쪽 지역이다. 이곳에 언급
되어 있는 지명 가운데 몇몇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자. 이두매 지역은 유대 남쪽 지
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이두매'(* )는 구약 '에돔'(* )의
헬라 음역이다. 에돔은 본래 요단.아르바의 동쪽 모압 남쪽의 산지를 차지하고 있었으
나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이후 광야의 아랍족속의 세력에 눌려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후자의 지역이 '이두매'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다 마카비는 이두
매인들을 공략하여 여러 번 성공하였다. 그 후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가 통치
할 무렵에 이두매인들은 유대교(Judaism)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그
리스도 당시에는 헤브론 주변 지역을 모두 이두매에 포함시켰다. 헤롯 대왕이 바로 이
이두매 출신이었는데(마 2:1), 그의 여러 아들들은 유대의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
을 하였던 인물들이었다. 한편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명은 사실상 팔레스틴의 북서쪽
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또 '요단 건너편'이라는 말은 갈릴리와 같이 헤롯 안디
바의 통치름 받던 베레아와 데가볼리 지방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Wessel).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 여기서 '그의 하신'에 해당하는 원어 '에포이에이'
(* )는 미완료 능동태로서 예수께서 계속적으로 행하신 수 많은 이적과 사
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듣고'의 원어 '아쿠온테스'(* )는 현재 분
사 능동태로서 지속적으로 들어오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께 모여든 무리
들은 예수의 신비한 사역을 수없이 들어왔으며 그 소문으로 인해 마음이 움직였던 것
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지니는 역동적(力動的) 특성이다. 복음의 소문은 인습의 장
벽과 지역의 장벽을 넘고 또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롬 10:15-18;히
4:12). 한편 이때 예수께 모여든 무리들은 어느 한정된 시점에 급히 모여 들었다기보
다 오히려 꾸준히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모여들었다고 보는 것이 좋다.
=====3:9
예수께서...면키 위하여 - 오직 마가만이 예수께서 배에 오르신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물론 예수께서 배에 오르신 목적은 무리들에게 밀리는 것을 면키 위함
이었다. 실로 예수를 향하여 육신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우성치는 무리들, 그들
은 아마도 예수께 접촉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으로만 여겼을 것이다. 예수께
서는 이같이 1차원적인 무리들의 심성에도 구애치 않으시고 당신의 복음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필요도 만족시켜 주셨다(마 4:23). 즉 예수는 무리들의 생각과 기대
를 초월하여 역사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께서 무리를 가르치기 위하
여 본문과 같은 이러한 방법을 취하신 것을 말하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자주 이 방법을
사용하셨다(마 14:22;요 6:15-25).
작은 배를 등대(等待)하도록(*
, 히나 프로이아리온 프로스카르테레 아우토) - 먼저 '작은 배'란 몇명밖
에 탈 수 없는 조그마한 보트를 가리킨다. 그리고 '등대하도록'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카르테레'는 '꾸준히 시중들다', '충성하다'는 뜻의 원형 '프로스카르테레오'
(* )의 가정법 현재형으로 사용되었으며 '...을 위해 항상 대
기하다', '집착하다', '지속적으로 맡은 일을 수행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즉 이
표현은 제자들의 성실하고도 발 빠른 헌신과 봉사를 예감케 해준다. 실로 그들은 예수
께서 필요로 하실 때, 언제든지 움직일 준비를 갖추고 그 준비한 배를 해변 가까이 놓
아 두었을 것이다. 특별히 그들이 어부 출신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능수 능란한 준
비 작업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10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 당시에 무리들은 예수를 만지는 행위를 통하여 병고침
을 받으려고 너도나도 그를 만지고자 밀어댔다. 마치 그 무리들은 예수를 기적을 행하
는 자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은
혜를 베풀어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마 9:20-22;14:34-36;눅 6:19).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 호소이 에이콘
마스티가스) - '병'(diseases, NIV)에 해당하는 '마스티가스'는 원형 '마스틱스'(*
)의 복수 목적격의 형태로 사용되었으며, '채찍', '고문'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채찍질(욥 21:9)이나 징벌(시
89:32)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데, 비유적인 용법으로 '병'이란 의미를 나타내는데 사용
되기도 한다. 이는 '병'이 하나님의 채찍을 맞거나 징벌을 받아 생긴다는 사상을 반영
한 것이기도 하다. 비유적인 용법으로 본 구절의 이 단어는 예수께서 고쳐 주신 여러
병들로 특별히 매우 만성적이거나 치명적인 질병을 가리킨다(눅 7:21). 5:29, 34에서
도 혈루병 걸린 여인의 특수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한편 그 당시 유대인들
은 병을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 안에 귀신의 권세가 활
동하고 있다고 보며, 또 간혹 죄와 병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마 12:22). 그러나
인과 응보(因果應報)를 초월하시는 예수께서는 그 병의 원인이 어떠하든간에 그 모든
소원하는 자들에게 치유의 용서를 베푸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류의 구속자요 의원으
로서 병자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병을 치료하신다.
핍근(逼近)히 함이더라(* , 에피피프테인 아우토) - '핍
근히'를 뜻하는 '에피피프테인'은 '...에 떨어지다', '몸을 던지다', '달려들다' 등의
뜻인 원형 '에피피프토'(* )의 부정사 현재형으로서 저돌적(猪突的)으
로 달려드는 무리들의 모습을 현장감 있게 묘사해 주고 있다. 즉 병자들이 위험한 정
도로 예수에게 몸을 던지고, 달려드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적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단지 각자가 자신의 병 때문에 예수의 치료를 받고자 맹렬하게 애쓸 뿐
이었다.
=====3:11
더러운 귀신들도...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 여기서 예수는 또다시 귀신들린
자들과 마주친다(1:23, 24, 34). 그 무리들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귀신들은 예수가 누
구인지 알았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1:1 주석 참조). 즉 예수의 메시야성
을 알고 소리친 귀신들의 외침은 '자신들을 해치지 말라는 쓸데없는 호소'(Wessel)라
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덧붙여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예수가 누구인
지 알아 본 귀신들의 이러한 외침은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의 정확한 이름이나 인격
을 잘 아는 것이 그를 지배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 볼 때(Lane), 자기들을 능
히 제어하실 수 었는 그분의 능력을 어떻게든 없애보자는 의도에서 나온 외침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귀신들이 예수를 알아 보았다는 이 사실은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당시 사람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였어도 영적 존재인 귀신들이 예수를
알아 보았으니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1:24;마 8:29;눅 4:41;행 19:15).
둘째, 그러나 귀신들이 예수를 알았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단의 수하(手下)로서 끊임없이 성도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장차
멸망의 심판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마 25:41;계 20:10).
=====3:12
예수께서...많이 경계하시니라 - 본문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많이'(* ,
폴라)란 부사는 예수의 꾸짖음이 지닌 엄중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예
수께서는 귀신들을 대하실 때마다 예외없이 타협이나 부드러운 청원의 입장에서가 아
니라 꾸짖고 징책(懲責)하시는 입장에서 그들을 상대하신다. 한편 위의 구절에서 '하
나님의 아들'(1:1)이라는 표현은 비록 예수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는 원수인 귀신들에
의하여 고백되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예수께 주어진 매우 정확한 이름이다. 그러나 예
수께서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 드러내야 할 때가 오지도 않았고 귀신들이 자신
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귀신들의 외침을 저지하였던
것이다(1:43 주석 참조).
=====3:13
산에 오르사(* , 아나바이네이 에이스 토
오로스) - 원문을 볼 때 예수께서 산에(갈릴리 호수 근방의 구릉지대로 추정) 오르시
는 장면을 현재 직설법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마가 특유의 생동감과 역사성이 넘
치는 표현 기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전승에 의하면 이곳은 '하텐산'(Mt.
Hatten)이라고도 하고 가버나움 북부 지역의 벌판을 가리킨다고도 하나 어느 산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모세의 시내 산 사건(출 19:20), 구약의 시온(호렙) 산에 대한
빈번한 언급(왕상 19:8), 산상 수훈, 변화산 사건 등 중요한 성경적 사건이 산에서 일
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산이 인간에게 엄숙하고 고요한 심성을
마련해 주고 또 절대자에 대한 외경을 일깨워 주는 영성(靈性)의 훌륭한 매개체였기
때문이다. 누가는 이때 예수께서 산에 오르신 이유를 기도하려 오르셨다고 함으로써
(눅 6:12) 이 같은 사상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자기의 원하는 자들 -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외적 조건이나 그들 각자의 열정적인
자원 의사에 따라 당신의 12제자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권위와 뜻과 계
획에 따라 그들을 선택하여 부르신 것이다. 이는 예정 교리(doctrine of
predestination), 선택 교리의 근간이 되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소명은 오로지 원하
시는 그분의 의지에 따라 되어 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
적인 소명에는 인간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동의가 요청되기는 하나 그것은 부차적인
조건에 불과하다.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 눅 6:12에는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예수께서 밤새도록 기
도하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는 모든 것을 기도를 통해, 즉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
해 해결하셨다(14:32). 한편 예수의 부름에 대해 제자들은 어떤 주저없이 즉각적으로
순응하였다(1:18, 20;2:14). 이제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의 모든 관심과 소망을 접어두
고 오직 예수의 삶과 뜻을 절대 헌신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3:14,15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 '열 둘'이라는 숫자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열 둘'은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궁극적
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마 19:28;눅 22:30). 그런 점
에서 그들 12명의 제자들은 새 이스라엘의 보좌에 오를 12족장과 같은 영광을 얻었음
이 분명하다(계 21:14, 15). 사실 앗시리아(B.C. 722)와 바벨론(B.C. 586)에 의해 이
스라엘이 멸망한 이래 현재의 이스라엘은 두 지파 내지 두 지파 반으로 만 구성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특히 이 12제자 선택은 이스라엘이 종말의 때 곧 메시야 시대에 열
두 지파의 백성으로 회복되고 완성되리라는 예언서와 묵시 문학에 터잡은 기대와 관련
되었다고 볼 수 있다(사 11:11, 16;27:12;35:8-10;49:22;60:4, 9;66:20;겔 39:27;미
7:12 등). 그렇다면 열 두 제자는 전체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요구를 상징할 뿐 아
니라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그의 약속을 상징하기도 한다. 마가는 열 둘의
종말론적 기능을 역사적인 과제로 확대시킴으로써 그런 이해를 받아들였다. 이 역사적
과제는 분명히 예수의 일을 지속시키는 것이지만, 열 둘이 구분에 의해 파송되고 또한
예수의 뒤를 이어 교회의 중추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예수의 일과 구별된
다(Gnilka). 한편 마가는 이 선택된 제자들을 대개 '열 둘'이라 칭한데 비해(16
절;4:10;6:7;9:35-헬라어 원문에는 '열 둘'로 묘사되었으나 개역 성경은 이를 '열 두
제자'로 번역하였다.) 마태는 '열 두 사도'(마 10:2) 또는 '열 두 제자'(마
10:1;11:1;20:17)로 표현하였다. 여하튼 마가는 이 '열 둘'이라는 칭호를 통해 그들을
단순히 예수를 좇는 무리들과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세우셨으니'(*
, 에포이에센)란 직역하면 '만드셨으니'로서 이를 근거로 본 구절을 '창조하
셨으니'로 번역하기도 한다(Lohmeyer). 즉 이 12제자 선택은 예수의 구속사적 관점에
서 새로운 역사적 실체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Taylor, Grant). 물론 나름
대로 의미있는 번역이기는 하지만 본 구절은 단순히 열 둘을 '임명하셨으니'로 번역하
여 예수께서 12제자를 공식적으로 임명하셨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 열 두 제자가 세워진
목적은 세 가지였다. 특별히 본문에서 목적 의식을 분명히 드러내는 헬라어 접속사
'히나'(* , '...하기 위해')의 2회 반복적 사용은 12제자 선택에 있어서 예수께
서 확실한 목적을 두시고 행하였음을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둘째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세째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실' 목적이었다. 실로 그 열 두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으
며 살아가야 했다. 즉 그들은 예수와 함께 살고 그와 대화하며 그에게 배워야 했다.
마가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제자들을 훈련시키는데 할애하셨다
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의 훈련은 예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보냄을 받아야 했다(6:7). 즉 그들은 보냄 받은 자, 곧 '사도'(*
, 아포스톨로스)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수행해야 했다. 또한 제자들의 사역은
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었다. 이 귀신 축출은 원래 예수께서 지니신 권
능으로서(1:26) 이제 사단의 왕국을 몰아내고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부름받은
제자들에게 부여(附與)되고 있는 것이다(마 10:8).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
는 일과 귀신을 쫓는 일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은 사단과 그의 일당들을 멸하시고 당신과 구원받은 자들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완
성하시는 것이다.
=====3:16
이 열 둘을 세우셨으니 - 신약성경에서 제자들의 명단이 기록된 데는 본문 이외에
세 곳이 더 있다(마 10:2-4;눅 6:14-16;행 1:13). 여기에 나타나 있는 12제자의 이름
들은 대부분 네 부분으로 나눠진다. 즉 첫번째 부분은 베드로가 예외 없이 맨 앞에 등
장하고 있으며, 두번째 부분에서는 빌립이, 세번째 부분에서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가 다른 제자들 앞에 등장하고 마지막 부분에는 유다의 이름이 등장한다(사도행전에는
그가 이미 자살한 것으로 묘사되어 그 이름이 생략됨). 한편 마가는 각자의 이름 앞에
접속사 '카이'(* , '그리고')를 삽입하여 연결시킴으로써 이러한 네 부분의 구별
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인상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마 10:2-4 주석 및 강해 그
리고 본장 13-19절의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시몬에게는 베드로 - 이 부분에서는 베드로(반석)란 별명을 얻은 시몬이 맨 처음에
언급된다(마 16:18). 여기서 '베드로'(* )란 이름은 헬라명이며, 요 1:42에
나오듯이 '게바'(* )는 아람명으로서 그 의미는 '반석'이다. 이는 그의 성품
의 강직성(强直性)에서라기보다 교회사적 의미에서 그가 수행해 가야 할 사명과 연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가의 복음서에는 어떤 점에서 시몬이 반석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예수께서도 베드로가 비록 굳건하지 못하고 연약한
인물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미래에 사역하게 될 교회에서 큰 일꾼으로 일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별명을 붙여 주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실로 그는 예수
생전에는 과격하고 또 비겁한 좌충 우돌형의 미성숙한 인격자에 불과했으나 예수의 부
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초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의 탁월한 사명을 완수한
반석같은 일꾼이었다(행 2:14).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그의 역할을 두드러지
게 강조하였다. 그의 역할은 첫 제자로 부름을 받은 데서 시작하여 무덤에서 천사의
위탁(委託)을 받는데까지 이른다(16:7). 한편 위에서 보듯이 그가 문자적으로 반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부활을 친히 목격하고(고전 15:5) 그분에게서 사명을 새롭
게 부여 받은 후(요 21장)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서부터일 것이다(행 2장). 어
쨌든 그는 열 두 제자 가운데, 그리고 위에 서술한 그들의 과제(14, 15절)에 있어서
모범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다.
=====3:17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 요한보다 야고보
가 항상 먼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야고보가 요한의 형인 것 같다. 그렇지만 야고보
는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기 때문에(행 12:2) 그의 형제 요한보다 큰 업
적을 이룰 수는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어부 세베대의 아들이었는데, 세베대는 사업이
번창하여 삯꾼들을 고용할 정도였으며(1:20), 그의 부인 또한 예수의 사역을 적극적으
로 도왔다(마 27:55, 56;눅 8:3). 열 두 제자 중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곁에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나, 세배대의 가족이 대제사장의 집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요
18:15, 16)은 아마도 세배대의 집이 부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
니는 살로메로 추정되는데(15:40;16:1), 예수를 섬기는 그녀의 동기가 순수한 것만은
아니었다(마 20:20, 21). 한편, 이들이 얻은 이름은 '보아너게'라는 이름으로 헬라어
로는 '보아네르게스'(* )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가복음에만 나타나는
이들 형제의 별명이다. 이 단어의 어근(語根)은 분명치 않으나 히브리어 '브네 레게
쉬'(* , '우뢰처럼 쉴새없이 시끄럽게 하는 아들들')에서 온 것 같다. 이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들의 성급하고도 직선적인 성격
때문에(9:38;10:35-37;눅 9:54) 얻게 된 듯하다.
=====3:18
안드레 - '남자다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로서(요 1:40, 41)
갈릴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의 어부였다(1:16-18;마 4:18-18;요 1:44). 그는 세례 요
한의 제자가 되었다가(요 1:35, 4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즉시 그를 따르게 된다(마
4:19, 20). 세례 요한을 따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좇은 안드레의 행동은 세례 요한에
대한 배반이 아니었다. 세례 요한의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앞서 증거하는 진리였
기에 스승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진리에로의 발전이며 본래 추구하던 진리를 좇
은 것이었다.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를 인도하고도 이름의 기록은 베드로가 항상 앞서
는데(요 1:44), 그는 이에 대해 하등의 시기심이나 불만을 갖지 않았다. 안드레는 함
께 동역하는 아량을 가진 형제애의 진수를 보여 주며 지극히 개인적이고 체험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빌립 - '말(馬)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빌립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
(요 1:44-51;12:21)으로 안드레와 나다나엘의 친구였다. 그는 예수께 발견되어 제자에
의 부르심을 받은 즉시로 그를 따르게 된다(요 1:43, 44). 그는 예수를 만난 후 나다
나엘을 찾아가서 그를 주께로 인도한다(요 1:45, 46). 그리고 그는 12사도로 부름을
받은 후에 오병이어(요 6:8-13)의 기적에 앞서서 주께 시험을 받는다(요 6:1-7). 그후
예루살렘 입성 때 헬라인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매개 역할을 하기도 한다(요
12:20-22). 또한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아버지(하나님)를 보여 달라고 주께 요청
하기도 했다(요 14:7-12). 전승에 의하면 히에라 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바돌로매 - '톨마이의 아들'(Son of Tolmai)이라는 뜻이며, 이 이름은 아버지의 이
름을 딴 것이기 때문에 아마 개인적인 다른 이름이 따로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데 요 1:46에 등장한 나다나엘(Nathanael)과 동일 인물이 아닌가 하는데, 그럴만한 적
절한 이유는 (1) 나다나엘은 12제자들과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며(요 21:2), (2)
빌립이 그를 찾아서 예수께 인도했기 때문이다(요 1:43-46). (3) 공관 복음에서 빌립
과 바돌로매는 사도들의 명단에 항상 함께 열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출생지가
역시 갈릴리의 가나(Cana)라는 것은 같은 결론을 뒷받침한다. 만일 사실이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는 나다나엘이란 이름은, 베드로를 지칭하는 시몬(Simon)이
란 이름과 바요나(Bar-Jona)란 의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돌로매와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The Pulpit Commentary). 어쨌든 교회의 한 전승에 따르면 그는
애굽, 인도,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선교 사역을 펼치다가 끝내 순교했다고 전한다.
마태 - 그는 분명 레위와 이명 동인(異名同人)이로서(2:14) 마가는 이에 대해 아무
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한편 마 10:3에서 마태는 사도들의 명단에 있는 자신의 이름
앞에 '세리'라는 형용어구를 덧붙인다. 즉 그는 자기 스스로 자신이 옛날에 온 백성으
로부터 비난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음을 결코 숨김없이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
이 용사받은 죄인의 떳떳함이요, 일꾼된 자의 진실과 겸손이다. 한편 마태라는 말은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의미의 '맛다디아'(Mattathias)의 준말로서, 헬라어로는 '데오
도르'(Theodore)가 된다(Gesenius).
도마 - 도마는 '디두모'(요 21:2)라고도 불리우는데, 디두모는 아람어로 '쌍둥이'
를 의미한다. 그는 그의 이름 때문에 알려지기도 했지만 또한 그의 용기(요 11:16)나
그의 의미 깊은 고백(요 20:28)으로써 더 알려졌다. 실로 그는 의심하는 자의 대명사
인 동시에(요 20:25) 예수를 가장 합리적이고 진지하게 알기를 소원했던 이성적인 신
앙인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어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인도에 선교사로 가서 일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 흔히 '작은 야고
보'로도 불리어졌다(15:40;마 27:56). 이는 아마도 세배대의 아들 곧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 보다 그가 늦게 부름받았거나 나이가 연소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일 것이다.
한편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는 글로바(Cleophas)와 동일인인 것으로 추정되며(15:40;
요 19:25), 그의 부인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도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 자매간으로 여겨진다(Jerome).
다대오 - 어떤 사본에는(Diatessaron Version) '렙바이오스'(* )와
'다대오'가 함께 불려지고 있다(Origen). 이 다대오는 아마도 누가복음의 명단에 나와
있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그의 본명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눅 6:16;행
1:13). 한편 '렙바이오스'와 '다대오'는 어휘상 유사성을 갖고 있다. 즉 '렙바이오스'
는 '심장 깊은 곳', '다대오'는 '가슴'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러한 이름은 아마 그를
배신자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붙여진 것 같다(The Pulpit Commentary).
가나안인 시몬 - 시몬은 '열심당'(the Zealot)이라 불리어졌다. 이러한 별칭은 단
지 그의 종교적인 열성을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가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기 전에 광적인 국수주의자 그룹인 셀롯당(열심당)의 일원임을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좋다. 열심당은 팔레스틴을 점령하고 있던 로마에 폭력
으로 대항하여 싸웠던 유대인들의 애굽 집단이었다.
=====3:19
가룟 유다 - 유다의 성은 '가룟'(Iscariot)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아마 '가룟
(Karioth)이라 불리우는 지방에서 온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가룟(Karioth)
지방은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는 '케리옷 헤즈론'(Kerioth Hezron) 지
방(수 15:25)이거나 모압 땅 케리옷(Kerioth) 지방과 동일시 될 수 있다(렘 48:24).
따라서 그는 12제자 중 유일하게 남쪽 출신의 제자였다고 보겠다. 유다는 예수의 제자
로서 성경에 나타나기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성경에는 단지
제자들의 돈궤를 맡아 회계(會計)를 보고 베다니에서의 향유 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예
수를 배반하고 자살하는 것으로만 유다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우리 주께서
당신의 제자들로 선택하신 12명의 사람들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했던
복음의 밑거름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4명은 어부였고, 또 한 명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
던 세리요, 또 한 사람은 과격한 독립 운동을 벌이던 열심당원이었다. 나머지 6명 제
자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그 열 두 제자들은 모두 평범한
인물들이었다. 즉 그들 가운데는 설교가도, 성경에 대한 전문가도 없었다. 그러나 예
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고 그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게 하였던 사람들이 바로 이 사
람들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12 사도의 명단을 대할 때마다 그들의 위대성이나 탁월한
봉사에 주목하기에 앞서 무엇보다 그들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우고 세계 복음화를 주
도해 가시는 예수의 초월적인 권능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3:20
집에 들어가시니...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 예수는 다시 무리들에게 둘러싸였다.
예수께서 들어가셨던 집은 1:29과 2:1에서 언급된 가버나움에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으로 추정되며 그 집은 예수의 갈릴리 전도 본부 역할을 하였다. 그 집에는 예수의
관심을 얻고 또 예수의 이적을 체험코자하는 무리들이 수없이 몰리는 바람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2:2;5:24;눅 5:1;8:19, 45). 이는 다음 절에 이
어지는 예수의 친속의 힐난(詰難)에 대한 배경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적어도 무리들의
예수께 대한 열심있는 신앙을 은연중에 강조한 것이라 본다.
=====3:21
예수의 친속(親屬)들이 듣고...미쳤다함일러라 - 여기서 '친속들'(*
, 호이 파르 아우투)이란 문자적으로 '그에게 속한 자들', '그 곁에서 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어떻게 보면 '그의 친구들' 또는 '그의 제자들'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31-35절과 연결시켜 볼 때 이는 분명 예수의 '가족들'이다. 즉 예수의
쉴새없는 활동을 심히 염려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던 나사렛의 어머니와 형제들이었다
(Donald W. Burdick).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의 많은 능력을 인하여 크게 소문이 나 식
사할 겨를도 없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예수께 와서 그를 붙들려
했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이 예수를 붙들어 다시 나사렛에 억지로 데려가고자 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일 것이다. 즉 그들은 예수를 육적 양식과 영적 양식을 얻기 위하
여 몰려드는 사람들로부터 빼앗아 갈 의도였던 듯하다. 특히 '붙들러'(take charge
of, NIV)의 헬라어 '크라테사이'(* )라는 동사는 어떤 사람을 체포한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본문의 긴장스런 장면을 더욱 고조시켜 준다(6:17;12:12;14:1)
. 한편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께 그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예수가 과로로 인하여 정신
적으로 타격을 받았을 것, 즉 그가 미쳤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쳤다
함일러라'(* ...* , 엘레곤...엑세스테)란 문자적으로 '정신이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나갔다'는 뜻으로 결국 비정상적 정신 상태, 불안한 정신 상
태를 지적한 말이다. 한편 본문은 주격이 없는 제 2단순 과거 3인칭 복수 형태를 취하
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미친 상태를 풍문으로 전해 들었음을 은연중에 암시한 것이라
볼수 있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당신의 적극적인 헌신 때문에 오히려 가
족 내의 긴장에 직면했다. 심지어 그분의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조차 자신의 아들은
특별한 소명을 위해 운명지워졌다고 익히 들어온 바였음에도 불구하고(눅 1:26-38),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정신적 상태를
의심했고 그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심지어 예수의 형제들은 그를 비웃었다(요
7:2-5). 이것은 분명 예수의 실체를 철저히 오해한 가족들의 관심의 수준을 대변해 줄
뿐 아니라(C. L. Mitton), 근본적으로 메시야이신 예수께 대한 그들의 불신앙을 반증
해 준다(요 7:5). 이처럼 불신앙은 진리를 왜곡, 오해할 뿐 아니라 심지어 진리를 훼
방하고 말살하려 들기까지 한다.
=====3: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 - 아마도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 공회에
서 예수의 언행을 세밀히 살펴 그 범법(犯法) 여부를 알아 보도록 보내진 일종의 종교
감시단이었을 것이다(7:1;마 15:1). 한편 여기서 '내려온'이라고 기록한 것은 예루살
렘이 이스라엘 내에서 종교적, 정치적으로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마가에게 있어서 예
루살렘은 예수를 핍박하고 처형한 참으로 적대적인 도시였다. 그러한 예루살렘에서 급
파된 서기관들(7:1 주석 참조)은 그야말로 극악한 무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
이다. 한편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은, 예수의 소문이 유대 온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 급기야는 중앙에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
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 적대자들의 비난은 친속
들의 언급에서 어느 정도 암시되었지만 그것과는 엄연히 구별된다. 실로 적대자들은
공개적인 공격을 가하며 예수를 모독했다. 그들의 첫번째 비난은 예수가 바알세불을
'지폈다'(is possessed by, NiV)는 것이다(요 10:20). '바알세불'은 헬라어로는 '베엘
제불'(* )로 표기되며, NIV와 KJV는 '베엘제붑'(Beelzebub)이라 표
기한다. '베엘제붑'은 라틴어 성경(Latin Vulgate)의 표기를 영어식으로 표현한 것이
다. 헬라어 '베엘제불'은 '바알 왕자' 또는 '고귀한 존재 바알'이라는 의미를 나타내
는 가나안 신의 이름인 셈족어 '바알제불'(Baal-Zebul)의 음역이다. 한편 이 말은 '집
주인', '파리들의 주(主)'라는 뜻으로서 모두 제의적(祭儀的)인 의미를 지닌다. 즉
'집 주인'이란 제전(祭典)의 주인을, '파리들의 주'란 귀신의 격하된 신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시기 적절하게 사단에 대한 동의어로서 그 이름을 사
용했다. 즉 유대인들은 이 '바알세불'을 귀신들의 왕 곧 사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거의
고정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곧 예수가 사단이라는 엄청난 모략이
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 비난은 '귀신의 왕을 힘입는다'는 것이었다. '귀신의 왕'
(the prince of demons, NIV)은 어둠의 세력 가운데 최강자, 또는 마귀들의 통치자란
의미로서 결국 사단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마 4:1-11 주제 강해 '사단과 귀신' 참
조). 한편 바알세불이 귀신들의 세계를 통치한다는 사실은 정통 유대교에서는 결코 용
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까닭은 선.악을 무론하고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믿었기 때문이다(욥 1:6-12). 그런데 간혹 구약의 위경이나
쿰란 공동체의 기록들에 따르면 선.악의 세계가 확실히 구분된다는 사실이 발견되곤
한다. 더욱이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수많은 이방 문화와 교류했기 때
문에 이 같은 이원론적 사고를 하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Grant, Taylor). 특히
당시 유대에는 이방에서 주입된 유사치료적 마술(homoopathisch)이 있었는데, 이 마술
에서는 귀신 축출자가 자기에게 예속된 귀신들의 힘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는 새로운 교훈과 지금까지 듣고 보지 못했던 이적을 행하심으로 마치 유
사치료적 마술의 전문가인 것처럼 주술의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Gnilka).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예수는 백성을 미혹하는 자로 오해받을 수밖에 없었다(요
7:20, 21;8:48;10:20). 어쨌든 예루살렘에 급파된 종교 지도자들은 성령의 능력과 하
나님의 인도로써 역사하시는 예수를 오히려 성령의 능력과 완전히 반대되는 바알세불
과 사귀(邪鬼)와 결탁한 자로 매도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그들은
(1) 예수의 메시야직을 모르고 죄를 짓기도 하였지만 (2) 예수의 가르침의 순수성과
순결성을 알고도 자기들의 사악한 정치, 경제적 이권이 침해당할까하여 예수를 고의적
으로 배척한 것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 사역의 동기와 목적, 능력의 근원까지를
고의적으로 모독함으로써 구원의 유일한 성령의 사역을 부인한 셈이므로 결과적으로
구원의 길을 영원히 스스로 막은 셈이 된 것이었다(마 9:1-34;15:14).
=====3:23
예수께서...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 예수께서는 당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감정을 폭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불러모으시고 대면하신 채로 비유를 들어 그
들의 그릇된 생각을 하나하나 깨우치셨다. 한편 여기서 '비유'(Parable)란 예수의 교
수법 가운데 두드러진 한 특징으로서 심오한 진리 옆에 평범하고 친숙한 상황을 나란
히 놓음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에 도움을 주게 하는 것이다. 실로 비유는 하늘
의 의미를 지닌 땅의 이야기로서 비록 이야기의 내용이 땅에 뿌리를 박았으나 하늘을
향해 열려진 창을 가진 집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마 13장 주제 강해 '예수의 비유' 참
조).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 어둠의 세력 가운데 가장 탁월한 존재인
사단은 그의 휘하에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활약하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않는
다. 사단이 사단을 쫓아내는 것은 스스로 분쟁하는 것으로서 자기를 망하게 하는 일이
된다. 그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사단이나 바알세불과는 적대 관계에 있으며(창 3:15), 또한 그들보다 더 강력(强力)하
시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는 귀신들을 만나실 때마다 두려워하거나 주저함 없이 책망
하셨다. 귀신들에 대한 예수의 권능은 특별히 그의 치유 역사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드
러났다. 각 복음서들에서 보듯이 그러한 치료의 사역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
설하고 계시는 것으로 항상 묘사되었다. 그러기에 진정 사단은 이 세상을 완전하게 장
악하지는 못한다. 그는 여러 가지 파괴와 고통과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
는 우리의 삶과 세상의 악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패배는 너무도 자명하
다. 왜냐하면 그들의 왕인 바알세불의 세력을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
애 기간 중 이미 책망하시고 몰아내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그 목덜미를 짓이겨
놓으셨기 때문이다.
=====3:24
만일 나라가...그 나라가 설 수 없고 - 예수는 사단이 사단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
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두 가지 실례를 사용하신다. 분쟁하는 나라는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극히 기초적인 상식이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이 상식에도 못 미치
는 발상으로 예수를 비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나라'(* ,
바실레이아)는 흔히 '왕국'으로 번역하는데, 실로 이 왕국이 건실히 유지되기 위해서
는 그 왕과 신하된 백성이 혼연 일체(渾然一體)가 되어야 함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어느 한 쪽이 불신하고 파괴적 성향을 띠면 그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이 실례에서
예수는 보편 타당한 진리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모든 나라, 모든 공동체들에게 적용
되는 진리요, 예외없이 사단의 나라에도 적용되는 진리인 것이다(눅 11:17;고전
1:10;3:3;11:18).
=====3:25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설 수 없고 - 예수의 보편 타당한 논리는 좀더 구체적이고
도 실감있게 적용된다. 그것은 누구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집안의 분란(紛亂)에 대한
비유이다. 여기서 '집'(* , 오이키아)이란 어떤 건축 구조물을 뜻하지 않고
혈연적인 가족 구성원들의 집합체로서의 집을 말하는 것으로서, 어떤 면에서는 '나라'
라는 집합체보다 더 결속력과 동질성 면에서 뛰어나다 할 것이다. 실로 이 두번째 비
유는 결국 사단의 왕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에 적용되는 것이다. 즉
어떤 단체로 그 자체 내에서 분쟁이 있으면 스스로 망하고 만다(Lenski).
=====3:26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망하느니라 - 24, 25절의 결론구에 해당한다. 요약하면 사
단의 왕국도 역시 분쟁하면 필연적으로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사단의 왕
국은 스스로의 내분으로 인해 멸망할 조짐은 없었고 성경에 기록된 바대로 최후의 심
판 때까지 그 왕국이 지속될 것이었다(요 12:30, 31;살후 2:8). 바로 그런 이유로 예
수의 귀신 축출은 사단의 내분으로 단정할 수 없으며, 오직 사단의 적대자요 심판주로
서의 권세있는 사역에 해당하는 것이다(요 14:30;요일 3:8;계 20:10).
=====3:27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늑탈(勒奪)치 못하리니 - 더 자세한 내용으로 엮어져
있는 눅 11:21, 22과 평행을 이루는 본문은 사 49:24, 25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여
기서 '강한 자'란 막강한 힘을 소유한 약탈자나 도적의 이미지(image)를 제공하는 자
로서 본문에서는 사단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마 12:29). 그렇다면 '강한 자의 세간'
은 사단이 소유하고 관할하는 그 휘하의 마귀들내지는 사단에게 직접적인 고통과 피해
를 입고 있는 존재들을 포괄적으로 일컫는다. 그리고 '강한 자의 결박'이란 사단과 그
휘하의 마귀들을 축출하는 일과 사단의 왕국을 황폐화시키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이
같은 강한 자 결박 장면은 유대 문헌들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계 20:2;외경 에녹서
10:4, 5;레위의 유훈 18:12) 악의 최후 멸망을 기대하게 한다. 한편 본문에 암시된
'그 강한 자를 결박할 자'는 사단의 왕국을 괴멸(壞滅)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건설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다. 실로 예수는 사단을 결박시키고 그 사
단에게 결박당한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병고침과 귀신 축출 등을
통해 이미 점진적으로 사단의 세간을 늑탈해 가고 계신 것이다. 물론 비록 사단이 결
박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최후의 심판 때까지는 긴 사슬에 묶은채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강조하신 바는 (1) 당신은 사단과 결코 동맹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과 (2) 당신은 현실적으로 사단의 세력을 파괴해 가고 계시며, 그렇기에
당신은 사단보다 더 강한 분이시라는 점이다.
=====3: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아멘 레고 휘민)
- '아멘'(진실로)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본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진실하신 품성과 약속
을 보증으로 말씀하시는 공식적이고도 중차대한 메시지를 전하실 때마다 특징적으로
사용하신 권위문(權威文)이다(마태복음 31회, 누가복음 6회, 요한복음 25회, 본서에는
13회 기록됨-8:12;9:1, 41;10:15, 29;11:23;12:43;13:30;14:9, 18, 25, 30).
사람의 모든 죄...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 여기서 '사람'에 해당하는 원문은 '사람
들의 아들들'(* , 토이스 휘오이스 톤
안드르폰)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어 '인자'(人子)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마
12:32와 그 언어적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모든 죄'(* ...
, 판타...타 아마르테마타)는 문자적으로 '모든 죄악된 행
위'를 뜻하며, '훼방'(* , 블라스페미아미)은 '모든 죄'의 한 부
류에 속하는 것으로서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상대방의 일에 적극적인 장애 역할을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같은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개개의 죄악 행위
조차 궁극적으로는 용서를 ('사하심을 얻되'라는 말이 미래 시상임에 유의) 받을 수
있다고 단언하셨다. 이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으로서 예수는 모든 죄
를 용서하시는 사랑과 또 모든 죄를 사하시는 능력을 지니신 인류의 유일한 구속자이
시다.
=====3:29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영원한 죄에 - 이 부분은 성경의 난해 구절들 가운데 하나
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통해 인간의 모든 죄는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3:16). 그럼에도 본문은 '성령을 훼방
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음 몇 가지를 통해
이 난해를 극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모든 죄는 무조건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예
수를 믿고 회개해야만 구원을 얻는 것인데,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결국 삼위 일체되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2) 성부는 구원을 계획
하시고 성자는 구속 사업을 실현하시고 성령은 이를 성도들에게 적용하신다. 따라서
인간은 성령의 감동 감화를 통해 구원받는데, 이를 부인하면 '회개'를 통한 구원의 길
이 영원히 막히게 된다. 즉 '인자'는 모르고 부인할 수 있을지라도 성령의 사역을 부
인하는 것은 고의적(故意的)인 일이고 또 회개를 거부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사
63:10;행 5:3;엡 4:30;살전 5:19). 더 자세한 내용은 마 12:31, 32 주석 및 강해를 참
조하라. 한편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해진다는 이 말씀은 교회 역사상
크나큰 불안과 고통을 야기시켜 왔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
하였는지에 대해 매우 불안해 해왔다. 실로 예수께서 여기서 강조하시고자 한 것은 그
죄의 일시적 경향이 아니라 반복 지속적이고 고의적인 죄악의 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고질적이고 뿌리깊은 영혼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한된 성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마음의
완악함과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그분의 은혜를 비난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라일(Ryle)의 다음과 같은 말
은 큰 위로가 될 것이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가 분명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죄로
인해 마음의 가책을 받는 자들은 결코 그 같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J. C. Ryle,
Expository Thoughts on the Gospels, 2:59). 반면에 실제로 그 같은 죄를 범하는 자
들은 완악한 심령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이 그 같은 범죄자요 또 미래에까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3:30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 본절에 언급된 서기관들의 말 자체가 위에 언급
한 영영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 직접적인 원인이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떤 범죄라 할지라도 회개가 있고 돌이킴이 있을 때에는 분명 하나님의 용서가 따를
것임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본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선행에 대한 예수의
교훈과 또 사단의 왕국이 분열할 때 그 왕국이 패망하리라는 사려깊은 예수의 설명을
듣고서도 오히려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의해 되어진 이적을 모독(冒
瀆)한 것이 곧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편견이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선한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일들을 행하셨다.
그는 불행한 사람들을 악의 세력과 속박에서 자유롭게 해주셨다(마 12:22;눅 11:14).
예수께서는 그 일을 성령의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통하여 행하셨으나
서기관들은 그것을 사단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어쨌든 영원히 용서받
지 못할 죄는 그 사람의 행동의 근거가 되는 심령의 자세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이다.
즉 예수의 진리에로의 인도와 성령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회개는 커녕 깊은 적의와 거
듭되는 의지적 반항을 함으로써 성령을 훼방하는 치명적인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Donald W. Burdick). 이에 대해 미톤(C.L. Mitton)은 말하기를 '당신이 선이라고 분
명히 알고 있는 데도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당신이 편견과 악에 사로잡혀 있
다는 것을 자인한 까닭에,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악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의 완악함(3:5) 때문에 이와 같은 죄악을 범한다'고 했다.
=====3:31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예수를 부르니 - 마가는 다시 21절과 연결하여 예수의
가족에 대하여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가는 서기관들과의 바알세불 논쟁
에 관한 기사를 삽입시킴으로써 위기감(危機感)을 고조시키고 더불어 예수의 가족들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암시하고 있다.
가족들이 예수께서 있는 곳에 도착하였으나 그들은 그가 계신 곳으로 들어가지 못했
다. 그 대신에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시켜 그를 불렀다. 특히 형제들과 그 모친이
언급되어 있으나(본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이 구절 한 군데밖에
없다) 요셉은 언급되어 있지 않은 점이 이채롭다. 아마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었던 것
같다. 한편 '동생들'에 관해서는 6:3 주석을 참조하라.
=====3:32
무리가...어짜오되...밖에서 찾나이다 - 예수께서 들어가 계신 집은 입추(立錐)의
여지없이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무리들은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를 중심으로
빽빽이 둘러 앉아 있었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마
12:47) 본문의 '무리' 대신 어떤 한 사람이 예수께 이야기했다고 기술한다. 이를 종합
해 보면 아마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장면을 지켜보던 한 사람이 바깥 사정을 전해
듣고(31절) 무리를 헤집고 들어와서 예수께 이르러 이야기를 전한 것을 의미할 것이
다. 이러한 두 복음서 간의 차이 이외에도 마가는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마태는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마 12:47)라고 전
하고, 누가는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눅 8:20)라고 각각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
가 발생한 이유는 각 기자의 관심사가 달랐을 뿐 아니라 각 기자들이 지닌 독특한 기
록 방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각 기자들은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함께
보완적으로 조화롭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본 구절에서는 가족들이 현장에
나타나 예수를 계속 찾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예수께서 명확히 알고 계신가의 여
부가 표면상 드러나 있지 않다. 측측하건대 예수께서는 그의 동생들의 불신을 이미 알
고 계셨을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은 다음 절에서 보듯이 예수의 영적 가족에 관한 가르
침에서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순종하기 위해 때로는 가족과
의 관계도 단절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실로 이것은 예수
께서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친히 집이나 가족까지 버리는 복
음에 대한 절대 순종을 주저없이 말씀하시게 된다(10:28-30). 어쨌든 본문에서 예수가
가족들의 면회 요청에 즉각 응하지 못하셨던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Lane). 한편
본절에 언급된 '누이들'이란 용어는 여러 권위 있는 사본들(시내, 바티칸, 에브라임
등)에는 빠져 있다. 아마도 31절과, 본문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마태복음, 누가복음과
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생략된 듯하다. 그러나 이 용어가 생략된다 해도 큰 무리는 없
을 것이다.
=====3: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근본 의도는
인간 관계를 전면 부정해서가 아니다. 예수는 바로 이 기회를 통해 영적 관계의 중요
성을 가르치시고자 하셨을 뿐이다. 실로 예수께서 평가하셨듯이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와의 긴밀한 관계성(복음을 전하고 그 나라를 건설하는 일등)이 지상에 계시는 어머니
와의 관계성(인간적 교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마 6:33). 따라서 예수는 비록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시한 가족들이 당신을 혈연으로서의 끈으로 연결코자 노력하였으
나, 당신은 하늘의 영적 관계성으로 대답하셨던 것이다. 이는 반인륜적(反人倫的) 처
사이기 보다 초인륜적(超人倫的) 처사였다.
=====3:34
둘러보시며...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 여기서도 세밀하고도 생동적인 문장
기법을 사용하는 마가의 특징이 돋보인다. 예수께서는 가장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이
들을 찬찬히 바라보시며 내밀한 감격의 음성으로 '내모친과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다.
추측컨대 이들은 예수의 12제자일 것이다(마 12:49). 특히 이들을 지칭한 것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예수와 함께 있는(14절) 자의 각별한 위치
를 뜻할 것이다. 진정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기준과 제약에도 구애됨 없이 먼
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로 인정된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
고 따르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예수와의 그
깊은 영적 가족 관계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보내 주신
당신의 행위에 대한 저들의 공개적 결단을 기뻐하시고 육친적 관계(肉親的關係) 이상
으로 저들을 예수와 결속시켜 주신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영적 가
족들에서 혈연적 가족들을 제외시켰다고 상상할 필요는 없다.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예수와 성(聖) 가족이 되는 것이다.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 예수의 참된 가족은 비단
열 두 제자만 아니라 '누구든지'(whoever, NIV)될 수 있었다. 이는 구원의 개방성과
영적 가족의 보편성을 일깨워 준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은 한 가지 필연적인 조건을
충족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즉 예수와 친속
관계를 맺게 해주는 핵심 요소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마 12:50;눅
8:21). 한편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하신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고려되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란 과연 어떤 사람인가 ? 라는 점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듣고 받아들이
며, 또한 그분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요 1:21).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
면 예수의 인격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요구에 대한 전폭적(全幅的) 순종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예수와 더불어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인간에게 돌연 나타나고 그 모습
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 순종에 대한 요구에 그 긴박성이 더해진 것이다(Lane).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시면서부터 존재하게 된 새가족에게는 마땅
히 예수께서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보이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순종과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이 주의 부르심에서 보여준 그러한 철저한 순종이 요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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