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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 9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1|조회수17,196 목록 댓글 0

누가복음 제 9장
=====9:1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 이 제자들은 5:3-11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처
음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어 6:12-16에서 그 선택이 완료된 인물들이다. 예수께서 열
둘을 부르신 것은 열 두 지파에 의해 상징되었던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비되는 새 이스
라엘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다(Hendriksen). 한편 누가는 마가의 '부르다'(*
, 프로스칼레오)라는 표현(막 6:7) 대신 '불러 모으다'(* ,
슁칼레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8:51에 있었던 잠깐 동안의 헤어짐과의
논리적 일관성을 고려한 누가의 세심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귀신...능력과 권세 - 마태와(마 10:1) 마가는(막 6:7) '더러운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모든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
마태와 마가는 귀신의 악함에 초점을 두고 누가는 '모든 종류'의 귀신을 제어하시는
예수의 권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 또한 누가는 마가복음에 있는 '권세'(*
, 엑수시아)에 능력(* , 뒤나미스)을 첨가하고 있는데, 전
자는 합법적 권리나 권위를 나타내며 후자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 영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세와 능력이 예수 당시와 초대 교
회에도 있었던 마술사(행 19:13)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
다.

=====9:2
하나님의 나라...보내시며 - 마태에 의하면(마 9:36)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는 동
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는 것을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이
라고 하나 본문에 의하면 제자들은 두 가지 책무를 부여받고서 파송되었다. (1)제자들
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사역과 인격 속에 현존함과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것이기도 했다(마 6:10).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뜻을 백성
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시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편협한 민족주의적 희망
으로인해 곡해(曲解)하고는 있었으나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왕권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4:15;마 18:1;20:21;막 11:10;15:43;14:15). 하나
님 나라의 개념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막 1:15의 주제 강해 '하나님의 나라개념'을 참
조하라. (2)제자들은 병을 고쳐주어야 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영적인 일
이라면 병을 고치는 것은 육적인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바 육적인 문제의 해결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짐에 주목해야 한다.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일이 영혼의 구원에
비하여 이차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질병 치유가 단순히 영혼의 문제로 이끌어 가는 수
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병을 고치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는 본문에서 '전파하고'(* , 케뤼쎄인)와 '고치는'
(* , 이아스다이)이 대등 접속사 '카이'(* )로 연결되어 있는 데서도
분명해진다. 한편 제자들이 해야할 이 두가지 과제 즉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을
고치는 일은 다름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인데(11절;마 9:35), 이는 제
자들이 해야하는 일이 단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을 계승할 사도로 서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9:3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벌 옷 - 예수께서는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도 그것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 하나 세부적인 항목
까지 열거하고 있다. (1)지팡이(* , 라브도스)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점에 대해서는 마태도(마 10:10) 동일하게 보도하고 있으나 마가는(막 6:8) 지팡이
는 허용하는 것으로 기록한다. 이 차이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여럿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ㄱ)마가는 왕하 4:29에 나오는 게하시의 경우처럼 지팡이를 스승의 권위에 대
한 상징으로 파악했다는 견해(Schurmann). 그러나 게하시의 경우에는 자신의 지팡이가
아니라 스승의 지팡이를 사용했다. 따라서 만약 게하시의 경우가 제자들에게 적용되려
면 제자들 모두가 스승인 예수의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야 한다. (ㄴ)누가는 지팡이나
슬리퍼나 허리띠를 띠고 성전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는 랍비적
규율을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Manson). (ㄷ)발음은 비슷하나 뜻은 서로 다른 아람어가
혼동되었다는 견해. 즉 '...외에'라는 뜻의 'ella'(엘라)와 '그리고...도 아닌'의 의
미를 가진 'wla'(웰라)를 혼동한데서 생긴 차이이다. 이 설명은 헬라어 성경 원문의
무오성(無誤性)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ㄹ)두 복음서 기자가 서
로 다른 지팡이를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 즉 마가는 길을 걸을 때 사용하는 지팡이를,
누가는 맹수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팡이를 각각 염두에 두었
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복음서가 모두 여행할 때 사용하는 지팡이인 '라브도스'를 사
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설명은 충분한 해명이 못된다. 결국 이런 정도로 추측할 수
있을 뿐 보편적으로 공감되는 설명은 아직 없다 하겠다. (2)가방(* , 페라)을
가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가방은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담는 가방일 수도 있고 동
냥 주머니일 수도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주머니가 동냥을 위한 것이라면 예수
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전도 여행 도중에 축재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금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여행 필수품을 담는 가방이라면 아무것도 의지할만한 물건을 소유하지 말
라는 의미에서 금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3)빵(* , 아르토스)도 가지고 가
지 못했다. (4)돈(* , 아르귀리온)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스스로 필수품을 자급할 수 있는 일체의 가능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5)마
지막으로 두 벌 옷(* , 키톤)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 옷은 속옷으로 거
의 발에까지 닿으며 소매가 달려있었다(Hendriksen). 한편 마가복음에는(막 6:9) 신발
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비해 누가는 신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고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신발을 가지고 가지 못하였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이렇게 여
행에 필요한 일체의 필수품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사도로서 하나님의
일을함에 있어서 현실적 여건이나 물질에 의지하지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
지하라는 신앙을 가르쳐주며, 동시에 사사로운 재산에 얽매이지 말고 모든 것을 포기
하고 따르라는 예수의 정신과도 일치한다(18:18-27). 22:35에 의하면 실제로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이 전도하러 다녔지만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9:4
어느 집에...떠나라 - 여행 준비에 관한 말씀에 이어 이번에는 유숙(留宿)하는 방
법을 일러주신다. 물론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머물라는 말은 아니며 말씀을 받아 들일
자세를 갖춘 사람에게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마 10:11). 그러나 한 번 숙소를 정했으
면 그 마을을 떠날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지 불편한 점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대
접을 받는다고 해서 더 좋은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주의
교훈집으로 알려지고 있는 '디다케'(Dedache)에는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는 거짓 선지
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는데, 본문은 제자들이 거짓 선지자들 처럼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탐하지 말고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 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9:5
발에서...떨어버려 -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행위는 유대인들의 오랜 관습에서
유래했다.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을 지나는 경우에 마을을 통과한 뒤 발의 먼지를 떨고
이스라엘의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방 지역에서 묻은 옷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들어
간다. 이는 유대인들의 성별(聖別) 의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부정한 것을 자신들의
땅으로 묻혀 들어오지 않으려는 의식적 행동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님이 이러한 행위
를 지시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선민과 이방인의 진정한 구분은 메
시지를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영접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2)더 나아가 발의 먼지
를 떠는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거부한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는 사
실에 대한 공적인 선언이자 증거가 된다. (3)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했을 때 받
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일러 둠으로써 제자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
하게 되었을 때 낙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참고로 행 13:50,51에 의하면 바울
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지역에서 주의 일을 하는 도중 유대인들로부터
방해를 당하였을 때도 이런 행동을 했었다.

=====9:6
나가 각 촌에 - '나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르콘토'(* )는
'디에르 코마이'(* )의 미완료과거 중간태로서 제자들의 선교 활동
이 계속적이고 반복적이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촌'(* , 코마스)이라는 단어
에 대해서 그룬트만(Grundmann)같은 학자는 예수가 읍내들을 돌아다니신데 비해 제자
들은 촌락들을 돌아다닌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나, 8:1에 의하면 예수께서도 '성' 뿐만
아니라 '촌'에도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처처에 복음을...병을 고치더라 - '처처에'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쿠'(*
)는 '그들이 가는곳 어디서나'의 뜻으로, 제자들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에
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등 예수의 사역을 열심히 대행하였음을 보여준다. 바
야흐로 제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고 실현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9:7
분봉왕 헤롯 - 이는 헤롯이 왕(王)이 아니라 영주(領主)였음을 뜻한다. 그는
B.C.4-A.D. 39까지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 었는데 그 지역은 예수의 사역이 펼쳐
진 중심지였다. 분봉왕 헤롯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3:1주석 참조.
이 모든 일 - 이 문구의 헬라어 표현은 '타 기노메나 판타'(*
)로 문법 구조상 현재 중간태 분사임을 알수 있다. 이것은 현재까지 발생
하고 있는 모든일을 말한다. '이 모든 일'이란 일차적으로는 예수께서 일으키셨던 갖
가지의 이적들과 선포이겠지만 누가는 이 표현을 제자들의 성공적인 사역에 이어 서술
함으로써 제자들의 역할도 예수의 소문이 널리퍼져 헤롯의 귀에까지 들려지게 되는데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였음을 시사한다.
심히 당황하여 - 이 말은 부정의 접두사 '디아'(* )와 '길'을 뜻하는 '포로
스'(* )의 합성어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헤
롯도 당황하여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표현이 문법상 미
완료 과거 능동태인 점을 감안할 때 헤롯의 당황과 불안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
해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한이...살아났다고도 하며 - 마태나(마 14:2) 마가(막 6:14)는 헤롯이 예수의 소
식을 듣자 곧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하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그러한 내용의 소문이 헤롯에게 들려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태와 마
가는 예수에 관한 헤롯의 최종적인 확신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고 누가는 무엇이 헤롯
으로 하여금 이 최종적인 확신을 갖게 되었는가를 보도하고 있는 듯하다. 즉 먼저는
세례 요한이 살아난 인물이 바로 예수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 소문이 헤롯에게 들려지
자 그는 세례 요한에 대한 자신의 좋지 못한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하여(3:19,20;마
14:3-11;막 6:17-28) 즉시 그러한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세례 요한이 예수
의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났다는 생각은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구약적 부활 사상이
담겨져 있음(신 32:39;삼상 2:6;욥 19:25-27)을 엿보게 한다.

=====9:8
혹은 엘리야가...혹은 옛 선지자...함이라 - 예수를 엘리야로 생각하게된 배경에는
말 4:5의 말씀이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종말을 알리는 '종말적 예언
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와의 연관성은 세례 요한에
게 그가 적용된다(1:17;마 11:14). 예수는 단지 종말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성
취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 대한 세번째 견해는, 옛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가 다시 살아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견해들은 정
확하게 예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것이지만 예수의 사역이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에
게 선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퍼져나갔음을 알수 있다.

=====9:9
이 사람이 누군고...보고자 하더라 - 헤롯은 예수께 대한 다른 두 가지 견해에 대
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세례 요한에 관한 견해에 집착하며 고민
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의로운 세례 요한을 터무니 없이 죽인 일에 대해서 늘 양심의
가책을 겪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마 14:3-11; 막 6:17-28). 여기서 "-자 하더라"는 표
현 '에제테이'(* )는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헤롯이 계속해서 예수를 보고자
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13:31에 의하면 헤롯이 예수를 보고자 한것은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호기심이나, 죄 없는 선지자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악의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예수를 희롱하며 예수가 처형되는 일에 적극적인 방조자
내지는 동조자(同調者)로서의 역할을 했다(23:8,11).

=====9:10
사도들이 돌아와...고한대 - 제자들이 사역한 기간이나 그들이 행한 구체적인 일들
은 분명히 명시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일시에 돌아와 예수께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사역의 기간과 다시 모이는 장소는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듯하다. 여기서 '고한
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게산토'(* )는 "경과를 끝까지 이야
기한다"는 의미로서 제자들이 행한 모든 일들을 예수께 상세히 보고하였음을 가리킨
다.
벳새다 - 이 지명의 뜻은 '고기 잡는집'인데 정확한 명칭은 '벳새다 율리아스'(Be-
thsaida Julias)로 빌립왕이 건설하여 황제 아구스도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는 뜻에
서 '벳새다 율리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갈릴리 호수 북동쪽 연안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인 이곳은 베드로, 빌립, 안드레의 고향이기도 하다(요 1:44). 예수께서
이곳으로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간것은 제자들이 먼 선교여행에서 돌아왔고 더구나
예수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
문이다(막 6:31). 말하자면 피곤하고 시장한 제자들에게 쉼을 주고자 하는 예수의 자
상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가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따로' 사적인 만남
을 갖고자했음을 부각시키는 인상을 주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선교 여
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을 주고 동시에 제자들이 했던 일들에 대한 의
미를 설명해 주면서 그들을 온전한 사도로 교육시키는 기회로도 삼고자 했을 것이다.

=====9:11
무리가...따라 왔거늘 - 누가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으나 마가에 의하면(막
6:32,33) 예수와 제자들은 배를 타고 이동했으며 예수와 그의 일행이 배를 타고 가는
것을 알아 본 많은 사람들이 배가 상륙할 지점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
가는 어떻게 사람들이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보다는 예수께 많은 사람들
이 모여 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강조점을 두려는 듯하다.
영접하사...고치시더라 - 제자들 하고만 있고자 했던 예수의 계획은 모여든 무리들
로 인해 일단 좌절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들을 떠나간 것은 사람들이 싫어서가 아
니라 제자들과 별도의 시간을 갖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예수께서 무리들을 영접했다 해
서 이상할 것은 없다. 오히려 '영접했다'는 표현은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목자없
는 양 같이 보인 불쌍한 무리들을 따뜻이 그리고 흔쾌하게 맞아주신 예수의 온정을 느
끼게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두 가지 하셨는데 하나는 하
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는 일 즉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에 걸린 자
를 고쳐주는 일이다. 특히 '이야기 하시며'(* , 엘랄레이)와 '고치시더라'
(* , 이아토)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상당한
시간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9:12
날이 저물어 가매 -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해가
저무는 시간까지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병고치는 능력에
완전히 마음이 붙들려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듯하다.
먹을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시티스몬'(* )은 '곡
식'을 뜻하는 '시티온'(* )에서 유래한 동사 '에피시티조 마이'(*
, '스스로 양식을 공급하다')에서 나온 단어로 특히 고대 헬라어에
서 '여행중의 양식'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와같이 제자들이 무리들의 묵을 곳
과 먹을것을 염려하는 모습은 예수의 생각에 비교한다면 믿음이 없는 모습일 수도 있
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는 따뜻한 마음이었다는 점에
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9:13
너희가 먹을 것을...없삽나이다 - 예수는 제자들이 오천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배불
리먹일 수 있는 아무런 물질적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
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령을 하신 의미에 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
해 볼 수 있다. (1)본문에서는 '너희가'(* , 휘메이스)에 강조점이 주어지는
데, 이것은 무리들의 배고픔을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 스스로가 책임의식을 가
지고 해결해 주라는 의미이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의 사역을 계승해야할 사도로서, 예
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전적인 책임의식을 가지셨던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백
성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2)예수께서는 선교여행 중 지녔던 권세
와 능력에 대해 망각한 채 극히 평범하고 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제자들을 깨우쳐
주고 책망하는 의미로 그런 주문을 하셨다. (3)제자들은 선교여행 중 아무 것도 소유
하지 않았으나 주리지않고 헐벗지도 않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그
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자들은 자기들이 받은것에 대해
서 필요에 따라 되돌려 주어야 한다. 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적인 동
시에 의존적인 존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명령은 엘리
사가 그의 사환에게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라고 명령한 것을 연상시킨다(왕
하 4:42-44). 이에 대해 제자들은 자기들이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기에는 불가능함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1)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본문의 기록대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가 두 마리 뿐이니 이것은 단 한 사람이 먹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양이다. (2)지금의 장소는 너무 외진 곳이어서 음식을 구하러 사람을 보낼 수가 없다.
(3)설령 사람을 보내어 200데나리온 어치의 음식을 사온다 한들 어림없이 부족하다(요
6:7). 특히 마가(막 6:37)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당치도 않다는 듯 빈정대
는 말투로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먹이리이까?'라고 반문한다. 이에
반해 누가는 비교적 진지한 태도로 대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9:14
남자가 한 오천 명 - 남자 장정만 오천명 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한다면 그
보다 훨씬 많은 수가 될 것이다.
떼를 지어 - 마가는 이 표현을 라틴어의 '심포지움' 즉 '향연'과 같은 의미의 '쉼
포시아'(* )를 사용하는데(막 6:39) 비해 누가는 이 표현을 '클리시아
스'(* )라는 단어로 나타내고 있다. 이 단어는 정찬에 참석하기 위해 모
여드는 모습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는 것으로서, 마샬(Marshall)같은 학자는 이것이
초대 교회의 만찬을 반영해 준다고 한다.
한 오십 명씩 앉히라 - 여기서도 누가는 독특하게 '한'(* , 호세이)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누가는 의사와 역사가로서 숫자에 대해 상당히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비교, 막 6:40). 몇 명 단위로 앉혔는가 하는 사실에 관해
서는 전승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여기서는 단지 무리를 일정한 단위
로 세분화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데 중요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무리를 세
분화했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대로 굉장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9:15
제자들이...다 앉힌 후 - 제자들이 예수의 지시에 아무런 이의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습이 간결하게 서술되고 있다. 또한 사람들 역시 음식이 어디서 올것
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음을 보여준
다.

=====9:16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공관복음서 모두가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문구(文句)이
다. 여기서 예수께서 취하신 행동은 일반적인 유대인의 식사 관습과 일치한다. '축사
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오'(* )는 '찬양하다', '축복하다',
'감사하다'로도 번역된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것은 하나님의 이
적적인 능력을 요청한 것이 아니며 단지 평범한 감사의 식사 기도로 보아야한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되는 삶을 사신 예수께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였
으므로, 오병이어의 이적을 위한 별도의 간구가 필요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어...놓게하시니 - '주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두'(* )는 '디도
미'(* )의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예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었음을 가리킨다. 떡과 물고기는 예수의 손에서 제자들을 경유하여 사람들에게 전달
되었다. 이러한 전달 과정에서 어떤 기적적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단지 우리는 '주어'(* , 에디두)라는 미완료 동사에서 예수의
손에서 떡이 끝없이 계속해서 떼어져 나가는 기적적인 증가가 있었음을 암시받을 뿐이
다.

=====9: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 그곳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배불리 먹지 못한 자는 하나도
없다. 이는 예수의 능력의 완전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
서는 육신의 빵 문제를 해결하는 것 자체 보다는 신령한 영의 양식으로 무리를 먹이는
일에 궁극적 목적을 두셨다. 이는 예수의 능력에 매료(魅了)되어 찾아온 무리들에게
책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도한 요한의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요 6:14,15,26,27)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 - 무리가 모두 배불리 먹은데 그치지 않고 남은 양이 무려
열 두 바구니가 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께서 남은 조각을 거두어 들이라 명하시는
데(요 6:12), 이것은 음식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 외에도 무엇이든 힘들이지
않고 예수의 이적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다음에
또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켜 해결해 주시리라는 기대는 갖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구니'(* , 코피노이)는 군인들이 장비나 급식을 담아 짊어지고 다니
는 기구 또는 여행자들이 음식과 필수품을 가지고 다니는 기구를 가리킨다. 처음의 시
작은 바구니 같은 것은 필요치도 않는 적은 양이었지만 그것이 예수 앞에 바쳐졌을
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을 정도의 결과를 가져왔음에 주목하라. 제자들은
이백 데나리온으로도 안된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겨우 한 아이의 식사에 적합할 만큼
의 적은 것으로 큰 일을 하신 것이다.

=====9:18
따로 기도하실 때에 - 누가는 막 6:45-8:26의 내용을 생략한 채 오병 이어의 기적
에 이어 바로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으로 넘어가기 위해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
인 '...할때에'라는 '엔토'(* )구문으로 단락을 전환시키고 있다. 마태나 마가
에 의하면(마 16:13;막 8:27) 이 장소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이었다. 가이사랴 빌립
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90km 떨어진 헤르몬 산 근처의 성읍으로 특히 우상 숭배로
유명하다. 토착민들은 바알신을 헬라계 사람들은 산림과 야수의 신인 판(pan)의 신당
을 지어 섬겼으며 헤롯은 황제 아구스도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이곳에다 황제 신전을
건립해 놓았다. 이런 우상 숭배의 지역에서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게 된 것은 하나
의 아이러니(irony)라 할 수 있다. 한편 누가는 이러한 단락 전환에 있어서 그 서두를
예수께서 기도 중에 있는 사실로 시작하는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전개될 것임
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누가의 복음서 기록에 있어서 예수의 기도는 중요한 사건들과
연결되어지기 때문이다(3:21;6:12;9:28).
무리가...누구라고 하느냐 - 무리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소문을 못들
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자들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물으신 듯하다. 예수께서 지
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리들의 생각이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이었으며, 그는 이미
무리들의 생각을 알고 계셨다(요 6:14,15,26).

=====9:19
세례 요한...엘리야...선지자...살아났다 - 제자들의 답변은 7,8절에서 헤롯이 들
었던 소문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예수의 특별성은 보았으나 그가 단순히 특
별한 선지자 이상의 존재 즉 메시야라는 생각은 가지지 못했다.

=====9:20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예수께서 재차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 것은 무
리의 생각이 틀렸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수많은 이적적
권능들을 나타내 보이셨다(8:22-25,26-35,41-56;9:10-17). 이 모든 일들은 첫째, 그에
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며, 둘째,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
게하려는 간접적인 교육의 일환이었다. 이제 예수는 제자들이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의 이해를 갖게되었을 것이라고 보아 이런 물음을 던지신 것이다. 한편 이 물음은 모
든 신앙인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공개적인 신앙고백의 요청이기도 하다. 즉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을 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분이며 어떻게 경험하는가하는 질문이다.
베드로가...그리스도시니이다 - 질문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졌으나 역시 제자들의
대변인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고 있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기록함에 있어서 각 복음서간에 표현상의 차
이를 나타낸다. 마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로 마
가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로, 요한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되
어 있어 표현상의 차이는 있으나 내용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 호 크리스토스)는 '기름부음을 받은자' 즉 메시야를 뜻하는 것이며 이
고백은 (1)예수의 신분을 증거한 것으로 그가 곧 성경에 예언된 바 하나님의 뜻을 성
취시킨 인물임을 말한다(민 24:17). (2)또한 이 고백은 예수의 신적 속성을 증거한 것
으로 그가 하나님의 본체이자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심을 시인한 것이다(요 10:30;요일
4:2).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이 고백은 지금까지 의문시 되어 왔던 예수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
으나 마태복음에는(마 16:17-19) 훌륭한 고백을 한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칭찬과 약속
이 언급되며, 그 본문은 카톨릭 교회의 교황이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하여 교회의 머
리가 된다는 근거로도 사용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마 16:13-20의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따른 약속'을 보라.

=====9:21
경계하사...명하시고 - '경계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피티마오'(*
)인데 이 말은 '보통 꾸짖다'(4:35)라는 뜻을 가지나 여기서는 '당부하다' 또
는 '심각하게 말하다'는 뜻이다. 여기에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명령하다'(*
, 파랑겔로)를 첨가하여 매우 강도 높은 함구령임을 부각시겼다.
예수께서 이렇게 메시야로서의 정체를 강력하게 숨기려 한것은 (1)유대인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오랜 역사의 억압과 수탈을 당해 오
면서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메시야를 열렬히 대망했다. 따라서 예수가 메시
야시라는 소문이 퍼져나갈 경우에 그들은 예수를 민족 해방 운동의 지도자로 세우려고
들었을 것이다(요 6:14,15). (2)예수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메시야라는
소문이 퍼질 경우 너무나 빨리 그에게 정치적 위협이 다가올 수 있고 그럴 경우 예수
의 지상 사역이 방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3:31).

=====9:22
인자가...하리라 - 본절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네차례의 수난 예고 가운데 첫번째
것으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바로 이어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
이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즉 예수는 민족적 정치적 메시야로서 유대의 주권을 회복하
여 그들에게 태평성대를 가져다 주는 임무를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
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는 임무를 띠고 오신 분이다. 본절의 수난 예고는 예수
에게 네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을 말해주는데 (1)먼저 수난을 당하신다. 이 고난의 배경
에는 사 53:4,11의 예언이 있다. (2)버림을 받으신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아포도키
마조'(* )는 '거부하다', '쓸모 없다고 선언하다'는 뜻으로 공
무원 지망생을 면밀히 조사하고 심사한 후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는 경우나 열등한 화
폐를 검사하여 버리는 경우에 사용되는 동사이다. 여기서는 산헤드린이 예수를 거부하
고 배척할 것을 말해준다. (3)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4)죽은 후 제 삼 일에 살아나실
것이다. 여기서 마가는 '일어나다'는 표현을 능동태 '아나스테나이'(*
)로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수동태 '에게르데나이'(* )를
사용하여 '일으킴을 받는다'(be raised)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죽음과 삶에
하나님의 권능이 개입함을 시사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동사
'데이'(* )는 당위의 뜻인 바, 예수의 수난이 필연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밝
혀준다(사 53장; 요 3:16;롬 8:32).
인자 - 여기서 인자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인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5:24의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을 보라.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장로들'(* , 프레스뷔테
로스)은 지방의 하급 법원에서 재판관의 직무를 수행했던 사람들로 지방의 공회를 구
성하였다(7:3;20:1;22:52). '대제사장들'(* , 아르키에류스)은 1년
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특권과 산헤드린의 의장이 되는 권한이
있다. 본래 구약에서는 대제사장이 종신적 세습제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고 총독들에 의해 임시로 교체되는 관행이 생기면서부터 그 권위가 많이 실추되
었다. 여기서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된 것은 대제사장을 지냈던 사람들까지 포함
해서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서기관들'(* , 그람마튜스)은 '랍
비', '율법사'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는데 대부분 바리새인으로서 각각 공공기관 또
는 사설 단체에 속하여 율법의 이론적 발전, 율법의 교수, 율법의 적용에 힘썼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나열되고 있는데 실제로 이 그룹들은 유대 최고의 권력기관
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무리들이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모두 7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사법권과 행정권을 가지고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기관이었
다. 유대민족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백성들을 옳바른 종교적인 삶으로 인도해야할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차단시키는 역할을 선도적으로 하게된다는 것은
비극적인 유대인의 역사에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9:23
자기를 부인하고...십자가를 지고 - 예수의 길이 분명하였듯이(22절) 이제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라야함을 말해준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누구에
게나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의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기란 실로
어렵다. 첫째로 자기 부정이 요구된다. 자기 부정이란 자신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한다는 말이다. 둘째로 자기 십가가를 져야한다. 십자가는 로
마시대의 형벌 중 가장 잔혹한것으로 고난과 죽음을 상징한다. 세째로 이러한 자기부
정과 십자가를 지는 삶이 지속성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려면 일시적 결심으로만은 부족하며 일관된 신앙 훈련이 요구된다.

=====9:24
목숨을...잃을 것이요 - 자기의 삶을 고집하는 사람 즉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
아의 범주 속에 파묻혀 일신상(一身上)의 부귀 영화만을 위하여 타자를 생각하지 않는
자는 도리어 자신의 목숨을 잃게될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방식을 거부하
는 자는 교회에 핍박과 순교의 시련이 올 때 육신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을지 모르나
최후의 심판 때 진정한 생명을 잃게되고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릴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요 12:25).
나를 위하여...구원하리라 - 마가복음에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고 하여 '복음'
을 첨가하고 있으나 누가는 그것을 삭제하여 예수께 대한 헌신에 초점을 집중 시킨다.
진리를 위해 세상에서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기꺼이 포기할 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잃음이 아니요 얻음이라는 이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의 참 제
자라 할 수 있다.

=====9:25
온 천하를...유익하리요 - 사람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의 문제를 가르친다.
세상이 제공하는 부와 명예와 쾌락을 아무리 많이 차지하고 누려본다 한들 자기의 영
혼과 본성을 잃게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온 천하를 얻기위해 자신의 인생과 영혼의 가치를 소모한
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온 천하를 잃게
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게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마지막에 결
코 잃어버리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계 2:10).

=====9:26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 적극적 의미에서는 복음 증거시 다른 사람들의 부정
적 반응을 의식(意識)하지 말라는 당부이며, 소극적 의미에서는 박해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 즉 예수의 부활, 승천후 교회에 핍박이 닥쳐올 때
예수께서 가르쳐준 삶의 방식이 무기력해 보이며 기독교인들의 삶이 실패자의 모습처
럼 사람들의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자도...부끄러워 하리라 -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재림이 최초로 언급되고있다. 누
가는 마태나(마 16:27), 마가(막 8:38)와 달리 '자기와 천사의 영광'을 첨가하여 "자
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이라는 삼중(三重)의 영광 형식으로 표현함으로
써 재림주로 오실 예수의 영광스러움을 강조한다. 영광스러운 예수의 재림은 사람들을
행위에 따라 심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마 16:27)에 주목하자.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써(히 12:2) 종말 때의 심판주로 재림하시지만 이러한
삶의 방식을 부끄러워 하여 인간적인 방식대로 살았던 사람은 혹 세상을 얻었을지 몰
라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 수치스러운 종국을 맞게 될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믿
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롬 1:16).

=====9:27
여기 섰는...있느니라 - 26절에서 예수 따르기를 거부하는 자에 대한 심판을 확인
하였다면 본절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축복이 약속되고 있다. 본절에서 먼
저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 섰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구별된
사람들'이 보게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서 해답
을 얻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쉽지 않다. (1)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예수의 변모를 목격한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 (2)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기까지
오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사실을 가리킨다는 견해, (3)오순절
이후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 (4)예수의 재림을 가리킨다는
견해 등이다. 이 중 세번째 견해가 유력하다고 본다.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 누가는 마태(마 17:1)나 마가(막 9:2)와 달리 이 연결구를 첨
가하여 앞에서 하신 말씀과 이제 시작되는 이야기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과 이제부터
무엇인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 이 세 명의 제자들은 본 사건 뿐만 아니라 야이로의 죽
은 딸을 살리시는 사건(8:51)에서도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의 결단시에도(마
26:37;막 14:33) 예수를 따로 수행했던 제자들이다. 특히 이 가운데 베드로는 훗날 여
기서 경험한 놀라운 사건을 벧후 1:17,18에 증언하기도 했다.
기도 하시러 산에 -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이 언급하지 않는 산행(山行)의 목적을
밝힌다. 전통적으로 이 산에 대해서는 '헤르몬 산', '메론 산', '다볼산'이라는 추측
들이 있으나 복음서 기자들은 산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누가에게 있어
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이며 앞으로 일
어날 놀라운 계시의 사건도 '기도'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9:29
기도하실 때에...나더라 - 이러한 놀라운 일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일어났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용모가 변화되고'는 문자적으로 '그 얼굴의 모습
이 달라졌다'이다. 마태에 의하면(마 17:2) 예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다고 한다. 이
는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이나 천사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시 84:11;계 1:16;10:1). 한편 누가는 '변형되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메테모르포데'(마 17:2;막 9:2)가 헬라적 사고방식을 따
른 신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옷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흰색은
하늘의 색깔, 천사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며 평화와 순결과 사랑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마 28:3;막 16:5;행 1:10;계 3:4,5;7:14). 이것 역시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밝혀준
다. 또한 '광채가 나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사스트랖톤'(*
)인데 이 말은 '밖으로' 또는 '앞으로'를 뜻하는 '엑스'(* )와 '빛이 번쩍나다'를
뜻하는 '아스트랖토'(* )의 합성어로 예수의 영광스러운 몸에서 발산
되어 나오는 빛의 광채를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결국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예수의 변
모는 (1)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 즉 그가 진정한 메시야라는 사실을(35절) 확
증해 주며 (2)장차 수난을 받는다 하더라도(22, 31절) 다시금 그의 영광을 회복하리라
는 점(빌 2:8-11)을 암시하며 또한 (3)천국에서 영광 중에 계실 예수의 모습과(롬
8:34) 다시금 재림하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26절)을 간접적이나마 보여주는 것이
다.

=====9:30
모세와 엘리야 -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이며 엘리야는 구약 선지자의 대표이자
예언의 대표자이다. 또한 모세는 과거에 시내산에서(출 31:18)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왕상 19:8) 각각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었다.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메
시야를 예언하였고(신 18:15), 엘리야는 메시야의 선구자로 예언되었다(말 4:5). 엘리
야는 산채로 승천하였고(왕하 2:11), 모세도 특이한 방식으로 소천당하여 그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신 34:6). 이제 이들이 변화산에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율법과 예언으로 말해지던 구약이 예수에 의해 복음으로 완성되었으며 결국 모세와 엘
리야의 사역은 예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나타낸다(마 5:17,18).

=====9:31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 - 누가만이 모세, 엘리야와 예수의 대화 내용을 보도하
고 있다. 여기서 '별세'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소도스'(* )인데 이말은
'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의 뜻으로 죽음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낸다. 즉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가는 것으로 적어도 예수에게 있어서 이것은 새로운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엑소도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의미하기
도 하는 바(히 11:22) 예수의 죽음은 죄악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에서 인류를 탈출시키
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강조되는것은 영광스러운 변모의 찬란함 속에서 대
화의 내용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든 사역은 결국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장소로서 제시
되며 그의 전도여행은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9:32
곤하여 졸다가 - 본절 역시 누가만의 기록으로 예수와 두 구약인물이 예루살렘에서
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 제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예수는
기도함으로써 하늘의 계시를 다시 한번 확인하신데 반해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하고 잠
에 곯아 떨어짐으로써 포착했어야 될 중요한 계시를 놓쳤으며, 계속해서 상황을 곡해
하는 결과까지도 초래한다(33절). 이와 유사한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연출되는
데, 그 때에도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는데 반해 제
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자는 실수를 범하며 결국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는
결과를 초래했다(22:42-46).
아주 깨어...보더니 - 제자들은 뒤늦게나마 깨어난다. 아마 예수와 모세, 엘리야를
둘러싸고 있는 찬란한 빛 때문에 깨어났을 것이다. 제자들은 깨어 예수와 두 인물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모습을 묘사한 장면에서 예수의 영광에 두 사람이
압도되어 있다. 이는 예수가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을 능가하는 존재임을 간접 시사한
다.


=====9:33

<변회산>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이 제단은 하늘로부터 온 두 사람이
오래도록 머물기를 원하는 베드로의
바램을 보여준다. 하지만 베드로는
조금 전에 들었던 예수의 수난 예
고와(22절) 그것을 확증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를(31절) 충분히
깨닫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그리
스도의 제자로서 겪어야하는 고난과
그 이후의 영광을 망각하고
현실에 안주(安住)하기를 도모하는
비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초막 셋을 짓되 - 이 초막은 숙곳에서 장막절에 사용했던 것(출 13:20)과 같이 나
뭇잎이나 기타 일시적인 재료로 지은 움막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는 텐트나 장막을
가리킨다. 아마 베드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천상적인 영광의 임재를 계속해서 느끼
고 싶은 심정에서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초막 셋'이라는 표현은 예수를 다른 두
사람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영적 무지를 반영한다.

=====9:34
구름 - 구름은 미래에 다시오실 인자와 관련되기도 하고(단 7:13) 성도들을 하늘로
들려 올리는 수단으로도 사용되며(계 11:12), 신 구약 중간시대 문학에서는 메시야의
도래와의 관련성 속에서 등장하기도 하였다(위경 2 Baruch 53:1-12;4 Ezra 13:3). 구
름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경우이다(출
16:10;19:9;24:15-18;33:9). 특히 출 24:15-18에는 본문과 매우 유사한 병행구를 찾아
볼 수 있다. 예수와 두 인물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이어 하나님 자신의 임재로 말미암
아 상황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저희를 덮는지라 - 여기서 '저희'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1)예수와 두인물 그리고 3제자 모두(Schurmann), (2)모세와 엘리야만
(Greijdanus, Williams), (3)예수와 모세, 엘리야(Godet, Knox, Marshall). 이 중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무서워하더니 - 신적인 권능 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
끼기 마련인데 이는 인간의 죄성과 유한성 때문이다(8:25;24:4,5).

=====9:35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 - 구름 속으로부터 들려온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음성
이기에 그만큼 이 선언은 엄숙하고 확정적이다. 또한 이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 들려왔던 음성과도 비슷하다(3:22).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고백한 예수 이해
는 이제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더이상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요
한에 의하면 수난 주간에도 한번 더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요 12:28).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 사역의 시작과 절정기와 마지막에 주어진 것이며 이것
은 그 사역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의미한다. 한편 누가는 마태
(마 17:5)나 마가(막 9:7)와 달리 '사랑하는'을 생략하고 '택함을 받은 자'를 첨가하
고 있다. 누가는 이런 표현을 통해 예수의 삶에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었음과 아
울러 예수의 권위의 출처가 초월적인 것임을 말해 준다.
저의 말을 들으라 - 이 명령은 신 18:15의 반영으로 이제 예수의 정체(正體)가 분
명히 드러난 이상 그분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그의 말을 들으려 하
지 않거나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가정한다면 이 명령은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 선택 여하에 따른 필연적 심판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하여
튼 본문에서의 강조점은 제자들의 순종에 있으며 예수께서 제시하는 사역의 목적과 방
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신하지 말라는 것이다(마 16:21-23).

=====9:36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 누가는 상황이 끝나는 장면을 매우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마 17:6-8 비교).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지고 '예수만' 남아 있음이
'오직'이란 뜻의 '모노스'(* )로 강조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는 구
약의 위대한 두 인물도 결국은 예수의 정체를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보조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사라질 뿐 주인공은 '오직 예수' 뿐이다. 그만큼 예수는 탁월하신 분이라
는 사실이 강조된다.
그 때에는...아니하니라 - 자기들이 본 사실을 잠정적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음
을 말하는데 아마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에는 말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듯하다(마 17:9;
막 9:9).

=====9:37
이튿날 - 누가만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본문에 의하면 변화산의 영광
이 밤사이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마태나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엘리야와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대한 대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마 17:10-13;막 9:11-13) 누
가는 그 이야기를 생략한채 바로 무리들과의 만남을 서술한다. 이 무리들 중에는 베드
로, 요한, 야고보외의 제자들도 함께 있었고(40절), 막 9:14에 의하면 서기관들도 있
었다고 한다.

=====9:38
내 외아들이니이다 - 무리들이 예수를 기다리고 그 중에 한 사람이 딱한 사정에 대
하여 도움을 호소하는 모습은 8:40,41에 있는 야이로의 외딸을 살리신 사건과 유사하
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외아들'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는 피해자들이 당하는
고통의 극심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고통이 극심한 만큼 하나님의 은총도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릴 때(7:12)나 야이로의 외동딸을 살릴
때도(8:41) 마찬가지였다. 한편 누가는 아버지의 간청을 묘사함에 있어서 마가(막
9:22)의 '불쌍히 여기다'(* , 스플랑크니조마이)를 '돌아보
다'(* , 에피블렙사이)로 대치시키고 있는데 이 단어는 '위로'를 뜻
하는 '에피'(* )와 '보다'를 뜻하는 '블레포'(* )의 합성어로 환자를
정밀하게 검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의학 용어이다. 의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누가의
독특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9:39
귀신이 저를 잡아 - 마태는 이 아이가 간질병에 걸렸다 하고(마 17:15), 마가는 벙
어리 귀신에 들렸다고 하나(막 9:17) 누가는 간략하게 귀신에 붙잡혔다고만 서술하고
있다. 누가로서는 이 사건의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확증을 받은 '아들'과 아들
의 사역을 방해하는 핵심 세력인 '귀신'과의 싸움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졸지에...떠나 가나이다 - 이런 증세는 의학적으로 규명할 때 간질병의 증세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 간질병 배후(背後)에는 귀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복음서 기자들
의 공통된 진술이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의 문제는 간질병과 예수와의 관계가 아니라
귀신과 예수와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9:40
제자들...능히 못하더이다 - 결국 서기관들을 포함한 무리들의 변론 주제가(막
9:14) 제자들의 무능력에 관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신적 정체를 드러내고 있을 동안 예수와 함께 있던 세 제자는 잠을 자고(32절), 아래
에 있던 제자들은 귀신에 붙잡힌 아이를 구하지 못해 무리들로부터 실망을 사고 서기
관들로부터 야유와 비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인 바, 이는 제자들의 아둔함을 잘 보여준
다. 본래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온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능히 예수를 대신하여 귀신을 쫓아내 주어야 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예수로부터 권능을 받았고 그 권능으로 능히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1-6
절). 그렇다면 제자들의 능력이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
이 없었기 때문이다.

=====9:41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 이 꾸중은 믿음 없는 제자들과 거기 모인 모든 무리
들에게 하신 것임에 분명하다. 한 아이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과 다른 입
장의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는 서기관들과 한 아이의 고통에 대해 단순한 호기심을 발
동시켜 이적(異蹟) 자체를 즐기려는 무리들에게 적합한 책망인 것이다. 결국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아무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패역한 무리들은 아이와 아버지의
고통을 더욱 극대화 시키는 역할 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너희를 참으리요 - 본절에 나타난 '믿음이 없는', '패역한' 등의
표현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들을(신 32:5,20) 반
영하며, 본문의 말씀은 더이상 간과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패역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 백성들을 품안에 품으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를 연상시킨다(사 46:4).
이제 예수의 지상 사역은 예루살렘에서의 종국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지만 제자
들은 여전히 믿음의 결핍을 노출시켰고 거짓 지도자들에 의해 인도되는 무리들은 점점
더 패역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느끼는 예수의 격한 감정은 '호'(* )라는 탄식어가
잘 나타내 준다.

=====9:42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 '올때에'는 문자적으로 '아직 저가 오고있는 동안'
의 의미로 아직 소년이 예수 앞에 도착하지 않았을 때부터 귀신이 도발을 시작했음을
뜻한다(비교, 막 9:20). '거꾸러뜨리고'(* , 엘렉센 아우톤)
는 전투나 레슬링에서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타격을 가하는 동작을 표현하는 말로
아이의 발작이 귀신의 공격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동시에 귀신이 예수의 사역
을 좌절시키려는 의도에서 감행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더러운 귀신을...낫게하사 - 귀신의 격렬한 도발 행위는 예수의 꾸짖음 앞에서 무
기력하게 멈춰졌고 결과적으로 아이는 괴롭힘당했던 모든 질병들로부터 치유를 받았
다. 한편 마가(막 9:22-24)는 아이의 아버지가 믿음을 갖게 되는 이야기를 전해 줌으
로써 신앙적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그 부분을 생략하여 예수의 놀라운
치유 능력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 조금전의 엄한 꾸짖음(41절)과 달리 이번에는 부드러운 사
랑과 자비로운 행위로 아이를 아비에게 인도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런 행위는
7:15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본질적 성품이 사랑임을 나타내 준다.

=====9:43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확인은 예수의 귀신 축사를 통해 분명히 증명되었으며, 사람들은 이 사건 속에서
예수안에 하나님의 권능이 충만하게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예수의 행위를 보면서 그의 정체를 알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수준까지 이
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제껏 겪지 못한 놀라운 경험을 했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9: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 사람들이 예수의 행함을 기이히 여기고 있을 때 예
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다시 한번 수난 예고를 하고 있다. 이 수난 예고는 22절에 이
어 두번째에 해당하며 여기서는 '너희'(* , 휘메이스)가 강조적으로 쓰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다른 사람들이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기적들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든지 제자들은 이 말을 명심해 들어야 한다는 것이
다. '이 말들'이란 계속 이어지는 '수난 예고'를 가리킨다.
인자가...넘기우리라 -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수난 예고는 누가복음 전체에 기록
되어 있는 네 번의 수난예고 가운데 두번째 것이다(9:22,44;18:31-34;22:21-23). 여기
서 '넘기우다'(* , 파라디도스다이)는 수동태의 표현은 가룟
유다에 의한 배반을 예고하며 '사람들'은 22절에 언급된 바 있는 산헤드린(Sanhedrin)
을 가리킨다. 물론 가룟 유다의 배반 이면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었음이 전제되
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마태(마 17:23)나, 마가(막 17:31)와 달리
누가는 여기서 '부활'에 관해서는 언급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9:45
알지 못하였나니 - 제자들은 두 번에 걸쳐 주어진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
하였다. 제자들은 첫째, 변화산에서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變貌)를 목격하고 이어서
귀신 쫓아내는 권능을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게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
던 까닭에, 둘째 수동태의 '히나'(* )절에 의해 확인되는 바 제자들의 몰 이해
배후에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
고 있다. 이러한 '숨김'에 대한 진술은 본서에만 나오며, 일정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제자들이 무지한 상태일 수 밖에 없음을 설명했다. 여기서 누가가 더 중요하게 말하고
자하는 것은 예수께서 걸으셨던 수난에로의 길은 '부활' 이후에 그들이 갖게 될 성서
적 지식과 부활의 빛에서 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Marshall).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것에 대해 묻
기조차 두려워 하였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
고 있음을 뜻하며 동시에 23-27절에 기록된 바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길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스스로 사도로서 사역할 수 있
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9:46
누가 크냐 - 마가복음에서(막 9:33)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이르는 노중(路中)에 논
쟁을 벌였으며 가버나움에 이르러 예수의 추궁이 있었다. 누가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서술을 생략한 채 문제의 쟁점만을 취급한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의 질문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한 것이었다(마 18:1). 여기서 변론(* , 디알로
기스모스)은 '논쟁'을 의미하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하였음
을 시사한다. 불과 일주일 쯤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 부인을 가르치셨고(23,24절), 조
금 전에는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수난을 제차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44절) 제자들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크냐 하는 문제는 결국 메시야가 일으켜 세
울 왕국에서 누가 높은 요직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때 제자들
은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아(ego)를 버리지 못하고
지위나 명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찬 제자들로서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할 수 없
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9:47
예수께서...아시고 - 제자들은 예수 몰래 자기들 끼리 논쟁을 벌였으나 예수께서는
신적인 능력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다툼을 이미 알고 계셨다.
어린아이 하나를...세우시고 - 누가는 마태나(마 18:3,4), 마가(막 9:35)가 기록하
고 있는 '큰 자'에 대한 결론적 서언을 생략한 채 바로 어린아이를 데려오는 장면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9:48
내 이름으로...영접함이요 - 예수께서 제자들의 사고 방식을 교정시켜주기 위해 간
접적인 방식으로 교훈을 베푸신다. 먼저 '내이름으로' 행하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명예
나 지위가 예수께 완전히 종속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모든 제자들의 이름은 예수라
는 이름 앞에 따로 드러날 수 없으며 모든 영광이 예수의 이름에 돌려져야 함을 뜻한
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시금석(試金石)은 예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가의 여부인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런 어린아이 하나'라고 하여(막
9:37) 어린이 일반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데 비해 누가는 '이 어린아이'라고 하여 바
로 제자들 앞에 서 있는 어린이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실제로
어린아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는 사
람 혹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나를 영접하면...영접함이라 -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셨으므로 예수를 영접하면 그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이 논리는 성도들의 대인 관계에 있어 중요한 열
쇠가 된다. 허물과 죄로 가득한 인생들을 자연 모습대로 대할 때에는 누구나 환멸의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과 주님의 피로 새로 태
어난 생명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사랑과 헌신의 태도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 - 작은 자가 큰 자라는 역설적 진리는 23-25절에서 말씀하
신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역설적 진리와 갖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큰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이며 세상에서 보잘것 없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행위의 대가로 지위나 명예를 얻어 보려는 욕망을 버린 사람이다. 한편
본문에서 '가장 낮은 자'와 대비되는 개념을 '가장 큰 자'가 아니라 단순히 '큰 자'라
고 표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데는 비교 우위의 개념이 적용되
지만 높아지는 데에는 비교 우위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9:49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았다. 제자들은 그가 자기들과 같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단의 일원이 아
니라는 이유로 그 사람의 행위를 금하였다. 여기서 제자들이 취한 행동은 그들만이 예
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베풀 수 있는 제한된 자격을 가졌다는 자의식(自意識)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1, 2) 아울러 이러한 행위의 이면에는 자기들의 실패에 대
한(40절) 열등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9:50
금하지 말라...위하는 자니라 - 그 사람은 예수에게서 특별히 권위를 부여받지는
않았지만 예수께 대한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11:23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
는 자니라"는 말씀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바의 요지는 이러하다.
익명(匿名)의 귀신 추방자는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자의 참경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
고 그가 확신하는 바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의 행
위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했던 일을(6, 42절) 한 것이므로 예수와 제자들을 위하는
자인 셈이다. 이것은 어느 집단에 소속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하는 일
의 내용과 지향점이 중요함을 가르친다.

=====9:51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 여기서 '승천'(* , 아날렘프세오
스)은 '위로'를 뜻하는 '아나'(* )와 '올리다'의 의미를 갖는 '렙시스'(*
)의 합성어로 '들어 올라감'이란 뜻이다(24:51). 여기서는 '죽음'(31절) 대신 '승
천'이 언급됨으로써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천이라는
영광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차가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플레로오'(*
)는 본래 '완성하다', '성취하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승천을 성취할 시
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주며 동시에 이런일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정되었음과 예
수께서 그것을 알고 계심을 분명히 밝혀준다.
예루살렘을...굳게 결심하시고 - 갈릴리로부터 예수의 최종 종착지인 예루살렘에로
의 대전환이 언급되고 있다. 승천은 곧 수난과 죽음을 전제한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그
일이 일어날 장소인 예루살렘에로의 행로를 굳은 결심으로 시작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굳게 결심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어귀는 '...로 얼굴을 향하다'는 셈어적인 표현
으로 굳게 마음을 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곧 죽음을 뜻한다 하
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는 죽음을 향한 결단을
하신 것이다(22:42;요 10:11).

=====9:52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경유하는 것
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런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역사 깊은 불화와 반목
(反目)이 있어(왕하 17:24-41;요 4:9)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과 사
마리아인 사이에는 충돌이 있었다. 그리하여 순례객들은 가까운 사마리아 길로 가지
않고 먼 베레아 지방으로 지나다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을 택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른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사마리아를 멸
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 주며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 하셨음을 보여준다.

=====9:53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 사마리아인들은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중앙 성소
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신 12:4-14). 유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
은 예루살렘성전에 대응하는 성전을 그리심산에 따로 지어서 이것을 자기들의 중앙 성
소로 삼았다(요 4:20). 이런 종교적 갈등 때문에 저들은 예수께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
지 않은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예수의 예루살렘행이 다시 한 번 확인되며,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의 조그마한 난관은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겪을 고초를 암시하
는듯 하다. 또한 이 사마리아인들은 전통적 관습에 의한 편견에 사로잡혀 진정한 성전
이신 예수를 만나 구원의 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
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예수의 예루살렘행을 방해하는 불행을 자초하였다.

=====9:54
야고보와 요한이...원하시나이까 -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우뢰의 아들'
(Sons of Thunder, NIV)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는데(막 3:17), 그 까닭은 본절에서 보
는대로 그들의 성격이 매우 급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이들은 순간적으로 흥분하여 하
나의 보복 조처를 제안하는데 그 내용은 아하시야 왕 당시 엘리야를 모욕했던 자들에
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그들을 사른 사건(왕하 1:10-12)을 반영한다. 어쨌든 제자들
은 복음이나 메시야 사역의 본질을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상태였으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세상을 구원하며 잃어버린
자들을 건지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19:10;요 3:17;12:47)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9:55
꾸짖으시고 - 구체적인 내용없이 간략하게 언급된 '꾸짖으시고'는 제자들의 제안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일축하셨음을 말해준다. 제자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
의해 보복을 요구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구약적 대응방식 즉 '이에는 이로 눈에
는 눈으로'를 거절하시고 도리어 꾸짖고 있다. 제자들은 엘리야의 방식 즉 '보복의 방
식'을 요구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사랑의 방식을 말씀하심으로써 엘리야를 능가하는 분
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또한 여기 나타난 예수의 태도는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저항
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에 대한 하나의 복선(伏線)이라 할 수 있다.

=====9:56
다른 촌으로 - 누가는 지리에 관한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고 단지 다른 곳으로갔다
고만 하여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한 사실 자체에만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예루살
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없고
그것을 방해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보복적 행동을 취할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는 먼 길로 돌아가는 비효율적 방식을 택하셨고 폭력이 아닌 평화의 길을 택하셨다.
그것이야 말로 참된 삶의 방식,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교회도 이러한 예수의 방
법을 따를 때 모든 난관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다. 한편 학자들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간 '다른 촌'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추측하는데, (1)사마리아에 있는 다른 마을
(Klostermann, Zahn, Plummer), (2)사마리아로부터 다시 돌아간 갈릴리의 어느 촌
(Bruce, Gilmour, Farrar), (3)베레아 접경의 촌 등이 그것이며 이중 어느 견해가 정
확한지 단정 지을수 없으나 9절과 10:10과 17:11의 본문을 참고할 때 세번째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9:57
혹이...좇으리이다 - 여기서 '혹이'는 불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헬라어 부정 대명사
'티스'의 번역이다. 누가는 이렇게 불특정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나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에서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다(마 8:19). 학식, 재력, 권력에 있어서 유대사회의
최고 상위계층에 있는 서기관(22절 주석 참조)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말은 그가 단지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갖
겠다는 뜻이 아니라 열 두 제자들처럼 예수를 수행하며 섬기는 제자가 되겠다는 의미
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의 어떤 점을 보고 그를 따르려 하는지 그리고 어떤모습
의 제자상을 가지고 그의 제자가 되려고 지원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계속 이
어지는 예수의 답변(58절)의 빛에서 볼 때 아마 이 지원자는 예수의 권능(마 8:16)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그렇게 능력 많으신 분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에 부러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광에 동반되는 아픔, 능력 이전에 가
난함의 의미를 알고 지원했어야 했고 무엇보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결심은 자기 부
인(自己否認)의 의미를 알고 난 후에 했어야 했다.

=====9:58
여우도...머리 둘 곳이 없도다 - 암시성이 깊은 예수의 대답은 이 지원자의 의도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으며 그런 생각으로 제자가 되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
을 뜻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 명예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도리어 여우나 새와같은 짐승들에게도 허락된 최소한의 삶의 터전조차 보장받지 못한
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의. 식. 주 문제가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거기에 덧붙여 입신
양명(立身揚名)을 지향하는 출세주의가 아니라 때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안정
된 삶의 거처도 없이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자기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
이다(23절). 허영심에 사로잡혀 예수의 제자가 되려했던 이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9:59
부친을 장사하게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이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식은 가
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였다. 장례의 의무는 율
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 예배, 유월절 제사, 할례 시행 등 보다도 우선권을 가졌으며,
보통 죽은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하는 사제들도 그들의 친척이 죽은 경우에는 시체를
만질 수 있었다(레 21:1-3). 그 만큼 장례를 치루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밖에
연고자(緣故者) 없이 죽은 사람을 묻어주는 일은 이생과 내생에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
된 사랑의 행위로 여겨졌다. 유대사회의 장례 풍토가 이런만큼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
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의 명분은 누구도 반대할수 없는 적절한 것이었다.

=====9:60
죽은 자들로...장사하게 - 이말은 그 내용의 급진성 때문에 해석하여 적용하기가
매우 난해하여 여러가지의 견해가 제기되었던 본문이다. (1)아람어를 잘못 번역한 것
이다(Black). (2)본문의 표현은 역설적인 것으로 장례지내는 일은 반드시 치러지고야
말리라는 의미이다(Manson, Sayings of Jesus, p.73). (3)이 표현은 비유대인 계열에
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렇다고 하여
이 말을 보편적인 행위 규범으로 해석하여 주의 일을 위하여 가정에 대한 의무를 저버
려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안될 것이다. 본문의 의미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
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하라"는 뜻으로 세상 일은 세상 사람
들에게 맡기고 오직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한다. 즉 성도들이 예수를 좇음에 있어서 결정적인 우선 순위를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 중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자세의 문제로서 그것은 뼈를 깎는 아픔을 동반하는
결단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 이 문구는 누가만의 것으로 콘첼만(Conzelmann) 같은
학자는 본문에서 회개의 긴박성으로부터 전도의 긴박성으로의 전이를 보기도 한다.
아무튼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는 예수를 따르는 일이요 그러한
예수 제자의 길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음을 말해준다.

=====9:61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 이 장면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좇기 전에 가족과 마지막
입맞춤을 하게 해달라고 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왕상 19:20). 그러나 뒤이은 예수의
대답을(62절) 통해 유추하건대, 이 사람의 마음은 가족에 대한 염려로 가득차 있었으
며 작별인사 중 가족의 만류가 간절해질 경우에는 가정에 발목이 묶일 가능성이 많았
을 것이다.

=====9:62
손에 쟁기를...돌아보는 자 - 농경문화의 산물인 이 격언적 표현은 B.C. 80년의 헤
시오드(Hesiod; 그리스의 교훈 시인)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전통
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격언적 문구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신이 가르치고자하는 교훈
의 소재로 삼으시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손에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자의
유일한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이며,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써서 뒤를 돌아 본다면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좇는 자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다. '따르는
자'는 이 목적의식을 잠시도 망각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합당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데토스'(* )는 '잘 놓여 있는', '적합한', '순응하는'의 의미를 갖는
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선 순위에 대한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궁극적인 목적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람이 '적합한'자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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