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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 4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1|조회수14,587 목록 댓글 0


누가복음 제 4장
=====4:1













<요단강과 여리고전경>










예수께서...성령에게 이끌리시며 - 이 구절은 3:22에 연결된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이 구절은 구약성경과 연결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해 준다. 예수는 '40일 동
안 광야'에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
(wander)했던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모세가 산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40일간 있었던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신 9:9).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호 11:1)로 비유한다면 즉,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집단적 개념을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개인적 또는 단일적 개념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
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인도했다. 전
자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셨으나 여기서는 사단이 그의 아들을 시험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시험을 받았을 때 실패하고 말
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는 그 시험을 이기셨다. 그 이후로도 이스라엘은 수많은
시험 가운데서 거의 매번 시험에 져 엄청난 죄악들을 범했지만 예수는 광야에서의 몇
차례의 시험 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내내 많은 시험들을 당하셨지만 그 모든 시험에
서 승리하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출생, 똑같은 유년기, 똑같은 청년기, 장년기를
거치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히 4:15). 바로 이
런 흠없고 순전(純全)한 어린 양 같은 예수께서 온갖 시험을 이기시면서 우리 인류의
죄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신 것이다. 한편 누가가 성령의 사역과 활동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구절에서도 그 사실이 명확해진다. 3:22에서 성령이 예
수께 강림하시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공식적(公式的)으로 모습을 드러내 메시
야적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언급했다. 여기서 우리는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다하더
라도 세례식 이후에 예수께서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그 인도하심에 따라 활동하였
을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시험을 받는 것 역시
이 가운데 성령의 개입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예수에게 있어 행동 동
기였고, 그 이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폭발적 복음운동의 주요 동인(動因)
이었다(행 2:4;10:44;13:4).

=====4:2
마귀에게(* , 디아볼루) - '마귀' 또는 '사단'을 나타내는 이 단어
는 '비방자', '고자질장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70인역(LXX)은 비난자나 적이나 유혹
자로서 마귀를 지칭하는데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대상 21:1;슥 3:1). 한편 이와 유사
한 내용의 단어로 '사타나스'(* , '대적자', '적')를 들수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사탄(* )에서 유래하였다(삼상29:4). 이 두 단어는 요한복음과 요한계
시록에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반면에 바울은 대개 '사타나스'를 사용하며 평행구절인
막 1:13도 '사타나스'를 사용하고 있다. 사단이 세상의 왕이요 신이다(6절;고후 4:4).
그러한 존재로서 사단은 하나님의 것인 영광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속받지
못한 자들은 사단의 통치 아래 있게 되며(마 6:13;막 3:27;요 6:70;8:44;행
13:10;26:18;골 1:13) 그들이 하는 일은 '디아볼로스'의 일이다(요일 3:8). 결국 사단
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갈라놓는 것이며 사단의 궁극적 무기는 사망이다(히
2:14).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왕국이 마귀의 왕국을 멸망시키게 되고 결
국 사단은 하늘로부터 쫓겨나게되며(10:18;요 12:31;계 12:9) 그 결과 사단은 더이상
비방자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사단과의 싸움은 그리스도의 공동체(共同體)를
상대로 계속된다(고전 7:5;엡 4:27).
시험 -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을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
이 필요할것이다. 왜냐하면 개역성경은 이 세 가지의 경우를 구분하여 따로 기록하지
않고 모두 '시험'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사단은 사람들을 '시험
'(temptation)한다. 다시 말해서 사단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유혹한다. 그러나 하
나님은 그와 같은 시험을 하시지도 않으며 그 자신이 그런 방법에 의해서 시험을 받으
시지도 않는다(약 1:13). 게다가 모든 시험(temptation)이 직접 사단으로부터 온다고
말할수도 없다. 왜냐하면 가끔 시험은 우리 자신의 그릇된 마음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약1:14, 15). (2) 사람들은 하나님께 신앙과 어긋나는 그릇된 요구들을 하므
로 하나님을 시험(test)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와 같은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예수가 신 6:16을 인용한 의도도 아마 그 사실을 암시하고 있을 것이
다(12절). (3)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 것과 마찬가지
로 그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다(신 8:2). 이스라엘 사람들과 예수가 광야에서 경
험한 것 가운데는 위의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이 포함되어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
는 하나님은 '율법의 준행(遵行) 여부'를 보시려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
셨다(출 16:4). 한편 사단의 시험에 마주쳤을 때 예수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내
가 너를 기뻐하노라'(3:22)고 하신 말씀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즉, 예수는 구
약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시험을 이겨내셨던 것이다.
주리신지라 - 본 구절이 보도하는 바는 예수께서 금식을 하는 40일 동안 전혀 배고
픔을 느끼지않았다거나 또는 배고픔에 대해 전혀 자유했었다(Shurmann)는 것이 아니
다. 오히려 예수께서 계속 주리신 가운데 극도의 배고픈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마귀
가 유혹을 해왔다는 것이다. 즉 마귀는 예수의 배고픔이 극에 달한 것을 알고는 그 배
고픔을 더윽 자극하여 먹는 것으로 예수를 유혹하려고 했던 것이다.

=====4:3
마귀가...떡덩이가 되게 하라 - 여기서 사단이 떡덩이를 언급한 것은 구약에서 하
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것을 연상시킨다(출 16:31). 그 당시 사람
들은 메시아가 오면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던 것과 같은 이적을 베풀어 주리라 기대
했었다(요 6:30). 결국 사단이 예수에게 이와 같은 시험을 했던 것은 예수가 메시야라
는 것을 증명하는 어떤 일을 행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촉구의 목적은
예수의 메시야성에 관한 객관적 증거를 보려는 것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을 신실하게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도록 부추기는테 있었다. 즉, 이 사단의
간악한 시험 배후에는 하나님과 예수의 사이를 와해(瓦解)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예수가 수행할 메시야적 사명을 방해하려는 사악하고도 교활한 간계가 숨
어있는 것이다. 결국 애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유혹을 이겨내는데, 사단의 유혹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그 사실을 더욱 확실히 입증해 준다(I.H. Marshall).

=====4:4
예수께서...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신 8:3
에서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를 40년 동안 유랑하
게 하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며 그들을 시험하사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
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고 하신'것이다(신 8:2).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
를 주신 이유는 그들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준
수함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신 8:3).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동안에 예
수는 줄곧 신실했다. 예수께서 보여준 행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했을때
그들이 행동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답변한 내용은 예수
의 마음이 분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에 철두철미 순종한
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가 시험받을 때 모범이 되는 것이다(히 4:
14-16;5:80. 한편 극도의 굶주림 가운데서도 끝까지 신실하심을 갖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는 떡부스러기 하나를 취하시는 것조차도 인류 구속을
위해 거부하시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 주셨다(22:19;요 6:48-51).
따라서 우리는 시험 당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알 수 있다.

=====4:5
마귀가...천하 민국을 보이며 - 이 두번째 시험을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세상
권세에 대한 정치적 시험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다른
두 시험과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여기서 누가는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라
고 기록해 어디로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평행구절인 마 4:8은 '산'이라고
기록하여,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장면
을 연상시킨다(신 34:1-3). 그러나 혹자(I. H. Marshall)는 '산'이라는 표현이 상징적
(象徵的)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나 육신의 몸을 입고 계
신 예수께서 모든 나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이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기때
문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 일이 심
리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예수께서는 실지로 시험을 받기 위
해서 모든 세상을 구석구석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
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간 곳이 산이든 아니든 천하 만국을 보기위해서 설정된 장소
였다는 정도로 보면 무난할것이다.

=====4:6
이 모든 권세와...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 이러한 사단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이
다. 인류의 타락 이후 이 세상은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사단은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 소유권, 양도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단의 그러한 권한
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조만간 모든 '권세와 영광'을 되
찾게 될 것이며, 또한 온전한 공의와 사랑으로써 모든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기 때
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귀는 예수께 세상 전체를 소유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마귀
의 주장에 대해서 예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시며 그렇다고 마귀의 주장을 인정하시
지도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궁극적 지배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사단
의 뜻에 의해 좌지우지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단은 하나님을 정면
으로 모독하는 행위인 우상 숭배를 조건부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시험
은 성도들의 일상 생활 가운데서도 크고 작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세상이냐 신앙적 진
리냐 혹은 사단이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적 상황에서 우리는 세상만
국의 권세를 초개처럼 버리시는 예수의 단호한 결단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
(마 6:24).

=====4:7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 마귀가 요구하는 절은 단순한 인사형식이 아니라
'완전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들을 마귀에게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가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들의 구원도 불가능했을 것이
다. 왜냐하면 (1) 죄를 범하는 결과가 되므로 우리를 위하여 온전한 희생 제물로 자신
을 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2) 성경은 메시야가 먼저 고난을 받고 그 다음에야 '영광
에 들어간다'(24:26)고 가르친다. (3) 마귀는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스스
로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이 시험은 예수가 왕국을 즉시에 받으므로
십자가를 피하게 하여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挫折)시키려는 것이었다.

=====4:8
주 너의 하나님...그를 섬기라 -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신 방법은 우리에게 좋은 본
보기를 제시해 준다. 예수는 사단을 대적함에 있어 신 6:13을 인용하심으로써 하나님
께 순종한 마지막 아담(고전 15:45), 곧 완전한 인간으로서 마귀를 대적했다. 즉 예수
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고 응답하신 것이다. 이렇듯 예수가 구약에
서 인용한 말씀들은 마귀를 대적하는데 더없이 훌륭한 무기였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항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려는 그리스도와(요 5:30;6:38) 항상 그 뜻을 대적케 하
려는 사단의(창 3:1)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4:9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뛰어내리라 - 마귀는 세번째 시험을 위해서 예수를 예루살
렘으로 이끌고 간다. 그런데 마태는 이 시험을 두번째로 제시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다(마 4:5-7). 이것은 누가가 예루살렘 성에 좀 더 관심을 기울
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험이 의도하는 바는 예수의 자기 과시욕을 부추켜
그러한 저급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게끔하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꼭대기'라는 말의 헬라어 '프테뤼기온'(* )은 '날개'
라는 뜻의 '프테류스'(* )에서 온말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요세푸스(Jos, Antiq. 15, P. 411)에 의하면 이는 성전 바깥뜰 남쪽에 있는 주광
을 뜻한다고 한다. (2) 예레미야스(J. Jeremias)에 따르면 이는 성전문 위로 가로지르
는 인방(lintel)이라고 한다. (3) 게르하드슨(B. Gerhardson, Testing Gods son, P.
54)에 따르면 시 91:4(LXX은 제 90편)의 '프테뤼가스'(날개들)와 본문 9절의 '프테뤼
기온'(꼭대기) 사이에는 일종의 언어 유희가 있다고 하며 이를 일종의 성전을 보호해
주는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 이중 어떠한 견해를 취해본 구절을 이해하든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결국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끌고 갔다는 것
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랍비 문헌에 보면
메시야가 성전의 꼭대기에 나타날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따라서 비록 랍비문헌에는
뛰어내린다는 언급은 없지만 마귀는 그러한 배경에서 이 시험을 예수께 제기했을 가능
성도 있다.

=====4:10
하나님이...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 이 시험에서 마귀는 성경 본문의 내용과 상
관없이 구약성경들을 잘못되게 인용한다(시 91:11, 12). 그러기에 우리는 단지 어떤
성경구절들을 인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마귀의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예수
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마귀는 시
91:11, 12을 인용하면서 고의적으로 '네 모든 길에'라는 구절을 빼버렸다. 게다가 여
기에 인용된 시편은 택한 백성을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인도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 것이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섭리를 방해하는 일이나 충동적으로 위험에 뛰어드는 일을 용서하시지 않으시고
엄히 징계하신다고 가르쳤지만(신 6:16;18:20;사 45:9) 마귀는 이런 진리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않았다. 오늘날에도 마귀는 성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순수
한 신앙을 변색시키기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게 만들고 거짓 종들을 통해
그 말씀을 왜곡시킨다(마 22:29;고후 2:17). 사실 세계 도처에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는 허다한 이단들은 성경을 그들의 경전으로 내세우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다만 문
제는 이 성경 말씀을 자신의 거짓된 사상을 세우고 은폐시키려는 목적에서 아전 인수
(我田 引水)격으로 짜맞춘다는데 있는 것이다.

=====4:12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 예수의 대답은 다시 성경의 인용으로 주어진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맛사에서 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시험했을 때(출
17:1-7)를 배경으로 하는 신 6:16을 인용한 것이다. 만약 예수가 마귀의 시험에 응한
다면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나님께 그릇된 표적을 구하는 셈이 되어 하나님을
격분(激忿)케 하는 결과가 된다. 결국 여기에서도 마귀는 하나님과 예수와의 신실한
관계를 공격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사단의 시험에 대한 결론적 말씀이라 할 수 있
는 본절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예수의 굳은 결의를 보여준다.

=====4:13
미귀가...떠나니라 - 사단은 모든 공격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갖은 방법을 다하였으
나 실패했다. 결국 마귀는 얼마 동안 예수의 곁을 떠났다. 콘첼만(Conzelmann)은 이
'얼마 동안'(until an opportune time, NIV)의 기간을 22:3까지라고 이야기한다. 즉
22:3에서 마귀가 다시나타나 예수의 수난을 야기시키나 그 전까지는 사단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Conzelmann, Theology of Luke, P. 38). 그러나 브라운(Brown)은
본서를 살펴보면 사단이 예수의 전생애 동안에 역사했다고 주장한다(Schuyler Brown,
Apostasy and Perseverance). 예수의 공생애가 유대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적대자
들의 핍박으로 일관되었고 이러한 핍박이 궁극적로는 사단에 의해 사주되었음을 고려
해 볼 때, 이중 두번째 견해가 더 타더한 듯하다. 사단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승리가
가져다 주는 의미는 실로 크다. 결국 사단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곧 예수의 복음
사명이 최종적 성취를 보게되리라는 점을 암시하는 복선적 역할도 하기때문이다. 예수
께 있어서의 사단과의 싸움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함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인 것이다. 한편 누가는 시험이 끝난후에 천사들이 예수를 수종들었다는 것을 기
록하지 않고 있다(마 4:11;막 1:13). 이것은 각 제자간의 저작 목적에 따른 시각 차이
이겠으나 누가는 예수께서 홀로 힘든 시험을 이겨내신 사실을 보다 강조해 보이고자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14
성령의 권능으로...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 저자 누가는 철저하리 만큼 성령에 대
해서 강조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한 사실(3:21, 22)과 성령에 이끌
려 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일(1절) 등에서 누가는 성령의 역할을 두
드러지게 부각(浮刻) 시킨다. 그런데 이 곳에서도 누가는 재차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
고 있는 바 예수께서 새로운 사역의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그가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
되었음을 재삼 언급한다. 이러한 언급은 누가의 독특한 특징으로 본서(10:21)와 사도
행전(행 1:8;10:38) 등에서 자주 나타난다. 우리는 1장에서 4장까지 오면서 예수의 잉
태에서 사역의 시작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개입했던 성령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
다. 이제 예수의 능력이 성령의 권능을 통해 가시적으로 나타나 그의 명성이 널리 퍼
지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보였던 몇몇반응들(22, 28, 32,
36, 42절) 중에서 우선 예수에 대한 소식이 퍼져 나갔다는 것을 언급한다. 한편 마태
와 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로 돌아가신 이유를 그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들으셨기때문
이라고 기록하였다(마 4:12;막 1:14).

=====4:15
가르치시매...칭송을 받으시더라 - 누가는 여기서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 내
용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예수가 성령의 권능으로 가르쳤고 그 가
르침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칭송했다고만 전할 뿐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칭송을 받은
이유는 그의 가르침에 생동력, 권위, 논리 정연함, 실제적 적용, 흥미, 진리 등이 담
겨 있기 때문이다(31, 32절;마 7:28, 29).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들의 칭송이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열심으로 찾아왔지만 예수의
가르침이 그들의 선입견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자 그들은 반대로 비판적 태도를 취하
거나 심지어 적대적 행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본장에도 기록되어
있다(28, 29절). 한편 '가르치는' 것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 골격을 이루며(마
4:23;9:35;11:1), 그 가르침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과 예수자신에 관한 계시(마 6:32,
33;요 14:6) 및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17:20, 21;마 21:31) 등으로 요약된다. 복음
서에는 병자 치유등을 위시한 예수의 놀라운 이적들이 독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하지
만 이 모든 이적들도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메시야의 여러 교훈의 진정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에 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4:16
예수께서...자기 규례(規例)대로 - '그가 자라나신 곳'은 예수가 자신의 고향에 있
었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표현이다. 예수가 회당을 방문한 것은 예수의 어렸을 때부터
의 습관이다. 누가는 예수가 '자기 규례대로' 곧 '전에 하던대로' 회당에 참석했음을
시사함으로써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을 강조한다. 이와같은 누가의 강조는
예수께서 이처럼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철저하게
배척당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고있다.
회당에 들어가사 - 유대에서는 5세가 되면 회당에 가는 것이 허락되고 13세가 되면
회당에 출석하는 것이 유대인 율법생활의 일부분이다. 유대인들의 회당의식은 성경에
나타난 바 없지만 유대 전통에 따르게 되면 그들은 회당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개인
기도를 한다. 그 다음 '쉐마'( , 신 6:4-9;11:13-21)를 고백하고 열 여덟개의
간구로 이루어진 소위 18기도문을 낭송한다. 그후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을 낭독
하게 되는데 보통 모세오경이 중심된 고정된 성구집(lectionary)의 구절을 읽는다. 성
경은 몇사람이 교대로 읽는데 아람어로 돌아가면서 읽는 경우도 있다. 성경 낭독 후
기도를하고 설교를 하게 된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하게
된다(행 13:15). 한편 성경을 낭독할 사람은 선정(選定)되었는데 본문에서 예수께서
자진해서 성경을 낭독하였는지 아니면 그전에 비공식적인 요청이 있었는지는 언급이
없다(W.Schrage, TDNT VII, 798-841).
성경을 읽으려고 - 예수의 가르침은 성경으로 시작되어 성경으로 끝난다. 이는 그
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참 메시야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예수는 구약
말씀, 특히 율법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거부감을 나타내신 적이 없다. 다만 예수는 율
법의 자귀자체에 얽메이지 않고 그 율법 규례들 속에 함축된 정신을 밝히 드러냄으로
써 사람들에게 진실로 요구되는 생명력있는 교훈을 베푸신 것이다.

=====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찾으시니 - 저자 누가는 예수 자신이 사 61장을
선택해서 읽었는지 아니면 그 구절들이 그 날 안식일에 읽혀지도록 이미 정해져 있었
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드리거늘'(* , 에피
디도미)이란 말을 예수가 특정한 책을 요구하고 그 책을 사람들이 넘겨주었다는 뜻으
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찾으시니'에 해당하는 '휴렌'(* )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뜻보다는 예수의 의도적 발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보아도 무난하다.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자유케 하고 - 예수께서 낭독하신 사 61:1, 2의 말
씀은 예수의 두가지 사역 곧 선지자적 사역과 메시야적 사역을 증거하고 있다. 먼저
예수는 신 18:15, 18에 예언된 바로 '그 선지자'(the prophet)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
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이심을 증거한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
음을 받은 자'곧 메시야로서(단 9:24) 영적으로 눈멀고 포로된 자들을 죄악에서 건져
내어 자유케 하시기 위해오신 분임을 증거한다(6:20, 21;7:18-23). 본문의 '임하셨으
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리세'(* )는 '기름붓다', '기름바르다'의 뜻
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제사장(출 28:41), 선지자(왕상 19:16), 왕(삼상 10:1)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듯이 예수께서도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이러한 직분을 모두 수행하실 것을 시
사한다. 따라서 이사야 예언의 주인공이신 예수께서는 (1) 성령을 받은 자이며 (2)
복음의 선포자이며 (3)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는 분이신 것이
다. 한편 '가난한 자'란 순수한 은혜와 자비만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열어 놓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늘나라를 소유케 하실 것을 가리
킨다(마 5:3). 그리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이란 일차적으로 유대 백성이 바빌론에
서 귀환(歸還)할 것을 가리켰지만 궁극적으로 메시야께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그늘
에서 해방시킬 것을 의미한다. 또한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육
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눌린 자에게 자유를'이란 표현은 죄의 노예가 되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 얽매이며
고통받는 자에게 예수께서 영혼의 평안과 자유를 주실 것을 가리킨다.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주의 은혜의 해'는 레 25:8-55에 나
타난는 '희년'(year of iubilee) 곧 여호와께서 매 50년마다 빚진 자들의 빚이 탕감되
고 노예들이 해방되고 땅의 경작을 쉬게 하고 모든 거민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게 정하신 해방의 해를 뜻한다. 나아가 이 해방의 해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은
혜로 죄와 죄의 결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역사(歷史)의 시기를 가리킨다. 바로 이
와 같은 시기는 메시야가 선도할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이와같이 예수께서 이사야
의 이 놀라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그가 당신의 사명을 똑똑히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
실을 말해준다. 한편 이사야서의 인용 부분인 본문을 누가는 결국 예수의 사역에 대한
표제적(標題的)인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다. 선지자이며 메시야로서 예수는 성령의 능
력으로 사회의 소외자들, 가난한 자들 및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해 봉사하실
것이다.

=====4:20
책을 덮어...주목하여 보더라 - 읽기를 마치신 예수는 성경 두루마리를 말아서 그
것을 '맡은 자'에게 건네주셨다. 여기서 '맡은 자'(attendant)는 헬라어로 '휘페레테
스'(* )인데 흔히 '섬기는 자', '배 젓는 자'를 말한다. 이 '맡은 자'
의 직책은 매우 다양한데, 이들은 성경 두루마리를 관리하고 회당을 청소한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성일을 선언하는 은나팔을 불며 주중에는 어린아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친
다. 이들이 관리하는 성경 두루마리는 보통 함이나 궤에 보관된다. 한편 낭독자가 성
경두루마리를 '맡은 자'에게 넘겨주고 나면 낭독자는 자리에 앉게 된다. 랍비적 전통
에 따르면 앉는 것은 가르침의 시작이다. 낭독자는 그 자리에 앉아 낭독한 구절에 관
한 교훈적 강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예수의 강론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호의로 시
작해서 결국은 적대감으로 끝이나고 만다.

=====4:21
오늘날 - '오늘날'을 나타내는 헬라어 '세메론'(* )은 다분히 긴박감
을 띤 표현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에 해당하는 '하루'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사람에
게 허용된 일정기간'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이 '오늘날'은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본문에서도 말했듯이 사 61:1, 2의
예언이 성취된 그날 곧 이사야의 예언대로 실제로 메시야가 오셔서 회당 사람들이 그
메시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있는 그 날로 볼 수 있으며 둘째, 그날 예수
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과 동시대인들이 맞게 되는 시대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셋째,
나아가 하나님의 복음을 접하는 모든 시대 곧 시시각각 새롭게 다가오는 모든 시대를
뜻한다고 볼 수있다. 결국 오늘날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생생히 들려오는 하나
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날인 바 지나간 과거가 아닌 오늘 완성되
는 '주의 은혜의 해'(19절)를 뜻하는 것이다. 실로 '오늘'이야말로 구원받을 날이요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날인 것이다.

=====4:22
그를 증거하고..요셉의 이들이 아니냐 - '증거하고'에 해당하는 '에마르튀룬'(*
)은 '칭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speak well of, NIV). 따라서
우리는 회당에서 말씀을 들은 청중들이 예수의 강론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서 예수의 '은혜로운 말'에 대한 청중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후로도 예
수가 말씀을 증거하는 곳에서 계속해서 나타난다(20:26). 청중들이 기이하게 여긴 것
은 예수의 외모나 행동을 통해서 나온 것이아니라 '은혜로운 말씀'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에 긍정적반응을 보인 청중들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부분에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한다는 점이다. 본문은 청중들이 왜 적대
적이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아마도 같은 동네 나사렛에서 목수 요셉
의 아들로 자라 이토록 엄청난 주장을 하는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에게서 너무도 당돌
한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이 간다. 즉 사람들은 예수의 인간적인 면, 즉 목수 요
셉의 아들이라는 사실만 염두에 둘 뿐 그가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 따
라서 예수를 기이히 여기며 칭찬하던 분위기가 쑥덕공론과 의심과 불신의 분위기로 돌
변하여 급격하고도 과격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4:23
의원아 너를 고치라 - 본래 이는 '남을 돕는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돕
는것이 바른 순서'라는 의미의 속담으로서 의사인 누가에게는 친숙한 것이었을 것이
다. 다시 말해서 이 속담은 예수께서 메시야되심을 입증하기 위해 가버나움과 기타 등
지에서 행하신 이적들을 여기 나사렛에서도 행하여야 한다는 사람들의 시험기 깃든 요
청을 예언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회당에서 그의 강론을 들은 나사렛사람들이 나타
낼 반응을 미리 간파하고 계신 셈이다. 예수는 그의 사역 기간중 계속해서 표적을 보
이라는 요구들을 받곤 했다(11:16, 29). 하지만 그는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
시켜 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적을 행하시지는 않는다.

=====4: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A , 아멘 레고 휘민) -
이 말은 엄숙한 단언을 내리고자 할 때 사용된것으로 누가복음에서 여섯 차례 사용되
었다(12:37;18:17등). '진실로'에 해당하는 '아멘'('A )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각
개인과 공동체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1) 하나님의 뜻에따라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
라다(왕상 1:36) (2) 하나님의 위협이나 저주가 내림을 확증하다(민 5:22) (3)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참여하다는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1) '아멘'은
예배시의 환호로서 적극적응답을 의미하며(계 5:14) (2) 기도와 송영에서(갈 1:5;엡
3:21;딤전 1:17) 아멘은 그 기도와 송영의 내용에 대한 온전한 공감을 나타내 준다.
여기서처럼 예수가 아멘을 자기 자신의 말씀 앞에 둘 때, 그 목적은 그 말씀의 진정성
과 타당성을 강조하는데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없느니라 - 이 속담 자체는 큰 일을 성취한 사람이 자기 고향
에서는 오히려 냉대받는다는 의미로 쓰였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심으
로 인해 타인의 탁월성을 객관적으로 인정해 주기를 꺼려하며 자신의 평범한 수준으로
타인을 격하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속담을 자신에게 적용하신것은 자
신이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만, 나아가 한층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즉, 예수는 자기 자신의 민족에게 배척당한 선지자들의 계보(系譜)에 속한
다는 것이다.

=====4: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본 구절은 '...위에'를 나타내는 '에피'(*
)의 축소형 '에피'와 '진리'를 나타내는 '알레데이아'로 서두가 구성되어 '그러
나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근거 위에서 말하노니'라고 다시 번역할수 있다. 이것은 이
어지는 구약상의 두 가지 실례가 나사렛 사람들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확증해준다. 나사렛 사람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잘 알고있고 또
그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오직 이방인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푼 일이 자신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Lenski).

=====4:26
엘리야가...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 왕상 17:8-24에 나타난 내용이다. 3년 6개월동
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을 때 온땅에 흉년이 들어 그 상황은 매우 참담했
었다. 더욱이 뚜렷한 생계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웠던 과부들의 생활상은 매우 극심해
그들 중 대부분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런데 이때 엘리야는 가뭄에 고생하며 굶주려
있는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들을 남겨두고 베니게의 큰 도시 시돈에있는 작은 마을 사
렙다에 사는 이방인 과부를 찾아가 그 집을 구원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엘리야가 단독
적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룬 일이라고 명백히 밝히
고 있다. 한편 사렙다의 과부에게 베풀어진 자비는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신 경우와 유사하다(막 7:26-30).

=====4:27
엘리사 때에...수리아 사람 나아만뿐 - 왕하 5:14의 내용이다. 엘리사의 경우도 엘
리야의 경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다른 많은 문둥이가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수리아의 장수 나아만만이 깨끗함을 얻었다. 이 역시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베푸신 은혜라고 예수는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구속사의 새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명확하게 알
려주는 것이다. 즉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하여서 진실되게 '예수께로 나오는 모든 자들
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되었음을 의미한다(마 8:11;요 6:37). 오늘날 성도들에
게 있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당시 배타적 선
민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일대 충격이고 도전이었다. 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처음 선포된것이 아니라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다(사 43:5, 6;49:12;59:19;말 1:11;미 4:1, 2;슥
8:20-23). 한편 나아만 장군의 치유사건은 예수께서 로마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경우와
유사하다(7:1-10).

=====4:28
회당에...분이 가득하여 - 예수의 말씀이 선민 의식에 가득차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모욕과도 같은 언사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회당은 일시에 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예수의 말씀을 청종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
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길 간구해야 할 청중들은 냉소적이고 불신에 찬 태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맹목적인 증오와 분노의 태도로 돌변한다.

=====4:29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 분노가 극에 달하면 살의(殺意)를 띠게 된다. 처음엔
호의적인 태도로 말씀을 듣던 청중들이 어느새 폭도가 되었다. 이는 예수를 향하여 호
산나 찬양을 외치던 군중들이 종국에 가서는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적대
무리로 돌변하는 장면과 대비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한편 나사렛
은 갈릴리 구릉의 남쪽 경사면의 낭떠러지 위에 위치하였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이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림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배척과 살해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기 때문에 예
수가 민족 반역죄를 범한 것으로 몰아 유태 전통상 반역자를 처단하는 형벌 제도인(대
하 25:12) 벼랑에서 아래로 사람을 밀쳐 죽이는 형벌을 집행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
나 예수는 후에 십자가의 형장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잃은 무리가 자신을 마
을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묵묵히 허락하셨다.

=====4:30
예수께서...지나서 가시니라 - 아직은 예수께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가 아니었다.
본문은 예수께서 그 죽음의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므
로 그 상황에서 예수가 어떤 기적적인 탈출을 시도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저자 누가
는 단지 무리가운데로 걸어서 지나 가셨다고 전한다. '가시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류에토'(* )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가시고자 하
시는 길로 계속 가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분이 어떻게 죽음의 위기를 넘겼던간에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난관에 봉착(逢着)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며 복음의 사역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예수를 보게 된다. 또한
선교활동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혀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후에 지속적
으로 봉착하게 될 어려움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시리라는 예측도 가능케 한다. 아울
러 사역 초기에 당한 어려움을 통해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인가도 감지하게 된다. 한편 나사렛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예수는 가버
나움으로 행로를 잡는다. 이에 대해 플루머(Plummer)는 예수가 이후 다시는 나사렛으
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4: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 - 나사렛 북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 갈릴리 연안에 위
치한 도시로 예수께서 광범위한 사역을 수행하신 곳이다(마 8:5, 14;요 6:55-59). 예
수의 수많은 이적을 목격하고서도 회개치 않음으로인해 가버나움에는 장차 화가 임할
것이 예언되기도 했다(마 11:23).
내려오사 - 이 표현은 갈릴리 바다가 지중해의 수면보다 약 200m 정도가 낮기 때문
에 높은 곳에 위치한 나사렛에서 해변의 평지에 이르는 길이 내리받이 경사였음을 보
여준다.
가르치시매(* , 엔 디다스콘) - 본 구절의 원문 표현은 완곡
한 미완료 시제로서 그 뜻이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다'가 된다. 이는 예수께서 회당에
참석하여 가르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음을 암시한다(33, 38절;막 1:21). 한편 우리는
31-41절에서 예수의 사역이 하루종일 쉴틈없이 진행되었음알 수 있다. 예수는 오전에
회당에 들어가서 권세있는 말씀으로 교훈을 베푸시고 귀신을 축출하셨으며, 오후에는
시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다. 그리고 해가 진 이후로부터 밤 늦
도록까지는 몰려든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치유하시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4:32
권세가 있음이러라 - 마가복음 평행절(막 1:21, 22)은 예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
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전한다. 랍비 정도도 못되는 사람이 독특한 권위로써 가르치
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의 랍비들은 그들의 선임자들의
견해를 다시 인용함으로써 자신들의 가르침을 누적된 전승(tradition)의 기초 위에 세
웠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그 가르침 자
체에 독자적인 권능이 담겨 있었다. 이렇듯 예수의 말씀 전파는 그의 생애 전체를 통
하여 항상 권세와 능력을 수반하고 있다(36절).

=====4:33
더러운 귀신들린 - 귀신 '들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 )는 '가지다',
'소유하다', '잡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귀신들린 상태에 관해서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할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간혹 목격되는 바이다. 이 상태는 '전혀
이질적인 타인격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지배하는 상태'라고
정의내려질 수 있다. 따라서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되는 것이아니라 다만 그 귀신에
의해 인격이 지배당하게됨을 의미한다. 귀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은혼인 것처럼
나타날 때가 있지만 이는 속임수에 불과한다. 인간의 영혼이 귀신의 형태로 활동한다
는 것은 비성경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한편 귀신들린 자의 상황은 완전히 미친 상태,
병걸린상태, 혹은 귀신을 빙자한 주술적 능력을 지닌상태 등이다. 귀신은 세상 끝날까
지 잠시 동안은 인간보다 영적 능력이 더 우월한 상태로서 인간을 괴롭힐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써 귀신을 추방하고 정복할 능력과 특권을 지니고 있다(약
4:7). 그런데 축사 신학에서 주의할 사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귀신을 쫓는 것
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귀신이 축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4:34
아(* , 에아) - 이는 놀라움이나 두려움, 분노 등을 표현하는 감탄사이며 본 문
장에서는 악마적인 무서운 비명을 나타낸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수사적 용구인 본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나이까', '왜 방해하시나이까' 등의 의미이다. 즉 예수의 출현으로 인해 귀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게 되자 그 긴장과 불안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귀신들은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臨在)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존재 거점의 근
거를 잃어버려 두려움에 떨게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 때문이다. 즉 하나님
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권위 아래 사단의 어두운 지배와 군림이 사라지는
곳이다. 따라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상징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
에는 사단이 떨며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여러 가지것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해 주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귀신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말은 예수의 신성을 인식한 것으로 놀
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귀신은 마 8:29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막 5:7에
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고 있다. 한편 이 말은 '더러운 귀신'이라는
말과도 대조를 이룬다.

=====4:35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 예수께서는 귀신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 침묵할 것을 명령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때가 이르기 전에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것을 금하는 예수의 행동 가운데 그 첫번째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함
구령을 거듭내리신(마 8:4;막 1:34)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짐작된다. (1) 정해진 때가
이르기 전에 대적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사역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당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갔으며 더욱이
예수의 교훈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을 초월한 내용이 많았다. 따라서 유대교 지
도자들은 날이 갈수록 예수께 대한 의혹과 경계의 눈초리를 나타내었다. (2) 호의적인
무리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경계하시기 위함이었다. 당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은 거의
가 육신상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그 중에는 예수를 로마의 압제로부
터 구원해줄 위대한 민족적 영도자(領導者) 곧 정치적 메시야로 여기고 추종하는 사람
들도 있었다. (3) 예수는 자신이 입으로 증거되기 이전에 당신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
님의 신령한 권능으로 인해 자연히 증거되기를 원하셨다. 더욱이 본문의경우 예수는
굳이 더러운 귀신의 입을 빌어 당신의 신분을 중거케하기를 원치 않으셨음이 분명하
다.
넘어뜨리고...상하지 아니한지라 - 예수의 행동은 소위 전문적인 '악령 추방'
(exorcism)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그가 어떤 주문을 외운다거나 다른 이의 권위를 끌어
들이지 않은데서 알 수 있다. 대신 예수는 단 한마디 명령하는 말씀으로써 귀신을 내
어 쫓았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이 얼마나 권세있는 것인가 알 수 있다. 하나님
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써 죽은자를 살려내기도
하시는 등(8:49-56) 인간의 어떤 불가능도 가능케 하신 것이다.

=====4:36
다 놀라 -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담보스'(* )는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말씀과 권세와 능력에 대한 놀
라움이다. 귀신을 축출하는 이례적인 사건을 통한 예수의 신적능력을 경험한 군중들은
예수에게서 범접(犯接) 할 수 없는 권위를 보게 된다. 물론 당시 사회에서는 귀신을
달래거나 위로하는 주문과 주술적 행위를 통하여 일시적 또는 거짓으로 악령추방이 행
해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환자를 잠시 잠들게 하는 것 뿐으로 오히려 또
다른 귀신의 힘을 비는 경우도 있어 귀신들린 사람으로 하여금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주문이나 주술적 행위가 아닌 일방적인 명령을 귀신에게 던졌다.
그것은 하늘의 권세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불가항력적인 명령이었다.

=====4:37
소문이...퍼지니라(* , 여세포류에토 에코스) -
'퍼지니라'를 나타내는 '여세포류에토'는 원형 '여포류오마이(*
)의 미완료 중간태로서 '계속 퍼져나가고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소문'을
나타내는 '에코스'에서 영어의 '메아리'를 나타내는 '에코'(echo)가 파생되었다. '에
코스'는 해변가의 파도 소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던 단어이다. 즉, 예수의 소문은 자
연스럽게 그리고 폭넓게 퍼져 나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예수의 권능과 말씀을
가버나움 회당에서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은 가는 곳곳마다 이 경험을 이야기했
을 것이다.

=====4:38
시몬의 장모 - 저자 누가는 이전까지 베드로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본서를 기
록하다가 본 구절에서 갑자기 아무런 소개없이 베드로를 언급한다. 그것은 누가가 본
복음서를 기록할 시기는 이미 초대교회 시대였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통해 베드로의
이름이 온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갑자기 그의 이름을 언급해도 별
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같다. 한편 본 구절과 고전 9:5은 베드
로가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부인의 이름은 컨콜디
아(Concordia)나, 또는 펄페튜아(Perpetua)였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
멘트는 그녀가 베드로보다 일찍이 순교당하였다고 전한다.
중한 열병 - 문자적 의미로는 '높은 열병'(high fever)이다. 누가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것으로 보아 그는 열병의 정도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고대의 의학적 관습을 따
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누가가 전문 의사였음을 차증해준다.
붙들린지라(* , 쉬네코메네) - 이 동사는 헬라 의학 저술에서
흔히 사용이되는 동사로 의학 전문 용어이며 '어려움을 겪다', '억눌리다'는 뜻인 '쉬
네코'(* )의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서 열병이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아마
시몬의 장모는 만성병(慢性病)에 시달린 듯하며 당시에는 매우 중태였던 것 같다. 베
드로의 장모의 중병이 그 가정에 위기를 가져왔지만, 그 위기 상황은 또한 예수가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4: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 원문상으로는 예수께서 환자의 머리 곁에 서서 허리를 굽
혀 진단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주술적 행위나 무당의 무속적 행위에
의해서 질병을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 판단에 의거한 정확한 진단과 완전하고
도 즉각적인 치료를 하신다.
열병을 꾸짖으신대 - 본 구절을 두고서 혹자는 이 열병의 배후에는 악한 귀신이 자
리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께서 하늘과 홍해를 꾸짖으셨다고 해서(욥 26:11;시 106:9) 하늘과 홍해 뒤에 귀신의
영향력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열병을 꾸짖었다'는 표현은
열병을 내모는 행위 자체를 더욱 생생히 부각시키기 위해 열병을 의인화시키거나 아니
면 누가가 예수의 말에 힘이 있었음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있다.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 만성 질병이었던 열병은 사람을 탈진(脫盡)시키고
매우 심약하게 만드나 환자는 치료 즉시 일어나 시중을 든다. 이는 예수의 치유 권능
이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나타내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병상에서 일어난 환
자가 예수 일행을 위해 수종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영적 의무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새로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위한 봉사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4:40
해질 적에 - 해가 지기를 기다려 환자들이 예수께 몰려든 것은 안식일 때문이었다.
안식일에는 어떠한 노동 행위도 용납되지 않았기에 환자를 운반하는 일이나 치료 행위
를 행하는 것 역시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안식일에 발이 묶여 환자들은 예수께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녘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이다(창 2
:2, 3;출 34:21).
손을 얹으사 - 원래 안수란 첫째, 제사드리는자가 희생당할 동물에게 손을 얹음으
로써 자신의 죄악을 전가시키거나(출 20:15, 19) 둘째, 신성모독자를 돌로 칠 때 신성
모독의 말을 들은 증인들이 자신들에게 임한 더러워진 인격, 죄악등을 전가시키거나
(레 24:14) 셋째, 병을 고치는 역사를 행할 때 예수님 혹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그 병자들에게 전가시키거나(막 6:5;행28:8) 넷째, 사도들이 사도적인 권위로써 성령
이 임하지 않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그들도 성령 안에서 한몸이 되
었음을 외형적으로 나타내는(행 8:18, 19) 등의 이유에서 사용되었다. 결국 안수란 공
통적으로 무엇인가를 전가시킨다는 의미가있다. 이중 본문에서는 세번째의 의미로 사
용된바 이러한 예는 예수 뿐만 아니라 여러 사도들의 경우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께서 안수하심으로 병을 고치신 행위는 어떤 마술적인 요법이 아니라 단
지 그분의 능력이 그 환자에게 전가됨을 외형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본 구절에서 예수께서 환자들에게 손을 얹은 것은 예수가 치유능력의 근원이라
는 것과 그가 병자들 개개인에게 자상하신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4:41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 더러운 귀신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정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신앙고백적 차원이 아니며 다만 예수 앞에서 그들의 패배와 예
수의 권능을 인정하는 말로 이해된다. 한편 간악한 귀신들조차 예수의 정체를 알고 있
었다는 사실과 무리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서로 역설적(逆說的)인 대조를 이
룬다. 복음서 기자들은 다양한 사람들, 심지어 불신자들이나 귀신들까지도 예수의 정
체를 직접 혹은 간접으로 증거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서들이 확고히 하고자 하는 사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지지해 주는 폭넓은 증거 구실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분명히 별개의 사실임을 알 수 있다.

=====4:42
한적한 곳에 가시니 - 평행 구절 막 1:35에서는 예수께서 아직 동이 트기 전에 기
도하셨다고 전한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시는 모습은 단순히 쉽게 스쳐
지나가기 쉬운 장면이지만 여기에 예수의 사역의 비결이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
습을 눈여겨 보지않았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정작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도해야
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다(22:39-46). 예수는 언제나 기도를
하며 자신의 사역을 준비하고 하나님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4:43
하나님의 나라 - 이는 예수께서 전하신 말씀의 핵심적인 주제이다(8:1;9:2). 예수
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죄인들을 흑암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어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함이었다(골 1:13).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
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속한 것으로 오해함으로써 왕이신 예수께 대해서도
오해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예수의 사역이 있는 곳에
함께 있었다(마 12:28).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
은 막 1:15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참조하라.
전하여야 하리니 - '...해야 한다'(* , 데이)는 말은 예수 사역의 필연성과
긴박성을 강조하기 위해 누차 사용되었다(2:49;13:33;24:7, 26, 44).

=====4:44
갈릴리(* , 테스유다이아스) - 본 구절은 학자들 간에 논
란이 많은 부분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서 각각 '갈릴리'나 또는 '유대'로 표기되고 있
기 때문인데 특히 '유대'라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본문이 계속해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NIV 난외(欄外)에서는 '유대인들
의 땅'(the land of the Jews)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을
전달해 주려는 것 같다. 즉 '땅'(land)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고향인 팔레스틴 전부
를 의미하는 말로 전통적으로 생각되었다. 누가도 역시 이런 의미에서 '유대'(Judea)
라는 말을 사용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광의(廣義)에서 '유대'라는 말을 쓰면
그 속에서 갈릴리가 자연스럽게 포함되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셈이다. 어쨌든
예수의 이 첫번째 전도 여행 기간은 대략 4, 5개월 정도로 추측된다. 또한 당시 갈릴
리 지방에는 15,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는 큰 마을이 200개 정도나 있었고 전체
인구수는 3백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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