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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 10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1|조회수16,185 목록 댓글 0

누가복음 제 10장
=====10:1
이후에 - 이 표현은 단락의 전환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주께서 - '주'의 헬라어 '호 퀴리오스'(* )로 7:13이후 처음 사용되
며 제자들을 세워 사명을 부여하는 경우에도 이를 사용한것은 이번이 처음이다(9:1).
리펠트(Liefeld)같은 학자에 의하면 이 칭호는 이하의 교훈이 바로 예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또 헨드릭슨(Hendriksen)같은 학자는 이
명칭이 구세주의 소유권, 권위,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의미 외에도 여
기서 주어지는 예수의 제자 파송이 전세계의 열국에 대한 처음의 전파를 의미한다고
할 때 이 중요한 사역을 지시하시는 예수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하여 이러한 칭호가 사
용된 듯하다.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 여기서 '달리'(* , 헤테루스)는 앞에 있었
던 열 두 제자의 파송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된 듯하며 '70인'은 논란이 많은 부분이
다. 이것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사본에 따라 어떤 것에는 72인으로, 어떤 것에는 70인
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70인을 뒷받침해 주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1)이스라엘의 장로가 모두 합하여 70인이었다(출 24:1;민 11:16-17;24-25). (2)산헤
드린의 구성원이 70인이었다. (3)세계에는 70개의 민족들이 있다고 여겨졌다(창 10
장). 다음으로 72인을 주장하는 근거는 (1)이스라엘의 장로는 70인 뿐 아니라 72인으
로 보는 견해도있다(민 11:26의 엘닷과 메닷을 포함하여) (2)창세기 10장에 대한 70인
역(LXX)은 세계의 민족을 72민족으로 서술하고 있다. (3)70인역을 준비한 장로들은 모
두 72명이었다. (4)세계에는 72명의 왕자들과 72개의 언어가 있다고 여겨졌다(위경 에
녹 3서 17:8;18:2-3;30:2). 이러한 논거(論據)들 중 앞의 (3)과 뒤의 (2)가 본문의 맥
락에 가장 잘 적용된다고 본다. 즉 창세기 10장에 대한 해석에서 히브리 원문을 택하
느냐, 70인역을 택하느냐에 따라 70인도 될 수 있고 72인도 될 수 있으나 그것들이 세
계의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는 동일한 뜻을 갖는다고 보아 예수께서 70(72)
인을 선택한것은 후대 교회가 세계 모든 나라들에 복음을 전파하게 되는 것을 예견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세우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데이크센'(*
)은 '공식적으로 임명하고 선포하사'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이번에 파송하는
70(72)인의 제자들 역시 지난번의 12제자와 동일한 권위로 보내어졌음을 의미한다.
둘씩 - 열 두 제자를 파송할 때처럼(막 6:7) 이번에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떠나게
하신다. 제자들을 둘씩 파송한 것은 서로 돕고 격려하며 유효한 증인이 되게 하기 위
해서다(민 35:30;신 19:15;전 4:9;마 18:16;딤전 5:19). 이것은 후에 제자들의 설교나
초대교회 선교의 모델(model)이 되기도 하였다(행 3:1;4:1,13,19;13:1-3;15:40;15:27,
39,40;7:14-22).

=====10:2
추수할 것은...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 본절은 마 9:37,38과 평행을 이루는 말씀
으로 마태복음에서는 12제자들을 파송하기전에 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70인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틈나는 대로 제자들에게 복
음 전파의 시급함을 말씀하셨을 것으로 보인다. 구약적 이미지에서 볼 때 흔히 추수는
하나님의 심판에 적용되며 이런 경우 추수를 하는 자는 주로 천사들로 묘사된다(욜
3:13;계 14:15-20). 그러나 여기서는 심판이 아니라 은혜의 측면에서 복음의 전파를
말하며 그 임무가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또한 본절은 일꾼이 부족한데서 오는 안
타까움과 그나마 있는 일꾼들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일꾼들은 자기의
책무를 다하는 동시에 주인에게 일꾼을 증원(增員)해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물론 여
기서 주인은 하나님이며 일꾼들은 제자들이다. 제자들은 임의대로 일꾼을 부를 수 없
다. 다만 일꾼을 보내는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으며 그분이 보내주는 일꾼만이 진정으
로 그분의 추수를 돕는 일꾼이 되는 것이다.

=====10:3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 마 10:16에는 '양'(* , 프로바톤)이라
고 되어있는데 본문에서는 '어린 양'(* , 아렌)이라고 하여 제자들의 연약함이
지적된다. 양은 용감하고 능력있는 목자의 보호가 없으면 이리에게 무방비 상태로 당
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짐승이다. 또한 '양'은 선한 것의 상징이라면 '이리'는 악한
것의 상징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제자들이 세상의 악한 세력과 영적인 싸움을 수
행해야 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서 영적인 선한 싸움을 할때
절대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방심해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도 전혀
없다. 왜냐하면 강하고 능력있는 목자이신 예수께서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기 때문이
다. 결국 제자들은 자기들의 연약함을 늘 확인하여 겸손해져야 하며 늘 하나님을 의지
하여 강해질 수 있어야 한다(엡 6:10-17). 한편 마샬(Marshall)은 '보내다'(*
, 아포스텔로)라는 동사가 제자들에게 적용되는 점을 주목하여 사도직의
기원(起原)이 '선교'의 개념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다.

=====10:4
전대(纏帶)나 주머니나 신 - 마태는 금이나 은 또는 돈을 넣어다니는 '허리띠'(*
, 조네)로 표현하는데 누가는 '지갑'의 의미인 '발란티온'(*
)을 사용하고 있다. 허리띠에 돈을 넣어 묶는 관습 보다는 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것
이 더 후대의 관습이라고 볼 때 누가는 도시인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적절하게
단어를 바꾼 것이라 하겠다. 주머니(* , 페라)는 일용품을 넣는 가방이며(9:3)
신을 가지지 말라는 것은 맨발로 다니라는 것이 아니라 여분의 신을 지참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제자들은 9:3에서 처럼 여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품 조차 소
유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그들에게 부여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함에 있
어서 전적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문안하지 말며 - 동양에서는 서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는 것은 다소 시간이 걸리
는 일이라 하더라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의 인사를
금한 것은 복음 전파의 긴급성을 강조한 것이다(Marshall).

=====10:5
먼저 말하되...평안할지어다 - 지금까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는 행해야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 '평안' 혹은 '평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 )는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이 이웃의 안부를 물을
때(삼하 8:10;11:7;왕하 4:26), 사람을 만났을 때(왕하 5:21), 헤어질 때(삼상 1:17;
삼하 15:9) 하던 '샬롬'(* )에 상응하는 인사말로 샬롬의 의미가 '평강을 빕니
다'(스 4:17), '평안하냐'(왕하 4:26;5:21), '평안히 가시오'(삼상 1:17)인 만큼 '에
이레네'도 같은 범주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지시
하신 인사 내용 자체는 당시의 일반적인 인사법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제자들에게 '먼저'(* , 프로톤) 인사의 말을 하라고 하여 그들이 친
절하고 공손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인데 아마 이것은 예수의 권위를 부여받은
제자들이 그 권위에 도취되어 교만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절의 인사가 일반적인 인사말이라 해서 일반적인 의미의 단순한 바램이나 기원을 뜻
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주시해야 한다. 앞으로 제자들이 흩어져 선교
(mission) 활동을 할 때 하게 될 '평안'이라는 인사는, 하나님의 구원이 도래함을 뜻
하는 차원에서의 '평안'을 의미하며(요 14:27;행 10:26), 하나님께 기원을 둔 하나의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10:6
평안을 받을 사람 - 헬라어 '휘오스 에이레네스'(* ) 즉
'평안의 아들'(Son of Peace, R S V)은 히브리식 용법으로 '부활의 아들'(눅 20:36),
'빛의 아들'(눅 16:8), '지옥의 아들'(마 23:15), '멸망의 아들'(요 17:12) 등과 같은
유형의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어떤 사람의 성품과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
는 태도에 따라서 겪게될 응분의 운명을 말해주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평안의 아들'
은 '평화에 합당한 사람',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사람'의 의미로 볼 수 있으며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마 5:9). 이런 사람들에게는
제자들의 인사가 단순한 기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선물로 주어지게 된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말이 지니는 힘에 대한 히브리식 믿음이 깃들어 있는 바, 구약에
서 족장들의 축복은 취소할 수 없는 유산(遺産)으로 여겨졌었다(창 27:37). 그러나 제
자들의 축복은 수용자의 태도 여하에 따라 머물기도 하고 되돌아 오기도 한다는 점에
서 개인의 책임성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10:7
그 집에...옮기지 말라 - 여기서 '그 집'이란 물론 '평안의 아들'이 있어 제자들
을 영접해 주는 집을 뜻한다. 여기서 '그 집에'(* , 엔 아
우테 테 오이키아)는 강조적 표현으로 직역하면 '그 집 자체에서'(in the house
itself)이며, '바로 그 집에'(in that very house)란 뜻이다. 제자들은 대충 아무 집
에서나 유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의 아들'이 있는 바로 그 집에 머물러야 했다. 열 두
제자들도 그랬던 것처럼(9:4) 70(72)인의 제자들도 여러 집을 옮겨다니지 말고 한 집
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열 두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더 나은 대접을 받
기 위해 옮겨다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한편 제자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보답으로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받을 권리가 있다(갈 6:6). 말씀의
사역자들이 그들이 섬기는 성도들로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받는 것의 정당성에 대해서
는 딤전 5:18;고전 9:3-18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물질적 제공을 받는
것이 '상전'으로서가 아니라 '일꾼'으로서의 삯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되어야 하는데 그
것은 제자들이 겸손해야 함과 그들이 받는 물질적 대가는 풍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
계를 위함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10:8
차려 놓는 것을 먹고 - 본문의 말씀은 단지 앞절에 대한 동의어적 반복으로 보기보
다는 고전 10:27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유력하다(Marshall,
Hendriksen). 즉 제자들 중 대다수가 유대인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전통적으로 지켜
내려오던 음식에 대한 종교적 관습에 젖어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라
도 이방인의 동네에 복음을 전파하러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때 그들 앞에는 유대적인
음식 규정에 의하지 않은 음식상이 차려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본문의 말씀은
그러한 상황에서 음식물에 대한 유대적 관습에 매여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주어졌다고 보아야한다는 것이다(행 10:9-16). 그렇다고 할
때 이 말씀도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는(막 7:15,16) 예수의 사상과 일맥 상통한다.

=====10:9
병자들을 고치고...하나님의 나라...가까이 왔다 - 여기서도 열 두 제자들에게처럼
병을 고치는 능력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대한 사명이 주어지고 있다(9:2).
예수에게 있어서 각종 질병을 고치는 일은 자신의 메시야됨을 증거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해 임재(臨在)하는 것에 대한 표상(表象)이었다(마
11:5;눅 7:21-22). 그런데 본문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가까이 왔다'로 번역된 헬라어
'엥기켄'(* )에 대한 해석이 '가까이 다가오다'로도 '당도하다' '이르
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막 1:15에서는 아직 당도하지 않고
가까이 이른 상태를 묘사하는 한편 눅 11:20(마 12:28과 평행)에서는 이미 당도한 것
으로 쓰여진다. 눅 11:20에서는 귀신 축사(逐邪)가 곧 하나님 나라의 임재에 대한 표
시로 제시된다. 그리고 귀신들림에서 해방되고 병으로부터 온전해진다는 것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상태로부터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됨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현상들은 하나님 나라의 특징적 요소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병을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와졌다고 선포할때 그 말의 의미는 시.공간 속에 도래하는 완성
된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특징적 효력들이 발생했
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고 느낄 수 있을 만큼 가시화(可視化) 되었음을 선
언하는 것이다. 여기에다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
엥기켄 에프 휘마스)는 구문이 문법상 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아직'(not yet) 완성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already) 하나님 나라의 효력이 발생하기 시작했음을 말
해준다.

=====10:10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 이번에는 영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의 행동 지침을
일러주고 있다. 여기서 '영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코마이'(* )는
사신들(ambassadors)을 환영하거나 그들이 전달해 주는 통지문을 환영하는 것을 묘사
하는 말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 제자들 개인의 자격이나 권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것임을 가
리킨다. 또한 '거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테이아'(* )는 '넓은 길'
또는 '노천의 넓은 거리'를 뜻하는데 이것은 거절하는 사람 또는 동네에 대한 제자들
의 행동이 공개적이어야 함을 뜻한다.

=====10:11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 복음을 거절하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하
는 행위로서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것이다(9:5 주석 참조). 결국 이런 행위
는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한 행위로 인해 필연적으로 결과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그
책임이 전적으로 그들에게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경고성 행위는 반대나 불이익
을 뜻하는 여격이 사용된 '너희에게'(* , 휘민)로써 더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 이 말씀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마
지막까지 회개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즉 그들이 복음을 거절한 행위에 대해서
는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나
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2)복음을 거역하고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엄연한 사실로서 다가오며 어떤 악한 세력에 의해서도 지연되거나 저
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10:12
저날에 소돔이...쉬우리라 - '저날'은 마태복음의 병행 본문에 기록된대로(마
10:15) '심판의 날'을 뜻함이 분명하다(21:34;마 7:22;살후 1:10;딤후 1:12,18). 또한
마태는 구약적 표현에 일치되게 '소돔과 고모라'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고모
라를 생략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악의 상징이며(사 1:9;렘
50:40) 본래 이 두 성읍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 심판을 받아 멸망
한 도시였다(창 19:24-28). 한편 '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는 표현은 심판의 강약을 뜻
한다기 보다는 그들의 심판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확정지우며 그 심판의 준엄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0:13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 여기서 '화 있을 진저'는 반대자들에 대한 보복 보다는 불
행한 운명을 맞게될 대상에 대한 슬픔과 유감을 표시한다(6:24). 고라신은 마태복음의
병행본문(마 11:21)과 이곳을 제외하고는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지명이다. 고라신은 당시의 가버나움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4km정도 떨어진 곳에 위
치한 성읍인데 현재는 텔 흄(Tel Hum)으로부터 동부쪽으로 5km정도 거리에 있는 '케라
제'(Kerazeh)일 것으로 추측한다. 예수께서 이 곳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셨는
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두로'와 '시돈'에 비유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셨으리라 추측된다.
벳새다 - 이 곳에 대해서는 9:10의 주석을 참조. 예수께서 이곳에서 사역을 하신
기록은 9:10-17에 나와 있다.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 - 이 문구는 앞에서 언급한 두 장소에서 행하신 사역들이
성경의 기록보다 훨씬 많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권능'(* , 뒤나미스)은
4:14과 9:1에도 나오는 데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이 곳에서 두
로와 시돈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하나님의 표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
고 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두로와 시돈 - 이 두 도시는 갈릴리 북방에 있는 베니게의 항구도시로 두로는
B.C.2750년 경에, 시돈은 B.C. 1400년 이전에 건설되었다. 이 두 도시는 번영과 쾌락
과 이교도의 도시로 유명하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한 결과(암
1:9;욜 3:6)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사 23장;겔 26-28장).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 베옷(* , 삭코스)은 염소털로 만든 거친 옷으
로 회개나 애도의 표시로 입었다(왕상 21:27). 재(* , 스포도스) 역시 애
도의 표시였고(욥 2:8;욘 3:6;마 6:16) '삼베'와 연결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에
4:2,3).

=====10:14
심판 때에...쉬우리라 - 12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두로와 시돈이라는 두 패역한
도시에 비유하여 고라신과 벳새다의 심판이 얼마나 중할 것인가에 대해 경고하고 있
다.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도 심판을 면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
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에 대해서 엄한 심판이 있을 것은 자명
한 이치이다.

=====10:15
가버나움 - 문자적으로 '나훔의 마을'이며 '나훔'은 '자비로운'이라는 뜻으로 이
마을 이름은 결국 '자비의 마을'이 되는 셈인데(Hendriksen) 예수의 심판의 말씀에 비
추어 볼때 이 마을의 이름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완악한 마을'이라고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아무튼 가버나움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
보, 요한과 같은 중심적 제자들이 그곳에서 선택되었고(5:10), 많은 이적과 교훈이 그
곳에서 베풀어졌다(4:23,31-37;7:1-10). 그리하여 마태는 가버나움을 예수의 '본 동
네'라고 하였다(마 9:1). 그러나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그렇게 주어진 기회를 저버리고
말았는데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떻게 예수를 거역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네가 하늘에
까지 높아지겠느냐"는 표현에 의해 그들이 매우 교만하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
이다.
하늘에까지...낮아지리라 - 이는 이사야가 포로후기 시대에 오만불손했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말씀(사 14:13,15)을 가버나움에 적용한 것이
다. '네가...높아 지겠느냐'(* , 메 휩소데세)에서 '메'(* )는 부
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는 조사로서 결코 하늘에까지 높아질 수 없음을 반어법적으로 강
조해 준다. 하늘의 영광과 음부의 파멸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교만한 가버나움이
당할 파국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음부'(* , 하데스)는 구
약에서 죽은 사람들의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며, 신약 시대에는 그 의미가 조금
변하여 무신론자들이 벌을 받는 장소로 여겨졌다(Marshall).

=====10:16
너희 말을...것이라 - 제자들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에 의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제자들의 권위가 존중되어야 함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의 권위
를 존중해주지 않고 거역할 때 그 행위는 예수를 거역하는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을 거
역하는 것이다. 반면에 제자들로서는 자신들의 권위가 자생적(自生的)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임을 인식해야 하며 따라서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한다는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했다.

=====10:17
기뻐 돌아와 - 제자들의 사역이 성공적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마 이들은 예수께서
하셨던 일들을 자기들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항복하더이다 - 제자들의 이 보고는 귀신을 쫓아낸 일이 예상 외
의 놀라운 경험이었음을 가리킨다. 제자들이 귀신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이
름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며, 그 결과 많은 사람을 고통에서 구원하고 이와 더불어 예수
에게 그러했듯이 자기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던 것이
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구할 때 놀라운 이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마 21:21).

=====10:18
사단이 하늘로서...떨어지는 것 - 본절의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1)70인의 제자들이 사역할 때 사단이 추방당했다는 견해. (2)사단의 경우를 예로 들
어 제자들로 하여금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신 말씀이라는 견해. (3)예수께서 광
야 시험을 이겨내셨을 때 사단이 하늘에서 추방되었다는 견해. (4)70제자 뿐만 아니라
향후 전도자들의 복음 전도를 통해 결국 사단의 세력이 완전히 패배하게 될 것을 뜻한
다는 견해 등이다. 어쨌든 70제자들의 귀신 축사(逐邪)는 악의 세력의 패배를 보여주
는 명백한 표라 할 수 있다.

=====10:19
뱀과 전갈 -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의 상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
냐하면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제자들이 뱀과 전갈을 밟아 죽였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
이다. 단지 바울이 뱀에 물렸으나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은 경우가 있을 뿐인데(행
28:3-6) 그것은 본문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성경에서 뱀과 전갈은 주로 사단의 세
력을 상징한다(창 3:1-15;고후 11:3;계 9:3,5,10). 본문의 출처라고 보여지는 시
91:13의 맥락에서도 갈은 의미를 갖는다. 결국 이 말씀은 앞절(18)과 같은 맥락에서
사단의 세력이 제자들에 의해 짓밟힌다는 의미이나 다만 여기서는 사단의 실체가 더
구체화되며 제자들에게 악한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보다
강조된다. 창 13:15에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 처음
나온다. 이제 이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며 그 제자들 또한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케 된 것이다.

=====10:20
귀신들이...기뻐하라 - '-때문에 기뻐하지 말고 -때문에 기뻐하라'는 전형적인 히
브리어 격언구 형식이다. 이 말씀은 귀신들을 제어하는 권세를 기뻐하는 것이 잘못되
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름이 생명서에 기록된 것에 비하면 귀신 축사가 아무 것도 아니
라는 뜻이다. 또한 이는 제자들의 사역의 목적이나 참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
히 보여준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
어가는 보증수표가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마 7:22,23). 만약에 주의 이름
으로 이적을 행하는 자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하거나 성취한 업적에 대해 교만한 마음
을 갖게 된다면 그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기록된'에 해당하
는 헬라어 '엥게그랖타이'(* )는 '등록하다', '기록하다'는 뜻
의 헬라어 동사 '엥그라포'(* )의 완료 수동태로 하늘에 이름을 기록하
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의한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유대교의 문헌에는 하늘
의 책에 대한 사상이 많이 발견되는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 기록되는
생명의 책을 가리킨다(출 32:32,33;시 69:28;단 12:1;히 12:23;계 13:8;20:12).

=====10:21
이 때에 - 예수께서 제자들의 성공적 사역을 치하하신 바로 '그 때'(at that
time,NIV)를 가리킨다. 또한 이 표현은 누가가 즐겨쓰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도 많이
발견된다(2:38;7:21;12:12;13:31;24:33;행 16:18;22:13).
성령으로 기뻐하사 - 마태의 병행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마 11:25) 누가만의 독특
한 표현이다. '기뻐하사'(* , 에갈리아사토)는 '기뻐하다'는 뜻
의 동사 '아갈리아오'(* )의 과거형으로 1:47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
에서도 사용된 동사이다. 지금 예수께서 느끼는 기쁨임을 뜻하며 계속 이어지는 감사
의 기도 역시 하나님의 감동에 의한 일종의 계시임을 암시한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 '천지의 주재'라는 호칭은 다분히 구약적인 표현으로(창
14:19,22) 전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전권적 위엄을 나타내며 '아버지'(*
, 파테르)라는 호칭은 아람어의 '압바'(abba)에 해당하며 따뜻한 부자 관계를 나타
내주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온 천하 만물의 주관자이신 창조주께서 바로 예수
님의 아버지가 되심을 나타낸다.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영적 일체를 이룸으로써 하나님
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다(롬 8:16).
이것을 지혜롭고...나타내심 - '이것'이란 아마 예수의 사역 즉 그가 베푼 이적들
과 말씀의 선포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리고 방금 70(72)인의 제자들이
체험적으로 터득한 것들일 것이다. 여기서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어린아이
들'이 대조되고 있는 데, 전자는 율법에 대한 지식과 지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
시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후자는 세상적 지혜나 율법적 지
식이 부족하지만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는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사상 즉 지혜로운 현자(賢者)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생각을(위경
제 4에스라 12:35-38) 뒤엎는 역설적인 말씀으로서 바울에게서도 발견되는 사상이다
(고전 1:18-31). 또한 본절은 소위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자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사
람들 그리하여 멸시와 천대를 당하던 자들에 대한 예수의 각별한 애정을 암시하며, 구
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10:22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 여기서 '모든 것'(* , 판타)이 구체적으로 무
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1)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계시
(Jeremias), (2)(본문이 단 7:13,14;마 28:18과 평행을 이룬다고 보았을 때) 예수께서
위임(委任)받은 하나님의 권한(Lagrange, Schniewind), (3)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 것
(Weiss), (4)모든 사람(Bengel), (5)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필요한 모든것(Holtzmann),
(6)그 하나님의 뜻(Plummer), (7)모든 교리(Harnack) 등. 그런데 본문에서 '모든것'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주셨다'(* , 파라디도미)
의 의미와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주셨다'는 동사는 스승이 제자에게 지식, 교리, 전
통과 같은 것을 물려주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하며(막 7:13;고전 11:2,23), 권
력이나 권위를 위임하는 데도 사용된다(4:6). 이렇게 볼 때 앞에 열거한 제 견해들은
어느 것이 틀리거나 어느 것이 정확하게 맞다기 보다는 종합적으로 취해질 세상의 것
이라 하겠다. 결국 본문에서 중요한것은 예수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와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 외에는...아는 자가 없나이다 - 여기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상호 인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또한 본절은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론적(存在論的)
인 관계 즉 복음서들이 한결 같이 증거해 주는 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증거한다. 물
론 성도들도 하나님을 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능력에 의해 아버지를 안 것이 아
니라 아들이신 예수의 중재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지식이 너무도 부분적
이라는 점에서 예수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

=====10:23
너희는 보는...복이 있도다 - 그런데 제자들이 '보는 것'(what you see, NIV)에 대
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다음의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넓은 의미
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그리고 행하실 이적들과 가르침들을 통해서(4:6) 구원의 시대
가 도래했음을 인식하며 하나님과 아들 사이의 비밀을 보는것을 의미한다(22절). (2)
좁은 의미에서,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굴복시킬 때 경험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보는 것을 가리킨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언급한 마태복음의 문맥에서는
(13:16) 전자에 가깝고, '듣는 것'을 생략한 누가복음의 문맥에서는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0:24
많은 선지자와 임금 - 제자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옛 선지자와 임금들을 제자들과 대조시키고 있다. 본절의
말씀에는 과거에 가장 종교적이었던 사람들(선지자)과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들(왕)조
차 보지 못한것을 지금에 평범한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사상을 말하려는 누가의 의도
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미래에 성취되기를 대망한
사람들이고(사 52:15) 왕들 가운데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와 같은 왕들은 옛
계약을 신뢰한 자들로서 선지자들의 계시를 받아들여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기
를 열망했었다(시 110:1).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를 보지 못했고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
다는 복음의 선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보고 들었으니 복된 자
들이 아닐수 없다(2:30;히 11:13;벧전 1:10,11).

=====10:25
율법사가 일어나 - 마가는 '서기관'으로 기록한(막 12:28) 반면 마태와(마 22:35)
누가는 '율법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직분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
보면될 것이다. 율법사는 유대 율법의 전문가를 말한다(9:22 주석 참조). 이 율법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가
르치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한편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가 어느 장소, 어느 시점
에서 있었던 일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다. 그런데 마가복음이나(막
12:28-34) 마태복음과(마 22:35-40)과 연결지어 생각할 때 이 이야기가 24절에 바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막 11:27을 고려하여 이 이야기가 예루살렘이
나 그 근처에서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그룬트만(Grundmann)의 견해는 일리가 있다.
시험하여...영생을 얻으리이까 - 마가복음에서는(막 12:28) 율법사는 예수를 시험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감탄한 나머지 진지한 물음의 자세로 질문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 구절에서의 '시험'(test, NIV)은 강한 악의를 강조하는 의미에서라
기 보다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종교 지도자가 공식적 직함을 받지 않은 예수께서 올
바른 대답을 줄 수 있는가를 보려고 물어본 것으로 이해된다. 계속되는 질문 가운데
'영생'(eternal life, NIV)은 '내세에 적합한 생명'(Tyndale) 또는 '하나님 나라의 생
명'을 가리킨다(18:18,24,25,29;요 3:3,5,15,16,36). 한편 여기 율법사의 질문은 구원
을 얻기에 합당한 선행을 물은 어떤 부자 관원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18:18). 구원
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깨닫지 못한 채 율법의 자구적(字句的)
해석과 적용에만 몰두했던 사람으로서는 본절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러울 따름이었다.

=====10:26
율법에...어떻게 읽느냐 - 결국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은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마 22:36;막 12:28)라는 질문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
된다. 마태복음(마 22:37-40), 마가복음(막 12:30-31)에는 예수께서 대답 하시는 것으
로 묘사하는데 비해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반문에 대한 율법사의 대답 형태로 전개된
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율법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율법으로 인도하고 있는데 이는
율법사의 이해의 범주에 맞도록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율법사들은 모
세 오경의 핵심 내용을 담은 경문을 손목이나 이마에 붙이고 다녔는데, 아마 예수는
이 경문을 가리키며 말씀하셨을 것이다.

=====10:27
네 마음을 다하며...사랑하고 - 이 말씀은 신 6:5의 인용으로 십계명의 전반부 즉
대신(對神) 관계에 관한 내용을 주석적으로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유대교의 중심을 형성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일편 단심의 충성과 사랑을 요약한
것이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계약 관계에 의해 피차간에 충성과 사랑의 관계를 지켜야
함을 주장하는 신명기 학파의 신학의 주제이기도 하다. 율법사들은 신 6:7-9에 의거하
여 이 중요한 말씀을 소가죽에 기록하여 호부(護符)처럼 늘 지니고 다녔다.
네 이웃을...사랑하라 - 이 말씀은 레 19:18의 인용으로 십계명의 후반부 즉 대인
(對人) 관계에 관한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이웃'(* , 플
레시온)이라는 단어는 유대적 어법상 집단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유대인들은 이 단어
를 동족, 같은 종교권에 있는 사람, 혹은 같은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배타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을 이 단어의 범주에서 제
외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뒤에 이어지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에 대한 유
대교적 관점을 파기하는 의미가 있다.

=====10:28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 "이를 행하라"(* , 투토 포이에
이)는 현재 명령법으로서 행위의 계속성을 강조한다. 행함에 대한 결과는 '살리라'는
것인데 이러한 표현은 레 18:5;갈 3:12에도 있다. 혹자는 여기서 율법과 복음, 행함과
믿음을 구분하는 차원에서 예수의 인정(認定)과 행하라는 명령이 행위에 대한 거부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기도 하는데(Tyndale) 본문의 문맥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논
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러한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이 율법사가 요약한
율법의 핵심은 옳다고 인정받을 만한 것이었으며(마 22:37-39;막 12:30,31) 예수께서
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신바 있기 때문이다(마
7:21,24;25:31-46).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이 율법사의 율법 지식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가 물음을 묻는 저의(底意)와 그의 위선을 아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대답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온전한 의미에서 충족시키기
란 불가하며 따라서 율법 준수를 위해서는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음을 간접적으로 교훈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10:29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율법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는 소위 율법사가 사람들 앞에
서 제기한 자신의 질문이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나자 2단계로 사랑의 실천이라는 주제
에 대한 이야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웃의 개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아마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이웃의 개념을 과시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율
법사가 생각하고 있는 이웃의 개념 속에는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이 제외된다는 것을 아
셨으므로 이 사람의 질문에 대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10:30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이며 여리고는 해면하(海
面下) 250m의 저지대로 두 지역간의 거리는 약 36km정도였으며 길이 가파르고 길 옆에
는 암석들이 많아 도둑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제롬(Jerome)에 의하면 A.D.4세기말까지
도 그 길에는 강도떼들이 횡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길을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것으로 예수의 말씀은 시작된다. 그 사람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청중들은 자연
스럽게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
은 민족적 구분을 초월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암시한다.
옷을 벗기고...거반 죽은 것을 - 길을 가던 여행자는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겼다.
심지어 강도들은 옷까지 빼앗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심한 폭행을 가하여 거의 죽을 지
경이 된 상태에서 버려두고 떠나갔다. 혹자는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는 배척당했으나
사마리아인들로부터는 영접받은 예수라고 하고 주막은 교회를 뜻한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해석(Allegory)일 뿐, 예수께서 말씀하실때의 의미는 문자적인 의미 그
대로였다고 보아도 무난하다.

=====10:31
마침 한 제사장이...피하여 - 여기서 '마침'(* , 카타
슁퀴리안)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우연히'라는 뜻이다. 이 말은
강도 당한 사람이 쓰러져 있던 곳이 외진 곳이며 그가 오래도록 구조를 받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이 길을 지나간 제사장의 주 임무는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이었
다. 아마도 그는 성전에서의 제사장의 의무 기간을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당시 여리고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고 한다. '피하여 지나가고'(* , 안티파렐덴)는 반대편의 길
로 돌아가는것을 말해주는 바 제사장의 '도피'를 분명하게 확인해 주는 것이다. 제사
장이 피하여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자기도 강도 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Marshall)이거나 (2)그 사람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판
단하여 시체를 만져 자기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율법 준수의 정신 때문(레 21:1-3)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사 여부를 획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것으
로 미루어 제사장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결국 이 제사장은 절실히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도, 백성들에게 봉사할 직무를 맡은 제사장으로서도(민 18:1-32) 용납될 수 없는 과오
였다.

=====10:32
한 레위인도 - 레위인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성별된 지파였다(민 18:1-32). 레위인들은 제사장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유대의 종교적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인만큼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이 레위인은 앞서 지
나간 제사장과는 달리 그 사람에게 다가가 보기는 하지만 역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
고 떠나가 버린다.

=====10:33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불쌍히 여겨 -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세번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더구나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 중에도 유대교 지도자들이었
으며 당시 사마리아인은 그들에 비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부류에 속했다. 예수
께서는 여기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킴으로써 교만하고 완악한 유대주의자들과 강한 대
조를 이끌어내고 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에 대해서는 9:52,53의
주석을 참조하기 바란다.

=====10:34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 사마리아인은 먼저 응급 조치를 취하고
있다. 당시 기름과 포도주는 상처의 치료제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대개 기름은 상처
의 통증을 식히고 포도주는 살균 역할을 한다(Robertson).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
에 바른 후 싸매어 주었다. 이 여행자가 비상시를 대비해 붕대를 가지고 다녔다면 다
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그의 옷이라도 찢어서 상처를 싸매어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
다.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 '짐승'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테노스'(* )는 타
고 다니거나 짐을 실을 수 있는 짐승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아마 이 짐승은
나귀였을 것이다(Lenski). 그리고 '주막'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도케이온'(*
)은 '모든'을 뜻하는 '파스'(* )와 '영접하다'를 뜻하는 '데코마이'
(* )의 합성어로 많은 사람을 유치할 수 있는 대규모의 여관을 말한다.
탈진한 환자를 자신의 나귀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온 사마리아인은 계속해서 그를 돌보
아 주었다. 여기서 '돌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딤전 3:5에서 교회를 돌보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는 사마리아인이 환자를 '책임적으로' 돌보아 주었음을 시사한
다.

=====10:35
이튿날에 - 시리아어 시내역 본(Syraic Sinaitic)에는 "그 날 새벽에"(at dawn of
the day)로 되어 있어 더 정확한 시점을 전해 주고있다. 이렇게 일찍 떠났다는 것은
그 여행객이 결코 제사장이나 레위인 보다 할 일이 없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돌보아
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사실 그는 새벽에 일찍 떠나야 할만큼 바쁜 사람이었으나
도움이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바쁜 시간과 물질을 희생했던 것이다.
데나리온 둘 - 마 20:2에 의하면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며
역사가 폴리비우스(Polybius)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동시대 이탈리아(Italy)에서 하
루 숙박비가 로마 제국 화폐로 1/32 데나리온이었다. 로마 제국 내에서 통용되던 화폐
의 가치가 동일하였다고 볼 때 이 금액은 약 2개월 동안의 숙박비에 해당한다.
갚으리라 - 이 사마리아인은 완전한 이웃 사랑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왜냐
하면 그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되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책임을 지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일시적이며 충동적인 동기에 의해서 행해져
서는 안되며 끝까지 완전하게 책임 의식(責任意識)을 가지고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성도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의 온전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요 13:1).

=====10:36
누가...이웃이 되겠느냐 -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29)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께
서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질문으로 결론을 유도하고 있다. 두
질문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전자에는 이웃의 개념을 범주적으로 제한하려
는 의도(意圖)가 숨겨져 있는 반면 후자에는 전자의 제한적인 이웃 개념을 타파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의 질문의 의도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부터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자신의 이웃이 누
군가를 미리 설정해 두기 보다는 스스로 이웃을 만들어 나가는 자세가 은혜받은 자들
의 바른 태도이다.

=====10:37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 율법사는 당연히 '사마리아인이니이다'로 대답했어야 했음
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푼 자'라는 표현으로써 핵심을 피해가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민족적, 인종적 제한을 두고 있는 유대인들의 이웃 개념을 타파하고
그들이 원수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도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려 하셨다.
그러나 그 율법사는 여전히 사마리아인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너도 이와같이 하라 - 이웃의 개념을 따져 묻는 율법사의 현학적(衒學的)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너무도 단순 명료하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는 예수의 권위
있는 명령은 율법사의 교만과 위선을 꺾어버리는 위엄있는 말씀이다. 율법사에게 있어
서 중요한 것은 율법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영육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당장 자비를 베푸는 사랑의 실천이다.

=====10:38
길 갈 때에...한 촌에 - '길 갈 때에'라는 모호한 표현은 장소와 시점 그리고 앞
부분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한 촌'이라는 표현 역
시 누가가 장소에 대한 정확성에 집착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개괄적인 표현이다.
이 '한 촌'은 요 11:1과 12:1에 의하면 '베다니'라는 마을이며 이 마을은 예루살렘 동
쪽에 있는 감람산(the Mount of Olives)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예루살렘에서
3km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마을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아마 누가는 예수가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에서 사역한 것에
관해서는 이후에 언급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13:32,33;17:11;19:28).
마르다...영접하더라 - 마르다의 자연스러운 영접과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는 예
수와 그들이 초면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요 11:5). 이 마르다는 마리아의 언니이며
나사로의 동생이다(39절;요 11:19,20;12:2,3). 나사로는 죽었다가 예수의 도움으로 살
아난 일이 있으며(요 11, 12장) 마리아는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일이 있는데 그 만
큼 이들 가족은 예수와 각별한 사이였다. 여기서는 예수를 영접하는 주체로 마르다가
등장하는데 우연히도 '마르다'(* )라는 이름은 '여주인'이라는 뜻으로 아람
어의 여성 명사이다. 성경에 그녀의 남편이 있다는 것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으며
단지 마 26:6에 근거하여 그가 문둥이 시몬의 아내일 것이라고 막연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10:39
주의 발 아래 앉아...말씀을 듣더니 -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은 요 12장에서의 모
습과 병행을 이룸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도 마르다는 예수를 위하여 음식을 마련하고
(요 12:2) 마리아는 예수 곁에서 그에게 향유를 붓는다(요 12:3). 여기서 '아래 앉아'
(* , 파라카데스데이사)의 문자적 의미는 '곁에 앉다'로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자세를 묘사하는 말이다(행 22:3). 이것은 마
리아가 마치 학생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듯이 예수에게 진리의 말씀을 들으려고 매우
열심이 있었음을 뜻한다. 이는 마리아의 태도를 묘사한 '듣더니'(* , 에쿠
엔)가 미완료 능동태로 되어 있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는 바 그녀는 다른 일에 관심을
돌리지 않은 채 열심히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경청하였던 것이다. 한편 마리아를 가리
켜 '발 아래 여인'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녀가 예수의 발 아래서 그
의 말씀을 들었고(본절), 죽은 오라비를 위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고
(요 11:32), 예수의 발 아래 앉아 그에게 향유(perfume, NIV)를 부었기 때문이다(요
12:3).

=====10:40
마르다는...분주한지라 - 마르다의 바쁜 모습은 그녀가 예수께 대단한 정성을 쏟았
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분주한지라'(* , 페리에스파토)는 '사방
에서 끌어당기다'는 의미로 그녀의 바쁜 상태가 어느 정도인가를 생생하게 나타낸다.
이렇게 바쁜 마르다의 모습과 예수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조용히 듣고 있는 마
리아의 모습은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마르다도 마리아처럼 예수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그분이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음식을 장만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명하사...도와주라 하소서 - 아마 마르다는 혼자서 음식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바쁘
니 와서 도와 달라고 마리아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
수의 말씀에 너무 열중인 나머지 그녀의 요청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마리아의 태도에
화가난 마르다는 마침내 예수에게 직접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마르다
의 이의 제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들어 있을 것이다. (1)자신이 그렇게 바쁜데도
불구하고 전혀 자기를 도우려 하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인 책망이 있을 것이고,
(2)그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예수의 무관심에 대한 원망이
있으며, (3)적어도 지금의 상황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자신의 판단과 행위가 가장 옳다
고 하는 확신에 의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의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에 비해 자
기가 지금 얼마나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를 은연중 과시하려는 마르다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다.

=====10:41
마르다야...염려하고 근심하나 -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에 걸쳐 부르는 이중 호격
의 사용은 예수께서 마르다의 정성스런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동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염려하고'(* , 메림나스)라는 표현은 '흩어지다'
'나누어지다'는 의미의 헬라어 '메리조'(* )에서 파생된 것으로 과도한 욕
구로 인해 어지럽게 분열된 심적 상태를 나타낸다. 또한 '근심하나'(*
도뤼바제)는 '문제를 야기시키다'는 뜻으로 이것 역시 자기가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것
이다. 물론 예수께 대한 열심으로 말하면 마르다(Martha)나 마리아(Mary)가 매일반(每
一般)이었다. 하지만 마르다는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소해 줄 먹을거리 보다는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생명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더 소중하고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시 119:103-105).

=====10:42
몇 가지만...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 본문은 해석이 난해한 구절로서 각 사
본들에도 다양하게 표현되는 부분이다. 아무튼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몇 가지'와 '한
가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둘 다 음식의 가
지 수로 보는 견해. 이렇게 볼 때 예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즉 마
르다는 너무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만들려 했기 때문에 바쁜 것이니만큼 음식의 가지 수
를 몇 가지로 줄이거나 또는 한가지만 하여도 족하다는 것이다. (2)전자는 물질적인
것을, 후자는 영적인 것을 뜻한다고 본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접대 행위 자체보다는
영적인 것에 관해 가르쳤다는 디벨리우스의 견해에 따라 (2)의 견해(見解)가 더 타당
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예수께서 물질적인 것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한다.
좋은 편을...빼앗기지 아니하리라 -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를 돕도록 명하여 달라는
마르다의 요청은 거부되며 오히려 마르다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로 대
답이 주어진다. 예수를 섬기는 적절한 방법은 필요 이상으로 지나친 물질로써가 아니
라 그분의 말씀에 동참함으로써 섬기는 것이다. 한편 이 이야기는 여인들의 위치가 가
사 일에만 국한되지않고 여자들도 복음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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