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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 24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1|조회수11,141 목록 댓글 0

누가복음 제 24장
=====24:1-53
예수의 부활(1-49절) 및 승천(50-53절)에 대한 기사로써 본서를 끝맺고 있는 결론
부분이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각 복음서의 끝을 장식하고 잇는 최종 메시지이긴하지
만 누가의 기록은 (1) 예수의 부활이 허구(虛構)가 이닌 실제 사건임을 강조하며 (2)
그 사건이 지니는 예언적, 구속사적 의미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이와 더불어 누가는 보혜사(保惠師)에 대한 예수의 약속 및 승천에 대해 언급하
고 있는데 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태동 및 성장 과정의 배경이
된다.

=====24:1
안식 후 첫날 새벽 - 사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언급하고있는 부활의 날은 안식일 즉
토요일 다음날인 일요일이었다. 여기서 '안식후 첫날'(on the fisrst day of the
week, NIV)는 셈족어의(Semitic) 영향을 받은 것으로(Josephus)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
되었던 표현이었다(요 20:19; 행 20:7; 고전 16:2). 하지만 이날은 기독교 역사상 중
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이후로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던 유대인의
전통을 깨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즉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행 20:7). 이것이 곧 오늘날 기독교회가 지키고 있는 주일의 기원이다. 한편 '첫날
새벽'은 토요일 저녁 여섯시경부터 일요일 저녁 여섯시경까지가 첫날이므로 일요일 새
벽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는 언급이 없으나 막 16:1,2에서는 여인들이 안식일을 지
키고 토요일 밤에 향품을 사 두었다가 해돋는 대에 무덤으로 갔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23:56에서 언급된 향품은 안식일 다음날의 첫시간대인 토요일 밤에 준비한
것이며 무덤으로 간 시각은 일요일 새벽 동틀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24:2
돌이...옮기운 것을 보고 - 본서에서는 무덤을 돌로 막았다는 이야기가 언급된 적
이 없었지만 마 27:66에서는 무덤을 돌로 막고 인봉까지 한 후 병사들을 지키게 하였
다고 언급되었으며 막 15:46에서도 무덤을 돌로 막았다는 언급이있다. 그리고 마가에
따르면 여인들은 무덤을 향해 가면서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어떻게 옮길 것인지에 대
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는 그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는 누가 특유의 간결
성과 사건 전개의 극적 효과를 상기시켜 준다. 즉 여인들이 무덤 가까이에서 무덤이
열린 것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을 직접 언급함으로서 그들이 받은 충격과 놀람을 극적으
로 보여주고 있으며, 아울러 예수 부활 사건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전대미문
(前代未聞)의 이적적 사건이었음을 복선적으로 암시해 준다(Grundmann). 한편 마태는
무덤의 돌문이 하늘로부터 온 천사들에 의해 지진과 함께 열려졌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28:2) 이는 부활의 사건이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초자연적인 종말적 사건으로 묘사한
마태의 독특한 저작 의도를 반영해 준다.

=====24:3
주 예수의시테가 뵈지 아니하더라 - 부활에 대한 두번째 암시를 주고 있으며 첫번
째 암시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신비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주 예수
의 시체'(* , 토 소마 투 퀴리우 예
수)는 23:52의 '예수의 시체'라는 말과는 다른 의미를 내포한 표현같다. 즉 어떤 사본
들에는 '주'(* , 퀴리우)라는 단어가 삭제되고 그냥 '예수의'(*
, 투 예수)만 언급되고 있으나(Marshall), 다른 많은 사본들에는 '주 예
수'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이같은 차이는 필사자들의 신학적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이
해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즉 예수 앞에 '주'라는 말를 덧붙인 것은 부
활한 예수에 대한 새로운 호칭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다(행 1:21; 4:33;
8:16). 따라서 23:52의 '예수의 시체'는 부활 이전의 표현이고 여기서 언급된 '주 예
수의 시체'는 부활한 에수를 의식하여 나타낸 함축성 있는 표현으로 봄이 타당하다.

=====24: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 -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에 대한 여인들의 반응을 누
가의 독특한 표현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여인들이 근심하고 있다는 점
에서 이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이 근심한 것
은 아마도 마 27:64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수의 시체를 누가 가져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 에수의 시체가 안 보이는 고로 여인들이 심히 당
황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들 곁에 나타난 두사람의 정체에 대한 간접적 묘사인 이 구
절은 천사를 암시한다. 막 16:5에서는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라고 언급되고 마
28:2,3에서는 '눈 같이 흰 옷을 입은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언급된다.
'찬란한 옷'을 입었다는 말은 천사들과 하늘에 사는 존재를 표현하는 상징적 어법이다
(행 10:30). 이 같은 표현은 변화산 사건에서도 묘사되고(9:29) 승천(昇天) 사건 때에
도 묘사된다(헹 1:10). 그런데 '천사'를 누가는 '사람'으로, 마가는 '한 청년'으로 언
급하였다. 이는 천사의 모습이 사람의 형상을 한 청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 달리 천사의 수효가 두 명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변화산 사건과 예수의 승천에서 나타난 두 사람과 병행시키려는 누가의 독특한
의도로 보여진다(Stuhlmueller). 그러나 요 20:12에서도 두 명의 천사가 언급된다는
점에서 누가만의 독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I. H. Marshall). 부활에 대한 중대한 증
언을 두 사람으로하는 것은 어떤 일에 보증을 설 때 두 사람으로 하는 것이 한 사람보
다 더 확실성 있는 보증이 된다는 유대인의 전통적 사상(신 19:15)에서 비롯되는 것이
기도 하다.

=====24:5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 갑작스런 천사의 출현에 나타나 여인들의 반응은 놀랍
고 '두려운'(* , 엡포보스) 것이었다. 이 같은 두려움은 경이로운 사건
에 대한 놀라움의 표시로서 초자연적 신비감을 강조한다(37절; 행 10:4; 4:24; 계
11;13). 그 놀라움의 표시로 여인들이 얼굴을 땅에 대었다고 묘사되는데 이는 누가만
의 표현이다. 마 28:4에서는 '놀라서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묘사함으로 초자연적 사
건에 대한 종말적 두려움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경이롭고 신비로운 사
건에 대한 경이감(驚異感)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언급하는 '두
려워', '놀라지 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데 역시 두려움에 대한 강조를 약
화시키는 반면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부각시키려는 누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다.
두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 두 명의 천사가 동시에 말한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가 '한 사람의 천사'혹은 '한 사람의 청년'을 언급한 것이 누가의 '두 사
람'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한 것은 한 사람이 말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찌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티'(* )는 의문 대명사 '누
구'(who)라는 뜻과 의문 부사 '왜'(why) 또는 '무엇'(what), '어느 것'(which) 등의
다양한 의미로 쓰여지며 여기서는 '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자의 무덤에서 찾고 있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의미와 함께 부활의 당연함과 그
것이 예정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 격언조의 이 구절은 상징적 의미를 시사해 준
다. 즉 '죽은 자 가운데'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 톤 네크론'(*
)은 '죽은 자들 가운데'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의 무덤 안에 여러 '시
체들'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과 '무덤' 그 자체를 상징한다. 다시말해
서 무덤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국한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구절은 예수가 부활하
여 살아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누가는 2,3절에 이어 세번째로 예수의 부활을 단계
적이면서 간접적으로 시시하고 있는 바, 그 자신 특유의 치밀한 구성력(構成力)을 보
여준다.

=====24:7,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 두 명의 천사가 예수께서 생전에 직접 하셨던 말
을 여인들에게 상기시켜주자 여인들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두 천사가 직접 언급한 내
용은 9:22의 에언이엇다(9:22 주석 참조).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의 예언을 천사들
의 입을 통해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다시 기억해 내는 누가의 표
현 의도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총제적인 예언의 성취라는 맥락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누가의 이 같은 표현 의도는 예수의 부활 사건을 중심한 대
적들의 묵살 음모라는 당시의 정황을 염두에 둘 때 보다 더 분명하게 이해된다. 즉 마
28:13에 따르면 예수의 대적들은 당시 예수의 부활이 그 추종자들에 의해 조작된 사
건이라고 날조(捏造)하며 이를 소문으로 퍼뜨렸던 것이 분명하다. 누가는 대적들의 이
같은 음해적(陰害的) 행위와 소문에 대한 치밀한 반론으로서 이같은 상세한 묘사를 시
도 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누가는 예수의 부활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임과 그 사실이 이미 예언되었던 사실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두 천사가 직접 들려 주었을 때 여인들이 비로서 기억했다
는 언급을 통해 9:22나 18:33에서와 같이 평소 예수의 말씀을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하
였고 제자들 이외의 사람들도 그 말씀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4:9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 부활을 확인한 여인들은 성안으로 돌아가
열 한 사도와 성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보고 확인한 바를 전하였는데 부활에 대
한 확신을 갖고 전달한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건 즉 시체가 없어진 사실
과 천사를 만났던 사실만을 전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막16:8에서는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마가의 표현은 놀라움에 강조를 둔 것으로 보인
다. 한편 마태(마 28:8)와 누가는 여인들이 이야기를 전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특
히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즉 마
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부활한 후 갈릴리로 갔다'는 사실을 천사가 일러 준 것으로 언
급하고 있는데(마 28:7; 막 16:7) 누가는 이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마태는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간 것으로만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제자들과 다른 모든 사람
들로 확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마태에 따르면 예수를 팔았던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직후 죄책감으로 목매여 자살하였다(마 27:3-5). 누가는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여기서 열한 명의 제자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24:10
이 여자들은 - 누가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확인한 갈리릴 여인들의 이름을 이
제야 밝히고 있는데 마가는 무덤으로 가기 전에 이 여인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막
16:1). 그러나 이름에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막달라 마리아 - 이 여인은 누가 이외에도 마태와(마 28:1) 마가(막 16:1) 그리고
요한(요 20:1)에 의해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며 일곱 귀
신이 들렸다가 예수에 의해서 나음을 받은 여인이다(8:2).
요안나 -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8:3)로서 예수와 제자들을 섬겼던 여인이며
마가복음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 마리아 헤 야코부)에 해
당하는 헬라어는 직역하면 '야고보의 마리아'가 된다. 이는 곧 아고보의 아내를 의미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마가가 언급한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는 다른 인물이
된다. 그러나 막 15:40절과 47절을 본다면 '야고보의 마리아'를 '야고보의 어머니 마
리아'로 해석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저희와 함께 한 다른 여자들 -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과 더불어 무덤에 따라갔던 갈
릴리 여인들이며(23:55, 24:1) 이로써 부활의 증인이 이름을 밝힌 세 명의 여인 외에
더 있음을 말하고 있다. 마가가 언급한 세 명(16:1)보다 확대된 숫자이다.

=====24:11
사도들은...믿지 아니하나 - 여인들로부터 부활 사건을 전해들은 사도들의 반응은
믿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 나타낼 수 있는 것처럼 의심과 불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
었다. 즉 그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얼토당토 않는 것으로 여겼다. 즉 너무 뜻밖의 일이
었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의 반응은 이제까지 보
여왔던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과도 동일한 것이었다. 즉 평소에 가르쳤던 예수의
말씀을 이해자지 못했던 것처럼(9:45; 18:34) 정작 예수의 부활이 그들의 눈앞에서 실
현되었어도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제자들 역시 여인들처럼 예수의 부활 예언을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6절 주석 참조).

=====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니 - 누가는 앞절에서 언급된 사도들의 불신에 대비
되게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베드로의 권위를 높이려하는 의
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본문은 많은 사본들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 구절
은 요 20:3-10에 근거한 삽입구로 이해되기도 했으나(Metzger) 많은 학자들은 이구절
을 본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Lagrange, Jeremias, Gundmann, Ellis, danker, Morris
등).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 무덤에 도착한 베드로는 빈 무덤 속에 남아 있는 세마
포만 발견하고 '이상히 여겨'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 '그 된 일'은
여인들과 베드로가 직접 확인한 빈 무덤을 뜻한다. 한편 요 20:1-10에 언급된 평행 본
문은 누가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요한에 의하면 베드로 혼자 무덤에 간 것이 아니
라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 한 명이 함께 갔고 그가 베드로보다 빨리 무덤에 도
착하였으며, 베드로가 본 것은 세마포 뿐만 아니라 머리 수건도 있었다. 그리고 나서
무덤에 먼저 와 있던 다른 제자도 무덤안으로 들어가 보고 믿었다고 언급된다. 즉 요
한복음에서는 베드로 이외에 익명의 사랑받는 제자를 예수 부활 사건의 목격자로 언급
함으로써 열 한 사도 외의 다른 제자들도 빈 무덤을 확인한 것으로 언급한다. 이렇듯
예수의 부활은 일부의 몇몇 여인들만 목격한 것이 아니요 평소 그분께 관심을 가졌던
제자라면 누가나 가보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객관적, 실체적 사건이었으니 이로
써 하나님 계시의 확실성과 역사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24:13
그 날에 - 헬라어 성경은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보라'(* , 이두)라는 단어로 이 무장을 시작하고 있으나
91:20,31,36; 13:35; 18:31 등) 개역 성경은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았다. 여기 언급된
'그 날'은 앞에서 언급한 사건이 일어난 '안식 후 첫날'(1절)을 가리키는데 관찰자의
시점이 옮겨갔다. 즉 앞에서 언급한 관찰자의 시점은 예수가 부활한 당일이었으나 현
재의 관찰자는 먼 훗날 시점에서 부활 사건이 있었던 그날을 회고하고 있다.
저희 중 둘이(* , 두오 여스 아우톤) - 여기서의 인칭 대명
사 '아우톤'(* )은 앞에서 언급된 어떤 이를 지시하는지 불분명하나 여인들
과 열한 사도를 제외시킨다면 9절에 언급된 모든 '다른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부활 현장을 목겨한 여인들로부터 증언을 들었던 사림들이다.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 이 장면 묘사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긴박한 사건
묘사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 즉 유월절 축제와 예수의 체포, 그리고 사형 집행과 빈
무덤의 발견으로 나타난 부활의 충격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긴박한 사건 전개와 달리
그 사건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떠나 한적한 시골로 향하고 있는 두 사람에 초점을 맞
춘 이 장면 묘사는 이야기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한다. 요컨데 이사람들은 이야기의 내
용으로 보아 예수를 열렬히 추종했던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없고 유월절 축제에 참여하
기위해 예수와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던 자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뜻하
지 않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대가 좌절(挫折)된 경험을 안고 힘없이 집
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여기 언급된 '엠마오'(* )라는 지명은 정확
하게 고증되지 못하고 있다. 분문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이 십 오리 즉 10km 정도의 거
리에 위치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십 오 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타디우스 혀세
콘타'(* )의 정확한 거리는 약 11.2km이다. 이
정도의 정보로 추정할 수 있는 두 개의 지명이 학자들 사이에 거론되고 있다. 첫째는,
욥바(Joppa)로 가는 방향으로 예루살렘에서 약 32km 지점에 위치한 '암와스'(Amwas)로
보는 경우인데(Lagrange, Metzger) 거리가 누가의 언급보다 배가 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야기하면서 하루를 걸어갈 수 있는 거리로서는 적당하지 못하다는 점
도 문제가 된다. 둘째, 유력한 장소는 예루살렘 서쪽 약 6km의 거리에 위치하였고
A.D.69-70년경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의 침입(侵入)으로 인해 식민자가 되었던 '칼로니
에'(Kaloniye)이다(Weiss, K.Lake, Harrey). 이 지명 역시 거리의 차이가 문제인데 누
가가 언급한 거리의 절반밖에 안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혹자(Benoit 등)의 말처럼 누
가가 왕복거리로 언급했다고 추정한다면 그리고 하루에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라는 점
에서 첫째 지명보다는 둘째 지명이 훨씬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수 있다.

=====24:14
이 모든 된 일을 -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즉 예수의 성전 숙정을 비롯해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빈 무덤으로 대두
된 부활 문제를 서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24:15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 두 사람이 열심히 지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걸
을 때 예수가 그들과 동행하기 시작함을 언급한다. 문맥으로 보아 예수께서 처음부터
동행한 것이 아니라 도중에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여기서 묘사된 예수는 분명히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함께
걸어가는'(* , 쉼포류오마이) 모습이었다.

=====24:16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 생전
(生前)에 가까이 있어서 예수의 얼굴을 매우 잘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옆에 다가
선 예수를 그들은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만을 생각했지 정작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들 곁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눈이 '가
리워져'(* , 크라테오)라는 말은 고정되고 변동이 없음을 뜻하는데 두 사
람의 의식과 시각이 변함없음을 가리킨다. 이 말이 시사하는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두사람의 의식과 시각이다. 즉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의식과 시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식 변화 또는
영적 각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둘째는, 부활한 예수의 존재 문제인데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
임을 알 수 있다. 즉 늘 함께 하였던 사람도 면전에서 알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존
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길 가던 두 사람은 예수가 왔을 때 보통 사람으로서 같은 방향
으로 가는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24:17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 비로소 부활한 예수와 길가는 두 사람과의 대화가 예
수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예수의 질문 내용은 두사람의 대화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었고 그질문에 대한 대답에 앞서 누가는 두 사람의 얼굴 표정을 질문에 대한 반응
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가던 길을 멈추어 섰다. 이 두 사람
은 예수의 죽음에 따른 깊은 실의(失意)에 빠져 있었으며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
는 상태였다.

=====24:18
글로바라 하는 자 -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 '클레오파스'(*
)로 밝혀지고 있으나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첫째는, 요
19:25에 언급된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견해(Alford, Gilmour 등)이며 둘째는,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말에 근거하여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시몬의 아
버지와 동일한 인물이자 예수의 삼촌이라는 설(Origen, Zahn 등)이 있는데 정확한 근
거는 없다. 두 견해의 다른 가능성에서 제시된 인물이 동일인일 수도 있음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름을 언급한 점으로 보아 당시 누가복음의 독자들은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이거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특히 유월절 행사에
참석했었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가족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따라서 동행한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신빙성있다 하겠다. 아들보다는
아내일 확율이 높은 것은 가족의 구성상 남편과 아내가 기본 구조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 예수의 질문에
대한 글로바(Cleopas)의 대답은 핀잔 섞인 어투로 시작되고 있다. 글로바는 부활한 예
수를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자신들과 같은 나그네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같은 곳에 머
물렀으면서도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왜 혼자만 모르느냐는 반문(反問)을 하게 된 것
이다. 따라서 예수에 관한 사건이 예루살렘 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큰
사건이었음을 반증해 준다. 여기서 언급된 '근일'(近日)(*
, 타이스 헤메라이스 타우타이스)은 여러 날 동안 예루살렘 안에 머
물렀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유월절 축제에 참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24:19
무슨 일이뇨 - 글로바의 흥분된 반응에 대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
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식으로 되묻는다. 이 같은 예수의 질문 의도는 예루살렘에 있었
던 일련의 사건을 해명(解明)하기 위한 문제 제기였다. 즉 두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사건 이해에 대한 잘못된 것을 시정하고 바로 잡아주기 위해 그들의 견해를 직접 듣고
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작하면서 예수의 언행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힌다. 그들은 예수를 '능력있는 선
지자'(* , 프로페테스 뒤나토스)로 말한다. 이 같은
두 사람의 견해는 당시 일반 대중들의 의견과도 일치되는 보편적인 견해였다(9:19).
그들 두 사람에 의하면 예수가 선지자로 보여진 것은 그의 말과 행동에 권능(權能)이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과 민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사람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24:20
우리 대제사장과 관원들이...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 두번째로 그들은 예수의 처
형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힌다. 그들은 하나님과 민중들로부터 인정받았던 능력있
는 권능의 선지자 예수를 죽이게 한 주범들이 자신들의 종교, 정치 지도자인 대제사장
들과 관원들임을 천명한다. 여기에 빌라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것은 예수를 처형
한 책임이 전적으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누가의 의도와 일치된다. 특히 두 사
람이 '우리들의' 지도자임을 밝힌 사실은 예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유대인의 책임을
더욱 강조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24:21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 - 그들이 갖고 있었던 세번째 견해는 에수에게 걸어던 기대
였다. 그들은 예수가 악의 세력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민중들을 해방시키고 예수가 선
언하였던 것처럼 하늘나라(The Kingdom of God)가 이루어지기를(막 1:150 기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된 다른 세계를 기대하며 예수를 추
종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17절에 언급된 바처럼 얼굴에 슬픈 빛을 할 수밖에 없
었던 것은 그들이 걸었던 기대가 예수의 사형으로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 그들의 실망은 예수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예수가 죽
은지 사흘이 지났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를 죽였던 그들이 여전히 세
상의 주인이 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어투로 보아 그들은 어렴풋하
게나마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듯하다. 즉 그들은 예수가 단순히 죽음으로 끝
나지 않고 적어도 사흘째되면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던 듯하
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사흘 째까지 희망을 갖고 있었다는
셈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희망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하소연하고
있다.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 이야기의 전개는 점점 감정을 고조시키면서 뜨거
워지고 있다. 앞절에서 표현되었던 실망감에 덧붙여 경악스럽고 놀라운 사건을 언급하
면서 10절에서 언급되었던 여인들을 소개한다. 여기서 그들은 '우리들 중'(*
, 여스 헤몬)이라는 말로써 그 여인들과 자신들의 관계를 언급한다. 그렇다
면 이 두 사람은 10절에서 언급된 여인들과 동향(同鄕), 즉 갈릴리 사람이었을 가능성
이 높고 친분이 있는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우리'라는 의미로 볼 때 열두 제
자들 외에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어느 정도 고정된 숫자를 유지하며 공동의식(共同
意識)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 그들을 놀라게 하고 '경악케한' 일은 1-8절에 언
급된 내용이었다. 여기서 강조되는 내용은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빈 무덤 안에서 천사를 만나고 그 천사로부터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믿어
지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11절 주석 참
조).

=====24:24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 여인들에 이어 빈 무덤을 확인하였던 사
람을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12절 내용과 조화되지 않는 듯하다. 즉 11,12절에서는
제자들이 여인들의 증언을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점과 베드로만 무덤에 간 것으
로 언급된 점이 본문과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문의 '두어 사람'(some
of our companions, NIV)은 요 20:3-8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본
문을 삽입된 문구로 볼 수 있는데(J. Weiss) 꼭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의
화자(話者)가 열 두 제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우리들 중'이란 9절에서 언급된 바처
럼 열 한 사도와 그 외의 사람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2절에 언급된 베
드로 외에 다른 어떤 사람이 무덤을 찾아 갔으리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
서 본문은 12절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진술을 통해 예수
의 무덤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자들만의 증언이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재확인 증언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빈 무덤 사건을 점한 이들의 관심은 부활
사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같은 부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영적 안목(眼目)이나 믿음
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 자신이 예고했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
을(9:22; 18:32,33) 예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해했다는 결론을 얻게한다. 그래서 그
들은 예수의 죽음과 빈 무덤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24:25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 예수에 관한 사건들로 인해 실망과 좌절에 빠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예수의 반응은 책망을 하는 투이다. 예수의 책망은
'오'(* )라는 감탄사로 시작되면서 자신의 감정이 강하게 주입된다. 첫 마디는 '미
련하다'(How foolish you are!, NIV)라는 책망인데 그들의 생각이 '바보스럽고 무지하
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진술했던 두 사람의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선언
한 셈이 된다. 두번째는 선지자의 말을 '더디게'(* , 브라데이스) 신뢰
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하는데 그들이 신뢰하는 선지자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
을 책망하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생전에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구약 예
언자들의 예언 성취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왔지만(18:31; 22:37 주석 참
조),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구약 시대의 예언까지 바르게 믿지 못하고 있음을 탄
식(歎息)하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사건을 접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처럼 예
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의 활동이 끝장나고 그 추종자들에게 실망과 절
망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남은게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꾸짖는 것이다. 즉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예수가 활동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30,31절).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 이제까지 유대인들의 생각해 왔던 그리스도에 대한
고정 관념을 앞절에서 일축(一蹴)한 후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반문 형식으로
설명한다. 특히 '해야 하지않느냐?'라는 반문의 대답이 자명함을 전제로한 질문인데
27절의 장면처럼 구약성경에 그 답이 분명하게 제시되었음을 나타낸다(시 22:6-8, 18;
27:12; 41:9; 사 50:6; 53:3-9; 슥 11:13).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관심하지
않고 영광만을 생각하는 오류(誤謬)를 범하였다. 심지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조차도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영광에만 참여하려는
이기적 야욕(野慾)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영광 이전에 반드시 고난을 겪어
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반드시 겪고 나서
얻게 되는 영광은 칭송받고 높임을 받는 인자(人子)의 영광이다(9:26; 21:27; 빌
2:5-11; 딤전 3:16; 벧전 1:11,21). 약한 사람들로부터 힘없이 처형당해 죽었지만 하
나님에 의해 인정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칭송받게 된다는 암시이다.

=====24:27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도가 고난 받아야
하는 필연성에 관련된 예언들을 하나 하나 인용하면서 설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인용된
자료는 모세와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이라고 누가는 밝히고 있다. 여기서 '모세의
글'이란 '모세오경'을 가리키는 말이고 '선지자의 글'이란 '예언서'를 지칭한다. 그리
고 '모든 성경'은 그 율법과 예언서 외의 구약성경 일반을 가리킨다 하겠다.

=====24: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 엠마오가 그들의 최종 목적지인지 분명하지는 않
지만(왜냐하면 그들은 갈릴리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8절 주석 참조). 그들
이 도착하려고 했던 장소에 거의 다 왔음을 말하고 있다. '가까이 가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기조'(* )는 '도착 했다'와 '거의 다달았다'의 두 가지 뜻을
포함한다. 이처럼 도착 시간에 대한 언급은 출발 시각처럼 자세히 언급되고 있지 않으
나 29절의 내용을 보면 날이 거의 저물고 있는 때임을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일요
일 즉 안식후 첫날이 거의 끝나는 시각쯤인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 13절에서 언급한 대로 그들의 목적지 엠마오
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머물고자 하였을 것이고 예수는 목적지가 엠마
오가 아니어서 더 걸어가겨 했을 것이라는 이해는 쉽게 가능하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가 계속 길을 가려고 했다는데 있기 보다는 29절에 나오는 내용, 즉 예수가 그들
두 사람과 함께 머물게 된 동기가 두 사람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음을 뒷받침해 주는
데 있다. 본래 예수는 엠마오에서 유숙(留宿)하려는 계획이 없었음을 암시하여 두 사
람의 강권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24:29
저희가 강권하여...유하사이다 - '강권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비아조마이'(*
)는 '압력을 넣어 강제로 하게 하다'의 뜻을 가진 단어이
나 여기서는 절박한 간청(懇請)으로 봄이 적절하다. 예수가 글로바의 일행과 엠마오에
서 머물게 된 동기는 그 두 사람의 간절한 요청에 의한 것임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
이다. 따라서 '강권이 있었다'는 것은 사양하는 말도 있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들
이 이와 같이 예수를 붙잡고 머물기를 간청한 이유는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여행이 어
렵다는 점뿐만 아니라 길을 함께 걸어오면서 나눈 대화 속에서 그들은 어떤 감명을 받
았음에 틀림없고(32절)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겨났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와 함께 유숙하면서 더 많은 가르침을 듣고자 하여 예수를 강권하였을 것
이다.

=====24:30
저희와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 저녁 식사 때인 것으로 보이는데 앞절에서 날이
저물고 기울었다는 언급이 있었다는 점을 보아 점심 식사라는 주장은(Bornhauser) 적
절하지 못하다. 이 저녁 식사는 글로바 일행이 준비한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집인지
아니면 여관이나 민박하는 집에서 만찬을 베푼 것인지는 정확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여관이나 민박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이 저
녁 식사는 일상적인 평범한 식사이었음에 틀림없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매 - 이 같은 식사 장면은 오병 이어의 기적
(9:10-17)과 유월절 식사를 연상케 한다(22:14). 글로바 일행은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
지 못했다는 점에서(열두 제자들과 예수가 함께한 만찬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식사를 주제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들판에서 오병 이어의 기적을 으로 배불리 먹
던 그 때가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31절에서와 같이 이두 사람이 예수를 알아보
게 된 요인(要因)중의 하나가 이 식사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
한다.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 글로바 일행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
가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는데(16절) 예수와의 저녁 만찬 도중 눈이 열려지게
되어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다. 개역 성경에서 '밝아졌다'(their eyes were
opened, NIV)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디에노이크데산'(* , 디아노이
고)의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눈이 열려지게 된 원인이 타자(他者)에게 있다는 암시
를 주고 있다. 눈이 열려지게 된 원인은 앞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떡을 떼어 주는 행위
가 될 수 있으며 알지 못하는 신비적 능력이 작용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 모두
가 하나님에 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I. H. Marshall). 이와같이 글로바 일행이 부활
한 예수를 낯선 여행자로 보지 않고 생전의 예수의 모습으로 보게 된 것은 다음과 같
은 두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 식사 이전까지는 예수가 낯선 타인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휼륭한 선생으로도 생각하였을 것이다(29절 주석 참조). 이
는 이제까지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이해했던 바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제 떡 곧
예수의 몸을 진정으로 나눔으로써 그들은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떡을 떼는 만
찬(晩餐)을 친교하고 할 수 있다면 친교 속에서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둘
째는, 갑자기 눈이 열려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32절에서 그들이 고백하는 바와 같
이 길을 걸으면서 그의 가르침을 들을 때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뜨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 낯선 길손을 애써 대접
하려고 했다는 것이 예수를 알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열게 했다. 즉 예수의 가르
침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예수와 함께 하기를 간절히 요청하는 마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한 동인(動因)이 되었다.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 예수께서 더 이상 시각적으로 포착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는 본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암시한다. 첫째, 부활한 예수는 시.
공(時空)에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에게도 환상이 아니라
생생한 체험이었다. 부활한 예수는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으로 만나되 시각적으로 보여
지는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새로운 존재로 만나게 된다. 둘째는, 우
리가 예수를 만날 때 고유한 일정한 모습으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모양으로 만
난다는 점이다. 글로바 일행이 경험한 바처럼 낯선 길손과의 만남이 예수와의 만남이
될 수 있고(창 18:1-15) 헐벗고 굶주린 이웃과의 만남이 예수와의 만남이 될 수도 있
다(마 25:31-46). 따라서 이제 예수와의 만남은 시간과 공간의 구분없이 무한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초월적 사건인 동시에 어느 대상에 국한됨이 없이 구체적인 우리의 생
활 가운데서 경험되고 찾을 수 있는 내재적 사건이기도 하다.

=====24:32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낯선 사람이 예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순
간 예수는 사라지고 두 사람은 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회고하면서 자신들의 마
음이 뜨겁게 타올랐던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감동되었던 것
은 예수가 들려주었던 가르침의 내용이었다. 특히 성경을 '해석해' 주었을 때(27절)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다'(* , 카이오)는 것을 회상한다. '타올랐다'는
말은 어떤 심적인 충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일반적 마음의 변화라기보다는 밖
으로부터의 어떤 이끌림을 감지하고 감격적 기쁨과 황홀감을 체험하는 초월적 경험이
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성경을 해석해 줄 때'라는 점이다. 예수를 만나
는 중요한 요인(motive)은 다름이 아닌 바로 주의 말씀을 탐구하는 행위었다. 한편 이
와같은 체험은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만 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했음을 '우
리 속에'라는 말로 확인된다.

=====24:33
곧 그 시로 일어나 예수살렘에 돌아가 - 두사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놀라운
체험을 한 순간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이 그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바로 그시각에 이미 날이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박
차고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다. 이 같은 행동의 즉각성은 회개하는 자세의 모범
이 되기도 하고 성령받은 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참된 회개는 깨닫는 즉시 돌이켜 행
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에서 전격적으로 변혁(變革)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으
니 그들은 발길을 달려 예루살렘에 이르게 된다.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 - 예루살렘에 글로바 일행이 도착하였을 때 열
한명의 사도와 다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있다. 이 사람들은 9절에 언급되었던
사람들과 동일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였을 것으로 족히 짐작된다. 여인들과 제자들 중 베드로가 예수의 빈 무덤을
목격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의무심에 차 잔뜩 흥분과 조심 속에서 어찌 할 바를 몰
랐었다. 그러나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를 만났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베드로의 증언(34절)이 더욱 확실한 것임을 은연중 믿게 되었고 이제까지의 그들의 의
심과 의혹(疑或)을 완전히 떨어버리지는 못한 채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24:34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 글로바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
여 제자들로부터 들은 소식은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사실이엇다. 11절에서 보았듯이 사
도들은 빈 무덤을 부활 사건으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렇게 믿게 된 결정적 계기는 시몬이 부활한 예수를 경험하였다는
증언 때문임을 시사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몬은 베드로를 말하는데 언제 베드로가 부
활한 예수를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 전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고전 15:5
에서 바울이 증언할 뿐이다. 아무튼 그들은 최초의 빈 무덤을 목격한 여인들의 증언을
들었을 때엔 쉽게 믿으려하지 않았으나 열 두 사도 중 하나요 평소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을 때에는 달랐다. 베드로의 증언은 그들 무리 가운
데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하였고 한 곳에 모일 수 있게 하였다(33절). 한편 이러
한 본절의 내용은 37,41절에 나오는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여 이상히
여기는 제자들의 양상과 부합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의 심리
상태를 염두에 두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즉 그들 앞에서 처참히 죽으신 예수가 다
시 살아나셔서 그들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실제로 나타셨을 때 그들은 애기치 않은
주(主)의 출현에 간담(肝膽)이 서늘해지거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수의 부활은 여태
껏 점진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제자들에게 확증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자연
적 사건 앞에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경이와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
서 37,41절의 내용은 부활하신 예수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며 본절 내용과는 다른 경험
을 인간 내면에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에 투영(projection)시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본절과 상치되지 않는다.

=====24:35
두 사람도...말하더라 - 베드로가 경험한 사실을 듣고 글로바 일행도 자신들이 경
험한 사실을 말하면서 길에서 예수와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졌던 사실과 떡을 떼며 확
인했던 예수를 '상세하게 설명하였다'(told what had happened, NIV) 이렇게 함으로써
서로 다른 곳에서의 경험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를 확인해 주고 있다. 누가는 다른 복
음서 기자들과 달리 부활한 예수에 대한 체첨을 확신시키기 위해 단계적으로 그리고
치밀하게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 부활한 예수의 출현이 세번째 언
급된다. 이 이야기는 부활 예수에 대한 체험의 체험적이고 종합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구성상으로 베드로와 글로바 일행이 각각 경험한 부활 예수의 체험은 이 세 사
람이 한 자리에 있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까지 증인으로 선 가운데서 종합되고
확인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부활을 최종적으로 선언하려는 누가의 치밀한 의
도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글로바가 경험한 부활한 예수가 시.공(時空)을 초월한 영
적 만남을 제시한 것이라면, 여기서의 부활한 예수는 육체적 부활을 증명하는데 관심
을 집중하고있다. 그러나 요 20:19에 따르면 문을 닫아 두었는데도 들어왔다고 표현함
으로써 영육(靈肉)에 구애를 받지 않는 신비한 모습을 말하고 있으며 여기서도 영과
육을 종합하여 영과 육의 부활을 균형있게 언급하려고 하는 듯하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이 인사는 요 20:19,20에서 두 번 거듭되고 있는데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하는 인사의 형태이다. 그런데 이 인사는 단
순한 인사말이라기 보다는 부활한 예수의 시대에 평화(平和)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축
복의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하늘에서 온 천사들이 땅 위의
평화를 노래하였듯이(2:14) 부활한 예수가 머무는 곳 그리고 예수를 만나는 모두에게
'평화'( , 에이레네)가 있으라는 축복의 말씀이다.

=====24: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 그 자리에 모여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공포에
싸여 무서워 했지만 베드로나 글로바 등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
러나 본절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모두 놀랐으리라는 생각이 적절하다 하겠다. 왜냐
하면 그들이 이 같은 놀라운 체험에 익숙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두번째 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갑자기 예수가 나타났을 때 놀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라 할 수 있다.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 그들이 그렇게 놀라고 무서워한 것은 갑자기 나타난 예수가
'영'(* , 프뉴마)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예수를 육체가
없는 유령(幽靈)과 같은 존재로 오해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떤 사본에서는 본절
의 '영' 대신 '유령'(* , 판타스마)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24:38
어찌하여...의심이 일어나느냐 - 예수의 출현에 대해 놀라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는 '왜 의심하고 무서워 하느냐'는 반문 형식으로 책망하신다. 이 말은 제자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모습을 부활한 예수로 이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일로 생각하며 부활한 사실을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만큼 그들은 예수가 말했고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 부활한 예수를 의심하고 유령으로 오해하는 제자들에게(37,38
절) 예수는 자신이 참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그 예수이며 유령이 아니라 참으로
육신을 가진 완전한 사람임을 확인시키고자 증거를 제시하신다. 증거로 제시된 것은
자신의 손과 발인데 왜 그것이 증거가 되는지 누가는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요
20:25-27에 못박았던 자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를 만져 보라 - 두번쩨로 제자들에게 확인시키는 것은 육신의 실재(實在)이다.
이것은 자신이 유령이 아님을 나타내려는 의도적 말씀이니 유령은 살과 뼈가 없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살과 몸을 직접 확인시킴으로써 유령이 아님을 선언
하신다. 이 같은 부활 증명은 영적인 부활이냐 아니면 육적인 부활이냐 하는 문제를
연상시킨다(고전 15:31-52). 그러나 여기서의 강조점은 영적 부활이냐 육적 부활이냐
하는데 있기 보다는 부활은 완전히 새롭고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로 나타난다는데 있
다고 보아야 한다. 글로바 일행이 경험바 처럼 부활은 영과 육의 완전히 새로운 차원
의 존재가 되는 것이지 영이냐 아니면 육이냐 하는 일차원적인 선택적 사고로 부활을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육체를 확인 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육적인
부활을 강조하는데 있지 않고 부활이 유령이나 환각 현상(hallucination)이 아님을 확
인 시키고자 하는데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24:40
손과 발을 보이시나 - 예수가 증거로 제안했던 것은 손과 발 그리고 자신의 육신을
직접 만져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손과 발만을 보여준 것으로 당시 상황
묘사를 끝내고 있으며 보기만 했는지 직접 만져 확인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
다. 그러나 요 20:20에서는 손과 옆구리만 언급하고 있으며 요 20:24-27에서는 도마의
요구에 의해 예수께서 직접 만져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도마 역시 적접 만져 확인
하였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본문은 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어떤 사본에서는
본문이 삭제되고 없고 또 어떤 사본에서는 괄호에 묶어 언급하고 있다(I. H.
Marshall). 아마도 요한복음과의 내용이 일치되지 않아 삭제(削除)하였을 수도 있고
(Jeremias) 앞절(39절)과 중복되는 내용이라고 생각되어 삭제한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K. Aland). 그러나 요한복음과의 일치성이 문제되지않고 앞절과 중복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다. 중요한 것은 보여주고 확인시켰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있다. 이는
요한복음과 일치하고 있는데 누가는 목격자들의 충격과 의심이 큰만큼 부활한 예수가
유령이나 환상이 아님을 단계적으로 확인시켜 나가고 있다.

=====24:41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 손과 발을 확인한 제자들의 반응은 처음으로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그 기쁨 때문에 믿어
지지 않았다. 이 같은 표현은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면서 느끼는 감격과 놀라
움(amazement)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의심에 강조점이 있지 않고 놀라와하며 기이히
여기는 제자들의 기쁨에 강조점이 있다. 이제 제자들은 의심과 두려움의 고개를 넘어
서 기쁨과 놀라움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 같은 누가의 묘사는 매우 극적이고
치밀한 문학적 능력으로 평가될 수 있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 부활 사실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극적으로 제시되
고 있다. 제자들의 기쁨이 터져 나올 때 식사를 제안함으로써 제자들의 확신을 움직일
수 없는 믿음으로 굳히려 하고 있다.

=====24:42
구운 생선 한 토막 - 제자들이 제공한 먹을 것은 구운 생선(broiled fish) 한 마리
였는데 어떤 사본에서는 꿀찍은 떡이라는 구절을 첨가 시키고 있다(Metzger). 아마도
필사자들이 요 21:9에 제시된 음식인 물고기와 떡을 염두에 두고 삽입한 것으로 보인
다(M. Alford). 또한 이 같은 물고기를 언급한 것 때문에 장소를 갈릴리로 볼 수 있는
데(Creed, Klostermann 등) 내륙 지방 예루살렘에도 소금절인 생선을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Jeremias) 예루살렘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24:43
잡수시더라 - 예수가 생선을 제자들 앞에서 먹어 보임으로써 예수 자신이 유령이나
환상이 아님을 최종적으로 확인시키고 있다. 부활한 예수가 식사를 했다는 사실(30절)
을 두번 언급하면서 누가는 예수가 유령이 아니라 분명 죽었던 나사렛 예수가 되살아
났음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한 예수가 식사를 했다는 점에서 누가의 독특한 강조라고
볼 수 있다.

=====24:44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 예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최종 확인 후
예수의 마지막 가르침이 언급되면서 누가복음 대단원의 마지막 국면으로 접어든다. 예
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말했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예고(9:31;
18:31-33; 22:37)를 상기키시면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예언의 성취임을 언급하고 있
다.이 같은 예수의 부활 사건을 거듭 설명한 것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구원사적(救援史的) 맥락에서 부각시키고자 한 의도에서였다. 누가는 본문 서두에 '이
것들은 내말들이다'(* , 후토이 호이 로고이 무)
라고 말한 후 '호티'(* , '왜냐하면')로 시작되는 관계절을 통해 성경의 에언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지시대명사 '이것'(* , 후토이)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
하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 예수의 체포에 서부터 부활까지의 사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복음의 세계화와 전인류의 구원을 위한
필연적 결과요 하나님의 뜻임을 확언하는 것이다(27절 주석 참조).

=====24:45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 이 구절 역시 27절에 언급된 내용과 비
슷한 내용이며 38절에 언급된 예수의 책망과 대응된다. 즉 두려워하고 의심하던 마음
이 '열리다'(* , 다아노이고) 곧 전적인 신뢰와 깨달음으로 전환되었
다는 극적인 대비를 보여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구조는 글로바 일행
과의 만남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바, 25절의 '마음에 더디 믿는'이라는 표현과 31절의
'저희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이 서로 대비되어 부활 확인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장면은 그동안 있어 왔던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벽이 무너지고 한마음이 되는 것
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교훈과 행동에 대해 늘 깨닫지 못하고 무지했던(11,25,37,38
절; 8:9,25; 18:34; 22:24) 제자들이 비로소 성경의 예언이 뜻하는 바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이해하게 되는 극적인 순간을 맞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누가는
성경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을 함으로써 성경에 기록되고 에언된 메시야에 대한 메시지
가 예수의 모든 삶을 통해 완전히 성취(成就)되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24:46
또 이르시되 - 자신에관한 사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두번째는 구체적 성경의 근거를
들고 있다. 때문에 누가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후토스 게그라프타이)라는 인용 도입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인용된 것은 자신
이 직접 예언했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이다(9:22; 18:31-33).

=====24: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 - 여기서 언급된 내용은 렘 31:34에서 인용
된 것으로 보이는데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할 것은 죄사함을 위한 회개임을 말하고 있
다. 누가가 인식하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은 '회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의 이름'(* , 오노마티 아우누)이 누구를 뜻하는 것인
지 모호하지만 문맥으로 보아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 즉 예수의 이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회개'(* , 메타노이아) 운동은 이미
세례 요한에서부터 예견되었고(막 1:15) 그의 모든 사역, 심지어 십자가 수난과 부활
사건에 이르기까지 전생애를 통해 계속된 것이었다. 이 죄사함을 위한 회개 운동은 죄
의식을 높이고 참회하도록 하자는데 강조점이 있기 보다는 죄의식으로부터 해당된 존
재로서 그리고 전혀 새로운 방향을 향해 근본적(根本的)으로 변혁된 새로운 인간으로
서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추구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 본문은 사 2:3; 미 4:1,2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내용상 세 복음서가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다. 특히 세 복음서의 결론
부에 해당되는 이 말은 죄사함의 회개운동 곧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전세계를 향해
확장 선포되어야 함을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보다
'모든 족속'(* , 판타 타에드네)에 있는데 유대인들의 배타
적인 선민 의식을 깨치고 보편적 구원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같은
만인 구원 사상은 공관 복음서 모두 공통되게 선언하고 있으나 특히 누가는 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행 1:8).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 - 예수의 삶, 즉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목격하였고
그 의미를 성경을 근거로 하여 깨닫고 눈이 열리고(31절) 마음이 열리게 된(45절) 제
자들에게 예수는 47절에서 언급한 지상 최대의 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증언하
는 증인이 될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의 모든 활동이 완결부(完結部)에 이르
고 있다. 예수의 일은 지금부터 증인에 의해 새롭게 시작되고 있으며 이 새로운 시작
은 사도행전으로 이어진다.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 예수의 마지막 약속이 언급되고 있는데
'보라'(* , 이두)라는 단어로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내 아버지의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지 않다. '약속'(* , 에팡겔
리아)은 성령과 관계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행 1:4; 2:33; 갈 3:14) 성령에 대
한 언급이 없는 점이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행 1:4,5; 2:1-4을 참고한다면
'성령'을 약속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위로 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 복음의 증인들에게 약속된 것은 '위로부
터'(* , 여스 휘푸스)오는 '능력'(* , 뒤나민)이다. 앞
에서 약속한 것이 '성령'임을 전제할 때 이는 성령의 성격에 대해서 암시한 것이다.
즉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이 성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같은 언급은 증인의 활동이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에 힘입어 되어야 할 것임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능력을 얻기위
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는데 이 사실은 행 2:1-4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
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이유는 47절에서 언급했듯이 선교 활동이 예루살렘에서부
터 시작하여 이방 세계로 확장되어 나감을(행 1:8)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다.

=====24:50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 누가복음의 에필로그(epilogue)에 해당된다
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작별 장면이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고 나감'(* , 여
사고)으로 시작되고 있다. '여사고'는 출애굽 사건을 묘사할 때 언급한 70인역의 용어
라는 점에서 볼 때 누가는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어 내는 모습을 통해 또 다른 출애굽
을 상징적(象徵的)으로 나타내려 했다고 볼 수 있다(Lohfink). 이들은 예루살렘 성을
벗어나 감람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베다니'(* )로 나갔는데 이 장소
는(19:29 주석 참조) 승천의 장소로서는 처음 언급되고 있다. 행 1:12에 따르면 승천
의 장소가 감람산이라고 언급되는데 장소의 모순은 발견되지 않는다.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를 하는 이 모습은
예수를 사제적인 모습으로 기리려고하는 누가의 의도로 볼 수 있기도 하나(Lohfink)
누가는 사제의 모습으로 예수를 묘사하려려 했던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다
(I. H. Marshall). 이 같은 축복의 장면은 증인들의 활동이 인간적인 사역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되는 것이며 그 같은 사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주기를 바라
는 간절한 요청을 암시하는 것이다.

=====24:51
저희를 떠나(하늘로 올리우)시니 - 누가는 예수가 축복을 할 때 그들로부터 떠났음
을 하늘로 '올리워갔다'(* , 아네페레토)는 승천의 묘사로 그리고
있다. 개역 성경은 이 문구를 괄호로 묶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구절을 언급하지 않는
사본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 16:18,19과 행 1:2,9에서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
삭제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삭제하지 않았을 때 문제가 되
는 것은 부활 후 사십 일 간 지상에서 머물렀다는 행 1:3의 언급과 모순되다는 점이
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승천일이 부활한 날 밤이거나 그 이튿날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
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천에 관한 기사는 같은 저자의 기록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
이에 불일치(不一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막 16;19에서는 누가복음과 일치되고 있
다. 모든 점을 염두에 둘 때 50-53절의 기록은 앞의 이야기와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이
해하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승천에 관한 기사는 분명하게 일치되지만 시간에 대해서
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다.

=====24: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 승천하는 예수가 '예배'(* , 프로
수퀴네오)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이제부터 예수의 신
성(神性)이 인정되고 예배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제는 예수가 신적인 존재로
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거니와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하나님의 가장 위
대한 이적적 권능으로 인식되고 제자들이 존재하는 근본 의의가 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그에게 경배하고'가 괄호로 묶여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누가는 이제
부터의 복음의 내용을 곳곳에서 증언하고 상고하게 될 것임을 이 구절을 통해 언급하
고 있다(행 2:22-24).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 실망과 좌절 그리고 두려움에 빠져 있던 제자들
(17절; 요 20:19)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다. 예수의 부
활과 승천 사실이 그들에게 새 힘과 용기를 제공한 것이다. 이 같은 묘사는 53절과 함
께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사도들의 활동을 암시적으로 예시해 주고 있다.

=====24: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 매우 진지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누가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두 가지 의미를 시사해 주고 있다. 첫째는, 성전 안에서 예수의
명령대로 위로부터 오는 능력, 즉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
가에게서 성전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전에서의 가르침과
(19:47; 21:37,38) 관련 지어볼 때 기독교의 발생이 구약 전통(傳統)과 성전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
을 찬송하였다는 점이다. '찬송하니라' 대신에 '축복하다'(* ,
율로군테스)는 말로 언급되었든 또는 '찬양하고 축복하다'(*
, 아이눈테스 카이 율로군테스)로 되어 있든 각 사본마다의
차이점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예수에 관한 사건 즉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사건
을 모두 하나님과 관계된 사건으로 확인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의 모든 활동과
삶 전체를 하나님과 관련시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누가는 또한 자신의 복음서를 마치
면서 자신의 책에 기록된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에 근거된 것임
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누가복음 주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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