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4장
=====4:1
다시(* , 파린) - 이는 마가의 현장감 넘치는 문장 비법이 돋보이는
표현이다. 헬라어 '파린'은 '간다', '보낸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하여 다시 그 행위
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또 과거의 어떤 사건이 다시 반복하여 일어날 때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음에 이어 나오는 '바닷가'라는 말과 연결하여
생각할 때 바닷가에서 설교하는 것이 처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2:13에 보면 '바
닷가'에서 무리에게 설교하신 적이 있고, 3:7에는 바다로 물러갔다가 다시 산으로 올
라갔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2:13의 가르침에 이어 '다시' 바닷
가에서 가르치신다는 뜻이다. 3:7의 경우는 가르친다는 말이 없고 단순히 '바다'로 물
러간 것이기 때문에 이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아도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활동하신 현장 묘사라는 점에서는 3:7과 도 깊은 관계가 있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바다'란 갈릴리 호수를 가리킨다.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 여기서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청중을 '큰 무리'(*
, 오클로스 폴뤼스), 곧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무리들이라 표현함으로
써 그 당시의 매우 혼잡했던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공동번역과 새 번역에서는
"군중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 들었기 때문"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큰
무리'라고 한 개역성경의 표현보다 상황 묘사가 더 실감 있다.즉 예수께서는 수많은
청중들에게 밀려 하는 수 없이 배에 오르셨음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상황 묘사는 본
장에서 다루는 여러 비유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숫자의 많음을 통해 당시 예수의
말씀의 권위(權爲)와 그분의 영적 영향력 등이 대단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처럼
참 생명과 진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강한 흡입력이 있다.
바다에 떠 앉으시고 - 마태복음에서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마 13:2)라고 표현한
다. 공동번역 역시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신'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표현이 적절
하다. 즉 예수께서는 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배(3:9) 위에 올라 거기 앉으시고 해변
가에 모인 무리들을 바라보시면서 강론을 시작하셨던 것이다.
=====4:2
예수께서...가르치시니(* , 에디다스켄 아우투스)
- 이는 미완료 과거 시상으로서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계속적으로 가르치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여러가지를 비유로 - 여기서는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가르쳤음을 밝히고 있다.
이절을 장소적 상황 묘사라고 한다면 여기서의 표현읕 방법론적 설명이다. 즉 이때까
지의 가르침은 주로 직설적인 표현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비해 여기서는 우회적으로 혹
은 상징적으로 진리를 제시하는 비유적 방법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사실 본장과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3장에서는 7개의 비유가 사용되었지만 본장에서는 등불의 비유
(21절;눅 8:16)와 자라는 씨앗의 비유(26-29절)가 더 있어 9개의 비유가 사용된다. 더
욱이 마가는 본장 후반부에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34절)라는 말을 덧
붙임으로써 본장이 다루고 있는 비유 이외에도 상당수의 비유들을 계속해서 말씀하셨
음을 시사한다.
가르치시는 중에(* , 엔 테 디다케) - 직역하면 '그 가르
침 가운데서'라는 뜻이다.따라서 이제 예수께서 가르치신 여러 가지 비유 가운데서 몇
가지를 소개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바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여기 소개되지
않은 비유도 있을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다.
=====4:3
들으라(* , 아쿠에테) - 이 말은 '듣는다'(hear), '순종한다'
(obey), '말을 듣는다'(listen), '깨닫는다'(understand)의 뜻인 헬라어 '아쿠오'(*
)의 명령형이다. 여기서는 의미상 '깨닫는다'의 뜻으로 이해하여 '깨달을
지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이러한 표현은 미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고 마가
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문형이다.이러한 어법은 (1)비유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라는
간청을 위엄 있게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이제까지 가르쳐온 방식과는 다른 비
유적 방법이기 때문에 주의를 환기시켜 잘못된 이해가 없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3)이러한 경고형의 명령형은 이제까지 가르쳐 온 예수의 교훈에 대하여
청중들의 이해가 부족했던 점이 암시된다.따라서 오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警告)
일 수도있다.이 말은 9절의 표현,즉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는 표현과 함께 이
경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씨를 뿌리는 자 -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비유의 소재가 씨뿌리는 농부로부터 얻어졌
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형식, 즉 씨뿌리는 자를 소재로 한 문구는 구약성경에서도 많
이 발견된다(욥 4:8;시 126:5;잠 22:8;사 61:3;호 8:7;10:12). 한편 여기서 씨뿌리는
자(farmer, NIV)는 예수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비유의 동기는 당신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와 훈계를 위한 것
임을 알 수 있고 더불어 그 훈계의 주체자가 바로 예수 자신임을 보게 된다. 물론 본
문의 '씨뿌리는 자'를 오늘에 재해석하면 곧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사람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4:4
뿌릴새 더러는 - 본문은 팔레스틴 농부들의 파종(播種) 장면을 연상케 하는 구절로
농부들은 보통 우기(雨期)가 시작되는 10, 11월에 비가 온뒤 밭을 갈게 된다. 그런후
나귀등에 씨를 담은 큰 자루를 싣고 밭에 나아가, 그 씨를 다시 허리춤에 찰 수 있도
록 만든 가죽 주머니에 적당히 옮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이미 기경해 놓은 밭 이랑
을 돌면서 그 씨를 손으로 여기저기 흩뿌리면 다른 사람이 그의 뒤를 따르며 쟁기로
흙을 덮음으로써 파종을 마치게 된다(Fred H. Wight). 따라서 여기서 '뿌릴새'란 정확
히 표현하면 '흩뿌리새'가 된다(창 26:12;레 25:3).
길가(* , 텐호돈) - 길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에서 삶의 자세로
서의 행동 양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이 자주 다녀 단단히 굳어진 길을
가리킨다. 당시 팔레스틴에는 요즈음과 같은 넓고 곧은 도로가 드물었고 대개가 여행
자나 나귀 등이 자주 다님으로써 생겨난 자연적인 오솔길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이
오솔길은 공유(公有)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밭 주위나 혹은 그 밭을 가로질러길
이 날 경우 그 밭주인은 그 길을 남겨두고 개간해야만 했다(2:23;마 12:1;눅 6:1). 한
편 말씀이나 교훈을 듣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비유 중 첫번째가 '길'과 같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사실 길은 땅이 굳고 통행인이 많기 때문에 씨앗을 싹틔어 열매를
맺도록 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땅이다. 누가복음의 평행구는 (눅 8:5)이러한 점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해 '밟히며'가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다. 즉 길에 떨어진 씨앗은 밟히어
못쓰게 된다는 말이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 길가에 떨어진 씨는 흙으로 덮여지지 않고 그대로 방임
되기 때문에 새들의 좋은 먹이감이 되고 만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새의 먹이가 되
는 것은 그 씨 자체의 결함 때문이라기보다 그 씨를 담고 있는 땅의 상태가 문제인 것
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아무에게나 무조건 전한다고 해서 싹트는 것이 아니다. 복음
을 받아들인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뿌리면 도리어 사단의 좋은 먹이
감이 되고 또 복음이 밝히어 모욕을 당하게 된다.
=====4:5,6
흙이 얇은 돌밭에...말랐고 - 여기서도 마태복음과는 평행구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
지만(마 13:5) 누가복음에서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눅 8:6)라고 전혀 다르게 표현하
고 있다. 그러나 본문과 누가의 기록과는 내용면에서 깊은 상관 관계가 있다. 왜냐하
면 본문의 '흙이 얇은 돌밭'이란 돌이 약간 섞여 있는 농토가 아니라 거의 돌로 이뤄
진 밭에 흙이 얇게 덮여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토양은 갈릴리 호수 근방에서 쉽
게 찾을 수 있다. 이런 곳은 수분을 쉽게 취할 수 있고 마치 온실같은 역할을 하기 때
문에 빨리 싹이 트게 된다(Donald W. Burdick). 그러나 연한 뿌리는 더 이상 깊게 박
히지 못하고 거의 지면에 노출되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열에 견디지 못하여 곧 말라 죽
고 만다. 여기에 대해 누가는 '습기가 없어 말랐고'라는 표현을 통해 태양열로 인한
고사(枯死)를 말한 본문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4:7
가시떨기(* , 타스 아칸다스) - 이 말은 '첨단', '뾰족
나온 끝'(apoint)이라는 의미도 있으나 여기서는 가시가 돋은 나무(thorn plant)를 가
리키는 말이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가시덤불'로 번역되어 있는데 본문의 상황
을 이해하는 데는 오히려 이같은 번역이 어울릴 것이다. 팔레스틴에는 밭주위에 이러
한 가시덤불이 많이 자라며 때로는 곡식과 함께 자랄 경우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적
당한 시기에 이 가시떨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주변 곡식은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만
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태복음에서는 가시떨기 '위에'로(마 13:7), 누가복
음은 '...속에'로(눅 8:7) 각각 표현하고 있다. 이는 각각 다른 상황을 표현하기보다
가시 덤불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땅에 씨앗이 뿌려지는 상황을 일컫는 것이라 본다.
사실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의 토양자체는 어쩌면 매우 기름진 곳인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에 가시덤불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운(氣運)을 막으므로(* , 쉬네프닢산) - 이 말은 '함께'라는
뜻의 헬라어 '쉰'(* )이라는 말과 '질식시키다', '억누르다'는 뜻의 '프니고'(*
)라는 말이 결합된 합성어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함께 억눌렀기 때문에
질식하였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공동번역에서는 '숨이 막혀'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
서 '함께 억눌렀다'는 뜻은 가시나무의 여러 줄기들이 힘차게 자라나므로 그 속에 뿌
려진 씨는 공기나 햇빛을 적당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잎이나 가지가 뻗어 나갈 수도
없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숨이 막혀'라는 표현으로 적절히 해석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가시덤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식물의 경우에도 적용
될 수 있는 것이지만 특별히 가시덤불을 소재로 택한 것은 상징적으로 씨앗이 자라날
수 없는 최악의 조건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결실치 못하였고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없다. 이 비유가 단계적으
로 진행되고 있는 점, 즉 첫째는 씨앗이 밟히거나 새의 먹이가 되어 쓸모없게 된 점,
둘째는 싹은 틔었으나 뿌리를 못내린 점, 세째는 자라기는 했으나 열매를 얻지 못했다
는 점으로 보아 다음절(8절) '결실하였으니' 라는 말과 대조되면서도 문맥상 잘 어울
리는 구절로서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의 무가치함을 잘 가르치고 있다.
=====4:8
좋은 땅에 떨어지매 - 여기서 '좋은 땅'은 위의 세 경우의 흠이 모두 제외된, 농부
가 정성껏 경작한 옥토를 가리킨다. 이 땅은 씨앗을 무성하게 자라게 하며 열매를 잘
맺게 한다.
결실하였으니(* , 에디두카르폰) - 이는 미완료 능
동태를 취하고 있어 계속해서 열매를 맺고 있음을 현장감 있게 보여 주고 있다. 이 같
은 사실에서 한 가지 염두(念頭)에 두어야 할 점은 본 비유가 강조하는 바는, 씨가
뿌려진 땅의 종류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때 일어나는 다양한 반응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Lane). 비
록 온갖 역경이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막아선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필코 자라서 궁
극적으로 풍성한 수확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이 본문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
할 점이다. 한편 여기서 '30배, 60배, 100배'라는 숫자의 점진적 증가는 옥토를 만난
씨가 지닌 왕성한 생명력을 더욱 능동적이고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해 주고 있다.
특별히 고대 팔레스틴의 농사법이 상당히 미개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양의 결실은 매우
감격적일 만큼 풍성한 결실인 것이다.
=====4:9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이 비유를 시작할 때 '들으라'라는 경고적 어투로 했던
것처럼 비유를 마치면서도 시작 때처럼 경고적 어투이면서 시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
다. 이러한 표현은 공관복음에서 여러 번 사용된다(23절;마 11:15; 눅 14:35). 이 경
고적 어투는, 비유를 통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어떤 이는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이는 오해하며 잘못 알아듣는 현실을 이미 전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의미에
서 이 경고가 주는 의미는, 첫째 이해하기 위해 주의를 집중해 달라는 촉구이다. 둘째
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적 의미가 담겨있다. 결국 이 두 가지 의미
모두 듣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4:10
홀로 계실 때 - 이 표현은 마태와 누가복음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본절의
상황 설명은 1절의 상황 묘사와는 전혀 다르다. 즉 비유를 가르치기 시작할 때는 사람
이 너무 많아 배 위로 올라가야 할 정도였는데 여기서는 예수께서 홀로 있음을 말하
고 있다. 따라서 이 '때'는 비유를 통한 설교를 마친 후 군중들이 자리를 떠난 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장소는 같은 장소, 즉 배 위가 틀림없다(36절 주석 참조).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들로 더불어 - 비유에 관하여 질문하는 사람들을 가리
킨다. 그런데 미태와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라고만 언급하여(마 13:10;눅 8:9) 진
리 탐구에 대한 제자들의 열의를 은연중에 나타내 주는 동시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영
적 무지를 타인들에게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소극적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는 달
리 마가복음에서만 제자들의 수가 12명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그 외에 비유
를 들었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남아 비유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이 편협하게도 12제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해 주기 위한 본서 기자 마가의 진지한 노력을 넌지시 보여 준 표현이라할 것이
다. 실로 예수께서는 밀의 종교(mystery religion)에서나 볼 수 있는 폐쇄성을 거부하
시고 당신의 진리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진리를 계시해 주기 원하셨다.
비유들을 묻자오니 - 여기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끝난 후에 질문을 하고 있지만
'비유들'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본 비유 이외에는 여러 가지 비유들이 언급되었음
을 암시하고 있다(2절 주석 참조). 한편 이 질문의 내용에 있어서 마태복음에서는 비
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비유의 뜻을 묻는
다. 그리고 본 마가복음은 이 양자 모두를 묻는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것은 제자뿐
만 아니라 다른 청중들까지 모두 비유를 통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을 암시하고 있다. 또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마태의 기록에서 보듯이 제자들이 비유
로 가르친 것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본격적으로 비유만을 통
한 진리 교육이 예수께서 이제까지 가르쳐왔던 방법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설교였기
때문에 생소하게 느꼈을 것이다(2절 주석 참조).
=====4:11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 '비밀'(* ,뮈
스테리온)이라는 말은 복음서에서는 바로 여기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에서만
사용된 말이다(마 13:11; 눅 8:10). 이에 비해 바울서신에는 무려 21번이나 나타나며
계시록에는 4번 쓰였다(계 1:20;10:7;17:5,7). 이 말은 '전수받은 자'란 뜻을 가진 헬
라어 '뮈스테스'(* )와 '폐쇄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뮈에오'(*
)로부터 파생된 말로서 '알려지고 전수되는 것이 폐쇄된'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 용어는 당시 흥행하던 밀의 종교(mystery religion)내에서 외부로 전혀 노출되지
않는 어떤 의식을 통하여 그들만의 비밀한 가르침을 전수하던 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Donald W. Burdick).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 '비밀'은 단지 허락된 몇몇 사람만을
위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비밀은 전에 알려지지 않은 일을 사람들에게 드
러내 보이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즉 이 '비밀'은 모든 사람들을 향
해 선포된다. 그러나 그 비밀을 궁극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앙을 가진 자
들이다.특히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비밀'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더불어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이에 관히 래드(G. E. Ladd)는 말
하기를 '이 비밀은 다니엘서에 예언된다(단 2:44;12:12,13)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
내 세상에 도래하여 사람들 가운데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바, 숨겨진 형태로 진보해 나
가는 것이다' 라고 했다. (A theology of the N.T. p. 94).한편 본문의 '하나님 나라'
에 대해서는 1:15 주석을 참조하라.
외인(外人)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 이 구절을 12절에 붙여 그 이유를 밝
히고 있다. 여기서 '외인'이라는 말은 본절에서 지칭하는 '너희들' 즉 질문한 사람들
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서 불신앙의 완악(玩惡)한 마음을 지닌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것'은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의미를, '비유'(*
, 파라볼레)라는 말은 '수수께끼'(riddle)로서 '풀리지 않는 의문
점'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말은 비밀을 알게 했다는 말과 대칭을 이루어 천국에 대한
비밀이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계속 남아 있게 했다는 말이 된다.
=====4:12
이는 저희로...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 70인역(LXX)에 의한 사 6:9, 10의 자유스런
인용이다. 그런데 히브리 맛소라 사본에는 사 6:9, 10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셈어에 있어서 명령형은 곧 결과를 표현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70인역에서 이사야의 글과 마가가 여기에 인용한
구절과는 뉘앙스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마가는 본문에서 보고 아는 것을
먼저 그리고 듣고 깨닫는 것을 나중에 배치시키지만 사 6:9은 듣고 깨닫지 못하리라는
사실이 먼저 언급된다. 또한 사 6:10의 첫 부분과 같은 강한 표현인 '이 백성의 마음
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는 70인역의 본문에 대해서도 침
묵하고 있으며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는 문구를 변
형시켜 단순히 '돌이켜'(* , 카이 이아소마이 아
우투스),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 카이 아페데 아
우토이스)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을 하는데 있어서 마가는 아람어의 역본
인 탈굼역(The Targum)을 따르고 있다. 이는 마가복음의 신빙성을 보증해 준다. 한편
예수의 이 말씀은 비유의 목적이 믿지 않는 자들(외인)은 진리를 받을 수도 없고 회개
할 수도 없게 하기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씀이 신학적으로 매
우 난해하게 취급되는 이유는 이 내용을 기록한 각 복음서간의 차이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마태는 본문 초두에 사용된 접속사 '히나'(* , '하기 위하여', NIV성경은
모호하게 '히나'를 '이는'<so that>이라고 번역함) 대신에 '호티'(* , '그결과')
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누가는 '메포테'(* , '...하지 않도록')라고 기
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접속사 '히나'의 뜻과 관련하여 본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분분하다. (1) '히나'는 문법상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하기 위하여'
라는 뜻을 갖는데, 이는 마가가 나름대로 목적어적 용법으로 예수의 말씀을 해석해 놓
았을 때의 경우이다. 이에 따르면 이 비유의 목적이 '외인들을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
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2)마가가 원래의 아람말 '데'(* )를 오역하여 '히나'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그 '데'는 '...하기 위하여' (in order that)를 의미하는 것
이 아니라 '...하는 자'(who)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즉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너희에게는 주어졌으나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라고 해석되어야 한다(W. W. Wessel). (3)'히나'는 마태복음의 '호티'(*
)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예수는 비유의 목적을 말씀하
고자 한 것이 아니라 비유의 결과를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 따라서 '히나'는 '...때
문에'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렇게 될 때 본문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한다는 뜻이 된다. 물론 이상의 해석 모두 존중되어야 한
다. 공동번역에서는 이러한 해석들을 통합하여 해석하고 있다. 즉 '외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로 비유로 말하고 그 비유를 알아보고 듣기만 하면 돌아와 용서를 받게 될 것'
이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시험을 치르고 용서를 받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쨌든 본절
말씀을 이해하는 최선의 길은 그저 단순하게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한 가지 이유
가 진리를 '외인(완고한 불신자)에게는' 감추는 것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좀더 적극적인 입장에서 마샬(Marshall)이 언급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비유로 가르치
시는 방법을 통하여 그의 청중들로 하여금 표면적인 이야기를 뚫고 들어와 그 실제적
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유도하셨으며, 동시에 어두운 눈과 둔한 귀를 가진 자가 돌이켜
진리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Commentary on the Luke, p. 323)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표면적으로는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느 것', 즉
완악한 맹목성과 복음의 거부에 관한 정죄 및 그로 인한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선포한
것(Robertson)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록 완고한 불신자에게는 비유가 심판을
지향하는 가리워진 비밀에 속하나 예수께서는 궁극적으로 백성들에게 그같은 심판과
형벌의 메시지를 제공하심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충격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깨달음과
회개를 촉구하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에 대한 좀더 상세한 설명은 마
13:11-15주석을 참조하라.
=====4:13
너희가...알지 못할진대 -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하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의 무지를 가볍게 책망하신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이미 입문
한(11절)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그 의미가 명백하여 깨달음이 있는 자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비유이지 않은가? 만일 이것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찌 더
어려운 비유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하고 실망섞인 책망을 하신 것이다. 한편 이같
은 사실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말하기를 '인간에게 덮여 있는 어두움은 보편적인
것이어서 제자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고 했다.
=====4:14
여기서부터는 3-8절까지의 비유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의 입을 통해서 직접 그 의
미가 해석된다.
뿌리는 자 - 이에 대해 본문에서는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지만 그
는 분명 말씀의 주체이신 그리스도와,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
다.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 마태복음에서는 간접적으로 '씨'가 '천국 말씀'임을 밝히
고 있는데(마 13:19) 비해 누가 복음에서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라고 직접 서술
한다(눅 8:11).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본문이 '뿌린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이라
고 번역되어 있다. 이로써 분명한 것은 비유의 '씨'는 '말씀'을 의미하며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말씀', 곧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다는 확실한 소식인 것이다. 사실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서(11절) 이러한 해석은 적절하다.
한편 본 비유에 있어서 그 강조점은 '말씀을 뿌리는 일'(the sowing of the Word)이었
으나 그 해석에 있어서의 강조점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the reception of the
Word)임에 유의해아 한다(15-20절). 이러한 사실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그 비유의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사실 예수는 이미 당신의 '말씀을 뿌리는 일'에
대한 사람들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의 부정적 측면을 경험하신 바 있다(2, 3장).
=====4:15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 본문은 4절의 중복으로서 매사를 신중하고 세밀
하게 기술하고 있는 마가 기록의 특징이다. 물론 여기서 '길가'란 자신의 능력과 경험
과 선입관과 주의 주장으로 인해 굳어질대로 굳어진 완악한 심령을 가리킨다. 이들에
게는 어떤 영적 감화나 감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들이니(* , 후토이 데 에이신) - 이를 좀더 상
세히 번역하면 '이를테면, 이 사람들은 다음에 나오는 종류의 사람들이다'라는 뜻이
다. 길바닥에 씨앗이 뿌려진 것에 비유되는 사람은 말씀을 들었으나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하고 사단에게 빼앗기는 사람이다.
사단이 즉시 와서 - 여기서 '사단'( , 사타나스)이란 인간의 내면에
흩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빼앗아가는 악의 실체로서, 4절에 언급된 '새들'을 이 사단으
로 보기도 하고(Lenski) 또 사단의 하수인으로 보기도 한다(Donald W. Burdick).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단'이라는 말 대신 사단의 별칭(別稱)이라 할 수 있는 '악한
자'(* , 호 포네로스)로 묘사하고(마 13:19) 누가복음에서는 '마귀'
(* , 호디아볼로스)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초점은 누
가 어떻게 빼앗아 가느냐에 있지 않다. 핵심은 자기에게 들려진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천국의 비밀이 자신에게 주어
졌어도 자기의 영혼의 양식과 신령한 지혜로 만들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비유이
다. 이 의미는 말씀을 듣고 천국의 비밀을 알았으면서도 즉시 자기 삶으로 옮겨 천국
을 이루어가지 못하면 그 말씀은 남의 것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특히 자기 삶으로 옮
기는 결단과 실천성을 강조하는 말이 '즉시'이다. 말씀을 내면 깊숙이 뿌리박지 못하
면 '즉시' 사단이 '와서' 빼앗아 간다.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 - 여기서 '저희에게 뿌리운'은 원어로 완료 수동태 분사형을
취한 단어로서 그들에게 넉넉하고 적절히 뿌려져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본문과 평행
을 이루는 마태복음에서는 '그 마음에 뿌리운'(마 13:19)으로 묘사하여 그 씨앗이 단
지 주변에 뿌려진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뿌려졌음을 암시한다.
=====4:16
본절은 돌밭에 뿌리워진 씨앗에 대한(5절) 해설이다.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 15절과의 차이점이 있다. 15절에서는 말
씀을 들은 사람에 대한 반응이 직접 묘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본절은 15절의 상태보다
좀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수용(受容)하
였음을 밝힌다. 15절이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라면 이 비유는 비록
순간적이라고는 하나 진리에 대한 관심이나 진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는 사람을 묘
사한 것이다. 이는 일시적이나마 신앙 생활에 흥미를 갖고 열심히 교회생활에 몰두하
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다.
=====4: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 뿌리가 성장할 수 없는 돌밭에 뿌리워진 씨
앗을 '그 속에 뿌리가 없어'로 묘사하고 있다. 실로 이런 자들은 그 마음속에 말씀의
씨를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그 말씀이 지속적인 생명력으로 커가 끝내 열매맺을 수 있
도록 하는 원천인 뿌리가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그들의 생명력은 일시적이요 그 본질
은 경박하고 유약하다.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 - 6절에 언급된 태양열이 여기서는
'환난'(* , 드립시스)과 '핍박'(* ,디오그모스)으로 묘사
되었다. 먼저 헬라어 '드립시스'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짓누르는 압박'을, '디오그모
스'는 '뒤에서 바짝 추격하는 듯한 위협'을 의미한다. 결국 이 양자는 외부로부터 오
는 온갖 어려움과 박해를 가리킨다. 실로 천국에 이르는 방법을 따라 살고 진리를 따
라 살때, 외부로부터나 자기 자신 안으로부터 여러 가지 갈등과 유혹이 있게 마련이
다. 또 불의한 세력들이 진리와 정의를 파괴하려고 하면서 공격해 오기도 한다(롬
1:25;2:8;약 3:14;벧후 2:2). 15절의 '사단'을 마태복음에서 '악인들'로 묘사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일치된다. 사단은 천국을 파괴하려는 세력이다. 이러한 환난이나 핍
박을 견디어 이겨내지 못하면 결국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6절에 언급된 '태양'은 이처럼 뿌리가 없는 식물에게는 생장(生長)의 크나큰
장애물로 대두된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리워진 '씨'에게 있어서는 그 생장에 있어서
습기 만큼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태양의 빛과 열기없이는 '씨'
는 결코 푸르게 성장하여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즉 그 '씨'는 '말씀을 인하여'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핍박과 환난('태양')없이는 결단코 풍성한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한다(Lenski).
곧 넘어지는 자요 - 여기서 '넘어진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칸달리조마이'(*
)는 원형 '스칸달론'(* , '동물들을 잡기 위
해 설치한 덫에 있는 막대기 모양의 물건'을 지칭)에서 유래한 현재 시상의 단어로서
결국 계속 그 함정에 빠져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실로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지 않
은 식물은 아무리 그 외모가 화려하고 푸르르다 하더라도 강렬한 태양 앞에 쉬 쓰러지
고 말듯이 신앙에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심령은 환난과 핍박에 견디지 못하고 마치
사냥꾼의 올무에 걸려 더 이상 활동력을 상실한 짐승처럼 죄의 올무, 절망과 좌절의
올무, 온갖 고통의 올무에 걸린 채 더 이상의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딤전 3:7;6:9).
=====4:18,19
가시떨기에...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 - 가시덤불에서 싹을 틔웠으나 가시덤불 때문
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앗의 비유이다. 앞절과의 차이점은, 17절에서는 뿌리가 없어
환난과 핍박이 일어나면 넘어지는 자, 곧 배반자를 말하나(눅 8:13) 여기서는 비록 뿌
리(말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성실성과 이해력)은 있으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욕심으
로 인해 끝내 결실치 못하는 자를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결과적 측면에서 17
절의 경우와 동일하다고 본다. 실로 가시떨기가 자라는 땅은 길가나 돌밭보다 훨씬 뛰
어난 옥토임에 분명하다(7절). 따라서 이곳에 씨앗이 떨어지게 되면 그 씨앗은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되고 또 싹이 돋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성장의 어느 시점에 이
르러 가시로 인해 방해를 받다가 종내 결실치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은 이 가시
를 세경우로 묘사하고 있다. (1)'세상의 염려'이다. 여기 '세상'(*
, 투 아이오노스)은 문자적으로 '그 시대'로서 일정한 기간 내지는 인간에게 부과
된 한 세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의 염려'란 인간의 생명이 끝내 종말을 고하게
될 현세대에 국한된 근심(Lenski), 현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열심과 걱정거리
(Donald W. Burdick),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일어나는 불안(Taylor)등이다(마
6:25, 31;눅 8:14;21:34;고전 7:33).(2)'재리(財利)의 유혹'이다. 재리와 가시를 연결
시킨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그 까닭은 재물은 인간의 영혼을 깊이 찌르는 가시가 되
기 때문이다(The Pulpit Commentary , 딤전 6:10). 이 '재리의 유혹'은 재물이 지
닌 기만성, 곧 재물이 어떤 안식과 자신감 등을 약속하는 듯하나 결국에는 그 소유자
와 기대자로 하여금 허무한 절망에 빠뜨리게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Taylor,
Lenski, Burdick, 마 11:21-23).(3)'기타 욕심'이다. '씨'(말씀)을 자라지 못하게 하
고 질식시켜 그 기운을 막는 모든 장애 요소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혹자(Robertson)
는 '모든 정욕, 모든 갈망, 모든 세속적 쾌락'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본문과 평
행을 이루는 눅 8:14에는 이 말 대신에 '이 생의...일락(逸樂)'이라 표현함으로써 하
나님 나라와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모두 앗아가는 현세 지향적이고 감각적이며 관
능적인 관심과 욕망을 암시하고 있다. 진정 이같은 욕망들은 마치 기운찬 가시떨기처
럼 우리의 영혼과 생활 전영역을 뒤덮음으로써 말씀의 씨의 성장을 철저히 제어해 버
린다.
=====4:20
말씀을 듣고 받아...결실을 하는 자 - 이 비유가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의 경우를
언급한 것으로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의 '결실'에 관한 내용이다. 실로 '씨'(말씀)
가 추구하는 최종 목적은 인간의 심령에 그 씨가 뿌려져 그 인간의 온 인격과 삶을 통
해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다. 이같은 결실을 맺는 사람은 무엇보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 즉 그는 말씀을 경시하지도,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
하지도, 세상의 유혹과 염려에 빠지지도 않고 오직 주어지는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실행하며, 온전히 간직하는 데 힘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나 커다란 결실, 곧 진리와 은혜와 덕이 충만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한편 여기
서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듣고'(* , 아쿠우신, '순종하다','깨닫
다','이해하다'는 뜻도 지님)와 '받아'(* ,파라데콘타이,
'영접하다', '승인하다', '인정하다'는 뜻도 지님) 그리고 '결실을 하는'(*
, 카르포포루신)이라는 말이 모두 현재 시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말씀을 계속적으로 듣고 또 계속적으로 그 말씀을 받아
들여 계속적으로 결실을 한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실로 앞에 언급된(15-19절) 세 종
류의 밭에 비유되는 사람들이 듣고 인정하는 것을 중도에 포기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좋은 땅'의 사람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생명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말씀에 착
념함으로써 끝내 많은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마 13:23;눅 8:15). 여기서 한 가지 주
목할 것은 그 결실이 30배, 60배, 100배 등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는 점이다. 이러한
소출은 그 밭(사람)의 능력보다 오히려 그 씨(말씀)가 지닌 역동적 생명력을 강조한
것이라 본다. 실로 한 인간에게 뿌려진 씨는 그 내부에서 풍성한 성장을 함으로써 회
개와 겸손과 온유함 등의 심령의 변화를 가져오며 그러한 변화는 그 속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타인에게도 옮아가는 것이다. 한편 이 비유는 마태복음의 달
란트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마 25:14-30). 즉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등
의 다양한 숫자 나열을 통해 그 결실의 종류가 다양함을 암시해 준다. 이는 주의 말씀
을 실천하여 천국을 이루어 갈 때 각 사람마다 다양한 형태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결실 각각을 존중해야 한다.
=====4: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 21-25절은 두가지 내용이(21-23, 24-25절) 한 데 어우러진
일종의 삽화 형식의 메시지로서 예수께서 여러 기회들을 통해 말씀하신 내용들이다.
특히 누가복음은 본문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눅 8:16-18), 마태복음은
산상수훈을 근간으로 본문과 연결되고 있다(21절-마 15:15;23절-마 11:15;13:9,43;24
절-마 7:2;25절-마 25:29등). 여기서 특히 강조되는 바는 예수의 가르침에 접한 자의
책임성(責任性)이다. 즉 빛을 받은 자는 그 빛을 타인에게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 오는 것은 - 다른 복음서의 평행구와는 달리 오직 마가만이
'등불'(* , 호뤼크노스)을 '가져 온다'(* , 에르케타이)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등불 앞에 정관사 '호'를 붙이고 있다. 바로 이것이 본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즉 등불 앞에 정관사 '호'가 붙어 '그 등불' 곧 세상에
유일 무이한 등불이신 '오신' 예수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가져 온다'
는 말은 종말론적 사상을 함축한 표현이다. 즉 지금까지 감춰져 왔던 계시를 종말의
시점에 이른 이제 만인에게 알리고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앞에 언급
된 '하나님 나라의 비밀'(11절) 개념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Taylor). 한편 본문에
언급된 '등'은 팔레스틴에서 사용하던 토기로 된 납작한 등잔으로서 그 속에는 감람유
(olive)가 채워지며 그 기름에 심지를 넣고 불을 켜게 된다. 이 등잔은 주인이나 종에
의해 방 안으로 옮겨지며 옮거진 등잔은 주로 기다란 등대 위에 안치되어 주위를 밝게
한다.
말 아래...두려 함이냐 - 부정적인 대답을 유도하는 헬라어 '메티'(* )로
시작되는 본문은 결단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간접적인 명령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은 가루나 곡식을 되는 도량형기구이다. 공동번역에서는 '뒷박'이라고 번역하며 누
가복음의 평행구(눅 8:16)는 등불을 덮는 '그릇'으로 묘사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등불
을 켜지 않을 때 이 그릇으로 등잔을 덮어 두거나, 침상 아래 그 등잔을 내려놓는다고
한다. 어쨌든 이 '말'(bushel)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왜곡, 단절시키게 만드
는 세상적인 부와 이익을 암시한다. 그리고 평상은 침상(공동번역)을 뜻하며 상징적으
로는 세상이 제공하는 평온함과 쾌락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이처럼 '말'과
'평상'으로써 '등불'을 가리우듯이 주께로 받은 복음 곧 빛나는 그 계시를 결코 세상
의 유익과 쾌락으로 덮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이다.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 여기서 '등경'은 등잔을 올려 놓는 받침대로서 가난
한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이것 대신 흙으로 된 바람벽에 돌출구를 만들어 그곳에 등잔
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본 구절의 의도는, 등불을 가져 오는 것은 집 안을 환하게 밝
히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마 5:15 주석 참조) 빛이 가장 잘 퍼져나갈 수 있는 장소인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등경은 상징적으로 복음의 빛을 세상에 널리
전파해야 할 사명을 맡은 교회를 상징한다고 본다(계 1:20). 여기서 등불을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죄악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리의 세계를 건설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참 빛 곧 세상의 유일한 빛이시
다(요 1:9). 둘째로 복음이다. 그 복음의 빛이 세상을 속속히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이 세상 한 가운데 선포하여야 한다(대상 16:23;시 66:16;행 20:24;롬 15:19;
골 1:23).
=====4: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 이 구절을 번역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리
고 이와 비슷한 구절이 마 10:26과 눅 12:2에도 나오지만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눅
8:17이 가장 적절히 본뜻을 밝혀주고 있다고 본다. 이 비유는 '숨긴 것은 언제나 드러
나게 마련이다'는 뜻의 속담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해 아래 모든 사물이 밝히
드러난다는 경험적 상식을 소재로 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는 것
을 말하고 있다. 이 의미는 21절의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다. 즉 (1)빛 아
래서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므로 거짓이나 부정직은 용납될 수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정직한 삶을 촉구하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2)심판 사상과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최후심판의 때에는 모든 감추어졌던 사실들이 다 드러나므로(고후
5:10) 하루하루의 삶에서 자기의 죄를 감추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고 회개하는 삶
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마 25:31-46). (3)'천국의 비밀'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즉 비유가 천국의 비밀에 관한 것이라면(11절 주석 참조) 그 천국의 비밀은 감
추어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밝히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
해 천국의 비밀은 언젠가는 모두 밝혀질 것이라는 말이다. (4)'메시야 비밀' 사상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즉 예수의 활동이 메시야적인 것이었지만 현재 그 사실을
숨기려 한 의도(9:9)에 대한 설명으로 생각된다. 예수의 비밀이 현재는 숨겨져 있으나
언젠가는 밝히 드러 날것이라는 암시와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
의 아들로 확증된 사건에서 그분의 메시야성이 밝히 드러났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예수 재림(* )시에 모든 영광으로 예수를 밝히 드러내실 것이다.
=====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이와 똑같은 구절이 이미 9절에서 언급되었고 같은 의
미의 서두가 3절에서도 언급되었다(3,9절 주석 참조). 여기서도 역시 '내 말은 중요한
말이니 더욱 마음을 써서 그 의미를 깊게 되새겨 보라'는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적 문
구로 생각하면 된다(마 11:15;13:9;눅 14:35).
=====4:24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 누가복음의 평행구는 '너희가 어떻게 듣는
가'(눅 8:18)로 표현한다. 새번역에서는 '너희는 조심하여 들으라'로 번역되어 있고
공동번역되어 있다. 이 말은 23절의 격언구와 비슷하게 반복하여 사용한 경고적 어투
로 보면 된다. 즉 똑바로 들어 비밀을 깨달으라는 촉구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또 더 받으리니 - 이와 비슷한 문구가 마 7:2과
눅 6:38등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두 구절들에서는 주로 타인을 비방하는 일을 삼가하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반해, 21절부터 이어지는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복음을 수
용하는 마음 자세(그릇)에 대한 교훈으로 이해된다. 즉 복음을 들을 때 깊고 넓은 영
적 통찰력으로써 받아들인다면 그 마음 그릇에 풍족히 채워질 정도로 이해될 것이고
계속해서 더 크게 이해될 것이라는 교훈이다. 한편 본 구절을 단지 문자적으로 직역하
면 '너희가 남을 재는 그 그릇의 크기로 너희의 크기가 측정될 것이다'이다. 공동번역
에서는 '너희가 남에게 달아주면 달아주는 만큼 받을 뿐만 아니라 덤까지 얹어 받을
것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전체적인 의미는 남에게 행한 것에 따라 보상되는 응보의
개념, 즉 심는 대로 거둔다는 의미가 짙게 깔려 있다(갈 6:7;고후 9:6). 그러나 앞에
서도 언급했듯이 본문은 사람이 영적 지각력을 갖고서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예수에 관한 진리를 밝히 알게 된다는 사실에 역점을 두고 있다. 실로 각자가
지닌 각각의 그릇(이해력, 지각력 등)에 따라 예수의 생명력 넘치는 말씀을 많이도 받
고 적게도 받을 것이다(고후 9:6).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복음을 수
용하는 데 따른 보상적 응보는 대등한 보상이 아니라 '더 받으리'라는 표현을 덧붙여
보상의 풍부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영적 세계에서의 영적 빈익빈 부익부 현상(現
狀)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마 13:12).
=====4: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격언구로 보인다. 누
가복음의 평행구(눅 8:18)외에도 여러 곳에서 이런 구절이 발견된다(마 13:12;25:29;
눅 19:26). 이 의미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갈래로 할 수 있다. 첫째는 천국의 비밀과 관
련시켜 해석할 수 있다. 즉 천국의 비밀을 알려고 노력하며 애쓰는 자는 더 많은 비밀
을 알게 될것이고 관심을 갖지 않고 듣지도 않는 사람은 알고 있는 것마저도 잃어버리
게 된다는 뜻이다. 둘째는 남에게 베푸는 사람을 베풀수록 더 많이 보상받고 덤까지
받지만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잃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나누는 것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세째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지만 나쁜 땅의 씨앗
은 열매를 못맺는 것처럼 겸손하고 말씀에 성실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풍성한 말씀
의 열매를 맺어 기쁨을 누리지만 반대로 편견과 비뚤어진 마음과 생각을 소유한 자는
오히려 현재 지니고 있는 조그마한 행복까지 빼앗긴다는 심판적 의미로 생각할 수 있
다(사 3:10; 렘 32:19). 물론 본문에서는 천국 복음과 진리에 대한 빈익빈 부익부 현
상을 의미하는 첫번째 견해가 적절하다.
=====4:26
하나님의 나라는...뿌림과 같으니 - 여기서 또다른 비유가 시작되는데 본 비유는
마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그 강조점에 있어서 3-8절의 '씨뿌리는 자
의 비유'와는 다르다. 즉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씨의 성장에 좋은 토질과 풍성한 수확
이 강조되었으나 본 비유에서는 씨앗을 자라게 하며 풍성한 수확을 이루게 하는 신비
로운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한편 이 비유의 제목을 붙이는 데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즉 '몰래 자라는 씨의 비유', '알지 못하게 자라는 씨앗 비유'등이
다. 공통적인 내용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나는 씨앗을 소재로 택하여 인간의 시각
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보이지는않으나 그 역동적 활동력으로 인해 조용히, 점진적으로
성장해 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과 관련시키고 있는 점이다. 한편 이 하나님 나라는 철
저히 현재적이고 영적이라는 데 본 비유의 주안점이 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말씀의
씨를 뿌림으로써 시작되고 성장한다(Donald W. Burdick).
=====4: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씨앗을 뿌린 농부가 씨앗의 성
장에 대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단지 알
맞은 장소에 씨를 뿌리는 일 뿐이다. 그는 결코 씨를 자라게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주
의할 점은 농부가 게을러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밭을 갈고 김을 매
는 등의 일은 부차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씨앗을 싹틔우고 자라게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땅과 비와 공기와 해를 주관하시
는 하나님에게 맡겨진 일이라는 점이다(고전 3:6). 둘째, 씨뿌린 농부가 땅에 대하여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씨앗을 뿌려놓고 농부는 전적으로 그 소출을 하나님께 맡
긴다.
씨가 나서 자라되...알지 못하느니라 - 농부는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지 그 원인적
이유나 과정을 알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씨의 성장이 방해받는 것은 아
니다. 다만 대자연의 생명력과 내밀한 성장 과정은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하는 순간에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 성장 과정은 신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도 역시
그 과정이 신비한 비밀에 싸여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나 원인적 힘을 발견하지 못한
다고 하여도 농부가 땅에 대한 믿음을 갖고 추수를 기다리듯이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확신(確信)을 가져야 한다(15:43).
=====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 여기서 열매를 맺게 하는 주체가 땅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본질적으로 땅 그 자체가 어떤 능력을 지녔다기보다 그
땅과 생명있는 씨앗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능력'을 암묵적으
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땅이 스스로'란 표현은 곧 농부의 힘을 철저히 배
제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여기서 '스스로'(* ,아우토마테)란 '자동
적'이라는 뜻이다. 즉 열매맺는 것은 농부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땅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의미를 26절에서 씨뿌리는 자를 '사람'( , 안
드로포스)이라고 밝힌 점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힘으로 확산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어서 사람의
힘이 전혀 배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인간에 의해 김을 매거나 경작하는일
이 진행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 씨앗을 결실케 하는 결정적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같은 점을 구원의 의미에서 볼 때 구원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영역이다(엡 2:8). 그러나 사람의 노력이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나 구원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
의 주권적인 역사에 따른 것으로,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와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요 6:28, 29;히 11:6;요일 3:23).
처음에는 싹이요...충실한 곡식이라 -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을 그림처럼 그려주고
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그 과정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자연의 법칙처
럼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도 천국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지금 나타나는
미완성 단계의 과정, 즉 '싹'이나 '이삭'은 '충실한 열매'가 되기 위한 가능태이다.
하지만 그 가능태는 완성의 현재적 모습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으며 현재에 실현되고 있는 가능태를 관찰
할 수 있다면 장차 올 완성의 하나님 나라도 확신을 갖고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를 암
시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혹자(J. Jeremias)는 말하기를, '열매는 씨의 결과이
다. 즉 마지막이 처음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무한하게 큰 것은 이미 무한하게
작은 것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 진실로 현재는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으나 하나님 나
라의 비밀을 이해하도록 허락된 사람들은(11절) 이미 보잘것없이 보이는 시작에서 장
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본다'(The parables of Jesus, pp 152-153)라고 하였다. 한
편 본문의 이러한 비유는 당시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던 것
을 추측 가능하게 한다. 또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보려고 하는 불신앙
적 사람들에게 이 교훈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철두 철미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해야함
을 가르치고 있다(창 18:14;신 10:17; 시 24:8;눅 1:49).
=====4:29
열매가 익으면...추수때 - 이 구절은 욜 3:13의 인용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
된 때 곧 세상의 종말이 이르는 때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익으면'(* ,
파라도)은 제2단순 과거 가정법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열매가 '스스
로 영글어 익어갈 때면'으로서 결실의 상황을 가정한 단순한 설명적 해석이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통치가 스스로(28절) 완성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적 열매들이 완전히 영
글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앞절의 '충실한 열매'와 같이 긍정적인 완성에 대한 그림
같은 표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28절의 표현과 함께 생각하여 미세한 하나의 씨앗
이 뿌려져서 충실한 곡식이 되고 그것이 익어지는 신비한 과정을 전개함으로써, 씨뿌
릴 때 과연 이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까 하는 의아심 혹은 확실성이 없는 기대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씨앗을 뿌린 뒤에 일정한 시간이 되면 곡
식이 결실할 때가 오듯이 하나님 나라가 지금은 모호하고 숨겨져 있으나 영광스럽게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이다(Cranfield). 즉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스스로 완성에 이른다. 그런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면서 현재적
과정이다.
낫을 대나니...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 이는 종말적 최후 심판을 표현한다. 이
처럼 종말적 심판을 '추수'로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잠
25:13;렘 5:24;51:33;욜 3:13;마 3:12;13:30;눅 3:17;계 14:14-16). 특별히 여기서
'낫을 댄다'는 것은 '낫을 가져 간다'는 뜻으로 씨를 뿌린 후 자기 일에 열중하던 농
부가 (27절) 추수의 시점에 이르러 다시 그 밭에 보내지는 광경을 묘사한 것으로(요
4:38) 무서운 심판의 때가 도래했음을 암시한다. 실로 이 '낫'은 개인적 종말과 우주
적 종말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한 환유적(換喩的)표현이다.
한편 여기서 추수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추수를 하는 것은 사람
이다. 왜냐하면 씨를 뿌리고 추수하는 일은 농부가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말적 심
판의 때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추수의 기
쁨을 맛보는 것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 것은 아
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 나라는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추수의
주체자는 하나님이다. 즉 사람이 씨를 뿌리고 가꾸며 추수에 투입되지만 그 씨앗을 자
라게 하며 풍성하고 잘 익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땅, 곧 신비한 자연의 힘이다(하
나님의 이면적인 섭리). 마찬가지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일
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
서 그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 두 가지 의
미가 빠지는 일이 없이 해석되어야 한다.
=====4:30
여기서 또 다른 비유가 시작된다. 주제는 앞에 나오는 비유에 이어 계속 하나님 나
라이며 소재는 겨자씨이다. 역시 청중과 장소변동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 13:31, 32과 눅 13:18, 19에는 공히 바로 이어서 누룩 비유를 첨가
하고 있으나 본문은 그에 대해 침묵한다. 어쨌든 본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사
람이 보기에는 미약하고 보잘것없으나 그것이 강하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크게 나타날
때가 올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 비하며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 이 비유의 시작은 다른 비유와 달리 어떻
게, 무엇으로 비유할 것인가 하는 이중적 물음으로 시작한다. 이는 주로 히브리인들이
즐겨 쓰는 수사법으로서 생생한 물음을 통해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관심과 주의를 환
기시키고 생각할 여유를 갖게 한다.
=====4:31
겨자씨 한 알 - 겨자씨는 당시 유대인들이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이며,
'사람이 땅에 심는 가장 작은 씨앗'(the smallest seed you plant in the ground)
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아주 작은 씨앗으로 비유되는 겨자씨를 '한 알'이라 한정
함으로 그 작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
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고 하는 설명구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물론 이 같은 표
현은 조금 과장된 듯이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천국의 실체는 마치 겨자씨의 성장 과정
과 같다는 사실이다. 즉 천국은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작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미미한 시초성과 현재성을 이야기한 것
이다. 그러나 이같은 미미함은 능력있고 흥왕한 모습으로서의 천국의 미래성을 내포한
다는 점에서 겨자씨의 생명력 넘치는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실로 가장 작은 것 속에
는 이미 가장 큰 미래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4:32
자라서...큰 가지를 내니 - 이 구절은 '가장 작은 것'을 강조한 31절과 큰 대조를
이룬다. 그 구체적 표현을 살펴보면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새들이...깃들일 만큼'
이라는 비교 문구를 각각 사용한다. 여기서 '모든 나물'을 공동번역에는 '어떤 푸성
귀'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겨자씨의 본질(나물)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본질을 훨씬
뛰어넘는 변화(나무로서의)를 암시한 것이라 본다. 즉 겨자씨는, 그 실제는 '나물'(푸
성귀)이지만, 그 키가 3-4m(심어어 7m까지 자라는 경우도 있다고 함)까지 성장하며 그
줄기의 굵기가 사람 팔뚝 굵기만큼 자라므로(Donad W. Burdick)가히 '나무'라 봄직하
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참으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변화와 성장을 이뤄놓는 것이다. 실로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폭발적인 확장성과 현
재와 미래의 대조적인 모습을 적절히 보여 주고 있다. 가장 작은 것으로 시작하여 가
장 큰 것이 된다는 의미는 앞에서 언급된 천국 비밀처럼(26-29절) 지금은 보이지 않는
듯 하지만 씨앗이 자라듯 그 작은 것은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이며 반드시 완성
된 형태로 성장할 것이라 확신을 갖게 하는 가능태이다(29절). 따라서 천국을 대망하
는 사람은 작은 것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있어야 하며(Nineham) 보이지 않는 것 속에
서 완성된 것을 바라보는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생각할 때 욥 8:7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과
마 25:21, 23의 "작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를 생각나게 한다.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 여기서 '공중의 새'란 어떤 구체적인 대상
을 가리키기 보다 오히려 자라난 겨자나무의 크기가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했음을 보여 주는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다(마 13:31). 혹자는 성경에서
흔히 '새'가 사단의 대리인들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확장되어가는 하나님 나라
를 해치기 위해 힘쓰는 존재들로 이해하기도 하나 본 문맥에서는 적합치 못한 해석이
라 본다. 또 다른 이들은 영적으로 이 '공중의 새'는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이방인
들로 보기도 한다. 한편 여기서 '깃들인다'(* , 카타스케눈)는
말은 단순히 비나 바람을 피해 잠깐 쉬어간다는 의미이기보다 거주지로 정하고 장막을
세우듯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이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 도처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평안히 그리고 영원히 깃들일 수 있는 보금자리인 것이다.
=====4:33
비유로...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 비유들은 예수께서 무리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
치실 때, 즉 예수 자신의 인격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실 때 사용하신 방
법 중 가장 탁월한 교수법이었다. 실로 예수께서는 진리를 비유로 말씀함으로써 무리
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셨다. 즉 비유(parable)란 일상생활의 단면들을 예로 들어 전하
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쉽게 납득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그것을 듣는 자들의 사고를
자극하고 영적 지각력을 일깨워주는 은혜로운 진리 전달 수단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비유는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즉 듣는 이의 영적 감지력과
진리에 대한 이해력 여부에 따라 쉽게 또는 어렵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4: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 이 말은 비유만 말하고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천국의 비밀에 대한 비유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하늘나
라에 대한 설명은 반드시 비유를 통해 가르쳤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11,12절 주석을
참조하라.
혼자 계실때에...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 이 문구는 10절의 시작과 비슷하다. 다
만 질문을 했다는 언급이 없고 10절에서는 청중이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제자들'만 언급하고 있다. 결국은 앞에서 가르친 여러가지의 비
유들은 일반 청중을 상대로 한 것이고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을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비유가 인간의 이성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
을 암시하고 있다(13,33절 주석 참조). 사실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자
들조차로 예수의 거듭되는 설명과 상세한 해설이 필요했었다. 사실 본문의 '해석하시
더라'(* , 에페뤼엔)가 미완료 시상으로서 단 한번이 아니라 계속 설명
해 주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진정 예수께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33절) 진지하
고도 쉽게 가르쳤지만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비유는 여전히 어렵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경고적 격언구와
내용의 일치를 갖는다(3, 9, 23절 주석 참조). 한편 예수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은 물
론이고 제자들조차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명백하게 밝
혀졌다. 그들은 예수를 배신하거나 십자가 처형에 침묵으로써 간접 동조했던 것이다
(114:50).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함으로써 사람들은 예수를 비로서 바
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의 잘못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의 잘못이
다. 이것에 대한 상징적 비유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 할 수 있다(3-20절).
=====4:35
그 날 저물 때에 - 이렇게 자세한 시간적 묘사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없다.
여기서는 앞에서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끝난 시간과 공백을 두지 않고 있다. 즉 '그
날 저녁때'라고 명시하여 예수께서 천국 비유를 가르치신 그날 많은 양의 활동을 하신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배에 오르시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 비유
를 베푸신 날과 전혀 다른 사건으로 다룬다(마 8:23). 누가복음 역시 '하루는'이라는
(눅 8:22) 단어를 사용하여 막연한 어떤 날로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1절에서 묘
사된 바닷가 풍경을 그대로 그려주는 듯한 배경 설명을 하고 있다. 이는 매사를 예민
하고 세밀하게 취급하고자 하는 마가의 특징적인 문장 기법에 의한 결과로 볼 수 있
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계속 갈릴리 바다 곁에서 선교 활동을 하셨는데 그것은 36절의
'배에 계신 그대로'라는 표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여기서 '그 날'은 분명
바닷가에서 많은 비유들을 가르치신 날이다.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 이 제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한 것이다. 아마도 예
수께서는 바쁜 일과로 인해 피곤하셨기 때문에 모인 무리들을 피하여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자 이런 제안을 하셨을 것이다. 한편 '저편'은 배를 타고 가야할 목적지를 가리
키는 말로서 바다 건너 맞은편에 있는 언덕을 의미한다. 5:1의 사건과 연결시킨다면
이곳은 '거라사인의 지방'일 것이다.
=====4: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나는 일행이 제자들과 예수뿐임을 암시
하고 있다.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 1절에서 시작했던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끝난 직후 곧
바로 일어난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배에 계신 그대로'란 '떠난 준비를 전혀 하
지 않는 채로'(Bengel), '해변에 내려가지 않고'(W. W. Wessel)라는 뜻으로, 예수께서
는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에 올라 앉으셨던 바로 그 배를 타고 지체없이 건너편으로 가
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물론 어부 출신 제자들의 즉각적인 순종과 실행이 뒤따랐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생동감과 현장감 넘치는 마가의 문장 표현법에 의해 눈에 선명히 다
가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상황 묘사가 없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 이는 마가만의 특종 기사이다. 여기서 '다른 배'란 예
수와 제자들이 탄배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탄 배를 말하는 데 이 배가 어디로 갔는지,
또 왜 함께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전체 상황으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에 매료된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그날 저물 때
에(35절) 같이 출발했을 것이며 또한 예수일행이 만났던 풍랑을 함께 경험했을 것이라
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10절에서 묘사된 것처럼 제자들
외에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 대한 관심은 낮이나 밤
(35절), 그리고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 기네타이 라일랖스 메갈레 마네무) - 회오리처럼 밀어닥치는 바람을 최대한 확대 표
현한 말로서 현장감과 긴박감을 더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다. 갈릴리 바다는 대체로
고요하고 음산한 기후를 이루고 있는데, 때때로 무서운 풍랑이 일어난다. 즉 지중해
수면보다 약 2oom아래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헤르몬 산에서 요단 계곡 쪽으로 이상기
류가 흐를 때 그 기류가 깊은 웅덩이와 같은 갈릴리 바다로 급하게 내려와 회오리같은
바람을 일으키며 이 때 물이 요동하여 무서운 풍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장면은 마
가의 독특한 표현기법에 걸맞게 현재 시제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긴박하고 급
격한 상황 변화를 묘사해 주고 있다.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 여기서 '부딪혀'(* , 에페발렌)는
미완료 시제로 '물결'(* , 퀴마타, '큰 파도')이 배를 계속해서 때려 정신
없는 상태가 진행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같은 위험 상황은 극에 달하여 물
이 '배에 가득하게'되는 절명의 순간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대해 마태는 "물결이 배
에 덮이게 되었으되"(마 8:24), 누가는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 지라"(눅
8:23)고 기술하여 한결같이 일촉 즉발(一觸卽發)의 침몰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한편
침몰 직전의 위기에 있는 배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면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첫째는 집단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생각할 수 있다. 마가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약
A.D. 70) 교회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적
해석은 적절하다고 본다. 둘째는 개인의 삶과 신앙의 위기로 해석할 수 있다.
=====4:38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 이 표현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보다 더 섬세
한 표현으로 37절에서 묘사된 급격한 상황 변동과 극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즉 예
수께서 '고물'(* ,프륌나, '배 뒤편')에서 베개까지 베고 주무신다는 묘
사는 풍랑으로 인해 배가 침몰 직전에 있는 상황과는 극명한 차이를 이룬다. 한편 혹
자(Lange)에 따르면 '당시 배들안에는 신분이 높은 손님이 오를 경우를 대비하여 고물
에 작은 의자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 곳에서 양탄자나 베개가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고
했다. 어쨌든 이 '베개'(* , 프로스케파라이온)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 토)가 쓰여진 것으로 보아 그 배에는 단 한개의 베개만이 있었음
이 분명하며 예수께서는 이 베개에 머리를 두고 잠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풍랑과 전혀 상관이 없는 평온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로 예수께서 잠이 든 이
유는 물론 밤에 수면을 하는 일상의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낮 동안 내내 무
리들을 가르치신 연고로 인해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곤하셨기 때문에 깊이 잠드셨을 것
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도 역시 우리와 같은 성정(性情)을 지니신 참 인간이심
을 입증해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께서 잠드신 본 장면은 침몰 직전에 있는 배 안
팎의 혼란상과 대비하여 절대적인 안정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같은
안정성은 우주 만물의 대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근본으로 하
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롬 8:39). 한편 앞절(37절)에서 침몰하는 배를 교
회나 개인의 삶과 신앙의 위기로 상징한다면 예수의 평온한 모습은 교회와 개인의 위
기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자로서의 모습이라 본다. 다시 말해 마가복음 기자는 이와 같
은 광경을 소개하면서 교회와 개인의 이같은 일시적 혼란은 예수에게로 돌아감으로써
영원한 평안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요 14:1).
제자들이 깨우며 - 여기서 '깨우며'에 해당하는 원어 '에게이루신'(*
)은 현재 시제를 취하여 매우 다급한 모습을 더욱 생동감 있게 전하고 있다.
마태의 현장성(現場性) 짙은 기술 특징이 돋보인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 제자들이 원망섞인 어
투로 예수를 불러 깨운다. 이러한 제자들의 다급한 외침은 진정 그들이 예수가 누구이
신지 아직 완전히 파악치 못한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
의 아들을 향해서 원망섞인 볼멘 소리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
다. 특히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서는 '주여'라고 부름). 이같은 마가의 표현은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를 구주와 죄인과
의 관계가 아닌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이 무례하게 예수를
대한 사실에 간접적으로 일침을 가하고 있다고 보겠다. 실로 우리가 예수를 향하여 어
떤 호칭으로, 어떤 외침을 부르짖는가에 따라 우리 신앙의 수준이 간접 평가될 수 있
을 것이다.
=====4:39
바람을 꾸짖으시며...이르시되 - 여기서는 37, 38절에서 묘사되었던 대혼란과 대조
되는 아주 평온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즉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진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타일렀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특이한 사
실은 '꾸짖으시며'(* , 에페티메센)와 '그치고'(*
, 에코파센)등이 부정 과거시제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즉각적이고
단 일회적인 사실을 암시하고 표현이다. 즉 예수께서는 권위에 찬 음성으로 한 번 꾸
짖으셨고 이에 견주어 더 이상의 반복이 필요 없을 정도로 풍랑이 잔잔하여진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 문자적으로 '침묵하라'(조용하라), '말하지 말라'(재갈을 물
어라)는 뜻이다. 특별히 '잠잠하라'(* , 시오파)는 바람을 향한 현재 명령형
으로 '(지금 당장) 그 부는 것을 그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고요하라'(*
, 페피모소)는 풍랑이는 바다를 향한 완료 명령형으로 '(더이상의 활
동을 중지하고) 그냥 그 상태로 조용히 있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자
연 현상을 인격적 대상으로 삼고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자연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
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 문자적으로 '크나큰 잔잔이 형성되다'는 뜻으로 마치 언제
풍랑이 있었느냐는 듯이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실로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권위와 능력을 한껏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이 자
연을 지배하시고 곤궁에서 구원하신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사
74:13, 14;107:28, 29 등). 지금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本體)로서 바로 그 하나님
의 능력을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4:40
어찌하여...무서워 하느냐...어찌 믿음이 없느냐 - 공동체든 개인이든 위기에 처하
면 누구나 당황하고 무서워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불신앙적 언행
(38절)에 대하여 꾸짖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마태복음에서는 풍랑을 잔잔하게 하
기 전에 나온다(마 8:26). 즉 먼저 제자들을 꾸짖고 바람을 꾸짖는다. 아마도 마태는
'풍랑'을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꾸짖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던 듯하다. 그러나 마가는
제자들의 '믿음'이 결여된 것에 대한 꾸짖음에 더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에 이같은 차
이가 생겨났을 것이다. 한편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본문이 권위 있는 사본들(시내,
베자, 바티칸)에는 '아직까지'(* , 우포)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고 이에 근거해
공동번역에서는 '아직도...'라고 번역되어 있다. 오히려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의미로 이 꾸짖음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풍랑이 일어났
을 때의 지나간 일에 대한 꾸지람일 수 있다. 즉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에 대하여 원
망어린 말투로 구원을 요청한 사실에 대한 책망일 수 있다. 둘째는 예수께서 바다를
잔잔하게한 기적을 보여준 후 '아직도 두려운가?'하고 반문하는 어투와 '아직도 믿음
이 없는가?'하고 반문하는 형태의 말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기적을 보았으니
믿음을 굳게 가지라는 의미로 예수의 꾸지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의미가 모
두 타당하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란 예수의 인격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고 있는 하
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말한다. 예수께는 제자들의 몰이해와 믿음의 결여
에 대해 여러 번 책망하셨는데, 여기 기록된 것이 최초의 사건이다
(7:18;8:17,18,21,33; 9:19).
=====4: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 문자적으로 '크나큰 두려움으로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히브리인들의 강조적 표현에 해당한다. 여기서 두려워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제
자들이 예수께 대하여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에 대한 놀라움
곧 일종의 종교적 경외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실로 '두려워한다'는 것은 예수의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과 일치시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을 대하듯이 예수를 대하는 제
자들의 심적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의 구체적 표현이 다음에 나오는 반
문하는 형식의 문구이다. 즉 '저가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가?'하는 질
문을 함으로써 이 글을 읽고 듣는 사람들에게 암시적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시
89:9;107:25-30). 그 대답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그렇게 하신다'일 것이다.
따라서 이 물음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논한 것으로 예수께 대한 본질적이고도 존재론
적인 물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로 마가는 이와 같은 기적 사건을 소개하면서 예수
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을 것이다. 한편 박해와 순교의 현장
에 놓여 있던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이 마가복음의 메시지는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
지에 대해서 가히 상상할 만하다. 이 사건은 시련과 박해의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평안을 갖게 해주었을 것이다(사 63:9;벧전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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