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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 12장 (김충만 목사)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3.07.11|조회수701 목록 댓글 0
(2/13) 요12:1-11 | 베다니교회에는 향유가 가득하다.



본문 관찰

마리아(1-3)
가룟 유다(4-6)
예수님(7-8)
대제사장들(9-11)




베다니교회의 풍경

에브라임에서 베다니로 제자들과 함께 올라오신다(1, 11:54).
유월절 6일 전의 일이다. 베다니는 예수께서 불과 얼마 전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다. 아마 나사로의 가정에서 예수님과 그 일행들을 초대한 모양이다. 잃어버린 것 그 이상인 이미 죽은 자가 살아났으니 '잔치'를 마련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무엇보다 지금까지는 주는 자로서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받는 자로서 말이다. "예수를 죽이려고"(11:53)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10) 그 사이에 배설된 잔치에서 [베다니교회]의 풍경을 맛보는 것은 아무래도 좀 무리일까. 하지만 베다니교회에도 새 남매들만 있는 게 아니다. 좀 더 가까이 가 보자.



마리아(1-3)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붙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

마리아에게 이 비싼 향유가 있었다는 것으로 봐 상당히 부자였지 않았나 싶다. 족히 하루 길이 넘는 곳에 계신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11:3)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알리고, 또한 돌무덤(11:38)을 소유할 정도였음에서 볼 때 역시 그렇다. 사실 그녀가 부자였다는 것이 이 본문과 별 상관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마음이며, 헌신이다.

마르다는 봉사함으로, 마리아는 예배(헌신)함으로, 나사로는 증인으로 각각 주님을 섬긴다. 일용할 양식 뿐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 주님의 말씀이 나누어지고 있다. 잔치에는 이 모든 게 다 있다. 그래서 이 잔치에는 예배의 그림이 있고, 교회의 풍경이 있다. 주님은 평범한 잔치를 이처럼 영광스럽게 하신다(7-8). 요한은 비로소 12장에서 와서야 주님께 받은 은혜를 다시 주께로 돌려드리는 성도의 출현을 알린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다. 한 건강한 예배자 마리아를 주목하는 이유는 또 있다.

가룟 유다의 발빠른 계산에 의하면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3a)은 300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고가품(高價品, 5a)이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 데나리온이었는데 그렇다면 이는 거의 1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녀는 이 귀한 것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린다. 여인은 이것이 예수님보다 더 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결코 주께 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받은 복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그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조그마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이 헌신은 불가능했다.

부자이기 때문에 이 정도는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발에 붓고, 그것도 부족해서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3b)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당시 유대 문화권에서 여자의 머리는 곧 영광의 상징이었는데 이를 발을 씻는 도구로 드렸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을 가장 아래로 비하(卑下)시키는 섬김과 겸손의 헌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여인에게는 300 데나리온을 드려도 아깝거나 후회스럽지 않은 신앙이 있었다. 주님은 바로 이 중심을 보셨다.



가룟 유다(4-6)
대제사장들(9-11)

"이 향유를 어찌하여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5)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10)

그는 이미 6장에서 불신앙의 계보에 오른 사람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70-71) '가난한 자들'(5-6)을 말하는 유다의 명분은 매우 합리적이고, 그것만큼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겉모양은 신앙 좋은 성도(聖徒) 같지만 그의 진심은 '도적'(盜賊, 6)이다. 주님의 평가는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신다. 그는 알곡과 공존하는 가라지 일 뿐이다. 알곡들로 가득한 베다니교회 회중으로 서 있지만, 그리고 그럴듯한 말로 믿음 깊은 사람으로 행세하고 있지만, 하지만 이런 혼돈스런 말로 정작 바르게 헌신하고 섬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도적이자 마귀일 뿐이다. 그는 예수님이 아니라 300 데나리온을 택한다. 신앙이 따라주지 않으면, 믿음의 눈을 잃어버리면, 무수한 표적과 말씀들을 들으며 3년이나 되신 시간들을 주님과 동거동락(同居同樂)했다 하더라도 -유다는 등록 후 3년이 된 성도다. 제자훈련 수료를 앞둔 지도자다- 유다처럼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 부분이 좀 충격이고 혼돈스러운 부분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준비되고 있는 주님의 교회(마16:18)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들만이 아니다.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는 대제사장들도 있다. 이게 교회란 말인가? 그런데 주님은 이게 교회라 하신다. 그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聖徒)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1:2)이라 부르신다. 이처럼 어느 시대나 교회는 이 두 그림이 공존한다. 천상의 교회 풍경에는 없지만 지상의 교회 풍경에는 이 그림이 천연덕스럽게 한쪽 모퉁이를 차지한다. 이게 현실이다.

그러나 진짜 아름다움은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할 줄 알고 그것을 다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헌신자'들이 있고, 이런 흔들리는 교회임에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오고 있음에 있다(11). 유다(도적, 마귀)가 있다고 교회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대제사장들이 기득권을 쥐고서 예수님이 그리시려는 그림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것처럼 보여도 상관없다. 주님의 것을 훔쳐가는 깨진 바가지들이 있어도 진리의 샘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부스러기 묵상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7)

주님은 마리아의 헌신에서 임박한 자신의 장사(葬事, 7)를 보셨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장차 … 보리라'의 꿈이 현실로 임하고 있음을 아셨다. 종종 우리의 헌신은 이처럼 상상 밖의 기적이 되곤 한다. 이제 곧 숨가쁘게 진행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구속의 파노라마를 마리아는 보고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미리 주께 드린 것이다. 예수님을 잡아 줄 제자가 있는 반면에 '장차 … 보리라'(1:42,50-51)의 완성인 십자가를 보고 있는 자도 있다. '장차 … 보리라'의 꿈은 마침내 현실로 임하고 있다. 주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자기 계시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종종 유다처럼 언행(言行)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사실이다. 그래서 헌신이고, 충성이고, 믿음이 아닌가. 세속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마리아가 틀리고 유다가 옳다. 가끔은 이 공식이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명분과 상식과 통념과 다수결이 세를 잡고서 밀어붙이면 꼼짝없이 마리아는 광신자가 되고 만다. 그래서 아무도 마리아처럼 앞서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눈치보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언제나 마리아가 옳았다는 것을 뒤 늦게 야 알게 된다.

해서 말인데, 지금은 마리아가 필요한 시대다. 유다로는 안된다. 다같이 망한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알고, 믿고, 고백하고, 확신하고 있다면 그것만큼을 주께 드리고 사는 사람이 필요하다. 마리아처럼 살아보자. 나를 한 알의 밀알로 드려 주님 영광이 이루어지는 그런 헌신으로 이 땅의 교회로 하여금 주님의 향기를 발하도록 해 보자. 생각만큼 그리 어렵지 않을거다. 12장까지 듣고, 보고, 알고, 고백했는데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다면 분명 유다는 아닌데, 그렇다고 마리아도 아니다. 내가 마리아일거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주님을 모독하는 것 아닐까 싶다. 내 기진 것을 꼼꼼하게 찾아보는 일, 오늘의 숙제다.



(2/14) 요12:12-19 |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



본문 관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13-16)
새 부류의 무리들
-유월절 순례자들(12,18)
-나사로의 증인들(17)
-바리새인들(19)




스가랴 9장 9절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임박하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이 시작됨에서 그렇다. 베다니의 잔치에서 시작된 향유 냄새가 예루살렘을 향해 부는 복음을 타고 온누리에 퍼질 기지개를 하고 있는 셈이다. 잔치가 벌어지던 그날 밤에도 예루살렘에 먼저 올라온 '많은 사람'(11:55a)이 "저가 예루살렘에 오지 않겠느냐?"(11:56b)며 예수의 향기를 기다리고 있다. 예루살렘의 분위기(11:57)와 전혀 다른 잔치(2)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묵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적(敵)은 사사로운 유추(추론, 상상)라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뭔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 무엇이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표를 따라 돌이킬 수 없는 행진을 시작하고 있는 느낌이다. 예루살렘의 아침은 이렇게 밝아오고 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14-16)

'호산나!'를 외치는 전도자들의 언행에 주님은 14절로 화답하신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메시야 언약의 성취가 '장차 …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끌어 당기고야만다. 주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 길에 오르신 것은 이미 스가랴가 기록한 성경의 말씀과 같았다 :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아라, 네 임금이 오신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슥9:9, 표준새번역) 제자들마저도 알아차릴 여유도 없이 계시는 성취된다(16).

그분은 이제 메시야 사역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다. 때는 왔고, 수난의 대장정은 시작된다. 예루살렘 입성은 죽음의 문에 들어서는 하나의 시작이지만 이것 역시 철저하게 성경의 계시를 성취하는 것과 균형을 잡는다. 그랬다. 주님은 언제나 홀로서기가 아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으로, 죽음까지도 그렇게 받아들이시며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그분은 사람들을 죽이고 영토를 더 넓혀서 개선하는 로마 제국주의의 개선장군과는 다르다. 포도들을 이끌고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그들을 사자의 밥이 되게 하는 것으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그런 인간 승리자가 아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왕'(13)으로 입성하신다. 죽임 당하실 어린 양으로 입성하신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다시 오실 만왕의 왕, 심판주로 다시 오실 '장차 …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성취하시기 위해 지금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



새 부류의 무리들

나는 어떤 무리의 일원이 되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맞이하고 있는가? 역시 이곳에서도 모두가 다 주님의 입성을 진심으로 맞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 유월절 순례자들(12-13,18)

"호산나(Hosanna)!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13, 표준새번역)

사실은 좀 놀랍고, 갑작스럽고, 생소하다. 아니 왜 이처럼 분위기가 반전되는가 때문이다. 무엇보다 13절이다.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12b-13a) 외친 게 13절이다. 이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종교지도자들과는 구별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요한의 관찰에 따르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 각처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사람들이다(11:55).

한편, 여기서 놀라는 부분은 바로 이어서 살펴볼 나사로의 증인들(17)로부터 들은 표적 때문이라는 점이다(18). 유대인들은 종교지도자들의 '다른 복음'(고후11:4, 갈1:8)을 들은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알았다. 마침내 3년이 넘는 공생애를 통해서 그 동안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가르치시고, 전파하신 살아있는 언행(言行)의 결과가 아닌가 : "… 듣고 … 맞으러 나가 …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12-18)


(2) 나사로의 증인들(17)

본문에 나온 두번째 전도자들이다. '명절에 온 큰 무리'(12)의 전도자들의 외침에 이어 이들 역시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로 서 있다. 참 멋지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자들이다. 이들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현장에 있었고, 지금 복음이 살아나야 할 예루살렘에 주님과 함께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메시야이심을,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증거한다.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이들은 사도행전 이전의 '증인'(행1:8)들이다. 17절의 증인들과 12-13,18절의 증인들이 외치는 복음의 하모니가 예루살렘 하늘에 울려 퍼진다 : "지금 구원을 주소서!"


(3) 바리새인들(19)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참으로 답답한 자들이다. 5:16,18절부터 시작된 집요한 음모(11:47-57 묵상노트, 부스러기 묵상 참조)는 이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예수님의 제1동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자 그룹 안에도 이런 불신앙의 세포가 자라고 있고, 당시 종교 권력의 핵(核)인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시행하고 있다. 가히 내외적으로 사면초가(四面楚歌)와 같다. 빛과 어두움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게 될 예루살렘, 그 일의 선봉에 선 바리새인들, 참으로 치열한 '영적전투'가 아닐 수 없다.

주님이 가시는 길에는 언제나 '호산나!'를 외치는 영접팀만 있는 게 아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가라지도 있다. 이 세상은 이처럼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한다. 어쩔 수 없는 섭리다. 복음이 가는 길에, 주님이 일하시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교회가 세워지고 주의 뜻을 성취하는 목양에도 이 쓴뿌리의 법칙이 늘 변수다. 홍해를 건넌 광야교회(행7:38)에도 끊임없는 불신앙의 계보가 가라지와 독초(毒草)처럼, 성령충만한 사도행전교회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주님의 12제자 가운데도 가룟 유다가 있었으니 오늘날의 교회겠는가.

교회를 통해 맡겨주신 목양의 길에도 바리새인들은 있다. 씁쓸하지만 사실이다. 이들은 주님이 일하셔도, 성경대로 잘 되고 있어도, 복음만이 살길이라 증거되고 있음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라', '뭔가 잘못되었다', '예수는 아니다', '다른 대안을 찾자'며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는 것을 자원한다. 이 가라지에게는 결코 열매가 없다. 수 십년 이러쿵저러쿵 했어도 하나님께 뭐 하나 제대로 이루어 드린 게 없다. 가라지기 때문이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이지 않는 한 심판의 주인공으로 가는 길은 끝까지 보장되어 있다. 주님을 반대하고 죽이는 것만큼 그 때는 보다 분명하게 임박하고 있을 뿐이다. 예루살렘은 분명 두 얼굴의 도시다.



부스러기 묵상

로마의 개선장군의 행렬에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것이 세속과의 간격이며 구별이다. 교회가 하는 일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이처럼 시시해 보이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유감스럽지만 존재한다. 오늘처럼 발달한 문명에서 볼 때 본문의 그림은 마당극이나 무성영화처럼 촌스러워 보인다. 이것이 '껍질문화'요, 세속의 사람들이 따르는 기준이다. 그러니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고, 아무도 가 본 경험이 없는 천국과 영생이 얼마나 더 한심해 보일까. 그것만큼 이 부류의 친구들은 손에 종려나무도, 호산나를 외치는 행렬에도 자신을 끼워 넣지 못한다. 그러나 이걸 알아야 한다. 주께서도 이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의 삶의 자리에 결코 끼워 넣지 않으실거라는 것을. 진리와 교회와 복음으로 하는 일이 유치하고, 창피하고, 이상하고,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만큼 그는 예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가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는 말, 여기서도 통한다.

주님 가신 길이 어떤 것인가를 진짜 목도하게 된다. '잔치'(2)가 있고, '호산나!'(13)를 외치는 환영이 있고, 그래서 주님을 따르면 이처럼 언제나 좋은 일만 만나는구나 생각한다면 그건 진짜 심각한 오해요 왜곡이며 변질이다. 이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좁은 길이다. 누가 주님을 따르는 길을 영광이라 했던가. 세상방정식으로 보자면 이 길보다 더 한 바보들의 행진이 또 있을까. 그런데 간다. 그래서 간다. 이게 생명과 영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믿음만이 이 길을 영광스럽게 만들며, 비록 무수한 음모와 사탄의 훼방이 있다 할지라도 중단되지도, 중단할 수도 없다. 나는 누가 뭐래도 이 길을 간다. 이 길만이 천국으로 가는 길임을 믿기에, 이 길을 따라가면 두 팔을 벌리시고 나를 받아주실 주님이 천국문 앞에 서 계심을 믿기에, 고난과 핍박과 시련과 눈물과 아픔이 축복과 상급과 영생과 구원과 은총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믿는 만큼 주님 가신 이 길을 나 역시 따를거다. 주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선 아침이다.


(2/15) 요12:20-36a | 죽음은 영광으로 가는 한 알의 밀알이다.



본문 관찰

헬라인의 물음(20-21) :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예수님의 대답1(22-28a)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나님의 응답(28b) : 내가 이미 …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무리의 반응(29) : 우뢰가 울었다,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
예수님의 대답2(30-33) :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무리의 반응(34) : 이 인자는 누구냐
예수님의 대답3(35-36) : 빛을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영광의 죽으심

이방인(헬라인, 20-21)의 등장은 하나의 사인이다.
아마도 이 헬라인들은 19절과 20절 사이에 있었던 복음서의 증언, 즉 '이방인의 뜰'에서 발생한 성전청결사건(눅19:45-46)을 목도한 모양이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 정도였다면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이번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다. 요한은 이 일을 평범하게 지나가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역을 통해 이방인들 역시 24,32절의 열매로서 '장차 … 보리라'(1:42,50-51)의 꿈에 참여하게 될 것을 내다보고 있다. 이것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특별히 이방인이 주께로 오는 것을 보시고 하신 23-28a절 말씀에서 그 빛을 발한다.



죽음, 영광으로 가는 길(23-28a)

주님은 이제껏 '때'(23)에 대해서 전혀 다른 쪽이셨다(2:4, 4:21,23, 7:6,30, 8:20). 그런데 이방인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대답하신다 :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 그리고 곧바로 죽음을 말씀하신다(24-27). 동시에 이 일이 아버지의 영광이라 하신다(28). 주님은 이방인을 포함한 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으로서 십자가 이후를 지금 미리 보고 계신다. 주님은 세상의 구주시다(3:16-17, 4:42, 6:14,33,51, 11:27). 문제는 23절이 24절을 통해서 성취되며, 이것이 곧 28절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어렵다.

묵상을 쉽게 이어보면, 공생애의 절정인 때가 지금 예루살렘을 무대로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 때가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인데, 그러나 이 영광이 무엇을 통해서 성취되느냐 하면 한 알의 밀처럼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영광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성전을 청결케 하는 운동가로서도 아니고, 오병이어를 통해서 빈민을 구제하는 사회복지를 통해서도 아니고(6:15),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할 정치적인 메시야로서도 아니다. 영광은 십자가에서 갈릴리에서 시작되고 십자가에서 완성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이 아니다. 이게 25-26절의 의미다. 나 역시 죽어야 영생하도록 보존된다(25). 그런데 이 죽음은 26절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된다 :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곧 죽음의 길이자 영생하는 길이라는 말씀이다. 주님이 갈보리에서 끝이 아니셨듯이 나 역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종점이 아니라 영생의 문에 들어서는 시작이라신다.

죽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일까. 27절의 주님에게서 이를 희미하게 본다 :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는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막14:32-36)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그저 통과의례가 아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갖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급기야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을 능가할 재주가 없기에 다시 기억해 본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여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5:7-10)

문제는 '그러나'로 이어지는 다음 말씀이다 :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7b-28a) 주님은 이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이 이루어짐을 보고 계신다. 거기까지 순종하시며, 낮아지시며, 충성하시며, 헌신하신다. 여기까지 묵상하다가 어떤 집사님과 통화하는 중에 "고난 속에 정답이 있다."는 말씀을 요즘 새롭게 붙들고 깨닫고 있으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정말 그렇구나 싶어 옆 종이에 메모를 해 놓았다가 이렇게 묵상에 첨가하게 된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고난 속에 영광이라는 정답이 있다는 생각, 정말 아멘이다.



죽음의 신학(30-33)

예수님은 처음부터 죽으시기 위해서 성육신(Incarnation)하셨다. 주님은 자신의 죽으심이 영광이 된다는 말씀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동의(28b)를 받으시고서, 곧바로 다음 몇 가지의 말씀하심을 통해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33)신다. 그게 31-32절이다.

첫째,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다(31a). 죄와 사망에 대한 심판이다. 둘째,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날 것이다(31b) :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12:10) 셋째, 내가 땅에서 들릴 것이다(32a, 3:14, 8:28). 넷째,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것이다(32b). 이 '장차 … 보리라'(1:42,50-51)의 꿈이 현실로 가까이 온 것이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때'의 옴이고, 그것이 죽으심으로 이루어지는 영광이다.



부스러기 묵상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b)

"우뢰가 울었다,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29)
"우리가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34)

전혀 상반되는 예수님 이해를 만난다.
이것이 요한이 고발하는 인간의 실존이다. 사람은 그렇게 똑똑하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금방 알아차리지도, 말씀하셨다고 그냥 곧바로 믿고 알고 깨닫지도 못하는 그런 존재다. 이것을 다 아시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들리실 것을 말씀하신다. 바로 그 때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9,34절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내가 그러니 주님은 오죽하셨을까.

그래도 주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35-36a) 그렇다. 아직(not yet) '때'는 남아 있다. 그것도 '잠시 동안'이다. 언제까지나 이 기회의 시간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7:33-34, 8:21). 바로 이 '때'가 왔다. 예루살렘의 입성은 이것의 신호탄이며, "호산나!"를 연호하는 무리들은 이 '때'를 알리는 나팔이다. 그 소리가 지금 내 귀와 마음과 심령에까지 전달되는 아침이다. 밖에는 또 다시 눈이 그야말로 펑펑 내리고 있다. 2월 하순으로 접어든 이때의 눈은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하나의 사인처럼 느껴진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봄은 어김없이 온다. 지금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이라는 십자가의 때가 깊어갈수록 최후 승리를 알리는 부활의 영광의 빛은 점점 밝아오고 있다. 죽어야 산다는 이 진리를 '때' 마침 다시 복습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2/16) 요12:36b-43 | 불신은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함이다.



본문 관찰

믿지 못하는 이유(36b-41)
믿음을 방해하는 자들(42-43)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표적은 믿음을 갖는데 꼭 거쳐야 하는 필수(必修) 과목인가?
흔히들 체험이 '확신'을 낳는 출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일수록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를 우선해서 생각하지 못하거나, 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이렇듯 '표적'을 의존하는 그것만큼 '말씀'을 믿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을 친히 경험하며 살았던 에덴, 그 많은 기적을 몸소 체험하며 가나안에 입성했던 이스라엘, 그리고 오늘 본문 뿐 아니라 요한복음의 사람들 역시 저희 앞에서 표적이 행해졌으나 그것을 통해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37). 결국 구원을 얻는 은혜가 예수님이 아니고 우리가 만드는 어떤 확신(경험)에서 비롯된다면, 이것 보다 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또 있겠는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36b-41)

요한을 이것을 밝히기 위해 이사야의 설교를 예로 든다(사6:10) :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을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표준새번역) 왜 이렇게 하셨을까? 하나의 실마리는 이사야의 글을 우리 주님이 인용한 본문으로 가 보는 것이다(마13:10-16).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15a) 이유인즉 바로 '죄' 때문이다. 그러니까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키는 회개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저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14)는 말씀처럼 여전히 영적인 캄캄함 속에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감추어진 '비밀'이다(골1:26a) :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었던 것인데 …." 인간은 죄인이면서, 그 결과 이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전적 타락'에 빠져있는 비참한 존재다.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데도 죄 아래 있음으로 이를 인정하지도, 알지도 못한다.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 아닌가. 이처럼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서 어떻게 주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13:14)는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을 막으신 것이다. 결국 이사야의 글이 성취된 것이다. 요한은 이 점을 분명히 통찰하고 있다 :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41) 결국 12장만 보더라도 4-6,10,19,29,34절처럼 언행하는 것은 믿지 아니함 때문이고(37-38), 그 이유는 40절 때문이다. 그러니까 요한은 이런 결과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나, 이해되지 않거나, 주님이 뭔가 예측을 잘못하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죄인에게서 인과(因果)된 문제라고 통찰하고 있는 셈이다. 지극히 옳은 관찰이다.



믿음을 방해하는 자들(42-43)

믿음의 길 밖에 서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이 방해꾼들이야말로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은혜) 밖에 있는 자들이다. 영적 진단을 해 본다면 다른 선(line)에 선 자들이다. 길과 진리와 생명의 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자는 오직 하나 뿐이다. 거짓 영, 즉 마귀다. 사탄은 미혹하는 자다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24:24) 결국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쓴 목적(20:31)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이들은 믿음과 영생과 아무 관계가 없는 자들이다. 그럼 이들은 누구인가?

먼저 바리새인들이다. 이 친구들은 상습범으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수 백 개에 해당하는 조문(규칙)을 만들어 놓고 지켰다. 일주일에 2일씩 금식하며, 거의 금욕에 가까운 종교생활을 한 종파다. 그러나 이들은 믿음 밖에 있는 자들이다 :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3,15)

또한 회당에서 쫓겨날까 하는 두려워하는 자들이다(42). 당시 회당은 종교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생활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이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다는 것은 마치 무인도(無人島)에서 홀로 모든 삶으로부터 고립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적당하게 타협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사람을 혼돈할 정도의 연약함이 더 결정적인 것이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나' 중심은 이처럼 언제나 하나님을 뒷전(차선)으로 밀리게 한다. 이해 관계나, 손익(損益)의 문제에 봉착하면 이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버린다. '하나님' 중심의 삶과는 철저하게 분리된 사람이기 때문이다(갈1:10, 고전7:32-35).



부스러기 묵상

이러한 방해물들을 넘어서지 못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은 불가능하다.
5:16절에서 바늘구멍처럼 틈이 벌어지면서 두 그룹으로 나누어지더니 급기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불신(不信)이다. 바로 그때부터 지금껏 물과 기름처럼 위험한 동거를 해 왔다. 그럼에도 주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얼마 앞둔 이 시간까지 말씀으로, 표적으로, 친히 하늘 양식을 이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셨다. 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왜로 이어지는 의문만 남겼던 사탄의 후예들의 정체가 성경 앞에 노출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선언된 죄의 정체다.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렇게 말씀을 듣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친히 만났으면서도 이럴 수 있을까.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왜 끝까지 믿음 밖에서 예수님을 적대하는 세력으로 남아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악과 사탄의 편에 서는 것일까. 율법이 있고,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대제사장이 있고, 전통과 역사와 혈통적 계보가 있어도 다 소용 없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다시 출발선을 기억한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1:11-13, 표준새번역)

그래도 주님은 십자가로 나아가신다. 죄인도 죄인이지만 요한과 더불어 예수행전을 산책하면서 더없이 놀라고 흥분하는 것은 바로 이 주님 때문이다. 나 같으면 수 십 번도 판을 뒤집었을 것이다. 나를 본다. 내가 만약 바리새인들처럼 뺀질뺀질 거릴 때 기다렸다는 듯이 결론을 내리셨다면 나는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이다. 오늘 그래도 이 모양 요 꼴로라도 이처럼 말씀 앞에 서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무한하신 은혜 때문이다. 내가 나를 봐도 '희망 없음'(시계 제로)인데, 그래서 바리새인을 보면서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따뜻함을 맛본다. 주님의 가슴은 언제나 포근한 향기로 가득하다.

주님도 나에 대한 최종 결론을 재림 이후로 미루셨다면 나 역시 그래야 할 것 같다. 세상을 보는 눈을, 사람을 보는 눈을, 교회를 보는 마음을, 성도를 보는 영성을 주님의 빛깔로 바꾸어야겠다. 생각의 속도만큼이나 급변하는 세상에서 바르게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영성의 질과 깊이와 넓이를 유연하고 탄력 있고 건강하게 바로 세워나가야 할 때를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사탄 때문에, 인간 장애물들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신앙다운 믿음생활을 하지 못했노라고 해봐야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에 불과할 뿐이다. 어차피 잔치 문이 닫히고 난 후에 밖에서 소리지르고 통곡하고 문을 두드려도 다 소용없는 일 아닌가. 주님이 미리 말씀해주신 장애물들을 잊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줍는다. 어차피 장애물 경주인데 이것을 무시하고, 부정하고, 내 마음대로 달려봐야 손해는 내 쪽이다. 믿음의 길에는 장애물이 있다. 지금 할 일을 이것들을 어떻게 넘어서 주님이 기다리시는 골(Goal)인 저 천국에 이르느냐가 아닐까. 아직 갈 길은 멀다. 먼길을 떠나는 나그네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지금 나에게는 이런 지혜가 필요하다. 오늘 아침은 이 부스러기 하나 주워먹고 다시 구두끈을 단단히 묶어본다. 불신이라는 조그만 모래가 신발 안에 남아있는 건 아닌지 살피는 것, 이게 번쩍 내 머리를 스친다.


(2/17) 요12:44-50 | '장차 … 보리라'의 길목에서 부른 노래가 있다.



본문 관찰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천국복음 전파(1-12장)
제자훈련과 기도(13-17장)
십자가 구속 사역(18-21장)

유월절 어린 양으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구속사가 절정을 향하고 있다.
예루살렘 입성(12:12- )이 그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13-17장은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36b)에서 암시되었듯이 제자들과 함께 지내신 기간으로 무대가 갑작스럽게 바뀐다. 이것은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18:1)의 어간에 되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12장은, 그것도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의 복음전파의 긴 여정 가운데 주께서 하신 일련의 언행(言行)에 대한 조그마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장차 … 보리라'(1:42,50-51)의 길목에서 강조하셨던 복음송을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44a)로 다시 부르신다.



44-45절

44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를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45 예수님을 보는 자는 그를 보내신 자를 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로서 오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이시다.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의 힘과 노력과 열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을 입고, 사람이 되셨다.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45절이다.



46-48절

46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신다.
47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시다.
48 '어두움'에 거하는 자의 마지막 날 심판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은 죄악으로 어두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셨다. 마침내 믿는 자를 '장차 … 보리라'의 빛의 나라로 부르셔서 더 이상 어두움에 거하지 않도록 구원하신다. 하지만 불신자의 계보에 선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말씀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결과 때문에 그 말씀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심판은 있다. 지금 그 심판의 때가 점점 임박하고 있다. 아무도 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세상은, 빛이 아닌 어두움에 거한 자들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말씀이 저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



49-50절

49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바를 말씀하신다.
50 예수님(아버지)의 말씀이 영생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예수님의 진리는 예수님이 스스로 만드신 독자적인 말씀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49b)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1-12장까지 하신 말씀들은 모두가 다 위로부터 온 말씀이다. 오직 이 진리의 말씀만이 믿는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준다. 주님은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identity)를 이처럼 하나님께 의지하신다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부스러기 묵상

주님은 지금 이 진리의 말씀을 외치신다(44a).
여기 "외쳐 가라사대"에 사용된 단어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11:43)에 쓰인 단어와 동일하다. 주님은 나사로를 부를 때의 그 마음과 그 심정으로 복음(福音)을 외치신다. 끝까지 아버지 하나님을 높이신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심을 분명히 하신다.

요한이 살았던 초대교회 1세기 시대는 예수님이 대한 오해가 팽배하던 시기였다. 사람이다, 하나님이다, 반(半) 사람에 반(半) 신이다,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등등 무수한 사설(私設)이 난무한 때였다. 요한은 자신마저도 영적 무지 때문에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었던 때가 있었음을 겸손하게 인정한다(2:22, 7:39, 10:12-13, 12:16). 그랬기에 요한 역시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가를 목놓아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를 영원히 부를 노래요, 다시 부를 노래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이 주님이 나를 믿는 자로, 당신을 보는 자로, 어두움이 아닌 빛으로, 구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 영생을 얻은 자로 부르셨다. 할렐루야 아멘이다! 주님이 먼저 부르셨던 노래를 나 역시 계속해서 부를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이고 축복인지 모른다. 부를수록 더 귀한 주님이시다. 이제 이 주님의 노래가 나의 노래가 되었다. 이 노래가 삶이셨던 주님처럼 나 또한 '생활복음'의 향(계8:3)으로 주님께 드리는 자 되기를 소망한다.

밤마다 가정예배를 드릴 때 14개월 된 아들 예준이 녀석은 이제 손을 모으고, 박수를 치는 수준(?)까지 왔다. 비록 그러다가 온 방을 돌아다니면서 걸어 다니는 예배,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지만 난 안다. 얼마 되지 않아 이 녀석도 내가 부르는 노래를 함께 부를 그 날이 오고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녀석 또한 가슴으로, 마음으로, 심령으로, 온 몸과 영혼으로 주님의 노래를 부르며, 이 주의 복음송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날 그 날을 '장차 보리라'의 꿈처럼 현실로 임하고 있음을.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44a)로 이어지는 말씀을 생명을 걸고 노래하셨던 것처럼 나 또한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 그 날까지 외치며 살아가련다. 돌들이 소리 지르는 모욕스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에게 가르쳐주신 이 복음의 노래를 온 세상을 향해 외치며 찬양하며, 주님께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딤전2:2)하는 이 일에도 최선을 다 할 생각이다. 요한이 이 주의 노래를 나에게까지 전해 주었듯이 말이다. 이 웹사이트(www.thesermon.org) 역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히 부를 주의 노래를 전파하는 하나의 도구가 되기를 다시금 주님께 간구하는 아침이다. 주님의 노래는 또 다른 영혼을 기다리고 있다(딤전2:2) : 예수님 → 바울 → 디모데 → 충성된 사람 → 또 다른 사람 → ○○○ 바로 이 자리를 이어가는 사람으로 나를 부르시고, 나를 통해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리시는 주님을 다시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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