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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 21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1|조회수9,080 목록 댓글 0
21장
=========21:1-4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 -- “마샬”(Marshall)은 요세푸스(Josphus)의 “유대 고대사”를 참고로하여 예루살렘 성전에는 귀중품을 관리하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금방”(金房)이라 불리는 방이 하나 있어서 여기에는 나팔 모양을 하고 있는 열세 개의 헌금통이 있었다고 한다. 계속해서 “마샬”은 본문에서 말하는 이 “연보궤”도 아마 열세 개의 헌금통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한편 열세 개의 헌금통을 보관하는 이 금방(金房)은 “여인들의 뜰”을 지나서 있었는데, “헨드릭슨”(Hendricksen)은 아마 예수께서 이 여인들의 뜰에 앉아 계셨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에 대해 “쉐크”(노다)는 예수께서는 이 헌금궤를 보관하고 있는 방 가까이에 앉아 계셨으며 당시에는 헌금의 종류가 무척 많아서 험금을 할 때는 액수와 용도를 말했기 때문에 예수는 이 과부의 헌금이 어떤 명목으로 얼마나 그려졌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학자의 주장이 확실한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께서 분문을 말씀하실 때의 상황과 분위기는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렙돈” --- 막 12:42에 의하면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이다. 그리고 네 고드란크는 한 앗사리온, 또 열여섯 앗사리온은 한 데나리온으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참조, 마 20:9,10). 결국 두 렙돈은 하루 품삯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돈으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액수이다.


========21:5-9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 --- 여기서 “헌물”을 가리키는 단어 “아나테마”는 “하나님께 봉헌되어지도록 결정된 것”(Hendricksen)으로 스펜서(Spence)는 “거룩한 헌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성전은 예루살렘 제 3 성전으로 이 성전은 헤롯 대왕에 의해서 세 번째로 지어진 성전을 가리키는데, B. C. 19년에 짓기 시작한 이 성전은 예수 당시까지도 준공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입구에 서 있는 아름답고 화려한 흰 대리석과 또 여러 부호들이 드렸던 휘황찬란한 귀금속과 보석들로 장식된 예루살렘 성전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드렸던 휘황찬란한 귀금속과 보석들로 장식된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하고 화려함을 이야기했다는 뜻이다.
내 이름으로 와서.--- 마샬(Marshall)은 원어 “에피 토 오노마티”를 ⑴ 내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⑵ 내가 메시야라고 주장하면서 ⑶ 내가 재림 주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면서의 3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비텐하르트(Bietenhard)의 견해를 좇아 두 번째 해석이 가장 적당하다고 말한다. 한편 요세푸스(Josephus)도 그의 유대 고대사XX. 8에서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실례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행 21:38에 언급된 드다(Theudas)의 출현이다(Spence).


=======21:10-11

민족이 민족을.....일어나겠고.----- 겔덴휴이즈(Geldenhuys)는 이 구절에 대한 실례로 로마 제국의 지배에 반발하는 유대 민족의 대대적인 반란과 폭동을 들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후에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이런 폭동이 끊임없이 발생하였고 이러한 유대 민족의 움직임은 결국 A.D. 66 년에 독립 전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유대 전쟁사”에서, 그리고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Tarditus)는 “연대기”에서 예수 사후의 기간을 전쟁과 폭동의 기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헨드릭슨(Hendricksen)은 이 구절을 예언의 성취라는 입장에서 현대를 조명하면서 어떤 작가의 말을 인용하여 유럽에서는 지난 300년 동안에 300차례나 전쟁이 발생하였다고 말한다.
처처에 큰 지진과.....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요세푸스는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나타날 징조라고 말한다. 징조가 나타나는 시기는 사실 확실치 않으나 이러한 징조가 일반적인 현상으로 흔히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즉 이런 징조는 재난의 시작일 알리는 것이지(참조, 막 13:8), 이런 징조가 ■타났다고 해서 주의 재림이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Marshall).


========21:12-13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이에 해당하는 실례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행 9:1 ; 22:19에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회당에 끌려가서 매질을 당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고후 11:24에는 바울도 그리스도를 인하여 많은 매를 맞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 행 12:1에는 세베대의 아들이요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가 헤롯 아그립바 Ⅱ세 앞으로 불려 나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헨드릭슨(Hendricksen)이나 마샬(Marshall)은 이 일들이 큰 전쟁이나 하늘로서 나타나는 무서운 징조가 나타나기 전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전에”라는 말을 시간적으로 보지 않고, “보다 중요한”이란 뜻으로 이해를 한다. 즉 그는 “이 모든 일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너희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전에”라는 표현을 시간적으로 이해해야 될지 아니면 “스펜서”의 의견대로 “보다 중요한”으로 해석해야 될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두 의견이 다 본문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21:14-15

미리 연구치 안기로 결심하라. --- 원어 “프로메레타오”는 “앞”을 가리티는 전치사(프로)와 “연습하다”는 뜻의 “메레타오”의 합성어로 “사전에 준비하다”라는 말이다. 렌스킨(Lenski)는 “제자들은 왕이나 총독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구타당하고 매를 맞아서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옥에 같혀 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과 신분이 높은 사람들 앞에서 변론해야 할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계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염려를 버리라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한다.
구제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 원어는 “스토마 카이 소피안”인데 “입과 지혜”라는 말이다. 플러머(Plummer)는 “스토마”를 “말의 재간”으로 또 “소피아”를 “할 말을 조리 있게 간추릴 수 있는 능력”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그는 이 구절을 “말하는 지혜”로 해석한다. 한편 마샬(Marshall)은 말주변이 없는 모세에게 말의 지혜를 불어넣어 주신 하나님을 상기 시키면서 본절을 설명하고 있다(참조, 출 4:10-17 ; 겔 29:21).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언약은 분명히 사실로 증명되었다(행 7:25,26장).


======21:16-19

심지어 부모와....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신약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 친척, 벗들로부터 박해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참조, 마 10:21,22 ; 막 13:12). 또한 구약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법으로 인해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박해받게 되는 경우를 보여 주고 있다(참조, 겔 38:21 ; 말 4:6 ; 비교, 창 4:8 ; 27:41 ; 히 11:4). 그래서 예수께서는 눅 14:26,27에서 당신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 형제, 자매,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 벵겔(Bengel)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상할 수가 없다고 설명한다(Sine praemio). 이상근 박사나 “헨드릭슨(Hendricksen)도 이 구절을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렌스키(Lenski).나 겔덴후이스(Norval Geldenhuys)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밖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플러머(Plummer)는 16절이 제자들의 순교를 지적한 것이라면 본절은 그 죽음이 제자들오부터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그 정신만은 빼앗을 수 없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마샬(marshall)도 이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가 좀 더 타당한 듯 하다.


======21:20-22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 말지어다. ---- 여기서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은 유대의 거의 대부분 지역이 산간 지방에었기 때문에 유대 지역에서 가급적이면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거나 아니면 요단강을 건너 동쪽으로 도망하라는 뜻이다(Novral Geldenhuys, Marshall). 한편 예루살렘은 68년에 로마 장군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포위당한 적이있으나, 네로의 죽음으로 인한 로마의 국내 문제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다시 70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인 티투스(Titus)에 의해 3일 만에 포위, 공격을 당하였다.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의 책 “교회사”에는 당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많은 성도들이 전쟁이 나기 전에 베뢰아 지방의 펠라(Perean Pella)에 피신처를 준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산으로 도망한다는 생각은 구약 시대 때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사상이다(참조, 창 19:17 ; 삼하 17:9).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악을 자행하고서도 회개할 줄 모르는 예루살렘에 대해 선지자들이 외친 심판을 가리킨다(Albert Bames). 이 심판은 바벨론에 의해 한 차례 이루어졌으나 계속되는 예루살렘의 행악은 다시 한 번 더 심판을 재촉하였다(참조, 레 26:31-33 ; 신 28:49-57 ; 왕상 9:6-9 ; 시 79:1-13 ; 사 29:2-4 ; 단 9:26,27 ; 미 3:12).


===========21:23-24

그날에는...진노가 있겠음이로다.---- 렌스키(Lenski)는 환란으로 인해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아이를 배거나 젖먹이를 가진 여인들이 당할 고통을 측은히 여기는 예수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헨드릭슨(Hendricksen)은 예수의 이와 같은 연민의 정이 왕위를 탈취한 뒤 그를 왕으로 인정치 않는 성읍을 파괴하고,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던 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과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한다(참조, 왕하 15:13-16).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 요세푸스(Josphus)는 “유대 전쟁사”에서이때의 유대인 사망자를 110만 명으로 그리고 포로를 9만 7천 명으로 밝히고 있다. 한편 본문의 “이방인의 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그레이다너스”나 “렌스키”, “스펜서, ”헤드릭슨“은 모두 다 ”예루살렘의 멸망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또는 이방인들이 개종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기간”으로 설명한다. 한편 알버트 반즈(Albert Barnes)는 “때”가 언제일런지는 불확실하나 확실한 것은 이빙인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예루살렘을 황폐케 한 뒹에 반드시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 의해 다시 재건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21:25-26

일월성신에는....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 마 24:29과 막 13:24에는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라고하여 본문보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월성신과 관련된 지이조가 구약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참조, 산 13:10 ; 겔 32:7,8 ; 율 2:10 ; 3:15 ; 암 8:9). 한편 하비(Harvey)는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는 시 65:6-8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바다에서 인간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그 붙드셨던 바다를 놓았기 때문에 땅에 있는 민족들이 두려워한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헨드릭슨(Hendricksen)도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일월성신에 변화가 생기면 달에 영향을 받는 바다도 조수(潮水)가 일정치 않게 되어 바다도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알버트 반즈(Albert Barnes)는 이르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바다에 풍랑이 일고 해일이 일어나 육지를 뒤덮는 것처럼 그렇게 재난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편의 주장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양쪽의 엄청난 재난에 대한 예고라는 사실만은 인정하고 있다.
하늘의 권능들.--- 원어로 “하이 가르 뒤나메이스 톤 우라논”인데, 여기서 “뒤나메이스”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여기서는 25절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천체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Plummer).


=====21:27-28

인자가 구름을 타고.....오는 것을 보리라.----- 러셀(Russel)은 키크(Kik)와 타스커(Tasker)의 견해를 지적하면서 이 구절을 정치적인 사건으로 해석한다. 즉 그는 앞 구절에서 나타나고 있는 우주적인 현상을 정치적인 재앙에 대한 상징적 묘사로 이해하면서 이 구절을 교회의 선교 활동으로 해석한다. 또한 현대 신학자인 테일러(Taylor)나 헤긴스(Heggins), 페린(Perrin) 같은 학자들도 이 구절은 구약의 여러 구절들 특히 단 7:13과 같은 구절들이 혼합되어 인용된 것으로 단 7:13의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예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펴시한다. 즉 이들은 당시의 성경 기자가 본 구절을 확대 해석하여 기록했다는 것이다. 한편 위의 학자들이 이 구절을 상징적 해석 내지는 아예 무시하려는 시도에 대해 마샬(Marshall)이나 이상근 박사, 헨드릭슨(Hendricksen)은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즉 예수의 초림은 은밀하고 보잘것없었지만 그분의 재람은 영광스럽고 공개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사상은 마 26:64 ; 살전 4:7 ; 계 1:&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일어나 머리를 들라. --- 즉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우주적인 징조들(Klostermann, Marshall, 이상근)이 나타나면 공포에 질려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용기를 가지고 주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뜻이다(Vincent, Lenski).


=========21:29-31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 마 24:32-34과 막 13:28-30에는 무화과 나무만 언급되고 “모든 나무”에 관한 기사는 빠져 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무화과나물를 마 21:9에서 예수께서 저주하여 말라 죽은 무화과로 해석하여 유대인으로, 또 “모든나무”는 이방인으로 간주 하였다. 그래서 유대인은 저주를 받지만 마지막 날에는 회복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해석이다. 누가가 모든 나무를 삽입시켜 기록한 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무화과나무가 없는 이방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Jeremieas, 이상근).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겨울철에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봄이 온 것을 의미했다. 이처럼 무화과의 잎사귀가 계절의 시작을 알려 주듯이 우주적인 징조(25,26절)가 나타나면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자연히 아나니 ------ 원어 “브레폰테스 앞헤아우톤”은 “스스로 본다”는 뜻이다. 즉 무화과나무의 잎사귀가 연해지고 싹이 돋으면 누가 그르쳐 주지 않아도 여름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Lenski, Marshall). 한편 누가는 이러한 표현에다 “이미”라는 시기를 나타내는 부사 “에데”를 덧붙여서 이미 그 시기가 가까이에 당도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1:32-33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세대”와 “모든 일”이 무엇을 가리키느냐는 것이다. “모든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종말에 나타날 우주적인 징조를 가리키는 데에 거의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Geldenhuys는 이를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세대”에 대한 해석이다. 원어 “게네아”에 대해서 퀨멜(Kummel)은 동 시대에 사는 사람으로 해석하여 예수 시대의 유대인으로 해석한다. 또 렝스토르프(Rengstorf)는 조상이 같은 민족으로 해석하여 유대 민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또 클로스터만(Klostermann)은 누가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엘리스(Ellis)는 예수께서 재림할 즈음에 사는 마지막 세대로, 미카엘리스(Michaelis)는 단순히 “행악하는 자”로 이해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가 어떤 세대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종말이 도래할 것을 확실히 말씀하셨다는 “마샬(Marshall)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한편 테일러(Taylor)는 원래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말씀하셨으니, 후대에 와서 여러 성경 기자와 또 학자들에 의해 예수의 재림으로 곡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21:34-35

방탕함과 술취한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 여기서 “방탕함”을 가리키는 원어 “크라이팔레”는 원래 “술취한 상태”(Marshall)인데, 의학적으로는 “술이 취해서 속이 메스꺼운 상태”(Norval Geldenhuys)를 가리킨다. 한편 알버트 반즈(Albert Bames)는 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다. 렌스키(Lenski)는 이용어가 술이 취한 상태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며 특별한 의학적 용어는 아니라고 말한다. 마샬(Marshall)은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겠지만 여기서는 는유적으로 이해하여 세상의 염려로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심으로써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라고 말한다. 또한 여기서 “마음이 둔하여 지다”는 말의 원어 “바레도신 휘몬 하이 카르디아이”에서 “바레오”는 “내리누르다”는 뜻이다(참조, 눅 9:32 한글 개역 성경에는 “곤하여”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피곤이 내리누르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를 마샬(Marshall)은 심리적으로 침체된 상태라고 한다. 즉 사람들이 세상 일에 연연함으로써 의기 소침해져서 하늘의 징조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렌스키(Lenski)도 이를 마음이 둔하여진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21:36-38

인자 앞에 서도록. ---- 이 말에 대해서는 해석이 다양하다. 마샬(Marshall)이나 파라(Farrar), 엘리코트(Ellicott)는 인자를 심판자로 해석한다. 반면 알포드(Alford)는 죄를 용서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구세주로 해석한다. 그러나 분문에서 “인자 앞에 선다”는 말은 렌스키(Lenski)나 알버트 반즈(Albert Bames)의 견해대로 인자를 심판의 주로 보는 동시에 구원의 주로 인정하는 편이 가장 타당한 것 같다. 한편 퇴트(Todt)나 헤긴스(Heggins)는 이 구절을 예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우가의 창작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를 누가의 창작으로 볼 만한 뚜렷한 이유는 없다(Colpe).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 원어로는 “아그뤼프네이테 데 엔 판티 카이로 데오메노이”인데, 여기서 “항상”, “언제나”를 가리키는 “엔 판티 카이로”가 “깨어 있으라”(아그뤼프네이테)를 수식하는지 아니면 “기도하며”(데오메노이)를 수식하는지 확실치 않다. 찬(Zahn)은 전자를 지지하고, 바클레이(Barclay)는 후자를 지지하나 이스턴(Easton)은 양자를 다 수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느 편을 수식하든 의미에는 차이가 없다. 아무튼 누가는 기도에 대해 특별히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참조, 눅 18:1 ; 비교, 살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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