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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 7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1|조회수13,931 목록 댓글 0


누가복음 제 7장
=====7:1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 이 구절에서의 두 동사 '듣다'와 '행하다'는 47절에 언
급된 세 동사와는 대조적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나아와' 진정으로 그리스도와의 일
대일 만남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 말씀을 듣는 일도 행하는 일도 제대로 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 경우에 설령 예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세상에 흔한
윤리적 교훈 중의 하나정도로 여길 따름이며 그 속에 내포된 생명력있는 진리를 깨우
치지 못하므로 실천적 행동이 뒤따르지 못한다 할 수 있다.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 마태는 '모래 위에'라고 한다(마
7:26). 모래가 흙보다 더 나쁜 상태를 나타내긴 하지만 흙이라고 그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집이 주초 없이 지어졌다는 점에서는 둘 다 곧 무너지고 파괴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탁류가 부딪히매...파괴됨이 심하니라 - 탁류가 흘러 내릴 때 '반석 위에 지은 집'
은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져 내릴 것임에 분명
하다. 이 구절은 종말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구절로서 환난과 시련은 모든 사람에
게 임할 것이며 그때 믿음이 없고 견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환난과 시련에 멸망하고
말 것을 나타낸다. 한편 여기서 '탁류'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는 여러 시련과 궁
극적으로 맞게 될 마지막 시험을 의미한다(고전 3:11-15).

=====7:2
백부장 - 본래 백부장이란 백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하급 장교를 말한다. 요세푸스
(Josephus)에 의하면 본문에 언급된 백부장의 군대는 여러 국적을 가진 외국인들로 구
성되었고 헤롯 안디바의 봉급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또 폴리비우스(Polybius)는 백부
장의 지위에 대해서 말하기를 지휘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군대에서 가장 우수
한 사람이 백부장의 지위에 선택되었다고 진술한다. 따라서 이 직책에 있는 사람에게
는 분명히 성실성과 지도력을 겸비한 인격이 요구되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소개된
백부장들이 모두 인격자였다는 것과 일치한다(23:47;행 10:22;22:26;23:17;24:23). 이
백부장이 반드시 이방인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께 보
내었던 것(3절)과 예수의 말씀(9절)이 그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사랑하는 종 - 마태는 '아들'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파이스'(* , '하
인')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하여(마 8:6) 누가는 분명히 '둘로스'(* ,'종')
라고 표현한다. 이 단어는 '종' 또는 '노예'를 가리키는 말로 생명에 대한 결정권이
자신에게 없고 주인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종과 상
전이라는 신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장로를 손수 찾아가
예수께 부탁을 올릴것을 간구한 사실은 이 백부장의 종에 대한 강한 애정을 반영한다.
아울러 이 종이 그의 상전인 이 백부장을 얼마나 성심 성의껏 섬기며 봉사했는가를 반
증하기도 한다.

=====7:3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 마태는 '백부장이 나아와'라고 말한다(마 8:5). 반면
여기에는 백부장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들을 보낸 것으로 말한
다. 이것은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마태는 요약적인 내용만을 기록하고 있는 반
면에 누가는 일어난 일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유대인의 장로들을 택한 이유는 자신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와 잘 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셔서...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 '구원하시기를'(* , 디아소세)이
란 폭풍같은 상황 속에서도 안전하게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에는 그
종의 생명이 몹시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라는 의
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 백부장이 구원을 요청하는것은 예수께서 죽어가는 자신의
종을 구원하여 건강하게 소생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전제로 한 것이다. 여기에 백부장
의 겸손하면서도 확고한 믿음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이방 죄인으로 여긴터라 감히 예
수께 직접 나아가 간구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음이 분명하다.

=====7:4
이에...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접촉을 꺼리며 그들과
의 접촉을 부정한 것으로서 간주했다. 특히나 자신의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로마인들
과의 접촉은 더더욱 기피했었다.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장로들이
이 백부장에게 매우 호의적(好意的)이었다는 사실에서 유추해 보건대 이 백부장이 평
소 유대인들에게 베푼 선행이 엄청났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대인의 장로들은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위해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또한
예수께 가서도 간절히 간청하였다. '간절히'란 원어상으로 보건대 서두름을 의미하는
말에서 나왔는데 시간에 쫓기는 상태에서 열렬히 무엇을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
로 이는 장로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백부장의 종을 위해 시간을 다투어 예수께 열심
히 간청한 것을 나타낸다. 또한 '구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파레칼룬'(*
)은 미완료형으로서 간구하기를 시작한 후 계속하였다는 의미이다. 따
라서 장로들의 간구가 단순히 한 두 번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응답이 있을 때
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7:5
저가 - 이 구절은 앞에서 장로들이 백부장을 '합당하다'고 말한 이유를 설명한다.
원래는 '가르'(* , '왜냐하면')가 들어 있으나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다. '저
가'(* , 아우토스)는 문법적으로 '그 자신이'란 의미다. 따라서 이 말은 회
당을 짓는데 있어서 그가 완전히 그 자신의 재산으로 지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 당시 로마 군관들은 일반적으로 교만하고 백성을 압제하여
재물을 탈취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유대인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전하는 자료에 따르면 이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이들
을 위해 회당을 지어 주었으며 또 유대인들에게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따라서
장로들은 백부장을 위해 그의 종을 살려주어도 될 만한 자격과 가치가 그에게 충분히
있음을 예수께 강조하였다. 백부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회당을 지었는지 아
니면 당시의 종교적인 관습을 따라서 지도자로서 회당을 지어 희사(喜捨)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백부장의 태도로 보아 일단의 신앙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7:6
주여 - 이는 단순한 호칭의 의미보다는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할 때(9절) 신앙 고백
적 측면까지 내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 백부장은 경건한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큰
거리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꺼려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비록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위대하
신 능력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대하신 분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치 못할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의 겸손한 신앙심을 표현해 주는 말이
다. 또한 그는 예수의 놀라운 신적 권능을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굳이 몸소 집을
방문해 주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7:7
말씀만 하사 - 이를 직역하면 '한 마디 말씀만 하시면'이다. 그는 예수의 말씀의
능력을 믿은 것이다.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신체적인 접촉을 한다거나 환상을 보는 따
위의 외적 증거를 넘어선 것이었다. 백부장은 종으로 하여금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도
록 하지도 않았고, 예수의 몸이 닿은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예수의 말씀 한 마디면 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사실 그의 믿음대로 예
수는 한 마디 말씀으로써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고(11-16절) 풍랑을 잔잔케도 하셨
다(8:22-25). 예수의 말씀은 태초에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었다(창 1:1-31).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2절에서는 '종'(둘로스)으로 표현되었으나 여기서는 '하
인'(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스'는 '아들'을 지칭하기도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는 장로들과는 달리 백부장이 그 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그
종을 아들과 같이 여겼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백부장은 아들과 같은 하인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예수께 간절히 간청하였던 것이다.

=====7:8
저도 - 원문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있어서 백부장이 예수께서 말씀으
로만 그 종을 치료하시리라고 생각하게 된 뚜렷한 이유를 드러낸다.
남의...사람이요 - 백부장은 자신의 위치를 설명함에 있어서 자신의 부하를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고 우월성을 강조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자신이 남의 수하(under
authority, NIV)에 있음을 먼저 드러내는 겸손함을 취하고 있다.
이더러...하나이다 - 백부장은 자신의 군대 생활의 경험을 예로 들어 실제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지금까지 명령만 하면 자신이 직접 행동하지 않아도 그 명령에 따라
원하는 것이 그대로 실행되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도 어떤 권위
로 말씀만하시면 그것이 능히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 백부
장은 유대교에 익숙하였던 관계로, 하나님의 명령에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순종했던
천군 천사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 말을 하였는지 모른다(왕하 6:17;시 34:7;68:17;103:
20;마 26:53). 어쨌든 군대의 상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신적권위를 가진 예
수와 연약한 인생인 자신이 영적상하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으며, 권위 아
래에 있는 자신이 그 수하 사람들을 복종케 할 수 있다면 하물며 신적 권세를 가진 예
수께서 못하실 일이 없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예수는 하늘과 땅에 속한
권세를 지닌 주권자이시다(요 17:2).

=====7:9
예수께서...기이히 여겨 - 예수께서 이상히 여기신 것은 오직 두 번 기록되었는데
한 번은 믿음이 있음을 보신 후였고, 또 한 번은 믿음이 없음을 보신 후였다(막 6:6).
예수께서 기이히 여기실 정도로 백부장의 믿음이 위대했던 것은 앞에서도 지적되었다
시피 다음 세 가지 사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1)그의 겸손함(humility)이다. (2)
예수의 말씀의 권능을 확신한 사실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요 4:50에서도 발견된다.
(3)예수의 신적인 신분에 관한 남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그의
겸손함이나 말씀의 권능 확신 등에 대한 기본적인 근거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만나보지 못하였노라 - 이 말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탄이 아니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미 믿음을 찾으셨기 때문이다(5:20;마 8:2,3). 예수께서 놀
라신 것은 그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능가하는 위대한 믿음
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헬라어 원문 중에 쓰인 부사 '우데'(* )는
'...조차도...않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인 구약성경을 늘상 접하며 여호와 신
앙에 삶의 기반을 두는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방인만한 믿음
을 가진 이가 아직 유대인 중에 발견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시는 예수의 책망을 떠올
리게 한다. 아울러 이는 선민들조차 갖지 못한 귀한 믿음을 이방인 백부장이 지녔던
사실을 한층 강조해 준다.

=====7:10
집으로 돌아가...강건하여졌더라 - 마태는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마 8:13)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께서 아무 말
씀도하지 않고 다만 보냄을 받았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건강해진 것
을 보았다고 한다. 이는 치료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종이 죽음의 문
턱에까지 이를 정도로 심각했던 중풍병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인처럼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였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이적적 치료 행위를 통해서 예수의 메
시야성은 밝히 드러났으며 아울러 예수의 사역은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을 향하는데
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11
나인이란 성 - '나인'(Nain)은 '즐거움'이란 뜻이며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나
타난다. 이 성의 위치는 나사렛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수넴(Shunem) 지방과
모레 언덕(the Hill of Moreh) 사이의 작은 헬몬산(little Hermon)의 비탈에 위치하고
가버나움에서는 남서쪽으로 약 40km쯤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 성에서 엔돌(Endor)
방향으로는 약 10분쯤 거리에 묘지가 있다. 한편 '나인' 성은 오늘날까지 '네인'
(Nein)으로 불리우는 작은 마을로 현존한다. 그 당시 이곳으로 올라가자면 좁은 급경
사로 이루어진 지대를 통과해야만 했는데, 그 길 양편에는 무덤같은 굴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바로 이 지점 부근에서 예수께서는 나인성 과부 아들의 장례 행렬(葬禮行列)
과 마주치셨다. 아마 그 지역의 사람들은 엘리사가 행했던 기적을 회상하고 있었을지
도 모르는 일이다(왕하 4:8-37).

=====7: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 이 성은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벽에 나 있는 큰
문을 통해 들어갔다. 보통 성문 근처는 성 주민들의 집회 장소로서 정규적인 화합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죽은 당일에 장례
를 치르었다. 그리고 묘지는 보통 성 밖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지금 성문
근처에서 모였던 장례 행렬이 성 밖의 묘지를 향하여 가고 있을때 예수의 일행은 성문
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장례시에 두 명 이상의
피리부는 사람과 한 명 이상의 호곡(號哭)할 여자를 고용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
서 '사람들'이란 단순히 시체를 직접 운구(運柩)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곡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까지 포함된 것이다.
이는 그 어미의...과부라 - 여인이 과부라는 사실은 그 가정의 비참한 경제 생활을
입증한다. 1세기 당시에 여자가 자기의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
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마지막 소망이었던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엄청난 상심에 빠졌음을 나타낸다. 한편 이 성의 주민들은 그전에도 이미 이 여인을
위해 죽은 사람을 한번 운반해 주었을 것이다. 그 죽은 사람은 물론 이 과부의 남편이
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여인은 하나밖에 없는 장성한 아들을 장사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독자요', '과부라'라는 말은 이 여인의 참담한 심경을 더욱 강조하며
잘 묘사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성의 많은 사람이 장례 행렬에 동참했다는
것은 그 동네 사람들이 과부에게 참된 동정을 표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7:13
주께서(* , 호 퀴리오스) - 여기 사용된 '주'(主)라는 칭호는 예수께
서 죽음을 다스리시는 권세있는 '생명의 주'이심을 나타낸다.
과부를 보시고 - 본문은 예수께 그 상황을 알리거나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께서 스스로 비통해하는 여인에게 위로의 눈길을
보내고 계신다.
불쌍히 여기사(* , 스플랑크니조마이) - 예수께서 이적
을 행하실 때 그 원동력은 사랑과 동정이었다(마 14:14;15:32;20:34). 이 헬라어 '스
플랑크니조마이'의 원래 뜻은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뜻한다. 즉 과부의 슬픔을
목격한 예수께서는 속내장까지 뒤틀리는 듯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다는 의미다. 그
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께서 과부의 슬픔을 보시고 얼마나 큰 동정과 사랑을 보내셨는
가를 보여 준다. 또한 이러한 긍휼은 본 이적의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믿음을 보시고 이적적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했으나, 본문의 경
우처럼 믿음의 유무를 보기 전에 고통당하는 인생에 대한 긍휼의 동기에서 먼저 은혜
를 베푸신 경우도 종종 있었다(마 15:32;20:34;막 1:34;8:2). 그리고 이는 곧 죄많은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구체적 실례이다. 하
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요 원수된 상태였을 때 독생자 예수를 대신 죽으시게끔 하
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 지으신 것이다.
울지말라(* , 메 클라이에) - 현재 명령법으로 '울음을 그치라'는 뜻
이다. '울다'는 동사는 두 가지가 있는데 '클라이오'(* )와 '다크뤼오'(*
)이다. 전자는 '흐느껴 우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
는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부는 지금 독자의 죽음에 슬퍼하고 비통해 하면서 매우
흐느끼며 울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7:14
가까이 오사...대시니 -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관에 손이 닿으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레 22:4;민 19:11). 왜냐하면 죽음은 곧 죄의 결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랑의 법으로 이 율법을 초월하셨다. 여기서 '관'(* , 소
로스)은 호머(Homer)의 글에서 나타난 바대로 원래 죽은자의 유골이나 재를 넣어 두는
항아리를 의미했으나 나중에 시체를 넣는 함을 뜻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
면 시체는 세마포로 감싸고 얼굴은 손수건이나 수다리움(sudarium)으로 덮어서 뚜껑이
없는 관에 넣었다(Josephus).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체에 대한 고정 관념에도 불
구하고 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셨음은 과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시고 과부
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의 사랑이 이런 율법의 문자적 이해를 뛰어넘었음을 뜻한다.
일어나라 - 예수께서는 지금 죽어 있는 청년에게 마치 그가 듣고 순종할 수 있는
것처럼, 즉 지금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말씀하시듯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사는 본문을 포함해서 세 번 나타나는 데 그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8:54;
요 11:43). 성경의 몇몇 인물들이 죽은자를 살렸던 경험이 있지만(왕상 17:21;왕하
4:35;행 9:40;20:10)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그러한 이적을 행했다. 그
러나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직접 사용하시어 '일어나라'고 명령하신다. 이
는 예수께서 음부의 열쇠를 지니고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단적 실례이다(롬 8:2;고후 1:10;딤후 1:10).

=====7:15
죽었던 자가...하거늘 - 누가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증거로 '일어 앉고
말도 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종말론적인 한 암시를 볼 수가
있다. 즉 세상 끝날 성도의 부활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이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을 얻을 것에 대한 간접적인 암시를 보게 된다.
예수께서...주신대 - 그 과부를 향한 예수의 사랑과 동정이 얼마나 크셨는지 분명
히 나타난다. 이러한 행동은 왕상 17:23의 엘리야의 그것과 유사하다. 예수는 소생한
청년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대신 그 불쌍한 여인을 잘 봉양하도록 당부하셨을 것
이다. 이제 이 과부에게는 더 이상의 비애와 고통이 없고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과 자
비로우신 예수를 만난 희열로 가득했을 것이다.

=====7: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 누가는 또다시 백성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5:26;18:43;23:47). 무리들은 이 이적이 하나님의 권세로 이루어진줄을 믿었으므로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영광을 돌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독사존'
(* )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예수의 크신 권능에 압도당한 무리들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사실을 나타낸다.
큰 선지자가...일어나셨다 - 전에는 보지 못한 큰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예수를
한 위대한 선지자로 보았고 이런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께 대
한 이 칭호가 비록 적합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는 그 무리들이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최대의 경칭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 대해서 선지자라는 칭호를 사용한 직
접적인 동기는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구약의 선지자가 행한 일(왕상 17:21;왕하
4:35)과 같은 일을 행하신 데 있었을 것이다. 무리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부터 약
4세기 동안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닌가하고 생
각했으나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시
기 시작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백성들의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로마의 압
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당시
부터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야관
은 현세적이며 또한 민족주의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데에 큰 문제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돌아보셨다 하더라 - 이 말은 구약에서 여러 번 나오며(룻 1:6;삼상
2:21) 축복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하고 또한 심판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었다. 원
래 '돌아 보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의사가 왕진하여 환자를 치료할 때 쓰는 동사
'에피스켑토마이'(* )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이 오랜동안의
침묵을 깨고 이제 이 큰 선지자를 통해 다시 그들을 방문하여 상하고 연약한 부분들을
치유하러(말 4:2)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

=====7: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결과 무리들이 하나님을
찬양한 바 곧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는 것과 관련된 소문이다(Meyer).
당시에 백성들이 순수하게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기
에는 아직까지 그들의 믿음이 너무 어렸으므로 그들은 예수의 놀라운 치유 이적을 목
격하고서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 이것은 유대 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
땅 전체, 즉 실질적인 팔레스틴을 말한다(1:5). 물론 유대 지방이 예루살렘을 중심으
로 한 남방 지역을 가리키지만 성경에서 보통 '온 유대'라고 했을 때는 팔레스틴 전역
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인 성'은 갈릴리에 속한 자그마한 마을이었으나 죽
은 자를 소생시키신 예수의 위대한 권능은 소문의 꼬리를 물고 각처로 퍼져 나갔다.

=====7:18
요한의 제자들이...고하니 - 마 9:14;요 3:26 등으로 비추어 보건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를 따른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베드로를 위시한 열 두 제자들처럼 철
저하게 예수를 따르지는 못했으며 세례 요한의 제자 출신이라는 생각을 늘 지니고 있
었던 것 같다. 또한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들이 감옥 밖에서 되어가는 일들, 특히 예
수의 활동에 대해 세례 요한에게 수시로 알려주었음을 알 수 있다.

=====7: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 그 당시 세례 요한은 헤롯이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
아와 저지른 불륜의 관계를 책망하고 또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에 대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다가 헤롯에 의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헤롯은 자신의 부정에 대한 요한
의 책망을 괘씸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많은 백성들이 그의 교훈과 회개의 세례에 동조
하며 따르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끼며 자신의 정치적인 위상(位相)에 도전이 된
다고 판단하여 그를 투옥하게 되었다(3:18-20). 이로 인해 옥에 갇힌 요한은 제자들을
통해 외부의 소식을 들으며 예수의 활동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요한은 자신
의 사명이 곧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행
적에 대한 관심이 그 누구보다 컸다 하겠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 '오실 그이'는 메시야를 의미하는데 이 칭호는 시
40:7;118:26;단 7:13등에서 유래한다. 원문에 의하면 '당신'(* , 쉬)이 강조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요한은 감옥에 있는 동안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한
다. 즉 요한은 예수께서 진정 메시야라면 빨리 어둠의 세력을 멸하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요한은 옥에 그대로 머물렀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대적하기까지 했다. 바로 이때에 요한은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정말 메시야인지를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나오실 때 성령을
통해서 메시야이심을 깨달았다(마 3:13-17).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제자들이 예
수께 나아가는 것을 보고서도 제지하기는 커녕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며 오히려 예수께로 적극적으로 인도하였다(요 3:30). 따라서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는 요한이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하여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그
가 메시야인지를 다시금 확인했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물론 오랜 옥
살이에 지쳐 예수의 사역에 대해서 의심이 일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즉 요한은 유대
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헤롯과 같은 악한 세력을 제거
하여 이스라엘에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 줄 메시야를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혹자는
요한의 제자 파송이 예수의 권능과 명성을 시기하는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듣게 하여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보기도 한다(Clavin,
Jerome). 어쨌든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은 그가 참수형을 당하는 그 순
간까지 그의 사역에 충실했다. 그가 옥중에서 예수의 메시야성을 오해하거나 의심했었
다 할지라도 예수께서는 그를 인정하셨으며 그의 사역을 극찬하셨다.

=====7:20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하더이다 하니 - 요한의 보냄을 받은 두 명의 제자가 예수
께 나아가 요한의 지시대로 질문하였다. 여기 사용된 의문형은 화제에 주목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러한 용법은 신.구약을 걸쳐 많이 사용되고 있다(창 32:27;33:5;삼상
24:16;요 1:19,25;4:11,12;6:5 등).

=====7:21
예수께서...많이 고치시며 -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이유는 먼저 그들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 때문이었다. 예수는 병자들을 치유한 대가나 칭송을 받으려하신
적이 없으며 어떤 특별한 조건을 제시하기 이전에 병마에 신음하는 인생에 대한 연민
자체 때문에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아울러 이런 치료 행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그곳에서는 애곡하는 것이나 질병이나 고통이 없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암시가 들어 있고 따라서 이러한 치료 행위에 나타나는 그의 이적적 권능을 통해 그가
메시야임을 증거하시고자 하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

=====7:22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왔을 때 병고치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들의 질문에 대답
하신 것으로 보인다. 마태는 현재 시제로 '너희가 듣고 보는 것'으로 말하는데(마
11:4) 여기서는 부정 과거형으로 말한다(NIV역은 완료형으로 번역되었다). 누가가 여
기에서 과거형으로 기록한 것은 예수의 병고치는 일과 지금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
신 시차를 분명히 하려는 정밀한 표현으로 보인다.
요한에게 고하되...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예수께서는 여기서 구약의 예언을 인용
하여 말씀하신다(사 35:5,6;61:1). 이 여섯가지 표적들은 모두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이적으로 유대인들이 구하는 것들이었다(고전 1:22). 따라서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
들의 질문에 직접 답하는 것을 피하고 이와 같은 표적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자신이 메
시야임을 확증하신 것이다. 본절과 관계된 구약의 예언은 다음과 같다.

+--------------------------------+---------------------+-----------------------+
| 내 용 | 예 언 | 성 취 |
+--------------------------------+---------------------+-----------------------+
| 소경이 보며 | 사 29:18;35:5 | 마 15:31;막 10:46-52 |
+--------------------------------+---------------------+-----------------------|
| 앉은뱅이가 걸으며 | 사 35:6;61:1 | 마 15:31;행 3:6 |
+--------------------------------+---------------------+-----------------------+
| 문둥이가 치유되며 | 사 61:1 | 17:14;마 8:3 |
+--------------------------------+---------------------+-----------------------+
| 귀머거리가 들으며 | 사 29:18;35:5 | 막 7:34,35;9:25-27 |
+--------------------------------+---------------------+-----------------------+
| 죽은 자가 살아나며 | | 14,15;8:54;요 11:43,44|
+--------------------------------+---------------------+-----------------------+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 사 61:1 | 4:18 |
+--------------------------------+---------------------+-----------------------+

=====7:23
누구든지...아니하는 자는 - '실족하다'(* , 스칸달리조)는 동
사는 '걸어 넘어뜨리다', '함정에 빠뜨리다'는 뜻이다. 이 말은 미끼를 놓은 덫에 어
떤 목표물이 걸려 결국 죽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사단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져 죄를 범하고 결국은 영혼이 사망에 이르고 마는 결과를 나타낸다. 그런
뜻에서 이 말은 신약에서 '죄를 범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므로 본 구절의
의미는 그 누구든지 자신을 오해하거나 정죄하여 거절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
다. 반면에 예수를 생명의 주로 바로 알고 받아들이면 복이 있다는 말이다.
복 - 여기에서 '복'은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거나 육적(肉的)인 복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영원한 축복을 뜻한다. 한편 본절이 직
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인 바, 세례 요한을 위시한 그 제자들이 예
수의 메시야 사역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가졌다고 하여 예수를 무작정 배척하거나 경
원(敬遠)시할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복음에 귀 기울이라는 경계와 당부의 말씀으
로도 이해된다.

=====7:24
무리에게...말씀하시되 -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이제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향하
여 요한에 관하여 증언하신다. 이는 주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강한 경고의 어조로 말
씀하셨을 때 무리들이 듣고 요한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주께
서는 구속사의 흐름에서 차지하는 요한의 중요한 위치를 분명히 주지시키기 위해 스스
로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요한을 증거하셨다.
너희가 무엇을...나갔더냐 -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회개를 외칠때 많은
무리가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모였다(3:2-14). 그러나 그들은 요한이 누구인지 모
르고 또 그의 설교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모였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요한이 어떠한 인물이며 그가 왜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는지 가르쳐 주셨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이 질문과 바로 다음의 질문(25절)은 자연스럽게 부정적
인 답변으로 이끄는 풍자성이 강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처럼 흔한 갈대를 보기위해
굳이 험한 광야로까지 나갈 필요는 없겠기 때문이다. 유대 광야에서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흔하고 하잘것없는 갈대처럼 요한이 약하고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하신다. 당시 유대 땅에는 일신의 부귀와 안락을 위해 마치 바람 앞에 선 갈대처럼 이
리저리 흔들리며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 양심마저 팔아 넘겨버리는 배도자(背道者)들과
매국노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예수는 세례 요한이 사람들의 여론이나 세상의 유혹에
동요되지 않고 거룩한 소명에 충실한 사람인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의 강직성은
헤롯과의 충돌 사건을 통해 뚜렷이 드러났다. 당시 헤롯의 악행은 묵시적으로 방관될
뿐 누구 한 사람 감히 이를 지적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
라 이 범죄를 공공연하게 책망하다가 결국 옥에 갇힌 신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7:25
그러면(* , 알라) - 화제를 새로운 초점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너
희가 갈대를 보려고 나간 것이 아니라면 너희가 보기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의미이다(R.C.H. Lenski).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 '부드러운 옷'이란 곱고 감촉이 부드러운 값비싼 옷
을 가리킨다. 그러나 요한은 거칠고 값싼 약대 털옷을 입었음으로(막 1:6) 이와는 강
한 대조를 이룬다. 당시 대다수의 서민들은 로마의 식민지의 상황에서 수탈과 착취로
인해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고 다녔음에 비해 고관 대작(高官大爵)들은 그들의
지위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매우 값비싸고 화려한 옷들을 걸치고 다녔다.
보라...자는 - '사치하게 지내는'이란 원어상으로 '건강을 해치다', '쇠약해지다'
는 의미이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결국 건강을 해치기까지 흥청거
린다. 이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상황을 극명하게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서
고관 대작들이 호의 호식하면 할수록 백성들의 생활은 갈수록 핍절해 감을 암시한다.
그러나 요한은 황폐한 곳에서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으며 어려운 삶을 살았다. 만일 세
례 요한이 권력자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귀에 달콤한 말만 골라 들려주었더라면 근사
한 옷과 음식을 누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궁의 회유 따위에 넘어
가거나 무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의 치부까지도 과감히 책망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자
요 또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었다.
왕궁에 있느니라 - 헤롯의 왕궁에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지금 마캐루스(Machaerus) 요
새에서 낡고 거친 외투를 입은 가련한 죄수로서 있다.

=====7:26
그러면 너희가...나갔더냐 - 예수께서는 요한의 위대함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무리
들에게 두 가지 풍자적 질문을 자문 자답 형식으로 던지셨다. 그러나 앞의 두 가지 질
문은 요한이 선지자 혹은 그보다 탁월한 자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서곡으로 볼 수
있다.
선지자냐 - 이 말은 선지자를 본다는 것은 '보려고 나갔더냐'는 의미이며 '선지자
를 그와 인격적인 접촉을 얻기 위하여, 즉 그의 말과 그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여 세례
를 받으려고 한다'는 의미이다(R.C.H.Lenski). 한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선지자들을 세우신 목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1)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책망
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다. (2)환난과 고난 중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소망과
격려를 주기 위함이다. (3)하나님과 그의 창조에 대한 사실들을 계시하기 위함이다.
(4)하나님의 백성들이 특별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취해야 될 행동에 대한 정보를 주기
위함이다. (5)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나 예언자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6)
장차 메시야를 통해 절정에 이를 위대한 구속 역사의 맥을 잇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관건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느냐는 것인데 요한에게는 하나님의 말
씀이 임했다(3:2). 따라서 요한은 분명히 선지자였다.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 원문대로 번역하면 '선지자 이상의 어떤 자'(*
, 페리쏘테론 프로페투)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이
그 어떤 선지자보다 탁월한 이유는 (1)그의 활동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
다. 그 단적 예로 사 40:3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말 4
:5에 예언된 '선지 엘리야'란 바로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 (2)그의 사역의 위대성 때
문이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직접
그 메시야를 보고 그를 증거하며 또한 회개의 세례를 통해 메시야의 첩경을 평탄케 한
위대한 선구자였다(27절).

=====7:27
기록된 바 - 예수께서는 말 3:1에 예언된 말씀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키셨다. 완
료형 '게그랖타이'(* )는 '지금도 기록되어 있다'(has been
written)는 의미이다
보라 내가...보내노니 - 주님께서 이 예언을 인용하실 때에 구약의 원문 그대로 하
신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해석하여 인용하셨음에 유의하자. 그것은 여기에 인용된 '네
앞에'(* , 프로 프로소푸 수,)란 말이 히브리어 원어에
는 '내 앞에'(* , 레파나이)로 되어 있고 70인역에도 '내 앞에'(*
, 프로 프로소푸 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주
님께서 이처럼 '내 앞에'란 말을 '네 앞에'로 바꾸어 사용하신 이유는 자신이 친히 하
나님되심을 드러내는 간접적인 자기 계시(self-revelation)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서 예수는 '하나님 앞에'를 '메시야 앞에'로 해석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메시야이신 자
신이 일체(一體)인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네 길을 예비하리라 - 요한은 메시야의 직접적인 선구자로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해
야할 사람이었다. 원문에는 목적을 나타내는 관계대명사 '호스'(* )가 쓰여서 사자
의 역할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선포함으로 메시야의 출현을 명백히 선포
하였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회개를 외치며 사람들
에게 세례를 베풀었다(3:7-14;마 3:2). 또한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겸손히
말하면서 구속 역사의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졌다.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 말라기의 예언이 세례 요한과 메시야이신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확언하는 말씀이다.

=====7:28
여자가 낳은 자 중에 - 인간의 죄성과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성을 강조한다(시
51:5). 요한은 비록 죄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모든 사람과는 다른 사람
이다. 그의 생애와 활동을 볼 때 그만큼 위대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저보다 크니라 -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결코 요한의 위대
함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비록 위대한 선지자보다도 큰 자라 하여도
그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비교할 때는 상대적로 작은 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그리스도를 직접 증거하는 등 사역면에서
구약에 속한 그 어떤 선지자들보다 탁월하였지만, 계시의 점진성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여전히 옛 언약이 속한 옛 세대(the Old Dispensation)의 사람이었고 신약의 예비 단
계에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신약에 속한 성도들은 세례 요한과 같이 강하고
담대한 활동을 보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른 하나님의 계시
를 밝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크다. 신약의 성도는 예수의 십자
가와 부활의 의미를 우선적으로 이해하며 신.구약 66권으로 구성되어 기록된 계시의
완결서를 늘 묵상할 수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성도의 심령속에 내주하사 영
적 안목을 뜨게 하며 삶의 바른길로 인도해 주신다(딤후 1:14). 한편 이 구절을 하나
님 나라에서 요한을 배제시킨 것으로 생각한다면 13:28(마 8:11)의 내용과 상반된다.
따라서 예수의 의도는 요한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요한의
활동 이후에 온 시대의 변화에 중요성을 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7: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 모든 백성들이란 말 안에는 당연히 세리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리들이 따로 구별되어 소개되어 있는 것은 이들이 그 당시 일종의 사
회적 계급의 한 부류로서 마치 별개의 족속처럼 취급될 정도로 동족 유대인들로 부터
미움과 배척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12,13;5:27-30). 이들이 미움과 배척을 받은
것은 로마 제국의 앞잡이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과중
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또한 이들은 거두워들인 세금을 관청에 보고하고 남은 여분의
세금은 자기들의 몫으로 착복하였다. 랍비 문헌에는 이 세리들이 강도와 동일하게 분
류되어 나타나고 공관복음서에는 모두 '죄인들'로 언급된다(5:30;7:34;마 9:10;11:19;
막 2:15). 이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로마 압제자들에게 아부하여 자기 동
족을 희생시켜 치부(致富)하고자 하는 변절자인 것으로 생각했다.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 3:12 주석 참조. 누가가 '요한의 세례'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 통용된 관례에 의한 표현법이다(20:4;행 18:25;19:3). 요한의 세례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1)메시야적 내지는 종말론적 예비 교육의 측면이다. 세례 요
한은 자신의 임무가 백성들에게 메시야를 소개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장차 메
시야를 통해 시행될 성령 세례의 예비 단계로서 물 세례를 시행하였다(마 3:11). (2)
세례 받는자의 생활 변화의 측면이다. 당시 대부분 유대인들은 단지 혈통상으로 아브
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으로 자긍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들이 메시야를 통
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와 구체적 삶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
았으며, 따라서 이러한 회개의 표시로서 세례를 베풀었다(마 3:7-9).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 이 말의 의미는 무리들이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를 깨달아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다'라고 선언했다는 뜻이다.

=====7:30
율법사 - '율법사'에 해당하는 '노미코스'(* )는 '서기관'(*
, 그람마튜스)과 동의어로 쓰였다(5:21;10:25;11:45,46,52,53;14:3;마
22:35). 이 말은 마 22:35를 제외하고는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말인데 이는 누가가
'그람마튜스'라는 말보다 '노미코스'라는 말을 이방인들이 듣고 쉽게 이해하리라는 생
각에서 사용했을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 예수의 말씀에 대한 상반된 두 반응이 나타난
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스스로 하나님께 열심있다고 자랑하는 소위 종교 지도자들
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를 배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했던 반면, 세리들과
같이 외견상으로 여호와 신앙으로부터 소외된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의 율법사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
연구에 헌신한 사람들이어서 율법의 세부 조항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나 그속에 감
추어진 근본적인 메시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율법
의 조항들 자체였기 때문이다.

=====7:31
이 세대의 사람 - 류만(Luhrman)에 의하면 '세대'(* , 게네아)란 이스라
엘 전체보다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세대'라는 말 속에 바리
새파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을지언정 그 말이 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
려 이 말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거절한 당시의 세대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마 11:20-24;13:53-58 참조). 이 말 속에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그 때문에 받
게 될 하나님의 진노가 암시되어 있다.

=====7:32
춤추지 않고...울지 아니하였다 - 예수께서는 아무런 상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평
일날 장터에서 놀이를 하기 위해 모인 아이들에 대해 묘사하신다. 아이들은 결혼식 놀
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는데 두 편으로 나뉘어져 결혼식 놀이에서 한 편이 피리를 불면
다른 편이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추고, 또 장례식 놀이를 하면서 한 편이 장례 흉내를
내어 슬피 울며 곡을 하면 다른 편도 그 곡(哭) 소리에 맞추어 울면서 가슴을 치게 된
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놀이가 잘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
은 한 쪽 아이들이 상대편의 행동을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이 아이들은
불평했고 서로가 서로를 나무랬다. 이처럼 서로 뜻을 같이 하여 그 놀이에 흥을 돋우
면서 재미를 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에도 응하지 않는 아이들처럼 그 당시 유
대인들도 자기 의(義)를 내세우며 세례 요한과 예수를 경멸하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공의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을 귀신들린 자라고 비난하고 세리
나 기타 죄인 취급받는 자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도우셨다는 이유로 예수를 죄인 중의
하나로 몰아붙였다.

=====7:33
원문에는 '왜냐하면'(* , 가르)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은 앞절에서 말씀하
신 아이들의 비유가 이 세대를 적절히 묘사하는 이유를 제시해 준다. 예수께서는 이
구절과 다음 절을 통해서 요한과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아이들과 흡사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떡도 먹지...마시지 아니하매 - 마태는 떡과 포도주를 말하지 않는다(마 11:18).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떡이나 포도주를 먹지 않고 메뚜기와 석청만을 먹었다(눅
1:15;막 1:6). 또한 그는 날 때부터 하나님 앞에 구별되어 나실인처럼 포도주나 독주
를 마시지 아니하고(민 6:2-4) 광야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였다.
너희 말이...들렸다 하더니 - 유대인들은 요한의 금욕적인 생활에 대해서 비난했
다. 왜냐하면 요한이 자신들의 사악한 잔치와 사치한 생활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자
신들을 책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평범하지 않은 생활을 하는
요한을 가리켜 귀신들렸다고 비난하였다. 이것은 앞절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 장터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따라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평하고 싸움에까지 이르는 것
처럼 이 세대 사람들도 그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7:34
인자는...먹고 마시매 - 예수께서는 요한이 하는 것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
으셨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자유로이 교제하셨다. 이는 예
수께서 말씀하신 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없다'(막
2:19)고 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어떤 형식적인 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
라 자유로운 가운데서 진리의 본질과 참된 생명의 도를 가르치시고자 하신 예수의 사
역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세리들과도 상종(相從)하신 것을 보면 예수는 인위적인 형
식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제도권 밖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과 온정을 베푸셨다(5
:27-32).
보라 먹기를...즐기는 사람이요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처럼 율
법적인 금식을 하지 않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폭언을 일삼았다. 요
한에 대해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는다하여 귀신들렸다고 비난하더니 오히
려 이제는 예수를 향하여 그 반대 이유를 들어 비난한다. 그들이 비난한 대로 만일 예
수께서 탐식가요 술주정꾼이셨다면 율법의 기준대로 한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의
항목에 속했다(신 21:20,21).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은 곧 예수를 정죄할
뿐만 아니라 그를 이단자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I. Howard Marshall).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 이러한 비난은 특별히 세리 마태의 집에서 베푼 잔
치 때에 예수께서 참여하신 사실과 관련된다(5:27-32). 예수는 세리 마태의 경우 외에
도 사회적, 종교적으로 소외당한 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나타내셨다. 이러한 관심은 특
히 잃은 양(15:1-7), 잃은 드라크마(15:8-10), 돌아온 탕자(15:11-32)등의 비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7:35
지혜 - 구약성경에서는 곧잘 지혜를 의인화시켜서 표현한다. 특히 잠언의 경우는
지혜에 관해 많은 언급을 하며 특별한 강조를 하고 있다(잠 1:20;8:22-31). 그리고 특
별히 사 9:6과 11:2는 메시야를 지혜와 긴밀하게 연관시킨다. 여기서 '지혜'란 곧 그
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고전 1:23,30). 성경은 지혜의 출처를 하나님께로 부터 찾는
다. 욥기의 저자는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욥 28:12)라고 답하였
다. 그리고 잠언서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갈파하였다
(잠 1:7).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조언을 구할 때 그
간구에 대한 응답으로서 지혜를 얻게 되는것이며, 이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특별히 성령과 관계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통
해 얻게되는 것으로 묘사된다(행 6:3;고전 2:6;12:8;엡 1:17;골 1:9;3:16;약
1:5;3:15-17).
자기의...옳다 함을 얻느니라 - 마태는 '그 행한 일로...'라고 묘사했다(마
11:19). 여기서 '자녀'란 지혜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을 가
리킨다(롬 9:7,8). 그리고 '옳다 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카이오데'(*
)는 '바르게 선포되다', '옳음이 밝혀지다'는 뜻이며 원문상으로 이 말은 문
두에 나와서 그 의미를 강조한다. 본절의 의미는 쉽게 설명하면 이러하다. 그리스도와
그 복음이 대적들에 의해 곡해되고 비난 받으며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핍박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씀대로 살려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며 그들에 의해 세계 만방에 선포되고 옳다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
다.

=====7:36
한 바리새인이 -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적대시하던 터에 그 중의 한 사람이 식사를 초대하였던 이례적
(異例的) 성격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이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40절)이
었으나 그의 신상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유대에서의 '시몬'은 매우 보편적인
이름이었다.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대한 일은 일견 용
기있는 태도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안식일 규례와 같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세리나 창기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죄인으
로 정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초대는 하였으나 냉랭한 자세로 손
님을 맞이하였다(44-46절). 이로 보아 아마 이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청한 이유가 예수
께 대한 사랑이나 존경에서 나온 것은 아닌듯하다. 그가 예수를 믿지 않으며 선지자로
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39절)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 바리새인은 병자를
고치기도하며 또 많은 군중들이 예수께 몰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을 수
도 있고 또 그에게 '큰 선지자'적인(17절) 능력이 있는가 알아보고도 싶었을 것이다.
아울러 군중들에게 추앙받는 예수를 자기 집에 초청함으로 자신도 추앙받고 싶었을지
도 모른다. 나아가 예수께 대해 고소할 빙거(憑據)를 찾기 위해 초대했으리라는 추측
도 배제할 수 없다. 누가는 이 구절 외에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초대한 예를 두 곳에
서 들고 있다(11:37;14:1).

=====7:37
죄인인 한 여자 - 이 여자를 창기(娼妓)로 보는 견해(Meyer, Bruce)도 있으나 성경
에서는 그녀가 어떤 종류의 죄를 범하여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는지 전혀 언
급이없다. 아마도 이 여인은 한 때 나쁜 길에 빠졌었고 그녀의 타락이 공공연히 알려
지게 되어 그 이후로 그녀는 죄인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비록 죄인으로 취급
받고 있었지만 이전부터 들어온 예수의 소문에 희망을 갖고 그를 찾게 되었다. 그가
들었던 소문은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하시며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임에 틀림없
다. 그 때문에 그녀는 매우 귀중한 향유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향유담은 옥합 - 이 옥합은 향유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둥근 그릇으로 손잡이가 없
었다. 그리고 그릇 속에 든 기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목부분을 깨뜨려야만 했다. 이
러한 옥합은 매우 값진 품목이었다고 하며(Pliney) 그 속에 든 향유도 값진 것이었다.
이런 류의 고급 향류나 값비싼 화장수는 보통 로마의 부유한 여인들이 주로 사용했으
며 구하기도 어렵고 매우 귀했기 때문에 매우 가치있는 재산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향유는 그 여인이 특별한 목적으로 구입하였을 것이다. 한편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적
선을 구하는 거지들은 초청을 받지 않고도 잔치에 들어가 음식 부스러기들을 얻어갈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여인도 그러한 비천한 무리들 틈에 섞여 있었을 것이다.

=====7:38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 그녀는 예수의 발 곁에 서자 눈물이 쏟아졌다. 이는
그녀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자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
고 아울러 예수의 인격 자체에서 흘러 나오는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그녀
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머리털로 씻고 - 여인은 자신으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삶에 근본적
인 변화를 가져다 주신 예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차게 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예수께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머리를 풀어 눈물로 예수
의 발을 닦았다. 그런데 여기서 머리를 풀어 발을 닦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일
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머리를 풀어 내리
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수치를 무릅쓰고 감격과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여인의 왕관이라고 할 머리털로써 예수의 먼지 묻은 발을 닦는
모습에서 그녀의 철저한 겸손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예수를 초대해 놓고서 발 씻을 물
조차 제대로 준비해 주지 않은 바리새인의 뻔뻔함과 대조된다.
그 발에 입맞추고 - 이는 가장 헌신적인 복종과 존경을 표하는 행동이며 특히 헬라
어 원문상 '카테필레이'라는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는데(* , '입맞추
고') 이것은 반복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표현인바, 예수께서 들어 오신 후 계속해서
예수의 입을 맞췄다는 의미이다(Robertson).
향유를 부으니 - 대체로 존경의 표시로 향유를 부을 때는 머리에 붓는 것이 관례였
으나 이 여인은 이례적으로 발에 부었다. 그녀는 예수의 발에 접근하는 것조차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바로 눈물의 회개와 벅찬 감격의
봉헌(奉獻)이었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신앙의 행동을 몇가지
살필 수가 있다. (1)복음을 듣고 알아야 한다(37절, 알고). (2)예수께 나아가 죄를 자
복하고 회개하여야 한다(예수의 뒤로...서서 울며). (3)전폭적으로 헌신하여야 한다
(자기 머리털로 씻고). (4)철저하게 순종하여야 한다(그발에 입맞추고). (5)최선의 봉
사를 해야 한다(향유를 부으니). 이러한 신앙의 행동이 있을 때 우리는 늘 구원의 감
격 속에서 살 수 있다.

=====7:39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 시몬은 여인의 도유(塗油) 행동을 보고서 한편으로는
몹시 기분이 상했고 또 한편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흘렸던 것같다. 그가 못마땅한 투로
혼자 중얼거린 것은 죄인인 한 여인이 식탁으로 접근한 사실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었
다. 그리고 그가 은근히 기뻐한 것은 예수께 대한 그의 의혹을 정당화할 만한 단서를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예수가 선지자라면 당연히 발 앞에 무릎 꿇
은 여인이 죄인임을 알았을 것이고 또한 그녀를 물리쳤을 것이었다. 따라서 죄인의 신
분에 있는 사람이 몸에 손대는 것을 허용하신 예수는 바리새인의 눈에 똑같이 천박한
사람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 바리새인은 과연 예수가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선지
자인가 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시라는 점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지하였다(5:32). 한편 원문의 가정법 형식은 사
실이 아님을 단정짓는 표현이다.

=====7: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바리새인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심중에 이러한 생
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이미 그 생각을 알고 계셨다. 바리새인은 마음속에
예수께서는 선지자도 아니며 그 여인이 어떠한 여인인지도 모르는 형편없은 사람이라
생각하였으나 예수는 이미 그 여인의 영적 상태를 간파하여 그녀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50절)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조차 알아차리시고 그에게 논박하신다.
이러한 예수의 신적 전지성(全知性)은 그의 메시야되심에 대한 증거의 일례가 된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 여기서 바리새인의 이름이 '시몬'이라
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교만하고 사악함을 실책하시는 투로 말씀하시
지만 그를 적대시하거나 미워하기보다는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사랑하는 마
음으로 그의 잘못됨을 바로 잡아주려고 하신다.

=====7:41
빚진 자가 둘이 있어 - 예수께서는 종종 하나님께 빚진 자들에 관해서 언급하셨다
(17:10;마 6:12;18:23-35). 그런데 마 6:12의 경우에는 죄가 구체적으로 빚과 동일시
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 빚의 탕감 여부가 죄 용서 문제와 동일시된다. 예수께
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빚의 예화를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진 인간의 빚은 너무 많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한다할지라도 그 빚을
상쇄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서 탕감(蕩減)은 하나님께서 우리게 베푸시는 은총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상응되는 의무를 부과해 주며 이 일을 행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 내용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마 6:12).
데나리온 -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은화로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오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명이 오백 일을 벌어야 하는 돈이
었다.

=====7:42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 '탕감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카리사토'(*
)는 '무효로 주다', '취소하다'는 뜻의 '카리조마이'의 부정 과거형이다.
이는 탕감의 행위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행해졌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은
'은혜'를 나타내는 '카리스'(* )이다. 따라서 본 비유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
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값없이 주어졌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믿음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떠한 노력과 선행으로써 구원에 이르
려고 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역시 값없이 만드는 것이다. 성도의 선행은 거저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이른바 성령의 열매이지(엡 2:8,9) 구원의 조건인 것은 아니다.

=====7:43
시몬이 대답하여...받은 자니이다 - 예수의 질문은 평범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답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도 자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몬은 매우 주의깊게 대답
했다. 아마 그는 예수의 놀라운 지혜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었던 터라 자신이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며 더구나 목전에 일어난 상황으로 말
미암은 불쾌감과 흉한 속마음을 표출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네 판단이 옳다 - 예수는 시몬의 악한 마음을 정면으로 꾸짖지 않으시고 그의 판단
을 '옳다'고 하신다. 이는 시몬으로 하여금 자신이 범한 무지를 스스로 깨닫고 부끄러
운 상황을 직시하게끔 하시기 위함이다.

=====7:44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 손님이 방문하면 주인은 먼저 그를
상석에 앉게 하고 손님의 손과 발을 씻기 위해 물을 준비하는 것이 통례였다(창
18:4;19:2;24:32;삿 19:21 참조). 그러나 시몬은 예수를 자기 집에 초청해 놓고 그러
한 통례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못했다.
이 여자는...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 예수께서는 시몬으로부터 아무런 대접도 받지
못하셨으나 여인으로부터는 전폭적인 헌신의 예를 받으셨다. 엎드려 발에 입을 맞추고
는 눈물을 흘려 머리털로 발을 씻는 행위의 헌신과 향유를 붓는 재물의 헌신은 성도가
지녀야 할 신앙 자세를 시사한다.

=====7:45
너는 내게...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 입맞춤은 자연스러운 영접
인사였다(창 29:13;45:15;삼하 1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예수께 대해 이런 예
를 갖추지 않았다. 예수는 주인으로부터 당연히 받게되어 있던 환영의 입맞춤도 받지
못한 반면 여인으로부터 발에 입맞춤을 받으셨다. '그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이 여
인이 과거의 어두운 세월을 예수께 묵언(黙言)으로 토로하는 중에 복받치는 감격과 희
열을 경험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존경하
는 손님에게만 특별히 행하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태양 밑에서 걸어다닌 사람의 머리
에 기름을 붓는 것은 당연한 예의였다. '감람유'는 다량 생산되고 값도 싸기 때문에
누구나 손님에게는 머리에 이 기름을 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몬은 이 일조차도 행
치 않았다. 반면에 그 여인은 가장 값진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다. '머리'와 '발'
그리고 '감람유'와 '향유'는 극명한 대조를 더해준다.

=====7:47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 여기서 '많은'(* , 폴라이)이란 강조하
기 의한 말인데 '모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은 그녀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해도 모두 사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고 '사하여졌다'(* , 아
페온타이)는 완료형 동사로 모든 죄를 사함받아 지금은 온전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
이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 이 구절은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카톨릭
학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 사랑, 즉 여인이 행한 사랑의 행위 때문에 용서를
얻게 된 것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랑이 용서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면서 행위
를 강조하고 있다. 아마 언뜻 보기에 여기 사용된 접속사 '호티'(* , '이는')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러한 해석으로부터 카톨릭의 공
덕설(ontritio caritate formata) 같은 교리가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첫째, 접속사 '호티'는 그녀의 죄가 사해진
'이유'나 '근거'를 나타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체 비유와 50절이 보여주는 바
와같이 그녀의 죄가 참으로 용서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증거'를 나타내
고 있는것이다. 사랑이 용서의 이유나 원인이 아니라 사랑을 보여줌으로 죄가 사해졌
다는 것을 '입증'한다(Lenski). 둘째, 성경 전체의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한 해석
은 억측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행위나 공로로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죄사함은 오직 은혜로 내려진 것이다(엡
2:8,9). 셋째, 그러한 해석은 예수께서 비유해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요점(42절 참조)
과 상치된다. 비유의 요점은 두 채무자가 그들의 빚을 은혜에 의하여 탕감받았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그녀의 사랑은 용서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Bengel,
Meyer, Farrar, Ellicott 등)로 봐야 한다.

=====7:48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 예수께서는 여자에게 직접 말씀하시면서 처음에
말씀(47절)하셨던 것처럼 '저의 많은 죄'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 죄'라고 하신다. 이
것은 시몬이나 그녀가 모두 죄를 용서받아야 할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으며 또한 그
여인이 사함받은 죄란 어떤 특별한 범죄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알게 모르게 지은 모
든 죄와 근원적인 죄까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죄사함에
대한 공적인 선언을 하신 이유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죄사함의 확신을 갖게 하시기 위
함이었음과 아울러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서 가진 선입견을 바꾸어 놓으시려
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녀를 소문난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49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 앞서 중풍병자를 고칠 때에도 이와 같은 반발이
있었다(5:21). 그때 바리새인들은 죄 사하는 권세로 사함을 선언하신 예수를 신성 모
독자로 정죄하였다. 여기서도 이들은 눈물로 회개하며 죄사함을 얻은 여인과는 대조적
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사하는 것을 보면서 '참
람'하다는 생각을 나타내었다.

=====7:50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이는 47절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에 쐐기를 박는 구
절로서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원
하였다'(* , 세소켄)는 완료형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구원받은
상태로 남은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여인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이
미 구원에 이른 상태였던 것을 보여 준다. 다만 예수께서는 이미 확보된 구원을 공공
연하게 선언하신 것이다(8:48 주석 참조).
평안히 가라 - 이는 예수께서 여인에게 하신 작별의 인사다. 이러한 유대인의 작별
인사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대의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통적인 표현이나(삿
18:6;삼상 1:17;삼하 15:9;왕상 22:17) 이 구절에서는 더욱 깊은 뜻을 나타낸다. 왜냐
하면 지금은 이 여인이 예수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확증받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예
수께서는 이제 멸시받던 죄인인 그녀에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되었
으니 평안한 마음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명령형은 평안 상태의 항구성(恒
久性),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이 허물어짐으로써 누리게
되는 영속적인 평안을 시사한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를(사 9:6)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
다 이러한 영속적이고도 참된 하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행 2:28;엡 6:23;몬 1:20 ;
히 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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