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요한복음

요한복음 12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4.08.19|조회수19,425 목록 댓글 0
요한 복음 제 12장

요한복음 제 12장

====12:1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 나사로를 부
활시키신 이적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여기서 그 사실을 다시 관설한다.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 마태와 마가는 이와 같은 사건에 대하여 말할 때에(마 26:7; 막 14:3),
그 연회 장소를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하였다. 어떤 학자는 상상하기를, 시몬은
마르다의 남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몬은 알려진 문둥이었으니 만큼, 결혼
하지 못한 사람이었을 것이다(Grosheide). 그러므로 시몬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과
는 가족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등도 아마 청함
을 받아서 그 잔치에 참석하였을 것이다.
"마르다는 일을 보고" 곧, 그가 연회 배설(排設)과 음식물 준비에 봉사한 것을 가
리킨다. 눅10:40 을 보면, 그는 이 방면 봉사에 능하였다. 이런 인물도 귀하지만, 그
보다도 주님의 진리와 영적 생활에 열중하는 인물이 더욱 귀하다(눅 10:39, 42)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나사로는, 그 부활한 몸으로 그 자
리에 와서 앉은 것만으로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그를 보는 자마다 주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을 알게 되었다.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
기 머리 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에 부은 향유는, 나드(nard) 향유인데, 인도에서 나며 파사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특
별히 술을 향기 있게 하는데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흑설에 이 향유는, 나사로 죽었을
때에 그 시체에 바르고 남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의 내용은 마리아의
특별한 사랑 표시를 말한다. 위의 학설은 이런 사랑 표시와 조화되지 않는다. 그가 쓰
다 남은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다면, 그것은 지극한 사랑 표시의 선이 될 수 없다.
막 14:8비교. 마리아는 예수님을 극히 존경했으며, 자기 오라비를 다시 살리신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향유
를 그의 발에 붓는 봉사를 하였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의미와 존
귀히 여기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은 그 일에서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더 보셨다.
그것은, 그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었다(7 절).
마태 복음과 마가 복음에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만 하고 발에 부었다
는 기사는 없다. 그러나 문제 될 것은 없다. 라그랑지(Lagrange)는 이 난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하였다. 곧, "머리에 기름을 부었을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
었으니 만큼, 요한은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마태와 마가
는 발에 기름 부은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 뿐이고,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닐 것
이다.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 마 26:8에 의하면, 마리아
의 향유 부은 일에 비평한 이들이 "제자들"이라고 하였다(막 14:4에는 "어떤 사람들"
이라고 했음).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가룟 유다만 거론한다. 유다가 그 다른 제자들보
다 지도적 처지에서 저런 비평을 하였기 때문에, 요한이 여기서 그의 이름만 말하고
그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는 관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
니 -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300날 동안의 노동 품 값이라고 한다. 유다
는, 가난한 자를 예수님보다 귀히 여긴다고 여기 말한 셈이다(Grosheide). 이것은 세
상 생각으로만 타산하는 그릇된 생각에서 일어난 불평이다. 이 불평은, 한 영혼이 예
수님에게 사랑을 붓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어두움이다. 마리아와 유다 두
사람을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마리아는 희생자임. 그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이나 아낄 줄 모르는 인물이었
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으니, 주님의 말씀과 같이 행한 자이다. 곧,
마 22:37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악한 일에 최선을 다 할 줄은
알면서도 하나님께 그리할 줄은 모른다. 인도의 어떤 선교사가 한 번은 이상한 일을
보았다. 곧, 간지스강 가에 한 여자가 섰는데, 앓는 갓난 아이는 팔에 안고 건강한 아
들은 옆에 세워 놓고 있었다. 그 여자는 오랫 동안 거기 서 있었는데, 얼마 후에 그
선교사가 다시 와서 보니 그 옆에 섰던 건강한 아이가 없어졌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그를 강에 넣어 악어들로 먹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 대답은, "나의 신(악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죄로 어두워져서 이렇게 악한 일에 최선을 다한다.
(2) 유다는 옳은 것을 비평하였음. 유다는 마리아의 봉사를 비평하였으니, 그것은,
한 영혼이 그리스도와 뜨거운 관계를 맺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그릇된 사상
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을 귀한 줄 모르는 그릇된 태도이다. 예수님은 천
하의 몇 만배보다 비교할 수 없는 귀하신 분이다. 이와 같이 귀한 예수님을 위하여 천
하를 바친들 아까우랴? 그러나 유다는 물질만 귀한 줄 알았으며, 빈민 구제를 구실로
삼아 트집을 잡았다.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다른 제자들이 마리아를 비평한 것(마 26:8; 막 14:4)은,
부주의로, 혹은 피동적으로 그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이 귀절에 나타난대로
자기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위선자(僞善者)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계획적인 악행이
었다. 유다는 저렇게 탐심이 강하였고, 그것 때문에 자기 선생을 파는 무서운 죄악까
지 범하였다(눅 22:3-6). 평소에 그의 마음 속에 자라나던 죄악(탐심)이 결국 그로 하
여금 큰 일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12: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그 여자로 하여금 지금 향유 붓고 남은것을 보관시
켜 후일에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 때에 사용하게 하라"는 뜻이라 함. (2) "그 여자의
향유 붓는 행동을 중단시키지 말라. 그 행동이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
미를 가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해석이 옳다.
"이를 두게 하라"란 말(* )은, "향유를 보관한 일이 되게 하
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보관해 왔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그 한 때에 사용하기 위하
여 향유를 그때까지 보관하였던 것이다. 칼빈(Calvin)은 이 점에 있어서 귀중한 뜻을
지적한다. 곧, "마리아는 그런 값 비싼 의식(儀式)을 흔히 실행한 것이 아니고, 예수
님의 죽음을 위하여 이렇게 희귀한 행위를 취한 것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흔히
외부적으로 찬란한 의식에 치중함을 금하신다. 어떤 해석가들이 마리아의 이 일에 기
준하여 추론하기를, 의식을 성대히 갖춘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리아의 한 일은 그 한 때에 필요하였으나 신약 계시가 완성 된 후
에는 그런 방식의 의식(儀式) 행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y, John's Gospel, Vol. , 가가. 13-14).

=====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서부 사본(西部寫本)의 대표격인 베사 사본(D)에는 이 말씀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보
다 유력한 사본들에 있으니, 이 말씀은 원본대로 전해진 것임이 분명하다(Godet). "가
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란 것은 신 15:11 의 말씀과 같다. 예수님께
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언제나 돌아볼 책임이 있음을 지시하
신다(13:29). 다만 시간적 순서로 볼 때, 그 때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중요성을 예언
적으로 표시하는 의미에서 그 값 비싼 향유를 사용함이 합당하다는 것 뿐이다. 예수님
의 죽음에 대한 예언 행위는, 복음 전파의 행위이다. 그것은 지극히 귀한 일이며, 따
라서 그 일을 위하여 값 비싼 향우라도 소비할만하다. 스킬더(K. Schilder)는 말하기
를,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왕으로 말씀하시면서 "먼저 나요 다음에 너희들이라"
고 하신 셈이라고 하였다(Christus in Zijn Lijden, Kampen, p. 45).

=====12:9-11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
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
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 예수님의 계신
곳으로 찾아 온 무리 중에는 구경이나 할 생각으로 온 자들도 있었다(11:46). 이렇게
피상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은 믿을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때에 베다니에 있던
유대인들 중에서,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 예수님을 믿은 자들도 많았다(11:45). 나사로
를 부활시키신 이적은 이적의 절정이다. 편견 없이 그 사건을 본 자들은 예수님을 믿
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이적의 목격자들이 많도록 하기 위하여 대중을 동원시
키신 것이다. 믿고 안 믿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이적을
어떤 캄캄한 모퉁이에 감추시지 않으셨다.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은 대중이 친히
목격한 사실이며, 또 그들이 믿은 진리이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의 행동은 참으로 악독하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실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고 하여, 그를 다시 죽여 버리자고
모의하였다.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이적인 반면에, 그를 다시 죽
이려고 한 것은 마귀의 행동이다. 이 들은 서로 정반대이다. 대제사장들의 이 행동은
시기심의 극단이요, 잔인성의 절정이며, 하나님과 싸우는 강팍한 행동이며, 대중 인기
를 탐하여 날뛰는 괴악한 명예주의이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극악한 원수들이 대적
한 이 진리(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극치(極致)이시다.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함을 듣고 - 이
부분에 기록된대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한 자들은, 예루살렘 시민들이 아니
라, 유월절을 지키려고 모여 온 나그네들이었다. 칼빈(Calvin)은 이 사실에서 영적 교
훈을 찾아 본다. 곧,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에 관습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
하여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진정한 종교적 열심은 식어졌고 외식(外飾)에서 움
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온 나그네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불타는 마음
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예수님에게 대하여 열광적인 환영
을 하게 되었다.

=====12:13

종려 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 "호산나"란 것은 히브리 말(* )의 음역(音譯)이니, 그 뜻은, "도와 주소서", 혹은 "구원하소서"란 뜻이다. "주의 이
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란 것은 시 118편에서 나온 말씀이나, 메시
야를 가리킨 것이다.

=====12:14,15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 그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신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메시야의 영광 얻으실 것을 예표하는 행동 설교이
다. 그가 장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므로 만민이 그를 따르게 될 것이었다. 이 사실
은 바리새인들도 무의식적으로 예언하였다. 곧, 19절에 말하기를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고 하였다. 요한은 이런 무의식
적 예언을 흥미 있게 취급하였다. 그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뒤에 있었던 대제사장의
무의식적 예언에도 우리의 주의를 끌게 한다. 요한 복음의 특색 중 하나는, 표적의 책
(book of signs) 곧, 신령한 뜻을 나타내는 이적들과 상징적 행동들을 기록한 책이라
는 것이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요한은, 바리새인들의 말(19절)을 인용한 뒤에, 헬라
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사실을 말하였다(20-22). 그것은 예수님의 죽었다가 다시 사
신 뒤에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세계적 복음 전파)을 표적으로 말함이다. 예
수님은 사실상 그것을 그렇게 해설하셨다(23-32)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평화와 겸손을 상징한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 전쟁하
는 것이 보통이었다. 카일(Keil)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이 그의 낮아지심을 상
징한 것이로 하였으나, 그 의견도 평화의 뜻을 제외함이 아니다(Grosheide). 우리 본
문에 인용된 예언은 슥 9:9의 말씀이다. "시온 딸"이란 말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메시야께서 평화를 가지고 오실 터인즉 하나님의 백성은 두려워할
것 없다. 스가랴 시대의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도 그 소망(메시야가 장차 오실 소
망)중에서 평안을 가지라고 부탁 받았으니, 그가 오신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욱 평안을 가져야 할 것인가?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
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 제
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그의 주(主)되신 영광이 나타날 때까지는, 예수
님의 나귀 타시고 입성하신 그 일이 슥 9:9의 성취하였음을, 미쳐 깨닫지 못했던 것이
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교훈을 받는다. 곧, 현재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잘모르지만, 세월이 지난 뒤에 알게 되기 위하여 그 동안에 파란 곡절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하여 그 당시에는 깨
닫지 못하였는데, 후에 그들이 깨닫게 되기까지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실 때까
지 어려운 고비들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깨닫는 과정이 단순치 않
은 줄 알아야 된다.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고개를 넘은 뒤에 비로
소 일찍부터 움직인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알게 되어 기뻐하게 된다. 시 119:71에 말
하기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
이다"라고 하였다.

=====12:17,18

여기서는, 그 무리가 예수님을 성대히 영접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곧, 그들
은,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려 내신 예수님의 권능에 대하여 들은 까닭이었
다. 그 사실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한 자들은, 나사로의 부활을 직접 본 자들이었다(17
절).

=====12: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
를 좇는도다 하니라 - 바리새인들의 이 말은, 그 때의 군중의 동태를 바로 보고 지적
하였다. 그들의 말에,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라고 한 것은, 무의식 중에 나온 예
언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세계적 선교의 확실성을 예언한 셈이다. 그들의 말에
뒤이어 예수님께서 자기의 세계적 선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20-32).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 여기 이른바 "헬라인"은
순연한 헬라인으로서, 개종(改宗)하고 그 때의 구약 종교에 들어왔던 자들을 의미한
다. 이제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장체 이방인들이 무수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사실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12:21

저희가 갈릴리 벱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 그들은, 직접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고 빌립의 소개를 받고
자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경외(敬畏)하는 증표였다(Calvin). 그런데,그들
은 하필 다른 제자들보다도 빌립과 접촉한 이유는 무엇일까? "빌립"이란 이름이 헬라
식 이름인 사실을 보아서 그가 누구보다도 헬라어를 잘 한 관계였든지, 혹은 그들이
빌립의 고향 벱새다(헬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온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이 말씀은, 그의
개인적인 영화를 말함이 아니고 메시야의 구원 역사의 완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물론
그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내포한 것이다. 구원의 갈증을 느낀 헬라인들이 찾아
온 마당에 있어서, 이 말씀은 적절한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의 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곧,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뵈옵고자 한 것은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올 영광은, 그가 죽었
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실현된다는 의미로, 그는 여기서 말씀하신다. 크로솨이데
(Grosheide)는 말하기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먼저 찾아 오는 원리에 따르지 않고 그가 저희를 부르심으로 되는 원리에 따른다. 곧,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저희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만 된다"라고 하였다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P. 215-216).
12장은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서 그를 영화롭게 함(1-8)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무리들이 그를 왕으로 영화롭게
함(12-19) 헬라인 몇이 그를 베옵고 영화롭게 하려 한 것이다(20-33). 그러나 이 일들
이 모두 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실 사건을 보여 줌과 관련되었다.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및느니라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많은 이방인들이 천국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가리킨 비유인데, 사
53:10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거기 말하기를,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의 속죄적 희생은 많
은 열매를 맺는 것인 만큼, 그를 따르는 자들(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는다.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
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 여기 기록된 희생의 원리는, 일반 사회에도 적용되는 진
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들의 지켜야 할 원리를
보여주신다. 곧,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이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만 따라가야
하는 신령한 희생의 도리를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셔
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으니 만큼(24 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따르지 말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고)그만 따라가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위한 자
기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씀하신 뒤에는, 이어서 그를 믿기(따르기) 위한 우리의 희생
을 권고하시곤 하셨다(마 16:21-26; 눅 9:20-26).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란 말은, 자기 힘으로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제 예수님의 속죄의 구원을 이루실 것이므로(24 절), 모든 사람들은 자기
생명의 구원을 그에게 맡기고 그만 믿고 따라야 된다. 그리하지 않으면 그들은 생명을
잃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듯이 주님만 사랑하며 바라보아야 구원
을 얻는다. 사람이 이렇게 되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용이하게 그렇게 되는 길이 있
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우리의 영혼이 우리 자신의 생명을 미워함에 도달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푹 적시움이 있다"라고 하였다.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 이것은, 위의 말씀에 이어
서 참된 신자 되는 원리를 더 자세히 가르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해설된다. 곧, 사람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25절 하반), 여기서
주님을 따른다(믿는다)는 말로 바뀌었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주님을 섬기는 자이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는, 고난도 주님과 함께 받게 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장차
주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하반절). 딤후 2:11-12 참조.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신자의 구원을 내세의 장소와 관
련시키는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에 많다(14:2, 17:24). 8:21, 33 참조. 그러나 이
와 같은 내세 사상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중심하고 있다. 곧, 그 장소가 그리스도의 계
신 곳이라는 것이다. "나 있는 곳", "나의 가는 곳"이란 말씀들이 그 뜻이다. 공관 복
음도 내세의 장소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마 19:28; 눅 23:43), 주로
"천국"이란 말에 내세(來世)를 포함시킨다. 천국이란 말이 내세의 장소성(場所性)도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로 운동의 경역(곧, 하나님의 통치 경역)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이 말하는 내세적 구원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혹은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는 사실을 그 중심 요소로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 예수님과 및 그를 섬기는 자들이 동일한 곳에 들어감에 대하여, 볼트만(R.
Bultmann)은 다음과 같이 잘못 말하였다. 곧, "여기에 나타난 교훈은 노시스(露智派)
신비의 구속 교리와 부합한다. 노시스는 우주적 관련에서 그런 구속자의 구원 받는 자
들의 연합을 가리키고, 여기 요한 복음은 역사적 관련에서 그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Johannes Evangelium, p. 326). 그는, 특별히 32절의 모든 사람을 이끄는 "들리움"이
란 말 해석에서도 이와같은 견해를 표시하면서 말하기를, "예수님은 다시 여기서 신비
(노시스 신비)의 술어로써 말씀하신다"라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30). 그
러나 예수님의 돌리우심은, 노시스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우주 전쟁을 통과하여 성
립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구원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들리우심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에게 순종하
신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사 부활 승천케 하신 것을 가리킨다.

=====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
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가 왔나이다 - "지금 내 마음이 민망
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란 것은, 주님께서 그의 인성(人性)에서 그의 당하실 속죄의
죽음을 느끼시고 하신 탄식이다. 그는 무죄하신 이로 죽는 것인 만큼, 죽음의 진상(眞
相)을 맛 보신 유일한 사람이시다. 모든 다른 사람들은, 죄로 물들고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져서 죄의 결과인 사망의 비참한 진상을 참으로 느끼지 못하고 죽는다.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 곧, 과거에
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과 말씀에 의하여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으
나, 앞으로는 그의 죽으심으로 그것을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12: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
하였다고도 하니 - 그 때에 대중은, 예수님에게 나타난 계시(啓示)의 말씀(28 절)을
깨닫지 못하고 자연계의 뇌성으로 오해하였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임하였던 하
늘의 소리가 역시 그 동행자들에게 오해되었다. 그 동행자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있었다고 하였다(행9:7). 그 때의 군중은 저렇게 심령이 어
두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그러하다. 인간은 죄
로 어두워졌으므로 천지를 진동할 능력 있는 복음을 들을 때에도 깨닫지 못하고 딴 것
으로 오해한다(Calvin). 어떤 이들은, 그것을 천사의 말로 오해하였으니, 그것을 뜻
있는 말로는 안 셈이다. 그것을 보니, 그 때에 들린 소리가 무의미한 소리 뿐만은 아
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뿐 아니라, 그 소리는 예수님 밖에 다른 사람들도 들었으니
만큼, 그것이 객관적 계시(客觀的啓示)인 것이 분명하다.

=====12: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
한 것이니라 - 위의 28절의 계시, 곧,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것(그리스도 죽으시리라
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일설에 의하면, 여기 "너희를 위한
것"이란 말씀은, 그 뜻 모를 이상한 소리가 그들로 하여금 신앙에 이르도록 함에 필요
한 것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경이감(驚異感)으로 인하여 신앙에 이르게 되는 일도 있
다. 그러나 이 귀절 말씀이 그런 뜻을 가진다고 하기는 어렵다.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 이 말씀은, 예수
님께서 자기의 고난 받아 죽으신 뒤에 나타날 결과를 표시한다. 그가 죽으심으로 세상
의 죄는 처분되고(1:29), 마귀의 계획은 파괴된다. 거기에 따라서 새로운 영적 질서는
오기 시작하여 마침내 만물이 새롭게 되는 우주적 구원이 임한다(계 21:5). 곧, 예수
님은 자기의 죽었다가 부활하심이 가져올 구원 운동의 전폭(현재와 미래를 포함함)을
여기 진술 하셨다. "이 세상 임금"이란 말은 사단을 의미한다. 눅 10:18 참조.

=====12:32,33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못 박혀 죽으실 것을 가리킨다(3:14). 이렇게 그가 속죄의 죽
음을 죽으심으로 만국에서 그의 모든 백성을 모으신다. 곧, 만국에서 그를 믿을 자들
이 생긴다. 희생은 사람들을 끈다. 특별히 흠과 티가 없으시며 전연 허물과 죄가 없으
신 하나님 아들의 속죄하시는 죽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그 죽으심으로 신자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실 뿐 아니라, 그들이 그에게 나아와서 그 안에서만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의하여 사람들을 거듭 나게 하시어 자기에게로 오게 하신
다. 6:44 참조.

=====12: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나 -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이것은, 그들이 시 110:4; 사 9:6; 단 7:14등에 근거하여 생
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사야서 53장의 말씀)
은 몰랐던 것이다.

=====12: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가는 바를 알지 못 하느니라 -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여기 "잠시 동안"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을
기회를 가리킨다. 기회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두근거리며 긴장을 느낄 줄 알
아야 된다. 그 이유는, 기회는 언제나 잠간 동안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기회라는 것은
사람이 당면한 그 현재 밖에 없다. 그는 미래를 자기의 시간이라고 할 수 없다. 미래
는 그에게 감취어 있다. 혹 그것이 그의 것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그의 것이 되지 못
할 수도 잇다. 엄격히 말해서 그의 받은 기회는 현재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회를
잠간 동안 있을 것으로 생각지 않고 시간을 낭비한다. 청년들은 생각하기를, "우리는
지금 준비하는 시기이고 정규적 살림을 차려 놓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부나 다 해
가지고 이 다음이 정규적 살림을 차려 놓은 뒤에 신앙 생활을 바로 해 보겠다"고 한
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속은 생각이다. 청년들은, 그 준비하는 중에도 그 준비가
역시 정규적 살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준비가 바로 살림이다. 그러므로 그 때에
도 하나님 없이 살지 말아야 된다. 이 다음에 잘 믿겠다고 하는 것은, 이 다음에도 잘
못 믿을 것을 약속함과 같다. 노인들은 낙오자의 심리를 가지고 기회를 허송하기 쉽
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시대는 다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말이다. 노인들이야말로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을 좋은 환경에 처햐여 있다. 그들은,
한 평생 모든 것을 다 지내보고 헛된 줄로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이야 말로 그 당하고
있는 현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을 만하다. 죠지 뮬러(George Muller)는
70세 때에 선교사로 출발하였고, 크랜멀(Cranmer)은, 60세 때에 비로소 복음 진리를
크게 깨닫고 그 진리를 위하여 순교하기까지 하였다.
이 귀절과 다음 귀절에 "빛"이란 말이 다섯 번 나온다. 여기서 "빛"은 그리스도를
비유한다. 36절에 말하기를,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
스도를 빛으로 비유하였을 때는 그 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하나님께서 만물 중에 빛을 가장 먼저 지으셨으니, 그것을 보아도 빛이 얼마나 중
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빛이 없는 세계에는 생명이 살 수 없다. 슐라텔
(Schlatter)은 말하기를, "생명은 존재보다 높고, 빛은 그 중에도 가장 높다. 그 이유
는, 그것이 생명에게 깨닫는 내적 성정(內的性質)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Hoher
als das Dasein ist die Lebendigkeit, und das Hochste ist das Licht, womit dem
Leben die bewusste, enkennende Innerlichkeit verliehen ist. - Der Evangelist
Johannes, p.6). 그러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보여주시는 빛이신가? 그는 우리에게 하
나님을 보여주신다.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실 때에 어떤 이론에 의하여 보여
주시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보여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 심령 속에 모실 때에
는 하나님이 환하게 우리에게 알려진다. 슐라텔(Schlatter)은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
는 교훈에서 교훈을, 또는 신학에서 신학을 해설하시는 이가 아니다. 그는 빛으로 역
사하신다"라고 하였다. (Er hat nicht Lehre durch Lehre, Theologie durch Theologie
ersetzt. Er wirkt als Licht. - Der Evangelist Johannes, p. 273).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진리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에게 참으로 접촉하는 자마다 참되이 하나님
을 알고 믿게 되어진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보다 귀한 빛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믿을 수 있는 기회처럼 중대한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 보다 그 분을 중
요하게 생각해야 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전파할 때에 생명을 아끼지 않
았다. 행 20:24에 말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
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고 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생각한 원인은 어디까지나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
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니 만큼,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제일 주의로 살아야 된
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맡겨야 된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나를 위
하여 죽으셨던 분으로 내 영혼을 구원하게 하여라"고 하였다.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
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서 숨으시니라 - 여기서 "빛"은 윗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빛이신 만큼, 그도 빛이시다
(요일 1:5; 요 8:12). 예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계심은 그 때 팔레스틴에만 한 번 있
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그때의 유대인들은 그를 배척하는 중에 있었다. 그것은 천재
일우의 귀한 기회를 놓치는 불행이었다. 그 기회를 놓친 뒤에는, 그가 육신으로 세상
이 계실 수는 영원히 없을 터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 기회를 붙잡아 그를 믿
어야 될 것이었다. 예수님의 별세 후에는 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될
기회도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육신으로 세상에 계시던 주님을 오랫 동안 보면
서도 그렇게 완강하게 끝까지 배척하던 자들로서는 그렇게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
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두 번이
나 역설(力說)하신 것이다(35절 참조).

=====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나 - 요한 복음의 특
징 중 하나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탄식함이다. 1:5, 10-11 참조.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것은, 인간의 호기심이나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메시야심을 보여주시는 표적(곧, 증표)인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않았으니, 그들 자신에게 죄책이 돌아갈 것 밖에 없다.

=====12:38

이는 선지자 아시아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
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니이까 하였더라 - 이 말씀은, 사 53:1의 인용이
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수효가 많지 못할 것을 가리킨 것이다. "주의
팔"이란 것은 주님의 능력(곧, 사람의 마음 눈을 열어 복음을 깨닫게 하시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 예언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그 때에 별로 많지 못하였다.

=====12: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 은혜가 많
을술록 불신앙을 고집하는(37 절) 원인은, 그들이 택함을 받지 못한 사실에 있다. 우
리가 이 원리를, 현재에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할 것은 아니다. 그 이유
는, 그들 중에 믿을 자도 있기 때문이다.

=====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것은, 이사
야서에 있는대로 이사야가 주님의 영광을 본 뒤에 받은 말씀이다(사 6:10).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선한 인간들을 강팍하게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는고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악화되는대로 버려 두심을 의미한다. 그런
데, 그의 이렇게 하심이 그의 거룩하신 계획에 들어 있었다는 뜻도 여기 포함되어 있
다. 물론 유대인들이 저렇게 되는(40절의 내용과 같이 되는) 죄책은 저희 자신들에게
있었다.

======12: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이사야
는, 묵시 중에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영광을 본 일이 있었다(사 6:1). 그는 그 때에
주님의 말씀, 곧,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심을 들었다. 그
때에 겸허하여 받은 말씀이 앞질러 인용된 내용이었다(사 6:9-10).

=====12:42,43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
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 여기 "관원"들은, 산헤드린공의회의 지도층 인물들을 가리킨다. 그들
은 세상 영광에 사로잡혀 있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 신자들이 많다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이신 사실이 너무도 명백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본문 "그러나"란 말과
"에도"란 말이 이 사실을 역설(力說)하며 지적한다. 그들이 그 믿은 바를 공적으로 고
백하지 않았던 원인이, 진리 지식의 부족이 아니고 도덕력의 부족이었다. 곧,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한 까닭이었다.
그들이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더욱 약해질 위험성이 있는 것
이다. 신자가 마땅히 강해야 할 자리에서 어떤 육적 이유로 강하지 못하면, 그는 강해
질 방향을 등지고 약해 가는 방향으로 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계속하여 약해
진다. 그것은, 사람이 경사진 어름판에서 미끄러져 내림과 같다. 그러면 그 때에 믿는
관원들이 왜 저렇게 약하여졌던가? 그것은 우리 본문이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이 "사람
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까닭이었다. (1)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욱 사랑한 것은 어리석은 생각임.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니, 곧 존
재자란 뜻이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인즉, 본래 없던 자요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없앨
려면 없앨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인간의 칭찬이나 영광을 찾지 말고, 오직 하나님
의 칭찬과 영광을 찾아야 된다(Hengstenberg).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판단보다도 사람의 박수를 택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기보다, 차라리 짐승 같은 행동
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2)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명예를 탐하면 명예의 종이
됨. 이런 사람은 혹시 의(義)를 행하다가도 명예를 위하여 얼른 중단한다. 명예주의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요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 중에서 명예주의에 속한 자를
사용하시지 않고 버리신다. 무디(Mody)가 하나님께 사용된 이유도 그가 언제나 자기를
감추었으며, 명예를 좋아하지 않은데 있었다고 한다. 그의 후계자인 트레이(Torray)의
말에 의하면, 그는 남의 말을 많이 인용하기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는 강단에도 될 수
있는대로 남들을 내세웠다고 한다.

=====12:44-46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믿음을 권고하신 말씀이다. 이 권고의 내용
은 그가 바라 신인 간(神人間)의 중보자란 것이다. 곧, 그를 믿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
를 믿음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중보자)라는 것이, 요한 복음
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중보자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영적으
로 보게)하시니,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12:47-50

이 귀절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권위가 어떻게 큰 것을 가리킨다. (1) 그 말씀은 하
나님 아버지의 말씀인데 세상 끝날에 그 말씀이 심판한다고 하시며(47-48), (2) 그 말
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며(49절), (3) 그 말씀이 영생을 주는 것이니
만큼, 그 말씀을 "영생"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신다(50 절). 요 6:63 참조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