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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 8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1|조회수12,843 목록 댓글 0


누가복음 제 8장
=====8:1
이후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카덱세스'(* )는
'후에', '순서대로'(1:3), '뒤를 이어서' 등의 뜻이며 반드시 시간적인 의미로만 사용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의미는 7:36-50의 사건이 있은 후라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 앞에서 시간에 관하여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은 것처
럼 장소에 관해서도 정확한 정보를 말해주지 않고 단지 '각 성과 촌'이라고만 기록하
고 있다. 아마 이 지역들은 갈릴리지방에 있는 고을들이었을 것이다. 혹자는 4:15와는
달리 본문에서 '회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들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마 12:9-14, 13:54-58;
요 18:20을 볼 때 예수께서는 회당에서도 가르침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고 '각 성과
촌'이라는 축소(縮小)된 표현 속에는 '회당'이 포함되어 있는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
다. 한편 '두루 다니시며'(* , 디오듀엔)는 누가만의 독톡한 언어로서
이곳과 행 17:1에만 나오며 '디오듀오'(* )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이다.
이 단어가 미완료 능동태인 점과 또한 이 단어 속에는 '이리 저리 길을 만들다'의 의
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은 예수의 사역이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progress)되었으며,
성읍이나 촌, 또는 집이나 회당에서, 심지어는 노천이나 길 등에서든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셨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나라...복음 -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복음을 전하는 것으
로 요약된다(4:43).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예수께서 하였던 일
들을 보건대(7:22,48) 죄의 결과로 인해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왜곡된 인간의 모
습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포함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복음이란 바로 이런 일들이 예수로 인해 현재에 실현되기 시작했으며 장차 완성될 것
이라는 내용으로 요약된다(막 1:15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 참조).
열 두 제자 - 이들은 6:12-16에서 예수의 정규 제자로 선택된 자들이었으며 예수께
서는 이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밤을 세우며 기도하기까지 하셨다. 이제 이들은 공적인
예수의 수행원(隨行員)으로 언급되고 있는 바 이들은 예수의 선교를 수행하면서 스승
의 사역을 계승할 수 있는 진정한 사도로 설 수 있기 위하여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었
다.

=====8:2
악귀를...병 고침 받은...여자들 - 예수를 수행하여 함께한 사람들 가운데는 열 두
제자 외에도 다수의 여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유대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자들
은 남자와 동등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온전한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예
수는 공생애 초기부터 몇몇 신실한 여인들을 전도 여행에 합류(合流)시킴으로써, 천국
의 일꾼될 자격이 외적 조건에 달려있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뿐만 아니라 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본서의 특성을 나타내기도 하며 과연 천국
이 어떤 자들의 것인지에 관해서도 암시하고 있다. 곧, 천국은 자신의 죄성과 연약성
을 시인하고서 주님의 은혜만을 겸손히 간구하는 자에게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18:13,14).
막달라인...마리아 - 마리아라는 이름은 매우 흔했으므로 이 특정한 마리아를 구별
하기위해서 '막달라'라는 지명을 이름 앞에 붙였다 '막달라'는 '탑' 또는 '망루'라는
뜻의 지명으로 갈릴리 바다의 서해안 가버나움 남쪽에 위치한 작은 성읍이다. 이 마리
아를 특징지워 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녀가 과거에는 일곱 귀신에 들려서 극심한 정
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였으나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어 지금은 온전하게 되었다
는 것이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전수라는 점 뿐만 아니라 일곱 귀신은 최악의 상태를
묘사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는 점에서도(마 12:45) 이 여인에게 임한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큰 은총을 입었으므로 그녀가 예수에게
전적인 헌신을 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인 바 예수를 따랐던 여성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
인 역할을 하였다고 짐작된다. 그것은 그녀가 예수의 수난사에서 독보적(獨步的)인 증
인이 된 점에서 충분히 짐작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할
때 그 자리에 있었으며(마 27:55,56;막 15:40;요 19:25), 예수의 시신이 매장되는 현
장에도 있었고(마 27:61;막 15:47;눅 23:55), 주일날(안식 후 첫날)이른 아침에 예수
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을 찾았고(마 28:1;막 16:1;눅 24:10), 예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자도 바로 그녀였다(막 16:9;요 20:1-18).

=====8:3
요안나 - 이 여인은 24:10에서 예수의 부활 사실을 두 천사로부터 통고 받은 인물
로 나오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본절에서 그녀는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라는 사람
의 아내로 소개된다. 여기서 헤롯은 당시 갈릴리를 지배하던 헤롯 안티파스로 보이며
구사라는 이름은 이곳에서만 나오므로 그 인물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의
직업을 말해주는 청지기는 그 직책이 무엇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청지기'의 헬라어
'에피트로포스'(* )가 '넘겨 준다'는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재산을
넘겨 받아 관리하는 재정 담당관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직책을
가진 구사의 아내 '요안나'는 매우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자였음에 틀림없
다. 고뎃(Godet)과 같은 학자는 '구사'라는 관리가 다름 아니라 그 아들을 예수께서
낫게 하였던 요 4:46이하의 관리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는데, 만약 그럴 경우 그의
아내 요안나가 예수를 따르며 섬겼던 이유는 각별(恪別)한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막
달라 마리아와 요안나를 대비하여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예수께서
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낮은 계층의 여성과 요안나와 같은 부유한 계층의 여성을 모
두 제자로 받아들이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의 보편성(universality)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다.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 - 수산나라는 이름의 뜻은 '백합'인데, 그 이름대로 매우
친절한 여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 외에는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이렇
게 구체적으로 이름이 언급된 세 명의 여인들 외에도 수명의 여자들이 함께 하였다는
사실도 전하여 주는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여자들을 제자로 받아들임으로써, 여자들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으며 모든 면에서 여자를 남자들의 소유물 정도로 여겼던 유대인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해주었던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
는 여자들에게서도 남자들에게서와 똑같이 구원의 가능성과 복음의 증언자로서의 가능
성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자기들의 소유로...섬기더라 - 이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필요
한 물질적 재원을 어떻게 얻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을 줄 수 있는 일부분의 자료가
된다는 점과 예수의 선교 사역 배후에는 이와같은 여인들의 헌신적인 섬김이 있었음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요 13:29에 의하면 예수와 제자들 일행에게는 공동
의 '돈 궤'가 있어서 그 돈으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도왔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돈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이와같이 예수에게 은혜를 입은
여인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자신들의 소유를 헌금한 것에 의해 충당(充當)
되었을 것이다. 한편 고대의 순회 설교자들이 부유한 여인들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은 경우는 혼히 있었던 일이나, 본문의 여인들이 예수를 헌신적으로 섬긴 것은 그것
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며 그들이 예수와 참된 정신적 영적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
라고 볼 수있다. 더구나 이들의 행위를 묘사하는 동사 '섬기더라'이 해당하는 헬라어
는 '디에코눈'(* )이 '디아코네오'(* )의 미완료 과
거 능동태임을 감안할 때 여인들의 재정적인 섬김은 일회적이 아니라 연속적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도움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8:3
큰 무리를 이루니 - 누가는 현재의 시점과 장소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지 않으나 마
13:1-23;막 4:1-20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형제, 자매, 모친이 누구인가에 대한
교훈을 하고 난 후 가버나움의 어느 해변에서 배를 타고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고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각 동네에서 모여 들었는데, 이들은 아마 예수의 교훈과 병든 자
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는 예수의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몰려든 무리들이었을 것
이다.
비유로 말씀하시되 - 디아 파라볼레스(* )는 '비유의 방
법으로'라는 뜻으로 비유로 말하는데에는 무언가 의도가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10절
주석 참조). 여기서 비유는 헬라어 '파라볼레'(* )에 해당하는데, 이
말은 '곁으로'를 뜻하는 '파라'(* )와 '던지다'를 뜻하는 '발로'(* )
의 합성어로 한 물건을 다른 물건 곁에 두고 비교함으로써 그 실체(實體)를 정확히 아
는 방법을 뜻한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어려운 이치를 다른 것에 빗대어 쉽게 설명하
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복음의 심오한 내용을 모든 세대
에 걸쳐 안전하고 신선하게 보존해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비유는 그 단순성으로
인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며 또한 복음의 의미를 학술적이기 보다는 일상적으로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유는 복음의
원뜻을 너무 과도하게 노출(exposure)시키지 않음으로써 소위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은 실수를 막아주는 보호막 구실을 한다.

=====8:5
씨를 뿌리는 자 - 원문상으로는 씨를 뿌리는 자 앞에 정관사 '호'(* )가 붙어 있
다. 이는 씨를 뿌리는 전체를 대표하거나 또는 예수께서 본 비유를 베푸실 당시 주위
에 씨를 뿌리는 특정한 사람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아무튼 예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 대다수의 청중들은 농경 문화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 말씀의 표면적인 의
미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5-8절은 씨뿌리는 비유에 관한 말씀으로서,
씨뿌리는 자나 씨앗 자체보다도 오히려 다양한 종류의 토질(土質) 곧 성도들의 마음밭
에 강조점이 있다.
길가에 떨어지매 - 밀이나 보리 등을 사람이 손으로 뿌리는 일은 통상적이었다. 팔
레스틴의 토지는 보통 가늘고 길게 분할되어 있고 분할된 밭 사이에 좁은 길이 있어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다. 씨를 뿌릴 때는 이 좁은 길에도 씨가 뿌려질 수 있는 일이
었다. 이 곳에 떨어진 씨는 당연히 뿌리를 내릴 수가 없으며 농부들이 지나다닐 때 그
발에 밟히거나 새들의 먹이가 되어 버리게 마련이었다.

=====8:6
바위 위에 떨어지매 - 마태(마 13:5)나 마가(막 4:5)는 '돌밭'이라고 기록하고 있
는데, 이는 돌로만 이루어진 곳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밭에 간혹 바위가 있어 그 바위
위에 흙이 얇게 덮여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땅에서는 씨에서 싹이 나서 조금 자라
기는 하지만 수분이 부족하고 자양분이 없으므로 해가 뜨면(마 13:6) 곧 말라 죽게 된
다.

=====8:7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 팔레스틴에는 유난히 가시가 돋은 식물들이 많이 자란
다. 헥커(Hacker)와 같은 학자의 분석에 의하면 히브리 성경에는 가시나 가시 종류의
식물을 의미하는 용어가 22종류나 된다고 한다. 아무튼 가시 떨기 속에 뿌려진 씨는
싹이 나고 자라기는 하지만 왕성한 성장력들 지닌 가시떨기에 자양분(滋養分)을 빼앗
겨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8:8
좋은 땅에 떨어지매 - 충분한 습기와 자양분을 구비하고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잘 성장하여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 마태나 마가의
경우에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3단계로 구분되어 있으나(마 13:8;막 4:8), 누가는
나머지 두개는 생략한 채 백 배의 결실만을 언급함으로써 풍성한 결실을 강조하고 있
다.
들을 귀 있는자 - 들려 준 이야기의 표면적 의미 외에 숨은 뜻이 있음을 암시해 주
는 말씀으로, 이러한 표현은 종종 예수께서 중요한 교훈의 종결 어귀로 사용하신 것이
다(14:35;마 13:9, 43 등).

=====8:9
제자들이...물으니 - 유감스럽게도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없었던 듯하다. 왜냐
하면 예수의 비유에 대해 적절한 응답을 한 청중도 없었고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그 비
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물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
로톤'(* )은 '심문하다'의 뜻을 가진 '에페로타오'(* )
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집요한 질문을 하였음을 뜻한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뜻을 알려고 하는 열정적인(passionate) 태도를 지니고 있었
다.

=====8:10
하나님 나라의 비밀 - 비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스테리아'(* )는
'가둔다'의 뜻을 지닌 '뮈오'(* )에서 온 말로 숨겨겨 있는 사실을 뜻한다. 이것
은 인간 스스로 발견해 낼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실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참다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그 고유한 속성으로 인해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이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
물로 부여받을 때 뿐이다. 그런데 그 선물은 인간의 상태에 따라 선택적(選擇的)으로
주어진다. 예수께서는 그의 열 한 제자들과 그밖의 제자들(막 4:10)에게는 그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들 즉 군중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허락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그것을 진실된 마음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닫혀 있음을 말해준다.
이는 저희로...함이니라 - 본문은 사 6:9,10의 내용을 축약적으로 인용한 것인데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셨던 목적을 설명해 준다. 한편 마
태는 사 6:9,10을 보다 명확하게 인용하고 있는데(마 13:13-15), 예수께서 비유를 사
용한 이유를 설명하였다는 점에서 본서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나 이 두 복음서들의
기록은 상호 보충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마태의 문장은 '호티'(* )절로
되어 있어 '왜냐하면...'의 구문으로 이해되는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백
성들이 완악(wicked)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 듣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마 13:15). 사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은 은사를 주시기 원하지만(마
28:19,20;요 3:16;딤전 2:4;벧후 3:9)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는 사실을(5:21,30;6:2,7,11;7:30;마 23:37)증거한다. 한편 누가의 문장은 '히나'(*
) 구문으로 되어 있어 '...하기 위하여'로 이해되는데 이는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
을 말해준다. 즉 하나님의 은사를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비밀'을 감추기 위하여 비유
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8:11
하나님의 말씀 -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어귀로 본서에 네번(11,21절;5:1;8:11,21;
11:28) 나오고 사도행전에는 12회나 사용되고 있으나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한 차
례씩만 사용되고(막 7:13;요 10:35), 마태복음에는 한번도 쓰이지 않았다.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9절) 예수의 답변은 '씨를 뿌리는 자'보다는 '씨'와 씨가 뿌려진 밭에 관
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물론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 자신일 것이다. 씨가 하나님의
말씀 또는 천국 말씀(마 13:19)이라면 그것은 예수 자신이고(요 1:14) 복음을 뜻한다
고도 볼 수 있다.

=====8:12
길가에 - 계속되는 설명은 씨가 뿌려진 밭(5-8절)이 다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
씀을 받아들이는 인간 자신임을 말해준다. 좁게 말하면 인간의 마음이라고 볼 수도 있
겠으나 그 보다는 전인격적인 인간을 말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길가와 같은 상태의 인
간은 말씀을 듣기는 하나 그 말씀에 대해 냉담(冷談)하거나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말씀이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게 된다.
마귀 - 마태는 '악한 자'(포네로스, * )로, 마가는 '사단'(*
, 사타나스)으로 표현하는데 비해 누가는 '마귀'(* , 디아볼로
스)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길가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데 그치고 받
아들이기를 보류(保留)하고 있을 때 그 말씀을 빼앗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
다. 5절과의 관계에서 살펴볼 때 씨앗은 밟히기도 하고 새에게 먹히기도 한다는 점에
서 말씀을 빼앗아 가려는 마귀의 훼방은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훼방을 물
리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 뿐이다(엡 6:13-17).

=====8:13
바위 위에...시험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 바위 위에 얇게 흙이 덮혀있는 것과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감정적 흥분과 피상적 열정으로 받아들인다. 그
러나 그런 사람들은 감정의 상태를 넘어 말씀이 심령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지는 못한
다. 이러한 신앙을 예수께서는 뿌리없는 믿음이라고 규정하는바 이들의 믿음은 일시적
이며 잠정적이다. 믿음의 진정성 여부는 시험에 견디어 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검증(檢證)되어진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말씀을 듣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린다. 한편 본문에서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믿음
이 참인가를 검증할 수 있는 '시험'이 필연적임을 암시한다.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믿
음은 마치 뿌리없는 식물과 같이 그 생명이 오래가지 못하며 따라서 그 과실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는것이 된다. 그러나 시험을 견디어낸 믿음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
(약 1:12).

=====8:14
가시떨기에...일락에 기운이 막혀 - 가시떨기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어느정도 영
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상당한 정도의 신앙을 갖게
되지만 궁극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가치를 혼동함으로써 결국에는 실패하는 부류들
이다. 마치 세례요한의 메시지에 대해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지만 세상적인 지위와 부
귀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국은 인정하지 않고 죄를 범했던 헤롯 안디바와 갈은 사람들
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의 세 가지가 문제가 된다. 첫째는, 이생의 염려이다.
마가는 '이생의' 대신에 '세상의'라고 표현했는데(막4:19), 지극히 세속적인 것에 대
한 염려 때문에 신앙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게 됨을 말함에 있어서는 같은 뜻이다.
이 염려는 신앙 생활에 매우 해로운 것으로 영혼의 저항력을 조금씩 약화시켜 마침내
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죽은 영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것을
경계하여 염려하지 말 것에 대한 교훈을 주신 바 있다(12:22-34;마 6:25-34). 둘째는
재리(財利) 이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진리를 따르지 못한 예는 '어리석
은 부자'(12:16-21), '부자 관원'(18:18-23)과 같은 이야기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셋째는 일락(逸樂) 즉 생의 향락이다. 일시적이고 표면적이며 충동적인 육체의 쾌락을
위해 영혼의 존귀한 가치를 망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숭고한 영혼을 조금씩
침식하여 마침내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요 4:36) 맺지 못하게 하는 생의 향락은 크
게 둘로 나누인다. 첫째는 그 자체가 죄악이 되는 술취함, 음란한 행위, 폭력 등이며
둘째는, 그 자체는 죄악이 아니나 심하게 빠져들 경우 죄가 될 수 있는 유흥
(amusement), 스포츠 등이다.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 성경에는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한자들을 열매 없는 나무
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는데, 호 10:1,2는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잎사귀만 무성한 포도나무로 비유한다.

=====8:15
착하고 좋은 마음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 )는 인간
의 영적, 지적, 의지적인 요소가 집중되어 있는 전인적(全人的)인 좌소를 가리킨다.
한편 '착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 )는 '칼로스'(* )의 변형으
로 '카코스'(* )의 반대어이다. '카코스'는 '올바로 쓰이지 못하는 펜'이나
비겁한 병사처럼 그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카코스'의
반대말인 '칼로스'는 목적에 적합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돈벌이나 사리사욕과
같은 낮은 차원의 성취에 몰두하지 않고 지혜나 의로움 등의 숭고한 일을 획득하는 일
에 열심인 태도를 묘사하는 말이다. 복음의 씨가 뿌려져서 좋은 열매를 맺기에 적합한
마음은 그 다음의 형용사 '좋은'이라는 단어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좋은'에 해당
하는 헬라어 '아가데'(* )는 숭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시에는 작은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아는 내면 상태를 가리킨다. 이 단어도 반대어인 '포네
로스'(* )와 비교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포네로스'는 '적극
적으로 악한 것'이란 뜻이며 '가장 큰 피해를 끼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포네로
스'의 반대어인 '아가데'는 선하고 유익한 것이라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달리 말해서 말씀을 듣되 그 말씀을 듣는데 그치지 않고 지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
은 염려, 재물에 대한 욕심, 그리고 쾌락과 같은 마귀의 시험을 '인내'로 견디어내
마침내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 '인내'는 모든 영적 열매가 발아(發芽)하고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요소이다.

=====8:16
등불 - 여기서 '등'은 한쪽 끝에 손잡이가 달리고 다른 한쪽에는 심지를 꽂도록 구
멍이 나있는 대롱 모양의 꼭지가 달려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접시모양의 적갈색 그릇
이었다. 등의 윗부분에는 기름 공급용과 공기 소통을 위한 두개의 구멍이 있었다.
그릇으로 덮거나 - 마태복음 5장 15절이나, 마가복음 4장 21절에는 '말'(*
, 모디오스) 즉 '되'로 표현되어 있는데 비해 본문에는 단지를 뜻하는 '스큐오
스'(*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곡식이나 밀가루 등을 넣어서 보
관하는 용기를 뜻한다. 등불을 피워놓고 이 그릇으로 덮어 버린다면 당연히 빛은 아무
곳도 비출 수가 없을 것이다.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 이 말은 침상을 의미하는 바 등불을 켜서 침상밑을 밝
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등경 - 이 기구는 등불을 올려놓을 수 있는 받침대를 말한다. 이것은 방 중앙에
있는 기둥에 부착된 쪽선반이거나, 벽에서 방 안쪽으로 돌출(突出)되어 있는 돌받침이
거나 또는 이와 동일한 용도를 위해 사용되는 금속 토막일 수도 있다.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 16-18절의 말씀이 앞에서 말씀하신 비유와의 연관성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면 본 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만일 숨
겨진 것이 악이라면 이 말씀은 10절과 12-15절에 언급되어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
판이 필연적으로 임하게 될 것임을 말하며 둘째, 만일 숨겨진 것이 선이라면 이는 예
수께서 제자들에게 사적으로 가르쳐 주신 진리의 말씀이 장차 제자들에 의해 밝히 드
러나리라는 말씀이다. 셋째, 본문의 말씀이 앞의 비유와 무관하게 독립되어 있는 것이
라면 빌 2:15의 말씀처럼 좁게는 제자들이, 넓게는 모든 성도들이 세상의 빛으로 드러
나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진리의 빛으로서 바른 길을 제시
해 주어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마 5:16).

=====8:17
숨은 것이...감추인 것이...없느니라 - 마치 '비밀은 없다'는 뜻의 속담과 같은 것
으로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된 말씀이다(마 10:26;눅 12:2).
빛이 있는한 감추이거나 숨겨진 것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빛으로서의 진리를
보여주어야 하는 동시에 어둡고 부정적인 국면들을 드러내고 밝혀내야 한다. 여기서
사실상 중요한 것은 신앙인들이 빛으로 온전히 서느냐의 여부이다. 왜냐하면 신앙인들
이 참다운 빛으로 선다면 그 빛에 의해서 숨겨지고 감추인 것이 드러나기란 필연적
(inevitable)이기 때문이다.

=====8:18
어떻게 듣는가...삼가라 - 말씀을 듣는자의 태도가 중요함을 말해주는 구절이다.
겸손하며 진실되게 말씀을 새겨 듣는 사람은 있는것 위에 더욱 풍성한 것을 받게 되지
만 교만하여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빼앗기게 된다. 이는 경제적 차원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의 논리와는 전혀 무관(無關)한
것이며 영적 생명의 법칙에 관계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여 풍성한 생명의 결실을 거두기를 원하시지만, 이러한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부
하거나 예수의 달란트 비유 중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하나님이 주신 재능
을 사장시켜 버리는 자는(마 25:24-30) 스스로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빼앗기
고 만다는 것이다.

=====8:19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가까이 하지 못하니 - 마태와(마 12:46-50) 마가(막
3:31-35)도 기록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이 이야기를 바알세불
논쟁의 결론 부분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과 다르다. 마태와 누가에서는 분명
하지 않으나 마가에 의하면 이들이 찾아온 이유는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
되어 예수를 데려가기 위함이었다(막 3:21). 그러나 19-21절의 말씀은 예수께 대한 친
속들의 무지를 드러내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방문을 또 다른 차원의 교훈(敎訓)
을 위한 동기로 활용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한편 예수의 친속들이 예수를 만
나려 하였으나 무리로 인하여 접근할 수 없었다는 데서 우리는 당시에 얼마나 많은 무
리들이 몰려들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무리들은 예수께서 일으키는
갖가지 이적들에만 관심을 가졌지 그의 가르침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마 13: 13).

=====8:20
고하되 - 막 3:31,32은 이 장면을 보다 상세하게 묘사한다. 즉 먼저 마리아 일행이
한 특별한 전달자를 보내어 면회를 신청하고 그 사람은 예수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면회를 요청하였으며 그리고 주변에 있던 무리들이 예수에게 친속들이 왔
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으로 되어 있다.

=====8:21
내 모친과...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 마태(마 12:48)와 마가
(막 3:33)는 이 부분에 대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는 예수의 반문을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는 이를 생략한 채 바로 교훈적 답변을 기록한다. 먼저 우리는
'내 모친과 내 형제'(* , 메테르 무
카이 아델포이 무)라는 표현이 관사없이 쓰여져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죄를
나눈 실제의 모친과 형제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친과 같은 사람, 형제와 같은 사람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Plummer). 이는 피를 나눈 육신의 혈육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요 19:26,27) 영적 공동체의 보편성을 암시한 말이라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가족의 개념은 '피를 나눔'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
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 얼마든지 보편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혈
통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요 1:13의 말씀은 이것을 밑받침해 준다. 중
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대로 행하는 것, 즉 하나님의 뜻(마 12:50;막 3:35)에
온전히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며 이것에 의해서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수의가족, 하
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 사람들'은 누구인지 불분명한데, 마태에
의하면(마 12:49) 제자들을 가리키고 마가에 의하면(막 3:34) '둘러앉은 자들'을 가리
킨다.

=====8:22
差)를 두었던 것처럼 보이나 막 4:35에 의하면 이때는 그날 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려주신 날 저녁 해질 무렵이었다.
호수 저편으로 - 마태(마 8:24)와 마가(막 4:39)는 '바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
는데 그것은 갈릴리 호수를 가리키는 유대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누가는 '갈릴리 바
다'라는 말이 이방인들에게는 이해가 잘 안될 것으로 보아 '호수'라는 표현을 사용한
듯하다.
떠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고'(* )는 항해 용어로 '출항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단어는 특히 사도행전에서 많이 사용되었다(13회).

=====8:23
잠이 드셨더니 - 예수께서는 쉴새 없이 진행되는 선교 사역으로 인해 매우 피곤해
있었으므로 배에 오르자 깊은 잠에 빠져들어가셨다. 한편 마태나 마가의 기록에 비해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잠이 드셨다는 사실이 더 일찍이 언급되어져 있다. 이는 폭풍의
흉흉함과 예수의 평화로운 휴식을 대조시켜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 광풍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일랖스'(* )는
'돌풍'(突風) 또는 '회오리 바람'을 뜻한다. 갈릴리 호수는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유명
한데 그러한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갈릴리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의 지리
적 특성 때문이다. 갈릴리 호수는 지중해면보다 200m가량 낮고 주변에는 높은 협곡들
이 둘러싸여 있다. 높은 곳에 있던 차가운 바람은 깔떼기 역할을 하는 협곡(ravine)을
따라 빠른 속도로 내려와 호수면에 있던 더운공기와 충돌하여 폭풍을 일으키게 된다.
이 광풍은 배에 몰아쳐 배의 조종을 불가능하게 할뿐 아니라 마태의 표현처럼 '큰 놀'
을 일으켜 배를 전복시키거나 가라앉힐 수 있을 만큼 격렬한 것이었다.
배에 물이 기득하게 되어 - 게속해서 몰아치는 높은 파도는 배 안에 물을 퍼부었고
그 물을 제자들이 퍼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물은 점점 배를 채워 마침내 배는 가라앉
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8:24
주여 주여...죽겠나이다 - 제자들 가운데는 배를 다루는 일에 전문가인 사람들도
있었으므로(눅 5:1-11),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
고, 따라서 자기들의 힘이 미치는대로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
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갔고 마침내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제자들은 예수를 깨워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주여' '주
여'라는 반복된 외침은 그들이 처한 다급한 상황을 능히 짐작하게 한다. 마가는 제자
들이 자기들의 곤경에도 불구하고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께 대해 원망하는 투의 말을
기록하고(막 4:38), 마태는 탄원의 말을 기록하고 있는데(마 8:25), 누가는 이 모든
것을 생략하고 단지 제자들의 급박한 보고만을 언급한다. 이는 예수께서 깨어나기만
하면 제자들을 구해주리라는 믿음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꾸짖으시니 - 마치 바람과 물결에 인격이 있는 것처럼 꾸짖었다는 이 표현에 대해
혹자는 예수께서 바람과 물결 배후에 있는 악령(惡靈) 또는 악마적인 세력을 꾸짖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Tyndale). 그러나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
병을 꾸짖었던 것처럼(눅 4:39), 본문에서도 바람과 물결 그 자체를 꾸짖은 것으로 보
아야 한다는 해석이 더 타당하다(Hendriksen). 이는 자연계를 한마디 말씀으로써 제어
하시는 예수의 신적 권능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잔잔하여지더라 - 마태(마 8:26)와 마가(막 4:39)는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하여
잔잔해진 상태를 부각시킴으로써 예수의 권능을 강조한다.

=====8:25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 다소 위급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함께 있는
한 안전하리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 제자들을 질책하신 말씀이다(막 4:40). 두려움에
떤 제자들의 불신앙은 예수의 평안한 모습과 대조되며, 시험의 때에(13절) 마땅히 취
해야 할 인내의 태도를 망각하였음을 보여준다. 막 4:40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
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는 강한 어조의 책망과 비교된다.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 제자들은 예수의 권능을 목격하고 다시 한 번 놀란다.
여기서 느끼는 두려움과 기이함은 조금전에 자연력의 위력 앞에서 느꼈던 죽음의 두려
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신적인 능력 앞에서 느끼는 경외심(敬畏心)을 가리킨다
(7:16).
저가 뉘기에...순종하는고 - 제자들은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고(6:8) 귀신을 쫓아내
며(6:18),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을 목격하였다(7:11-17). 그럴때 마다 그들은 놀라기
만 할 뿐 예수를 선지자중 한 사람으로 여겼었다(7:16). 그러나 지금 제자들이 경험한
사건은 너무 놀라운 것이었으므로 예수의 정체에 대한 물음을 묻는다. 자연 현상을 지
배하시는 예수의 권능에서 신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
직 예수의 신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단지 놀라운 감정에 사로잡혀 '저가 뉘기
에'라는 물음만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답되지 않은채 하나의 강한 의문으로
남는다. 도대체 자연 현상을 한 마디의 명령으로 순종시키는 예수는 누구인가?

=====8:26
거라사인의 땅 - 이 지명의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히 밝히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첫째 마가와 누가의 기록상으로는 지명이 일치하지만 마태는 '가다라'(*
, 가다레논)라고 기록함으로써 불일치를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거라
사는 갈릴리 호수까지 거리가 무려 40km이상 떨어져 있어서 예수께서 육지에 내린 직
후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고 기록한 27절과 부조화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가다라'
는 호수에서 9km정도 떨어져 있어 거리상 거라사 보다는 더 타당한 것으로 보이나 9km
의 거리가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역시 지지받기 힘들다. 한편 이러
한 이유로 해서 제 3의 견해가 대두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오리겐(Origen)이
주장한 것으로 본래의 지명은 게르게사(Gergesa)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복음서 기자
들이 이 지명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들이 알고 있는 부근의 마을 이름을 기록했다는 것
이다. 또다른 견해는 가다라 지방의 가파른 동쪽 제방에 위치한 '게르사'(* )
라는 지명이 바로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주는 곳이라는 주장이다. 또 하나의 견해는 예
수께서 귀신들린 자를 만난 곳이 갈릴리 호수 근처인데 그곳을 '거라사' 지방 또는
'가다라'로 표현한 것은 그곳이 이 지명들의 지배권(支配權)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여러 견해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
증서는 없으며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성서의 본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원
칙에 입각해서 생각할 때 마지막 견해를 지지할 수 있다.

=====8:27
귀신들린 자 하나 - 누가와 마가는(막 5:2) 귀신들린 자 한 사람만을 언급하고 있
으나 마태에 의하면 둘이었다(마 8:28). 여기서 누가의 관심은 귀신들린 자의 수가 아
니라 이방 땅 거라사에서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신 사실 자체였다.
오래 옷을...거하지도 아니하며 - 이 귀신들린 자는 집을 나가 자신을 정상 생활로
부터 격리하였으며,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모두 잃어버린 채 벌거벗고 산 지 이미 오래
되었다. 표면적인 증상으로 미루어 볼 때는 악성 정신질환을 앓은 것 같으나 누가는
그가 분명히 귀신에 들려있다고 확증한다. 이 귀신들린 자는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일도 하였다(막 5:5). 인간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태를 보는 듯한 이 모습은 죄인의 영
적인 상태를 형상화(刑狀化)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덤 사이에 - 무덤이 귀신들린 자의 거처로 묘사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팔레스틴에는 바위에 동굴이 많아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들이 은거하
는 거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무덤이 죽음을 의미한다면 귀신들린 자의 모습은 영적
인 죽음 상태에 있는 죄인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일 수있다.

=====8:28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 귀신들린 자가 엎드려 절한 것은(막 5:6) 결코 경
배의 행위가 아닌 예수의 능력에 굴복한 표현이다. 눅 4:33-37에서나 그 밖의 귀신 축
출 이야기에서처럼 더러운 귀신들은 예수가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러한 귀신의 고백은 예수와 화해를 하기 위한것도 아니고 예수께 대한 복종
과 신앙 고백을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예수의 마음을 약하게하여 적절한 타협을 얻어
내려는 본능적 자기방어의 술책(intrigue)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귀신의 고백은 정
확한 사실을 말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제자들은 예수의 정체를 아직 알지 못하고 있으
며(25절), '저가 뉘기에'라는 의문만을 제기했었다. 결국 귀신의 고백은 제자들과 복
음서 독자들의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질 수 있다.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히브리인들의 관용어로 '나를 버려두고 네 일
에나 신경쓰라'는 뜻이다. 귀신은 예수의 명령을(29절) 들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예수
의 신성을 인정하는 고백을 하고 그 앞에 엎드려 굴복(屈服)의 표시를 하여 예수의 마
음을 누그려 뜨려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귀신은 예수께서 자기를 멸할 수 있다는 사실
을 알고 있다(요일 3:8). 그리하여 귀신은 예수에게 피차에 상관말자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적대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마귀는 사람들이 구
원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을 하고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려 하시기 때문이다(8:12;
요 3:16).
괴롭게 마옵소서 - 마태에 의하면(마 8:29) 귀신은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
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말했다. 귀신의 최후가 괴로움과 멸망으로 끝나버리
고 만다는 점을 암시한다(계 20:1-3).

=====8:29
귀신이...광야로 나갔더라 - 귀신이 한 사람을 완전히 정복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귀신들린 자는 늘상 정신 이상의 상태로 있었고(27절) 때로 귀신의 특별한 작용에 의
해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마 8:28). 그리하여 사람들
은 그를 쇠사슬로 매어 두곤 했지만 귀신들린 자는 번번히 그것을 끊고 광야로 나갔다
(막 5:4). 이처럼 마귀는 사람의 주체적 의지를 파괴하고 마귀의 의지대로 통제하고
조종함으로써 사람을 파멸로 이끌고 간다(마 8:28-34;9:32;12:22;15:22;막 1:23-26;
16:9). 그러나 이처럼 강한힘을 가지고 있는 귀신이 예수 앞에서는 순한 양같이 꼼짝
못하는 것은 예수가 누구인가를 가히 짐작케 한다.

=====8:30
네 이름이 무엇이냐...군대라 -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은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라 귀신에게 묻고 있음을 말해준다. 고대의 민속 신화에는 귀신 축출자가 귀신의
이름을 물어서 귀신에 대한 우위(優位)를 확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하튼 귀신의
이름은 '군대'로 드러났는데, 이 이름은 많은 귀신이 들어갔음을 뜻한다. 실제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 레기온)는 군대 용어로 6,000명의 단위 군대를 뜻한
다. 한 귀신이 한 사람에게 있는 경우와 한 사람에게 여러 귀신이 있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가령 2절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한때는 일곱 귀신에 들려 있었음을 전해주는
보도가 있고 11:24-26에는 한 사람이 한 귀신에 들렸을 때보다 일곱 귀신에 들려 더
악화된 경우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것에 비추어 볼때 군대 귀신에 들린 이 사람이 얼
마나 극심한 고통을 받았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8:31
무저갱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뷔쏜'(* )은 부정 접두어 '아'(* )
와 '깊은'의 의미를 가진 '바두스'(* )의 합성어로 바닥이 없는 깊은 장소를
뜻한다. 이는 끝없이 깊은 곳이며 마귀가 일시적으로 갇힐 곳이다(계 9:1;20:3). 또
마 25:41에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이라 표현되어 있다.

=====8:32
많은 돼지 떼가...이에 허하신대 - 막 5:13에 의하면 이 돼지 떼는 무려 2,000마리
에 달했다. 귀신은 이제 예수의 명을 거역하고 그 사람에게 계속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귀신은 자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는 이를 허
락하셨다. 결국 2,000마리에 달하는 돼지떼의 몰사로 말미암아 돼지떼의 주인에게 막
대한 경제적 손실이 돌아갔고 이 사실은 혹자들에게 도의적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였
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 사람의 영혼이 2,000마리의
돼지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다는 점이다. 예수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마 16:26).

=====8:33
비탈로 내리달아...몰사하거늘 - 사건 발생 지점은 분명히 호수에 근접한 곳이었
다. 갈릴리 호수 동편에는 급한 비탈이 있고 비탈 위에는 평지로 되어 있어 그곳에서
돼지를 먹였다.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자 이천여 마리에 달하는 돼지 떼가 비탈길
을 내리달아 갈릴리 호수에 빠져 몰사(沒死)하는 큰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에 대해
서 혹자는 왜 예수께서 귀신들을 돼지 떼에 들여 보내 다 몰사하는 상황을 초래하게
하셨느냐고 문제를 제기하기도한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짐작해 볼 수 있는것은 다
음과 같다. (1)앞절 주석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어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이천 마리의 돼지는 오히려 하찮은 것이라 할 수 있다. (2)귀신들이 돼지 떼와 함께
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그 귀신들에 붙잡혀 무수한 고통을 당할 제2, 제3의 피해자는
없을 수 있게 되었다. (3)율법상 돼지는 그 고기를 식탁에 올릴 수없는 부정한 짐승
으로 간주되었다(레 11:7,8). 따라서 이들을 몰사시킨 예수의 처분은 율법에 근거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4)예수께서는 온 우주의 주권자로서 세상에 있는 사물을 임
의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과 권능이 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예수의 판단과 행위
는 정당하며 실수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8:34
치던 자들이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는 부정(unclean)한 것으로 규정되었고 물
론 먹지도 않았다(레 11:7). 또한 탈무드에는 '돼지를 기르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리
라'는 격언이 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 주변에는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
다. 이런 이유로 해서 돼지를 치던 자들은 이방인으로 짐작된다.
도망하여...고하니 - 돼지를 치던 자들은 예수와 귀신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목격
(目擊)하고 한편으로는 자기들이 치던 돼지 떼의 손실에 대해 당황했을 것이고 또 다
른 한편 예수의 권능에 대해 심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도망' 하였다는
표현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그들은 이 신기하고도 두려움을 느낄 만큼 놀라운 사건에
대해 동리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8:35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 옷을 입었다 함은 그가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었음
을 뜻한다. 그는 완전한 정상인이 되어 예수의 발 아래 앉아 있었다. 아마 그 사람은
자기를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려 주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의 경배를 드렸을 것
이다. 불과 조금전만 해도 발가벗은 몸으로 이리 저리 방황하며 때로는 괴성과 괴력으
로 사람들을 위협하였던 사람이 이제는 옷을 단정하게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점잖게
앉아있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야기시켰다. 그들이 두려워하였다는 것
은 지금 그들에게 직면된 상황이 매우 파격적(破格的)임을 뜻하며 인간의 논리적 사고
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또는 신적 사건이었음을 입증한다.

=====8:36
구원받은 것을...이르매 - 아직 사건의 자세한 전모를 모르던 상황에서 돼지치는
자들이 자세한 사실을 증거하자 몰려온 사람들의 두려움은 더욱 증폭되어 간다. 한편
'구원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소데'(* )는 '구원하다', '안전하다' '견
실하다'의 뜻을 가진 '소스'(* )에서 유래한 '소조'(* )의 제 1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이다. 귀신들린 상태에서 원상 회복된 상태를 구원받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먼저 그는 귀신에 붙잡힌 육신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더 나아가 예수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영적인 구원을 받기에 이르렀음에
틀림없다. 결국 구원은 육신과 영혼이 죄로 말미암은 모든 저주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8:37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시기를 구하더라 - 예수께서 일으키신 귀신 축출 사건은 그곳
주민들로 하여금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크게 두려워하여'라는 표
현은 신적인 능력에 접한 인간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25절에서도 제자들은
자연을 지배하시는 예수의 권능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거니와, 거기서의 두려움은
'신적인 능력'에 대한 경이의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저들이 느낀 두려움은
미신적인 것이었다고 짐작된다. 이런 시각으로 볼 때 이천여 마리의 돼지 떼가 물에
빠져 몰사한 사건은 자기들이 믿었던 미신의 재앙(woe)이었다고 생각할 수있었을 것이
므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은 더없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리
하여 그들은 죽은 돼지 떼에 대해서는 감히 아무런 불평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떠나주
기를 요청하였다. 그들은 죽은 것과 다름없던 귀신들린 사람의 구원을 보았으나 그것
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물질의 손실만을 생각하여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실수를 범
한 셈이다. 예수께서는 그 지방에서도 구원 사역을 펼치실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원하지도 않는 무리들로부터 아무런 미련없이 떠나
신다. 이것은 예수를 알아보고 더 머물러 달라고 요청했던 사마리아인들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일이었다(요 4:40).

=====8:38
귀신 나간 사람이 - '귀신 나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셀렐뤼데이'(*
)는 '엑세르코마이'(* )의 과거 완료 능동태로서 과거 시점
에서 완료된 상태를 뜻한다. 즉 귀신이 나간 것은 이제 이미 과거의 일이며 이제는 완
전히 정상인임을 말한다.
구하였으나...저를 보내시며 - 이 구문은 미완료과거 중간태로 되어 있어(*
, 에데이토 아우투) 몇번이고 반복해서 계속 구하였음을 뜻한다.
이 사람은 너무나 귀한 은총을 체험했으므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것은 어쩌면 당연
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거듭되는 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셨는데, 이는 예수께서 그를 위한 다른목적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었
다. 주님은 각 사람의 처지(處地)와 재능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당신을 섬기게끔 하
신다(요 21:21,22).

=====8:39
하나님이 네게...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 예수께서는 그를 단지 귀신의 고통
으로부터 구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증거자로 삼으셨다. 예수께서 그의 요청을 받
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로 하여금 그 지방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전파하게 하려는 목
적 때문이었다. 예수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큰 일을 일일
이 전하라고 명하신다. 여기서 주님이 귀신 축출 사건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고 말
씀하신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일과 자기의 일을 동일시(同一視)하
는 놀라운 계시가 있다. 이것은 예수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이며 나아가 제자
들이 제기한 바 있는 예수의 신분에 관한 물음에 대한(25절) 명확한 대답이 되는 것
이다.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하라고 했는데, 이 사
람은 성내에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전하고 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온 성'을 다
니며 자기에게 있었던 일을 전파하였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방식은 다르다 하더라도(직접 예수를 따르던가 아니면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저마다
은총을 나누어야 할 소명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8:40
환영하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덱사토'(* )는 '기쁨으로
맞아들인다'는 뜻으로 무리들이 예수를 진심으로 환영하였음을 뜻한다. 이들이 그렇듯
환영한 이유는 아마 거라사 지방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다 기다렸음이러라'는 표현 속에는 예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
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다.

=====8:41
회당장인 야이로 - 회당장은 회당의 수반(head)으로 집회를 인도하고 회당 건물의
유지, 보존, 운용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예배의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
고 있으며 또한 토라(율법)를 낭독하거나 설교하는 사람을 선정하는 권리를 갖고 있었
다. 이렇게 볼 때 회당장은 지방에서는 최고의 상류 계층의 일원으로 사회적 지위가
있고 존경을 받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 발 아래 엎드리는 것은 동양의 보편적인 경의의 표시였
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경의를 표
하며 자기 집으로 가주기를 간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중대한 사건이 있음을 말해준다.

=====8:42
열 두 살 먹은 외딸 - 야이로의 의외의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가 설명되고
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자식인 외딸이 그것도 열 두살의 젊은 나이로 죽어가고 있다
는 것이다. 열 두살이라는 나이가 유대 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바야흐로 결혼할 수 있
는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나이를 뜻하므로 이제 막 피어 나려는 한 여성의 인생이
여기서 마감 된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죽어감이러라'의 헬라어 '아펠네
스켄'(* )은 미완료 과거로 되어 있어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
었다는 뜻이 된다. 외동딸이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야이로의 애타
는 심정은 체면 불구하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하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무리가 옹위하더라 - 아마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이 예수의 도움으로 회생하게 되기
를 바라는 동정의 마음으로 또는 과연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어갈 것인가에 대한 호기
심으로 무수히 몰려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몰려든 무리들은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이
살아있는 동안에 도착하시지 못하게끔 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더욱 결정적
인 이유는 가는 도중에 혈루증을 앓던 여자를 만난 일 때문이었다(43-48절).

=====8:43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이 여인이 병을 앓았던 햇수와 야이로의 딸이 살아온 햇
수가 우연히도 일치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혈루증'(血漏症)이라는 병은 대개 혈관
조직이 약하여 혈관의 틈을 통해 피가 몸 밖으로 나오는 병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만성
출혈증으로서 여인의 자궁 벽에 종기(boil)가 생겨 규칙적 또는 불규칙적으로 피가 흘
러나오는 병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 병이 죄에 대한 하
나님의 징계의 결과라고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이 병은 의식적(儀式的)으로도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 병에 걸린 자를 멸시 천대하였고 완쾌될 때까지 사회로부터 격
리시켰었다(레 15:1-12, 25-27).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이 여인은 삶의 의지를 버리
지않고 끝임없는 투병 생활을 해왔으며, 마침내는 예수께 구원을 얻고자 무리들 틈에
끼어 예수에게 접근하여 온 것이다. 만약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다가 발각되는 때에는
어떤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여인이 취한 행동은 대
단한 결단력과 의지를 보여준 행위였다.
고침을 받지 못하던 - 열 두해를 통하여 병고침을 얻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고,
갖고 있는 가산(家産)을 다 탕진하였지만(막 5:26) 병세는 오히려 악화되어 가기만 했
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절망의 상황에서도 여인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8:44
옷가에 손을 대니...그쳤더라 - 여인은 매우 은밀히 예수의 뒤로 접근하여 예수의
옷가에 손을 대었다. 그녀가 그렇게 은밀히 접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의 병이
부정한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는 할 수가 없었고, 또한 예수께 직접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것은 예수의 옷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막 5:28). 여인이 손을 댄 옷은 유대인들이 입는 겉옷, 더 정확하
게는 이 겉옷에 달린 술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의 겉옷은 네모 반듯한 정방형의 천인데
가운데는 머리를 내어놓을 구멍이 있고 그옷의 네 귀에 술을 드리우고 푸른 실로 장식
하였다. 이 술은 율법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민 15:37-41) 바리새인들은 과시
하기 위하여 이것을 크게 하였기 때문에 예수께 비난을 받기도 했다(마 23:5). 하여튼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인은 그녀의 믿음대로 혈루증이 즉시 그치는 이적을 경험했다.
한편 '그쳤더라'(* , 에스테 헤 뤼시스)는 '흐르기를 그쳤더라'
는 뜻으로 누가에게 볼 수있는 독특한 의학적 표현이다.

=====8:45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 예수의 이 물음은 옷가에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 몰라
서 물으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각 사람의 심중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은밀
한 생각까지도 꿰뚫어 보시기 때문이다(요 13:21-30). 그럼에도 예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신 까닭은 다음의 몇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여인의 병이 나았음을 사람들 앞
에 드러내어 증거하기 위함이다. (2)만약 그녀가 예수의 옷을 만진 이유가 미신적 기
대 때문이었다면 그녀의 믿음 속에 들어 있는 미신적(迷信的) 요소를 제거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시키시기 위함이다. (3)사람들로 하여금 여인의 병 나음을 보고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4)그녀에게 구원의 확신과 아울러 위로와 평강의
말씀을 주시기 위함이다.
옹위하여 미나이다 - 예수 주변에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들었고 그 많
은 사람들이 좁은 길을 밀치며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옆에 있던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예수의 옷에 손을 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제자들이
듣기에 조금은 의아스러울 수도 있었다.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점잖게 '주여 무리가 옹
위하여 미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예수의 질문을 무시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막
5:31에 의하면 제자들은 강한 어조로 예수의 질문이 터무니 없음을 지적하였음을 알게
된다. 이는 누군가 예수의 권능을 힘 입고자 의도적(意圖的)으로 그의 옷에 손을 댄
자가 있음을 인지하고 물으시는 예수의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몰이해에
서 비롯된 것이었다.

=====8:46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 이 표현은 예수의 몸에 있던 일정량의 능력이 빠져나가
소모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옷에 의도적으로 손을 댄 사람에게 치유의 사
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 사건의 장본인을
밝히려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45절 주석을 참조하라.

=====8:47
떨며 나아와...고하니 - 예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병이 나은 사실과 그것을 알
고있는 예수의 능력에 깜짝 놀란 그 여인은 자신의 은밀한 시도가 공개되고 수많은 군
중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자 당혹감과 긴장으로 떨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유대 사회에
서 여자들은 남자의 옷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고, 부정한 병에 걸린 자가 다
른 사람의 옷에 접촉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부정이었으므로(레 15:1-12, 19-27) 여
자는 그 사실에 대한 추궁이 두려웠을 것이다. 마태는 여인이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
다고 보도하는데(마 5:33) 비해, 누가는 초점을 증언의 공개성에 맞추어 '모든 사람
앞에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여인의 병 나음은 공개적으로 증명되었으며 예수의 신적
인 권능 또한 모든 사람 앞에서 증거되었음이 강조되는 것이다.

=====8:48
딸아 네 믿음이...평안히 가라 - 예수께서는 먼저 여인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딸
아'하고 매우 부드럽게 부르고 있다. 여기서 '딸아'(* , 뒤가테르)는 다
정한 목소리로 딸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인 바,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를 소유
한 예수의 신성을 엿보게 한다. 다음에 예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 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은 믿음 그 자체의 능력으로 구원을 획득했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녀의 믿음은 치유가 성취되게 하는 매개체(媒介體)의 역할을 한 것이
다. 즉 그녀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에 의해 자신이 치유될 수 있도록 사용
된 도구의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여인의 믿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지만 예수께서는
그 적은 믿음을 귀중히 여기셨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끝으로 예수께서는 '평안히
가라'는 축복의 말씀을 해주신다. 아마 이 평안은 영혼과 육신의 안녕을 동시에 뜻하
는 온전한 의미의 샬롬이었을 것이다.

=====8:49
당신의 딸이...괴롭게 마소서 - 예수께서 여인에게 마지막 축복의 말을 하고 있을
즈음에 야이로의 집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비보(sad news)가 날아들어와 이제 막 병에
서 치유된 여인에 대한 축하의 분위기를 일순간에 뒤바꿔 버리는 장면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이의 태도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취하였던 태도(요
11:21-32)와 흡사하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인으로서 표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 평범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께서 이미 죽은 자를 살리신 권능을 행하셨던 것을(눅
7:11-17) 기억하였다면 그렇게 쉽사리 절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50
믿기만 하라...구원을 얻으리라 - 누가는 마가에는 없는(막 5:36) '구원을 얻으리
라'는 약속을 첨가시키고 있다. 야이로는 한 혈루증 환자가 예수의 권능으로 치유되는
것을 목격했을 때만 해도 자신의 딸이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소망으로 가득했을 터이
나 집으로부터 전해져온 딸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는 한없는 절망에 빠져들어갔을 것이
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먼저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이는 처음 자신을 찾아왔
을 때의 신뢰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며 그러할 때 야이로의 딸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믿음의 성격에 대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는 것
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당신
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그분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구속사(救贖
史)를 통해 볼 때에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같이 뵈는 상황에서도 믿는 자들
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구원을 받았던 사실을 익히 발견할 수 있다(시 22:4;사
26:3,4;43:2). 또한 이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믿음직한 사랑과도 일맥상통한다(사 42:3).

=====8:51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 예수께서는 집에 데리고 들어가는 수행원의 수를 세 제
자로 제한하고 있다. 이 세 제자를 따로 구분하여 데리고 간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였
는데, 지금이 처음이고, 변화산에 오르실 때(9:28)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대 결산을
하실 때였다(막 14:33). 이 세 사람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
특별히 긴요한 역할을 감당할수 있도록 열 두 제자들 중에서도 예수께로부터 각별한
훈련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8:52
울며 통곡하매 - 집 안에서는 이미 집안 식구들이 딸의 죽음을 인하여 울며 통곡하
고 있었다. 유대인의 장례식에는 모인 사람들이 같이 우는 풍속이 있었고, 경우에 따
라서는 직업적인 애곡꾼들을 고용하여 울게 하기도 하였다(렘 9:17). 마 9:23에 의하
면 그들 중에는 피리를 부는 이들도 있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말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딸 아이
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예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이며 누가의 문맥에서도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1)53절은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였음을 밝히고있다. (2)55절은 예수의 명령
에 따라 '그 영'(Her spirit)이 돌아왔다고 진술하는데, 이는 영과 육이 분리된 상태
곧 죽음 상태를 전제로한 표현이다. (3)요 11:11에서도 예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잠든 것이라고 표현했던 일이있다.

=====8:53
비웃더라 - 아이의 죽음을 분명히 확인했고, 예수의 신적 권능을 알지 못하던 사람
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이 호곡자(號哭者)들의 비웃음은 아이의
분명한 죽음과 또한 분명한 부활을 증거해 주는 간접 자료가 된다. 막 5:40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이 비웃는 무리들을 다 내보내고 나서 아이를 일으키셨다. 불신자들 앞에
서 예수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8:54
손을 잡고...일어나라 하시니 - 마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아람어(Aramaic)로 말씀
하셨다(막 5:41). 예수는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율법에는 시체에의 접촉
을 부정한 것으로 규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마찬가지로 율법이 금하고 있는 나환자
에게도 손을 대었던 일이 있다(5:13). 이러한 예수의 행위는 그의 뛰어난 사랑을 표현
해 주며 율법을 초월하여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예수의 부르는 소리는 너무나 다정
하여 마치 엄마가 아이를 깨우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8:55
영이 돌아와...일어나거늘 - '영이 돌아와'라는 말은 누가만의 섬세한 표현으로 생
명이 즉시 회복되었음을 가리킨다. 예수의 부드러운 음성은 소녀를 죽음으로부터 조용
히 살려냈다. 막 5:42에 의하면 아이가 일어나 걸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 아이가 완전
히 회생했음을 증거해 준다.
먹을 것을 주라 -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이 너무 흥분되어 미처 생각하지 못한일을
섬세하게 배려해 주는 예수의 자상하심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아이의 회생을 공
식적으로 확증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
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질적 도움도 주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8:56
말하지 말라 - 예수의 함구령(緘口令)은 여러모로 보아 지켜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애곡하던 자들에게 딸 아이가 살아났으니 더이상 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도 해주어야
할것이고 딸 아이가 건강한 모습으로 다닐 때 그 사연을 묻는 자들에게 설명도 해주어
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 9:26에 의하면 실제로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짐작된다. (1)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단지 기적이나 일으키는 마술장이 정도로 오해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2)일찍이 예수께서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해 보이라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친 일이 있었다(4:9). 여기서도 예수께
서는 대중들 앞에 자신의 위력을 과시하여 영웅으로 행세하고자 하거나 자신의 그리스
도됨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3)예수의 지상 사역의 궁극 목적이 결코
사람들의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4)아
이의 부모들이 지나치게 흥분하여 나타난 사건에만 집착하여 본질적인 문제 즉 하나님
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망각하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했다. 그러나 어떤것이든 그 속
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이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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