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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11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2|조회수11,737 목록 댓글 0

마가복음 제 11장


마가복음의 다섯 번째 주요 부분은 예루살렘 안과 그 주변 안에서의 예수의 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들 특히 최후의 사자인 하나님의 아들을 거역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하였다. 예수는 또한 예루살렘과 유대 민족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대해 경고하셨다.



=====11:1상
예루살렘 남쪽 1마일 앞에는 벳바게 마을이 있었고 약 2마일 밖 감란산 동편에는 많은 감람나무로 유명한 약 2마일 정도 넓이의 베다니가 있었다. 예루살렘 여리고까지 사람이 살지 않고 위험한 길이 있었는데 그 길가에 있는 베다니에는 예수가 유대에 계실 때 대체로 예수의 숙소로 제공되었던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이 있었다. 또한 베다니에는 문둥이 시몬의 집도 있었다.

====11:1하
-3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냈다. 거기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곧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귀를 풀어 예수께로 끌고 왔다. 마태는 그 나귀의 어미까지 언급하고 있다.
“약 누가 외 이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쓸 것이며 곧(지체없이) 다시 여기로 돌려보내리라” 라고 말해야 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주”(쿠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나귀 소유주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을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1:4-6
마가는 제자들이 예수의 명령을 따랐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그의 예고가 자세하고도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2-3절 참조) 이것은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강조한 것인데 이 어린 나귀는 예수의 메시야적 표상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그 나귀의 주인과 미리 약속해 놓은 것인가? 아니면 이 사건이 그의 초자연적 지식을 나타내는 것인가? 이후의 상황을 볼 때 아마 첫 번째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귀를 얻어 오는 마가의 상세한 묘사의 많은 부분을 볼 때 분명히 두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나귀의 주인은 아마 예수와 사전에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마가가 기록한 많은 상세한 기사는 직접적인 목격자의 보고를 통하여 기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심부름에 보냄을 받은 두 제자 중의 하나가 아마 베드로 였을 것이다.

===========11:7-8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등에 걸쳐 안장을 대신했다. 예수께서 전에는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에 오르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즉시 그들의 겉옷을 먼지 투성이의 길 위에 깔고서는 환호했다. 또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싱싱하고 푸른 나뭇가지들(스티바스, 잎사귀들 혹은 우거진 가지들)을 깔았다. 종려나무 가지는 요한 복음 12:13에 언급되어 있다.

========11:9-10
이 구절들의 교차 대구 법적 배치는 두 그룹이 -예수의 앞서 가는 그룹과 그 뒤를 따라 가는 그룹- 서로 번갈아 노래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시편 118:25-26을 노래했다. 해마다 유월절 축제가 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기원을 나타내는 여섯 편의 순례 시를 노래하였다.
히브리어(호시아나)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음역한 호산나라는 말은 원래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뜻하는 기도였다. 이후에 이 말은 큰 소리로 외치는 찬양으로 사용되었고 순례자들이나 유명한 랍비들을 열렬하게 환영할 때 사용되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는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즉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소서”와 같은 의미이다. 여기서 이 말이 사용된 것은 군중들의 성겨 때문에 이런 모든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11:11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 가셨다. 그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성전이 바르게 사용되고 있는지 보기 위하여 성전 주위를 관찰하셨다. 이것이 다음 날 그의 행동을 유발한 원인이 되었다. 이 때는 해질 무렵이어서 성문이 닫혀졌기 때문에 예수는 12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가셔서 그날 밤을 지내셨다.

=======11:12-13
다음날 이른 월요일 아침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베다니를 떠나신 후 도중에서 시장하셨다. 멀리서 예수께서는 길가에 있는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셔서 나무에게 무슨 열매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쳐다보셨다. 그러나 그 무화과나무에는 무성한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마가는 “때가 무화과 철이 아니었더라” 라고 설명해 놓았다.
그 때는 니산월(4월) 중간인 유월절 절기 때였다. 팔레스틴에서는 3월에 무화과나무에 먹을 수 있는 조그마한 열매가 열렸고 뒤이어 4월이 크고 무성한 잎들이 나왔다. 이러한 일찍 열리는 푸른 “열매”가 지방 소작농을 위한 일반적인 식물이었다. 이러한 작은 열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들이 푸르고 무성한 잎사귀를 낸다는 것을 그 해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징조였다. 이러한 작은 열매들은 정상적으로 무화과가 열려서 무화과 철인 늦은 5월이나 6월에 익게 되면 마침내 떨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유월절(4월중) 직전에 비록 그때가 무화과 때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무화과나무에서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찾기를 기대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11:14
그 무화과나무에 대해 예수께서 강하게 저주한 것은 예수께서 시장하셨거나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극적이고도 예고적으로 보여준 표징이었다. 잎은 많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은총과 그들의 종교에 대한 외적인 인상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영적인 불모성을 상징한 것이었다.


======11:15-16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서 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바깥뜰인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셨다. 어떤 이방인도 이 뜰을 넘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성전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필요한 순결한 품목들을 그 곳에서 사고 팔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 자리에는 돈을 바꾸는 일들이 성행했으며 그 돈에는 우상적인 모습으로 간주되는 인간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거래는 보통 강탈과 사기 속에서 행해졌다. 게다가 사람들은 물건을 싣고 성전을 두루 돌아 다녔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이곳 저곳을 다니기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특별히 이방인들이 사용하도록 구별해 놓은 성전 뜰을 무시하고 소란을 피웠기 때문에 노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둘러엎으시고 아무도 성전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1:17
예수의 이러한 대담한 행동은 사람들의 주의를 사로잡았고 그는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서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무감각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뜰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께서 노하신 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성전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속이는 장사꾼들에 대한 예수의 거절이었다. 이러한 행동으로 메시야로서의 예수는 대제사장들보다 성전에서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셨다.

=========11:18-19
종교적 지도자들이 이 사실을 들었을 때 큰 소요 없이 예수를 잡아죽일 최선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에 놀란 군중들과 예수는 그를 체포하려는 유대인의 권위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11:20-21
이 구절은 12-14절의 계속이다 다음날 아침 즉 화요일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고 있을 때 그들은 어제 그 무화과나무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말씀이 실현되어 뿌리로부터 완전히 말라 시들어 있었다. 비록 예수께서 그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의 생생한 묘사였다고 믿고 있다.

===========11:22-24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히 선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엄숙한 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은 “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는 의심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기도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스라엘의 부족한 신앙과 대조되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하는 두드림이 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훈계하셨다.

=======11:15:26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태도는 기도를 효과 있게 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서서 기도하다가 믿는 자들에게든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든지 누구에게든지 악의를 기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일단 그것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믿는 자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에 대한 관계는 서로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용서하시는 자와 용서받는 자 사이에는 하나의 결속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신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이 요구된다. 만약 그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11:27-28
화요일 아침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들어갔다. 성전 뜰에서 예수님은 산헤드린의 대표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스라엘 종교 생활의 감시인인 그들은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1)너의 권세가 무엇이냐? (2)너의 권세는 근원이 누구이냐? 누가 너에게 이런 일을 할 권세를 주었느냐? 는 것이다.

=======11:29-30
랍비들의 일반적인 논쟁 기술인 예수의 반문은 그에 대한 대답을 그들 스스로 하도록 만들었다. 예수는 그 자신의 권세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상대할 자가 없었던 요한의 권세와 출처가 같다는 것을 의미하셨다. 요한에 관한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예수에 대한 결론도 달라지게 된다.

=======11:31-32
예수의 질문은 이러한 종교적 지도자들을 궁지에 빠지게 했다. “사람에게서”라는 후자의 대답이 그들에게는 더 타당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사람들이 두려워 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11:33
따라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시도로 변론을 했던 그들은 그 어느 쪽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래서 예수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의 질문은 그의 권세가 요한처럼 하늘에서 왔음을 암시한 것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이 판단을 보류함으로써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요한과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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