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 2장
=====2:1
이때에 - 2장을 시작하는 이 말은 1:80의 언급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 새로운 사건
의 시작을 알림과 아울러 상황의 변화로 인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가이사 아구스도(K* A , 카이사로스 아우구스투) -
'카이사로스'는 하나의 인명일 수도 있고 후대적 용법에서처럼 칭호일 수도 있다. 아
구스도는 원래 라틴어인데 헬라어로는 보통 '황제'(* , 세바스토스,
행 25:21, 25)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인명으로 사용되었다. 아구스도 황제의 본명은 가
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이다. 그는 B.C. 27-A.D. 14까지 로마의 황제로 있
었고 그후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의 이름을 따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이저(Gaius
Julius Caesar)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
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 이란 뜻)라는 칭호를 부여
받으며 그후 그는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로 명명되고 최고의 권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하고 훌륭한 정치 및 행정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점령지에 대한 정책의 일환(一環)으로 점령지의 지방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도
하며 점령지의 문화와 종교, 생활 풍습등을 인정해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나라의
법률까지도 로마법에 비추어 무리가 크게 없는 한 인정해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건축 등을 장려하기도 했으며 그 자신이 또한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하였
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정책과 통치로 인해 전에 없이 오랜 세월동안 평화가 지속되
었고 그는 '자비로운 정치가', '로마의 대부'(代父)로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최고 승원장(Pontifex Maximus) 또는 대제사장(Highest Priest)이란 칭호를 받아
들여 모든 종교의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게다가 그는 피살(被殺)된 자신의 외증조
부 율리우스 시이저를 신격화하여 그를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그를 신으로 받들도
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는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범하기도 하였다. 한편 탁월한 정치 지도자이며 행정가인 그가 자기에게 속한 나라들
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고는 로마에 속한 모든나라들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
록 명령했다. 따라서 그는 인구조사의 실시로 말미암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 5:2
의 예언을 성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Hendriksen).
영(* , 도그마) - 이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며 '원
리', '법령' 등의 뜻이다. 동사로는 '법령을 제정하다', '칙령을 공포하다' 등의 의미
를 갖고 있다. 여기서는 황제의 포고령을 가리킨다.
천하 - 이는 원어상 '거주지'란 뜻이다. 고대 학자들은 이방인의 땅과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헬라인의 거주지를 이 단어로써 나타냈으며 그 후에 '로마제국'이란 의미
로 사용되었다(행 11:28;17:6).
호적(戶籍) - 황제의 칙령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인구 조사에 관한 것
이었다. '호적'에 해당하는 원어 '아포그라포'(* )는 '등록하다', '기
록하다'(2:3, 5;히 12:23)는 말로 세금 징수를 위한 파피루스로 된 공식기록부를 가리
키며, 이 기록부에는 성명, 직업, 재산, 친척관계를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어
쨌든 이 인구 조사는 예수의 탄생을 세계역사의 맥락 속에 넣어 하나님이 그의 섭리를
달성하기 위해서 지상의 통치자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2
구레뇨 -B.C. 12년에 마르마리대(Marmaridae)를 군사적으로 장악하여 집정관이 된
후 구레뇨는 갈라디아의 남쪽 접경에 있던 산적떼의 후손인 호모나덴세스
(Homonadenses) 족을 정복하였다. 그후 그는 A.D. 3-4년 가이우스 시이저(Gaius
Caesar)의 고문역을, A.D. 6-9년에는 시리아의 황제 파견관을 역임한 후 A.D. 21년에
죽었다.
수리아 - 시리아(수리아, :27)는 B.C. 64에 로마제국에 합병되었다. A.D. 70까지
유대는 별도로 자체의 행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시리아에 복속되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이 당시까지만 해도 시리아는 유대 지역까지 포함된 로마제국의
통치령이었다.
첫 번 한 것이라 - 제1차 인구 조사는 흔히 예수의 탄생보다 훨씬 이후인 A.D. 6년
경 구레뇨가 통치하던 시기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행 5:37과 요
세푸스의 저서(Antiq. , 26 . 1)에도 제1차 인구조사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누가가 A.D. 6년에 실시되었던 제1차 인구조사를 그 이전에 실
시되었던 것으로 혼동했다고 추측한다. 그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견해들이 제시되었지
만 다음 두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첫째, 어떤 사본에는 구레뇨가 '두번째'로
'시리이의 총독'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 사본의 내용이 애매한점이
있기는 하지만 구레뇨는 예수가 태어날 당시와 그 후의 몇 년이 지난 뒤, 곧 두 차례
에 걸쳐 시리아의 총독 직위에 있었다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F.F. Bruce, Quirinius,
NBD, p.1069). 둘째, '첫 번'의 헬라어 '프로테'(* )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에 '첫 번째의'라고 번역되었지만 그 단어는 그 의미보다 '이전의' 또는 '앞의'를 뜻
할 수 있다. 만약 '첫 번'이라는 단어가 '이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본절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이 되기 이전에'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본
문의 기록의 역사성이 대해 회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만일 이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면 초대의 기독교 논박자들이 이를 지적하지 않았을리 없으며 또한 당대의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 써보낸 누가의 기록 속에 터무니없는 내용이 수록되었을리도 없겠기
때문이다.
=====2:3
모든 사람이...고향으로 돌아가매 - 인구 조사는 각 사람의 고향에서 실시되는 것
이 관례였다. 이렇게 많은 불편을 감수하며 자기의 고향까지 가서 호적을 하는 것은
유대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이었다. 로마의 호적제도는 자신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인적 사항만을 기록하는 훨씬 더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유
대인들이 로마의 손쉬운 호적 제도를 따르지 않고 굳이 번거롭게 많은 어려움을 감수
하면서 자신들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은 이 호적명령이 로마의 명령으로 행해지는
것이지만 자신들의 독자적(獨自的)인 방법과 의사에 의해 행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모든 사실들을
자세히 미루어 살펴본(1:1-4) 누가가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던 인구 조사를 강조하여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4
다윗의 집 족속...다윗의 동네로 - '집'은 단순한 문자적 의미보다는 좀 더 포괄적
인의미를 나타내어 '민족', '족속', '나라' 등의 의미를 내포하며, '족속'은 문자 그
대로의 뜻을 나타내나 이 곳에서는 둘이 서로 동의어로 사용된 것 같다. 평행본문 마
1:6, 16에서도 요셉이 다윗의 후손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거니와 본절에서 다윗의 집
혹은 다윗의 동네라는 말이 거듭 언급되는 것은, 예수께서 육신상으로 다윗의 후손임
을 강조함과 아울러 다윗 왕가의 후손이자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께서 일개초라한
시골민의 가정에서 태어남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삼상 20:6에서 베들레헴
은 '다윗 성'이라 불리운다. 다윗은 약 천년전 이곳에서 태어났고, 그가 양떼를 돌보
던(삼상 17:15) 곳도 이 마을 근처의 언덕이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7.2Km 떨어졌고 나사렛에서는 약 144Km 떰어진 곳이며 그것의 옛 이름은 에브라다이고
라헬이 장사된 곳이기도 하다(창 35:19). 이 마을 이름의 뜻은 '떡집'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다윗이 자라난 곳이고 미 5:2에 나타난 대로 메시야가 출생한 곳
이라는데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가 다윗성에서 난 다윗
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2: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 누가는 요셉이 어느 시기에 베들레헴을 향해서 출발했
으며, 또한 그가 왜 마리아를 동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얄는다.
추측컨대 아마 마리아의 고향에서 마리아에 대한 그릇된 소문이 퍼지고 있었을지도 모
르며 그 소문으로 인해서 마리아는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았을 것이므로 요셉은 인구
조사를 기회로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요셉은 이미 그녀를 아
내로 맞이했다(마 1:24). 그러나 그들이 성령으로 잉태한 아이를 낳을 때 까지는 분명
히 약혼 관계에만 머물러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정혼'이라는 말을 유대적 배경에
서 이해해야만 한다. 유대적 개념에서 '정혼'은 결혼을 의미하고 절차상으로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오는 일만 남은 것이다. 혼인서약은 대체로 정혼에 행해졌으며 이 정
혼은 항상 공식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에는 신랑이 그의 신부를 데려가는
일에 있어서 어느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한편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하는 것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산이 임박한 마리아가 그
장거리(약 144Km, 요단을 우회하여 돌아가는길)를 여행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
을 것이다. 이것은 산모와 태아에 치명적인 위험을 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여자도 호적해야할 의무가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고향에 가서
호적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함께 동행하는 것은 세인(世人)의 비난을 피하고자 한 요
셉의 배려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되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
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자신의 뜻대로 운행하는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
(시 136:8-26).
=====2:6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 이 표현은 단순히 임신과 출산 사이에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만 아이가 태어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다. 임신 자체는 비록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지만 태중에서 아기가 자라나는 것은 일반적인 과정에 의했던 것이
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성정(性情)을 가지고 똑같은 성장 과정을 거치며 모
든 인류를 대속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는 우리와 똑
같은 출생과 성장과정을 거쳤기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히 4:15). 한편 이 구절에서 '해산할 날'이 현재대로 12월 25일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회에서는 성탄절을 전승에 따라 보통 겨울로 잡는다.
이것이 3세기부터 문제시되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5월 20일을 제안했다.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킨 것은 336년부터였다. 서방에서 이날을 택한 것은 로마신인 '정
의의 태양'(Sol Invictus) 탄생일에 대치한 것이나 동방 교회에서는 주현제 즉 동방의
현자들이 도착했다고 하는 날(Epiphania manifestation, 1월 6일)에 예수의 수세를
기념하다가 4세기부터는 예수의 탄생도 연결시켰다. 그리고 5세기 중엽부터는 동방 교
회도 거의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켰으나 예루살렘 교회는 549년까지도 1월 6일을 크
리스마스날로 지킨다.
=====2:7
맏아들 - '외아들'이 아닌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뒤 계속해
서 자녀들을 낳았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에 계속해서 동정을
지키며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이야기며 이는 마리아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와 경외심에서 나온 이야기라 하겠다. 그리고 예수의 여러형제와 여동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8:19, 20;마 12:46, 47;13:55,
56;막 3:31, 32;요 2:12;7:3, 5, 10;행 1:14).
사관(舍館)(* , 카탈뤼마) - 이 단어는 흔히 '여관'(inn)이라고 번
역되었다. 이 단어는 최후의 만찬 때에 사용된(22:11) '객실'(guest room)을 의미하기
도 하는데 22:12에는 그 객실이 '다락방'으로 언급되었다. 또한 이 단어는 군인들의
숙소나 여관을 포함하여 숙박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
도 만난 사람을 데려갔던 '판도케이온'(* , '주막', 헬라어에서
대체로 여관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과는 다르다(10:34). 그런데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다가왔을 때 그 보잘것없는 가족에게 허락 되었던 장소는 가축우리있다고 누가는
담담하게 표현한다. 그곳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대로 곳간(cave)이었을 수도 있으
며, 또는 집이나 사관의 일부분이었을 수도 있다.
구유(* , 파트네) - 신약에서 이 '파트네'는 누가복음에서만 4회 나온다
(7, 12, 16절;13:15).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비천한 신
분으로 보잘것없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이세상에 오셨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구유는
세상 구속주의 비천한 탄생을 당시 세게의 주관자인 아구스도의 영광과 대조시키며(1,
11, 14절), 아무데도 머리둘 곳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이신 예수의 겸손과 고
난을 상징한다(9:58). 어쨌든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구유는 갓난아이를 누이기에는 안
성 맞춤이었다. 그리고 마굿간밖에 내어 줄 수 없었던 여관 주인은 동정심이 전혀 없
어서 그러했다고 보이지 않으며 누가 역시 그러한 각도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 같다(H.
Hengel, TDNT. , 49-55).
=====2:8
목자들이 - 당시 유대 사회의 여러 가지 직업들 중에서 목자라는 직업은 아주 천시
되었다. 일반 사람들은 목자들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목자들
이 하는일이란 유대인의 규례(規例)에 의하면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다. 이 이야기를
살펴볼 때 명백한것은 복음이 맨 먼저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
다. 뿐만 아니라, 이는 예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마져 아끼지 않는 선한 목자처럼
인류를 위해 당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이심을(마 20:18;요 1:29) 넌
지시 암시한다. 한편, 이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여호와께서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언
약하는 내용(삼하 7:8)을 상기해볼 수 있다. 그 내용 중에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메시야의 선조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나온다. 그리고
신구약에서 목자는 하나님 자신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자들을 상징적으
로 가리킨다(시 23:1;사 40:11;렘 23:1-4;히 13:20;벧전 2:25;5:2).
밤에...지키더니 - '지키더니'에 해당하는 '퓔라쏜테스'는 '파수하다', '보호하다'
의 뜻인 '퓔라쏘'(* )의 복수 현재능동태형이다. 그리고 '밤에'에 해당
하는 '테스뉴토스'는 '밤 새워'란 뜻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 귀절은 밖에서 여러명이
교대로 밤을 새워 도둑이나 다른 들짐승들로부터 양떼를 지키며 보호하는 일련의 행동
을 묘사한다. 팔레스틴지방에서 목자들은 4월부터 11월까지 이런 식으로 양떼를 밖에
서 방목(放牧)하였으며 겨울철에도 날씨가 춥지 않을 때에는 종종 그렇게했다. 한편
본문상으로는 예수가 어느 철에 태어났는지에 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여
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어느 철에 태어나셨나 하는 점보다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
신 사실 그 자체이다.
=====2:9
주의 영광 - '영광'(* , 돝사)은 영원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양식 중 하
나이며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독사'는 하나님과 그
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표현 속에서도 흔히 등장한다(9절;9:31, 32;행 22:11;계
15:8).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에 의해 다시 살아나셨으며(롬 6:4) 영광 속으로
올리워 지셨고(딤전 3:16) 지금도 영광의 우편에 계신다(행 7:55). 또한 영광이 하나
님께 돌려지듯이 그에게도 돌려진다(2:14;히 13:21). 따라서 그는 영광의 주님이시다
(고전 2:8;약 2:1). 나아가 우리의 종말론적 소망(사 40:5)은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딛 2:13).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들이나 본 구절에서 그의 출생시에 영광이 드러난 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진작부터 말해주는 것이며 요한복음에서도 또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요 1:14;2:11;11:40).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들어가
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이다(요 13:31).
두루 비추매(* , 페리엘람프센) - 이 단어는 '페리'(*
, '주위에')와 '람포'(* , '비취다')의 합성어로서 '빛에 완전히 쌓인 상
태'를 뜻한다. 때때로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한 빛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하나
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유대민족들 가운데서는 '세키나'로서 알려져 있다. 이는
매우 희고 밝게 빛나는 구름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출 24:16;왕상 8:10;사 6:1-3;행 7:55).
=====2:10
온 백성 - 이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러나 천사를 통해 전달
된 복음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적울타리를 넘어 세계 만민에게 개방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 백성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 먼저 전달된 것은 그들을 통
해 온인류에게 전해지게끔 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소식은 이 복음의 메시지를 접할
대상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14절)과 '이방'(32절)에로 확대(擴大)된다는 점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좋은 소식을...전하노라(* , 유앙겔리조마이) - 이 단어
는 '기쁜 소식을 전파하다'의 뜻이며 히브리어로는 '바사르'( )에 해당한다. 이
히브리어는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다'는 뜻을 나타냄은 물론이나 승리의 기쁜 소식
을 전한다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삼하 4:10;왕상 1:42). 이 용어는 특히 사 40장
이하에서 의미심장하게 사용되었으니 여기서 사자는 시온에 이르러 구원의 시대를 시
작하시는 하나님의 전세계적인 승리를 선포한다(사 40:9;41:27;52:7). 한편 본문에서
의 '좋은 소식' 이란 곧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
신 사실 자체가 기쁜 소식이며,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곧 복음이라 할수 있었다.
=====2:11
다윗의 동네 - 베들레헴(4절 주석 참조). 메시야는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 예언되었다. 여기서 베들레헴을 '다윗의 동네'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
은 메시야의 오심과 관련된 모든 약속들을 기억나게하고 그와 관련된 예언의 성취를
암시하기 위함이다.
구주(* , 소테르) - 헬라어 '소테르'는 신약 성경에서 드물게 나타나며
그것도 누가와 바울에 의해서만 주로 사용된 표현이다(행 5:31;엡 5:23;딤후 1:10).
이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표현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바(1:47;삼하 22:3;시 49:26),
예수께서 죄악에 찌들은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뜻한다.
그리스도 주 - '그리스도'는 마 1:1 주석에서 설명된 바처럼 인류 구속의 대사명과
관련되는 주님의 직능적명칭이며, '주'(헬, 퀴리오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한다.
예수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와 주로 예정되었으며(엡 1:4;3:11;골 4:3), 본체상으로는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성육신하셨으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신 것이다.
=====2:12
강보에 싸여...표적이니라 -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는 긴 옷감으로 아기를 포근히
감 감싸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 태어난 아기를 따뜻하게 하고 병으로 부터 보호하
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기예수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놓여있다는 것은 특별한
표적이라고 언급된다. 그것은 다음 세가지 면에서 표적이 되었다. (1) 천사가 목자들
에게 예언한 시기의 장소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2) 그들에게 전달된 기쁜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기름부음 받은 자 곧 그리스도로서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지극히 비천한 자리에까지 낮아지셨다. 한편 겔 16:1-5에는 예루살렘이 이방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불쌍한 아기로 묘사되었거니와, 예수는 이와
같은 가련한 상태에 놓인 이스라엘과 나아가 온 인류를 구원하고 돌보시기 위해 스스
로 비천한 자리(구유)에 누이셨던 것이다.
=====2:13
허다한 천군이...찬송하여 - 두 세사람의 증거로도 어떤 사실의 진정성을 입증할
수 있었거니와(마 18:16) 여기서는 수많은 천군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
나님의 아들을 증거하고 있다. '천군'에 해당하는 '스트라티아'(* )는
구약 성경에서 종종 천체(henvenly bodies)를가리키나(느 9:6), 여기서는 일군(一群)
의 천사들을 가리킨다(시 103:21).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 이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루는 내용이
다. 그리스도의 등장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1) 하나님의 영윈하신 신성과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거하고 또한 그를 통해 확연히 나타나기 때문이다(요
1:14).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요
14:9). (2)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과 경배로써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1:20). (3) 그리고 하나님이 그 영원하신
섭리에 따라 인생과 세상 만물을 향해 이루고자하신 계획을 그리스도를 통해 완수하시
게 되기 때문이다.
땅에서는...평화로다 - 그리스도의 오심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인(and on earth peace to men on whom his favor rest, NIV) 것은, (1) 그리스도
의 중재와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막혔던 장벽이 제거되고 화해가 이루
어지기 때문이다(엡 2:14).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서 하나
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있으므로 늘 불화의 다툼의 수렁에서 허덕이지만, 하나님과의
근본적 화해를 이룬 사람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평강을 선물로 소유하게 된다
(요 14:27). (2)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죄악이 제거되고 사람들간
에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엡 2:16-18). 여기 언급된 평화는 메시아의 도래와 관
련된 총체적 축복과 구원을 지칭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수는 평강의 왕으로서(히
7:2), 당신의 공생애를 백성들의 평강을 위해 보내셨으며(7:50;8:48) 그 평강을 위한
사역은 십자가상에서 절정에 달했다.
=====2:15
하늘로 올라가니 - 누가는 천사들이 단순히 사라졌다고 언급하지 않고 '하늘로 올
라갔다'고 말한다. 이는 공간적인 이동을 자세히 묘사한 누가의 독특한 표현이다
(24:51;행 1:10). 물론 우리는 본절을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하여 수직 상승의 뜻으
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의 처소 곧 하늘 나라는 이 우주속의 그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의 승천
장면에 대한 묘사와 마찬가지로, 지각 가능 상태로부터 지각 초월 상태에로 변화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
이제(* , 데) - 강조를 위한 접두사로서 특히 명령형 문장과 더불어 사용되며
여기서는 긴급성을 강조한다.
=====2:16
빨리 가서 -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난 후 엘리사벱을 찾아 나선 장면을 연상
시킨다(1:39). 목자들은 자신들이 돌보던 양떼를 두고 마리아처럼 서둘러 찾아 나선
다. 목자들이 양떼를 다른 동료 목자들에게 맡기고 갔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보존에 맡겼는지 알 수가 없으나 아무튼 목자들은 즉각적(卽刻的)인 반응을 보여주고
아기 예수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양떼를 뒤로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에는 결
단이 요구된다. 우리도 목자들과 같이 순수한 믿음과 겸손하고 완전한 섬김으로써 주
를 찾을 때에 주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인도자 되신다.
찾아서(* , 아뉴란) - 원어상으로 '끊임없이'(부지런히) 탐색하여
찾다'라는 뜻이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계속해서 찾아다녔으며, 그렇게 노력하여 찾
던 끝에 정말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평강의 왕 아기 예수를 발견한 것을 말한다.
=====2:17
보고...말한 것을 고하니 -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처해 있었던 이
목자들이 최초로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었고 또 최초로 복음을 전달한 사람들이었
다. 그런데 목자들이 그 아기에 관한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전해 주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 외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마굿간에 모여 있었으리라고 추
측해 볼 수도 있고, 목자들이 이웃 사람들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고도 짐작된
다.
=====2:18
기이(奇異)히 여기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우마조'(* )는 '이
상히 여기다', '놀라다'는 뜻 외에 '찬양하다'는 뜻도 내포한다. 즉 이 말은 초자연적
적인 혹은 신적인사건과 접한 자의 외경스러운 감동을 시사한다. 누가는 메시아에 대
하여 선포하는 말을 들었던 이들이 그 말을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여러번 언급하고 있
는데 본절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마리아와 요셉도 시므온이 예수께 대하여 하는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으며(33절) 47절에 보면 성전에서 답변하는 어린 예수의 말을 들었
던 모든 이들이 예수의 말을 기이하게 여겼다. 또한 나사렛의 회당에서 예수가 사 61
장의 어떤 부분을 읽고 나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곳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예수
의 말을 기이하게 여겼다(4:22;8:25;9:43;11:14, 38;20:26;24:12). 이외에도 사람들이
위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것을 설명해주는 여러가지 어휘가 사용되었다(4:15,
36;5:26). 사실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충만히 거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기이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롬 1:20).
=====2:19
지키어 생각하니라 - '지키어'에 해당하는 '쉬네테레이'는 원형'쉰테레오'(*
)의 미완료 시제로서 '보호하다',(기억으로) '간직하다'의 뜻이며, '생각
하니라'에 해당하는 '쉼발루사'는 원형 '쉼발로'(* )의 주격 분사 현
재형으로 '숙고하다', '생각하다', '만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마리아는 사
건 전반을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로 계속해서 생각하여 그 의미를 되새겼음을 알 수 있
다. 예수 탄생을 전후하여 천사로부터 전해진 메시지들이나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사
실 등은 마리아로 하여금 아기 예수의 신분과 사명에 대해 거듭 상고해 보게끔 하였을
것임에 분명하다.
=====2:20
목자가...찬송하며 돌아가니라 - '하나님께'라는 목적어를 받는 '영광을 돌리다'
(* , 돝사조)라는 표현이 누가복음에 자주 쓰인다
(5:25;7:16;13;17:15;18:43;23:47). 그리고 본절에서와 같이 어떤 이야기가 찬양으로
끝맺는 것은 누가복음의 특징중 하나이다(24:53). 목자들은 그들이 천사들로부터 들은
바와 실제로 본 것이 똑같음을 알고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린다. 사실 아기의
탄생 자체는 평범한 보통의 사건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는 그 비슷한
시간에 태어난 많은 아기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말구
유에 오신 아기 예수는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성육하신 하나님이신 것이
다.
=====2:21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 성경에는 아기가 출생하기도 전에 이름이
먼저 지어진 예가 여러번 나온다. 이삭(창 17:19), 솔로몬(대상 22:9), 요시야(왕상
13:2, 왕하 22:1), 고레스(사 44:28-45:1), 세례요한(1:13,60-63), 예수(마 1:25)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한편 예수라는 이름이 명명된것은 마리아나 요셉의 의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아기 탄생 전에 천사가 지시한 바를 따른것 뿐이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그들의 의견을 전혀 가미하지않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명령하신 그대로 수행했다고 하는 것은 이 일이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
하심 가운데 진행되어온 일이라는것을 인정하며 앞으로의 일 역시 성령께서 진행시켜
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2:22
결례(潔禮)의 날 - 유대의 모든 산모는 자녀를 낳은 후 율법에서 정한 기한이 지나
면 제사장에게로 가서 규례대로 예물을 드려 속죄를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자녀를
해산한 산모는 부정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율법에서는 부정하게 된 산모
와 아이들을 위해서 정결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율법이 명
시한대로 정결케 되는 기간이(남자 아이 40일, 여자 아이 80일) 찬(레12:1-5) 산모는
최종 정결 예식으로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만 했다. 여기서 번제는 출산에 대한 감
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드렸고 속죄제는 출산에 따른 부정(不淨)을 제거하
는 뜻에서 드렸다. 이때 각 예물은 번제로 양, 속죄제는 비둘기였으나 가난할 경우 번
제로 양 대신 비둘기 둘로 대치할 수 있었다(레 12:1-8). 본문에서 누가는 어머니의
정결 예식과 아기를 바치는 행위를 함께 묘사하고 있다(Marshall). 여기서 아기 예수
를 위해 제사장을 찾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결국 이 예수는 우리를 위한 대
제사장이시다(히 3:1). 이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분이 아니
며 우리의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
=====2:23
주의 율법에...아기를 주께 드리고 - 율법은 처음 난 짐승의 새끼를 여호와께 드리
도록 규정하였다(출 13장;22:29;34:19;민 3:11-13;40-51;8:16-18;신 15:19).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첫 아기를 제물로 드리는 일을 대치시키기 위해 레위 지파를 성
별하셨는데 이때 이스라엘 장자의 수가 레위인의 슷자의 비율에 맞지 않을 때에는 이
스라엘 백성들의 장자 수만큼, 즉 한 사람당 다섯 세결씩을 속전으로 지불하도록 하셨
다. 이러한 율법에 근거하여 예수께서도 장자, 곧 거룩한자로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된
다. 그러나 예수는 비록 인간의 몸을 입으셨긴 하지만 전혀 무죄하시다(히 4:15). 따
라서 예수가 주께 바쳐진것은 그가 자신을 중보자로서 주께 드림을 상징한다(딤전
2:5). 실로 예수의 생애 자체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연속
이었다.
=====2:24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斑鳩)둘로 제사하려 - 누가는 계속해서 산모의 정
결예식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반구는 산비둘기를 말한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태어나
셨던 가정환경과 그 사회적 형편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앞서 기술했듯이 레 12장에
는 해산한 여인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을 '양 한마리와 비둘기 한마리'로 규정하
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에 따라 제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으로서 그 양(量)과 방법들이 엄격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극빈자의 경
우는 정한 제물의 양대로 바치지 못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종교적으로 갈등을 갖게
될 것이므로 그 양을 줄이는 것 역시 법으로 정하여 바치게 했다. "그 여인의 힘이 어
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들기 새끼 둘을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
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레 12:8).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와 관심에서 이루어진 일들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부유한자나 가난한 자나 남녀노소할 것 없이 누구나가 하
나님을 경배하여 그에게 예배를 드려야 함을 암시한다. 당시 비둘기의 가격은 어린 양
의 약1/10정도에 해당하였다. 마리아와 요셉이 하나님의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경건
한 사람들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극빈층에 속하였던것이 분명하다.
=====2:25
시므온 - 이러한 이름은 유대 사회에서는 매우 보편적이고 흔한 이름이었다. 그런
데 혹자들은 이 구절의 시므온은 잘 알려진 유대랍비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
버지라고 주장하며 그가 A.D. 13년에 산헤드린의 회장이 되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막연한 추측일 뿐 정확한 자료나 확증이
없다. 어쨌든 시므온은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왔으며 더욱이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아왔다. 메시야가 바로 그의 위로의 근원인 것이다. 이는 우리들에
게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며, 우리가 언제 재림하실지 알 수
없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경건된 삶을 준비하여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마
25:1-13).
의롭고 경건하여 - 1:5, 6에서 세례 요한의 부모 사가랴와 엘리스벱이 소개될 때처
럼 의로음과 경건함이 강조되고 있다. '의롭고'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스'(*
)는 '공정한', '정의로운'등의 뜻을 나타내며 하나님과 신정 사회(神政社會)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따라서 '의로운'자에게 있어서 무엇보
다도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경건하여'에 해당하는 '율라베스'
(* )는 '경건한', '독실한' 등의 의미외에 '주의', '신중함' 혹은 '두려
워하다', '경계하다' 등을 뜻하며, 율법의 요구를 면밀하고 세심하게 충족시키고자 행
동거지를 주의하는 독실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잘 사용된다. 따라서 시므온이
얼마나 율법을 공경하며 준수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위로 -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받는 위로를 가리킨다
(사 40-55장). 말라기선지 이후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영감받은 선지자가 나타
나지 않았는데, 시므온은 이러한 소위 오랜 침묵의 시대에 살면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확신하며 끈기있게 기다리는 믿음을 소유한 자였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다. 우리는 눈앞에 전개
되는 타락과 불신의 흐름에 휩쓸려갈 것이 아니라 역사의 끝까지 투시(透視)하는 신령
한 눈을 떠서 매일 매일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결단하고 인내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
야 할 것이다.
=====2:26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 '지시를 받았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크레마티스메
논'(* )은 '사건을 다루다', '계시를 전달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본 구절에서 이 단어는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메
시야를 대망하며 그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경건한 생활의 한 부분
이었다. 시므온은 오랜 세월을 메시야의 도래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은 계시의 전달자인 성령을 통해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에게 메시야께서 오실 것을 보
리라는 계시를 허락하셨다.
=====2:27
성령의 감동으로(* , 엔 토 프뉴마티) - 이 구절은 시므
온이 계속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결국 시므온이 성건에 들어오게
된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고 마리아 부처가 아기예수를 성전으로 데려올
때 그를 맞이하도록 시므온을 준비시킨 분도 바로 성령이셨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주도면밀(周到綿密)하고 정확하다. 오랜 세월을 기다림으로 보낸 나이먹은 시므온은
이제 계시의 말씀이 완성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부모 - 법적인 차원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의 부모였다.
=====2:28
성령의 감동으로(* , 엔 토 프뉴마티) - 이 구절은 시므
온이 계속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결국 시므온이 성건에 들어오게
된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고 마리아 부처가 아기예수를 성전으로 데려올
때 그를 맞이하도록 시므온을 준비시킨 분도 바로 성령이셨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주도면밀(周到綿密)하고 정확하다. 오랜 세월을 기다림으로 보낸 나이먹은 시므온은
이제 계시의 말씀이 완성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부모 - 법적인 차원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의 부모였다.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시므온은 히브리적 표현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메시야를 보았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눈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는
누가복음의 한 특징으로서 이미 나타난 바와 같이(1:69, 71, 77) 예수를 본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구원이 구체화된 것(embodied)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시므온이 예수로
말미암아 구현될 인간구원의 역사를 예견하였다는 의미이다. 사실 예수 탄생 자체가
이미 인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사역의 첫 발걸음이기 때문에 그 사역은 벌써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시므온은 구약시대 동안 계속해서 예언되었지만 아무도 보지못
했던 메시야를 맞이하는 구약시대를 마감하는 인물이요, 또 메시야를 맞이함으로 신약
시대를 열도록 길을 열어주는 서언적(序言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갓난아기
의 모습인 예수를 보고서 그토록 즐겁고 평안한 심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정도
로 강력한 영향을 시므온이 받았다면, 구원의 실제적 내용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이 복음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얼마나 더 큰 기쁨과 확신을 나타내어야 하
겠는가!
=====2:31
만민 앞에 -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서 세상 끝에까지 미칠 그분의 영광과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이는 구원의 복음이 이스라엘의 지경을 넘어 세게 만방에로
확장될 것임을 내다보는 예언자적 통찰력이다. 한편 이방인의 구원 혹은 복음의 보편
성이라는 주제는 누가복음에서 강조된 사실들 중 하나이며(15장), 구약 속에 이미 태
동되어 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었다(사 43:5,6;45:6;49:12;미 4:1,2;슥 8:20-23). 이
점에 관해서는 마8:1-17주제 강해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관계'를 보라.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 빛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또한 그의 온전히 의
로우신 성품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시 27:1;요 1:5;딤전 6:16) 또 하나님의 계시와
(시 34:5) 생명의(요 1:4) 상징으로서 언급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
사장 나라로 삼으사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을 이방에 전파할 '이방의 빛'으로 삼으
셨다고 되어있다(사 42:6). 이러한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되었다. 예수는 그 가운데 조금의 어둠도 없으신 참빛로서 인종과 신분
등 모든 인간적 장벽(障壁)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에게 비추이신다(요 1:9). 그리고
예수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도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고(마 5:14) 그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고 명하셨다(마 5:16).
주의 백성...영광이니이다 - 예수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다. 왜냐하면 온
세게 만민을 위한 구원의 길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 열렸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세력의 지배 하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잃은 상태였는데, 이
제 메시야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면모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특권을 바로 깨닫기는 커녕 오히려 메
시야를 배척하고 마침내 십자가 형틀에로 내몰아 버렸다.
=====2:33
기이히 여기더라 - 마리아와 요셉이 기이히 여기며 놀란 것은 단지 시므온의 찬송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보다는 천사들, 목자들, 동방박사들, 엘리사벱,
사가랴 그리고 시므온 등 사방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아기 예수에 관한 증거가 나타났
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증거들을 접하게 됨으로써 마리아 부처는 애초 그
들에게 임했던 천사들의 계시를 거듭 상고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자신들의 이해를
보다 깊게 다져 나갔을 것이다.
=====2:34
많은 사람의...세움을 입었고 - 이 구절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도 하는 반면 하
나님의 집을 세우는데 기초석이 되기도 하는 돌(사 8:14;28:16)에 관한 사상을 반영한
다. 예수를 배반하고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예수께서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거게 하며
멸망에 이르게하실 것이요 또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세움을 입고 하나님 나라의 초석(礎
石)이 되게 하실 것이다. 또한 예수는 백성의 구원자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박
해와 곤욕을 치러야만 될 것으로 예언되었다. 이는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
터 받으셨던 각종 모욕과 비방(4:29;22:63-65;23:11, 34-39)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
라 영원 전부터 예정된 것(시 32:6-8;사 50:6;53:4-12)임을 증거해 준다. 시므온의 이
러한 예언은 엘리사벱의 노래나(:42-45) 사가랴의 예언(1:68-79) 그리고 천사들의 찬
송과는(2:10-14) 반대로 예수께 드리워질 어두운 면을 증거한다. 예수의 영광에 관한
기쁨의 증거와 더불어 이러한 비탄스러운 증거는 앞으로 전개될 메시야적 사역의 진면
목이 어떠한지를 암시해 준다.
=====2:35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 '칼'을 나타내는 헬라어 '롬파이아(*
)는 드라키아인들의 대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큰 칼을 의미한다. 여기서 마리아
는 '여인 중에 가장 복이 있는 자'(1:42) 곧 메시야의 어머니라는 영광과는 또 달리
'슬픔의 어머니'(Mater dolorosa)로 묘사되고 있다. 한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는 예수께
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나사렛에서 함께 보낸 소년 시절과 청년시절이 가장 행복된
나날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됨과 그의 때를 같이하여 대두한 유대교 지
도가들의 핍박은 날이 갈수록 심각성을 띠어갔으며, 이로 인해 혈육의 정을 떨칠 수
없었던 마리아로서는 예수의 장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으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엄청난 고통을 받을 때 큰
칼이 찌르는 것보다 더한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었을 것이다.
드러내려 함이니 - 여기서 헬라어 '아포칼뤼프도신'(*
)은 '베일이 벗겨지는'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을 행한다고 하는 자들의 위선과 허위가 드러나지 않은 채 그대로 숨기워 있었
지만 이제는 예수를 통해 사실 그대로 드러날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사역과 더불어
그를 섬기는 자들과 대적하는 자들이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다.
=====2:36
아셀 지파 비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 - 시므온의 소개와는 달리 안나의 경우
는 지파명까기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시므온의 경우는 구체적인 신분을 확인할 수
가 없었으나 안나는 삶의 배경이 기술되었다. 아셀은 야곱의 여덟번째 아들이었다(창
30:13). 예수 탄생 당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주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어
있어 나머지 10지파의 행방은 불투명했다. 이는 바벧론 포로지로부터 귀환(歸還)한 자
들 중 거의가 이 두 지파에 속한사람들이었던 연유도 있겠는데, 안나도 바로 다른 지
파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이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
신들의 족보를 보관하고 그 잃어버린 지파백성의 후손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한편 '바
누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고
그 곳에 붙인 '브니엘' 이라는(창 32:30) 지명에서 나온 이름이다. 따라서 히브리식으
로는 '브니엘'이며 그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그리고 '안나'는 히브리어의 '한나'
( )에 해당한다(삼상 1:2). 즉 이 이름은 사사이며 제사장이고 선지자였던 사무
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름과 동일하다. 그녀는 구약 성경의 드보라(삿 4:4)와 훌다(왕
하 22:14)와 같이 휼릉한 여성 예언자였다.
=====2:37
과부 된 지 팔십 사 년이라...기도함으로 섬기더니 - 당시 유대 사회의 조혼 풍습
에 비추어 볼 때 안나는 14세를 전후하여 결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안나의 나
이는 14+7+84=105세 쯤 되는 셈이다. 이처럼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긴'여인이었다. 이는 그녀가 철저한 헌신의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이스라엘의 소망 곧 메시야를 대망하며 기도했던 여인임을
나타내준다. 아마 그녀는 오직 메시야만이 그녀와 이스라엘의 가슴에 수십년 동안 맺
혀있던 응어리를 풀어주고 위로해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한편, 안나는 성전
에서 시므온의 송가(頌歌)를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송가를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그 아기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신하였다.
=====2:38
하나님께 감사하고 - '감사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도몰로게이토'(*
)'는 '찬양하다', '감사하다' 등의 뜻외에 '단호하게 신앙을 고뱄하
다', '무엇인가를 믿음으로 고백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안나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신앙 고백적인 믿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안나의
감사는 순종 및 메시지의 선포와 결합되고 있다.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 이 구절은 사가랴가 이스라엘의 속량
(1:68)을 노래하고,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25절)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사 52:9에 나타난 메시야의 예루살렘 구원에 대한 대망의 연장선상
에서 이해된다. 사실 '구속'은 예수께서 이룩하실 신적구원 개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롬 3:24;엡 1:7;골 1:14).
=====2:39
주의 율법을 좇아 - 누가는 예수의 부모들이 율법이 명하는 바를 열심히 준수하였
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본장 내에서만 하더라도 예수의 부모들이 얼마나 철저
하게 율법을 준수했었는가 여러차례 강조되고 있다. 22절(모세의 법대로), 23절(주의
율법에 쓴 바), 24절(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27절(율법의 전례대로 미루어 보건
대 마리아 부처는 경건한 삶을 사는 유대인의 전형(典型)이었다. 본절은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롬 10:4) 율법 아래 있는 모든자들을 구속하시
기 위하여(갈4:4) 친히 율법을 지키셨음을 시사한다.
갈릴리로...나사렛에 이르니라 - 누가는 마태복음 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방 박
사의 방문이나 애굽으로의 피난 기사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그것은 누가가 마태의
기사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마태는 또 하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실례를 들기 위해서 그 기사의 내용을 넣었겠지만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를 구원하
시기위해 사람의 몸을 빌어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에 대해서 기술하려고
하는 누가에게는 그러한 내용이 그다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가는 예
수의 부모가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예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사람들에게 귀여움
을 받고 정상적인 어린 아이로 성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40, 52).
=====2:40
아기가 자라며...그 위에 있더라 -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어릴적 성장 모습을 묘
사한 1:80의 내용과 비교된다. 그리고 52절은 이 구절에 대한 보충 내용이다. 이것은
예수가 12살이 되기(42절) 이전의 이야기이다. '자라며 강하여지고'라는 표현은 신체
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범한 아이와 같이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음
을 말한다. 그리고 '지혜가 충족하며'라는 표현은 정신적 성장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는 표현은 영적 성장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어릴 때부터
지혜와 은혜를 가진 인물로 세례요한보다도 훨씬 탁월했음을 의미한다.
=====2:41
그 부모가 해마다...예루살렘으로 가더니 - 예수의 부모가 율법을 성실히 이행하는
경건한 유대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의식은
온갖 위선과 타락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구약적 차원에서 지켜야 할 율법 의식들은 여
전히 중요한 구속력(拘束力)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경건한 자들이 그러한 의식에
맞춰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은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이었다. 율법에는 유대 성인
남자들이 연례 행사로서 삼대 주요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장막절)을 예루살
렘을 방문하여 지키도록 명시되어 있다(신 16:16). 그러나 바벧론 포로 시대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각처로 흩어지게 되어 이행사에 매년 모두 참석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렵
게 되었다. 그렇지만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적어도 유월절 행사에만은 꼭 참석하려
고 노력하였다.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이 행사에 남자들만 참석하도록 명시하고 있으
나 유대 랍비 힐렐(Hillel)은 여자들도 축제에 참석하도록 권고하여 그렇게 지켜졌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어린 예수가 자란 가정의 신앙적 배경을 살필수가 있다. 어린 예
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영적 및 인격적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며 어려서
부터 의롭고 경건한 삶에 훈련되어져 갔던 것이다.
=====2:43
그 날들을 마치고 - 유월절과 무교절은 모두 7일 동안 계속되었다(출 12:15;레
23:6-8;신 16:3). 그리고 이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은 적어도 이틀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 예수는...알지 못하고 - 예수는 그의 부모들보다 예루살렘에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당시 열 두 살의 나이는 결코 어리게만 간주되지 않았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예
수의 부모는 예수의 움직임을 일일이 살피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들은 그 사실을 모
르는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어중간한 나이였던 예수는 여인들과 어린 아이
들의 행렬이나 남자 어른들과 제법 나이가 든 소년들의 행렬중 어느 한 곳에 끼여 여
행했을 것이다. 이 행렬이 이처럼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면 요셉은 예수가 마리아
와 함께 여행하고 있을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가 요셉과 함께 여행하
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서로가 착각한 사이에 하루가 끝나갈 무
렵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편 예수는 그의 부모들이 찾고 있을 시간에 성전에서
최고 석학(碩學)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일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
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은 그를 게속해서 엉뚱한 곳에서 찾아 해맨다.
만일 그의 부모들이 예수의 메시야성을 게속해서 염두에두고 그의 신성을 깨닫고 있었
다면 그들은 예수가 보이지 않았을 때 바로 성전에 가서 찾았을 것이다. 왜야하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그의 아버지의 집은 바로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2:44
동행 중에...아는 자 중에서 찾되 - 성전 절기 준수를 위해 성전으로 모이는 여행
자 무리는 같은 마을 이웃들과 친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매일 저
녁 때 이 무리들은 지정된 장소에서 함께 모여 유숙하고 여행 일정 등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예수의 부모는 예수가 일행 중에 있을 줄로 알고 신경쓰고 있지 않았으나 저
녁 식사 때 혹은 잠자리에 들려 할 때 그가 없음을 알고 아는 사람들 속에서 그를 찾
아 나섰다.
=====2:45
찾으면서 - 헬라어 '아나제툰테스'(* )는 현재 분사형으로
서, 마리아 부처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며 줄곧 예수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음을 뜻한
다.
=====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 마리아와 요셉은 하룻길을 여행하고 나서 예수의 행
방이 묘연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44절). 이튿날 그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예수
를 찾는데 하루가 걸렸을 것이다(45절). 그리고 그 다음날 곧 '사흘 후에' 그들은 예
수를 성전에서 만났다.
선생들 중에 앉으사...묻기도 하시니 -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과 이스라엘인의
뜰과 안뜰의 동남부 등 이렇게 세 곳에 회당이 있었다고 탈무드(Talmud)는 전한다. 대
체로 랍비들은 바로 이 안뜰의 동남부에 있는 회당에서 율법을 강론(講論)했다고 한
다. 당시 생존해있던 저명한 율법 학자들은 '힐렐'(Hillel), '샴마이'(Shammai), '가
말리엘'(Gamaliel), '요나단'(Jonathan), '시므온'(Simeon), '니고데모'(Nicodemus)
등으로 짐작된다. 추측해 보건대 이러한 유명한 학자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중 적
어도 한 사람 정도는 예수와의 토론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외경 '도마 복음
서'(Gospel of Thomas)에서는 이때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또
어려운 질문을 제기하고 답하며 천문학, 의학, 물리학, 철학 등에 관한 이야기 등도
논의되었다고하나 정확한 증거 자료는 없다. 아무튼 어린예수께서 당대 최고 석학들과
함께 율법을 이야기하며 토론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2:47
듣는 자가 다...기이히 여기더라 - '기이히 여기더라'(* , 여시
스탄토)는 미완료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놀라움을 나타내며, 그
원형 '에크시스테미'는 거의 기절(faint)할 정도로 놀랐다는 뜻이다. 즉 예수의 이야
기를 듣는 사람이 계속하여 반복해서 그 질문과 답변에 매우 놀라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놀라움은 어린 소년의 입에서 그토록 영특한 이야기가 넘쳐나온 사실로 말미암은
바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입에서 나온 지혜의 말씀 자체의 탁월성에 기인한 것임에
분명하다. '지혜'에 해당하는 '쉬네세이'(* )는 '이해'라는 뜻이다. 여
기서 이 이해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다. 예수의 답변과
하나님의 지혜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
(神靈)한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이다(골 2:3).
=====2: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너를 찾았노라 - 누가는 예수의 부모가 예수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들의 처음 가졌던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불과
12세에 불과한 소년이 당대의 석학들과 당당하게 토론하는 장면은 그들에게도 놀라움
으로 먼저 다가왔다. 물론 그들은 예수의 탄생에 얽힌 신비스러운 일들이나 차츰 성장
하면서 보여준 특출한 지혜와 인격에 대해 남다른 경험을 한 바 있었을 것이다. 그러
나 그들 역시 경험한 바 계시에대한 이해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한 인
간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신분이나 사역의 본질적 의의를 정확히 깨닫지는 못한 상태였
다. 이어서 마리아가 예수께 책망조로 탓한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마리아는
어디까지나 잃어버린 아들로 인해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로서의 걱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속상한 감정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의 대답은(49절) 마리아 부처로
하여금 예수의 신분에더해 다시금 깊이 숙고해 보게 하였을 것이다.
=====2:49
어찌하여...알지 못하셨나이까 - 본서에 나오는 예수의 첫 말씀이다. 이는 혈육상
의 모친인 마리아에게 하신 삼가는 투의 공손한 말씀이지만 자신의 존재 의의를 분명
히 천명(闡明)하신 단호한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몇 사항을 상고해 볼 수 있
다. (1) 혈육상의 모친에 대한 순종과 하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순종 사이의 긴장
관계가 나타난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몸을 입고 한 가정의 아들로 탄생하셨기 때문에
그 부모에 대한 임무에 충실하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사로운 일에 얽매일
여념이 없을 엄청난 사명, 곧 온 인류에게 구원의 산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막중한 사
명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지상에서 수행해야 할 인간에 대한 모든 임무는 하
나님의 계명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만 수행될 수 있을 뿐이며 우선 순위는 절대적으
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18:29;신 33:9;마 6:33). (2) 예
수는 자신의 전생애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전개되어감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음을 보
여준다. 특히 '있어야 될 줄을'이란 표현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는 당위성(I
must be...)을 강조해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인간에
대한 의무의 우선 순위 문제, 그리고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욕망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하는 마음 간의 양자 택일 문제를 놓고 믿음의 용단(勇斷)을 내릴 수 있어야 하겠다.
내 아버지 집에 - 예수께서 하나님을 독특하고 유일한 의미에서 자신의 아버지로
부른 최초의 언급이며(22:29;23:46;마 11:25;막 14:36;요 5:17), 자신의 신성(神性)을
증거한 것이다.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내 아버지의 일'(My Father's
business)로도 번역된다. New KJV는 본절 하반절을 '내가 내 아버지의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을 모르셨나이까'(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about My Father's
business ?)라고 옮겼다. 이는 '집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이스'가 중성 복수로
'일' 또는 '사물'의 개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일'이라 번역하든 '집'이라 번역하든
이 구절의 의미를 크게 바꾸어 놓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의 전생애를 하나님
의 일을 실천해 나가면서 살았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에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이 그가 머물 자리이고 그의 집이었던 것이다.
=====2:50
양친이...깨닫지 못하더라 - 마리아에 임한 예수 탄생에 관한 계시를 생각해 보면
이 구절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즉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다면
이 정도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부의 깨닫지 못
함이 훨씬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48절에서도 나타내었듯이, 설령 그들이 예수께 얽
힌 여러 신비로운 계시를 접했다고 해도 그 의미를 확연히 깨달을만한 영적 수준에는
도달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2:51
예수께서...순종하여 받드시더라 - 누가는 예수의 신성에 관해서 언급하고나서 한
가정의 자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인자이신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다. 예수는 이후 세
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실 때까지(3:21) 18년 동안 갈릴리 나사렛에서 그의 부모와
동생들과 함께 지내셨다. 그곳에서 주님은 아버지 요셉의 가업인 목수직을 이어 동생
들을 보살피고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했다(막 6:3). 요셉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언급
되지 않고 있다. 추측컨대 이 18년 어간에 요셉이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요셉이 죽
자, 장남인 예수가 그의 가족을 부양(扶養)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모친은...마음에 두니라 - 1장의 주석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누가는 이 복음
서의 내용 중 일부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마리아에게서 얻은 듯하다. 그녀는 여
기 언급된 세부 내용들을 얘기할 수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
든 말'이란 본장의 사건 전반에 걸쳐 나타난 말들을 지칭한다.
=====2:52
예수는...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 외경의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
작하시기 전에도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비상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하셨다고
전하지만 그 증거는 불확실하다. 본문이 거듭 밝히는 바는(40절 주석 참조), 예수께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지혜와 키가 자라갔다고 하는 것
이 예수의 신성(deity)을 도외시하는 뜻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을 뿐이기 때문이다(빌 2:6, 7). 한편 '키'에 해당하
는 헬라어 '헬리키아'(* )는 '키'(stature, NIV) 또는 '나이'로 번역된다.
이를 어떻게 번역하든 별반 차이가 없지만 '키'로 보는 것이 적합한 듯하다. 왜냐하
면 '나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부연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자는 그 의미를 신체적인 성장이나 인격적
인 성장으로 보기도 한다.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착실한 성장은 모든 이의 귀감(龜
鑑)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에 순종하며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아끼며 도와주는 그의 생활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
의 이런 칭송은 후에 초대 교회의 사람들이 받았던 칭송으로 이어졌다(행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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