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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 10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4.08.19|조회수15,778 목록 댓글 0
요한복음 제 10장

=====10: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
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 이 말씀
은, 사람이 합법적으로 양에게 관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자도 하나
님의 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 본문의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의 양을 정당하게 인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
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그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교회의 인
도자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교회의 인도자가 되는 자
는,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아니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이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는
양을 먹일 만한 진리와 능력을 받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 된 일군은, 결국 하나님의
교회를 진정한 의미에서 돕지 못하고 도리어 양 떼에게 해를 끼친다. 그는, 무의식 중
에, 혹은 의식 중에 저렇게 불행한 생활을 보내기 쉽다.

=====10:3-5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
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
리어 도망하느니라. - 여기 이른바 "문지기"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어떤 학자는 이것
이 세례 요한을 의미한다 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말하기를,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역사를 생각할 때에, 그를 가리켜 문지기라
고 하는 것이 반드시 낮은 칭호라고 할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를 문지기라
고 생각하는 것은 문맥상으로 보아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므로 "문지기"는 성령
님을 가리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관계를 맺어 주시는 점으로 보
아서 이 해석이 적당하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라는 문구는 10장에 많이 나온다. 4,5,27절을 참조하여
라.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택한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말씀
을 알아 듣는 사실을 비유한다. 택한 백성은 그 목자 되시는 하나님(혹은 하나님의 아
들)의 말씀을 알아 듣고 모이는 법이다. 교회의 사역자(使役者)는 하나님의 양을 자기
힘으로 만들 수 없다. 온 천하의 모든 세력과 능력을 가지고라도 하나님의 양 하나를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의 양(택한 백성)은, 오직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대
로 하나님 자신이 이루어 놓으신 백성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그들
을 모울 수 있고 또한 완성시킬 수 있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정미롭게 전파할 뿐이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양 된 자들은 모여서 한 무리가 된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이 점에 있어서 행스텐벌
키(Hengstenberg)는, 시 147편; 사 40:26, 43:1; 출 33:12,17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주님의 지식이 얼마나 친근하고 개별적인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름을 각
각 불러 낸다는 것은, 지도자로서 피지도자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질 뿐 아니라, 뜨
거운 사랑과 정성을 가지고 지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영혼을 먹이는 자는, 대중 본위
로 사업의 동기를 가지지 말고, 다만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마음으
로 영혼 하나에게라도 모든 사랑과 성의의 정력을 기울여 일해야 된다. 그런 역사(役
事)가 진정한 복음의 열매를 맺힌다. 그것은 마침내 광범위에 미치는 구령 운동(救靈
運動)도 성립시킨다. 설혹 그의 역사로 광범위한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는 소
수의 열매로써도 만족한다. 비루마에 처음 선교사로 갔던 저드슨(Judson) 목사는 7년
만에 세례 교인 한 사람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써도 천하를 얻은 듯
이 기쁨을 느꼈다.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이란 말은, 그가 우리에 있는 양들을 인
도하여 푸른 초장으로 갈 때에 양 한 마리라도 빼놓지 않기 위하여 노력한 표를 보인
다. 곧, "다 내어 놓은 후에"란 것이 이 뜻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는 양 한 마리라도
등한히 여기지 않는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하는 인도자는 소자 한 사람
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된다.

=====1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는 구약에도 많이 있다. 시 23편, 79:13, 80:1,
95:7; 사 40:11; 렘 23:1; 겔 34:1-2; 슥 11:17, 13:7 참조. 그때 유대인들이 구약을
알았더면 이 비유를 깨달았을 번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에 무식하였으므로 주님
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
의 문이라. - 여기서는, 윗부분(1-5)의 말씀을 해설하는 것 뿐이다. 1-6절 해석에 대
한 머리말을 참조하여라. 버나드(Bernard)에 의하면, 여기 "문"이란 말이 사히딕
(Sahidic) 사본에는 "목자"(* )란 말로 읽게되어 있는데, 모판트
(Moffat)는 그것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버나드(Bernard) 자신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양의 문"이란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리
킨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인도하는 통로를 의미한다(14:6). 로
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시 118:19-20을 해석하면서 말하기를, 문은 의
(義)의 문, 곧, 그리스도라 하였고, 익나디오(Ignatius)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로 가는 문, 곧, 그리스도라 하고, 그것을 통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선지자들,
사도들, 또는 교회가 들어간다고 하였다. 슐라텔(Schlatter)에 의하면, 예수님은, 시
118:20의 예언("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대로 오신 분이
다. 그는 말하기를, "시 118:20에 있는 '이는'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가
하나님의 문이시다. 거기 '의인들'이란 말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양들을 의미한
다."라고 하였다. (dieser, namlich der Christus, ist das Tor Gottes. Die
Gerechten des Psalms sind bei Joh. die dem Christus gehorenden Schafe.-Der
Evangelist Johannes, p. 235)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 "나보다 먼
저"(* )란 말에 대하여는 사본상 차이가 있다. 곧, 몇몇사본(*
,A,B,D,L,W)이 우리 본문과 같이 이 문구를 가지고 있고, 다른사본(* )은 이것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원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본들의 증거가 강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 )란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내 권위를 횡령
하여"(above me)란 뜻이라고 함. 이 해석이 옳다면, 이 귀절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권
위를 무시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을 절도나 강도로 간주한 것이다. (2) 이것은, 시
간적으로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들을 가리킨다는 것. "먼저"라는 헬라 원어가 그런 뜻
으로 요한 복음에 많이 나와 있다(11:55, 12:1, 13:1, 19, 17:5, 24). 크로솨이데
(Grosheide)는 이 해석을 합당하게 여기는 이유로서 그 아래 나온 에이신(*
),곧, "이요"로 번역된 동사가 현재사라는 것을 들어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염두에 있었던 인물이 예수님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와서 교권을 잡았는데, 아직도 그
현재에(예수님 당시에)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인 것
이 분명하다.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한다.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 "누구든지"란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민족이나 국가의 차별 없이
관계한다는 보편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란 말씀
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믿고 그의 중보 역사를 통하여서 하나님에게 들어감을 의
미한다. 이렇게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생명의 부요를 얻기 위
하여 영의 양식을 자유롭게 받는다. 이 사실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
씀으로 알려진다. "들어가며 나오며"란 것은 자유로운 활동을 의미한다(신28:6; 시
121:8; 렘37:4). 그리스도 신자는, 그의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신령한 양식을 섭
취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주시는 양식은 영원한 만족을 준다. 땅에 속한 모든 것은
인간이 가져 볼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다. 그것들로써는 인간의 갈증을 멈출 수 없다.
그것으로 만족하려는 자는 소금 물을 마셔서 갈증을 없애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시
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하여질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꼴은, 먹
는자마다 영원한 만족을 얻어서 모든 다른 것들을 진토와 같이 여기게 된다. 이 아래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이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
말씀이 그 뜻이다.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이 말씀은, 기독교회에 거짓 스승
들이 종종 들어올 것을 미리 경고한것이라고 생각된다. 교회에 나타나는 도적은 거짓
교훈을 가진 자들이다(골2:8; 렘23:2; 겔34:2). 이런 자들은 양을 귀히 여기지 않고
저희의 사리 사복을 위주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목자로서 양들의 진정한 유익을 구
하신다. 곧, 그는 신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며, 또한 그 생명을 장성케 하신다(시
23편; 히13:20-21).

=====10:11-13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
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
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
이나. - "선한 목자"에 대하여는, 구약에도 많이 예언하였으니, 대상11:2; 시23편; 사
40:11; 겔34:23; 슥11장 등이다. 이 귀절들을 보면, 여호와 자신이 바로 하나님 백성
의 선한 목자라고 했으니,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때 그 예언들은 성취되었다. 선
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헹스텐벌키
(Hengstenberg)는, 그말이 그 양을 위하여 목숨을 대속물(代贖物)로 주실 것을 가리켰
다고 한다(막10:45; 마20:28).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사53:10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고데이(F.Godet)도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란 말씀이, 다른
이의 요구에 응하여 생명을 내어 놓음, 혹은 바침, 또 혹은 희생함을 가리킨다고 하였
다.

=====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여기 목자와 양
이 서로 안다는 것은 어떤 지식을 말함인가? 예수님이 그의 백성(양)을 아신다는 것
은, 그들이 선택되어 그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그들을 아신다는 뜻이다(민16:5;
딤후2:19). 그것은 그의 전지(全知) 성품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이 그를 안
다는 것은 성령에 의하여 성립된다. 이것은, 성부자(聖父子)의 서로 아심과 같이 신령
하고 정확하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인간의 자율적인 지식이 아니다. 마11:27 하반에
말하기를,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
니라"고 하였다.
볼트만(Bultmann)은, 여기 양이 목자를 안다는 지식이 노시스(Gnosis)의 실존 각성
(Seinsverstandnis, Existenzverstandnis)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
였다. 곧, "이와 같은 지식은 노시스 신미 문건에서 왔을 터인데, 그 지식은, 아는 자
와 알리운 자가 서로 일체로 관련된 사실을 결정함이다. 그런 지식은 이론적 지식이
아니고(nicht ein rationales, theoretisches Erkennen),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실
존적으로 결정함이다"라고 하였다(ein Innerwerden, in seiner ganzen Existenz
bestimmt ist.-Johannes Evangelium, p.290). 그는, 요한 복음의 이 부분 사상이 분명
히 노시스를 배경하고 있다고 한다(Der gnostische Hintergrund dieser
Gedankenbildung ist unverkennbar.-Johannes Evangelium, p. 285).
그러나 신약이 말하는 양과 목자 사이의 지식은 그런 빌려온 것(Lehnsatz)이 아니
다. 요한 복음의 구속자(목자)는 노시스 문헌의 그것과 다르다. (1) 사도들이 전파한
그리스도는 명백한 역사적 인물로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고, 노시스(만데안 문학)에
서 말한 구속자는 전사 시대(前史時代)의 신화적 인물에 불과하다. (2) 사도들이 전파
한 구속자(救贖者)는 유신론적(有神論的)이고 구원사적(救援史的)인 구속자요, 노시스
에서 말한 구속자는 이원론적인 우주 세력들과 싸운 상상적인 전쟁 영웅이다.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
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 이것은 이방 선교에 대한
예수님의 사명을 가리킨다. 이방 선교에 대하여는 벌써 구약에 많이 예언되었다. 사
49:1-13, 52:13-15, 53:10-12;미 4:2; 슥 8:23; 마 8:11 참조.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
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심으로만 이런 놀라운 선교가 시작되겠
으므로, 그의 목숨 버리신다는 말씀이 이 귀절 앞뒤에 배치되어 있다. 뱅겔(Bengel)
은, 하나님 백성의 통일성을 위하여 아름다운 목자도 한 분(예수님)이심을, 이 귀절이
지적한다는 의미로 말하였다.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는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버릴 권세도 있
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이유가 그의 목숨 버리심과 다시
사심에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성자(聖者)이시니 존재론적으로 영
원토록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다(5:20). 그러나 그가 인성(人性)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시는 때에 구속 사업의 사명을 받으셨으므로, 그의 사명에 순종하신(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 그 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방면도 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곧, 그가 목숨을 버리시는 것
과 다시 사시는 것이 순연히 독자적(獨自的)인 의지(意志)로 순종하심이라는 것을 가
리킨다. 특히 그 위의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말씀이, 그
사실을 역설(力說)한다. 여기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도 예수님의 생명 버리심을 강
요하시지 않는다는 뜻을 포함한다. 곧, 하나님 아버지도 성자(聖子)의 생명을 빼앗을
처지에 계시지 않다는 말이다. 그는 순연히 자유 의지로써 단 마음으로 순종하신 것
뿐이다. "계명"이란 말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사명을 의미한다.

=====10:19-21

<예수님 당시의 헤롯성전의 모형 1:50축소>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
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 예수님의 말씀
으로 인하여 듣는 자들이 두 편으로 갈렸다. 언제나 진리는 이 세상에서 전적으로 환영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있는 반면에 마귀에게
속한 자도 있기 때문이다(창 3:15).

=====10:22,23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 "수전절"은, 유다의 매코비가 성전을 중수(重修)한 뒤에 그것을 기념하는 절일을 정했는데, 그것을 말함이다( .매코비 4:51, .메코비 10:5-8). 이날은 12월 25
일이다. "솔로몬 행각"은, 비를 피하기 위하여 시설한 현관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
팔레스틴에는 12월이 우기(雨期)이므로 예수님께서 그 때에 솔로몬 행각에 다니신 듯하다.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
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 주님께서는 자기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직설(直說)하
심보다, 흔히 비유적으로 하시고 밝히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때 민중의 메시야 관념이 그릇되어서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이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더러 그의 메시야이신 여부를 "밝히 말하시오"라고 한
다.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
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메시야
격에 대한 두 가지 증거가 나타났다. (1) 그의 말씀의 증거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음.
예수님의 말씀은, 신자들이 등한히 해도 언제나 살아 역사(役事)한다. 그의 말씀을 오
해하고 선전하는 자들이 많아도 그의 말씀은 그대로 살아 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말씀을 반대하는 자들이 많아도 그의 말씀은 계속 살아 있다. 그것이 그렇게 되는 이
유는,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마 24:35에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고, 요 8:51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권위 있고 진실하다. (2) 예수님의 행하는 일들이 그를 증거함. 예수님의 일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의 이적들을 가리킨다. 현대인은, 기독교에서 그 이적 요소를
제외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기독교는 이적으로 된 종교인데 거
기서 이적을 제외하고 믿으려고 하는 것은, 돌 집에서 돌을 모두 다 뽑아 버리고 남은
데서 살아 보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
도의 이적은 구원사적(救援史的)인 진실과 구속적인 사랑을 그 성립 요소로 한다는 것
이다. 메시야께서 이런 권능을 행하시리라는 것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데(사 29:18,
35:5-6), 그것이, 과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그것을 가리켜 구원사적 이
적이고 한다. 이것을 보고도 믿지 않음은 메시야를 보고도 믿지 않는 죄악이다.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먼저 하
나님이 우리를 아셨다(벧젠 1:2). 곧, 그가 우리를 택한 백성으로 삼으셨으므로, 우리
가 그를 믿게 된 것이다. "양"이란 말은 택한 백성을 비유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
스도를 믿게 할 증거들은 많이 나타났다. 그 증거들은 하나님의 진실성에 의하여 완전
하게 나타났다. 기독교는 이렇게 가장 믿을만하게 된 유일하고도 진정한 종교이다. 그
래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쌀이 가득한 창고 안에서 굶어 죽는 자들과
같고, 샘 앞에서 목 말라 죽는 자들과 같다. 결국 그들은 영생의 복을 받도록 택함이
되지 못한 자들이다.

=====10:27

이 귀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양(택한 백성)의 성질이 어떠함을 밝혀
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음성(하나님 말씀)을 알아 듣고 따른다(닮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음성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그들의 편애(偏愛)가 아니
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먼저 택하신 사실에서 일어난 반응이다. 그것은, "나는 저희
를 알며"란 말씀이 밝혀 준다.

=====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테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
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이 귀절들은, 그리스도의 양 된 자의 행복에 대하여 말한다.
그 행복은 그들이 영생을 받음이다. 아무도 그들의 받은 영생을 빼앗지 못한다. 그 이
유는,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예수
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목적은, 그의 양 된 자들, 곧, 참된 신자들로 하여금 그 받는
구원의 불변성을 알고 안전감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그의 양 된 자들은 힘있는 원
수들에게 둘러 싸였고, 그들 자체는 심히 연약하다. 그러나 그들의 의뢰한 자가 그들
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능히 지키실 줄을 그들은 확신한다(딤후 1:21). 하나님의
양 떼인 교회는, 악한 것들이 가득한 세상에 놓여 있어도 근심할 것 없다. 악한 것들
도 하나님의 주권에 복속하지 않을 수 없다.
28절 상반 말씀은, 7-10절의 사상과 연락하고 나온다. 곧, 이 귀절은, 그리스도께
서 그 백성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는 사상을 재음미한다. "주노니"라는 말(*

)은 현재 동사로서, 현대시 곧, 신약 시대에 세계적으로 신자들에게 영생 주시는 운동
이 시작됨을 염두에 둔 말이다.(E.Smilde, 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111).
그리고 28절 하반(29절도 참조)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한
말씀은, 11-18절의 사상을 재음미한다. 그리스독게서 그 양들을 위하여 원수들(도적,
갇도 같은 자들)과 싸워 이기시므로, 양들은 영원토록 안전하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란 문구(*
)에 대하여, 우리 한역과 같이 번역된 것을 찬성하는 학자들도 있다. (Godet, B.
Weiss, Bernard). 그런 경우에는, 이 문구의 의미가 양들(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 주
신 하나님이 만유보다 위대하시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스밀데(Smilde)는 이 문구를 우
리 한역의 각주(脚註)와 같이 번역하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만물보다 크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신 것"이란 말이 신자들을 총칭한 것이라고 하며, 또
말하기를, "신자들은 시간 세계에서나 영원한 세계에서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의
대상이고 그리스도의 소유니만큼, 만물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서 승리자들이다. 그들은 원칙에 있어서는 벌써 세상을 이긴 자들이다. 그들 중 하나
라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Leven in de Johanneische
Goschriften, p. 112).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28절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예수님의 손
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29-30절 말씀이 나왔다. 그들을 아버지
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그 이
유는,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일체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
이니라"고 하심은, 본질적으로 그가 아버지로 더불어 일체로서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
이시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계시자(啓示者)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순종하시는 것 만큼, 그의 모든 행동은 곧바로 아버지의
행동과 완전히 일체(一體)였다.

====10:31,32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
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
느냐 - 그 때 유대인들은 자칭 경건하다고 하며, 거짓 선지자를 돌로 치라는 성경 말
씀(신 13:5)을 실행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악행을 연출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담대히
답변하신다. 그 답변은, 유대인들의 완강한 불신앙을 지적하신 것이니, 곧, 그들이 너
무도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몰라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완전하고
철저함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보여준다. 곧,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
러가지 선한 일", "너희에게 보였거늘"이란 말씀들이다. (1) "아버지께로 말미암아"란
말은, 그의 하신 선(善)이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사실이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유
대인들은 그것을 알아 보지 못했으니 그들의 불신앙은 현저하다. (2) 그 뿐 아니라,
그 선한 일이 한 가지만 아니고 여러가지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신앙 하
였다. (3) 또 그 뿐 아니라, 그런 선한 일들을 그들에게 밝히 보였으되 그들은 불신앙
하였다. "보였거늘"이란 말의 헬라 원어(* )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
록 공중 앞에서 행한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밝히 보여주었으되, 그들은 강팍하여 아
직도 믿지 않았다.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
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철
면피는 저렇게 두텁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
는 듯이 자처한다. 곧, 그들이 하나님께 특별히 충성하는 듯이, 예수님의 발표하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 말씀을 책잡아 그것이 "참람"한 말이라고 한다. 그
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이 진리와 시실에 근거한 여부는 알아 보지 않고 먼저 정죄한
다. 그것은 그들의 교만과 편견과 시기에서 나온 행동이다.

====10:34-3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하였노라 하지 아니
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
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
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 여기 "율법"이란 말은 시 82:6을 가리킨다. 시편을
왜 율법이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곧, 모세의 율법이 구약의 처
음부분에 있는 것만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구약 전체의 책 이름을 "율법"이라고
하는 풍속이 있었다. 요 12:34, 15:25; 롬 3:19; 고전 14:21 참조
시 82:6에는 재판장들을 가리켜 "신들"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재판장들이 신
(神)의 시키심을 받아 재판을 대행(代行)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고, 그들 자신
이 영원한 신들이라고 함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신격(神格)이나 신자격
(神子格) 주장의 정당성을 이 시구에 두셨다. 그것은 얼른 보아 예수님도 순 인간으로
서 신의 시키시는 일을 맡은 의미의 하나님 아들이고,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
(Ontological Sonship)이 아님을 증거하시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구에 근거
한 예수님의 논증의 귀결은, 추론의 등위적 이론(等位的理論=Analogical argument)이
아니고 강이유 결론(a fortiori)이니, 곧, 보통 인간들도 신의 시키심을 받은 자라면,
그 본질에 있어서는 신(神)이 아니로되 그들을 "신들"이라, 또는 "자존자의 아들들"
(시 82:6)이라고 하였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야 말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결론이다.

====10:37,3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
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 여기 "내 아버지의 일"이란 말은 그가
행하신 이적들을 가리킨다. 그는, 그의 이적 행하신 사실을 저 불신앙자들 앞에 도전
적으로 내세우신다. 그것은, 그 이적들의 역사성과 진실성에 대하여 천하가 공인한 사
실을 지적함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어떤 한 구석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
고 대중이 주목하는 공석에서 되었으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강퍅한 교권자
들이 끈질기게 책잡으려는 무서운 눈초리 앞에서 성립된 일들이다.
"그 일은 믿으라."이것은, 그의 행하신 이적들이 초자연적이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 표적인 사실을 믿으라는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다 함은,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그의 기관
(organ)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성(예수님)에게 하늘의 모든 부요(富嶢)를 충만히 전달
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하나님) 안에" 계신다 함은, 그리스도
께서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 하시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부요에서 모든 것을 가져
오심을 가리킨다(Godet).
예수님의 이적은, 저렇게 땅에 계시면서 하늘에 계시는 (3:13) 오묘를 보여준다.
그것은 내세(來世)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을 예표하는 것이다. 바빙크(Bavinck)는
말하기를, "내세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되는 것이니 거기 의(義)가 거한다. 그
때에는 이적과 자연이 하나가 된다. 그 때에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하나가 된
다"라고 하였다(Geref. Dog. Uitgave van J.H Kok Te Kampen 1928, Vol I, p.311).

====10:39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 아직도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므로 원수들이 그를 해하지 못하였
다.

======10:40,41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
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
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 예수님은, 불신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떠
나 요단강 저편으로 가셨다. 그곳은 물론 적막한 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
에도 대중으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하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이유는, 세례 요한
의 이적(세례 요한은 이적을 행치 않았음)을 본 까닭이 아니고 그의 증거한 말(그의
메시야 증거)이 참된 까닭이었다. 말의 진실성은 이렇게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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