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12장
=========12:1상
이 간결한 요약적인 말은 마가가 여기에서 기록한 단 하나의 비유를 소개하는 말이다. 예수는 그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있던 산헤드린을 대표하여 질문 해 온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것은 적의에 가득찬 그들의 의도를 폭로한 것이며 그 결과에 대하여 경고한 것이다.
========12:1하
포도원 건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사야 5:1-2에서 온 것으로서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알려진 표상이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산 울을 두르고”-포도즙을 짜서 모으기 위한 구유 자리를 파고 보호와 저장고 안전을 위해 망대를 세웠다. 이것은 좋은 상품을 만들려고 하는 주인의 욕망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소작농 즉 포도원 재배자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타국에 나가 살기 위하여 여행을 떠났다.
=======12:2-5
주인은 추수 때가 되어 소작료로 그 과실을 받기 위해 종들을 차례로 그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난폭한 행동으로 종들을 때렸고 마지막 종은 죽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개와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몇 번이고 거듭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그들은 능욕을 당하고 상처를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12:6-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은 한 사람 즉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다. 소작농들은 자기 아들은 존경하리라고 기대하면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상속자인 것을 알고 음모를 꾸며 그를 죽여서 포도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땅의 일부분이 어떤 기긴 내에 상속에 대한 요구가 없는 주인 없는 재산이 될 때에는 그것을 먼저 주장하는 자가 합법적으로 그 땅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소작인들은 만약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여 버린다면 포도원을 자기네들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2:9
예수의 수사적인 질문은 그 주인이 어떤 행동을 했겠는가를 결정하는 데 청중들을 함께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주인의 아들을 배척하는 것은 실제로 주인을 배척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인은 강한 권한을 갖고 와서 악한 소작인들을 죽인 후에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릴 것이다. 예수에 대한 배척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배척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게 되었고 그들의 특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나마 넘겨주게 되었다.
=======12:10-11
예수는 이 비유를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에게 적용시켰다. 그리고 그 비유를 확대시켰다. 소작인이 비유에서 시편에 나오는 돌과 건축자의 비유로 바뀌었고 그것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비유적으로 언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건축자가 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돌은 거물에서 가장 중요한 돌로 간주되었다. 건축자들의 버림과 버림받은 돌의 귀히 쓰임은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적인 행동이었다.
========12:12
산헤드린을 대표하던 그들은 예수께서 그 비유를 자기들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흥분하기 쉬운 유월절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홀로 버려두고 떠나갔다.
예수의 대적자들이 이 비유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새로운 발전이며 그의 진정한 정체의 비밀을 자신하여 공공연하게 선언하심으로써 예수의 주권 성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12:13
바로 전에 나오는 비유로 예수께서 산헤드린에게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리새인과 헤롯당 몇 사람을 보내어 그의 말을 책잡으려 하였다. “책잡는다”고 번역된 말은 덫을 가지고 짐승을 사로잡는 것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12:14-15상 예수를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은 그들의 진정한 의도를 숨기면서도 예수께서 자기들의 어려운 질문을 피하지 못하도록 머리를 짜낸 질문을 조심스럽게 예수께 던졌다. 그들은 예수가 참되시며 편견이 없으시고 사람들의 외모에 따라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는 그가 사람의 현재의 모습에 관심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고 물었다.
“세”는 인구조사를 의미하는 라틴어였다. 이것은 유대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던 A.D. 6세기 이래로 모든 유대인들이 해마다 바치는 인두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돈은 곧바로 로마 제국의 국고로 들어갔다. 이 세금은 유대인들이 로마에 정복되었다는 것을 상징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못하였다.
이러한 질문을 예수께 한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궁지에 몰아 넣기 위한 수단이었다.
===========12:15하-16
예수는 즉시 그들의 정직한 체 하는 질문의 이면에 그들의 위선이 가려져 있음을 간파하였다. 예수는 그들이 왜 자신을 책잡으려 하는지를 수사적인 질문으로 폭로하셨다.
===========12:17
가이사가 새겨진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권위와 정부의 유익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결국 세금을 내야 할 의무가 잇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선언하셨다. 이 세금은 가이사의 돈을 사용했다는 데 대한 빚이며 그가 통치함으로써 백성들이 유익을 보았음으로 내는 빚이었다. 예수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것은 성전 세를 언급한 것이기도 하지만 황제를 신성시하는 데 대한 저항이기도 하였다. 즉 황제가 신적인 영예와 숭배를 결코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영광과 예배를 드려야 한다.
========12:18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깎아 내리기 위하여 또 다른 질문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 왔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주로 제사장과 상류 계급 출신인 유대의 귀족 당이라고 믿어졌다. 그들은 산헤드린에서 영향력 있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유대 최고의 법관이며 주로 로마 권력자들과 협력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부활의 진리, 미래의 심판, 천사와 영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들은 모세의 책만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 들였고 바리새인들이 수집하여 지키고 있는 구전은 거부하였다. 이것이 사두개인들에 대한 마가의 유일한 언급이다.
=========12:19-23
그들은 공식적으로 예수를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형사 취수에 관한 모세의 규례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는 가족의 혈통을 잊고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 취해지던 전통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자식 없이 죽어 버린 7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꾸며냈다. 사두개인들은 분명히 불활 신앙을 믿고 있지 않으면서도 “부활했을 때에 과연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12:24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두 가지 반문을 하시면서 예수는 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는지를 두 가지 이유로 말씀하셨다. 먼저 그들은 성경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그들은 죽음을 극복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능력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먼저 두 번째 이유와 더불어 그 첫 번째 이유를 각각 보충 설명하였다.
======12:25
사두개인들은 부활 후에도 결혼이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잘못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한 사람들의 삶에는 정혼도 결혼도 없다. 다만 하늘에 잇는 천사들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하나님께서 죽음 후에 전적인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실 것과 그와 관련된 눈에 보이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실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질문은 부당한 것이다.
=========12:26-27
사두개인들은 알지 못하여 부활에 대한 이해가 오경에는 없는 것으로 단언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을 하시면서 모세의 책 즉 모세 오경에 호소하셨다. 그리고 불붙는 가시나무 떨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출3:1-6)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확언하시면서 모세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셨다. 그들은 비록 오래 전에 죽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으로서 그들과 계속적으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신 말씀이었다. 이것은 죽으면 끝이라고 이해한 사두개인들의 이해대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라고 예수는 결론을 내렸다. 만일 그들이 죽은 후에도 살아 있지 않거나 죽음이 끝이라면 그는 진실하지 못한 하나님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 속의 신실함이 바로 육체적 부활을 보증해 준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예수의 대답은 분명히 죽음 이후의 살에 대한 사실을 확증한 것이었다. 이것은 육체적 부활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마가가 기록한 예수의 마지막 교훈은 그들이 부활과 죽음 후의 삶을 부인한 것이 얼마나 심각한 잘못 이었는가를 강조하신 것이다.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의 사두개인과의 변론을 듣고 그들에 대한 그의 훌륭한 답변에 매우 감명을 받았다. 이것은 그가 바리새인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서기관들 사이에 토론되던 주제에 대해 예수의 답변하는 솜씨를 평가하기 위하여 어떤 적대감이나 숨겨진 저의 없이 찾아왔다. 전통적으로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에 관한 613가지의 개별적인 율법(365가지는 부정적인 것이요 248가지는 긍정적인 것이다.)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모든 율법이 구속력 있는 것으로 믿으면서도 더 무거운 것과 가벼운 법령을 구분하여 생각하였고 전체의 율법을 단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쟁의 견지에서 이 서기관은 이 모든 율법 주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12:29-31
예수의 대답은 어느 것이 크냐 작으냐의 문제를 뛰어넘어 전체 율법을 요약해 주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가는 것이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은 인격적으로, 포괄적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헌신하여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마음, 뜻, 힘등 반복되어 사용된 말들이 이 계명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뜻”이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지 않고 70인역에서는 “마음”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두 낱말을 모두 포함시켜서 계명의 본질을 포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다음으로 예수는 첫 번째의 계명과 분리 할 수 없는 그리고 첫째 계명에 보충이 되는 두 번째 계명을 인용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헌신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 것이다.
이 두 가지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왜냐하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을 지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지키는 것이다.
===========12:32-34상
이 구절은 마가에 독특한 것이다. 이 구절은 분명히 영적인 것과 예식 적인 예배 사이의 관계와 싸우는 그의 독자들을 훈계한 것이었다.
서기관은 예수의 답변이 정확함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예수를 뛰어난 선생으로 보았다. 신의 이름을 지나치게 존중하여 신의 이름을 불필요하게 사용하는 것을 피하는 전형적인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피하면서 예수의 대답을 다시 표현하였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말은 신명기 4:35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또한 마음과 듯에 대하여 그가 이해한 말로 대신했다.
그는 대담한 말을 했는데 사랑의 두 가지 명령은 모든 번제나 기타 제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그는 현명하게 대답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는 선언을 하심으로 그로 하여금 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이 사람은 영적인 이해와 예수에 대한 개방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12:34하
예수는 그를 깎아 내리려는 모든 시도를 효과적으로 좌절시키고 적대자들의 악의에 찬 의도와 잘못을 능숙하게 드러내셨으므로 아무도 감히 그에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였다.
==========12:35
그 후에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기다리던 메시야를 그리고도 즉 승리의 구원자가 될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서기관들에게 예수께서는 물으셨다.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은 구약 성경에 확고하게 그 기초를 둔 기본적인 유대인의 신앙이었다. 예수는 메시야가 다윗의 주라는 사실이 옳다고 덧붙였다. 서기관들의 견해도 옳은 것이었지만 불완전하였다. 성경의 견해는 바로 그들의 좁은 민족주의적인 희망보다 훨씬 더 넓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12:36-37상
메시야가 다윗의 주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어 다윗 자신이 시편에 선포해 놓은 것을 인용하셨다. 이것은 분명히 이 시편이 다윗의 저작이며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공격할 수 없는 것은 다윗이 메시야를 “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 시켰다. 그러면 어떻게 그는(메시야) 그의(다윗) 자손이 될 수 있는가? 예수의 수사적인 질문은 청중들로 하여금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주”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메시야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는 이 지상에서 미래의 다윗 왕국을 회복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문제를 자기와 연관시켜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이 문제를 신중하게 부각시켰다는 것은 분명하다.
=======12:37하
교묘한 질문으로 예수를 시험하고자 했던 유대 지도자들과는 달리 많은 유월절 군중들은 비록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기쁨으로 처음부터 그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
===========12:38-39
예수는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기를 원하고 또 그들의 특권을 남용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경고하셨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지만 많은 서기관들이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들은 긴 옷 즉 제사장, 서기관, 레위인들이 입었던 길고 흔 술 달린 가운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공적인 명칭인 랍비, 주인, 아버지와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들은 회당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좋아했고, 연회에서도 영예의 자를 차지하여 주인 다음의 좌석에 앉아 특별 대우를 받기를 원하였다.
=======12:40
1세기의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직무에 대하여 급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이 바치는 자선에 의존해야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남용하는 면이 있었다. 과부의 밭을 삼킨다는 비난이 바로 한정된 재산을 가진 사람들 특히 과부들의 호의를 악용하고 있는데 대한 생생한 표현이다. 그들은 비윤리적으로 사람들의 재산을 착복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그들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장시간 기도를 드렸다.
예수는 그들의 화려한 행동, 탐욕, 위선을 꾸짖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강조하지 않고 경건한 척 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그런 위선을 요구하였다.
======12:41-42
예수께서 그의 공적인 가르침을 행하시던 이방인의 뜰로부터 여인의 뜰로 들어가셨다. 이 뜰 벽 맞은 편 벽에는 예배 자들의 자발적인 제물과 헌금을 거두기 위하여 나팔 모양을 새겨 놓은 13개의 연보궤들이 있었다.
맞은 편 유리한 위치에 자리하시고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어떻게 성전 금고에 그들의 돈을 넣는가를 살피고 계셨다.
한 불쌍한 과부는 두 렙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한 렙돈은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가장 작은 유대인의 청동 동전이었다. 두 렙돈은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이었던 로마 데나리온의 64분의 1읠 가치였다. 마가는 자기 로마인 독자들을 위하여 다시 로마 화폐 단위로 그 가치를 말했다.
===========12:43-44
엄숙한 서론적인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이 여인이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과부는 어려운 중에서 모든 것을 넣었기 때문이다. 비례로 따지면 그 여인■ 가장 많이 바쳤던 것이다. 그 여인은 희생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리라고 신뢰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위하여 동전 하나를 간직해 둘 수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전적인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녀의 예를 사용하셨다.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헌신은 곧 시험 당할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예수께서 자신을 전적으로 죽음에 내어 주심을 예증하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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