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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 15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4.08.24|조회수17,623 목록 댓글 0
요한복음 제 15장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거짓에지는 그 농부라 - 여기 "참"이란 말의 헬라
원어 대조되는 "참"이 아니고, 불완전에 대조된 "완전", 그림자에 대조된 "실
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택한 백성)을 가리키는 비유이
다(시 80:8-15; 겔 15:1-8, 19:10-14). 그러므로 랍비 문학에서도 말하기를, "실물 중
에 가장 낮은 것(포도나무)이 식물계의 왕인 것처럼,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낮아
보여도 장차 메시야 시대에는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점령한다"고 하였다(Lev.R.
36:2 참조). 예수님이 이런 랍비 문학에서 이 비유를 인용하신 것은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말이다.
예수님은 참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을 성립시키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 자
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본래 참 포도나무가 아니며,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실 열매를 맺는 포도
나무와 같으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포도나무)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
서만 비로서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중보자(中保者)되신 관계
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뢰하여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신자의 의뢰
심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일체 될 정도까지 깊어져야 한다. 그에게는, 독자적 의지
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이상적 신앙
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포도원의 농부라고 하였으며, 그가 가지들을
깨끗하게 하신다고도 하였다(2 절 끝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생활은 하
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 그러나 인간 편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
간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성경은 많이 말씀한다. 마 11:12; 빌 2:12 참조.
그러나 위에 말한 일체 관계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일체를 말함이 아니니, 인격과
인격의 관계이면서 다만 신자 편에서 그리스도에게 종속하여 순종하는 관계를 말함이
다. 2세기의 이단자 뫄타누스(Montanus)는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하나님 아버지)요,
말씀(그리스도)이요, 성령이다"라고 하였다(Epiphanius, Haereses . . ).
이런 그릇된 사상에서는 신자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구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것은 잘못이다. 신자는, 은혜를 많이 받아 그리스도에게 접근할수록 자기의 죄를 깨달
으며, 주님과 자기와의 구분을 더욱 밝히 깨달아 안다.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세우신 이는, 하나님 아버지이
시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를 영원 전에 세우시고(벧전 1:2), 그를 마침내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가 중보자를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듬이요 내 기
뻐하는 자라"고 하셨다(마 3:17). 그리고 변화산에서는 말슴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
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도 하셨다(마 17:5). 하
나님께서 신임하시고 세우신 중보자를 인간이 불신임할 것인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

=====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 여기 이른바 "내가 일러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전도의 말씀, 곧, 복음이며, 오늘날은 성경 말
씀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작용으로 그렇게
된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혹은 하나님의 말
씀)이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는 교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은혜
의 방편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행각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슴"이란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바 성경에 기록된 말슴 곧, 복음
과 율법을 의미한다. 성경이란 책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슴을 기록한 것이다. 이 말슴
은 언어, 혹은 문자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로 되었다
는 것이, 그것의 하나님 말씀 자격과 효능(效能)을 상실시키지 않는다. 헬만 바빙크
(Herman Bavinck)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사람의 말은, ... 그 사람과 그 말과
의 시간적, 혹은 장소적 거리에 따라서 효력의 다소가 좌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
씀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언제자 그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말씀과 함께 현
림(現臨)하시어 계시다. 그는, 언제나 그의 전지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시고 그 말씀과
함께 임하신다....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
나 성령에게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영감되었고, 계속하여 성령
으로 말미암아 보관되며, 능력 있게 되는 것 만큼, 거기서 섭취하여 전파되는 부분적
말씀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mpen, J. H. Koke
1911, pp. 502-503).
바빙크(Bavinck)는, 또한 하나님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에 대하여, 성경이 말한 것
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곧, (1)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라고 함(롬 1:16;
고전 1:18, 2:4, 5, 15:2; 엡 1:13). (2) 생명 있고 영존하는 말씀이라고 함(밸전
1:25). (3)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함(히 4:12). (4) 영이며 또 살리라는 것이라고
함(요 6:63). (5) 어두운데 비취는 빛이라고 함(벧후 1:19). (6) 마음에 심는 씨(생명
있는)라고 함(마 13:3). (7)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이라고 함(히 4:12), (8) 믿는 자
들 속에 역사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살전 2:13).(Gereformeerde Dogmatiek. , pp.
501-504).
바빙크(Bavinck)는, 성경 말씀의 능력과 생명의 역사에 대하여 비유하기를, 손이
일하지 않을때에도 일할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
말씀에 능력이 마술적으로 붙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말씀과 관계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바빙크
(Bavinck)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개혁자들은, 성경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
를 무인격한 마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늘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
도와 연락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은 무인격한 능력이 아니며, 늘 말씀과 함께
하시며, 말씀으로 활동하게 하시되 늘 같은 모양으로 역사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 말씀(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역사하여 혹은
회개시키가며, 혹은 강팍케 하시며, 혹은 일어나게 하시며, 또 혹은 넘어지게도 하신
다. 그가 이 말씀으로 역사하시되,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하시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
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ampen J.H Kok 1911, p. 503).

=====15:4-6

이 부분에 사용된 어귀들중, "거하라"는 말(* )은 "머물라"는 뜻이
니, 이미 있는 자리에 머물라는 뜻이다. 5절의 "있으면"이란 말도 헬라원어에서는 꼭
같이 "머물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여기 "머물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택
하여(16절) 은혜 주신 그 자리에서 그들이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그리스도 박까에서 그를 믿으려고 자율적으로 찾아 가는 자가 아니고 벌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 인도된 자니, 그는 거기 멀물러 있으려고 순종의 걸음을 걸을
자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6:44).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는데, 우리는 그저 순종 할 뿐이다. 순종
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의 말씀을 지킴이다.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나의 구
원을 다 이루어 주시는 것인 만큼 나는 순종 할 것 없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한다
면, 그것은, 자기를 무생물 혹은 하등 동물로 취급하는 오착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
원을 이루셨으나, 우리로서 할 일은 그에게 순종함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시므로 구속(救贖)의 큰 사업을 완성하셨다(히 5:8-9).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아래 말
씀이 알려주느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이다. "내 말이 너
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주님의 말슴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높이
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 유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약에 참여한 자로서
신종(信從)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신분
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신자의 의지를 성
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
광만 위하여 기구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신자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이다. 그러므로 그것
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
지 응답 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 시선에서도 말씀한 바 있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요일 5:14). 기도 응답을 받는자들은 저렇게 내면적인 경건의 소유자
들이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고(신
34:10), 히스기야는, 기도 하여 자기의 병을 고침 받았다(사 38:2-5; 왕하 20:5-6).
그는 기도하여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는데(왕하 19:14-19, 35),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대로,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할 만큼, 경건하였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신자들 전체에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져 주시는 대
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이다. 히 4:14-16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
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
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
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다. 약 5:17에 말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아니로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큰 죄인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
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대하 33:10-13), 신약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
다. 눅 18: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
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
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
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
니라" 하였고, 계 3: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
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
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다.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실과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을 찍어 버릴 수 밖에 없다. 실과 나
무를 심는 자는 목재를 쓰려고 심지 아니하고 열매를 따려고 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는 나무와 같이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자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행실을 바로 행함
이고(갈 5:22-23), 또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함이다. 잠 11:30에 말하기를, "의인
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하였다. 사람의 영혼은 귀하
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셧다(마 16:26). 예수
님게서 사람의 영혼이 귀하다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세상 문화를 건설하기 때문이 아
니다. 그들의 영혼을 귀하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겠기 때문이다. 다
시 말하면, 그에게 여호와으 빛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잠 20:27에 말하기를,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등불
이 되게 하는 운동, 곧, 전도 운동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의인 99명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눅 15:17).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
라 - 이 귀절부터 15절 까지는, 신자들끼리의 연합의 배경을 말해 준다. 곧, 신자들
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속죄 사업
을 담당하시게 하신 것을 말함이다. 5:20-21 참조.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이것
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이루실 속죄 사업을 가
리킨다. 사람들이 이런 사랑에 거하는 것은 기븐 일이요, 괴로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그들의 갈망하는 보금자리인데 그들은 왜 거기서 떠날 것인가? 거기 거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계명(신자들끼리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킴이다.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
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땅 위에서나
어디서든지 완전히 하신다(10:17-18, 12:43-50, 14:31). 그것이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방법이다. 그와 같이 신자도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므로 그의 사
랑 안에 거하게 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신자가 주님의 사랑에 거
하는 방법은, 신비주의자들처럼 그의 사랑의 취미에 집중하여 즐기는 것이 아니고, 그
의 계명을 지킴, 곧, 생활로 그 사랑을 나타냄이다"라고 하였다(Jezus vraagt niet
een mystick zwelgen in liefdegenot, Maar activiteit, liefd toonen. - Het
Heil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 346).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
려 함이니라 - 여기 이른 바 "이것"이란 말은, 윗절에서 가르친 내용을 가리킨다. 곧,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므로 그리스도와 사랑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 사랑을
받으면 그들에게 기쁨이 넘친다.
"내 기쁨"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기뻐하시는 기쁨을 가리킨
다.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16:22). 우리가 이 기
쁨을 가져야만 (1) 우너망, 불평, 의심을 이기며, (2) 담력, 용기, 인내를 가지고 이
세상 모든 난관과 환란을 이기며, (3) 모든 수고로운 사랑의 책임들을 꾸준히 이행(履
行)하게 되며, (4)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여기서는, 10절에 말한 바 그리스도의 "계명"이 무엇임을 밝힌다. 바리새인들이 계
명을 지키는 동기는 남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남들에게 종교가로
나타내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명을 오해한 것이다. 계명의 목적은 사랑이다.
사랑만 이루묘가 그것은 완성된다. 롬 13:8-10 참조.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면서도 실상은 옛 계명이다(13:34; 요
일 2:7-8). 사랑은 이렇게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리이다(고전 13:13). 고데이
(F.Godet)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15-1-11 까지는, 계명의 첫 부분(하나님과 연합해
야 될 것)을 가르치시고, 12-17절까지는, 그 둘째 부분(사람을 사랑해야 될 것)을 가
르치신다"고 하였다.
성경은, 신앙 사상이 같은 형제들기리의 분리(分離)를 정당하게 여기지 않고 연합
을 고조한다. 예를 들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밖에, "몸과 지체"의 비유(엡
1:22-23, 3:6, 4:15-16). "성전과 돌들"의 비유(벧전 2:5)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
간에게서 반응을 부족하게 받으시더라도 사랑을 계속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
랑은 상대방에게서 반응(서로 사랑함)이 있으므로 계속된다. 사랑을 받는 자도 같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인격이니 사랑을 행해야 된다.
여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행은, 신자가 그 속 사람의 영적 충동으로만 취
할 행동인가? 그에게도 외부적 성질이 있는 계율들의 제재가 필요한가? 그렇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만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됐으므로, 무엇에게 얽매인 바 없
어도 자발적으로 선을 힘쓸 자요 자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부터 감심으로 하나가
의 종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주님의 뜻을 자세히 알아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외부적 표준으로 있는 율법을 상세히 알야야 되며, 지켜야
된다. 그는, 이 율법을 폭군의 엄한 명령과 같이 생각하지 않늘다. 그 율법은 실상 은
혜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사랑하는 목자의 음성이다. 그것은 은혜의 한 방면이다. 그
러므로 기독자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는 사실은, 은혜
의 원칙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의 부요를 가져오는 거룩한 생활을 위
한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계명의 목적과 정신이 사랑하는 의미에서 "계명"이란 말을 단수(單
數)로 썼다(* ).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인 복수적 율례들이 이제부터
신자와 관게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그의 시선에서 계명이란 말을 복수로도 사용
하였다(요일 3:22, 5:2).
신비가들은, 내적 생명에 흥미를 가지고 외부적인 율법 조문들을 무시한다. 그러므
로 그들 중에는 반율법주의 경향이 많다(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 p.
499). 그들은 외부적인 신앙 규율, 곧, 성경도 사실상 무시한다. 16세기의 자유 형제
파(Brethren of free Spirit)나 17세기의 란텔과(Ranters)는 그렇게 잘못 움직였다
(R.A. Knox, Enthusiasm, p. 173). 이렇게 신비가들은, 외부적 계율들보다 자기 마음
에 온다는 영적 감동을 표준으로 삼기 때문에 도덕상 오착이 많다. 그들은 옳지 않은
일을 해 놓고라도 그것을 계시 받아서 하였다고 하면서 통과하려 하였다.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큰 사랑으로 희생하실 것을 가리킨 말슴이다. 그
는, 자기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실을 설명하여, 윗절(12절)의 내용과 같이 신자들로
하여금 남들을 사랑하게 하려 하신다. 그리스도의 무한히 큰 사랑을 받은 우리들로서,
어찌 남들을 사랑할 마음이 없으랴? 요일 4:11 참조.
예수님게서 신자들을 "친구"라고 하신 것은, 그 앞에 죄인이요 원수 되었던 자들을
속죄의 사망으로 사랑해 주신다는 뜻이다. 롬 5:6-10 참조. 우리를 사랑하심은, 다만
우리의 보통 유익을 위한 일반적인 적선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여 죽기까지
하셨으니, 다시 사신 뒤에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은 또 얼마나 클 것이가? 이렇게
신자들은 예수님의 친구 되는 큰 축복을 받았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친구였다(사
41:8).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여기 이른바 "나의 명하는대로
행함"은, 그가 그 제자들더러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순종함이다. 믿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받은 증표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믿는 형제를 참으로 사랑할 수 없다(요일 4:7-21). 이 귀절 뜻은, 그리
스도의 계명을 순종하는자가 그리스도의 친구 된 자격, 곧, 그 속죄의 사랑을 받은 자
격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15:15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
라 - 그리스도께서, 이때까지 구속에 관한 모든 진리를 그 제자들에게 전하여 주셨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에게 깊이 감취었던 오묘한 진리였다(벧전
1:10-11).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
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
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 그들이 사도로 세움 받은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인 만큼, 그들의 일은 유력해진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배경이기 때문에 그들은 영
적 과실을 맺고, 그들이 과실을 맺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가 응답된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외식자의 기도를 응답하싶 않는다(마 3:7-8, 5:23-24, 6:14-15).
이 말씀(16 절)은, 주님과 신자가 연합하게 되는 것(1절 이하에 있는 말씀)이 전연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성립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 위에 있는
15-16절 말슴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내막을 보여 준다. 그가 이 내막을
신자들에게 알려 주시는 이유는, 신자들로 하여금 서로끼리 사랑하게 하른 것이다. 인
간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을 근거하여서만 남을 사랑할 수 잇다.
18-27 - 이 부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핍박 받을 사도들(신자들)자게 대하여, 몇
가지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1) 그 핍박은 결국 예수님을 미워하는 일이니(18 절).
그들로서는 주님께서 받으시는 미움에 동참함이 영광이다(행 5:41). (2) 그들이 핍박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증표이니(19절), 핍박 받음은 그들이 선택을 받아 구원
얻은 증표이다(빌 1:28), (3) 주인이 핍박을 받으셨으니 종 된 자로서 그것을 면할 수
없다(20절). (4) 핍박자들의 악행은 하나님에게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행동이
며 따라서 무서운 죄악이니, 불쌍히 여길 대상이다(21-22). 눅 23:24 참조. (5) 신자
를 핍박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두려운 일이다(23-24). 하나
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윤리적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미워
하는 부패한 인간성을 원인으로 한 것이다. (6) 그것은 율법에 기록된대로 되는 일이
니, 핍박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줄 믿고 안심할 따
름이다(25 절). (7) 그리스도에게 대한 성령님의 증거가 사도들과 함께 하실 것이므
로, 그들은 핍박을 이길 수 있다. 벧전 4:14에 말하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
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다.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예수님은, 이때까
지 그 사도들의 받을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그들의 받을 미움에 대하
여 말씀하신다. 그들이(일반 신자들도) 예수님에게서는 사랑을 받으나 세상에서는 미
움을 받는다. 그들이 핍박을 받으면, 예수님은 그 사건에 있어서 그들보다 먼저 영적
으로 박해를 받으시는 셈이 된다. 그 만큼 그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밀접하다.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세상이 그들을 사랑할 경우는 한 가지 조건 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의 근원이 그냥
세상에 속하고, 따라서 그들의 생활은 세상의 소유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사랑
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과 반대되는 조건이 있는 까닭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그
들을 택하신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세상에게서 미움 받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
다. 그리스도와 세상 죄악은 이처럼 서로 반대된다(7:7).

=====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
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 13:16 참조. 이 귀절 말씀은, (1) 기독 신자가 핍
박 받을 것이 필연적이니 피할 수 없다는 것과, 또한 (2) 도덕적 처지에서도 그것을
받음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 여기 "지킨다"는 말은 트집 잡는다는
뜻이다.

=====15:21,22

하나님에게 대한 핍박자들의 무지가 사도들을 핍박하게 되엇다. 그러나 그 무지는
무죄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자게 증거하셧는데도 불구하
고, 그들이 불신앙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좋을 번 하였다.(Bengel).

=====15:23,24

참 신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미워함이고(18 절), 그리스도를 미워함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큰 죄라는 의미에서 이 귀절들은 말씀한다. 그리스도를 믿
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 속은 자이다. 그리스
도와 하나님 아버지는 일체이시다(10:30). 이 점에 있어서 벴겔(Bengel)은, 미움과 불
신앙과의 관련성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에게 대한 사랑은 신앙과 동반하나
증오는 불신앙과 동반한다"라고 하였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 여기 이른바, "아무도 못한 일"이란 것은,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들을 가리킨다.
10:25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적들)은 너무도 위대하며, 그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히 계시한다(5:17,36, 14:9,11). 그러므로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다만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더덕적 반역이다.

=====15: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
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 말씀은 시 35:149의 인용이거나, 혹은 시 69:4의 인용이다.
시편을 "율법"이란 이름 아래 넣어 말하는 것은 그 때의 풍속이었다(10:34). 그 때에
는 사람들이 구약 초두의 부분 곧, 율법으로써 구약 전체의 명칭을 삼앗던 것이다.

=====15:26,27

이 세상 사람들이 사도들(신자들)을 미워해도(18-25).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을 받
으므로 세상에서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
다. 여기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증거는 실상 일체이다. 성령은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증거하실 것이다
(Wikenhauser, Schlatter).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친히 목도한 사
실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사도의 자격이다(고전 9:1; 행10:41). 그러나 그들이 와 같
은 자격으로만 증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참
으로 증거하게 되었다. 행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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