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 22장
=====22: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 이 구절은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을 묘사하는데 공관복음서 평행 구절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누가의 경
우 21:38의 이야기와 무관한 듯하게 이야기를 출발시키면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동일
(同一)한 절기로 묘사한다. 한편 마태의 경우 앞장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유월절' 이틀 전임을 묘사한다.(마
26:2). 그리고 무교절에 대한 언급은 하고 있지 않아 시간적 정확성이 누가에 비해 두
드러져 보인다. 마가의 경우도 누가와 같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언급하는데 여기
서는 앞절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연결하면서 '유월절' 이틀 전임을 밝히고 있다. 다
만 마가는 누가와는 달리 두 절기가 동일하다는 의미보다는 두 개의 절기가 같은 날에
있다는 듯 언급한다(막 14:1).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
한 구분 문제, 둘째, 시간 표현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정확한 것인가이다. 첫째, 유
월절과 무교절은 분명히 구분된다. 유월절은 유대인이 조상들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해
방절이라고 할 수 있다(출 12:1-14). 유대인들은 한 해의 첫 달이 되는 1월 곧 니산
(아빕)월(태양력 4월) 10일에 어린 양을 식구 수대로 취하여 14일까지 양을 보관하였
다가 1월 14일 저녁 해질 무렵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날 밤에
그 고기를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을 함께 먹되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
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날 밤에 애굽에 내렸던 장자의 재앙
을 유대인들만은 피할 수 있었고 마침내 출애굽시 장정(長征)에 오르게 되었다. 유월
절은 바로 출애굽에 있었던 이러한 일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따라서 유월절은 밤에 양
고기와 무교병 그리고 쓴나물을 먹는 니산월 14일 밤을 가리킨다(출 12:8-11). 한편
무교절은 출 12:15-20에 근거한 것으로서 유월절 밤 즉 니산월 14일 밤 교병을 먹는
것으로 시작하여 일주일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으로 식사하면서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유대인들의 날자 계산법이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되는 까닭으로 무교절은
15일부터 21일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유월절은 14일 저녁 식사와 함께 끝나고 무교절
은 그 식사 때에 무교병을 먹음으로써 시작되는 셈이다. 즉 유월절과 무교절의 시작은
서로 맞물려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마가의 '유월절과 무교절'이란 표현과 마태의 '유
월절'이라는 표현은 서로 문제가 없고 다만 이틀이라는 시간상의 문제만 남게 된다.
그리고 '유월절이라는 무교절'이란 누가의 표현은 무교절에 강조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무교절이 시작되기 하루 전이고 또 유월절이 끝남과 동시에
무교절이 맞물려서 시작되므로 유월절은 곧 무교절의 시작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은 문제는 마태.마가의 시간과 누가의 시간 표현이다. 마태의 경우는 예수가
직접 이틀 후면 유월절이라고 하신 말씀을 언급하는데 이 날은 세 복음서 모두 예수를
죽일 음모가 있었던 날을 지시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마태와 마가의 표현대로라면
니산월 빕일이 되고 누가의 경우는 불명확하다. 아마도 누가는 그 음모가 있었던 날을
정확하게 규명(糾明)하기가 어려워 '가까우매'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리라 여겨진다.
=====22: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예수를 죽이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전전긍
긍하는 이 자들은 19:47, 48 ; 20:19에서 보여진 인물과 동일하다. 따라서 예수에 대
해 가장 큰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은 종교 그룹 가운데서 최고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의 최고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서기관들이었음을 알 수 있
다. 물론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한 인물들이었으므로 바리새파도 포함된다.
이들은 산해드린 의회를 구성하는 주요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 예수 살해 음모는 종교
적, 정치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들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
성 이후부터 더욱 바짝 긴장하였고 한시바삐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본격적인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며 이들의 음모가 결국은 구체적 실행 단계로 옮겨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된다.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 예수의 활동에 대한 민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19:37-40 ; 21:38) 염두에 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이 같은 묘사가 20:19에서도 나
온다. 예수에 대한 민중들의 열광이 집권자들에게는 체제 도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
다. 그러나 섣불리 예수를 처형시켰다가는 많은 백성들로부터 거센 대항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서, 대적들은 온갖 허위 선전을 통해 군중들을 회유하고 선동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23:21), 그리고 한편으로는 유월절이 이르기 전에 예수를 체포하여
빌라도에게 넘기기로 게획을 세웠던 것이다. 더욱이 종교 지도자들은 유월절이 다가오
자 더욱 근심하였다. 유월절이 되면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기 때문에 군
중들의 전폭적(全幅的)인 지지를 받던 예수가 붙잡히게 되면 백성들이 순례자들과 합
세해 크나큰 폭동을 일으킬까 염려했던것이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은 많은 순례자들
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기 전에 예수를 조용히 잡아 죽이려고 계획했다.
=====22:3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 예수를 배반하는 유다에 대한 묘사는 공관 복음서가
공통되게 다루고 있지만 배반하는 주체에 대한 묘사에 대해서는 누가가 독특하다. 즉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스스로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팔아 넘긴 것으로 묘사하지만 누
가는 12제자 중의 하나인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감으로써 유다의 배반이 시작되는 것으
로 표현한다. 따라서 누가의 진술에 의하면 사단이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게 만든 장본
인이 된다. 요 13:2에서는 '마귀가 벌써...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
더니'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아마도 누가와 요한은 유다의 배반이 유다 자신
의 행위가 아니라 사단의 짓임을 말함으로써 예수의 대적은 궁극적으로 사단임을 강조
하고자 했던 것같다. 이 사단은 첫 사람 아담 부처를 유혹하고 죄악에 빠뜨린 것을 비
롯하여(창 3:1-13) 인류 역사를 통털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離間)시켜 왔으며
할 수만 있다면 믿는 사람들마저 멸망에 빠지게 하려고 안감힘을 다 쓰고 있다(벧전
5:8). 따라서 인류 구속의 대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야말로 사단의
눈에는 가장 무서운 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단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시종일관 예수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마침내 십자가 처형에로 몰고 갔다. 그러나 이
는 일시적인 승리였을 뿐 예수는 부활을 통해 피와 죽음과 세상을 정복하시고 사단의
머리를 깨뜨렸을 것이다(창 3:15).
=====22:4
군관들 - '군관들'(* , 스트라테고이스)이란 성전 수위대장을
지칭하는 말인데 단수로 사용되었을 때는 제사장 다음가는 직책인 성전 지배인을 가리
킨다(행 4:1 ; 5:24, 26). 여기서는 복수로서 수위 대장을 가리키며 무력적 힘을 집행
할 수 있는 권력자를 지칭한다. 마태와 마가는 대제사장만 언급하고 있는데 예수를 체
포한다는 생각에서 볼 때 누가의 진술이 훨씬 자연스럽게 보인다.
방책(方策)을 의논하매 - 마태의 경우를 보면 유다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를 넘
겨줄테니 얼마의 돈을 주겠느냐고 흥정했다(마 26:15). 방책이란 돈에 대한 흥정, 6절
의 표현처럼 민중들이 없을 때 체포할 것 혹은 48절의 언급처럼 입맞춤을 신호로 체포
할 것 등에 대한 의논을 포함할 것이다. 어쨌든 가롯 유다의 확연한 배신으로 인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호기를 만났고 예수의 공생애는 서서히 그막을 내리
게 된다.
=====22:5
저의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 지라 - 의논 대상자들의 기뻐하는 모습이나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표현은 마가와 동일하다(막 14:11). 그러나 마태는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은 30을 달아서 유다에게 직접 주었다고 언급한다(마 26:15). 여기서 은
삼십은 구약의 예언(슥 11:12)을 성취시키는 것으로 예수께서 비천한 자들의 죄과를
담당하셨다는 메시야적 사역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은 삼십,
즉 은화 30세겔(shekel)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한
편 제사장과 성전 수비대장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 대한 그들의 사
악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마태의 표현을 보면 유다가 먼저 돈을 요구하며 예
수를 넘겨 주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나타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급박(急迫)하게 진행시켰던 상황과 유다의 배신이 시기적으로 정확히 맞아떨어져 이
가운데 사단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알게 해준다.
=====22:6
무리가 없을 때 - 이러한 방법은 대제사장들과 의논하여 나왔을 공산이 크다. 2절
에서도 언급된 바 있지만 그들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민중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체
포할 수 있는 기회나 민중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
다. 한편 가롯 유다의 배신이 궁극적으로는 사단의 개입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유다
개인의 측면에서 볼 때에도 자연스러운 귀결로 이해될 수 있다. 유다의 마음에는 돈을
사랑하는 탐욕이 있었으며(요 12:4-6) 더욱이 그가 예수를 따른 동기는 다분히 지상적
(地上的)이고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을 기대한 데 있었기 때문이다.
=====22: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 - 마태는 '무교절 첫날'이라고 언급하고(마 26:17) 마가
는 '무교절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라고 묘사한다(막 14:12). 유월절의 끝남과
무교절의 시작은 시간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가의 진술이 가장 적
절한 것으로 보인다(1절 주석 참고). 즉 니산월(4월) 14일 해질 무렵에 양을 잡았으므
로(출 12:6) 해가지면 유대인의 계산법에 의해 15일이 시작되어 무교절의 첫날이 된
다.
=====22:8
예수께서...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서 지시하는 이 구절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없다. 이러한 묘사는 19:29에서도 나
타나듯이 누가의 독특한 의도를 암시한다. 즉 예수의 주도로 일이 이루어지며 제자들
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가서'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명하시는데 10절에서 언급된 것으로 보아 가라고 한 장소는 예루살렘성 안으로 보인
다. 그리고 예비해야 할 것은 식사를 할 장소와 잡아야 할 양 그리고 무교병과 쓴나물
및 고기를 구울 수 있는 도구들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출 12:8).
=====22:9
여짜오되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이 질문을 한 자는 예수의 지시를 받
은 베드로와 요한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마가는 제자 중 두 명이라고 언급하였
다(막 14:13). 제자들이 질문한 것은 유월절 식사를 할 장소에 대해서였다. 유대에서
유월절 행사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했고 유월절 음식 역시 예루살
렘 성 안에서만 먹어야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 때만 되면 예루살렘 성 안으
로 모여들었다. 따라서 유월절때 예루살렘 성 안에서 유월절을 먹으며 거할 장소를 얻
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예루살렘의 여관(旅館)은 모두 꽉 찼을 것이고 집집마다 사람으로 만원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방을 구하기가 가장 어려운 문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22:10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 성 안으로 들어가라는 지시로 보아 현재 머무는 장소가
성 밖 어느 곳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 진다. 즉 예루살렘 성 외각 지대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감람산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왜냐하면 21:37을 보면 예수께서 밤이면 성에
서 나오셔서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다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혹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감람산 기슭의 베다니 마을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Meyer).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 예수는 제자들에게 정확한 시간과 성
안 어느 지점인지도 밝히지 않은 채 넓은 성 안에 들어가서 물 한 동이를 들고 가는
한 남자를 만날 것이라고만 막연하게 언급하셨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제자들이 왜 비
밀스럽게 그 사람과 만나야 했는지이다. 아마도 성 안에서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할
만큼 분위기가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미 유다가 배신을 한 상황에서 그리고 적
대자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행동에 비밀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월절 식사가 사람들에게 알
려질 경우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혼잡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최
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조용하고 엄숙하게 지내기 위해 비밀리에 장소를 물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본문은 매사의 앞을 내다보실 수 있는 예수의 신적 전지성(全知性)을 엿
보게 한다.
=====22:11
그 집 주인에게 - 여기서 말하는 주인과 물동이를 들고 집으로 제자들을 인도한 남
자와 어떤 관계인지 또는 그 두 사람이 동일인인지도 알 수 없다. 또 그 집이 마가의
집일 것이라고 행 1:13 ; 12:12를 근거로 하여 추측하기도 하며 물동이를 가지고 가던
사람이 마가였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나 다만 전승으로 전해질 뿐이다.
선생님이 - 이 묘사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나귀 새끼를 구하러 보내면서 '주께
서 쓰시겠다 하라'고 지시한 장면과 비슷하다(19:31). 직접화법으로 인용되는 문장이
므로 '선생님'은 예수 자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시할 때 가상의 인물
을 가리켜 칭하면서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자
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신생님이라고 호칭했다면 또는 가상의 인물을 가리켜 선생이
라고 호칭했다면 아마도 유월절 식사를 비밀리에 하기 의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10
절 주석 참조).
객실이 어디있느뇨 - 마치 암호(暗號)를 전달하는 듯한 이 어투는 실상은 손님이
묵을 수 있는 방이 있느냐고 정중하게 묻는 말이다(I.H. Marshall). 이 집이 여관업을
하는 집인지 아니면 민박하는 집인지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객실'에 해당
하는 헬라어 '카탈뤼마'(* )는 여관이나 여인숙의 방보다는 개
인 주택의 객실을 의미한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2:7).
=====22:12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 집주인과 이미 약속이 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하는 이 묘사는 이미 유월절을 위한 준비가 갖춰졌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집주인이 자리를 베풀었다는 말은 헬라어 '에스트로산'(* )을 번
역한 말인데 본래 자리를 펴거나 까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완료 분사 수동형으로
이미 융단을 깔고 식탁과 의자까지 준비되어 있는 상태를 묘사한다.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이나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미리 부탁을 받
고 식사준비를 해두었거나 아니면 언제든지 손님들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했을
가능성이다. 둘째는 자리를 펴고 예비된 큰 다락방이 있다는 말은 단순히 방만 예비되
어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데 '거기서 예비하라'라는 지시로 볼 때 음식
까지 준비된 것이 아니라 방만 준비된 것으로 이해함이 적절할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
은 대부분이 갈릴리 사람들인 까닭에 예루살렘에 집이 없었으므로 잘 아는 사람의 다
락방을 빌리려고 한 것이다. 이 다락방의 주인은 필시 예수를 잘 아는 사람이 분명하
며 예수에게 매우 호의적(好意的)이었을 것이다. 전하는 정확한 자료가 없지만 예수께
호의적이었던 이 사람의 방은 예수 부활 후 설령 강림 후 복음운동의 주요 기지가 되
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2:13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 예수께서 일러준대로 모든 일이
실현되었음을 증언한다. 이 같은 묘사들을 종합하여 생각할 때 단순한 유월절 식사가
아니라 신비적 힘이 작용하여 더욱 그 엄숙함과 신비성이 고조된 최후의 만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같은 모든 일에 신적인 섭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22:14
때가 이르매 - 유월절 식사의 때 즉 니산월 14일 저녁 해질 때를 가리킨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식사의 때를 언급하는 것은 최후 만찬의 엄숙성과 다른 유월절 식사와
구별되는 식사임을 암시하고자 하는 누가의 의도라고 보여진다.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 예수께서 유월절 식사를 할 때 함께 한 사람들을 언급하면
서 '제자'(* , 마데케스)라는 말 대신 '사도'(* , 아포스
톨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사도는 제자들을 지칭하는 다른 말로서 대표, 사자 등
의 뜻을 지니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예수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누
가는 '사도'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유월절 식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락방에 '함께 앉았다'고 묘사하는 헬라어는 '아나피프토'(*
)의 제2 과거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의 뜻은 '눕다', '비스듬히 기
대다'이다. 아마도 식사하기 위해 비스듬히 눕는 자세를 그들의 습관에 따라 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래 유월절 식사는 일어서서 신을 신고 지팡이를 든채로 급히 먹는
것이었으나(출 12:11) 당시는 약식화(略式化)되어 일반 식사와 동일한 형식을 취했다
한다.
=====22:15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가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이 지
키는 유월절 식사 때(니산월 14일 해진 뒤)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 하
루 전날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 시간이면 이미 붙들리시
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요 19:14). 여기서 예수는 유월절 식
사를 자신의 고난과 결부시키고 있는데 이는 누가만의 독특한 자료이다. 따라서 유월
절 식사가 단순히 출애굽을 기념하는 식사가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앞둔 비장한 각오
와 결단이 서려있는 기념적인 식사임을 알 수 있다.
너희와 함께 -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누는 의미심장한 친교를 뜻한다고 볼 수 있
다. 즉 죽음을 앞둔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자 하는 심정은 이제까지 함
께 활동해 온 지난 날의 모든 추억들을 제자들의 마음속에 되살리고 자신의 일을 제자
들이 실천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제자들과의 영원한 연대성을 확인시켜 주고자 했을 것
이다.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유월절의 식사는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
에 뿌린 후 고기를 구워서 무교병과 쓴나물과 포도주를 함께 먹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유월절을 먹는다'는 말은 '유월절 식사를 한다'는 말인데 '먹다'의 목적어인
'유월절'에 대해서 다른 해석도 있다. 즉 유월절을 식사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왜
냐하면 식사를 먹는다는 표현이 어색하기 때문이다(I. H. Marshall). 따라서 유월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카'(* )는 어린양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C.K.
Barrett, Jeremias). 그래서 식사의 종교적 해석을 시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 유월절 식사는 전체적 정황을 볼 때 기념적 성격을 갖는 식사이므로 과거 이스라엘
의 출애굽이라는 종교적 식사보다는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예수 자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새로운 차원의 식사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이 식사는 다름아
닌 예수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는바, 장차 이루어질 그의 죽음을 의식하시고 제
자들과 더불어 사전에 기념을 한 선견적 식사였다. 예수는 이 같은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간절하게 강조한다. 이렇게 예수
께서 제자들과의 식사를 간절하게 원하셨기 때문에 10-12절에서처럼 그는 어렵게 유월
절 식사를 준비하셨고 비밀스럽게 식사 장소를 마련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
신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고 계셨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시면서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고(요 14-16장) 성찬 예식을
제정하심으로써 자신의 죽음이 갖고 있는 구속사적 의미를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이다.
=====22:16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 앞절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예수께서 제
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고자 간절히 원했던 이유는 이 유월절 식사가 마지막 식
사가 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이상 유월절 식사를 하시지 않
겠다고 선언 하면서 기한을 정하고 있는데 그 기한은 유월절이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
기까지이다. 여기서 두 가지로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에서 드러났듯이 유월절이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져야
할 과제라는 점이다. 먼저 유월절의 의미가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공동체 국가의 출발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아직도 유대 민족은 참다운 유월절
을 성취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즉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지배 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
의 전 영역을 이 피지배자의 위치에서 신음하고 있는 상황은 분명히 유월절이 아니다.
또한 같은 민족이면서도 지도자들은 민중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집권자들의 착취가 민
중을 억압하는 상황에서는 유월절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고통이 모두
사라지고 인간의 죄악성이 뿌리채 뽑아져 변화된 사람이 살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된 유월절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는 그 날까지 유월절 식사를 않겠다는
말을 함으로써 참다운 유월절을 기대하도록 제자들을 이끌고 계신 것이다(Jeremias,
Ellis 등). 둘째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주의 만찬의 친교를 통해 '새로운 유월절'
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다음에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참예하게 될 만
찬은 유대의 전통적 유월절이 아니다. 만민이 참여하게 되는 성찬식이 될 것이다. 이
런 점에서 예수의 만찬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 되는 동시에 새로운 성찬 예식의 전조
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행 10:41). 이 새로운 성찬 예식은 예수의 부활 이후부터 지
금까지 실시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22:17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먼서 떡을 떼어
축사한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누가는 첫 순서로 잔을 받아 사례한 것으로 묘사한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마태와 마가는 잔을 한번밖에 언급하지 않은 반면 누가는 20절에
서 다시 한번 언급한다. 그리고 누가는 두번째 잔을 언급하면서 잔에 대한 의미 부여
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월절 식사는 가장(家長)이 잔을 들어 축사하고 식구들에
게 잔을 돌리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누가가 첫번째로 언급한 잔은 유월절 식사의 첫잔
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잔은 누가가 20절에서 언급한
잔과 의미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식사 후에 마시는 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유월
절 식사때는 포도주를 모두 4잔을 마시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누가는 첫째 잔과 마
지막 잔을 언급했고 마태와 마가는 마지막 잔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Edersheim).
이유는 마태와 마가는 잔에 대한 의미 부여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세 복음서 사이에 나타난 식사 순서에 관한 진술에는 모순이 없다. 다만 잔
을 나누는 것은 일반적으로 교제를 의미하나 식사 후의 잔(20절)은 특별히 예수의 수
난과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너희끼리 나누라 - 사례한 잔을 제자들에게 주며 서로 나누라고 하는 이 장면은 마
치 예수는 마시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잔을 넘겨 준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런데 15
절에서 '먹기를 원했다'는 예수의 간절한 희망을 보거나 당시 같은 잔을 여러 사람이
나누었다는 예레미야스(Jeremias)의 진술이나 관례적으로 주인공이 먼저 잔을 마셨다
는 쉬어만(Schurmann)의 주장을 볼때 예수가 먼저 잔을 마시고 제자들에게 차례대로
마시게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22:18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 포도주를 더 이상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의 기한을
언급하는 이 구절은 16절에서 언급된 유월절 식사에 대한 것과 비슷한 어투이다. 여기
서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 구절 역시 두 가지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
째는, 유월절의 포도주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
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유월절의 포도주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유월절의 포도주를 나누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22:19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 유월절 식사중 두번째 순서에 대한 언급이다. 누가는 17절
에서 포도주를 가지고 행한 의식에서 사용된 단어 '사례하다'라는 뜻의 '유카리스테
오'(* )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축복'
이라는 뜻의(마 26:26 ; 막 14:22) 헬라어 '율로게오'(* )를 사용한
다. 이는 '찬양한다'(praise),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 축원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유카리스테오'나 '율로게오'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다른 의
미를 갖는다. 그러나 감사와 찬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한다는 믿음
에 근거를 둔 축복이라는 점에서 두 단어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큰 빵을 '쪼갠다'는 의미의 '크라오'(* )는 신
약 성경에서 식사 때 빵을 나누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24:30 ; 마 14:19 ; 15:36 ;
26:26 ; 막 8:6, 19 ; 14:22 ; 행 2:46 ; 20:7, 11 ; 27:35 ; 고전 10:16 ; 11:24).
큰 빵을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나누어 준 것인지 포도주처럼 자신의 것만
떼고 나머지를 제자들에게 돌려 차례대로 먹게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강
조되는 점은 한 개의 빵덩이를 여러 사람이서 나누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이것'(* , 투토)은 예수가 제
자들에게 나누어 준 빵, 즉 유월절 식사용 무교병을 가리킨다. 여기서 빵과 일치시킨
'몸'이라는 단어 '소마'(* )는 인간의 전체적인 육체를 뜻한다(Dalman,
Behm, Cranfield, Kummel, E. Schweizer). 예수는 자신의 몸 전체를 유월절 어린 양으
로서 온인류의 희생물로 드리고자 하셨음이 분명하다. 요 6:51에서는 같은 의미의 말
을 언급하면서 '소마' 대신 '사릍스'(* ) 곧 '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살과 피를 통해 죽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사실과 연관을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가 빵 한 개를 여러 사람에게 나눈것은 자기의 몸, 곧 살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이 상징적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예수 자신이 여러 사람을 위해 희생됨과 동시에 그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는, 먹는 사람 입장에서 볼때 그 빵 즉 예수의 살을 먹는 모든 사람은 예수의 희
생, 즉 그 삶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빵을 먹는다는 것은 그 빵이 먹는 사
람의 살이 된다는 의미에서 빵과 사람이 하나로 일치되듯이 예수의 살 곧 빵을 먹는
사람은 예수와 하나가 되어 예수와 일치된 삶을 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나를 기념하라 - 예수는 유월절 만찬을 자신의 최후의 만찬으로 지키셨으며 이를
그대로 행하여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기념하라'는 단어 '아남네시스'(*
)는 명사형으로서 '기억' 또는 '기념물'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이
뜻하는 바는 이것을 행하면서 예수의 전체적인 삶을 기억하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떼는 데서 상징적으로 묘사된 바처럼
예수의 삶과 희생을 생생하게 기억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찬식의 기원과 목적이 분
명하게 나타난다. 성찬식의 목적은 그와 같은 기억을 되살려 세상에 널리 알리는 선교
에 있으며, 기독교인은 예수의 일을 기억하여 선교에 힘써야 한다는 마땅한 의무를 갖
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만찬 도중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사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시고 자신의 재림시까지 이를 기념토록 명하신 것은 오늘날 카톨릭과 개신
교에서 지키고 있는 성만찬 예식의 기원이 된다.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 단순한 애
찬식 정도의 감사의 예전으로 지켜져 왔으나 중세를 거치면서 교리적이며 신학적 문제
가 제기되어 성만찬에 관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교리적 신학적
차이로 인해 카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카톨릭의 주장은 화
체설(Transubstantiation)로서 성찬식 때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는 순간 그것이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예수께서 성찬식에 육체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카톨릭측의 화체설은 너무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성찬식 때마다 떡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
찬에 너무 큰 의미를 두어 그 의미를 와전시킨 것이다. 성만찬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를 대속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고 그 성만찬에 임재하시는
예수를 기념하는 것이다. 성만찬의 역사적 변천 과정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에 관해
서는 주제 강해 '성찬식의 유래'를 참조하라.
=====22: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 여기 언급된 잔은 유월절 식사 중 마시게
되는 4잔 중 식사 후에 분배되는 마지막 잔으로 보인다. 잔은 단순한 그릇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잔 속에 담겨진 포도주를 가리킨다. 이 포도주가 예수의 피로 세운 언
약이 된다는 묘사는 출 24:8과 비슷한 내용이다. 그러나 누가는 여기서 '새로운'(*
, 카이노스)이라는 표현으로 모세의 계약과 예수께서 세우시는 언
약을 구분시키고 있다. 즉 더 이상 짐승의 피로 하나님과의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구원이 약속되는 새 계약이 성립되었다. 따라서 유
월절 식사는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예수의 희생과 구원의 능력을 기념하고 기억하게
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것이 성찬 예식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 성찬 예식은
예수의 말씀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보여 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기념하고 체험
케하는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 '붓다'로 번역된 헬라어 '여퀸노메논'(*
)은 '여케오'(* )에서 유래한 말인데 '피를 흘린다',
'피를 쏟는다'는 뜻과 '술을 붓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에 언급된 '붓는
다'라는 말은 예수의 죽음을 나타내는 피흘림과 그 죄를 상징하는 포도주의 의미를 함
축하고 있다.
=====22:21
그러나 보라 - 예수는 자신을 배반할 제자를 암시하면서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과
대립되는 문장으로 연결하기 위해 '그러나'(* , 플렌)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한 '너희를 위해 흘리는 피'로 세운 계약이 지금부터 언급되는
배반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즉 구원의 약속은 배반자를 제외시킨다는 말
이다. 배반자에 대한 예고를 강조하기 의해 '보라'(* , 이두)라는 누가만
의 강조법을 사용한다.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 배반자가 제자들 중에 있을 것이
라는 이 같은 누가의 암시는 마태와 마가의 진술과 차이를 보여 준다 이 같은 배신의
예고가 마태와 마가에서는 식사 시작 또는 식사 중에 나타난 것으로 묘사된 반면(마
26:21 ; 막 14:18), 누가는 식사를 마친후에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요
13:26에서는 빵을 한 조각 찍어 준다는 표현을 함으로써 식사 초반 또는 식사 중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같은 차이는 누가의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누가는 이 배반
의 예고를 다른 복음서들보다 비교적 짤막하고 간단하게 언급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유다를 직접 지목하고 마태와 마가는 제자 중의 한 명이라고 언급한다. 반면 누가는
이 같은 언급없이 암시적으로만 묘사한 점으로 보아 제자의 배신을 크게 강조하지 않
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식사 후에 배열함으로써 성만찬 예식과 예수에
대한 유다의 배반을 구분하고자 했을 것이다. 여기서 배반자는 '나를 파는 자'(*
, 파라디도미)로 묘사되었는데 5, 6절에 이미 언급된 유다의 배신
과 돈을 받기로 약속된 이야기를 전제한 것이다. 누가는 파는 자의 손이 함께 상 위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누구인지 불분명하게 언급하는 반면 마태와 마가는 배반자가 예수
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특히 마태의 경우는 그릇에
예수와 함께 손을 넣은 자가 유다임을 유다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을 통해 밝힌다(마
26:25). 반해 식탁 위에 손이 있다는 말은 단순히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손을 가리킬
수 있지만(B. Lohse) 더 확장된 의미로 볼 때 식탁은 식사를 나누는 장소이므로 친교
를 나누는 가까운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Rehkopf). 이는 예수가 가까운 친구로부터
배신당할 것이라는 시 41:9의 말과 일치되는 바, 예수의 배신당함이 구약 예언의 성취
로 이루어졌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 자리에 모든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서 이 사실을 말씀하신 이유는 유다로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케
하시려는 의도였다. 하나님은 항상 죄인들이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므로 길이 참
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인간 편에서는 다만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결단에는 선택에의 책임이 뒤따른다.
=====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 예수는 자신을 배신하는 유다의 행위가 이미
예정된 일이었음을 앞절에서 암시한 후 여기서는 자신의 고난이 또한 예정된 것으로서
피할 수 없는 것임을 표명한다. 예수는 여기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고난받는 메시야의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9:22). '작정된 대로 가거니'라
는 말은 가장 가까운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게 되는 고난이 변경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배신과 고난 그리고 죽음이 예측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견되고 있었으며 그러나 예수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운명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한대로 의
연히 그 길을 갈 것이라는 굳은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 누가는 앞절에서처럼 예수를 팔 사람
을 불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반면에 마태와 마가는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라고
분명하게 저주받을 사람을 지목한다. '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아이'(* )
는 저주문에 사용되는 단어이다(10:13 ; 마 11:21 ; 18:7 ; 막 13:17). 이와 같은 저
주는 마 27:3-5에 보면 유다가 목매어 죽음으로써 또는 행 1:18, 19절의 언급처럼 몸
이 곤두박질해 배가 터져 죽음으로써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22:23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 예수가 특정인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 12명
중 어느 누구가 배신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언급함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혼란이 온 것
을 보여준다. 12명의 제자 모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보
다는 자기들 중에서 누가 배반할 자인지를 찾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에 논쟁적인 분위
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태는 유다가 '랍비여 내니이까?'(Surely not I.
Rabbi?, NIV)라고 자수하는 듯한 말을 하고 곧이어 예수가 긍정함으로써 논쟁하나 장
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마 26:25). 누가는 유다 한 사람보다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 전체의 반응에 보다 큰 관심을 보였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을 유다
한 사람 뿐만아니라 제자들을 위시한 모든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22:24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 누가 예수의 배반자인가에
대해 논쟁한 직후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가에 대한 다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선
뜻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배신자가 누구냐는 심각한 물음에 대한 해결점 없이 갑
자기 자신들의 자리다툼으로 이야기가 전환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마태
와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이 식사 후 곧바로 감람산으로 간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
서(마 26:30 ; 막 14:26) 누가가 언급한 이 구절의 위치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제
자들 간에 자리다툼이 있었다는 암시는 9:46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고 마가도 9:33-35
; 10:35-41에서 두 차례 인급한 점으로 보아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가에 대한 문제
로 갈등(葛藤)이 여러 번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의 배신에
대한 언급과 고난이 임박했다는 분위기에서 9:46과 마찬가지로 자리다툼이 있다고 보
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또 접속사 '카이'(* )를 사용하여 앞절과 연결하고
있으며 앞절의 '서로 묻되'(* , 쉬제테인)라는 단어와 상응하여
'다툼'(* , 필로네이키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점이 매우 자연스럽
다. 그래서 이 본문을 누가만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제자들간의 갈등 묘사라고 볼 수
있으며 문장의 위치에 대한 의심도 해결이 된다. '다툼'(dispute)이라는 단어는 22절
의 '서로묻되'라는 말 보다 강한 의미로서 '싸움'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따라서 이 같
은 강조는 제자들이 배신자에 대한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자신들의 위치에 더 관
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배신자가 아니다'라는 소극적 논쟁에서 '내가
더 크다'라는 적극적 논쟁으로 전환함으로써 제가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회피하고 자신
들의 이기적 야욕(野慾)을 드러낸 것이다.
=====22:25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 이 구절은 마 20:25 ; 막 10:42과 평행을 이
루고 있다. 서로 높은 자가 되기를 바라며 다투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정치 권력의
예를들면서 교훈을 베푸신다. 누가가 언급한 '이방인의 임금들'이란 국가의 공권력(公
權力)을 장악한 통치자와 그 관료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방인들의 통치자들을 언급
한 이유는 당시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 상황하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유대인
들이 로마인들과 같은 이방인들을 적대시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의미의 정치 권력을
의미한다. '주관하다'의 헬라어 '퀴리유오'(* )는 '주인(*
, 퀴리오스)이 된다'는 뜻으로서 주인이 노예를 지배한다는 말이다. 다
시 말하면 집권자와 민중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되어 있다는 비판적 의미의 말이다.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 여기서 말하는 '은인'(benefactor)이라는
헬라어 '유에르게테스'(* )는 '좋다'는 뜻의 '유'(* )와 '공적
행동'이라는 뜻을 가진 '에르곤'(* )이 합쳐져서 된 복합어로서 '선
한 일을 위해 힘쓰는 자' 또는 '박애주의자' 등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이 같은 칭
호는 이집트나(Ptolemy , Ptolemy ) 시리아(Antiochus ) 로마(Trajain) 등
지에서 폭군적 지배자들에게 붙여졌고 유다에서도 오니아스 세 대사제(Onias )에게
이 칭호가 붙여졌다(I. H. Marshall). 이방인의 왕들은 그들의 백성 위에 군림하고 최
상의 군주로 행세하는데서 그들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며 백성들로부터 칭송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 같은 칭호를 스스로 사용한다. 이 말 역시 폭군이 미사여구(美辭麗
句)로 꾸며지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대한 비판적 표현이다.
=====22: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 여기서 가리키는 '너희'는 제자들이지만 앞절에서 말한
'이방인들'(Gentiles)에 대칭되는 말이라는 점에서 누가는 당시 기독교인을 염두에 두
고 말한 것이다. 즉 세상의 인간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되어 있고 그 지배자
의 횡포가 오히려 정당화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삶의 자세를 말한 것으로 25
절에서 제사한 이방인들의 집권자들과 반대되는 자세이다. 누가는 이 말을 소개하면서
당시 초대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즉 이는 당시 교회 내에 자리
의 높고 낮음에 한 문제가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큰 자'(the
greatest)에 대비되는 '젊은 자'는 헬라어 '호 네오 테로스'(* )
를 번역한 말인데 본래의 뜻은 '아주 어린 자'(youth)를 뜻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큰 자'와 대칭되어 아주 어리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 - 참된 지도자는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세상의 지배 구조를 거부하고 혁명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다. 뿐만 아
니라 교회안에서 나타나는 교권적(敎權的)이고 권위주의적인 구조를 뒤엎고 모두가 서
로 섬기는 위치에서야 한다는 요청이다. 이 같은 요청이 인간의 모든 공동체가 바르게
유지되고 발전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22: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그냐 - 섬김을 받는 자와 섬기는 자를 대비시
킨 반문 형식의 이 비유는 앞절의 내용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즉 큰 자가 작은 자
로, 지도자가 섬기는 자로 되어야 한다는 파격적(破格的) 명제와 현실적 가치 기준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26절의 내용을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앉아서 먹는 자'는 일반적
으로 유대 생활 속에서 종을 둔 주인 또는 앞절에서 언급했던 지도자, 집권자들과 시
중을 받으면서 음식을 먹는 손님을 뜻한다. 그리고 '섬기는 자'는 식사 시중을 드는
종을 가리키는 말로서 26절에서 언급된 '젊은 자'에 상응하는 말이다. 이와갈은 대비
적 비유를 이야기한 후 예수는 너무도 자명한 대답인 앉아 먹는자가 크다고 말하면서
대비적 효과는 고조시키고 있는데 곧이어 언급되는 문장을 강조하는 효과를 준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 26절의 내용을 결정적으로 보증하고
확신시키는 이 말은 제자들의 다툼에 대한 훈계의 결론에 해당된다. 특히 예수를 배우
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한 이 말은 곧 제자들에게 규범이 되고 모범이 되는 스승을 배
워야 함과 아울러 그를 따라 실천해야 하는 당위성(當爲性)을 가르친다. 여기서 예수
는 지금 자신이 제자들 속에서 섬기는 자로 있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먹는 비유를 들
었다는 점에서 예수가 제가들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같은 추
측은 17-20절까지의 내용을 전제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에서 행
한 예수의 역할은 섬기는 자의 모습을 통해 메시야적 입장에서 제자들에게 예수 사역
의 의미를 제시해 주었다는 의의가 있다(I. H. Marshall, J. Weiss). 그래서 바이스
(J. Weiss)는, 예수가 시중든다는 말은 그의 전체적 삶을 통칭한 은유적 표현으로 이
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예수 자신은 섬김을 밭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기 때문이다(마 20:28). 예수께서는 먼저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셨을 뿐아니라(요 13:4) 사랑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의 모든
것, 즉 생명까지도 내어주셨다.
=====22:28
나의 모든 시험 중에...함께 한 자들인즉 - 이 구절은 마지막 작별 인사와도 같은
암시를 준다. 이제까지의 공성애 활동을 하는동안 동고 동락(同苦同樂)했던 제자들에
게 예수는 그들의 고생을 격려하고 계신다. 24절에서도 묘사되었듯이 제자들의 여러
잘못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제자들을 가리켜 자신의 모든 시험 때에 함께 하여 준 고맙
고 장한 제자들로 묘사하며 제자들에 대해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예수는 제자들을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모범자들로 인정하고 앞으로 닥칠 위험
들 때문에 예수와 함께 했던 그 길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달려갈 것을 격려 하신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인이 예수와 같은 길을 가야 한다는 진리를 암시해 주고 있다. 여기
서 언급된 '시험'(* , 페이라스모스)이란 '유혹'이라는 단순한 의미
보다는 공생애 기간 동안 격어온 수많은 '위험들' 또는 '고통'과 '시련들'(trial)을
뜻한다.
=====22:29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권한과 과업을 넘겨 주기
전에 그 권한과 과업이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왔음을 밝힌다. 여기서 언급한 '나라'는
헬라어로 '바실레이아'(* )이다. '바실레이아'는 국가의 구성
요소인 영토적인 개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통치적인 개념 즉 왕권(kingship)을 나타
내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영토적인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통치적인
왕권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물론 이 왕건은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온 하늘나라
의 통치권(統治權)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왕권을 지상에서 받았으므로 이미 하
늘나라는 이 땅에서 예수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왕권을 위임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이 있음을 뜻하며 그 선포 내용에 대한
보증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이다.
나도 너희에게 맡겨 - 이제 하늘로부터 온 그 권한과 권위가 제자들에게로 옮겨간
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도 그렇게 위임한다고 밝힘으로써 자신의
위임이 하나님의 위임임을 알리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나라
(Kingdom of God) 건설과 하나님 나라 선포 활동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 뒤에도 중단되
지 않고 지속되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
=====22:30
내 나라에 있어 - 25-29절이 섬기는 자의 도리를 말한 반면 본절은 그 역할과 사명
을 다한 제자들이 받을 하나님 나라의 보상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내 나라'는 하나
님의 나라를 뜻하는데 종말적 심판의 때에 도래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마
19:28절에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까지'라고 언
급되는바 이는 세상이 변혁된 새세계 곧 종말론적(eschatological)으로 완성된 하나님
의 나라를 이룰 것임을 암시한다.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 그 날에는 하늘나라에서 예수와 함께하
는 잔치가 벌어진다. 16절에서 하늘나라에서 유월절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먹지 않겠
다는 예수의 말을 생각하면 이 잔치는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해방(解放)과 구원의
유월절 축제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제자들은 이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보상으로 받
게 된다. 마 19:28에서는 '열 두 보좌'라고 말함으로써 분명히 제자가 모두 참여 할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누가는 자리 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 어느 진술이 정확한 것인
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배반자 유다의 자리를 포함시킬 수 없어 슷자를 언급하지 않
은 것으로 보인다(I.H. Marshall). 그러나 숫자는 중요한 의미가 없다. '열 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을 두고 한 말이지만 보편적 의미로 이해되어야한다. 즉
열 두 지과는 곧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통치 구조
의 변혁이다. 즉 25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은 통치 구조는 사라지고 26절에서 언급된
형태의 통치 구조가 실현되어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나라가 될 것이
라는 말이다. 이 같은 형태의 통치는 종말의 때에 완성될 것이지만 지금 여기서 섬기
는 통치가 확장되어가고 선포되어져야 할 것이라는 점도 암시되고 있다.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청구 하였으나 -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였듯이 예수는
제자들에 대한 격려와 보상에 대한 약속을 한 직후 베드로의 배신(背信)을 예고한다.
그러나 독특한 점은 유다의 배신 예고에서는 언급한 바 없는 사단의 역할에 대해서 예
수가 직접 언급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배신에 대한 저주와 경고라기 보다는 애정을
담고 있는 충고와 걱정이다. 특히 여기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이름을 두번씩 반복하
여 부름으로써 충고의 간절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단이 청구했다'는 표현은 배신의
행위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자적(他者的)인 악령의 힘에 의해 이끌리게 될 것임
을 암시한다. 한편 '까부르듯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시니아조'(* )
는 '체를 흔들다', '체를 치다'는 뜻이다. 본절에 은유적으로 사용된 이 단어의 정확
한적용례(paradigm)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대체로 다음 새 가지의 견해가 있다. 첫
째는, 알곡과 쭉정이를 걸러내는 시련을 통하여 참된 제자와 거짓 제자들을 분리한다
는 견해이다(Jeremias). 둘째는, 사단이 시련의 체를 통해 제자들을 참소(讒訴)할 증
거들을 찾고 있다는 견해이다(Foerster). 이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 욥을 시험하여
악한 증거를 찾아 욥을 공격하고자 했던 사단의 시도를 상기케 한다(욥 1:6-12). 셋째
는, 여기서 체를 흔드는 것은 제자들을 구분하여 걸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들의 믿음을 입증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이다(Lanrange, Fuchs, Schurimann).
이 세 견해 중 두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다. 곡식을 체질하는 것은 원래 쪽정이
를 날려 보내기 위한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라는 전후
문맥으로 보아 첫번째와 세번째 견해는 각각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거니와 문
제는 제자들이 시련의 와중에서 서느냐 아니면 넘어지느냐 하는 점이다.
=====22:32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 여기서 배신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다시 말해 배신의 책임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베드로의 믿음
이 떨어지지 않고 굳세지기를 기도했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믿
음이 떨어질때 예수께 대한 배신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
신 것은 베드로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의 특별한 위치를 시사해
준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다른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해 주는 역할을 부여함으로
써 베드로가 제자들 중에 우두머리의 위치에 있음을 암시해 준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베드로에게 가장 큰 신뢰를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케 한다. 여기서 '돌이
킨 후'의 헬라어 '에피스트레포'(* )는 '회개한다', '돌아선
다'의 뜻으로 사용된다. 베드로가 변절(變節)할 것이라는 직접적인 예고없이 '회개하
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변절을 간접적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가서 제자들을 향해 슥 13:7을 인용하여 '너희 모두가 나를
버릴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을 기록한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여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
리로 갈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마 26:30-32 ; 막 14:26-28) 누가는 이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누가는 제자들의 자랑스럽지 못한 변절의 모습을 축소하고 완곡한
형태로 수정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22:33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 베드로는 예수의 말 속에서
암시된 뜻을 이해하고 예수와 함께 끝까기 같은 길을 가겠다고 호언(豪言)한다. 마태
와 마가는 다른 사람이 다 버려도 자신은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남과 비교하여 강경하
게 장담한다(마 26:33 ; 막 14:29). 전체적으로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의 충성하겠다는
장담과 변절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베드로의 변절을 강조한다. 반면 누가는 베드로의
변절을 부드럽게 묘사한다. 베드로는 천성적으로 성격이 매우 급한 충동적인 사람이었
다. 그는 인정받기를 좋아하고 자기 자신을 과시하며 자랑하기를 즐겨 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충성스러웠고 주를 사랑하고 남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고 아울러 훌륭한 통
찰력(通察力)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굴하지 않겠다는
자기 과신(self-confidence)에 빠진 베드로는 끝내 난관에 부딪혀 예수를 부인하는 우
(愚)를 범하게 된다.
=====22:34
베드로야 - 요 1:42에 의하면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가 직접 지어준 '반석'이란
뜻의 이름이다. 이렇게 예수 자신이 직접 베드로라는 이름을 부른 것은 이곳에만 나타
나는데 각별한 의미를 시사해 준다. 즉 베드로라는 이름이 반석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변할 수 없는 굳고 단단한 의지로 믿음을 지켜야한다는 것을 베드로에게 일깨워 주고
자 하는 듯하다.
오늘 닭울기 전에 -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변절의 정확한 시각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오늘'이란 유월절 식사를 마친 후에 언급된 시간이라는 점에서 유월절을 하루
넘긴 니산월 15일이다. 또 유대인의 시간 분배가 해질녘부터 다음 날 해질 때까지를
하루로 계산하기 때문에 15일 새벽 닭 울기 전이라고 보면 된다. 막 13:35에 보면 시
간을 한밤중과 닭 울 때, 그리고 새벽을 따로 구분하는데 동틀 새벽 이전의 깊은 새벽
이 닭 울 때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닭 울기 전이므로 새벽 3시경으로 시각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시각은 세 복음서 모두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는데 마가는 독특하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이라고 언급한다(60절 주석 참조).
=====22:35
전대와 주어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 - 본서에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여 보낸 적
이 두 번 있는데 한 번은 12제자를 파송해 보냈고(9:2-1) 또 한 번은 70인을 선택하여
두명씩 짝지어 파송했다(10:1-5).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기억하도록 요청하는
이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신다. 즉 전대, 주머니 그리고 신이라는 어휘는 10장에서 언
급한 내용과 일치하며 9장과는 옷과 식량에 대한 언급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예수
가 지시하는 기억은 70인 파송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0장에서는 12제
자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제외된듯 하지만 사실 제자들이 함께 선교에 참가했을 것
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제자들은 당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선교 활동을 했을 때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대답하면서 예수와 일치된 견해를 보여준다. 이 말은 선교 활동
당시 전도를 받은 사람들의 친절로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 되었다는 뜻이며(10:7) 그
들이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을 환영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22:36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 원문에서는 '그러나 지금'(*
, 알라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앞에서 언급한 상황과 전혀 반대되는 상황임을
암시해 준다. 즉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선교 여행을 하였고 식사와 잠자
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
수는 이제 전대(purse, NIV)와 주머니(bag, NIV)를 가지라고 지시하신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인심도 달라지고 따라서 제자들의 활동 무대가 제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암
시이다. 이 같은 시대의 구분은 예수 당시와 초대 교회의 박해 시대를 대비시킨 것으
로 볼 수 있다(Conzelmann). 21장까지 예수의 활동이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사
실과 22, 23장에 언급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대비시키는 것으로도 이해된다(P.S.
Minear).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 본 구절의 이야기의 내용은 매우 고조된 긴
장감을 나타낸다. 먼저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한 까닭은 반드시 겉옷을 팔라는 지
시가 아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전대를 가져 돈이 있다면 칼을 살 수 있겠지만 없는
사람은 자기의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준비하라는 말이다. 이 같은 말은 칼이 얼마나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인지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칼은 무엇에 쓸려고 준비하라고 하
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우선 제자들이 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한 점은 그 검을 준비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반증
한다. 그리고 38절에서는 제자들 중에 칼 두 자루가 있음을 예수에게 밝힌다. 따라서
제자들 중에 누군가가 칼을 소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칼이 필요했던 것은 영적인
검 또는 성령의 검을 준비하라는 은유적 표현이라는 견해도 있고(Olshausen, Godet).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 칼을 준비하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도 있으며
(Bengel), 무력적 힘을 통해 선교하라는 지시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견
해들은 예수의 전체적인 생애와 어울리지 않는 해석들이다. 오히려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이전과는 다른 위험이 닥쳐올 새로운 환경을 경계하도록 주의시키면서 자기 스스로
를 보호하고 나아가 희생할 각오를 하라고 당부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
다(Meyer, Farrar, Plummer, Gilmour).
=====22:37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 사 53:12을 상기시키며 34절에서
처럼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강조 어투를 사용하여 예수 자신의 고난을 예언의 성
취로 언급한다. 즉 메시야가 도리어 범죄자 또는 악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는 이사야
의 예언이 예수 자신에게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함으로써 앞으로 닥칠 예수의 체포와
재판을 통한 사형 집행을 시사해 준다.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 '내게 관한 일'이란 앞서 언급한 이사야의 예언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자신의 수난에 대한 예언들을 가리킨다. 그 예언들이 '이루어
간다'는 말의 헬라어 '텔로스 에케이'(* )를 직역하면 '끝', '결
말', 또는 '목표를 가진다'라는 뜻이며 이는 예언 성취의 절정에 이르렀다는 말로써
예수 자신의 수난이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22:38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 '검을 준비하라'는 말씀과 함께 자신이 체포될 것을 언급
한 예수께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칼(sward, NIV) 두 자루를 예수께 보여 주는 것이었
다. 제자들의 이 같은 행동은 예수의 체포에 대해 칼로서 저항하자는 의지를 담고 있
다. 또한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예수의 제자들 중에 적어도 한 두 명 정도는 칼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칼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
가 제기된다. 이 칼은 50절에서 제사장의 귀를 친 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칼의 주인은 요 18:10에 따르면 베드로가 된다. 그러나 칼 주인과 칼 사용자를 동일하
게 생각할 수 있는 중거는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가능한 추측은 6:15과 행1:13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 중에 갈릴리에 근거지를 둔 무력 혁명 단체인 셀롯 당원
(Zealots) 시몬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칼이 시몬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것도 증명되지 않은 추측이다. 당시 여행자들이 호신용 칼을 지니고 다니는 것은 흔
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 칼은 단순한 호신용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족하다 하시니라 - 칼을 내민 제자에 대한 예수의 이 대답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칼 두 자루는 저항할 수 있을 만큼 강
력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예수 자신이 체포와 수난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임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저항 의지를 보여준 것은 예수의 뜻에 반
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는 제자들의 의지를 묵살하는 뜻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역설적인 꾸지람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장소를 기도하는 곳으로 옮겼다는 사실도 이 같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22:40
<겟세마네과 동산에서 가장 오래된 한 나무>
그곳에 이르러 - 습관적으로 왔던 장소임을 말해주는
'그곳'은 감람산 서쪽 중턱에 있는 '겟세마네'로 추측된다
(마 26:36 ; 막 14:32). 이곳은 제자들과 함께 습관적으로
모여 기도하던 장소이기도 하지만 위험을 피하여 은둔
하던 장소이기도 하다(Leaney).
아무튼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기도하시면서 사역을 준비
하셨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이제 그는 이 땅에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기도를
드리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하는 마지막
기도를 잠으로 대신한다(45, 46절).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 여기서 시험이란
곧 닥칠 체포와 고난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체포되신 후, 이로 인해 제자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자신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이미 아셨고 따라서 그들이 낙심하고 절망하며 시험에 들지 않기
를 주의시키신다. 아울러 예수 자신도 심각한 고난과 시험을 직면하여 함께 기도하신
다.
=====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힘을 돕더라 - 예수의 고뇌에 찬 모습과 그 두려움은 심장의
파열로 죽음에 이를 지경으로 묘사한다. 마태는 예수의 고뇌를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기록한다. 예수는 인간이셨기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해서
하늘의 도움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움이 없었다면 십자가에 달
리기 전에 이미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하늘로부터의 사자(angel,
NIV)가 예수를 도왔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갖는다. 천사가 예수를 도왔다는 기사는 이
곳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언급되었다(마
4:11 ; 막 1:13). 광야에서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후 기진하셨을 때 천사가 그를 도
와, 기력을 회복하시고 성령충만한 사역을 하셨으며 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셨다.
아울러 이곳에서도 예수께서 고뇌(苦惱)와 두려움으로 가득차 기도하시며 기진하시자,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도와 끝까지 고난의 길을 다 갈 수 있도록 하였다.
=====22:46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일어나' 라는 말대
신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마태와 마가는 예수
께서 그 말씀을 하신 후 세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와서 자는 것을 보시고 돌아가 다시
똑같은 기도를 하셨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돌아와 자고
쉬라는 말을 하신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의 보도에 따르면 제자들은 예수의 체포 순간
까지 예수와 연대(連帶)하지 못하고 예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하고 어리석
은 모습으로 강조된다. 반면 누가는 이 같은 모습을 언급하고 싶지 않아 세 차례의 기
도와 책망을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제자들은 지난 밤의 긴장되고 무거운 만찬
과 예수의 고별의 말씀들과 예수께서 배반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흥분 등으로
매우 긴장된채 밤을 맞이하여 기도에 들어갓다. 아울러 그들은 기도하며 예수의 죽음
에 대해 인식하면서 슬픔 감정과 함께 심신이 피로하였을 것이다. 이런 복합적 요인으
로 인해 그들은 기도하면서 쉽게 잠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밤은 그들이 쉽게 잠
들 만큼 평온한 밤이 아니었다. 그 밤은 온통 죽음의 권세가 온 세상을 짖누르고 있었
으며 예수는 온몸으로 이 세력과 홀로 맞서고 계셨다. 이러한 예수를 두고 제자들은
잠들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예수의 힘이 되어 주어야만 했었다. 그들이 이전에 수많은
밤을 지새며 바다에서 고기를 잡지 않았었던가. 그런데 이 밤에 단 하룻밤 몇 시간 동
안도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고 말았다. 결국 이들의 잠이 그들에게 엄청난 시험과 좌절
과 절망으로 나타났으며 걷잡을 수 없는 슬픔 속에 빠지게 하였다.
=====22:47
한 무리가 오는데 - 유다가 오는데...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 예수를
체포하기 위한 일단의 무리들이 유다의 인솔로 예수께 다가오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는 이 장면을 다가오는 '무리들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
로들에게서 파송된 사람들임을 밝히면서 그들의 손에는 칼과 몽치가 들렸다고 언급한
다. 아울러 추측컨대 이 일단의 무리들 가운데는 안토니아 요새를 수비하는 로마 병정
들과 성전을 경비하는 유대 병정들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유다가 서술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누가는 유다에 대한 배신을 부각시킨다. 때문에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온
다고 기록하는데 누가는 '유다라 하는 자가' 온다고 경멸적 표현을 함으로써 유다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22:48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 유다가 예수께 입맞추기 위해 가까이 올 때 예수
께서는 유다의 심증을 꿰뚫어 보셨다. 덧붙여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검을 들고 따라온 병사들과 입맞춤을 신호로 체포한다고 약속했음을 밝힌다. 그
런데 마태와 마가의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 유다는 인사와 한께 입맞춤을 하게 되고 곧
이어 예수를 체포하게 된다. 반면 누가는 입맞춤을 시작하려 했을 뿐 성공하지 못하였
다. 누가의 이 같은 표현이 시사하는 바는 예수가 유다의 속임수에 넘어가 체포된 것
이 아니며 유다의 행위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점과 예수가 직접 유다의 이름을 부
르는 탄식조의 어투를 통해 유다의 배신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겟세마네
동산은 깊은 밤인데다 감람나무로 인해 더욱 어둑캄캄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한다면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가롯 유다와 체
포자들은 예수를 쉽게 알아내어 체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고, 그 신호는 가롯
유다의 배반의 입맞춤으로 결정되었다.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행해야 할 입맞춤을 가
롯유다는 파렴치(破廉恥)한 배반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22:49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 '좌우'(jesus' follows, NIV)란 예수 주위에 함께 있는
제자들을 지칭한다. 제자들은 유다와 그가 이끌고 온 무리들을 보고 예수의 예언대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태와 마가는 이러한 언급 없이 무리들이 예수를
잡았다고 말한다. 역시 누가의 표현은 제자들이 예수의 위험을 함께 느끼며 반응을 보
이게 함으로써 제자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 제자들은 예수에게 38절에서 보여 주었던 칼로 적들을
향해 대항할 것을 요청한다. 본문은 질문 형태이지만 50절에서 칼을 사용한 점으로 보
아 질문 속에 칼을 사용해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누가는 이같은
제자들의 행위를 의분(義憤)에 찬 긍정적 행동으로 묘사하려고 한다.
=====22:50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 칼을 사용한 사람이 요 18:10에 따르면
베드로였다. 그리고 요한은 종의 이름이 '말고'(Malchus, NIV)였음을 밝힌다. 이 같은
상황은 매우 긴박하고 전면적인 싸움의 단계에 이른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베드로가
보여 준 행동은 용감한 행동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자신의 스승을 걱정
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또 스승을 보호하고 위기 상황에서 구출하겠다는 기특한 마
음에서 나온 의리있는 행동으로 평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
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다함없는 충성이요 그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獻身)의
사랑이었다.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 칼을 내리친 결과 그 종은 오른쪽 귀가 떨어졌다.
마태와 마가는 어느쪽 귀라고 밝히지 않고 단순히 귀가 떨어졌다고 밝힌다. 반면 누가
와 요한은 오른쪽임을 밝혀 사건의 정확성을 보강한다. 한편 대제사장의 종처럼 신체
의 어느 부위가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제사장을 시중들고 봉사하는데 부적격자로 판명
이 되 더 이상 대제사장의 종으로 활동을 못했다(Jos., Antiq. 14:366). 그리고 유대
사상에 의하면 종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모독을 당한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그 종의 주인이 공격을 받고 모독을 당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종 말고가 귀
를 잘린 것은 그가 더 이상 대제사장의 종으로 활동할 수 없을 뿐더러 그는 직업을 잃
어버리고 생계를 위협받게 되는 것이었다. 아울러 자신의 종이 공격을 받아 간접적으
로 모독을 당한 대제사장은 신성 모독죄를 적용해 예수의 제자들을 탄압할 것이다. 예
수께서는 이같은 사실들을 너무도 명확히 아셨으며 그래서 종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
주셨고 제자들의 공격을 만류하셨던 것이다.
=====22:51
이것까지 참으라 - '이것까지 참으라'라는 말을 KJV는 '너희는 이보다 더한 고생도
받으리라'(Suffer ye thus far)라고 번역하며 RSV는 '이만큼 해두라'(No more of
this)라고 번역한다. 따라서 이 의미는 '너희의 항거는 이정도로만 하지 더해서는 안
된다'라는 뜻과 함께 '내가 잡히더라도 너희는 항거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헬라
어 원문은 그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전달해 준다. 즉 '이것까지'라는 말은 '헤오스 투
투'(* )로서 '여기까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참으
라'는 뜻의 '에아오'(* )는 '버려두라', '가게 하라'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들의 행동을 그냥 내버려두어 그들 마음대로 하게 하라'는 의미
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참뜻을 몰랐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체포가 어떤 의미를 주며
그의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따라서 제자들의 이런 무분별한 저항은 오히
려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 이 표현의 중심은 치료하는 기적에 있지 않고 치료
하는 행위에 있다. 즉 '참으라'고 한 말에 대한 구체적 행위로서 적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이다. 즉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제자들의 흥분을 막고 있다. 이 같
은 묘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요한복음에도 언급되지 않
는 누가만의 진술이다. 한편 마태는 예수께서 검을 도로 꽂으라고 지시하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교훈과 함께 당신이 힘이 없어 잡히는 것이 아니라고 책망
하는 어투로 묘사한다(마 26:47-56). 한편 예수께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
으라'(출 21:24)는 구약 율법의 말씀을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 5:39)는 사랑의 말씀으로 바꾸어 놓으셨으며, 또 이
를 몸소 실천하셨다. 따라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들까지도 사랑하시는 사랑의
완성을 보여 주셨다(23:34). 그는 실로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원형이었다.
=====22:52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
의 정체를 언급하는 이 구절은 마태와 마가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마태와 마가는
무리가 등장하는 초기에 무리의 정체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부터 파송된
사람들이라고만 언급한다(마 26:47 ; 막 14:43). 그러나 누가는 무리의 정체를 예수가
체포되는 순간에 언급한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라고 밝히며
서기관들 대신 성전의 군관들(the officer of themple guard, NIV)을 언급한다. 누가
가 성전의 군관들을 언급한 것은 4절에서 유다가 예수를 팔기 위해 의논한 대상이 대
제사장들과 군관이었다고 언급한 것과 일치된다. 아울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제사
장들이 직접 체포하러 오면서 성전 수비대를 이끌고 온 것은 타당하다. 따라서 누가의
진술이 설득력이 매우 강하다. 한편 이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
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갖은 음모를 다 꾸몄다. 간악한 질문
을 통해 책잡으려고 하는가 하면, 안식일을 범했다고 모함하고, 귀신들렸다고 비방했
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때가 이를 때까지 그들의 비방과 함정에 넘어가지 않고 복음
을 전하셨다. 그런데 이제 때가 이르자 유대의 사악한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가장 가
까이에 있던 제자의 배반으로 인해 예수는 죽음의 무리들에게 넘겨지게 된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것 같이 검과 몽치를 - 이 구절은 37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수
자신이 불법자와 동류(同類)로 취급당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확인하
는 말이다. 즉 예수는 범죄자로서 공권력에 의해 체포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
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된 이후 3년 동안 틈만나면 예수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
나 그들에게는 예수를 체포할 만한 정당한 근거가 없었고, 또 그들은 군중들의 눈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밤에도 정당한 근거가 없어 강도를 잡듯이 중무장
하고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야심(夜深)한 시각에 나타났던 것이다.
=====22:53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 예수의 말씀대로 유대교 지도자
들은 예수께서 낮에 선전에서 가르치실 때 공식적으로 체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들이 성전에서 낮에 예수를 체포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에게는 예수를 체포할 정당한
사유가 없었으며 아울러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좇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체포한 뒤
의 군중들의 반응을 그들은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낮에 성전에서
예수를 체포하지 못하고 적당한 기회를 엿보고 었었다. 그던데 이때 가롯유다의 배반
과 유대 지도자들의 기회 선택이 안성맞춤으로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 앞에서 상기시킨 말, 즉 예수의 활
동에 열광적으로 따랐던 민중들의 열기에 상대적으로 지도자들이 위축되고 두려워했던
때는 빛과 어둠의 대결에서 빛이 득세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이제 사태
가 역전되어 다시 어둠이 득세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마태와 마가는 이를 성경에 기록
된 예언의 성취로서 언급하고 있는데(마 26:56 ; 막 14:49) 누가는 3절에서 유다의 배
신이 사단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시사한 바 있듯이 예수의 체포 역시 악의 집단적 세
력에 의한 것임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어둠의 시대가 주는 고통과 치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의 자세는 초대 교회가 경험할 박해가 마땅히 겪게될 제
자됨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사단의 어
둠의 세력에 의한 것이라면 승리의 심판자로 예수가 다시 올 때까지 예수를 따르는 기
독교인들도 고난과 박해, 그리고 순교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22:54
예수를...대제사장의 집으로 - 이 구절은 예수를 체포한 주동 세력이 대제사장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때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다(마 26:57). 그는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
투스(A.D. 18, Valerius Gratus)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가 비텔리우스 총독
(A.D. 36)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18년간 대제사장으로 봉직했다. 그리고 그의 장인인
안나스 역시 대제사장을 역임했었다. 안나스는 A.D. 15년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안나스는 대제사장직을 종신직으로 여기던 유대인들
에게는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추앙 받았고 가야바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안나스는
명예 대제사장으로서 그 일가 중에서 세력의 우두머리를 차지하고 있어 현재 대제사장
직으로 있는 자기의 사위 가야바를 통하여 실질적으로 굉장한 세력을 계속 갖고 있었
다. 이처럼 유대 전통에 따라 대제사장직을 종신직으로 맡고 있으면서 유대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자들은 예수를 죽이는데 함께 공모해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누가의 표현에 의하면 체포와 연행의 순간에 아무
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제자들 모두가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였음을 묘사한다. 톡히 마가는 한 젊은이가 알몸으로 도망쳤다는 표현을 통해 상황
의 급박성과 제자들의 도망침을 구체적으로 강조한다(마 26:56 ; 막 14:51, 52).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 누가는 베드로의 행동에로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어
간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체포하여 연행(連行)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대제사장
의 집까지 그 뒤를 따라간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다른 제자들처럼
역시 베드로도 도망하였다가 멀리서 에수를 좇아 대제사장 집의 뜰까지 들어간 것으로
묘사하여 베드로의 비겁한 모습을 노출시킨다.
=====22:56
한 비자(婢子) -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한 일행이었음을 알아보았던 사람은 어린
여종이었다.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이 여종은 대제사장의 종이었고(막 14:66) 요한은
문지키는 여종이었다고 언급한다(요 18:17). '한 비자'라는 표현은 당시에 어린아이와
여성들은 사람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취급받았다는 점에서 제
자들 중에서 수석 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와 대비되어 베드로의 부인(否認)을 강조
한다. 그런데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와 마가의 보도와는 순서적으로 차
이가 있다. 즉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마당에 들어와 불을 쬔 후 곧이어 공회의 심문
이 있고 희롱을 당하는 예수의 모습이 소개된 다음 베드로의 부인하는 장면을 소개하
는데 누가는 곧바로 대제사장의 집에서 베드로가 부인을 한 후 사람들로부터 예수가
희롱을 당하고 마지막으로 공회의 심문(審問)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
다. 이야기의 전개상 누가의 방식이 더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베드로의
신분이 발각된 때가 예수의 심문과 희롱이 있은 후보다는 뜰 가운데 불쬐는 하인들 속
에 들어갔을 때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주목하여 가로되 - 어린 여종이 다른 곳에서 불쬐는 베드로에게로 가까이 왔는지
아니면 본래 베드로가 들어가기 전부터 불을 쬐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는
지 분명하지 않으나 후자가 적절하다고 본다. 이 여종은 베드로가 불을 향해 앉아 있
었기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여종은 베드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말을
하는데 주위에 있는 하인들을 향해 하고 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 어린 여종은 베드로를 지시하면서 그리고 눈을
베드로를 향해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그와 함께' 있었다고 폭로하고 있는데 여기서 대
명사 '그'(* , 아우토)는 예수를 가리킨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누가복음과는 달리 베드로에게 직접 '너'라는 2인칭을 사용하여 심문하듯이 말하고 있
다. 여기서 '함께 있었다'는 말은 체포 현장에 있었다는 뜻보다는 그 이전의 활동 현
장에서 목격하였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22:57
베드로가 부인하여 - 베드로는 여자 하인이 폭로한 사실에 대하여 부정하며 어린
여종이 '그'라고 지칭한 예수를 '저를'(* , 아우톤)이라는 같은 인칭 대
명사를 받아 답하고 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부정한 내용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진술과는 차이가 있는데 본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정면으로 부인한 반면 마
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어린 여종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겠
다고 말한 것으로 묘사하여 베드로가 거짓말을 매우 능청스럽게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22: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 두번째 베드로의 정체를 폭로한 사람을 언급하는 이 구절
은 공관 복음서 전체가 서로 다르게 보도하고 있다. 첫째, 누가는 베드로가 처음 부인
을 한 후 조금의 시간이 흘렀음을 언급하는 반면 마태는 베드로가 앞문까지 나갔다고
말하며 마가는 앞뜰로 나갔다고 언급한다. 둘째, 폭로자에 대한 언급인데 누가는 '다
른 사람'이라고 불특정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 반면 마태는 '다른 비자'라고 하여 처
음 폭로한 자와 구분하고 있으며 마가는 단순히 '비자'라고만 하여 첫번째 폭로자와
구분되는지 아니면 다른 비자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누가에 의하면 베드로는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장소의 이동 없이 한 곳에 머물러
있다. 반대로 마태와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베드로가 첫번째 공격을 받고 그 공격을
피하여 장소를 옮겨간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너도 그 당이라 - 첫번째 여종과는 달리 두번째 사람은 베드로를 향해 2인칭 '너'
(* , 쉬)라는 말로 직접 심문하듯 폭로하고 있다. 반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는 처음의 누가처럼 '이사람'이라는 말로 베드로를 지시하고 있다. 또한 베드로를 가
리켜 '그 당이라'(* , 여스 아우톤)고 공격하는데 여기서 '여
스'(* )는 '에크'( )가 모음 단어 앞에 올 때 변화된 형태로서 그 뜻은 속
격으로 어디에 '속한' 파당적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 베드로의 두번째 부인은 단순하게 부정만 하고 있는데
마태는 베드로가 맹세하여 부정하며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며 극구 부인을 하고 있
음을 묘사하고 있다.
=====22:59
한 시쯤 있다가 - 두번째 베드로의 부인이 있은 후 상당한 시간이 경과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베드로의 부인이 너무 완강했으므로 더 이상 사람들이 증거없이
주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한 사람이 - 누가는 세번째 폭로자를 두번째와 다른 또 한 사람임을 밝히고 있
는 반면 마태와 마가는 곁에 있던 사람들이라고 복수형으로 언급하고 있다(마 26:73 ;
막 14:70). 요한복음은 베드로의 부인을 언급하면서 베드로의 정체를 폭로 한 자가 예
수 체포 당시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렸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친척임을 밝히고 있
다(요 18:26). 말고의 친척은 자신이 예수를 체포하는 현장에서 베드로를 목격했다고
폭로한다.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 세번째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갈릴리 사람임을 내세워 매우 구체적 증거와 함께 강경하게, 그리고 확신에 차서 말하
고 있다. '장담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이스퀴리제토'(* )라
는 말은 '확실하게 주장한다'. '자신있게 주장한다'의 뜻을 갖고 있다. 특히 마태는
베드로의 말소리가 예수와 한 통속임을 증명한다고 증거를 대고 있는데 아마도 누가와
마가가 공통되게 예시하는 증거인 베드로가 갈릴리 사람임을 증명하는 기준인 듯하다.
즉 베드로는 갈릴리 사투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22:60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 베드로의 세번째 부인은 마태가 언급한 첫번째
베드로의 부인(否認)과 비슷하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베드로는 세
번째 부인하면서 예수를 저주하고 맹세하여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다. 여기서도 드러나
는 사실은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의 변절을 거칠게 표현함으로써 베드로의 배신을 강하
게 부각시키는 반면 누가는 베드로의 변절을 가능한 부드럽게 표현하려고 노뢨했다논
검이다.
닭이 곧 울더라 - 이 구절은 이야기의 극적인 전환점이 되고 있다. 첫째는, 예수의
예언이(34절) 적중되어 완성된다는 점이고 둘째는, 베드로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되
는 극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공관복음서 모두 세 번의 부인을 닭이 울음으로써
끝마치는데 마가만 닭이 두 번 울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막 14:30에서 예수가 언
급한 '닭이 두번 울기 전'이라는 예언과 일치되고 있다.
=====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내시니 - 예수가 돌아서 베드로를 응시한다는 이 구절
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누가만의 자료이다. 여기서 '보다'(*
, 에네 블려센)는 '뚫어지게 바라보다'는 뜻으로서 상대방에 대한 관심
이나 애정을 담아 응시하는 모습을 말한다. 예수는 닭 우는 소리를 들었을때 자신이
베드로의 번절에 대해 예언했던 사실을 기억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닭 우는 소리
와 함께 베드로를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 보았을 것이다. 예수가 보낸 그 눈길은 베
드로에 대한 질책의 눈길보다는(Schneider) 베드로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찬 눈길이었
을 것이다.
베드로가 주의 말씀...하심이 생각나서 - 예수의 눈길과 마주친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와 함께 예수가 했던 말씀이 생각났는데 그 말씀은 34절에서 언급된 예수의 예고
이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예수의 말씀을 생각했다고 언급하
는 반면 누가는 예수의 눈길과 마주친 사실을 부각하는데 아마도 누가는 베드로의 참
회가 예수와의 인격적 교감에 영향 받았음을 암시하려는 듯하다. 이 같은 추측은 누가
가 베드로의 변절보다는 참회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 말을
확대 해석하면 초기 기독교의 박해 가운데서 변절자에 대한 정죄보다는 참회의 회개를
통한 새사람 됨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이해될 수 있다.
=====22: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막 14:72과 그대로 일치하는 이 구절은 베드로의
변절에 관한 이야기의 마무리로서 극적인 감동을 주고 있다. 베드로가 문밖으로 나와
'통곡 했다'는 표현은 참회에 대한 더 이상 할 수 없는 극적이 표현으로 이 이야기의
핵심이 회개임을 말하고 있다. '밖으로 나갔다'는 베드로의 행동은 세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배신했던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며 변절의 과거 모습과 단
절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도 변절자로서 불신앙 속에 있는 사람에게 베드로처럼
배신의 자리를 떠나 눈물로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누가는 전하려 한 듯하다.
=====22:63
지키는 사람들이 - 예수를 희롱하고 때린 사람들을 지칭하는 이 사람들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성전 수비대의 사병일 수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예수를
희롱하고 때린 사람들을 대제사장이라고 밝히는데(마 26:65-68 ; 막 14:63-65) 누가의
묘사가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I. H. Marshall).
=====22:64,65
선지자 노릇하라 - 예수의 눈을 가리고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 맞히라고 요
구하는데 선지자라면 누가 때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선지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
는 말이다. 마태의 경우는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하라"고 소리치는데 당
시 민중들이 예수를 '그리스도', '선지자'로 고백하고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구절이
다. 마태나 마가의 묘사처럼 주먹으로 치며 얼굴에 침 뱉고 손바닥으로 때렸다는 말없
이 누가는 간단하게 때리고 욕했다는 말로만 표현하는데 누가는 예수의 치욕스러운 모
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공관 복음서 모두 예수가 희
롱을 당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사 53:3에서 예언된 메시야의 수난 모습에 누가
의 묘사가 가장 잘 어울린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희롱받는 모습을 예언의 성취로
서 보았음에 틀림없다.
=====22:66
날이 새매 - 누가는 매 사건마다 시간적 구분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유월절
식사 때는 초저녁이었고 식사 후에 상당한 시간 동안 마지막 가르침을 행하셨으며 감
람산으로 이동하여 기도하는 동안 시간은 상당히 흘러 예수 체포의 시각은 한밤중이었
다. 그리고 체포되어 대제사장 집으로 연행되고 공의회 대표들이 모여들고 베드로가
세차례에 걸처 부인하는 동안 또다시 시간이 경과되었음을 묘사한 후 닭 울음 소리로
동틀 무렵 전의 새벽 시간을 암시했다(60절). 그 다음 베드로의 참회(懺悔)후 약간의
시간이 경과된 것을 암시하면서 날이 밝아왔음을 알리고 있다. 따라서 날짜는 니산월
십오일로서 유월절 다음날 무교절의 첫날 아침이 된다.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 52절에 의하면 예수를 체포했던 자 중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직접 예수를 연행하여 가야바의 집으로 왔을 것
이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가야바의 집으로 공의회 대표들이 다 모여들었다는 말을
언급하고 한밤 중에 가야바의 집에서 공의회가 열린 것으로 묘사한다(마 26:57-68 ;
막 14:53-65). 그런데 누가의 표현을 보면 시간적인 차이도 있지만 장소에도 차이가
있는 듯하다. 누가는 예수가 대제사장 집에서 산헤드린 곧 공회로 끌려갔음을 보도하
기 때문이다. 마태나 마가의 진술보다 누가의 사건 전개가 더 설득력을 갖는데 이유는
공회(公會)는 낮에만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의 보도의 신빙성 문
제도, 한밤중에 심문한 내용을 예비 심문으로 마 27:1과 막 15:1에서 짤막하게 언급된
죽이기로 의논했다는 보도를 누가의 언급과 같은 정식 회의로 본다면 해결된다. 어쨌
든 누가의 이야기가 더 명료하고 사실적이다. 여기 언급된 '공회'(* ,
쉬네드리온)는 장로, 서기관, 대제사장들로 구성된 유대의 최고 의사 결정기관인데 대
제사장이 의장이 되어 유대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고 처리하지만 사형(死刑)에 관한
문제는 로마 총독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따라서 사실상 어용 기관이라고도 볼 수 있는
데 여기서 공식 회의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22:67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 이미 한밤중의 회의에서 가야바가 이와 동
일한 질문을 한 바 있다(마 26:63). 따라서 이 질문은 이미 확정된 사실을 공식적으로
재차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질문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으나 마태와
마가는 의장격인 대제사장이었음을 밝히고 있다(마 26:62 ; 막 14:60). 또 누가는 마
26:59-61과 막 14:55-59의 내용 즉 예수를 죽이기 위해 증인들을 동원하여 개재판하는
장면도 생략했다. 세 복음서 모두 질문의 내용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인데 이는 예수께
서 공생애를 통해 수많은 백성들로부터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여김을 받으셨음을 시사
한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권능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보고 듣고서
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기는 커녕 백성들을 미혹하는 이단자라고 규정했다. 그들
은 스스로 진리의 파수꾼으로 자처했지만 실상은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진리
를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나아가 일반 백성들을 선동하여 비진리쪽으로 돌아서도록 유
도하는 가증한 거짓 선생들이었다(11:52). 한편 본구절의 내용은 각 복음서마다 약간
의 표현 차이가 있다. 누가는 단순히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묻고 있는데 마
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묻고 있고 마가는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
도냐?'라고 기록함으로써 신학적, 종교적 의미를 비교적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 질문에 대한 대답의 필요성이 없음
을 예수는 질문자의 불신앙을 들어 단정하셨다. 이미 예수는 이 재판이 공정한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기 위한 음모에 따라 꾸며지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또
그리스도임을 증명해 보이는 따위의 요구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것이며 그리스
도임을 확신하는 것은 믿음에 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죽이기로 결심하여 음모를
꾸민 그들에게는 아무런 변명의 말도 소용없음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22: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 실제로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메시야와 관련된 질문을 수차례 던지신 바 있으나 그들은 묵묵부답할 수밖에 없었다
(20:3-8:41-44). 이 같은 표현은 상호간에 대화가 될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관계
단절을 상징하는 말이다. 서로간에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의 의지는 분명하
다. 그들과 더이상 논쟁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마태와 마가는 질문자의 말에
대하여 분명하게 긍정하신 것으로 묘사한다(마 26:64 ; 막 14:62).
=====22:69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 예수는 질문자들이 이해할
수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이 말씀을 하신다. 마태와 마가에서 약간의 내용상 차이
는 있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하고 있다. 차이점을 보면 먼저 누가는 이후에 되어
질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으나 마태와 마가는 단 7:13의 내용인 하늘 구
름을 타고 올 것이라는 재림 약속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너희가 볼 것'이라는 예
언을 첨언(添言)함으로써 재림이 임박함을 시사하고 있다(마 26:64 ; 막 14:62). 누가
의 관심은 강도와 같이 불법자 취급을 당하고 이제까지 모욕받아온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 이후부터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다. '이제 후로'(* , 아포 투 뉜)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 후를 가
리키며 부활을 통한 승리의 확증을 지시한다.
=====22:70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 예수의 말을 들은 후 공의회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하
나같이 나타낸 반응은 예수의 말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언급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그들에게는 예수의 발언이 신성모독(神聖冒瀆)으로 들렸을 것임을 암시해
준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 간접적인 시인이지만 예수는 분명하게 자신이 하
나님의 우편에 앉을 아들임을 시인하고 있다. 예수의 이 같은 긍정은 대적들에게 자신
을 변호하거나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의 신성을 공공연하게 드러 내는 주권적
선포의 의의를 지닌다. 예수는 지상적, 정치적 차원의 메시야가 아니라 세세토록 온
세계를 권능으로 통치하며 만물을 새롭게 회복시키는 구속주로서의 메시야이신 것이
다.
=====22:71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 예수의 발언에 대한 공의회의 반응은 몹시 신경질적
이었는데, 누가는 더 이상 증거가 필요없는 확실한 증거가 예수의 입을 통해 나왔다고
선언하는 공회의의 획신에 찬 결정을 소개하면서 공회의 회의를 마무리짓는다. 그들의
확신에 찬 증거는 신성모독적인 예수의 발언이다. 마태와 마가는 이 상황을 더욱 격렬
하고 신경질적인 장면으로 묘사하는데 대제사장이 자기의 옷을 찢고 예수가 참람한 말
을 했으므로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다고 선언한다. 이같는 언급은 레 24:16을 근
거로 한 것이다. 마 27:1과 막 15:1에서는 산헤드린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빌
라도에게로 끌고갔음을 언급하는데 여기서도 누가는 산헤드린 전체 회원이 정죄(定罪)
한 듯한 암시를 주고 있다. 누가의 보도가 더 사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산
헤드린의 권한에 있어서 사형 결정권은 로마 당국에 있으므로 산헤드린의 결정은 의미
가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에서 언급한 사형에 대한 언급은
공식 선고가 아니라 그들의 희망 사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 법
정으로 예수를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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