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누가복음

누가복음 5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1|조회수14,085 목록 댓글 0

누가복음 제 5장
=====5:1
게네사렛 호숫가 - 갈릴리 바다의 별칭이다. 이 외에도 이 바다는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구약 시대에는 '긴네렛 바다'(민 34:11;수 13:27) 또는 '긴네롯 바다'(수
11:2)로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긴네렛 호수', '디베랴 바다'(요 21:1)로 불리웠다.
이 바다는 남북의 길이가 20Km, 동서의 폭이 12Km이고 면적이 144Km에 달한다. 요단강
수원으로부터 흘러 호수를 거쳐 흘러 내려온 맑은 물과 갈릴리 바다 주변의 따뜻한 온
천수로 이루어진 이 바다에는 엄청난 양의 물고기들이 번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을
에워싸고 있는 계곡들은 비옥한 충적토(沖積土)로 덮여 있으며 날씨가 따뜻하고 물이
풍부하여 밀, 보리, 무화과, 포도, 야채 등의 농작물 재배에 아주 적합하다. 이 바다
는 하아프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는 높은 산들이 둘러 서 있으므로 바다 한복판
에서 이따금씩 돌풍 현상이 일어나곤 한다(8:22-25;막 주제 강해 4:35-41, '갈릴리 호
수 조감도' 참조). 또한 이 바다는 예수 사역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는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이 이곳이며 오병이어(五餠二漁)의 이적을 행하신 곳도 이곳 해변
가이다. 한편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는 동안에 수 많은 군중들이 그를 에워쌌다. 군중
에 둘러싸인 가운데서 예수의 말씀은 잘 전달되지 않았고 또 군중들은 예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자 자연히 소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리와 함께 서있던 예수
는 말씀을 가르치는데에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셨다.

=====5:2
호숫가에 두 배 - 예수께서는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배를 이용하기로 하
셨다. 호숫가에 배를 대고 그물을 씻는 것을 보아 그 두 척의 배는 고기잡이 나갔다가
금방 돌아온 배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배를 사용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면 그
두 배가 모두 빈배였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두 척의 배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
은 고기잡이를 나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 소득없이 돌아왔다는 결론이 선
다.

=====5:3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 호숫가는 단구(段丘)로 둘러싸인 평지였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썩 훌륭한 강론(講論)의 장소가 되었다. 따라서 예수
는 시몬의 배에 올라 시몬에게 청하여 호숫가에서 약간 떨어진 다음 배를 설교 연단으
로 삼아 무리를 향하여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렇게 함으로 1절에서보다 말씀은 훨씬
더 효과적으로 무리들에게 전달되었다. 한편 누가는 이 배가 시몬의 배라는 것을 특별
히 강조한다. 결국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헛수고만 한 사람은 다름아닌 전문어부 시몬
이었다.

=====5:4
깊은 데로...고기를 잡으라 - 시몬은 바닷가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고기잡이로 잔뼈
가 굵은 전문 어부였다. 반면 예수는 목수로서 생활해 오시던 분으로서 한번도 그물을
던져보지못한 분이었다. 그런데 목수 출신의 예수께서 무슨 연유에서인가 전문 어부인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신다.

=====5:5
말씀에 의지하여 - 예수의 말씀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해본 어부라면 누구
나가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불합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1) 예수는 고기잡이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는 목수였다. (2) 고기잡는데 최
적의 시간은 밤인데 지금은 태양이 바다에 눈부시게 비추는 아침이었다. (3) 그물을
내리는데는 적당한 깊이가 좋은데 예수는 깊은 데로 나가라고 명하신다. (4) 시몬은
고기를 잡기 위해 지난 밤을 새운 까닭에 몹시도 지쳐 있었고 게다가 깨끗하게 씻어
놓은 그물을 다시 내려 간밤의 헛수고를 다시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불합
리한점을 모두 알고 있는 시몬은 전문 어부답게 예수의 가당찮은 명령을 조목 조목 지
적하며 반박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말씀을 의지하여 그 명령에 순종한다. 시몬의 어부
로서의 경험과 지식과 경력은 예수 앞에서 바람 속의 먼지와도 같은 정말 하찮은 것이
었다. 그런 경험과 지식등이 한끼니의 양식을 해결해 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죄와 구
원의 문제는 결코 해결해 주지못한다. 사실 복잡한 삶의 정황들을 몸으로 부딪쳐가며
체득한 경험들이 현실을 살아가는데있어 중요한 노 하우(konw-how)인 것만은 분명하
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경험들과 스스로 설정한 원리나 기준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
혜를 거부케 되는 경우가 있다. 성도들의 삶이란 단순한 자연 법칙이나 합리적 상식의
선에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
역설적이고 이적적인 차원 또한 강력히 요청된다. 특히 베드로와같이 하나님의 일꾼으
로 부름받은 자는 끝없이 자기를 비우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의탁하고
순종하는 신앙 훈련을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실패, 그것은 곧 하나님
의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5:6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 순종(obediance)은 항상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하
나님께서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신다(삼상 15:22). 불합리하고 부적합한 상
황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렇다. 우리
에게 그 상황이 불합리하고 불가능해 보이고 나타난 결과가 기적처럼 느껴질지라도 예
수에게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예수께서는 고기의 있고 없음을 보신것이 아니라 시
몬의 심증을 보신 것이다. 결국 기적은 예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일 사람의 믿
음과 순종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곳에 차고 넘치게 주어진다. 한 사람의 순종이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이익을
미치며 은혜를 끼치게 된다.

=====5:7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 예수의 지시에 따라 그물을 던져 잡은 고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나게 많은 양이였다. 고기는 그 무게와 양에 의하여 그물이
터져 나갈 지경으로 많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시몬은 지난 밤에 함께 고기를
잡다가 헛수고만 한 다른 배의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도움을 청했다. 저자 누가는 이러
한 상세한 기술을 통하여 이 이야기의 확실성과 사실성을 부각시킨다. 한편 고기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 배가 잠길 지경에 이르렀다는 묘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인색
하지 않고 풍성하다는 것을 나타낸다(6:38;빌 4:19). 이러한 일련의 장면은 시몬이 사
람낚는 어부로서 부름을 받은 후에 감당할 사역들을 미리 예시(豫示)해 준다. 후에 그
는 예수 부활 승천후 말씀을 증거하고 한번에 3,000명 또는 5,000명의 회개하는 신자
들을 얻게 되는 놀라운 사역을 감당한다(행 2:41;4:4).

=====5:8
시몬 베드로 - 지금까지는 '시몬'이라는 이름으로만 언급이 되다가 이 구절에 와서
야 '베드로'라는 이름이 나온다. 시몬과 베드로라는 이름이 함께 결합되어 사용되는
경우는 본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만 나타난다. 여기서 누가가 의도적으로 베드로라는
이름을 시몬이라는 이름에 덧붙여 기록한 것은 중대한 상황의 변화를 예시하는 것이
다. 즉 베드로가 삶에 중대한 전환기(轉換器)를 맞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반석'이
란 뜻의 베드로라 하는 이름은 그가 예수를 만난 후에 예수께서 그에게 지어주신 것이
다(마 16:18;요 1:42).
무릎 아래 엎드려 - 다른 사람의 무릎 아래 엎드리거나 다른 사람 앞에 무릎을 꿇
는 것은 자신의 자아와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으로 겸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때
때로 수치로 여겨지기도 하고 비굴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여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
기도 한다. 따라서 무릎 아래 엎드리는것은 그 사람의 삶의 자존심의 마지막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종종 삶의 내용이나 삶의 질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상
황에 따라서 그것은 포로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됨이나 인간
됨을 포기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므로 무릎아래 엎드리는 것은 자신의
자아와 자존심 그리고 모든 삶을 상대방 앞에서 포기하는 것이된다. 그러나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본래 자아와 본래의 삶을 찾는 것이된다. 그것은 당
연한 회귀(回歸)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삶을 찾는 것이고 본래의
우리의 형상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내용이나 자아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본래의 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다.
현재 우리의 삶의 질그릇에 담긴 것을 쏟아 내고 하늘로부터의 것을 담아야만 한다.
대단한 역설(paradox)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포기하면서 얻어지는 것이다.
주여 - 베드로는 5절에서 '선생이여'라고 부르던 호칭을 바꾸어 이제는 '주여'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를 새로운 시
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호칭은 베드로의 예수께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말이
다. 70인역에서 '퀴리오스'(* , '주')는 하나님과 동의어로서 빈번히 사용
되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단순한 선생이란 표현보다 훨씬 더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베드로가 이순간에 예수를 신적 존재로 감지했는지 알 수 없으나 '주'로서
의 권능과 권위를 수반한 예수의 탁월성을 감지했음이 분명하다.
죄인(* , 하마르톨로스) - '죄인'을 나타내는 이 용어는 누가에
게 있어서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들 중 하나이다(7:37;15:7;19:7등). 누가에 의해
서 경멸적이 아니라 동정적으로 사용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공공연한 죄와 용납하기
어려운 직업 및 생활 방식 또는 이교도라는 신분 때문에 유대의 종교 집단에서 추방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 누가는 이런 죄인들이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한편 베드로는 예수의 탁월하신
신적 권능을 목격하고서 상대적으로 나약하고 비천한 자신의 죄성마저 돌아보게 되었
다. 여기서 우리는 (1)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이적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연의 정체
를 깨달아야 마땅하며(사 6:5) (2) 그 같은 상황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5:9
놀라고(* , 담보스) - 놀라움을 나타내는 헬라어 '담보스'는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을 뜻하며 신의 임재에 대한 외경심을 내포한 말이다. 납득할 만한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히자 시몬과 그의 동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궁극적으로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으로써만 받아들
여질 수 있는 것이다.

=====5:10
동업자(* , 코이노노이) - 이는 '공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7절에 나타난 '동무'라는 단어와는 다소 다른 뉘앙스를 준다. 특히 '교제'를
나타내는 '코이노니아'(* )라는 단어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친교' 뿐만아니라 공동 협력을 통한 상호 봉사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무서워 말라 - 이는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난 다음에 흔히 등장하는 어휘(1:13,
30;2:10)로서 베드로가 신현현(神顯現) 장면과도 같은 상황에 압도당해 있음을 나타낸
다. 혹자는 이 단어가 용서의 선포의 기능을 가진다고 한다. 베드로가 스스로 죄인이
라고 고백한 것에 대해 예수는 '무서워 말라'며 그의 죄인됨을 용서하신다.
취하리라 - 이는 궁극적으로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기위한 말이다.
70인역(Septuagin)에서는 이 말이 '위험에서 생명을 건져낸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
어 본 구절에 의미를 더욱 명확히 한다. 특히 누가는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자비
가 널리 퍼져 모든 인류에게 이른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이는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교회로 받아들이라는 환상을 보고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데까지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예시(豫示)하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행 10:9-48).

=====5:11
저희가...좇으니라 - '저희'는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말한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10절에서 이미 이
야기되었듯이 하나의 일에 있어서 공동 협력을 행하는 '코이노노스'(*
)의 삶의 태도를 말해주는 것이다. 제자의 삶은 예수 공동체의 삶이다. 이들의 결단
과 헌신은 예수 공동체를 형성하는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과 결단이 무분
별한 희생이나 복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책임을 전
가시키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물론 복
음 사역자로서의 특별한 헌신을 뜻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적용해 볼 때 모든 사회적
책임까지도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삶의 질서를 갖자는 것
이다. 즉 하나님을 우리들의 삶의 가장 첫자리에 놓자는 이야기다.

=====5:12
온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 - 구약에서 문둥병은 오늘날 정확한 의학 용어로 '한센씨
병'(Hansens Disease)이라 불리는 질병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반적인 피부병을 모두 포
괄하는말로 사용되었다(레 13:1-59). 문둥병은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무서운 병이었
기 때문에 문둥병자들은 육체적, 사회적 및 심리적으로 격리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특
히 레위기 13장에는 피부병의 일곱 가지 증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문둥병자들은 의식상
(儀式上) 부정하였므로 타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부정하다' 소리쳐야 했고, 동리 밖
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다. 랍비들은 문둥병자가 치유받는 일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보
다 더 어렵다고 여겼다. 만일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희생 제물을 바친
후 정상적인 사회로 복귀되었다(레 14:1-32). 한편 '온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a man
came along who was covered with leprosy, NIV)이라는 누가의 표현은 의사로서 병의
특성과 범위에 대하여 세심히 관찰하여 기록했음을 보여준다.
원하시면 - 이 문둥병자 역시 문둥병의 불치성(不治性)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
이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더럽고 부정한 문둥병을 치료하실 의사(意思)가 있으실까'하고 다소 의구심을 지녔던
듯하다. 즉 이 문둥병자는 주께서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은 믿고 있었으나 병
을 고칠 의사가 있는지를 몰라 의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문둥병자의
의심을 일순간에 종결시키신다.

=====5:13
손을 내밀어 - 문둥병자는 언제나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여 특별히 격리되어야 했
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예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댄 것은 의미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후에 예수께서는 관(棺)을 만지기도 하셨는데(7:14) 이것 또한 의식적(儀
式的)으로 금지된 행동이었다. 이처럼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손수만지신 것은 단순한
관심의 차원을 넘어 고통받는 이의 추하고도 뼈아픈 현실에 깊숙이 관여하시는 구세주
의 크신 긍휼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여기서 또한 중요한 것은 사회와 겪리
되어 폐쇄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부정한 문둥병자와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인 예수 자
신과의 사이에 막혀 있던 장벽을 예수께서 무너뜨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릇된 통념(通念)과 잘못된 전통들을 뒤엎어 그릇된 것을 바로 잡고 막힌 것을 허시
고 끊어진것을 이어 하나가 되게 하신다.

=====5:14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 예수의 명령은 4:41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즉 예수
는 자신이 메시야라고 공식적으로 선포되기전에 먼저 메시야로서 할 일을 하고 '희생
적 고난'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했다. 문둥병자들을 고치는 일은
감옥에서 세례 요한이 상기(想起)받은 바도 있는(7:22) 메시야적 표적들 가운데 하나
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자신이 백성들 사이에 알려지는 것을 경계하신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예수의 이러한 기적적 행동들을 보고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이 그를 정치적인 메
시야로 내세우는 것을 방지하시기 위함인 것 같다.
제사장에게...보이고 - 깨끗함을 받은 문둥병자가 자기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는
것은 레위기 4장에 규정된 의식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즉 문둥병자를 치료한 예수의 메시야적 행동이 '저희에게 증거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7:21-23의 주석 참조).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처럼 명약 관화한 메시
야적 권능을 보고서도 예수를 영접하기는 커녕 도리어 핍박함으로써, 그 완악성을 그
대로 드러내었던 것이다.

=====5: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 예수의 함구령이 복음서에 자주 나타나는 것과 함께
사람들이 그 함구령을 위반하는 사례도 자주나타난다. 실로 문둥병은 완쾌가 거의 불
가능하기 때문에 그 병에 걸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료를 포기하고 스스로 죽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그 질병이 치료되었다는 것은 만성고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는 곧 복음이었다. 한편 누가는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몰려
왔다고 강조한다. 마샬(Marshall)은 이것을 누가가 예수의 선포 활동을 치유 활동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5:16
한적(閑寂)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 NIV는 이 구절의 문장 속에 '종종'(often)이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기도하시러 가는 행동이 계속해서 반복되
었음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원문의 '엔 휘포코론'(* , '물러가
시고 있었다')도 완곡한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귀찮아서 물러가신 것
이 아니라 기도를 하시기 위해 잠시 물러가셨다가 또 다시 나오셔서 말씀도 가르치시
고 병자도 치료하시는 사역을 계속해서 반복하셨음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종종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신 이유는 한 장소에 오래 머물게 됨으로 오는 폐단을 없애고자 함이었
다고 한다. 즉 한 장소에 오래 머물게 되면 그 지역 사람들의 우상이 될 수도 있으며
예수 자신도 그곳에 안주하려 든다든지 아니면 그곳에 매일 우려가 있기 때문에 예수
는 그런 위험을 피하여 종종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던 것이다. 하지만 더중요한 점은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고 그 교제 가운데서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방향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예수의 삶의 주 원
동력이 있는 것이다.

=====5:17
바리새인 - 누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교법사)들을 언급하고 있
다. '바리새'는 '분리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파라쉬'( )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분리된 자'라고 불리워진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엄수하고 랍비들이 제정한 전통을 지켰다(막 7:3). 종교나 세속의 영역에서 세
부적인 율법 규례들을 제정한 것도 그들이었다. 이와함께 제사장없는 회당에서 바리새
인들이 평신도 예배에 끼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성전과 제사장 직제가 없어진 후에
도 바리새적인 합리주의가 계속하여 유일한 종교적 교육을 전담했다. 바리새인들은 또
한 세상의 종말에 있을 부활(행 23:6)과 천사의 존재를 가르쳤고, 부활 후에는 인간이
보상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들은 메시야적 소망, 민족주의, 반로마 제국주의를 고취하
였지만 그렇다고 열심당과 뜻을 같이 하지는 않았다. 또한 바리새인과 예수와의 반목
은 극에 달했었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율법의 교훈을 무시한데 대하여 그들
은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의 죄사함이나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도 인정
하지 않았다. 예수는 그들의 허영과 위선을 질책하셨고, 그들이 율법의 참뜻을 깨닫는
데 실패했음을 힐난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에 얽매여 한쪽 방향으로만 치우쳐 매우
극단적이고 위신적으로 변해버렸다.
교법사(敎法師) - 교법사는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나 말로 NIV는 '율법
선생들'(teachers of the law)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율법(written tradition과
oral tradition을 포함)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석학들이었다. 당
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경 연구와 율법 연구는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을 '교법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지만 바
리새인들처럼 어떤 특정한 종교적 일파를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유대의 법적
전통의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존경
을 받았다. 요 5:16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이미 충돌한 바
있으며, 따라서 그들이 예수의 행동을 책잡기 위해 일일이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은 자
연스러운 일로 이해된다.
병을 고치는...함께하더라 -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의 사역에서 치유의 사역으로 초
점을 옮기고 있다. 예수의 치유사역은 누가에게 있어서 대단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말
씀과 치유의 능력이라는 이 두 요소는 본 기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종종 구약에서
하나님은 영육간의 병을 치유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출 15:26;렘 30:17;호 7:1). 그
리고 장차 오실 메시야도 위대한 치료자로 묘사된 바 있다(말 4:2). 본문은 예수를 통
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났음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바로 그 능력을 지닌 메
시아이심을 아울러 증거한다.

=====5:18
한 중풍병자 - 중풍병은 뇌일혈로 인하여 반신 또는 팔다리 등 몸의 일부나 전체가
마비되는 증세를 나타낸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병이 죄 때문에 오는 것으로 생각한 듯
하다.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 한 사람의 중풍병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동원되었다. 환자를 메고 온 저들의 열심과 노력이 결국 환자를 치유케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들이 환자의 가족인지 친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믿음의 세계란 결코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서는 것임을 보여준다.

=====5:19
지붕에 올라가...달아 내리니 - 팔레스틴의 가옥은 대개가 휼X

=====5:20
저희 믿음을 보시고 - 확신있고 열심있는 믿음은 끝내 결실을 얻게 된다. 예수는
그 믿음에 확실히 반응하신다. 예수는 행위 보다도 먼저 믿음을 보신 것이다. '저희의
믿음'이라고 했을 때 '저희'란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을 말함이 분명하나 그 가운
데 '중풍병자의 믿음'도 포함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은 어려움에 처한 자를 돌보는 다른 자들의 중재(仲裁)에 응답하신다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남의 신앙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자들은 예수께서 그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구원은 그와 예수
사이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실제로 그가 믿음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본문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는 그를 치료하기로 선택했으며 그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자
신의 긴박한 필요성에서 절실한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예수가 그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 그가 그 명령대로 행한것은 그가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람아...받았느니라 - 예수는 여기서 자신이 죄를 사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 병
자의 죄가 '사함 받았다'(sins are forgiven, NIV)고 말한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용서의 근원임을 암시하는 겸손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주장은 옳았다. 그러나 그들의 실수는 자신들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예수의 선
언은 죄가 그의 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뜻을 내포하는 말은 아니다. 예수 당
시에는 흔히 병의 원인이 죄라고 여겼는데 예수의 제자들 조차 그러했다(요 9:2). 그
러나 본문의 문맥 속에서는 죄와 병을 연결시키는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예수
는 육신의 질병에 시달리는 병자에게 보다 근원적인 질병 곧 죄의 문제에로 관심을 집
중토록 유도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부분적인 구원이 아니라 전인적(全人的) 구원이라는 것이다. 즉 그
구원은 영적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또 육적구원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 임하는 구원은 예수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영육간의 전인
적(whole personal)인 구원이다. 예수의 치유 또한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완전한 것이다.

=====5:21
참람(僭濫) - 이것은 '신성모독'을 나타내는 말이다. 헬라어 '블라스페미아'(*
)는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대한 범과(犯過)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
한 직접적인 모독일 수도 있고(계 13:6), 그의 이름, 그의 말씀(딛 2:5), 혹은 천사적
존재(유 1:8-10;벧후 2:10-12)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죄를 사하
실 때(막 2:7), 메시야이심을 주장하실 때(막 14:64), 또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다고 주
장하실 때(요 10:30)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유대법은 이렇게 공
공연하고 명백하게 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신을 모독하는 자를 정죄하여 돌로 쳐죽이는
벌을 내렸다(H. W. Beyer, TDNT. I. 621-625).

=====5:22
무슨 의논을 하느냐 -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비상한 통찰력으로 그들의 의논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의 신적 전지
성(omniscience)의 일면을 볼 수가 있다.

=====5:23
어느 것이 쉽겠느냐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되물어보는 예수의 질문 속에 내포된
전형적인 '가언적 양도논법'(假言的 兩刀論法; hypothetical dilemma)의 뿔에 찔려 꼼
짝 못하게되었다(6:9).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와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들이 말하기에는 모두 똑같이 쉽고, 행하기에는 똑같이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언급이 표면적
으로는 더 쉽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죄사함은 반드시 외적 증거로 나타나지
않아도 되는데 반해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은 외적 증거가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물음의 핵심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하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둘다
어려울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고서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해보이는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하는 것에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데에 있다.

=====5:24
인자(* , 호 휘오스 안드로푸) - 복음서에서는 이 용
어가 90여회 나온다. 그 중 본서에만 26회 나올 만큼 인자 개념은 본서의 핵심 사상이
다. 요 12:34을 제외하고는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신 용어(6:5, 22;11:30;
마 8:20;막 14:41;요 3:14)인 '인자'가 원문의 표현상 여자적(如字的) 의미로는 '사람
의 아들'(son of man)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인자'라고 칭하신 데
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1)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관계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
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곧 그가 하나님이면서 인간의 몸
을 입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신 것을 의미한다. (2) 이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
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니엘이 이상(異象)중에 본 '인자'가 장차 이 세상에 오실 메시
야였던 점(단 7:13)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며 '네가 그리스도냐'는 대제사장들의 질문에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신 예수의 대답(막 14:62)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3) 그러나 예수께서
인자로서의 종말론적 영광을 누리기 의하여서는 그 이전에 반드시 이 땅에서의 각종
수난과 죽임을 당하여야만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다(22:42).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정녕 열 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부릴 수 있
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마 26:53) 시도 때도 없이 대적들로부터 당하는 각종 모
욕과 수난을 감내해내셨는데(4:29;11:53, 54;20:20;22:63-65;23:11) 여기에 예수께서
자기를 가리켜 '인자'라 칭한 또 다른 의미가 있다(본절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 참
조).

=====5:25
하나님께 영광을...돌아가니 - 중풍병자가 치료받은 것은 예수께서 난언한 말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풍병자에게 주어진 '일어나 걸어가라'는 명령은 하나님
의 능력이 아니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명령을 따르는 일은 신앙에
바탕을 둔 순종으로써만 가능하다. 병자가 치료를 받자 그 사람자신과 무리가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가 나타난다. 메시아의 사역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였다(2:14).

=====5:2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
리는 장면은 본서에 여러번 나타난다(25절;2:20;7:16;13:13;17:15;18:43;23:47). 따라
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누가의 중요한 목적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
다.
기이한 일을 보았다 - 원문은 '기이한 일'을 '파라돝사'(* )라 표
현하였는데 이는 '기대와는 반대되는', '기대에는 어긋나는'(contrary to
expectation)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NIV는 이 부분을 '주목할 만한'(remarkable)이라
번역한다. 영어의 '역설'을 나타내는 paradox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를 보건대
예수 주위에 있던 무리들은 예수께서 그 중풍병자를 고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
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의 기대를 뒤엎고 중풍병자를 그 즉시로 치
료하시자 무리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수는 그들의 의표(意表)를 찔렀던 것
이다.

=====5:27
세리(* , 텔로넨) -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로부터 인두세(마
22:15-22)와 토지세, 통행세 등과 같은 각종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감찰관(censor)들
을 각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돈을 받고서 위탁 형식으로 조세징수권을 유대 고
위 인사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자 유대 고위층들은 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
하여 다시금 조세 징수원을 고용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세리이다. 이들 세리도 두 부류
로 나누어지는데 곧 세관에 근무하면서 통행세와 같은 간접세를 받는 세리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인두세와 같은 직접세를 징수하는 세리이다. 아무튼 이들은 유대인들로
부터 창녀와 같은 죄인 취급을 당하였는데 그 이유는 (1) 이들이 유대를 지배하는 로
마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이고 (2) 이들이 동족들에게 그것도 가난한 자
나 부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과다한 세금을 부과하여 그 잔액을 자신들이
착복하였기 때문이다.
세관 - 가버나움에 있던 로마의 세관이다. 가버나움은 로마 군대가 상주해 있을 정
도로(7:1-10;마8:5-8) 중요한 도시였는데 특히 북쪽으로는 수리아 지방으로, 남쪽으로
는 유대와 애굽 지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한 탓에 통관세를 징수하는 로마
의 세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레위'(마태)는 이곳에서 근무하던 세관원이었다.
보시고(* , 에데아사토) - 이 동사는 관찰자가 주의깊게 보는
것, 즉 '눈여겨 보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레위를 주의깊게 살
펴보아 그를 특별히 골라 내셨음을 알 수 있다.

=====5:28
버리고...좇으니라 - 자신을 따르라는 예수의 직접적인 명령에 레위는 주저하지 않
고 즉시로 그를 따라 나섰다. 레위가 예수를 따라나선 것이 세리라는 직업을 버리고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모든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았으리라고 짐작된다. 레위의 이런 행동
은 후에 상세히 밝혀지게될 제자도(discipleship)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누가는 레
위의 행동의 두 가지 면, 즉 모든 것을 버리는 소극적인 면과 그를 따르는 적극적인
면을 모두 보여준다(9:23-25).

=====5:29
큰 잔치 - 신약성경에서 잔치는 기쁨을 상징하며, 때로는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허
베푸실 종말론적인 천국 잔치를 암시하기도 한다(13:29;14:16). 레위가 예수를 모시고
잔치를 배설한 것은 접대와 송별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또한 자신들의 옛친구들도 예
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함이었을 수도 있다.

=====5:30
세리와 죄인 - 29절에서 '다른 사람'이라고 언급된 사람들은 결국 '죄인들'이었다.
'죄인들'을 나타내는 '하마르톨로스'(* )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뿐
만 아니라,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규정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막 2:16). 바리새인
들에게 있어서 죄인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율법의 준수 여부였다. 이는 곧 율법을 지닌
사람들은 본래 거룩하며 반면에 율법 밖에 있는 사람들(이방인)은 본래 죄인임을 의미
했다. 바리새인들은 또한 그들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 즉 예수와 그의 제자들
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마 12:1;15:2)을 죄인으로 간주했다(K. H. Rengstorf,
TDNT. I, 317-35). 특히 압제자인 로마의 앞잡이로 동족의 고혈을 짜는 세리는 죄인중
의 죄인이요 극단적 경멸의 더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불경스런 죄인들과 함께 식사
를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계명의 본질적인 한 부분을 범하는 행위였다. 이들 바리새
인들은 특히 유대교적 신앙과 생활을 고수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러한 헌신의 노력으로
그들은 도덕적, 의례적 순결성에 있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분리시켰다. 여
기서 분리된 사람들은 죄인으로 간주가 되어 반드시 정결 예식을 거쳐야만 하는 사람
들이었다. 그중 갈릴리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 제시하는 그러한 율법의 조항들을 경멸
하고 무시한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먹고 마시느냐 - 바리새인들이 특별히 먹고 마시는 행위에 대해 비난한 것은, 식탁
에서의 교제가 그들의 사회에서는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해주는 행위이기 때
문이다.

=====5:31
건강한 자에게는...쓸데 있나니 - 예수는 속담이나 비유를 만들어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퍼져있던 속담이나 비유를 지혜롭게 사용하셨다. 이 구절에서 '건강한
자'와 '병든 자'의 대비는 32절의 '의인'과 '죄인'의 대비와 연결된다. 한편 영혼의
의사로 이 땅에 오신 예수는 아픔을 호소하는 모든 병자를 진단하시고 치료하신다. 그
러나 의사의 몫까지 자처하여 스스로를 건강한 자로 진단내리고 처방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예수의 처방이 적용되어질 수 없었다. 오직 그들에게는 자신의 오진
(誤診)으로 인한 죽음의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5:32
죄인을...왔노라 - 예수께서 이같이 말씀하신 것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
새인들을 책망하시기 위함이었다. 사실상 그들의 의인인체하는 태도는 스스로의 무지
와 잘못을 폭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실상 이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롬 3:10).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물리치시
며 자신의 무가치함과 구원의 필요를 깊이 느끼는 자들에게 구원의 초대를 하신 것이
다. 따라서 예수의 구원의 초대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진실된 회개가 필요하다. 결론적
으로 예수의 말씀의 요지는 누구든지 회개에의 호소에 진실로 응답하려면 먼저 죄인임
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행구절인 마 9:13과 막 2: 17에는 빠져있는 '회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는 예수께서 인용한 속담의 신학적 의미를 밝혀준다. 또한 이
'회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도입한다. 그것은 은혜와
용서의 복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은 사실이지만(2:10) 그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
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18:13, 14에 나오는 세리는 이런 전제조건을 충
족시켰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다(18:11, 12). 한편 본 구절의 '회개'라는 주
제는 15:7, 10, 22-27, 32에서 '기쁨'이라는 주제와 연결되고 있다.

=====5:33
금식하며 기도하고 - 예수 당시에 금식은 아주 일반화되어 있었다. 원래 유대 민족
은 금식을 속죄일(7월 10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시하였다(레 16:29). 이것은 히브리
어로 '이나 네페쉬'( , '영혼을 괴롭게 하다')라 하여 율법으로 엄히 명
한 것이었다. 이외에 유대인들은 금식을 국가적 재난이나(삿 20:26), 병들었을 때(시
35:13), 애곡할 때(삼상 31:13), 회개할 때(왕상 21:27), 위험이 임박할 때(대하
20:3), 재앙을 기념할 때나 기근때에 실시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은 바벧론 포로생활
당시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없었던 결과로 자신들이 당한 재앙에 대한 애도와 회개의
뜻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의미에서 금식을 시작했다. 이 금식은 예루
살렘 파멸과 관련하여 나흘을 했는데 (1) 성전이 불탄 날(5월 7일 ;왕하 25:8, 9),
(2) 그달리야 피살일(7월 2일;왕하 25:23-25), (3) 성전 포위 개시일(10월 10일;왕하
25:1), (4) 성전 함락일(4월 9일;왕하 25:3, 4)등 이었다. 이 외에도 바리새인들은 일
주일에 두 번 즉,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목요일과 그것을 가지고 내려온 월요
일을 기념하여 금식일로 지켰고 경건한 사람은 더 자주 금식했다(외경 유딧서 8:6).
그러나 이 금식의 의미는 갈수록 개인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과시 행위로
전락하여 외적인 자기 과시와 위선이 많이 개재되어 예수의 질책의 대상이 되었다(마
6:16;9:14)예수는 강제적이고 의식적인 성격을 띤 자기과시나 종교적 공적을 쌓는 행
위로서의 금식을 단호히 배격하시고 금지하셨다. 예수께서도 금식을 하셨지만 그것은
자발적 형태로서의 영적 훈련으로 실시하셨던 것이다(마 4:2;6:16-18).
바리새인의 제자들 -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 관한 언급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언급
된다(7:18;11:1;막 6:29;요 1:35, 37;:25). 그러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이라는 표현은
약간의 문제가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당시 대다수의 랍비들처럼 제자
들을 두지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요세푸스와 렝스토르프의 견해처럼 '바리새인의 아들
들'이라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때때로 '예언자의
아들들'(왕하 9:1, 개역성경에는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로 표현)이라는 표현을 '...
의 제자들'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바리새인
들의 가르침과 교훈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이다.
먹고 마시나이다 - 예수께 바리새인들이 하나의 질문 형식으로 묻지 않고 사실을
말하는 형식으로 묻는 것은 교묘한 질문 방식이다. 30절에서 대적들은 예수께서 '죄인
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비난하였으며 이에 대해 예수는 당신의 오신 목적이 바로
죄인 구원에 있노라고 대답하셨다(31절). 이제 여기서는 대적들이 '먹고 마시는' 일
자체를 가지고 비난하고 있다. 특히 대적들은 예수의 제자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반대 입장에 둠으로써 예수를 배타적으로 소외시키려 하고 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인
간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요 그 자체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특정한 날을 정하여 금식하는 형식적행위에 연연한 나머지 그러한 정해
진 틀에 얽매이지 않으시는 예수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금식에 관한 형
식적 틀을 초월하셨으며 진정 필요할 시에는 금식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35절;마
9:15).

=====5:34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신랑이라는 표현은 흔히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사 54:5, 6;렘 2:2;겔 16장;호 2:16, 19). 이와 관련
하여 예수는 자신이 세상에 있는 것을 혼인잔치와 비교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와
교회와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써 비교한다(마 25:1;요 3:29;고후 11:2;엡
5:32;계 19;7;21:9).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보통 일주일 동안 베풀어졌다. 이 잔치 마
지막 날 신랑의 들러리를 맡았던 친구들은 신랑을 신부방에 데려다 주고는 잔치집을
떠난다. 이 일주일 동안의 잔치는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매우 요란하고 화려하게 치러
지기 때문에 이때 금식일이 닥치어도 금식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신랑을
신부방에 데려다 준 연후에 집에 돌아와서 금식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실로 금식은 강
제적이고 형식적 절차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점을 경고
하셨다. 그가 함께하여 자비로운 사역을 베풀고 생명과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현
재는 결혼 잔치와 같은 기쁨과 행복의 순간이기 때문에 금식하며 슬퍼할 필요가 없다
는 것이다. 즉 금식의 실행 여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결정된
다.

=====5:35
신랑을...금식할 것이니라 - 예수는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결혼식을 비유로 들어
금식에 관한 자기의 뜻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결혼식에서 신랑이 죽을지도 모른다
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다소 어색한 일이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따르면 이
는 위경 제4에스라 10:1에 나타나는 사상으로 "내 아들이 결혼식장에 들어가 죽임을
당한다. 이로써 나는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며 내가 죽을 때까지 슬퍼
하며 금식하기를 작정하노라"는 내용이다(Jeremias, Theology I, 283). 이러한 사상을
예수께서 염두에 두었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으나 어쨌든 이 비유는 분명히 예수가 죽
어서 제자들과 이별하게 되어 제자들이 금식하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5:36
비유(譬喩) - 이 단어는 '곁에', '옆에'를 나타내는 '파라'(* )라는 단어와
'두다', '놓다'라는 뜻의 '발로'(* )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옆에 두다', '정
도를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특히 수사학에서는 '유사', '비유'라는 뜻을 나타
낸다. 비유는 친근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상 생활 중 많이 접하는 친근한
것들을 예로 들어 비교한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마솰'( , '비유')을 번역한
것인데 지혜문학에서 이 단어는 현명한 말을 나타내며, 생활로부터의 본보기, 신중함
과 정중함의 원칙들, 직업적인 충고, 도덕적 훈계들, 종교적인 지도들을 포함한다.
또한 묵시문학에서 비유들은 종말론적 가르침을 주는 방법들이다. 지상의 사건들은 하
늘의 사건들을 설명해 준다. 하늘과 미래의 신비들에 대한 환상(심판, 부활, 축복받은
자들의 거처)도 역시 비유들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는 물론 많은 비유를 베푸셨
는데, 이 비유는 알려지지 않은 것(그 나라, 하나님의 본성과 행위) 안에 있는 새로운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알려진 세계의 분명한 진리를 사용하는 유비법(類比法)이다.
막 4:33, 34은 예수께서 사람들이 이해하는데 더디기 때문에 비유들을 많이 사용한다
고 언급한다.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본성과 일, 인간의 운명 등을 취급한
다. 랍비들의 비유나 율법을 상술하지만, 예수의 비유들은 대부분이 종말론적(묵시적
은 아닐지라도)이다. 대부분의 예수의 비유들은 교훈적인 문맥으로 짜여져 있으나 어
떤 것들은 베일 뒤에 있는 메시지를 찾아내도록 청중을 자극한다(막 12:1). 그의 말씀
은 제자들에게는 빛이요 구원이지만, 응답하지 않는 대중들에게는 어두움이요 심판이
다. 그들은 동일한 말을 들으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 6:9, 10의 예언 아래 있게된
다.
새 옷에서...합하지 아니하리라 - 여기서 또다시 새 옷과 낡은 옷이 대비를 이루어
나타나고 37, 38절에 가서는 낡은 가죽 부대와 새부대가 대비되어 등장한다. 이는 누
가의 독특한 기술 방식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의 의미의 선명성 부각에 적절한 효
과를 나타낸다. 한편 '새 옷'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낡은 옷'은 유대주의를 가리키는
말로서 율법을 오해하여 가르친 유대주의와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로 합쳐질 수 없음
을 나타낸다. 특히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폐단은 복
음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시키기까지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내어 낡은 옷에 붙이면 새 옷 자체를 버리게 됨은
물론이고, 또한 빨면 새 옷 조각이 줄어들어 낡아빠진 헌 옷을 잡아당겨 뜯기게 만든
다는 것이다. 이처럼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시키는 유대주의자들과는 반대로, 예
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어 그것을 완성하
기 위해 오셨다(마 5:17).

=====5:37
낡은 가죽 부대 - 고대 사람들은 동물의 가죽으로 부대를 만들어 그 속에 여러 가
지 액체를 보관하였다. 이 가죽 부대는 동물을 잡은 후 머리 부분과 다리 부분을 잘라
내고 그 가죽을 벗겨낸 다음 털이 나있는 쪽을 바깥쪽으로 하여 목 부분만을 제외하고
모든 구멍을 꿰맨 다음 가죽에서 기름기를 제거하고 일정 기간 손질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팔레스틴은 물론 유럽, 남미에서 최근까지도 사용되던 방법이다. 한편 이 가죽
부대는 오랫동안 사용하게 되면 주름이 잡히며 그 탄력성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발
효력이 강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게 되면 새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발생하
는 강하고 독한 가스가 가죽 부대를 부식시켜 그 부대를 이내 터뜨리고 만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항상 새 가죽 부대에 담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경우 그 부대가 이내 터져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부대도 못쓰
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새 포도주'는 예수의 가르침을, '낡은
가죽 부대'는 유대교의 형식주의롤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의 은혜로운 가르침이 형식
위주의 율법의 낡은 형태 속에 담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이와 같은 사
실을 비유로 사용하신 직접적인 이유는 유대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이며 기쁨이 없는
금식은 그의 구원에대한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5: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원칙론적으로 유대교
의 형식주의적 의식과 종교 체제로서는 생명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을 담
지 못함을 가르시기 위해서였다. 원어상 (1) 새옷, 새 가죽부대에서의 '새'(*
, 카이노스)는 '질(質)과 그 신선함'을 강조하고 (2) 새 포도주에서의 '새'(*
, 네오스)는 '시간'을 강조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비유한 본문의 '새 포도주'
를 (2)의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우리는 옛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넘어가는 시간적 추
이를 보게 된다. 예수는 옛언약을 온전히 성취시키는 완성자로 오셨고, 그로 인해 모
든 것이 새로워졌다. 이제 예수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정신과 생활 방식을 요한이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따르는 낡고 형식적인 종교 형식으로는 보존될 수 없다. 발효력
이 강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할 수 있는 것 같이 역동적 생명이
신 예수와 그 복음의 수용을 위해선 이미 고착화된 낡은 형식주의적 신앙 형태가 아닌
신선한 새 부대 즉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 심령과 새로운 신앙 형태가 요구되는 것이
다.

=====5:39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 여기서 예수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논지를 뒤집는 것이
결코 아니다. 즉 그의 새로운 교훈이 옛 것만큼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의 강조점은 옛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면서 옛 것을 원하고 새 것을 배척하는 경향이
사람들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항상 묵은 포도주만 마시던 사람들은 새 포도
주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묵은 포도주만을 고집하며 새포도주를
무시하며 거부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낡은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진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통하여 전해지고 제시되는 새로운 영생의 진리를 느끼
지를 못했다. 새로운 영생의 진리를 맛보며 새복음에 참여하려면 새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옛 종교에 언제까지나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께서는 율법을 통해 형식주의에 빠진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 대하여 율법
이 계시한 그 메시야가 곧 당신 자신임을 드러내셨으며 자기를 통해 성취될 새 언약으
로 돌아오길 촉구하셨던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